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너는 이제 이곳에 없다.
내가 사랑하는 박상영의 소설들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재희> 두 편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오버더펜스
퀴어 영화를 찍어 칸영화제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으나 다 망해먹은 삼류 영화감독과 콩쿠르 입상에 실패한 후 필라테스 중독에 빠진 현대무용가의 연애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머니를 돌보는 인스타 스타와 공황장애를 앓는 군인의 불륜기, 집이 망한 뒤 몸을 팔게 된 남창과 애인이 자살한 뒤로 섹스 중독에 빠진 게이 컨설턴트의 동거담, 영원히 데뷔하지 못하는 아이돌 연습생과 자살 연습생의 연애담 등이 담겨 있는 상큼 발랄한 소설집입니다. (각주 2 : http://ch.yes24.com/Article/View/37093, yes24와의 인터뷰)
도대체 어떻게 이 작가의 소설들을 설명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에, 작가 본인의 완벽하고 컴팩트한 설명을 찾아냈다. 박상영의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대강의 줄거리는 저러하다. 무릇 소설이라 한다면 이러저러한 설정의 인물들이 사건을 겪기 마련이다. 사건을 겪고 그들은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고, 거기서 추출한 나름의 진실로 인해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고, 어찌할 바 모르는 엉거주춤의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그것이 문학, 구체적으로는 소설을 쓰는 하나의 방법론이자 해석론이라 배웠고, 나에게 그것은 거의 전범(典範)에 가까웠다. 문학을 읽는 일은 그렇게 함으로써 겨우 윤리적일 수 있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간접적 경험으로써 효용적이었다.
그러한 함의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훌륭한 작품들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좋은 작품이 산출해내는 경험이 가지는 보편적 호소성은 교훈적이고 감동적이지만 흥미롭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좋은 작품들에 ‘질리곤’ 한다. 서론이 길었다. 박상영은 건강한 문학작품들에 무감해진 문학 덕후들에게 ‘캡사이신’ 같은 자극이 될 만한 작가다.
고백하자면 나는 핍에 여태껏 실린 글 중에서 ‘그토록 짙게 남은 불행의 잔상들에 대하여 :『릴리슈슈의 모든 것』 리뷰’(각주3 :http://peeppeep.tistory.com/13?category=655540)를 가장 좋아한다. 그 글은 동일한 정도는 아니지만, 영화가 나에게 ‘투척했던’(그래서 무력하게 수동적이고 일방적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던) 감정과 잔상을 복기하고 연장시키는 데 성공했다.(각주4 : 건방지게 글을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글의 저자가 의도했던 지점에 공감할 수 있어서 기뻤음을 표현하고 싶다.) 그 글은 영화의 구조나 내러티브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했지만, 나는 어쩐지 글의 다른 부분에 끌렸다. ‘매혹적인 주관’ 이라고 정의해보면 되려나. 작품에 대한 훌륭한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글쓴이의 주관[자기투영이기도 하고 경험이기도 하고 태도이기도 한 것]은 내가 가장 쓰고 싶던 글이기도 했다. 그토록 충만[하다못해 넘쳐흐르는]한 자의식이라니! 그동안 숱하게 봐온 객관적이고 점잖은 분석들은 분명 훌륭한 인식들을 산출했으나, 결정적으로 내가 설득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결국 남의 일에 대해 쓴 남의 이야기니까.
마치 성공한 친구나 사회의 어른이 해주는 현명한 충고를 들을 때의 기분.
머리가 커 버린 지금 듣기에는 다소 지루한 것.
「알려지지 못한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 「자이툰 파스타」)에는 위의 맥락과 비슷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 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버리지도 않는 순도 백 퍼센트의 퀴어 영화를 만들리라” 다짐하고, 야심차게 첫 영화를 만들지만 보기 좋게 실패한다. 출품한 영화제의 뒤풀이에서 심사위원들에게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듣기에 이르는 주인공은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이 하는 보편적 사랑이 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동성애자들이 뭐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하고 산다는 건지, 동성애자인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성애자가 연루되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라고 (마음속으로) 응수한다. 그는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이것은 온전히 작가 박상영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전방위적으로 자신을 투영하고 투사한다. 작가가 이렇게 나온다면, 독자 입장에선 거부하기가 힘들어진다.
