펀치드렁크 러브, 찌질함과 답답함
널봐나
지인은 많은데 친구는 없더라.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들어줄 사람은 없더라.
대학에 들어 온 이후로 대다수의 시간을 답답해하면서 보냈다.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대학은 나 같은 진성 아싸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환경이다. 고등학교 때까지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다. 기숙사실이든 교실이든, 하나의 공간에서 붙어서 지내다 보니 반강제적으로 친해졌었다. 성격적으로 모두와 잘 맞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들은 우정, 또는 우정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위해서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했었던 것 같다. 무엇이 됐든 난 고등학교의 교우 관계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유지했고, 대학 생활에 대한 자신감도 그럭저럭 있었다. 고등학교 때처럼 적당히 선만 지키면, 친구들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물론 그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말수는 줄어들었다. 불편한 사람은 없지만, 딱히 편안한 사람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남아돌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나 같은, 좀 아싸스러운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기대감을 품고 PTA의 『펀치 드렁크 러브』를 다운 받았다. (각주: 물론 정품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담 샌들러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쎄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주인공이 이 정도로 한심한 놈일 줄은 몰랐다. 나도 딱히 잘난 놈은 아니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7명의 누나들한테 구박받으며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폰섹스를 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넘겼다가 문제들에 휘말린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레나라는 여인이 먼저 다가와 주지만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이건(각주: 아담 샌들러는 극 중 ‘베리 이건‘ 역으로 분한다.)은 주저할 뿐이다. 정말 답답해서 영화를 보다 화가 날 정도였다.
문제는 연출마저 이 답답함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경 음향은 신경에 거슬리고, 정신 사나운 핸드헬드 카메라는 미친 듯이 산만하다. 샌들러의 얼굴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만행을 보면, 감독이 관객들한테 시비를 거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솔직히 조금 열 받았다. PTA는 단순히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영화를 잘 만드는 ‘젊고 잘생긴’ 감독이다. (각주: 적어도 펀치 드렁크 러브가 개봉했을 2002년에는 그랬다.) 그런 사람이 뭘 안다고 이런 영화를 만드는가? 인싸들이 또 아싸들의 삶을 뺏어 가는구나 싶었다.
사실 주인공과 연출에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줄거리에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길가에 풍금은 갑자기 왜 떨어지고, 여주인공은 왜 이런 한심한 주인공한테 반하는가? 베리 이건은 잘 생기지도 않았고, 성격이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니다. 푸딩에 딸린 쿠폰으로 비행기 마일리지를 쌓는다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현실 감각도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폰섹스 업체에 개인정보를 전부 넘기는 멍청이가 갑자기 달라져서 사랑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버린다고? 줄거리의 전개 과정 중 무엇 하나가 충분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일일이 시비를 걸자면 끝도 없이 불만족스러울 영화이다. 그러나 참으로 우스운 점은, 나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는 사실에 안도해버렸다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난 스스로의 모습을 이건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그가 변화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마치 스스로가 변화한 것처럼 흐뭇해하고 있었다. 뭔가 감독한테 조련당한 것 같아 자존심 상했지만, 아무튼 그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개연성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해 보자. 이 영화는 분명 개연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정말 단점인가? 애초에 우리 삶에 개연성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가? 실제 현실에서 우리들은 굳이 행동의 이유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소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 다음 뒤늦게 거기에 이유를 부여할 뿐이다. 합리성은 대게의 경우 환상에 불과하다. 사랑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각주: 물론 딱히 제대로 사랑해본 적은 없다.) 더 깊은
관계는 더 깊은 상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불나방처럼 서로에게 다가간다. 솔직함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는 상대를 갈구한다. 개연성이나 이유 따위를 일일이 따지다가는, 남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겁쟁이만 될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겁쟁이로서, 나는 이건과 레나의 사랑에서 개연성을 찾기보다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I don't know if there is anything wrong because I don't know how other people are.”
답답하게만 굴던 베리 이건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레나를 만나러 하와이로 떠난다. 찌질하기만 하던 이건은 사랑의 힘을 통해 시련을 극복한다. 혼자 훌쩍거리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화장실에서 깽판을 치며 스스로를 탓하던 주인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베리는 분명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하다. 다소 씁쓸한 점은 이건과는 다르게 나는 영화를 보기 2시간 전과 달라진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나보다 한심했던 놈이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니 괜히 나만 비참해진다. 남들 눈을 신경 쓰면서 위축된 자신에게 자괴감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베리처럼 갑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바뀔 수 있었으면 진작에 바뀌었겠지!
나는 여전히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벌써 한 학기가 흘러갔다는 점에서 소름이 돋는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희망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 같다.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법이다. 후... 우선 영화는 좀 그만 보고 대학에서 ‘진짜’ 사람들을 만나러 좀 움직여야 할 듯하다. 로또도 일단 긁는 놈이 당첨되는 법이라 하지 않는가.
'PEEP VOL.04 [2019-2]' 카테고리의 다른 글
2D와 3D 사이 어디쯤을 덕질한다 - 흔한 연뮤덕1의 주저리주저리 (0) | 2019.10.08 |
---|---|
아이묭(あいみょん)순애가 ~들어~ (0) | 2019.10.08 |
¡Adiós, Samantha Jones!- <Sex and the City> 사만다를 보내며 - (0) | 2019.10.08 |
Road to Vntrve Kvlt (0) | 2019.10.08 |
우주소녀의 판타지 – 케이팝 마법소녀의 연대기 (0) | 2019.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