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소녀, 의 소녀 : ‘루나버스를 통해 살펴본 아이돌 세계관의 딜레마

 

선데이빽

 

 

지금부터 나는 아주 황당한 사실 하나를 당신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먼저 TV를 켜고, 무엇이든 좋으니 당신이 아는 음악방송 중 하나를 틀어보라. (TV가 없다면 유튜브의 K-pop 섹션에 들어가도 좋다.) 아마 당신은 저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나싶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아이돌 친구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면면을 찬찬히 한 번 살펴보라. 왜냐하면 그들 중 상당수는 사실 사람이 아니거든.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고? 아니, 이건 사실이다. 당신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그 노래는 사실 태양계 외행성으로부터 날아온 외계인들이 부른 것이고, 화면 속에서 웃으며 춤추고 있는 그 소녀들은 한때 황도 12궁의 별자리들을 대표하는 존재들이었지만 지금은 마법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서로의 꿈을 매개로 이어져 네가 나고, 내가 너인상태에서 무한히 확장하는 미지의 소년 무리도 있다. , 하나만 더 귀띔하자면 몇 년 전 거리에 널린 통신사 대리점들의 입구를 장식했던 그 입간판의 주인공 역시 실은 날개를 숨긴 천사다. 내 지독한 허언에 속이 울렁거려 이 장을 얼른 스킵하더라도 나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이건 말도 안 되는 허언, 음모론이 절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려준 비밀들은, 모두 각자의 회사에서 대외적으로 공인한 사실이니까.

 

작금의 K-pop 트렌드는 누가 뭐래도 세계관과 그에 따른 ‘n부작시리즈이다. 반도를 휩쓴 후크송 열풍에 너나할 것 없이 용감한그분, ‘신사동그분, 혹은 그밖의 히트송메이커들을 등에 업고 단발적인 흥행만을 노리던 그 언젠가의 기획 방식에 비교하면, 아이돌 음악은 분명 진화해도 한참 진화했다.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디스코그래피 내의 유기성을 견고히 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으며, ‘세계관은 바로 이러한 움직임에서 비롯된 궁극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음악과 안무의 차원을 넘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특정한 내러티브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다른 곡들 간의 연관성과 당위를 밝히려는 시도인 것이다.

물론 결코 그 수가 얄팍해서는 안 된다. 월드와이드를 향해 뻐렁차게 달려 나가고 있는 BTS는 물론 NCT, 이달의 소녀, 우주소녀, 여자친구, 온앤오프, 드림캐쳐, 원어스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수많은 아이돌 팀들이 모두 저마다의 크고 작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는 분명 야심차게 벌여놓은 판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무너지고야 마는 케이스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이 구축한 세계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방대하다. 모종의 이유로 위기에 빠진 멤버들이 서로를 구해내고 갈등을 해소하는 애처로운 스토리는 이미 클리셰가 된지 오래이며, 마법, 우주, 초능력과 같은 판타지적 요소의 개입도 이제는 예삿일이다. 그리고 길어야 10분을 넘지 않는 뮤비에는 도저히 그 구구절절한 내용을 다 담아낼 수 없었는지, 세계관은 이제 콘서트의 VCR 영상으로,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새로운 형태의 비주얼 필름(각주 : NCT‘NCTmentary’ 시리즈.)으로, 그리고 웹툰을 비롯한 각종 2D 컨텐츠(각주 : BTS화양연화 Pt.0 ’.)로 끊임없이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단언컨대 이는 새 시대에 걸맞는 진화된 형태의 떡밥이다. 뮤비와 화보에 등장하는 각종 오브제들을 발견하고 (사실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의미를 팬들끼리만 유추하던 고릿적 추억을 넘어서서, 회사는 본격적으로 을 짜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수많은 예시들을 보라. 그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컨텐츠를 던져주고 이를 알아채지 못하면 친히 떠먹여주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뭇 팬들의 텍스트뷰어를 가득 채웠던 각종 2차 창작물이 이제는 회사의 주도하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잠깐. 제가 좀 어지러워서 그러는데, 그러니깐 이게 지금 다 아이돌 얘기라는 거죠? 노래하고 춤추는?” 물론. 소설을 써도 몇 편은 썼을 이 어마어마한 서사들은 분명 모두 아이돌의 컨텐츠이다. 그리고 그들의 본업이 재담꾼, 혹은 연극배우가 아닌 이상, 이는 어디까지나 음악에 덧붙는 일종의 도움말에 지나지 않는다. 닭과 달걀, 혹은 배와 배꼽의 관계, 여기서는 따지지 않기로 하자. 다만 분명한 건 지금의 K-pop 씬이 이 거대한 세계관의 그림자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 이달의 소녀가 있다. ‘루나버스(LOONAverse)’라는 독자적인 명칭까지도 보유한 이 팀의 세계관은 의 존재를 중심으로 하여 오드아이, 안드로이드, 뫼비우스, 차원이동은 기본이요, ‘에덴이라고 불리는 천상계의 영역에까지 나아가 신, 성경, 금단의 사과, 사랑과 우정, 배신과 질투 등 세계관에서 등장할 수 있는 소재란 소재는 죄다 다루고 있다.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들은 이와 같은 방대한 세계관을 확립해냈으며, 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팬들은 여전히 새로운 떡밥을 갈구하고 있고, 제이든 정(각주 : 이달의 소녀의 총괄 프로듀싱을 맡은 A&R.)이 마구 흩뿌려놓은 단서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그 의미를 유추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론 어디까지가 기획자의 본래 의도였는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미지의 세계관에 열중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는 덤이고.)

이 루나버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그들의 ‘99억짜리초대형 데뷔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달의 소녀는 매달 1명씩 새로운 멤버를 공개한다는 독특한 컨셉의 프로모션을 통해 데뷔한 12인조 그룹이다. 또한 이 12명의 멤버들은 다시 3개의 유닛(각주 : 이달의 소녀 1/3, 이달의 소녀 오드아이써클, 이달의 소녀 yyxy.)으로 쪼개지는데, 특이하게도 이달의 소녀는 본격적인 완전체 데뷔 이전에 유닛 활동을 선행했다. 덕분에 팀의 정식 데뷔까지 자그마치 110개월이 걸렸으며, 각각의 솔로 앨범, 유닛 앨범과 리패키지, 그리고 그 밖의 스페셜 앨범을 포함하여 데뷔 이전에 발매한 공식 앨범만 18장이 넘는다. (여러모로 가성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기획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루나버스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 덩치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애초에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한데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서 사실상 요약이라는 게 불가능하지만, 정말 추리고 추리자면 루나버스는 ‘12명의 소녀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한 3개의 유닛들은 각기 다른 세상, 1/3은 지구, 오드아이써클은 중간계, 그리고 yyxy에덴이라 불리는 천상계에 존재한다.(각주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yyxy는 한때 에덴에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들로 지구에 추락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와 연결되어있는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 무한히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굴레에 속박된 탓에 어설픈 탐색의 시도마저도 늘 실패에 그치고야 만다. 하지만 어느 날, 오드아이써클이 가장 먼저 무언가를 깨닫는다. 한 쪽 눈의 색깔이 변하는 이 3명의 소녀들은 서로의 영향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각성하게 되며, 뫼비우스를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한 자리에 모여 본격적으로 다른 소녀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먼저 차원 이동 능력을 지닌 멤버 최리가 에덴과 지구를 오가며 나머지 멤버들의 각성을 돕고, 새롭게 각성한 소녀는 오드아이써클과 함께 또 다른 소녀를 돕는다. 이러한 크고 작은 노력들을 통해 12명의 소녀들은 마침내 서로를 모두 알아볼 수 있게 되고, 데뷔곡 가 바로 그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관한 곡이다. (각주 : 본 글에서는 루나버스의 A to Z에 대한 이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원한다면 차라리 나무위키에 들어가보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며, 사실은 필자도 그 자세한 내용을 다 알지 못한다.)

이달의 소녀의 영문명은 ‘LOONA’이다. 그리고 본 글의 제목처럼 이달의 소녀라는 이름은 이달(this month)’이 달(this moon)’,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루나버스에서 이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를 떠올려본다면, 우리는 이들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세계관을 전제하고 출범한 팀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정규 데뷔 전부터 수차례 진행한 상영회는 뮤비와 부가영상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대놓고 유도하는 자리이고, 자체 컨텐츠인 이달의소녀탐구’(각주 : 멤버들의 일상을 담은 짤막한 영상 시리즈로, 유튜브의 공식 채널을 통해 업로드된다.)에서도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본인들의 세계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술한 루나버스가 더 이상 팬들끼리만 공유하는 허무맹랑한 추측이 아니라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단서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연출된 메타포이며, 회사에서도 분명 이 장대한 픽션을 써내려가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달의 소녀는 너도 나도 뛰어든 이 세계관 열풍 속에서 가장 본격적으로 이를 전개해나갔던 팀들 중 하나이다.(각주 : 굳이 과거형을 쓴 이유는 데뷔 전까지의 전투적인 화력과는 달리, 지난 활동 이후로 회사에서는 그 어떠한 떡밥도 던져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저 근데요, 그래서 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요, 지금? 솔직히 그 세계관이라는 거, 말해주기 전까진 전혀 모르겠거든요.” 당장 지금도 다음 스토리를 구상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누군가는 대번에 힘이 빠지겠지만, 사실은 아주 예리한 지적이다. 물론 루나버스가 충성도 높은 코어 팬덤 구축에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십분 인정한다. 실제로 세계관은 새로운 유입을 불러일으키기에 꽤 괜찮은 미끼니까. 어느 정도의 항마력만 있다면야 이 ‘12소녀 판타지물은 분명 흥미로운 컨텐츠이고, 순수하게 그 내용이 궁금해서 웹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어버린 경우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필자 본인의 얘기는 절대 아니고 아는 사람 얘기이다. 아는 사람.) 뿐만 아니라 수용자가 능동적으로 이야기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작업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즐거운 게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으니, 그건 바로 세계관이 어디까지나 철저히 서브컬쳐라는 사실이다. 바다 속에 전복과 새우가 차고 넘쳐봤자 뭍사람의 몸을 적시는 노력 없이는 찜도 구이도 없다.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하지만, 대부분의 대중들은 애초에 이 소녀들의 절절한 사연에 대해 굳이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지금의 루나버스는 어지간한 관심과 노력 없이는 절대로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멀리 와버렸다. 이는 루나버스보다도 훨씬 더 심오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EXO처럼 어마무시한 화력이 뒷받침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아쉽게도 이달의 소녀의 현 위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과연 문제라면 문제이다.(각주 : 이와 관련하여 한 관계자는 이달의 소녀가 폐쇄적인 걸그룹을 지향한다고 밝힌 바 있다. (놀랍게도 실제로 한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걸그룹이 철저히 대중성을 타깃으로 기획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대단히 참신하고 도전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세계관에 대해 그닥 알고 싶지 않아 한다. 이 글의 첫 문단만 읽고도 손발이 뒤틀려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을 수많은 누군가들을 기억하자. 집에서 밥 잘 먹고 건강히 자란 성인이 사실은 안드로이드이고, 초능력자이고, 태양을 삼킨 죄수라니. 멀리서 보면 그저 애들 장난처럼 보이는 이 세계관 놀음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사람은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알고 보면 엄청난 진입장벽인 셈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달의 소녀가 직면한 또 다른 난관은 앞으로의 행보가 그들의 세계관에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팀의 근원적인 정체성부터 이미 철저히 루나버스에 귀속되어 있으므로, 추후에 발표하게 될 곡들 또한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곡은 이제까지 펼쳐온, 혹은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이야기들을 설명해줄 수 있는 단서로서 만들어져야 하고, 선택되어야 한다. 그저 듣기에 좋은곡을 발굴해내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 하물며 부수적인 스토리를 짜내고, 각각의 곡과 뮤비를 그 내용에 끼워 맞추어 (세계관을 모르는 사람이 접하기에도) 설득력 있는 결과물을 선보인다는 것이 과연 말처럼 간단할까. 더군다나 루나버스는 한시적으로 반짝 고생하고 해치워버릴 수 있는 ‘n부작프로젝트도 아니다. 결국 이달의 소녀가 지금의 전략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다시 말해 좋은 음악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각종 세계관 떡밥을 함께 뭉쳐서 던져주려면, 반드시 2, 3, 혹은 그 이상의 품을 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미 야심차게 루나버스를 선포해버린 이상, 이는 멋진 족쇄가 되어 오래도록 그들의 걸음을 무겁게 할 것이다.