“시에는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을 모아 시를 만드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다고 신형철은 말했는데, 박상영에게 이 말을 적용해보자면, 그는 소설, 넓게는 문학장(場)에서 배제되어온 소재나 화법으로 소설을 만들어내는 연금술사라고 말해볼 수 있다. 그 재료들은 구체적으로 실패와 사랑, 유머 그리고 옐로저널리즘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실패하는 인간들이 사랑을 하고 그것을 옐로 저널리즘적 태도로 유머러스하게 탐사하는 소설, 그것이 박상영의 연금술이다.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소설을 ‘세상천지 온갖 청춘들의 이야기’로 썼다고 했는데, 결국 청춘들의 삶을 들여다본 뒤 글로 쓴다면 위의 키워드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되겠다.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이 쓰는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자의식 과잉인 인물들이 실패를 하고, 사랑을 하고, 다시 실패를 한다는 것이다. 박상영의 세계에서 실패는 거의 당연하고 필연적인 숙명이자, 존재의 기본 조건처럼 보인다. 「자이툰 파스타」의 주인공은 세상에 없었던 퀴어 영화를 찍기 위한 제작비를 모으기 위해 자이툰으로의 파병을 지원하고, 거기서 왕샤(왕씨 성을 가졌고, 샤넬 향수를 좋아해 주인공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라는 인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정체화를 거부하는 왕샤와 이미 정체화를 마친 주인공은 몇 번의 육체적 관계를 갖지만, 결국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각각 현대무용과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이루는 데 완벽하게 실패하고 한국에서 다시 만난 둘은 “성적 욕망이 걷힌, 맑고 투명한 관계로 남아 인생의 가장 고단한 시절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고, 소설에 등장하는 온갖 부끄러운 일을 자행하고 다닌다. “술에 취하면 더욱 빠른 속도로 취해야 한다”는 공통적인 주사를 가지고 있는 그들은 샤넬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 주인이 시간을 짧게 주었다는 생각에 마이크를 훔쳐 나오고, 비욘세 순대국밥에서 마이크에 붙은 상표 스티커를 떼다 노래방 주인의 아들에게 걸리고 만다. “우리 완벽히 졌어. 마이크 하나 제대로 훔치지 못했어.” 그들은 실패의 동물이기에. 이 소설에서 그들이 성공적으로 해내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한심한 패배자로만 그려진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연민이나 광기가 예술의 조건이었다면 우리는 이미 세계적인 예술가가 됐어야 했다’라는 극에 달한 자조톤의 서술 뒤에 우는 왕샤를 달래기 위해 길거리에서 유채영의 노래를 틀고 정신없이 춤을 추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때는 몰랐었어. 누굴 사랑하는 법.’ (왕샤와 주인공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가사는 소설집 단행본의 후면에 주요카피로 소개되고 있다.)
왕샤가 인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유채영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그들은 예술로 슬픔을 달랜다. 바닥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순식간에 몸을 펴,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동작을 반복하는 그들은 이 현대무용을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제목으로 명명한다.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인생을 걸었지만, 결국 가장 두려워했던 결말을 맞이한 그들. 소설의 마지막은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엄정한 진술로 끝난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위 구절들로 마무리되는 소설의 결말부를 읽고 나서, 다소 당황스러웠다. 과거의 비극적인 사연과 현재의 희극적인 상황이 교차되면서 특정하기 힘든 복잡한 정서를 자아내던 소설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으로 끝맺어지면서, 능수능란하게 독자의 감정을 교란하는 좀처럼 마주하기 쉽지 않은 작가의 재능이 마지막에 와서 쉬운 방식으로 마무리 된 것 같아서였다. 박상영 작가의 다른 소설 중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결말지어지는 예가 있다. 단행본에는 실리지 않은, 「재희」라는 소설이 대표적이다.
#재희
「재희」 역시 박상영이 아니라면 어떤 작가가 쓸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가 힘든 소설 중 하나다. 게이 남성화자와 재희라는 여성의 눈물겨운 우정을 그린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자이툰 파스타」의 ‘나’와 왕샤의 이야기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물론 「재희」는 ‘성적 욕망’이 전혀 투여되지 않은 다른 형태의 사랑 이야기이다. 같은 학과출신인 두 주인공은 서로 얼굴만 아는 대학생활을 하던 중, 화자가 주차장에서 다른 남성과 열렬히 키스를 하던 모습을 들키는 것을 계기로 급속히 친해지게 된다.
