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발레 무용(舞踊)담
달
하체는 파쎄(Passe). 상체는 뒤로 캄브레(Cambre) 다리는 옆으로 턴 아웃, 몸을 뒤로 젖히더라도 허리는 뒤로 넘어가지 않고 꼿꼿이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깜블레(cambré). 끝까지 내려가요. 엉덩이 빠지지 않게! 앙 바(En bas), 앙 아방(En avnat) 앙 오(En haut) 거쳐서, 뒤로 깜블레. 반대쪽 어깨는 내리고! 몸은 비틀리지 않고 정면 바라보게 하세요. 팔 뻗어서 뒤로 더 젖혀요. 배는 내밀지 말고! 골반 세워요! 다시 쑤쉬(sous-sus), 앙 오, 발란스! 팔꿈치 벌려주세요. 위로 뻗어줘요. 다리 붙이고, 어깨 내리고, 등 모아주고, 숨 내뱉어서 흉골은 조여줘요. 나무가 된 듯이. 다리를 땅에 쭉 꽂아주세요. 턱 당기고. 좋아요. 꽃봉오리가 터지듯이, 알롱제(allonger), 그리고 앙 바. 시선 (바) 바깥쪽! 좋아요. 수고하셨어요.
12카운트, 시간으로 치자면 15초~20초 남짓의 동작이 끝났다. 비로소 코어에 힘을 풀고 숨을 크게 몰아 내쉰다. 식은 땀이 등으로 흘러 타이즈로 스며든다. 위의 동작들은 발레의 매우 기본적인 동작들 중 하나다. 지난 해 10월부터 나는 발레를 꾸준히 배우기 시작했다. 참고로 필자는 현재 27살이고, 남자다. 어디를 가더라도 클래스에서 거의 유일한 남자다.
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작년, 그러니까 2017년 1학기 <무용 미학> 수업을 수강한 때였다. 나는 무용을 해 본적도, 본 적도 없었다. 해 본 춤이라고는 초등학교 성경학교에서의 율동이 거의 전부였고 대학교 신입생 때 선배의 재즈댄스 공연을 본 것 말곤 무용 공연에 대해서도 딱히 기억이 없다. 수업 또한 전공을 채우기 위해 듣고자 했던 것이다. 나 까짓것이 어떻게 무용 작품을 비평하고 무용에 대해서 논하겠는가. 나는 내가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쓸 때엔 아는 척은 해야 할 터인데, 그 생각을 하니 수업을 듣기도 전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저 3학점만 채우자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는 다행히 내 기대이상으로 재미 있었다. 교수님의 강의 덕분이기도 했지만 다 같이 감상했던 무용작품의 덕도 컸다. 로이드 뉴슨(Lloyd Newson)의 댄스필름 <Enter Achilles>,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etherland Dance Theater, NDT)의 안무가인 이어리 킬리안(Jiri Kylian)의 <Petite Mort>, 샤샤 발츠(Sasha Waltz)의 <Körper>, 드미트리 체르니아코프(Dmitri Tcherniakov)의 <Metamorphosis>같은 작품들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이해 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아니, 어쩌면 이해는 했을지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이해 못했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딱 잡아서 말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무엇. 연예인들의 방송댄스처럼 사람들을 자극적으로 사로잡는 매력은 없을지언정 분명 그 몸짓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있었다. 작품이 멋있다고 생각하기보다 무용수들을 동경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 같다. 능구렁이 같이 굴러가는 무용수 신체적 능력은 탁월했다. 그들의 몸은 길고 가늘면서도 강인했다. 뛰고, 구르고, 타 넘고, 팔을 뻗으며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미학을 공부했으면서 이런 진부한 표현을 써도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몸 자체가 조각이요 예술 작품이었다.
영화 <Dancer>에서의 세르게이 폴루닌. Photograph by David LaChapelle
무용 미학을 듣던 학기 중 발레 댄서 세르게이 폴루닌(Sergei Polunin)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Dancer>를 봤고, 이 때 무용수들에 대한 동경은 정점을 찍었다. 나이도 세 살밖에 차이 안나는 동년배 발레리노는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스텝은 사자같이 대범 했고 점프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는 거침없이 스텝을 밟다가도 날아 오르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호지어(Hozier)의 <Take me to church>에 맞춘 4분 남짓의 격정적인 몸짓은 날 완전히 매료시켰다. 점프나 턴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흔들거리는 것만으로도 아우라를 뿜어냈다. 세르게이는 내게 새로운 차원의 몸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인류였으며, 단숨에 내 이상향이 되었다.