이건 비단 이달의 소녀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 열풍의 가장 큰 맹점은 바로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양질의 컨텐츠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내가 결코 그 수가 얄팍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내러티브의 짜임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드러내는 컨텐츠 자체의 퀄리티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계관은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치밀한 서사 구조는 물론이요, 감상자들의 높아진 안목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정교한 수준의 음악과 비디오,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우랴. 컨텐츠가 무슨 박 속에서 뚝딱!하고 나오거나 착한 황새가 냉큼 물어다주는 거라면 퍽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결국 컨텐츠는 전적으로 회사가 지닌 역량의 문제인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혹은 영혼을 갈아 넣는 기획력? 물론 둘 다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부내 나는 사운드를 자랑하는 EXO의 음악, 뮤직비디오보다도 더 공들여 제작한 것만 같은 NCT의 세계관 영상, 시작부터 호쾌하게 99억을 쏟아 부은 이달의 소녀의 데뷔 프로젝트. 요컨대 때깔 좋은컨텐츠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자본을 필요로 한다.

앨범, 뮤직비디오, 안무, 홍보, 헤메스, 식대, 숙소, 그리고 기타 등등등등등. 아이돌 프로듀싱에 있어 돈 나갈 구멍은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미 안정적인 수익 창구가 확보된 대형기획사야 뭐가 무섭겠느냐마는, 중소기획사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익히 알려져 있듯 대부분의 아이돌이 빚더미 위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으며, 어느 회사 대표는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노래를 받기 위해 월세 집으로 거처를 옮겨가면서까지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그런가하면 활동을 지원해줄 돈이 없어 음악방송 한 번 나가보지도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진 팀은 또 얼마나 많았나. 이것이 바로 중소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웬 역할놀이에까지 돈을 써야 한다니. 뒤에서 쫓아가는 것도 버거운 그들에게 이 ()음지문화의 유행은 너무나도 가혹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으려면 시류에 따라야하지만, 높은 문턱 앞에서 어설픈 도전은 또 다시 바스러지고야 만다. 세계관의 딜레마란 이토록 눈물겨운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음악 산업 내의 소비가 대부분 아이돌 시장에 쏠려 있음은 자못 분명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돌 음악에 대한 기대는 끝을 모르고 커져가는 중이다. 예컨대 최근 몇 년 새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자체 프로듀싱타이틀만 봐도 그렇다. 춤과 노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아이돌은 작사/작곡까지 잘하는 짱짱 아티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세계관 열풍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K-pop이 단순히 듣고 즐겁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호시절은 한참 지났다. 더 무겁게, 더 심오하게, 더 거창하게. 동시대 아이돌 음악의 방향성을 정리하자면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음악은 무거워질수록 점점 더 대중과 멀어질 수밖에 없고, 이에 결국 생존의 전략은 또 한 번 바뀌게 되었다. 리스너, 특히 (실질적 구매력이 있는) 코어 팬덤의 수요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이제, 그 이면에 대단한 의미를 숨겨둔 음악과 뮤직비디오가 필요하다. 세계관은 전적으로 회사의 역량에 달려있고, 역량의 다른 말은 곧 자본이다. 하지만 개천은 이미 오래 전에 말랐으며, 용이 떠난 그 자리에서 뱁새는 이제 다리를 찢다 못해 뜯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왕관을 쓰는 자는 누구이고, 무게를 버텨야 하는 자는 누구인가. 별안간 들이닥친 세계관 열풍은 지금,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나.

 

 

< 이야기를 통해 삶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우리들에 대하여  >

Stories We Tell 영화 리뷰

 

 

르네오

 사라 폴리의 Stories We Tell 제목 그대로 ‘”우리들 들려주는 이야기들 구성된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야기의 주제는 사라 폴리가 11 세상을 떠난 어머니 다이앤의 삶이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storytellers) 모두 다이앤을 가까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다이앤과의 추억이라는 공통 분모 때문에우리 묶일 있는 사람들이다. 다이앤의 남편이자 사라의 아버지인 마이클 폴리, 아버지는 다르지만 사라의 형제자매인 조안나, 수지, 마크, (다이앤은 번의 결혼과 이혼 끝에 마이클을 만났다), 다이앤의 형제 자매들, 그리고 연극 배우이자 캐스팅 디렉터였던 다이앤의 직장 동료들까지사라 폴리는 이들을 명씩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어머니에 대해 물을 것이니 알고 있는 이야기 전부(the entire story)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다이앤이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해, 다이앤이 마이클을 만나 결혼하고, 사라를 낳고, 번의 연극을 하고, 암에 걸려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날까지의 일들에 대해, 그리고 남겨진 마이클과 사라가 년간 조금은 우울한 상태로 서로 의지하며 지낸 시간들에 대해,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가며 이야기해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잔잔하고 애틋하게 흘러온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이야기의 주제는 다이앤 사후에 밝혀지기 시작한 어떤 충격적인 비밀로 전환된다. 다이앤이 죽고 나서 가족들 사이에서 사라의 아버지가 마이클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던 , 사라가 자신의 친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고 다이앤과 몬트리올에서 함께 공연했던 제프 보우스를 찾아가기까지 했던 (그러나 사라는 예상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몬트리올에서 다이앤과 친분이 있었다는 영화 제작자 해리 걸킨을 만나 이야기하다 사실은 그가 다이앤의 애인이였음을 알게 , 해리와 차례 만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한 ,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해리와 사라가 부녀 관계임이 확실해진 , 해리는 사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사라 앞에 나서는 것을 다이앤이 원치 않았기 때문에 혼자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왔다는 , 사라는 마이클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사실을 기사로 쓰고 싶어하는 기자 때문에 어쩔 없이 그에게도 사실을 직접 알리게 , 해리와 마이클이 각자 놀라운 사건을 기록하고 다이앤과 함께한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 그리고 사라 역시 어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구상하기 시작한 그들은 모든 일들을 각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조금씩 각색해가며 이야기로 들려준다. 이야기들의 편집자인 사라 폴리는 버전의 이야기들을 뒤섞고 재구성하여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Stories We Tell’ 완성한다.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면, 알고 있는 전부를 이야기해달라는 사라의 요구에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던 인터뷰이들의 표정을 이해할 있게 된다. 어디선가 들어본 같은 통속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놀라움과 상처를 남겼을 충격적인 사건이니 말이다. 마이클이 말한 것처럼 사라는 모두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잔인한 인터뷰어. 다이앤이 죽을 때까지 밝히지 않았던 비밀을 거침없이 파헤치는데, 그것도 가장 충격 받았을 사람들의 입으로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특히 다이앤과 가장 가깝고 깊은 관계를 맺었을 마이클은 이야기의 메인 스토리텔러일 아니라 내레이터로, (사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 자신의 회고록 일부를 직접 읽도록 요구 받는다. (: 사라는 마이클이 녹음실에서 자신이 글을 줄씩 읽어나가는 현장을 지켜보다 중간중간아빠, 방금 다시요같은 디렉팅을 내린다. 조금 짓궂기는 하지만 그의 거침없고 당찬 모습이 너무 좋다.) 

 

사라는 이렇게까지 모두를 동원하여 다이앤의 비밀을 들춰내는 걸까? 해리가 자신이 글을 출판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을 가족들의 사생활을 지켜주어야 한다며 화를 장본인이 이렇게 모든 것을, 모두의 기억을 기록하여 세상에 내놓다니. 인터뷰이들도 다큐멘터리의 의도가 궁금한 의문을 표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가 무엇에 대한 것이라 했지?’, ‘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남의 멍청한 가족사를 대체 누가 궁금해할지 하는 생각이 들긴 ’…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사라의 대답은, 자기도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 입장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우리 모두를 드러내는 제가 정말 당황스러워요. 이렇게 과거를 재건하고 엄마를 재조명하는게 잘한 짓일까요? 모든 것이 엄마가 떠나며 남긴 쓰나미 같아요. 아직도 필사적으로 그리워하며 잔해 속에서 조립하려 하는데 자꾸만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네요. 이제 겨우 얼굴이 보이려 하는데…” 

어쩌면 사라는 자신이 아주 어릴 , 심지어는 이렇게 충격적인 비밀을 남긴 해명도 없이 세상을 떠나버린 다이앤을 간절하게 이해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라에게 다이앤은 아주 그리운 사람인 동시에 가족들도 모르는 비밀을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낯선 사람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지금까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충격과 함께 무수한 질문들이 마치 쓰나미처럼 몰려올 것이다. 마이클이 회고록이 무수한 의문들을 해소하고 다이앤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면, 필사적으로 잔해들을 조립하려 하는 다큐멘터리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이앤과 2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한 마이클과 달리 사라에게는 다이앤과의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다이앤을 알고 지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이앤의 진정한 모습의 단편들이라도 발견하려 시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배우 집안의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사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말들을 해왔을 것인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다이앤의 가족과 친구들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다이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제대로 그려내겠다는 오기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Stories We Tell에는 이제는 흔적만 남은 다이앤을필사적으로 그리워하며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 있는 같다.  

