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머의 루머의 루머> 리뷰 -
레몬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내용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즌 1 1화의 첫 장면. 해나 사물함에 해나를 추모하는 사진이 붙어있다.
prologue: “안녕, 해나 베이커야."
해나 베이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자살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학교에서는 형식적인 추모가 이루어진다. 어떤 이들은 흘러가듯 해나를 잊어간다. 어떤 이들은 이미 해나를 잊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그 마지막 ‘어떤 이’에 해나의 친구 클레이 젠슨이 있다. 약간은 멍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클레이는 해나로부터 발송된 택배를 받게 된다. 그 안에는 열 세 개의 테이프가 있다. 첫 번째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재생을 누르는 순간, 죽은 해나의 목소리가 귀 속에 울려퍼진다.
해나는 13개의 테이프 앞면과 뒷면에 자신이 자살하게 된 경위를 녹음해 두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원작 제목이 <13 Reasons Why>인것도 이 때문이다. 충격에 휩싸인 젠슨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테이프를 듣기 시작한다. 시즌 1의 각 에피소드들은 해나가 녹음한 테이프 한 면의 내용을 따라 펼쳐진다. 테이프의 각 면에는 해나의 자살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들 각각의 이야기가 녹음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클레이와 친구들, 그리고 해나의 부모님은 미처 알지 못했던 해나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이들의 일상에 변화가 시작된다.
시즌 1: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가진 엄청난 힘의 원천은 어느 드라마보다 빼어난 심리 묘사다. 해나가 자살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시청자는 해나의 모습과 나레이션을 통해 그 감정의 강도와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우울증을 겪어봤거나 ‘애어른’ 소리를 들어봤던 사람은 조금 더 쉽게 공감할 수도 있다. 2 아니, 그 정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해나의 감정선은 일상 생활에서 깊은 감정의 부침을 겪을 때 누구나 충분히 느낄만한, (그러나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감정의 흐름이다.
자살하던 날, 해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난 뒤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굳은 마음을 먹고 부모님 가게에 가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며 말하기를 포기한다. 부모님에게 자신마저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애어른의 심리. 부모님이 힘든 것이 결국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끔찍한 고독. 해나는 면도칼을 가져가면서도 참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해나가 왜 부모님을 위하려다가 자기 이야기를 못 했냐고 답답해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힘들 때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라는 명제는 생각보다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서 실제로 의지할 사람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당사자가 의지를 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가족과 친구가 수 백 명이 있다고 한들 모두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왜 당사자가 의지를 할 수 없다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해나가 왜 의지를 할 수 없었을까. 해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선뜻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해나의 문제가 아니다.
마침내 딸 해나의 테이프를 듣기 시작한 올리비아, 그리고 앤드류 베이커
해나는 말을 했다.
해나는 표현을 했다. 힘들다고 말했다. 그냥 그걸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해나는 분명히 힘든 티를 냈다. 해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살려달라 외쳤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소리치고 싶었다. 해나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못하는 이유도 우울증에 걸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는 이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어서 혼자 침전해 간 거라고. 젠장. 왜 다들 죽고나니까 후회하는 거야. 어떤 이의 마음이, 감정이, 아픔이, 극단적인 결말로 치닫고 나서야 그것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들어보려고 하는거야.
해나는 말을 했다.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의 얼굴과 몸매를 평가하며 작성한 리스트를 보고 분노했다고. 그리고 그런 해나에게 남자아이들은 –꼴에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그래도 네 엉덩이는NICE라고 써 있지 않았냐고. 어쨌든 칭찬인데 좋은 거 아니냐고. 안타깝지만 남자 아이들은 해나의 마음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 성추행으로 이어졌음을 해나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돌고돌아 해나의 손까지 들어오게 된, 얼굴/몸매 품평 리스트
그렇지만 해나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그만큼 순진했을 수도 있고, 친구들을 믿었을 수도 있고, 외로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구들은 한결같이 같은 대답을 했다. “어쨌든 칭찬인데 좋은 거 아냐? 다른 애들은 욕도 써 있었잖아.” 힘들게 털어놓아도 공감 받을 수 없는 상황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외로움과 친구에 대한 배신감. 원망감.
또 다시 해나는 말했다.
자신의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고 있다고. 그러나 엄마는 그런 일들을 해나와는 관련없는 먼 세계의 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해나의 조심스런 구출 요청을 과대망상으로 치부해버렸다. 어렵게 세상 밖으로 나온 해나의 감정은 별 거 아닌 것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가장 믿을 만한 부모님에게 이해 받지 못한 감정을 온전히 떠 안아야 할 때의 외로움.
