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R 입문
이제로
ASMR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이 용어는 ‘졸음이 오게 만드는 영상’ 정도로 이해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상한 것 혹은 변태적인 것 혹은 야한 것이라는 오명이 덧붙여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누군가에겐 정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ASMR이란 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줄임말로서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후각적, 혹은 인지적 자극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심리적 안정감이나 쾌감 따위의 감각적 경험을 일컫는 말이다. 1쉽게 말하자면, 미용사가 머리를 자르거나 감겨줄 때, 혹은 해질 무렵 봄 창가에 앉아있을 때, 혹은 멀리서 누군가가 타자 치는 소리를 들을 때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러한 기분 좋은 생리적 반응을 팅글(tingle)이라고 한다. 팅글은 통상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고 졸음이 오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팅글을 주기 위한 시청각적인 컨텐츠가 ASMR이다. 2 그러나 이러한 모호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ASMR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며, 그 효과가 알려진 지도 얼마 되지 않기에 사람들이 느낌으로만 아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러한 느낌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러한 생리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더라도 ASMR은 하나의 장르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있다. 따라서 나는 ASMR을 하나의 문화 컨텐츠로서 제안한다.
왜 갑자기 ASMR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ASMR을 덕질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ASMR을 영업하고 싶다. 필자는 작년 가을 처음 ASMR영상을 접했는데, 그 때의 간질간질한 기분 좋은 느낌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곧 내성이 생겨 팅글은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ASMR영상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과 안정감, 그리고 왠지 모를 만족감에 중독되고 말았다. 그 해 겨울,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하루 종일 ASMR 비디오만 찾아보던 날들을 다 셀 수도 없다.
최근 들어 필자와 같이ASMR에 입문하는 사람이 늘면서 ASMR 커뮤니티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수도 없이 많은 ASMR 아티스트들이 등장하였으며, 나날이 영상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ASMR은 단순히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한 시청각 자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ASMR Videos?
앞서 말했듯ASMR은 문화 컨텐츠로서 그 안에 내용이라 할 만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 무엇을 내용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최근5-6년간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시청자들에게 효과적으로 팅글을 불러일으킨 시도들은 여러 아티스트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작되었고, 이는 장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진화하였다. 다음으로 제시될 것은 ASMR영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위 장르들이다. 자기 전 한 번쯤은 취향에 맞는 영상을 골라 시청해보길 권한다.
#Personal Attention
사람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은 장르는 Personal Attention이다. 이는 ‘사적인 주의끌기’라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말로 번역되는데, 쉽게 말하면 ASMR 아티스트가 마치 내 앞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종류의 영상을 의미한다. 주로 시청자를 쓰다듬어주는 듯한 핸드 무브먼트를 사용하고, 각종 사물들을 통해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종류의 영상은 시청자를 편안하게 만들고, 잠들게 만드는 것이 유일의 목표이다. 그래서 사실 팅글을 느끼기 위해서라기보단 기분 좋은 영상물로서 ASMR을 소비하는 필자는 이러한 종류의 영상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영상들이 조회수가 가장 높은 것으로 보아 ASMR의 본래 의도 하에서는 최적의 장르라고 생각된다.
#Role playing
Peronal Attention만큼이나 많이 등장하는 영상이 롤플레이 영상이다. ‘롤플레이’라 하면 외설적인 행위가 떠오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ASMR에서의 롤플레이 영상은 연극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하다. 한 예로, 국적을 불문하고 ASMR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재생산된 주제는 뇌신경검사(Cranial Nerve Exam) 롤플레이이다. 사뭇 뜬금 없는 듯한 이 주제는 ASMR아티스트가 의사가 되어 시청자의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감각 신경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의사나 상담사가 시청자를 상담하고, 검진하고, 치료해주는 종류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롤플레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패러디 영상들—예를 들어 할리퀸, 타이타닉, 타잔 등—도 자주 등장한다. 혹은 아예 아티스트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여 새로운 내러티브를 꾸려가는 경우도 있다. 즉 롤플레이는 가장 극적인 종류의 ASMR이며, 아티스트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가장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는 장르이다. 당연하게도 필자는 이러한 종류의 영상을 가장 즐긴다.
#Show & tell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이나 산 물건을 보여주는 유형의 영상이다. 뷰티 유튜브 영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유형의 영상일 것이다. 여타 하울(Haul) 비디오와 다른 점은, ASMR에서는 사물을 두드리는(tapping), 긁는(scratching) 혹은 부스럭거리는(crinkling) 등의 행위를 통해 여러 듣기 좋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주로 옷, 액세서리, 책 등 좋은 소리가 나는 사물들의 컬렉션을 보여준다. 남의 파우치를 들여다보는 것이 재미있듯이, ASMR아티스트마다의 개성이 드러나는 컬렉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Object Sounds
말소리나 입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노토킹(No-Talking)영상으로, 좋은 소리가 나는 사물들—ASMR커뮤니티에서는 이를 트리거(Trigger)라고 부른다—을 이용한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는 사물이라면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든 상관 없이 ASMR 영상의 소재가 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ASMR의 경우 사람이 직접 등장하지 않기에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object sounds영상에는 눈의 즐거움도 요구된다.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분이 좋아지는 영상 (혹은 Oddly satisfying videos)과 유사한 시각적인 만족감을 준다. 요새 유행하는 액체괴물(Slime) 비디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ASMR을 즐긴다고 알려진 아이유의 인스타그램의 액괴 영상이 좋은 예이다.