그래서인지 분명 사라를 포함하여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꾼(storyteller)들은 다이앤의 삶을 최대한 그의 입장에서 공정하게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세월 가족들을 속인 다이앤을 원망하거나 격한 감정을 내비치는 대신 담담하게, 종종 유머를 곁들여가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회상할 뿐이다. 어쩌면 다이앤이 죽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에 그토록 침착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침착하기만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다이앤의 입장에서 그의 심정을 추측하고 그의 선택들을 이해하려 시도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다이앤의 결핍과 상처를 헤아려 보기도 하면서 그의 전체를미처 알지 못했던 다이앤의 비밀과 이면들까지 포함하여 - 일관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다이앤을 누군가의 아내 혹은 어머니로서 평가하거나 자신에게 이런 상처를 남겼다고 나무라기보다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지만 번의 실수를 거듭한 개인으로서 그려낸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다이앤의 번의 외도와 이혼은 그의 전체를 구성하는 국면으로 그려질 뿐이다.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감독이 이야기를 편집하고 재구성할 수는 있어도, 인터뷰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 자체에는 관여할 없었을 텐데, 어쩜 이렇게 따뜻하고 성숙한 사람들뿐인지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따뜻하고 사려 깊은 이야기들을 통해 영화는 다이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진실에 근접할 있었을까? 영화 도입부에서 마이클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는다. “본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혼돈이라 있다. 어두운 포효, 맹목, 산산 조각난 유리 잔해, 쪼개진 나무조각,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 빙산에 충돌한 , 아니면 급류에 휩쓸린 배처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멈출 힘이 없다. 시간이 지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때에서야 이야기의 형체를 갖추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이앤의 삶을 회상하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다이앤이 남긴 혼돈에 분명한 형체를 부여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렇지는 않은 같다. 그도 그럴 것이 Stories We Tell 마이클과 해리의 회고록처럼 사람이 1인칭 시점으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마다 고유한 관점을 갖고 다이앤과의 고유한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각자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뒤섞고 재구성한 결과물인 Stories We Tell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는, 혼돈에 가까운 이야기다. 이야기들은 종종 서로 어긋나고 때로는 모순되기까지 하기에, 다이앤의 형체는 이야기들이 쌓이고 겹쳐 놓일수록 점점 모호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다이앤이 모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투명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한편, 다른 누군가는 다이앤이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다이앤은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 메이커로 기억되기도 하고, 항상 불안했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바쁘게 살아간 사람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다이앤이 사라를 임신했을 어떤 심정이었는지(마냥 기뻐했는지), 그리고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이처럼 어긋나는 이야기들을 연속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불일치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언뜻 인터뷰의 내용을 되짚어보면, 사라 폴리는 가족들을 포함하여 다이앤의 주변인들이 (이제는 모두에게 공공연히 밝혀진) 다이앤의 비밀에 대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흥미로움을 느꼈고 그때 비로소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라가 해리에게 보낸 편지를 직접 읽는 장면에서, 사라는 영화의 초점이 이야기들의 불일치에 있다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앞서 살펴 장면에서는 다이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형체를 필사적으로 조립하고 있다고 말했던 그가 여기서는 이야기들의 불일치를 강조하는 걸까? 사실 이상한 점은 두가지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사라 폴리는 이야기의 화자로서는 등장하지 않고 물러나 있지만, 예외적으로 그가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있다. 사라 폴리 자신이 해리나 마이클에게 보냈던 편지를 읽는 장면이나, 인터뷰이의 기습적(?) 질문에 대답하는 장면이 바로 그런 장면인데, 이런 예외적인 장면들에서 그는 다큐멘터리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던진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대답들은 조금씩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앞선 장면도 그런 경우다. 장면에서 사라 폴리는 영화가이야기들 속에서 사람을 되살리려는 시도라고 말하지만, 다른 장면에서는 영화가믿을 없는 기억과 덧없는 진실 대한 영화라고 말한다. 그나마 중립적인 표현으로, 영화가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삶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방식 관심을 두고 있다고도 말한다. 사라 폴리는 다이앤의 삶의 진실을 재구성해내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런 진실을 가려내는 일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은 걸까?

 

Stories We Tell에서는 이처럼 감독의 직접적인 대사에서뿐만 아니라 연출(이야기의 편집과 배치) 측면에서도 단편들을 조립하여 진실을 재구성하려는 충동과 모든 것을 부수고 무효화하려는 충동이 번갈아 나타난다. 예컨대 누군가 다이앤에 대해 A라는 기억을 회상하면, 바로 다음 장면에서 다른 사람이 ~A라는 기억을 회상하고, 다음 장면에서는 다른 사람이 어쩌면 A ~A 모순이 아닐 있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야기들의 충돌과 경합 속에서 다이앤의 형체는 완전히 무너지는 같다가 다시 조금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같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이처럼 조립하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연출은 특히 과거 영상을 담은 장면들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Stories We Tell 다이앤 주변인들의 인터뷰와 마이클의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중간중간 이야기의 내용과 관련된 저화질의 사진과 영상이 삽입된다. 홈비디오 형식의 흐릿한 영상들은 다이앤 생전에 촬영된 영상처럼 보인다. 다이앤이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고 상념에 빠지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영상은 인터뷰이들이 회상하는 내용의 진정성을 입증해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과연 영상이 과거에 촬영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다이앤이 죽은 후에 사라가 제프 보우스를 찾아가고, 해리를 찾아가 이야기하고, 나중에는 마이클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직접 밝히는 장면들이 모두 동일한 저화질 형식의 영상으로 담겨 있는데, 아니, 순간들을 모두 영상으로 담았다는 말인가? 사라 폴리는 그때부터 영화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엄청난 기록 변태인 건가? 이런 의문들이 쌓인 상태에서, 영화가 끝날 때쯤 사라의 언니 조안나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제각각이야. 엄마에 대한 오해도 많고. 각각의 상황과 진실이랄 것이 있으니 과거의 진실을 재구성해야만 . 처음부터 수많은 시각이 존재했으니 답을 없어. 이제 알아냈다 치자 무슨 일이 있었고 엄마가 어떤 분인지 알아도 전부 환상에 불과해.”

  말과 동시에, 과거를 기록하고 사람들의 추억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 영상들이 실은 감독의 디렉팅 하에 배우들이 재연한 연출 영상이었다는 사실이, 촬영현장 전체를 보여주는 영상을 통해 드러난다. 지금까지 영상 이미지들에 기반해 관객들이 나름대로 쌓아 올리고 조립해왔을 다이앤의 형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심지어 관객들은 무엇이 연출된 영상이고 무엇이 실제로 다이앤 생전에 촬영된 영상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여기까지 보고 나면, 사라 폴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다이앤을 되살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실은 다이앤이 남긴 모든 충격적인 진실들을 부정해버리고 싶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누구도 다이앤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심지어는 도대체 이들 누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해낼 없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말이다. 장면에서 마이클은 사라에게 이렇게 묻는다. ‘친부를 발견한 것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은 네가 받은 충격과 깊어질 걱정을 덜어내기 위한 것이니? 그래서 왜곡되는 진실과 믿을 없는 기억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 거니? 친부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사라는 그럴 지도 모른다고, 부정하고 싶은 숨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분명 사라 폴리에게는 다이앤의 비밀까지도 온전히 마주하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다이앤의 진정한 모습을 재구성해내고 싶으면서도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은 모순된 갈망이 공존하고 있는 같다. 

  그러나 혼돈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단순히 다이앤과 관련된 믿을 없는 진실들을 부정하기 위한 방어기제 같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찜찜한 점이 많다. 인터뷰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의 진실로 수렴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이앤이라는 사람에 관한 진실에 근접해가고 있는 같은 느낌, 다이앤이 이야기들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같은 느낌이 분명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하나의 진실을 부정하고 무너뜨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하게 찾아나서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사라 폴리가 영화의 초점이덧없는 진실믿을 없는 기억 있다고 말했을 , 어쩌면덧없음믿을 없음만큼이나진실기억에도 방점이 찍혀 있는 아닐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다이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불변하는 하나의 진실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겠지만, 각자의 상황에서의 단편적 진실들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분명 우리를 다이앤에게 더욱 가까이 데려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아닐까?

 

   어쩌면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언제나 그처럼 덧없고 단편적인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순간순간의 감정과 의도를 오해 받으며 살아간다. 순간 보여준 사소한 단면만으로 나라는 사람 전체에 대해 특정한 평가와 해석을 내리는, 오해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은, 사람에게 순간 보여준 모습과 다른 순간, 다른 이에게 보여준 다른 모습 어떤 것이 진심이고 진정한 나인지 스스로 헷갈리기도 한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고,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할 없는 나를, 남들이 하나의 모습으로 이해해줄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의리에 연연한 거짓말이나 기억의 왜곡이나 오해 때문이 아니더라도, 인터뷰이들이 다이앤과 공유한 유일무이한 경험 때문에라도 이야기들의 불일치는 불가피하고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앤에 대한 하나의 일관적인 이야기를 조립해내는 대신 혼돈에 가까운 상태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어쩌면 다이앤이라는 사람의 덧없는 진실들에 더욱 근접할 있는 길일지 모른다. 저마다 다른 관점의 이야기들이 중첩되면서 다이앤의 형체는 모호해졌지만 오히려 더욱 입체적이게 되었다고도 말할 있지 않을까? 이렇게 봤을 영화가이야기들의 불일치 초점을 두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이야기를 통해 되살리는 시도라는 설명이 이상 모순처럼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런데 사실 누군가를 이야기 속에서 되살린다는 말은 사람을 정확히 기억해낸다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람과 함께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특정한 순간들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고 사람의 잔상을 오랫동안 품고 있는 상태 혹은 실천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Stories We Tell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도 그처럼 다이앤의 잔상을 오랫동안 품고 있는 사람들, 다이앤이 남긴 흔적들을 더듬고 되짚어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덕분에 Stories We Tell 혼돈과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심지어는 기억의 왜곡과 오해들 속에서도 어떤 진정성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인터뷰이들은 모두 다이앤과 함께한 저마다의 경험과 역사를 갖고 있으며, 시간들 속에서 다이앤이 남긴 흔적들은 모두 유일무이하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과 해석을 기반으로 다이앤에 대한 각자의 버전의 이야기를 구성해가면서 흔적을 가늠하고 음미해본다. 다이앤의 어떤 실수들은 이해해주기도 하고, 당시 심정을 추측해보기도 하고, 그의 비밀이 자기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라의 언니 조안나는 어머니의 비밀이 밝혀진 후에도 가족들의 사이는 변하지 않았지만, 딸들이 모두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마이클은 다이앤이 자신에게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했더라도 사라를 자신의 자식으로 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고, 자신이 그만큼 충분한 사랑과 신뢰를 주지 못했음을 되돌아본다. 분명 다이앤의 비밀을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어쩌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고록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덕분에 오랫동안 다이앤이 바랐던 대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삶도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다이앤의 삶을 재평가하고 그가 자신에게 남긴 흔적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각각의 이야기들 속에 담겨 있다. 사라 폴리 역시 다이앤이 자신에게 남긴 쓰나미를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편집하고 재조립한다. 이처럼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전달한다는 것은 과거에 사람이 남긴 흔적을 현재에 곱씹어보고, 현재 알게 사실들을 기반으로 사람의 삶을 다시 재평가함으로써, 안에 있는 사람의 상을 다시금 재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이 이렇게 다이앤의 흔적을 뒤적여 과거를 재평가하고 재구성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아직도 필사적으로 그리워하며 잔해들을 조립하고 다는 사라의 말에서 엿볼 있듯, 무엇보다도 다이앤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일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그리고 사람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동력으로 하는 관계적 실천이라고 있을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인터뷰이들의 모습이 하나씩 비춰지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똑같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다이앤의 흑백 영상이 나타난다. (아마도 영상은 배우였던 다이앤의 오디션 영상인 같다.) 마치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다이앤도 새롭게 되살아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이야기가 다이앤의 죽음에 이르면서 인터뷰이들이 하나같이 말을 멈추고 상념에 빠지거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담긴다. 영화는 순간만큼은 사람도 편집하지 않고,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고 다이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보여준다. 그리고 무거워진 분위기는 마이클과 사라의 부녀지간에 관한 귀엽고 위트 있는 이야기로 풀어진다. 장면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다이앤에 대한 애정이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애정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준다. Stories We Tell 다이앤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다이앤을 기억하는우리들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자신의 치부일 수도 있는 가족사를 거침 없이 드러내면서도 개인적인 감정에 매몰되지는 않는,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방식자체를 무대에 올려 탐구하면서도 이야기들 하나하나의 따뜻한 온도와 유머와 진심 같은 것들을 놓치지 않는, Stories We Tell 적절한 거리감이 좋다. 다이앤이 그립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이앤의 진정한 모습을 되살리고 싶지만 쉽게 흩어지는 진실을 붙잡기 어려운 모호한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사라 폴리의 솔직함이 좋다. 감독으로서 사라 폴리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신촌에는 꿈틀거리는 검은 큐브가 있다 _ 신촌 극장에서 올려진  개의 공연을 보고 