그 때 나는 무용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발레여야 했다.
내가 마치 계집애가 된 기분이에요
It’s just, I feel like a right sissy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인 빌리는 발레에 흥미를 보이지만 흥미를 보이는 자신을 인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발레리노는 다 게이일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발레를 하면 게이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한다. 그는 발레 슈즈를 몰래 받아 와선 집 침대에 숨기고 발레 수업 대신 권투 수업을 가는 것이라 아버지를 속인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 장면을 보고 그저 웃고 넘겼겠지만 나는 사뭇 진지했다. 발레는 여자만 하는 것이니, 발레를 하는 남자는 다 게이일 것이라니, 그런 말들 다 고정관념이고 게이면 어떠하고 다 틀린 말인 줄 나도 안다, 다 아는데, 그래도 실제로 발레를 시작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빌리 엘리어트>를 봤다. 비록 영화라 할지라도 소년은 아빠가 알면 후들겨 맞을 걸 알면서도 몰래몰래 발레를 배우기라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 있나 싶은 심정이 들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실 발레를 하면 꽤나 잘 어울릴 것 같은 몸이라 생각했다. 180센티미터에 66킬로그람, 짧지는 않은 팔다리를 가졌다. 하지만 내 자신이 발레에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나는 왜 터질듯한 근육질의 몸보다 길게 쭉쭉 뻗는 근육을 가진 몸을 원하는 걸까. 몸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가진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나 발레 배운다고 말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왜?”라는 질문이 날아온다면 당당하게 대답할 용기가 없었다.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한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글로만 페미니즘을 배웠지 맨 박스에 단단히 갇혀 있었다. 영화를 봐도 용기는 부족했다. 빌리는 아무래도 픽션이지 않은가.
그래서 네이버에 검색했다. “키스는 어떻게 하는거죠”의 막막한 심정과 “애인 집에서 변기가 막혔을 때”의 부끄러움을 담아 “남자 발레”를 검색했다. 내가 미쳤지 싶었을 때 <멘즈 헬스(Men’s Health)>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사 하나를 찾아볼 수 있었다. 기사의 주인공은 마흔 살 직장인 장지웅씨. 그는 서른 한 살에 발레를 시작해 9년동안 주 3회 2시간씩 꾸준히 발레를 배워 왔다고 한다. 주짓수를 해오다가 발레로 종목을 바꾼 뒤 5킬로그람이 빠졌지만 몸은 더 건강해지고 근육에는 힘이 생겼다는 장지웅씨를 보았을 땐 그래, 이 사람이다 싶었다. 영화부터 남성잡지 기사를 뒤져보기까지 참 궁색한 과정이었지만 나는 충분한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곧 학원을 검색했고 집 가까이에 있는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아라베스크(Arabesque) 동작. 뒷 다리를 올리더라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최대한 꼿꼿하게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는 안 받습니다
발레 학원에 수업 문의를 했을 때 처음 받았던 답변이었다. 학원이 작아 남자가 이용할 시설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혹시 추천해주실 수 있는 곳이 있나요.” 나는 더 용기를 냈다.
“잘 모르겠네요.”가 돌아왔다.
힘껏 짜낸 용기는 그대로 주르륵 흘러 내려가버렸다. 남자나 여자나 배우면 되는 것이지 이렇게 야멸차게 퇴짜를 놓을 건 뭐람.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다시 학원을 찾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곳에 연락을 해 봤자 또 퇴짜를 맞지 않을까? “뭔 남자가 새삼스럽게 발레 수업을 문의해?” 들은 적도 없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 때는 몇 달이나 지나 종강을 하고 여름이 되었던 때다. 나는 거리는 멀지만 좀 더 큰 학원을 찾아갔고, 거기서 왕초보 클래스를 한 회 끊어서 수강했다.