“아예 먹어라.”
(…)
“학교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줄 거지?” “당연하지. 내가 돈은 없어도 의리는 있다.”
“근데 너 안놀랐어? 내가 남자랑……” “전혀.”
“언제부터 알았어?” “처음 본 순간.” (p.12)
‘재희와 나는 정조 관념이 희박하고, 아니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는 편이며 그런 방면에서는 각자의 세계에서 좀 유명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p.14)
게이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의 우정은 이렇게 서로를 알아보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동행은 여러 면에서 한국 문학에서 전에 없던 장면들을 만들어내는데, 자취를 하는 재희가 신원불명의 남성에게 위협을 느끼자 화자가 재희의 집에 들어가 같이 살게 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하다. 여기서 ‘나’와 재희의 성별이 각자에게 유리하게 활용되는 장면들은 정말이지 고유한 상황들이다. (‘나’는 군에 입대해, 관물대에 재희와 찍은 사진들을 붙여 재희가 여자 친구인 ‘척’을 하고, 재희는 남자친구에게 ‘나’를 ‘룸메이트 지은이’라고 소개한다. 이러한 부분들에서 다시 한 번 박상영은 단순히 등장인물이 퀴어라는 점을 넘어서는 퀴어 소설의 새로운 계보를 시작한다.) 서로를 위해 각각 말보로와 블루베리를 냉동실에 항상 비치해두는 이들의 관계는 서로의 일상과 남자를 공유하며 함께 품평하고, 낙태 수술을 위한 산부인과에 동행해주고, 매일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나에게 ‘이번에는 죽지 않을 애로 잘 고르렴.’이라고 충고를 해주는 (‘나’에겐 연애와 유사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죽은 K3라고 불리던 남자가 있었다) 사이로 그려진다.
이 세계에서 그야말로 유일한, 누구도 틈입해올 수 없을 거라 믿고 있던 이들의 관계는 그러나, 그리고 역시나 종착점을 맞게 된다. 결혼 제도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인 것 같았던 재희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나’는 겪어본 적 없던 혼란을 경험한다. 한 번도 흔들릴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던 관계에 궁극적이고 불가역적인 균열이 발생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동요(動搖)하기 시작한다.
“영아, 나 앞으로 바람피우지 않고 살 수 있을까?”
(…)
“있잖아, 재희야…… 나도 그게 걱정이긴 해.” (p.51)
재희에 대한 걱정으로 표면화되었던 그 불안은, 그러나 결국 ‘나’에 대한, 아니 ‘우리’에 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결혼식 당일에 축가를 부르게 된 ‘나’는 이번에는 핑클의 노래를 부른다.
“항상 나의 곁에 있어줘. 꼭 너에게만 내 꿈을 맡기고 싶어.”까지 부르자,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더 이상은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재희야, 너 진짜 혼자 이렇게 가버리기냐. (…) 재희가 드레스를 질질 끌며 달려와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더니 나머지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내 맘에 하나뿐인 소중한 그 사람……”
다른 건 곧잘 하는 재희는 노래만큼은 더럽게도 못 불렀고, (…) (p.54)
결혼식이 끝나고 홀로 집에 돌아온 뒤, 냉동실에서 블루베리 봉지를 꺼내보던 ‘나’는 비로소 홀로 됨을 실감한다. 한동안 헤어 나오기 힘들 상실감에 휩싸인 ‘나’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진술로 한층 엄혹(?)해진다.