 밤톨뿡

 

1.

 변화하는 검은색 네모큐브. 신촌 극장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기찻길 옆에 있는 작고 검은 공간은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차고에서 티켓을 받고, 옥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부터 연극은 시작된  같다.  많은 계단을 오르다보면 입에서는   소리가 나고 다리는 저려온다. 그리고, 옥탑에 도착하면 눈앞에는 조명과 함께 검은 공간이 펼쳐진다. 관객석의 위치도 항상 변화한다. 원하는 자리 아무 곳에나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공간에 완벽하게 나를 스며들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조명이 꺼지면 아주 천천히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배우는 잔상처럼  있다가 조명이 다시 켜지면  대사를 던진다.

 

 

2. <액트리스 >

 

 <액트리스 > 2029년에 등장한 연기하는 로봇 ‘액트리스  대한 이야기다. 스토리보다는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대부분의 연극은 상상력의 공간인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씨를 뿌리면 무엇이든 자라나는 정원처럼, 배우가 어떤 대사를 뱉고,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에 비해 관객석은 현실적 공간이다. 관객들은 무대보다 낮은 곳에서 무대 위를 바라보며 배우들이 전달하는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구성하며 감상할 뿐이다.

 하지만, 신촌 극장에는 무대와 관객석 사이의 단차가 없다. <액트리스 >에서 관객석과 무대는 그저 하얀색 선으로 구분되며, 배우와 관객은 수평적인 관계에 놓인다. 배우는 하얀색  안과 밖을 상당히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왔다갔다하며 현실과 가상을 옮겨 다닌다. 이는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무대 밖으로 나가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배우가   밖으로 나와도 연극은 계속된다.

 이렇게  선이 무대와 관객석,  극적 상황과 현실을 나누는 기능은 미약하다. 가상의 이야기는 무대 ,  현실의 공간에서도 진행되고 경계는 허물어진다. 어두컴컴하고 작은 공연장 안에서 현실과 가상이 뒤섞였다. 둘이 혼재되면서 소용돌이를 만들고 관객들을 2029년으로 이끈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상황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극이 끝을 향해 달려갈  , 현실과 극적 상황의 경계는 더욱 분명하게 무너진다. 마치 극이 끝난 것처럼 객석에 불이 켜지고 배우와의 대화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하는 장면은 관객을  다시 헷갈리게 만든다. 지금  상황은 현실인가? 아니면 아직 극적 상황인가? 극이 완전히 끝나도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액트리스 >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느낄  있는 경계의 애매모호함을 선사해주었다.

 공간의 애매함뿐만이 아니다. 인간이 연기하는 로봇, 로봇이 연기하는 인간이 등장하며 인간과 로봇사이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액트리스 원이 연기를 하는 메커니즘은 모방과 자기만의 해석을 거치는 것인데, 이는 인간이 연기를 하는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존재한다. 바로 로봇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만큼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액트리스 원은 성수연 배우의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생사에 대한 조금의 느낌을 얻을 뿐이다. 로봇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power off/power on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평생 태어남과 죽음은 평생 해결할  없는 숙제로 주어지며, 그에 대해 끝없이 고민한다. 여기서 로봇 배우와 인간 배우의 차이가 드러나고, 관객으로 하여금 로봇이 대체할  없는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3. <폴라 >

 

 “눈을 감고 바다에 잠겼을   끝에 닿은  차가운 빙하였다. 귀에서는 계속해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극의 분위기가 가장  표현된 대사라고 생각한다. <폴라 >에서 스토리는 없다. 이름 모를 주인공의 이야기 속에서 눈알이 파인 토끼와  잘린 ,  폴라 티셔츠, 청소도구함에서 나온 아이가 등장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대 위에 존재한다. 그것들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구성되고, 관객은 자신이 구성한  상황 안에 빠지게 된다.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배우의 대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파도처럼 가슴을 때린다. 계속해서 곱씹게 되고, 새로운 ()들이 만들어진다.

 <액트리스 > 비해 더욱 실험적인 극이었다. <액트리스 > 스토리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폴라 > 처음부터 끝까지 의미만이 가득한 극이다. 상황은 단절되어 주어지고 개연성은 찾을  없다. 그들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이라고 하면 적절할  같다. 어지럽다. 불확실한 것들과 상징들이 범람하고  안에서 의미를 찾는  관객의 몫이었다.  

 목이 잘린 닭과 눈알이 파인 토끼에게서는 버섯이 자란다.  폴라티는 버섯 모양으로 변한다. 청소도구함의 아이는 출석부에 이름이 없다. 오랜 시간 방안에 멍하니 있으면 그곳은 아무도 없는 방이 된다. 이렇게 우리가 무관심한 대상들은 사라지기도 하고, 그것들에서 버섯이 자라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조차 모르기에 버섯이 자라는 줄도, 사라지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 모를 주인공은 모두가 무관심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한다. 다들 듣고 흘려버리는 노래를 찾으려고 애쓰고, 청소도구함의 아이를 챙겨준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과, 평소에 생각조차 안하는 것들이 나열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관심했던 것들에 대한 사유를 일으킨다.

 <폴라 >에서 공간은 축소되고 확장된다. 작은 케비닛 하나가 무대의 중앙에 있었고, 불이 꺼지자 배우는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손전등을 켰다. 그러자 케비닛의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나와 문의 윤곽만 보이게 되었다. 마치 암흑 속을 걷다가 발견한  멀리의 집처럼. 배우는  안에서 노래를 불렀다. 목이 없이 태어난 소녀가 나중에 머리를 찾았지만 붙일  없었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없는 내용이었지만 닫힌 케비닛 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굉장히 기묘했다. 큐브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움츠러들었다. 문의 윤곽과  사이의 좁고  터널이 형성되었고, 어둠 속에서 찾아갈  있는 곳은   밖에 없었다.

 어느새 케비닛에서 나온 배우는 문틈 사이로 바깥을   있다며 손전등으로 벽을 비춘다.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벽에 비친 손전등 불빛이었다. 손전등이 만든 하얀 동그라미는 케비닛 밖의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 된다.  구멍을 바라보는 순간, 검은 큐브는 좁은 터널에서 케비닛 안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관객들은 케비닛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4. <춤추는 것은 먼지>

   

           

 < 추는 것은 먼지> 암흑 속에서 배우의 몸동작만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에 가까운 작품이다.   관람했는데 문이 열리면서 빛이 들어오는 장면에서 배우의 몸짓이 미묘하게 달랐고 그것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다. 배우는 어둠 속에서 시종일관 무언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눈으로 응시한다. 그러다가도 좌절하고 고개를 숙이지만 다시, 허공을 바라본다. 이렇게 그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는 듯이 움직이지만  공간 안에는 그림자와 어둠, 먼지뿐이다.   한동안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무대 한쪽에 위치한 바깥으로 통하는   사이로 밖에 설치된 조명의 빛이 들어온다. 문을 조금씩 열면서, 배우는 몸을 최대한 늘려 많은 면적이 빛에 닿게 한다. 갈구하는 듯한 몸짓이다. 새어 들어오는 빛을 온몸으로 느낀다. 문이 완전히 열리면 빛이 강해지고 배우는 밖으로 나가 조명 앞에서 움직인다. 관객들이 멍하니 앉아있는 검은 큐브 안에는 배우의 그림자가 엄청나게 커다란 크기로 만들어진다. 자코메티의 <walking man> 생각나는 형상이었고 존재의 슬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배우가 다시 큐브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문은 빠른 속도로 닫힌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배우는 가만히 앉아있고, “있다. 없다. 있나? 없다.”이라는 내레이션이 조용히 깔린다.

 빛을 갈구하는 몸짓을 보여준  번째 공연은, 언어 습득 이전에 경험하던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언어 습득 이후, 빛은 사라져버렸고 어둠과 그림자만이 존재한다. ‘결핍 상태에 놓이게  것이다. 가끔, 언어 이전의 것들을 어렴풋이 느낄  있는 순간들이 찾아오지만, 한계적이며  문은 금방 닫히고 만다. 빛이 더욱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커지고 어둠은 더욱 짙게 느껴진다. 그리고 언어 이전의 세계에 대한 환상도 커진다.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배우의 눈이 초점이 없고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있을  같다.

  번째 공연에서는 문이 천천히 열림과 동시에 ‘꼬로로록하는 물소리가 들렸고, 바깥 세상이 극장 안으로 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배우는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며 밀려나는 듯한 몸짓을 보여줬고 이는 갈망하는 몸짓을 보여줬던  번째 공연과의 확연한 차이였다.