죽기 직전까지도 해나는 말했다.
브라이스 워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싶다고. 그러나 상담 선생님과 젠슨을 비롯한 나머지 친구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방어 심리 때문에, 혹은 무지해서, 혹은 둔감해서 해나의 마음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했다. 심지어 오해하기도 했으며 도우려 했으나 제대로 돕지 못했다. 서툰 도움의 손길은 종종 구원이 아니라 공격이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이라면 해나의 수많은 시도가 더욱 애처롭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꺼낸 말이 빈 공간으로 사라질 때의 허무함과 좌절감은 심장을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 푹 꺼지게 만든다. 그 감정. 반복된 좌절로 학습된 그 무력감과 체념.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졌을 때.
그 때 해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이 모든 것이 해나를 자살로 이끌었다.
해나야, 해나야, 해나야.
시즌 1 마지막 화, 해나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장면을 나는 아마 절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손목을 긋는 장면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살 장면이 너무 적나라해서가 아니다. 해나가 끝내 삶을 포기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잘 느껴져서 그렇다. 자살하려 면도칼을 손에 쥔 와중에도 너무나 살고 싶어하는 해나의 눈빛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 모든 과정을 돌이켜보며 눈물 흘리는 해나의 얼굴에서 죽음이라는 두려움마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을 읽을 수 있어서.
그렇게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해나는 모두의 마음 속에 –심지어 나의 마음속에도- 짐이 되었다. 누군가는 죽고 나서야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참 슬프지 않은가.
시즌 2: 돌고 돌아 다시 추모로.
아니, 어쩌면 해나의 주변인들은 나름대로 해나를 도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 나름대로 해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행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방 변호사의 증인 심문을 바라보는 올리비아 베이커와 그의 변호사 데니스.
시즌2는 해나의 자살에 대한 학교 측의 책임 여부를 따지는 재판을 따라 진행된다. 시즌 1이 전적으로 해나의 관점에서 펼쳐졌다면 시즌 2는 해나가 언급한 당사자들이 자신의 시점에서 해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해나의 이야기가 공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테이프의 존재가 해나의 부모님께 알려지면서 증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테이프와 관련된 해나의 주변인들이 증인으로 채택되어 하나씩 재판에 출석하고, 학교 측 변호사는 해나의 자살에 대해 학교가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집요하게 증인들을 몰아간다. 이 과정에서 해나가 테이프에서 밝히지 않았던 내용들이 밝혀지게 된다. 3
너와 나의 이야기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사실적’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현실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 역설적이게도- 현실 그 자체와 동치시키는 것이 이 드라마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강간 문화,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 문화를 뼛속까지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갑과 을의 권력 관계는 드라마 안에서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돈 많은 백인 남성 ‘갑’은 아시안 남성과 동성애자 남성을 짓누르고, 짓눌린 이들은 또 다시 백인 여성, 돈 없는 흑인 여성, 동양인 동성애자 여성을 억압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폭력과 폭력의 연속이며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악인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은 극도로 악한 사람 한 명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이것은 기득권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무지한 –혹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고자하는- 모두의 이야기이다. 비극은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해나의 죽음도 그렇다. 자신을 보호하려면 (혹은 자신이 즐거우려면) 누군가가 괴로울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감수한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것이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
거울: 딱 현실만큼, 아니 현실보다 조금 더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현실 그 자체만큼, 아니 현실 그 자체보다 고통스럽다. 폐부를 찔러오는 고통에 시청 내내 괴롭지만 동시에 ”그래도 드라마인데, 조금은 ‘드라마다운’ 요소가 나오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쉽사리 멈춤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그 이상한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고집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당신이 그런 고집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이 드라마에 패배한 것일테니.
유능한, 혹은 잔인한 학교 측 변호사
시즌 2에서 학교 측 변호사는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해나를 ‘걸레’로, ‘정신이상자’로, ‘썅년’으로 프레이밍한다. 학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보는 입장에서는 ‘Come on!’ 소리가 절로 나온다. 변호사가 증인들의 말을 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몰아가는 모습은 너무할 정도로 가혹하다. 학교 안의 무법자들은 학교 안에서나 날고 길 뿐이다. 증인 자격으로 법정 앞에 던져진 해나의 친구들은 법정의 무법자 앞에서 그저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그렇다. ‘정의구현’이라는 말이 너무나 쉽게 사용되지만 뒤틀리고 기울어진 이곳에서 진정한 정의는 구현될 수 없다. 이 드라마가 특별히 잔인한 것이 아니다. 그냥 현실이 잔인한 것이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아이들이 점차 해나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시청자는 한 줄기 빛이 비추지는 않을지 자신도 모르게 기대한다. 사실 그들이 원하는 ‘빛’은 해나와 친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빛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시청자들이다. 한 줄기 빛에 대한 시청자의 바람은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사는 현실의 추악함을 마주하고 어떻게든 회피하고 거부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아니, 어쩌면 결말은 궁금한데 작품을 끝까지 보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함일지도.