ASMR Artist?
Isable Imagination ASMR, <ASMR THE WALKING DEAD ROLE PLAY> 그녀는 워킹데드를 패러디하여 시리즈로 ASMR 영상을 제작하였다. 그녀는 배우 못지 않은 훌륭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 글을 읽던 와중에 굉장히 거슬리는 단어가 하나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바로 ASMR”아티스트”이다. Peep 0호에서 아티스트와 아이돌의 경계를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아티스트”는 그 진입장벽이 높은 용어이다. 실제로 댓글을 보면 외국인들은 모두 ASMR 영상 제작자를 “ASMR artist”라고 칭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꼭 “유튜버”라고 부른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특별한 검열 없이 우수한 콘텐츠 생산자를 artist라 부르고 있다. 이에 더해 ASMR팬으로서 나름의 변호를 덧붙이자면, ASMR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수고를 요한다. 앞서 말했듯이 ASMR영상 제작자들에게는 컨텐츠의 독창성과 팅글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어 탁월함이 요구된다. 그래서 유튜버들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앞서 말했듯이 대개의 ASMR유튜버의 경우 영상의 기획과 제작, 편집 등 생산의 모든 과정을 오롯이 혼자서 해낸다. 예로 30분 정도의 영상을 편집하기 위해 영겁의 시간이 걸렸다는 한 유튜버의 푸념은 그 노력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더군다나 롤플레이의 경우에는 분장, 배경 세팅 등 영상을 촬영하기 위한 다양한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Goodnight Moon이라는 채널은 자체적으로 판타지 세계관을 만들어내어 이에 대한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한다. 분장이나 소품, 내러티브, 그리고 연기까지 모든 것이 세심하게 준비되어 어느 하나 고퀄리티가 아닌 게 없다. 물론 노력이나 작업의 양으로 아티스트라고 불릴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올-라운더로서 훌륭한 컨텐츠를 제작하는 그들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아티스트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것은 그리 부당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Goodnight Moon, <ASMR Maybell’s Menagerie: Dragon Egg Shopping> 이 영상은 판타지 시리즈인 Babblebrook Series 중 하나로 야생 동물샵에서 용의 알을 구입하는 내용이다. 그녀는 이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직접 용의 알 소품을 8개 가량 만들었다. (오른쪽 사진 출처: Fresh Blush Instagram)
Asmr Artists!
이제 그들을 아티스트로 부르는 것이 허락된다면, ASMR 아티스트 몇 명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추천에는 필자의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게 들어갔음을 미리 고백한다.
#Gentle whispering asmr
먼저 ASMR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Gentle Whispering ASMR을 소개한다. 필자를 ASMR에 입덕하게 만든 채널이기도 하다. 채널을 운영하는 Maria는 현재 활동하는 ASMR아티스트 중 가장 초창기 멤버이자, ASMR 커뮤니티를 키워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Queen Maria라고 부른다! Maria의 강점은 엄마, 언니, 누나 같은 따뜻함과 세심함에 있다. 이 채널에서는 Personal Attention영상들이 가장 인기가 좋다.
#Goodnight moon asmr
본 글에서 이 채널이 몇 번이나 언급되는지, 단연 필자의 최애 채널이다. 영상의 퀄리티와 완성도가 매우 높다. 그녀의 롤플레이는 다른 사람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가 만든 판타지 시리즈는 영화나 소설처럼 정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며, 등장하는 캐릭터마다 매력적이다. 롤플레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영상이 올라오는데 전혀 난잡한 느낌이 없이 그녀만의 빈티지한 분위기 속에 통일된다. 또한 빈티지하고 귀엽고 소소한 물건들을 까마귀처럼 모으는 그녀의 습관 덕에 Show&tell 비디오도 매우 흥미롭다. 이 채널에 태그를 붙인다면 #Vintage #rustic #nostalgic #warm #cozy 정도가 되지 않을까.
#Latte asmr
라떼(Latte)는 필자가 한국 ASMR아티스트 중 가장 좋아하는 유튜버이다. 목소리가 굉장히 좋아서 팅글이 마구 느껴진다. 그녀만의 신경 써주는, 보살펴주는 듯한 느낌이 ASMR에 굉장히 효과적이다. 또한 손짓이 굉장히 섬세해서 시각적으로도 팅글이 강하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팅글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혹은 간호사나 상담 직원 등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팅글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채널을 강력히 추천한다. 단, 한국어 영상에서 근본 없는 악플로 마음 고생을 했던지라 한국어 영상을 자주 올리지는 않는다.
#ASMRsurge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나 속삭임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노토킹 채널이다. 노토킹 ASMR 채널 중 가장 영상 퀄리티와 사운드 퀄리티가 좋다. 미지의 채널 운영자는 언제나 유머러스 하셔서 늘 더보기란에 위트있는 글을 남긴다. (더보기란을 기다리는 팬이 더 많은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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