 빛에 밀려나는 몸짓을 보여준  번째 공연은, ‘페르소나(persona)’ 떠올리게 했다. 하루가 끝나고 어둠 속에서 페르소나를 벗는다. 그것을 벗는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것으로 설명할  있다. 아주 길고 무거운 과정이지만,  과정을 거치면서도 진정한 ‘ 존재하는지, 가면을 완전히 벗는 것이 가능한지는   없다. 우리는 그저 암흑 속에서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며 계속 움직이고 가면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가면을 벗지도, ‘ 돌아오지도 못했지만 다시 하루는 물처럼 밀려오고, 뒷걸음질 치지만 다시 잠기게 된다. 우리 모두 가면을  , 물에 잠겨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공통적인 것은 ‘있고 없음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부터 있었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들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동일했다.

   특별했던 점은 신촌 극장 근처에 있는 기찻길에서 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차의 소리가 음향효과인줄 알았으나 아니었고. 우연적인 요소들이 배우의 몸동작과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효과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배우의 퍼포먼스는 연극 무대라는 제약을 벗어나 세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관객 또한 단순하게 연극을 보는 입장이 아니라 어떠한 현상을 바라보는 인간으로서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배우의 행위 또한 단지 연기가 아닌,  어떤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것이다.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몸짓으로서의 연극(퍼포먼스)이었다.

 

 

5.

 이렇게 검은 큐브는 극마다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며, 이러한 변화는 극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한다. <액트리스 >에서는 흰색 선을 사용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었다. <폴라 >에서는 케비닛과 손전등을 통해 공간을 축소시키고, 확장시켰다. <춤추는 것은 먼지>에서는 기차소리와 같은 우연적 요소와, 무대 밖의 공간과 조명을 활용하여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연극 무대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끌어들였다.   곳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버린다. 이러한 공간과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고정성은 신촌 극장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신촌 극장,  검은 큐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잊고 살아가던 것들을 일깨워준다. 로봇이 대체할  없는 인간성, 무관심했기에 무관심한 줄도 몰랐던 것들.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에 우리가 경험하던 세계, 그리고 페르소나.  곳을 찾을 때마다  검은 큐브가 어떻게 변화할지와, 어떤 극적 경험을 선사해줄지 매번 기대하게 된다. 예상할  없기에 더욱 즐겁다. 신촌 기찻길 옆에는 꿈틀거리는 검은 큐브가 있다!

나는  작곡을 하는가

마노

 

#0. 다단조의 발견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작곡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상의 단서가  만한 무언가가 전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어린 시절, 나는 특별히 음악적이라고  수도 없고 아니라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직업 음악인도 아니고 딱히 음악 애호가도 아니었지만, 그때 집에는 모차르트도 있었고, 산울림도 있었고, 키스 자렛도 있었다. 나의 ‘본격적 음악 인생의 시작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피아노 학원에 떨어진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피아노 연주는  체질에  맞았다.

나의  번째 작곡은 어머니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분명치가 않아서 2 혹은 4 때의 일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데,  이유는 (어머니의 기억이 맞는다면)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작업물의 ‘악보 보시고서는 ‘얘는 가르치지도 않은 다단조를 발견했다라는 식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체르니 단계로 넘어간 초등학교 4학년  학원 선생님께서 다단조를 ‘가르치지도 않았을 없으니, 스스로도 믿기 힘들지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처음 작곡이란   것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이와 관련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사실을 알게  계기도 어머니께서 악보든 녹음이든 남겨놨어야 했다는 후회 뒤섞인 회상을 나에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따르면 나는 백합을 소재로  가곡 비슷한 성악곡과 봄을 소재로  피아노 연주곡을 작곡했다고 하며, 누가 가르치지도 않은 다단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소재만 놓고 보면 그게 어떻게 단조랑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보다 다장조 사장조 바장조 정도만 알았을 초등학교 2학년짜리 어린애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팠길래 단조를 ‘발견하는데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란 힘든 법이다.

 이후의 나는 아마도 작곡이란 행위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같다. 아마 자신이  행위가 ‘작곡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나는 곡을 만드는 것보다는 악기를 연주하는 쪽에 조금  흥미를 느꼈던  같다. 제대로 기억이 남아 있는 이후를 돌이켜보면, 나는 오카리나를 굉장히 열심히 가지고 놀았고, 지판에 아무런 표시도 없는 바이올린을 들고 낑낑댔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생물학자가 되겠다라는 결심을  이후에도 나는 취미 삼아 이런저런 악기들을 놓지 않았다.

 

#1. 서태지피타고라스일렉기타

 

피아노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악기를 연주하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까지 나에게 청취의 측면에서 음악이란 ‘들리는 것을 듣는수동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부모님께서는 드라이브를  때마다 산울림 음반 카세트테이프를 트셨다. 나에게는 선곡권이 없었고, ‘드라이브를  때는 당연히 산울림의 음악을 듣는 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런 면에서는 아마 선곡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다.

 

청취의 측면에서 음악을 능동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한 계기는 작곡보다 분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2004년이니 초등학교 3학년 때였고, 정확한 날짜를 검색해보면 5 23일인데, 그날 MBC에서 서태지 블라디보스토크 공연 실황을 방영한 것이다. 일요일을 맞아 별다른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마주한 서태지의 공연 실황에 ( 곡은 아마도 <Heffy End>였을 것이다) 나는 문자 그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같은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에 의해 열심히 듣던 산울림이  음악을 거부감 없이 들을  있게   기반을 마련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여하튼 내가 원하는 특정 음악을 ‘찾아서듣기 시작한 계기는 서태지 7집이었다.

이후  년간 나의 연주와 청취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 같은  있었는데, 한쪽은 애들 장난에 가까운 클래식이었고, 다른 한쪽은 서태지를 중심으로   음악이었다. 여하튼 둘은 나의 음악적 생활에서 커다란  개의 축이었다.  둘의 균형이 깨져버린 , 과학고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면서 자발적으로 악기 연주를 취미로 돌려버린 중학교 때였다. 서태지가 8집을 들고 돌아와 활동하던 2008~2009 사이까지, 나는  음악을 열심히 들었지만 그걸 내가 연주하게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렉트릭 기타에 입문하게  계기는 아마도 가장 황당하게 느껴질 텐데, 피타고라스의 정리 때문이다. 원체 ‘체질적으로 수학을  했던 나는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제집 같은데 으레 있는 ‘읽을거리같은 데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점토판에 피타고라스  여럿(적어도  자릿수 단위의) 남겨놨다는  읽고서 ‘고대인들도 하는   나는  하고 있지?’ 하는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서는 불현듯 ‘일렉기타를 배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수적인 질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니, 너는 다른 길을 찾아보라 피타고라스의 계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 고등학교 – 음악적 암흑기

수학적 상상력은커녕 수학적 사고력 자체가 심각한 정도로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나의 생물학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향한 항해는 나름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표때문에 음악이  뒷전으로 밀려버리긴 했었지만 말이다.

일단 가장  문제는 중학교 이후 가벼운 취미로 전락해버린 다른 악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심지어 ‘메인악기로 삼은 일렉기타 연주마저 도저히 참고 봐줄  없는 실력이었다는 점이다. 결과 고등학교 밴드동아리에서 떨어졌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사건이 내게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음악은 취미로 하면 되지하는 생각을 용납할  없게  결정적 계기가  사건이 아닐까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흔히 ‘모던록으로 분류되는 초기 넬이나  같은 암울한 음악을 많이 들었었다. 밴드에서 떨어진 나의 취미 생활은 시를 쓰는 거였는데, 말이 작시지 실상은 작사에 가까웠고,  솔직히 말하자면 ‘가사 바꾸기 놀이 가까웠다. 여하튼,  시기는 여전히 음악에서 가사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운문 창작에 매달리던 때였다.

 

#3. 단과대 밴드

새내기 시절 활동 기수로 거의 살다시피 했던 단과대 밴드는, 내가 본격적으로 일렉기타를 연주하게  계기이기도 하고, 내가 음악적으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학기 중에는  5 하루 3시간, 방학 때는  5 하루 8시간씩 연습을 했는데, 지금 보면 이걸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기간 사이에 나는 청취와 연주 양쪽 모두에서 음악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유명한 국내 록이나 겨우 듣던 꼬맹이가 프로그레시브  덕후로 발돋움한 시기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동아리도  들어갈 수준의 취미 삼아 깔짝대던 연주가 밴드에서 합을 맞출  있는 수준으로 적지 않은 도약을  시기이기도 하다.

<새벽감성> (2014)(각주 :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dawn-emotion-gp-demo, 커버 이미지의 QR 코드를 스캔하면 연결됩니다.)

 

무엇보다 작곡 측면에서 이때가 중요한 , 본격적으로 ‘자작곡 만들어 보려고 시작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밴드 하면 자작곡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카피 겨우 하는 수준의 아마추어 밴드에서 끊임없이 자작곡이랍시고 뭔가를 들이밀었다. 처음에는 코드 진행과 간단한 녹음 정도였는데, 명확한 악보가 없으면 연주를   없다는 저항(?) 부딪혀, 나중에는 모든 파트의 기타프로 악보와 거기서 추출한 끔찍한 수준의 음원까지 만들어서 들고 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곡의 수준과 멤버들의 취향 모두에서 결코 합격점을 받을 수는 없는 결과물들이었다. 아쉽게도 단과대 밴드 활동 기수를 마무리하는 공연에서까지 자작곡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시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4.  입대  방황기