안타깝게도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어둠과 어둠과 빛>이 아니다. 재판에서 승소하는 것은 학교 측이고 해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가해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내려 앉는다. 이후 제시카의 증언으로 강간범 브라이스 워커에 대한 재판이 따로 열리지만 역시나 워커 또한 말도 안 되는 형량으로 빠져나간다. 4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새 출발을 위해 전학 갈 준비를 할 것이라며 학교로 돌아온다.
해나의 두 번째 추모식
그렇게 다시 한 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은 흘러간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드라마 맨 처음처럼 추모로 끝난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즌 1의 추모는 가짜 추모, 시즌 2의 진짜 추모라는 점일터. 추모에서 추모로, 몇 개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남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세상에 녹아들고자 한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인물들의 마음 속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클레이가 시즌 1에서 테이프 대신 라디오를 들은 것처럼, 시즌 2에서 해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상징의 문신을 팔에 새긴 것처럼, 진짜 추모를 통해서 모든 이들은 해나에게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까?
글쎄. 아닌 것 같다. 진짜 추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들은 영원히 해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해나는 그들의 삶 구석에 조용히 서 있을 것이고, 종종 잠잠해지려 노력했던 호수에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과유불급
아쉬운 것이 있다면 결말이다. 시즌 2가 시즌 3을 암시하며 끝나는데 굳이 시즌 3을 만들어야 했을지. 시즌 3까지 나온다면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아니라 <비극의 비극의 비극>일 뿐인데. 게다가 해나의 이야기로 시작했다면 해나의 이야기에서 적당히 끝맺음을 했어야 할텐데 초점이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져 간다. 어쩌면 해나가 주인공이었던 것은 시즌 1에 불과했고, 시즌2는 해나의 친구들이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시즌 3에서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비극이 사회에 미치는 여파가 이렇게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총기난사까지 넣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을지. 시즌 3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다. 또 과하다. 그래서 지친다.
해나의 다양한 추억이 담긴 영화관 crestmont. 글의 주제에서 어긋나기에 서술하지 않았으나, 작품의 영상미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긴하다.
epilogue: 또 다른 모든 ‘해나 베이커’들에게
시즌 2에서 다른 인물들의 속사정을 들을 수 있다할지라도 내게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어찌됐든 해나 베이커의 이야기다. 해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해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해나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 해나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막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해나와 함께 상처받은 시청자들에게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따뜻한 위로 한 마디 조차 건네지 않는다. 에피소드 시작 전에 우울증, 자살, 폭력 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있으니 시청자의 주의가 요구된다는 자막을 내보내는 것과 각 배우들이 나와 드라마를 소개하면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드라마 홈페이지(http://13reasonswhy.info)를 방문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이 작품이 베푸는 최고의 친절이다
그렇지만 지금 바로 내 옆과 뒤, 혹은 내 안에 또 다른 해나 베이커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수도 있다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면 도움을 청하는 게 맞는 거라고, 혼자 감당하느라 버거웠을텐데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것이 어떤 해나 베이커들에게는 필요하다. 크나큰 위로가 된다. 그래서 또 다른 모든 해나 베이커들에게 다음 노래를 바친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전해주지 못한 위로를 담아.
맘 없는 사랑은 진실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두려운 믿음은 너를 지치게 할 것도 알잖아
여전히 내딛고 있는 그 마음을 돌려
때론 행복은 내겐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고
허전한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때
여전히 힘들어 하는 그 마음을 돌려
너도 가끔씩은 그런 네 모습을 벗고 싶겠지
때론 누군가가 벌여놓은 장난인 것 같겠지
하지만 그렇지않아
하지만 그렇지않아
원하지 않는 아픔이 내 맘을 조여왔었다는걸 잘 알잖아
그 맘은 나도 잘 알아
돌이킬 수 없이 너무도 멀리 돌아와 이제는 힘들거라고
오늘을 그저 보내고
세상은 너무 외롭고 나 홀로 남겨진 사람이라고 느낄 때
그럴 땐 돌아서 내 손을 잡아주기를, 내게로 돌아오기를
메이트 - 우울한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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