‘그때,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언제나 때를 맞춰 블루베리를 사다놓던 재희, 내가 만났던 모든 남자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내 연애사의 외장하드 재희.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며, 가당찮은 남자만 골라 만나는 재희.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김형중은 「재희」의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이성애도 동성애도 양성애도, 그렇다고 (통속적인 어법의) 사랑도 우정도 아닌 어딘가에서 (대문자) ‘사랑’이 발생”하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지막 문장에 의해 「재희」는 (대문자) ‘사랑’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리는 소설이 되기도 하리라. 역사적으로 수많은 소설들이 품어온 이 주제를 「재희」가 다룰 때 새로워지는 지점이 있는가. 만약 그러한 부분이 존재한다면 역시나 (대문자) ‘사랑’에 관한 부분이 될 텐데, 재희와 ‘나’ 사이에 오고 가는 감정을 언어화할 때 ‘우정’이란 단어는 지나치게 안전하고, ‘사랑’은 기성적인 의미와의 위화감이 유발된다. 김형중이 지적했듯이, 「재희」는 그러한 위화감을 통속적인 어법의 사랑의 경계를 새로운 영역까지 확장 시켜 나감으로써 해소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당연하게 규정‧내재되어 있던 ‘성별-섹슈얼리티’ 내지 ‘관계 양상’을 무너뜨리는 방식에 의해 달성된다. 이들의 관계를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자이툰 파스타」의 주인공과 왕샤가 그러했듯, ‘나’와 재희 역시 한없이 부끄러운 시절을 함께 견디면서 자신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곁을 내주는 유일한 편(便)이 되어준다. 「자이툰 파스타」의 주인공들은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무너져버린”(각주 5 :박세미, 「벽 없는 집」)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채로, 여전히 같이 그 시절을 버텨나가겠지만, 「재희」에서는 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재희가 그들의 세계에서 이탈하게 됨으로써 ‘나’는 종합적으로 무너져버린 세계를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된다. 지난 호에서 윤이형의 「루카」에 대해 쓰면서 사랑은 “결여의 발견으로서의 응답”이며 서로의 결여를 분유(分有)하지 못하고, 자신의 결여를 부끄러워하게 될 때, 사랑은 상실되고 만다고 적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 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할 어떤 것이 된다.’(각주 6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러한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은 결여를 고통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는 것”이다. 「재희」의 ‘나’와 재희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온전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의 세계에 균열이 발생한 지금, ‘나’는 이제 더 이상 예전과는 같을 수 없다.
“도대체가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각주 7 : 김녕, 「상품과 사랑의 변증법」) 그들의 세계는 이제, 이곳에 없다. 그들이 축조했던 세계의 붕괴는 정확하게 사랑의 상실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재희」는 숱하게 쓰여 온 ‘사랑의 상실’이라는 주제를 새로운 주체와 감정 동력(動力)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다루어 봄으로써, 익숙하지만 여전히 정서적으로 유효한 고전의 전범(典範)과 겨루면서 동시에 계승해나가는 소설로 읽어볼 수도 있다.
내용적인 측면 외에, 「자이툰 파스타」와 유사한 소설의 마지막이 유발하는 정서에 대해선 첨언이 필요해 보인다. 단편소설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결말 방식은 장편소설과 구별되는 그것의 고유한 성격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장편과 단편 소설의 본질을 따지기에 앞서, 각각을 읽고 난 뒤의 정서가 사뭇 다르다는 점을 우선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총체적인 성격의 장편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맺어지는 동안 독자가 의미를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와 여지를 준다. 반면에 단편소설은 (물론 작품차가 있지만), 문득 무언가가 발생할 것 같은 순간 내지는 어떤 예감으로 가득한 장면에서 멈추는 경우들이 종종 목격된다.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를 묻고 삶에서 하나의 파열선을 발견해내는 작업에 만족할 때, 장편소설은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다', '주체가 진실에 응답한다'라는 3단계의 '진리의 윤리학'을 서사화한다.”라는 다소 도식적인 구분을 받아들인다면, 「자이툰 파스타」와 「재희」에서 두드러지는 단호한 끝맺음 역시 성급한 마무리가 아니라 그네들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발견되는 상실과 체념의 정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라 보아도 좋을 듯하다. 적어도 나는, 두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작가-등장인물과 함께했던 유쾌하고 떠들썩했던 술자리가 파하고, 홀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아무 걱정 없이 즐겁기만 했던 시간들은 너무나 짧고, 다시 마주해야 하는 불행은 너무 깊고 어둡다. 그럼에도 이들과 함께했던 “시시했던 행복”(각주 8 : 영화 『꿈의 제인』의 대사 中)은 가끔씩, 오래오래 한 켠에 머무르겠지만, 그렇게 제멋대로 흘러가버리는(정확하게는 흘러가게 되는) 과정은 나를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한다. 박상영의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은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감정 상태에 관한 것이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흘러가야할 시기에 남겨진 상황과 아직 남들만큼 비워내지 못하고 홀로 넘쳐흐르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하다.