지금  시대에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음원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런 쓸데없는 부분에서 묘하게 보수적인 나는 형식을 확정하는 것까지를 ‘작곡’, 이후의 과정을 ‘작업으로 끈질기게 구분해서 부른다.  글을 쓰다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형식 ‘(음악) 재료라는 단어를   번도 명확하게 정의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는데, 앞으로 ‘형식 일단 ‘어떤 노트를 어느 시점에 연주하면 되는지를 확정한 정도로 해두자. 유의해야  점은  ‘형식 실제의 ‘소리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청각 없이 시각만 가지고도 악보를 통해 확인할  있는 정보들이 ‘형식 해당할 것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예술철학(특히 음악철학)에서 통용되는 ‘형식 비교하자면  생뚱맞지만  혼자서는  쓰고 있는 ‘(음악) 재료라는 단어는, 신입생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미학 뭔지도 모르고) 학점 채우려는 생각으로 듣게  교양 강의에서 접한 아도르노에 한창 심취해 있을  내용물은 거의 흡수하지 못하고 껍데기만 주워다가 멋대로 의미부여를 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단어는 정의하기가 더더욱 힘든데, ‘음색을 포함한 실제의 소리정도의 부족한 설명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줬으면 한다. 그림으로 거칠게 비유하자면, 스케치에 해당하는 형식을 만드는 것이 ‘작곡’, 이후 물감에 해당하는 재료를 치덕치덕해 무언가 내보일만한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을 ‘작업이라고   있겠다. 여기서 하나 주지시키고 싶은 점은, 분명 토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사 문학의 영역이지 ‘음악 재료 간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소리를 했냐면, 단과대 밴드 활동 기수가 끝난 이후, 거의 2  동안 개인적으로 심각한 방황을 겪는데, 그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기의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그때까지 인생의  축이었던 생물학과 음악이 균형을 잃고 깨져버린 것이었다. 여기서 ‘생명과학 아닌 ‘생물학으로 굳이 옛날 단어를 쓰고 있는 이유는, 내가 꿈꾸던 미래가 19세기까지나 유효하던 ‘박물학자였지 현대의 ‘생명과학자 아니었다는 사실을 전공 진입한 이후에나 깨달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건과 내면 갈등들을 요약하자면, 현대의 생명과학에 적응하고자 했던 시도와 음악을 취미 삼아 하는 일로 돌리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정도로 정리할  있을 것이다. 여하튼,   가지 시도가 거의 실패했음이 명확해지는 시점에서 나는  입대로 인생 1막을 내려버리고 잠시간의 인터미션을 보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단과대 밴드에서 독립 아닌 독립을  이후, 아무 데도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던 2  사이에도 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우선 ‘형식을 만들어가면 재료를 채워 넣는  연주자와 엔지니어들이 해주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으로부터  발짝 양보해 ‘작업 하기 위한 각종 음향장비와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배웠다. 배우는 과정은 거의 독학에 가까웠는데,  시기의 자작곡들을 보면 재료에 천착하고 있다는 특성을 띤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없다. 서투른 녹음을 통해 확보한 ‘재료 가지고, 별다른 계획 없이 음악이랍시고 뭔가 만들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Polar Twilight》 (2015-2016)(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sets/2015-16-polar-twilight)

 생활을 하던 시절에 휴가 나올 때마다 잠깐씩 작업했던 음원들을 포함해서, 대체로 하드에 봉인되어있는  시기의 음악들은 대체로 보컬 없는 연주곡들이며, ‘프로그레시브  내걸고 있지만 이건 내가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솔직히 누군가가 장르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해 들어온다면 이길 자신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기에는 특히 컴프레서로 짓누른 스네어 드럼의 질감을 싫어했었고, 이걸 음악 재료에서 스네어 드럼(나아가  밴드의 드럼 세트) 제외해버리는 말도  되는 방법으로 해결했었다. 물론 드럼 없는  음악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나의 결과물은  밴드 편성을 위한 음악이면서도 실제로  밴드에서 연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계획 없이 재료를 다층적으로 쌓는 방법 역시 실제 연주 가능성을 떨어뜨렸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어느  저녁노을이 내게 말을 걸었어>(각주 : https://youtu.be/pqp1AXGUuKM) 실제로 연주하려면 7대의 일렉트릭 기타가 필요하다.

장르 논란은 일단 젖혀두고,  시기의 자작곡들에서 내가 견지하던 것들이  가지 있다. 우선 ‘사람이 실제로 연주할  없는 음악을 만드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라는  기타리스트 특유의 고집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사람 가상의 연주자를 상정하는 편이 옳았겠지만, 그때는 ‘혹은 ‘주변 사람정도를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전제했던  같다.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재료만 사용한다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도 내걸고 있었다. 이는 일종의 직업으로 보수를 받으면서 하는 일이라면 절대로 내걸어서는   간판이지만, 당시에는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라면 취미로 하는 것이 낫다 것을 스스로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반쯤은 손발을 묶는 기분으로 그것을 내세웠던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재료들만 엄선해 골라 담듯이 만든 곡으로 오카리나를 위한 연주곡인 <하늬바람숲>(각주 : https://youtu.be/KqQQW7U9xio) 있는데, 이건 입대  마지막으로 작업한 곡이기도 하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기질이 있지만) 당시의 나는 ‘보컬이라는 재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기의 연주곡들은 초보적인 수준 때문에라도 들어줄 것이  되지만, 자신도 별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일종의 자족적 행위에 불과했다. 그래도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만약 내가 조금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아마도 이런 부류의 음악을 추구하는 작곡가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5. 인터미션

 생활을 하는 동안은, 당연하게도 별다른 결과물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과학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확실히 결정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고 자평한다. 그래서 뭐가 되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요원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보랏빛에 대한단상,  번째> (2016)(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about_violet_part1)
<보랏빛에 대한 단상,  번째> (2016)(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about_violet_part2)

<원시림> (2017)(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virgin_forest)

 시기는 지금의 내가 확립되기 위한 일종의 준비 시기였다. 지금의 메인 기타와 보컬로이드를 구매하기도 했고, 내가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기도 했다. 여전히 서태지와 포큐파인 트리와 wowaka 합치되는 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가사 없이 그저 재료의 아름다움에 천착하는 단편적인 음악과 마치  편의 소설과 같은 CD   분량의 대곡이라는 모순적인  개의 축을 화해시킬 방법 역시 찾지 못하고 있지만, 평생에 걸쳐 이뤄내야  목표를 설정한  정도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6. 현재

 

<나비의 일생 2018> (2018)(https://youtu.be/ABbKb7af3A4)
인터미션을 마치고 돌입한 인생 2막에서, 가장 처음  일은 방황기 시절 최고 걸작인 <나비의 일생> 들어줄 만한 수준으로 다시 작업하는 일이었다. 일종의 개인적인 ‘과거 청산같은 것이었는데, 언젠가 다시  지점으로 돌아가게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빙정> (2018)

 

이후로는 보컬로이드를 사용한  음악의 작곡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번째 곡은 <빙정>(https://youtu.be/JqdmBje6k98)이었는데,  곡은 단과대 밴드 시절 자작곡  하나인 <새벽감성> 고등학교 시절 썼던 동명의 시를 가사로 붙였다. <새벽감성> 직접 가사를 붙이는 행위는 곡에 담긴 다층적인 감성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해, 보컬리스트가 읽어낸 감성을 바탕으로 작사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완성을 미뤄두었었다. 결국 보컬로이드를 사용하게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본인이 노래를 부르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는 음악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  번째 곡인 <곁에>(https://youtu.be/_j8REEY8zN0)역시 단과대 밴드 시절 만든 곡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새벽감성> 초기 넬의 아류작이라면, <곁에> 못을 따라 해보려다 실패한 작품이라고 자평할  있을  같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듣던 음악이 단과대 밴드 시절 작곡을 시작할  단초를 제공했었다고   있겠다.

<당신을 위한 이세계행 트럭이 대기 중입니다> (2018)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곁에> 가사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기보다, 곡을 만든 다음 뭐라도 필요해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같은 느낌이라는 혹평을 듣고 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당신을 위한 이세계행 트럭이 대기 중입니다>(https://youtu.be/l8fzDVvdCEM), ‘하고 싶은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곡이 나오기 전까지 내가 만든  어떤 곡과도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이세계행 트럭>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시도해본 적은 없었던 ‘소설 같은 음악  번째 결과물이기도 하고, 가장 록적인 분위기의 음악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세계행 트럭> (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주변 지인 몇몇뿐이지만) 논란과 호응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고, 심지어는 앞으로 내가 만들 음악의 성격을 구속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까지 했는데, 의외로 좋아할  같은 사람은  반응이 없었고, 싫어할  같았던 사람이 마음에 든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해서 당황하기도 했었다. 여하튼 <이세계행 트럭> 앞으로 내가 만들어나갈 음악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분명하게 밝힐  있을  같다.

 

 

#7. 나는  작곡을 하는가?

<이세계행 트럭> 이후로도 곡을 계속 만들고는 있지만, 아직 의미를 자평하기 이른  같기도 하고, 그보다는 지금까지 말한 선에서 각각의 곡들에 대해 정리할  있을  같다. <보랏빛에 대한 모티브>(https://youtu.be/h3iJYaaTQbE) 방황기 시절 음악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에 가깝고, <거미의 사랑>(https://youtu.be/ONFwzrQUC_I) 소설 같은 음악의 견지에서   ‘1970~80년대의 정통 프로그레시브 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였다. <사운드의 배반>( https://youtu.be/4J7qEHN4-l4) 음악이라기보다는 악의 없는 농담 같은 일종의 퍼포먼스인데, 르네 마그리트,  케이지, 아서 단토의 영향을 받았다.

 오래전부터 ‘마노라는 이름을 내걸고 음악을 만들고 있지만, ‘마노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장 명확한 답을 하기가 힘들다. 앞서 밝혔듯이 스스로의 청취연주작곡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프로그레시브  애호가로서 나는  편의 장편 소설 같이  짜인 음악을 추구한다.  밴드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로서 나는 언어 없이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 재료를 만드는 것에 천착한다. 작곡가로서 나는  둘이 화해하고 합치될  있는 지점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배워버린 과학적 엄밀성과 철학적 미학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보니  글이 되었지만, 사실 좋아서 하는 일에 별다른 이유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다단조를 발견한  같이, 의미는   없지만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찾는 일일지도.

내가 모르는 용기

: 영화 <한공주> 관하여

 

빙구

 

  

 매번 다른 답변을 하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이를테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그렇다. 종종 영화 <한공주>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거나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 나도  영화를 보는 일이 그다지 기쁘지 않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것은 고단하고 괴롭다. 그러므로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 <한공주>  마음에 남기는 것은 상처나 비극이라기보다는 어떤 종류의 강인함이다.

 

 우리가 영화 내내 보는 것은 강인한 한공주라기보다는 연약한 한공주다. 괴로워하고 도망치고 위축되고 전전긍긍해 하고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한공주.  영화는 부당한 패배와 모진 상처로 점철된 그의 삶을 집요하게 담는다. 삶이 그에게 주는 위협은 너무나 촘촘하고 무자비해서 그가 한강에 몸을 던질 무렵이 되면  모든  끝나서 차라리 다행스러울 정도다. <한공주> 본다는 것은 일면 세계와의 싸움에서 아주 작은 승리조차 거두지 못하는 어린 소녀를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하지만  고통을 함께 따라가며 한공주를 관찰하다 보면 그가 단지 괴로워하고 감당하는  외에도 줄곧 어떤 행동을 지속한다는 것을 발견할  있다. 그것은 수영을 배우는 것이다. 결코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수영한다. 서툴고 크게 첨벙거리며, 맹렬하고 절박하게 숨을 몰아쉬며. 영화는 한공주가 이렇게 절실하게 수영을 배우는 이유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 한공주의 투신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슬며시 다시 상기시킬 뿐이다.

  물에 빠진 한공주의 몸이 물결에 떠밀려 위쪽으로 사라지는 동안 영화는 친구 이은희(정인선 ) 목소리를 빌려 그에게 묻는다. 그것은 이전에 수영을 배우는 한공주에게 건넸던 질문이다.

 "공주야,  그렇게 수영을 열심히 ?"