그 수업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선생님은 유니버설 발레단 출신의 러시아인 무용수였는데 한 시간 반 수업 중에 한 시간을 요가 매트에서 날 조져 놨다. 정말, 조지다라는 비속어를 쓰지 않고서는 그때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크로스핏을 했을 때의 근육통과 힘듦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배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코어를 짜내고, 식은 땀이 줄줄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스트레칭을 했다. 탈수 증세가 와서 중간에 뛰쳐나와 물을 마셨다. 선생님은 씨익 웃으며 유리문 너머로 나한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어서 오라고 말했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그 뒤로 잠깐 바 동작, 정확히 말하자면 바 워크(Barre Work)의 마지막 단계인 림바링(Limbering) 을 했는데, 바 위로 다리를 얹은 뒤 선생님은 다리를 살짝 들어 옆으로 넘기는 자세를 요구했다. 해냈을 리가 없다. 발레 투투를 예쁘게 차려 입은, 근육이라곤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단백질 말고는 없을 것 같은 수강생들은 얼굴이 찌푸려지는 적은 있어도 이 모든 동작을 소화해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발레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발레를 잘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운동량을 소화해내야 한다. 발레는 흔히 생각하는 그런 “여성”적인 운동이 아니다. 표정 관리를 하며 몸을 하늘하늘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온 몸 구석구석 관절 사이에 존재하는 작고 미세한 근육들이 단단하게 자리잡아야 하고, 언제나 곧은 자세와 코어 근육에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필라테스에서 사용되는 코어 근육들을 고난도의 무용 동작과 함께 수행한다고 하면 이해하기가 쉬울까. 기본적인 자세만 하더라도 신경 써야 할 것이 수십 가지이며 팔 동작과 시선에 리버스(reverse) 동작까지 고려하게 되면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단순히 몸이 유연하다고 능사가 아니다. 유연하기 위해서도 이쪽은 가만히 있고 저쪽은 뻗을 수 있도록 엄청난 코어 근육이 필요하다.
첫 수업에서의 좌절 후 오기가 생겼다. 수업은 더 듣지 않았다. 지금 배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대신 평소 가던 헬스장에 운동을 갈 때마다 한 시간씩 스트레칭으로 몸을 찢었고 코어 운동을 했다. 비싼 돈 주고 웨이트 리프팅은 안하고 매번 신음 소리를 내며 다리를 찢는 꼴이 남 보기에는 웃겨 보였겠지만 나는 사뭇 진지했다. 그리고 약 두 달이 지나 10월이 되었고, 다시 유일한 남자 수강생으로서 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10개월이 흘렀다.
앞서 말한 장지웅씨처럼 나 또한 발레를 하고 난 뒤 살이 4킬로그람이 빠졌다. 주위에선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말하기 일쑤다. 그래도 확실한 건 내 자세는 훨씬 곧아졌고, 몸은 더 강해짐과 동시에 부드러워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몸을 쓴다는 것보다 몸으로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젠 발레 하는 남자를 처음 보는 여자 수강생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서도 담담하게 대할 수 있게 됐다. 보통 “남자이신데 (몸이) 잘 늘어나시네요.”나, “어떻게 발레를 배우시게 됐어요?” 같은 질문이 날아오곤 하는데, 이전에는 ‘이런 편견에 가득 찬 인간들!’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 요즘에는 “그러게요, 저도 신기하네요.” 나 “재밌어 보여서요.” 정도로 대답하곤 한다.
그랑 쥬떼(Grand Jeté)
마지막으로 그랑 점프 하고 다 같이 레베랑스(reverence) 한 뒤 마치는 걸로 할게요. 5 and 6, 7 and 8 and 톰베(Tombe), 파도브레(Pas de bourre), 글리싸드(Glissade), 그랑 쥬떼(Grand Jeté).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두 번씩 번갈아 하세요. 한 순서 나가시면 바로 다음 분 가실게요.
2번(오른쪽 사선)을 바라본다. 프리파라씨옹(Préparation). 5 and 6, 7 and 8. 톰베. 오른 다리를 접었다가 뻗는다. 뻗는 동시에 오른 팔도 쭉 뻗는다. 파도브레지만 샷세(Chasse)처럼 살짝 점프한다. 다시 오른발, 왼발, 살짝 플리에 한 뒤 글리싸드. 이 때는 왼쪽을 바라보며 왼쪽 팔 또한 쭉 뻗는다. 글리싸드는 크게 뛰지 않는다. 대신 그 다음의 그랑 쥬떼에서 힘 있게 날아오른다. 앞다리를 크게 차고(데벨로페, Développé) 곧바로 뒷 다리도 있는 힘껏 뻗는다. 허리는 펴고 몸은 사선을 바라보지만 시선은 관객쪽을 향하면서. 잠깐의 체공 시간이지만 모든 잡념을 잊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는다.
내 글은 여기까지다. 언젠가 무용 작품 하나를 해내고 나서 다시 나의 무용(舞踊)담을 들려줄 날이 오길 소망한다.
'PEEP VOL.02 [2018-2]'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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