#시기(時期) : 과도기. 과도(過渡)이기도 하고, 과도(過度)하기도 한.
「자이툰 파스타」205p.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우리가 느꼈던 감정은 모래바람처럼 한순간에 우리를 휩쓸고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신파는 영화로 족했다.”
211p. “그 시절의 그와, 나아가 그를 좋아하는 마음조차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시절의 나 자신과 화해하기로 결심했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햄릿 어떠세요?」 277p. “마지막 무대를 녹화할 때, 나는 내가 떨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라는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으니까. (…) 스물넷. 누군가는 아직 아무 시작도 하지 않았을 나이에 나는 포기와 체념이 때로는 나를 위한 최선일 수 있음을 배웠다.”
위의 문장들에서 공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은 한 시기가 지나갔다는 것, 경과(經過)를 온 몸으로 거부하고 밀어내고 저항해보려 해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이툰 파스타의 냉소적인 마지막 문장들이 암시하듯 이러한 인식이 통상적인 의미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상컨대 그들은 자신들이 발붙이고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을(못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나에게 거의 세대론처럼 보이는데, 그런 의미에서 박상영의 소설은 예술가(소설가)형 소설이기도 하지만, 세태소설로 읽을 여지도 다분하다. 특정 사건이나 실패를 계기로 각성하게 되는 인물이 결국 진창에서 도약하고 그 곳을 벗어나는 성장 드라마 따위야말로 진정한 판타지라는 것. 박상영 소설의 인물들은 진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진창에서 몸부림친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p.38,「재희」) 라고 자학하는 동시에, 유채영의 노래에 맞춰 온 몸으로 춤추는 인물들. 사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의 호오는 크게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패에 찌들어 그것에서 파생하는 자기 연민을 스스로 즐기는 ‘마조히스트-나르시스트’를 경멸하거나 ‘그것이 무슨 자랑인가’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기에.
박상영 역시 모두에게 자신의 작품과 인물이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 같지 않고, 보편적인 문학적 진실을 탐구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두 번째 장에서 언급했듯 박상영의 화자들은 모두 자의식 과잉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이 인물들에게 “(즉각적으로) 설득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작품에 대한 개개인의 평가로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설명과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박상영의 작품이 ‘볼 때는 별로였지만 해석을 보고 좋아질 수 있는’ 류의 작품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각주 9 : 남상영, 「별 수 있나요, 끝없이 흔들리며 흘러갈 수밖에」에서 수정.) 앞의 인용문은 대만 감독 차이밍량((蔡明亮)의 작품이 담고 있는 기이한 정서와 흐름에 대한 단평인데, 이것은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그래서 그 이유를 낱낱이 전달하거나 설명하기 힘든 작품들에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고유의 영역과 그것에 대한 설명의 불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존중하고 지지하지만, 촌스럽게 이 작품이 좋았던 이유를 찾아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 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각주 10 : 신형철, 위의 책)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박상영 소설의 정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위 문장 정도가 되지 않을까. 박상영의 인물들이라면 저 문장을 읽고 질색을 하면서 조롱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저 문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살아갈 것이다. 누군들 아니겠는가. “결국에 우리는 따뜻한 파스타 한 접시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다시금 실패하고 남부끄럽게 남을 것이다. “신파는 영화로 족하”다는 박상영의 소설이 가장 신파적인 문장으로 정리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다르게 살 수 있을는지? 그렇다면 아무 말 없이 이들의 춤사위에 동참해보는 건 어떠신지. 물론 “불행은 안 끊기고 계속 이어지겠지만”, 혹시 이들과의 시간에 “아주 가끔 드문드문 있는 행복”(각주 11 : 『꿈의 제인』의 대사.)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ps. 박상영은 「우럭 한 점과 우주의 맛」으로 2019년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젊은 작가상 최초의 중편소설 대상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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