 한공주는 대답한다.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 . ...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이어 한공주가 친구들과 함께했던 짧고 찬란한 순간이 짤막하게 음향으로 삽입된다. 그것은 불과 며칠  연예 소속사로부터 받은 반가운 연락에 친구들이 환호하던 소리다. 한공주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들이 잔물결 위로 환하게 반짝거린다.  소리와 겹쳐서 한공주의 것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다시 강물 위로 떠오른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희미한  형상이 강물의 방향을 거슬러 힘차게 헤엄쳐 나가면서 영화는 끝난다.  

 다소 불분명한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한공주가 죽지 않았기를 깊이 바라게 된다. 그러 사실성 없는 희망을 줄곧 차갑게 차단해온  영화의 끝에서 돌연한 행운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우리는  바람이 얼마나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반쯤은 알고 있다. 객석에 앉아서 한공주가 죽지 않았기를 바라는  누구도 한공주의 남은 삶을  살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살아주기만 바라기엔 삶이 그에게 얼마나 모질었는가.

 

 반면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냉소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한공주는 죽었고 세상으로부터 패배했으며, 그런 환상은 그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런 단언은 너무 단편적이고 손쉬울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무익한 것이라 여겨진다. 황정은의 말을 빌려오자면 ‘삶이란 원래 이렇고 세계란 원래 이래하는 식의 단념은 이미 세계에 충분히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낙담은 그저  다른 낙담을 퍼뜨리는 일일 뿐이라고, 이천십사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그런 마음은 ‘파렴치한것이라고. (각주: 황정은·김봉곤 대담, 「새로운 원고지」, 『문학동네』 2019 여름호 통권 99)

 

 그렇다면 <한공주>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진 영화인가.  영화는 허위적인 희망을 경솔하게 내어주지도 않고, 동시에 한공주의 죽음을 ‘파렴치하게확정 짓지도 않는다. 따라서  영화가 갖는 어떤 진실은  이상 한공주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사실관계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가 어떻게  장면에 도달했는지를 상상해볼 때에 비로소 일별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공주> 물에 잠겨 사라지는 한공주의 실제적 몸과 강을 수영하는 한공주의 허구적 몸을 교차시킨다. 그와 더불어 한공주가 수영을 배웠던 이유 역시 관객에게 뒤늦게 알려진다. 그것은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 인데,  말은 우리에게 다음의  가지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나는 한공주의 마음에 언제나 죽음이 육박해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토록 가까운 죽음을 넘어 너무  삶으로 돌아가기를 몹시 바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공주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 끝에 언제나 가능해 보였던 것으로서의 죽음과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으로서의 삶이 한공주를 두고 각축한다.

 

 현실에 가까운 것은 물론 죽음일 것이나,  자리에 영화가 놓아두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수영하는 한공주의 모습이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영화는 한공주가 사는 내내 가장 치열하게 했던 행동을 다시금 상기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괴로움과 고통에도 삶을 바라고 예비하던 한공주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한공주가 죽음을 거슬러 이쪽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영화의 마음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영화는 영화  한공주에게(혹은  영화를 보고 있을 세상의 다른 한공주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같기도 하다. 여기 내가 너의 고통을  보았다고. 그리고 화면 밖으로 사라져버린 다음에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의 마음이 바뀌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진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그러나   마디의 마음을 비추기 위해서  영화는 필연적으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한공주를 모두 통과하지 않으면  된다. 죽음 이후에도 삶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할  있으려면, 먼저 죽음의 문턱에서 생사를 오가는 한공주에 이르지 않을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름이 <한공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영화는 한공주에게 건네고자 하는   마디 말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한공주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내가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런 용기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 위해  고통을   살아버리려는 다정, 삶이 주는 두려움과 통증을 모르지 않으면서 타자의 두려움과 통증에 또다시 감응하는 기꺼움이 가지는 용기. 그리고 매번 그것에 깜짝 놀라고 마는데, 내가 모르는  용기가 너무 낯설고 부드럽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각주: 이런 종류의 용기에 관해 양효실은 이렇게 적었다. “환상 없이 현실을 끌어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용기 주체적인 자아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 그러므로 그냥 발휘하기만 하면 되는 내적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용기는 그런 주체성이나 능력을 잃는 , 네게 함입되기 위해 내가 최소화되는 무력감을 뜻한다. 흔한 말로 가진  없는 사람들의 생존법 같은 것이다.  용기는  잃을  없기에 어디든 가는 사람들의 긍정법을 가리킨다.” 양효실, 『불구의 , 사랑의 』, 현실문화, 2017, p. 44.)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난처하다. 남의 고통을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소비하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어떤 인물을 짓밟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어른들의 가혹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채로,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의 강인함이니 삶이니 하는 말을 적는 것은 사실 절반쯤 기만인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언제나 영화 <한공주> 대해서 조금   말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들에 종종 기대기 때문이다. 이따금 사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대체로  아픔을  이겨내지는 못하면서 지낸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는  시간을 통과하기 위해 용기를  적도 있었다.  용기의 일부는 영화 <한공주>에게서 받은 것이다. 언젠가 그런 용기가 되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모르는 용기에 관해 적는다.

 

 

당신이 알려준 기다리는  

임영웅 연출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보고

 

시나인

   세상의 전부가 자신이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만나게 되는 순간으로 알려진 사춘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합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당시 저는 세상의 중심이 제가 아니라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괴로움을 견뎌내느라 참으로 버거웠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진학 이후,  자신과 타협하면서 애써 숨구멍을 마련하고 숨통을 트일  있었습니다. 사춘기를 무사히 극복하고 성장한 것은 아니었지요.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작은 사람이라고 자각하면서 스스로를 위한 안식처를 마련했을 뿐이었습니다.

   자존감을 잔뜩 움츠러들게 만드는  자위적 안정은 저에게 이상한 버릇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능수능란하고, 세상에 온전히 적응하며 모든 상황 속에서 넉살 좋은 사람들을 보면 감탄을 금치 못하게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  주어진 역할을 어려움 없이 매끄럽게 수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고민 없이, 자신을 믿고 무엇이든지 쉽게 해결하고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완벽해 보이는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본 것도  보기에 옥에  하나 없는 삶의 모습 때문이었겠지요. 이렇게 저는 어른이란 무릇 고민도 불안도 없는  완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대학생이 되고 보니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은  커져버렸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근사한 어른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들 저마다의 삶을 멋지게 살고 있는  같았습니다.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어느새 스물다섯이나  저를 뒤돌아보았지만 저는 변함없이 그대로였습니다. 어렸을 때엔 지금쯤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여전히 ‘배워야  것이 많은 사람은 완벽할  없어.’라는 얄팍한 타협 뒤에 숨은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고민이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고민을 끝내지 못한 저를 애써 모른    같아  안식처가 사실은 도피처가 아닌지 의문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만   같은 조급함을 느끼던 요즘이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눈을 감고서도 이어지는  답답한 마음은 악몽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당신을 만난 날에도 저는 그랬습니다. 어른이 되어야한다는 고민이  어깨 위에 앉아있었습니다. 당신을 충분하게 감상하고 최선을 다해 완벽히 해석해내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난 순간  바람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2  앞자리에서 당신을 내려다본 저는 당신의 능숙한 모습에 압도되어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보았기에 전체적으로 완벽한 짜임새와 매끄러운 흐름을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3시간이라는  시간동안  눈과  그리고 마음까지 사로잡으셨습니다. 언제나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외치는 블라디미르(이하 디디) “ 그렇지.”라고 답하는 에스트라공(이하 고고) 주고받는 모든 대화에는 사랑스러운 운율이 넘쳤습니다. 글로는 표현할  없는 음의 고저와 언어의 장단이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배우들의 연기는 어색함이 없이 유려했습니다. 마치 광대 같은 디디와 고고의 과장된 몸짓과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는 점점 익숙해져서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  배우들이 천천히 걸으며 등장하자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 배우들 덕분에 제가연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마치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완결된 연극이었기에 저는 당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외에는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현실성도 맥락도 없는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가 웃음을 유발하고,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의상도 웃음을 연발케 했습니다. 당신을 보는 내내  또한 많이 웃었습니다. 구두를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다시 그것을 신는 고고,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모자를 벗어서 안을 긁어대는 디디, 방금까지 쥐고 있던 시계가 없어졌다며 찾는 포조, 괴상하고 단순한 춤을 추는 럭키. 이런  광대의 모습과 행동은 자연스레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제가 사랑하지 않을  없는 기억을 선물해주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완벽하게 보여준 당신의 능력은 제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어른이었습니다. 연극 티켓을  쥐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티켓 위에 쓰인 50주년이라는 글자에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시간 동안 자연스레 당신 속에 존재하며 함께 시간을 지내온  배우들의 시간들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살았던 시간의   .  시간 동안 함께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고도는 무대  디디와 고고에 의해서만 기다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나름의 고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0주년을 맞이한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모습에 만족하신가요?” 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에게 찾아왔던 소년처럼 대답하리라 감히 생각합니다. “오늘 밤에는  오고 내일은  오시겠다고 전하랬어요.”

   당신은 제가 보기에 이미 충분하지만, 지금도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나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란 생각에  또한 기다리다 보면 만족스러운 자신을 만날  있겠지 라고 안도했습니다. 고민으로 짓눌렸던 어깨가 조금 가벼워져 안식처의 존재가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른에 대한  생각을 완벽한 당신으로부터 확인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포근했기에 하루가 흘러가기  다시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곳에서 보았던 처음과 달리,  번째 만남에서 저는 당신을  누구보다 가깝게 마주할  있었습니다. 무대 바로 앞에 앉은 저는  당신을 만날 생각에 설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과 너무도 가까워진 탓일까요. 그저 완벽하게만 보이던 당신의 이야기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이제야 당신이 무대 위에 심어 놓은 나무  그루가 보였습니다. 우뚝  있는 굽은 소나무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연륜이 느껴졌습니다. 곧고 수려하게 자란 소나무는 사람들이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 베어가 버리고,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나무는 분재용으로 송두리째 뽑혀져 버린다고 합니다. 때문에 못난 소나무만이 모진 고생을 견디며 그곳에 머물러 오래도록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못난 소나무와  닮아 오랜 시간 그곳을 지켜낸 앙상한 나무처럼 보였습니다. 당신이   비루한 나무를 심어두었는지 이제야 궁금해졌습니다. 나이  나무도 근사한 모습을 갖지 못한  여전히 삶의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의미일까요. 어른의 완벽한 모습에 대한  환상에 작은 파동이 일었습니다.

    당신이 시작한다는 종소리가 울리고 암전되었습니다.  짧은 순간이 마치 악몽과 현실의 경계에서 불안해하며 제가 견뎌내던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조명이 서서히 켜지며 현실에서 고고와 마주했지만 꿈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혼란에서 벗어나 못난 나무 곁에 앉아있는 고고에게 초점을 맞추며 정신을 차릴  있었습니다. 그는 낑낑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두를 벗으려 버둥거렸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서 달려오는 디디는 반가워하는 손짓으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인물의 대화에 집중하려고 하였으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의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어제는 분명 웃게 했던 광대를 연상케 하는 행동들이나 느닷없는 대화가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초조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던 고고의 걸음걸이는 사실 세상에 발을 딛는 자체가 불안했기 때문이었고, 시원하게 웃지 못하는 디디의 모습이 실제로는 고통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점령할 것처럼 강인했던 포조가 하루아침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장님이 되며 찾아온 불안함과, 폭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던 럭키가  순간에 벙어리가 되어버리면서 느껴지는 허무함은 완성된 것처럼 보이던 당신조차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을 보면서  사람이 지내왔을 수많은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있는 일이라곤 고도를 기다리는  뿐이기에 무료하고 지루한  날들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안함을 애써 웃음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나누었을 수많은 대화와 고도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고통에 사무쳐 무의미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당신이 보여준 디디와 고고의 이틀이라는 시간은 다르지만 결국 비슷했습니다.  사람이 고도를 기다리는 곳으로 포조와 럭키가 찾아와  무료함을 달래주고, 그들이 떠나가면 해가 저물어 노을이 집니다. 고도가 오늘이 아니라 내일 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소년이 찾아왔다가 그들을 떠나면 그렇게 밤이 찾아옵니다. 디디와 고고는 “이제 가자.”라고 서로를 재촉하지만, 나무 아래에 고개를 떨구고 멈춰버립니다. 고도는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멈추었더라도 기다림에 지쳐 포기하거나 나무에 목을 매다는 선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날이 밝으면  사람은  자리에서 다시 고도를 기다릴 것이라 예감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만남에서의 웃음과 안식이 자기기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어른이라고 감탄한 존재는 그저 겉모습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말이죠. 완벽해 보였던 당신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에 고뇌하고 혹시나 오지 않을지도 몰라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엉뚱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들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서 저는 어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은 어린 아이를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눈에는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잠자리에 들며 저처럼 고민을 하겠지요.

   기다림은 반복되지만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것을, 매일같이 웃어 보이지만 갈등하고 고민하며 불안한 밤을 맞이하는 디디와 고고의 모습으로 보여주었지요. 이를 통해  안식처가 도피처였음을 깨달았고 제가 여전히 고민하는 것은 사춘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니란 사실 덕분에 후련해졌습니다. 저도 이상하고 아름다운 당신처럼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이상 숨기지 않으려 합니다. 작은 시간 속에서라도 불안한 자신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진짜 첫걸음일 테니까 말입니다. 당신은 디디가 소년에게 하는 말을 빌려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나를 만났다고만 .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모든 것이 불확실한 대화로 채워졌던 당신 안에서 이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분명히 만났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수없이 많은 불안을 느끼고 하염없이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진짜 어른의 이야기가 저에게 응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히 마주할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불안이든, 고민이든 말입니다.

   당신을 만난 후에 저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약속한 시간보다 30 정도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기에 숨이 트이는 기분을 들게 합니다.  시간을 그대로 느끼고,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저를 애써서 감추려 하지 않으면서요. 당신이 알려준 기다림을 위해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스스로 선물하고 있습니다. 그저 작은 여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순간들이 쌓여 당신이 무대 위에 심어 놓았던 나무처럼 많은 것을 겪고 견디어낸 사람으로, 완벽해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고민하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어른으로 성장할  있겠지요. 당신의 가르침을 받을  있었던 봄날의 소중한 이틀을, 제가 진정으로 사랑할  있는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까지 기억하겠습니다.

2019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스치던 어느  . 

이달 소녀,  ‘ 소녀

: ‘루나버스 통해 살펴본 아이돌 세계관의 딜레마

 

선데이빽

 

 

  지금부터 나는 아주 황당한 사실 하나를 당신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먼저 TV 켜고, 무엇이든 좋으니 당신이 아는 음악방송  하나를 틀어보라. (TV 없다면 유튜브의 K-pop 섹션에 들어가도 좋다.) 아마 당신은 ‘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다들 어디에 숨어있었나싶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아이돌 친구들을 마주하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보라. 왜냐하면 그들  상당수는 사실 사람이 아니거든.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고? 아니, 이건 사실이다. 당신의 귀에 너무나도 익숙한  노래는 사실 태양계 외행성으로부터 날아온 외계인들이 부른 것이고, 화면 속에서 웃으며 춤추고 있는  소녀들은 한때 황도 12궁의 별자리들을 대표하는 존재들이었지만 지금은 마법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서로의 꿈을 매개로 이어져 ‘네가 나고, 내가 너인상태에서 무한히 확장하는 미지의 소년 무리도 있다. , 하나만  귀띔하자면    거리에 널린 통신사 대리점들의 입구를 장식했던  입간판의 주인공 역시 실은 날개를 숨긴 천사다.  지독한 허언에 속이 울렁거려  장을 얼른 스킵하더라도 나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이건 말도  되는 허언, 음모론이 절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려준 비밀들은, 모두 각자의 회사에서 대외적으로 공인한 사실이니까.

 

  작금의 K-pop 트렌드는 누가 뭐래도 ‘세계관 그에 따른 ‘n부작시리즈이다. 반도를 휩쓴 후크송 열풍에 너나할  없이 ‘용감한그분, ‘신사동그분, 혹은 그밖의 히트송메이커들을 등에 업고 단발적인 흥행만을 노리던  언젠가의 기획 방식에 비교하면, 아이돌 음악은 분명 진화해도 한참 진화했다.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디스코그래피 내의 유기성을 견고히 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으며, ‘세계관 바로 이러한 움직임에서 비롯된 궁극의 산물이라고도   있다. 음악과 안무의 차원을 넘어, 전체를 아우를  있는 특정한 내러티브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다른 곡들 간의 연관성과 당위를 밝히려는 시도인 것이다.

  물론 결코  수가 얄팍해서는  된다. 월드와이드를 향해 뻐렁차게 달려 나가고 있는 BTS 물론 NCT, 이달의 소녀, 우주소녀, 여자친구, 온앤오프, 드림캐쳐, 원어스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수많은 아이돌 팀들이 모두 저마다의 크고 작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는 분명 야심차게 벌여놓은 판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무너지고야 마는 케이스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이 구축한 세계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방대하다. 모종의 이유로 위기에 빠진 멤버들이 서로를 구해내고 갈등을 해소하는 애처로운 스토리는 이미 클리셰가 된지 오래이며, 마법, 우주, 초능력과 같은 판타지적 요소의 개입도 이제는 예삿일이다. 그리고 길어야 10분을 넘지 않는 뮤비에는 도저히  구구절절한 내용을  담아낼  없었는지, 세계관은 이제 콘서트의 VCR 영상으로,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새로운 형태의 비주얼 필름(각주 : NCT ‘NCTmentary’ 시리즈.)으로, 그리고 웹툰을 비롯한 각종 2D 컨텐츠(각주 : BTS ‘화양연화 Pt.0 <Save Me>’.)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단언컨대 이는  시대에 걸맞는 ‘진화된 형태의 떡밥이다. 뮤비와 화보에 등장하는 각종 오브제들을 발견하고 (사실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의미를 팬들끼리만 유추하던 고릿적 추억을 넘어서서, 회사는 본격적으로 ‘ 짜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수많은 예시들을 보라. 그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컨텐츠를 던져주고 이를 알아채지 못하면 친히 떠먹여주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팬들의 텍스트뷰어를 가득 채웠던 각종 2 창작물이 이제는 회사의 주도하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잠깐. 제가  어지러워서 그러는데, 그러니깐 이게 지금  아이돌 얘기라는 거죠? 노래하고 춤추는?” 물론. 소설을 써도  편은 썼을  어마어마한 서사들은 분명 모두 아이돌의 컨텐츠이다. 그리고 그들의 본업이 재담꾼, 혹은 연극배우가 아닌 이상, 이는 어디까지나 음악에 덧붙는 일종의 ‘도움말 지나지 않는다. 닭과 달걀, 혹은 배와 배꼽의 관계, 여기서는 따지지 않기로 하자. 다만 분명한  지금의 K-pop 씬이  거대한 세계관의 그림자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 ‘이달의 소녀 있다. ‘루나버스(LOONAverse)’라는 독자적인 명칭까지도 보유한  팀의 세계관은 ‘ 존재를 중심으로 하여 오드아이, 안드로이드, 뫼비우스, 차원이동은 기본이요, ‘에덴이라고 불리는 천상계의 영역에까지 나아가 , 성경, 금단의 사과, 사랑과 우정, 배신과 질투  세계관에서 등장할  있는 소재란 소재는 죄다 다루고 있다. 3년이   되는 기간 동안 그들은 이와 같은 방대한 세계관을 확립해냈으며, 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팬들은 여전히 새로운 떡밥을 갈구하고 있고, 제이든 (각주 : 이달의 소녀의 총괄 프로듀싱을 맡은 A&R.) 마구 흩뿌려놓은 단서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의미를 유추하기에 여념이 없다. (물론 어디까지가 기획자의 본래 의도였는지도 확신하지 못한 , 미지의 세계관에 열중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는 덤이고.)

   루나버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그들의 ‘99억짜리초대형 데뷔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있듯) 이달의 소녀는 ‘매달 1명씩 새로운 멤버를 공개한다 독특한 컨셉의 프로모션을 통해 데뷔한 12인조 그룹이다. 또한  12명의 멤버들은 다시 3개의 유닛(각주 : 이달의 소녀 1/3, 이달의 소녀 오드아이써클, 이달의 소녀 yyxy.)으로 쪼개지는데, 특이하게도 이달의 소녀는 본격적인 완전체 데뷔 이전에 유닛 활동을 선행했다. 덕분에 팀의 정식 데뷔까지 자그마치 1 10개월이 걸렸으며, 각각의 솔로 앨범, 유닛 앨범과 리패키지, 그리고  밖의 스페셜 앨범을 포함하여 데뷔 이전에 발매한 공식 앨범만 18장이 넘는다. (여러모로 가성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기획이 아닐  없다.)

 

 

  그리고 루나버스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덩치를 키워나갈  있었다. 물론 이는 애초에  내용이 너무 방대한데다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서 사실상 요약이라는  불가능하지만, 정말 추리고 추리자면 루나버스는 ‘12명의 소녀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한 3개의 유닛들은 각기 다른 세상,  1/3 지구, 오드아이써클은 중간계, 그리고 yyxy ‘에덴이라 불리는 천상계에 존재한다.(각주 :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yyxy 한때 ‘에덴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들로 지구에 추락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와 연결되어있는  같은 막연한 느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 무한히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굴레에 속박된 탓에 어설픈 탐색의 시도마저도  실패에 그치고야 만다. 하지만 어느 , 오드아이써클이 가장 먼저 무언가를 깨닫는다.   눈의 색깔이 변하는  3명의 소녀들은 서로의 영향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각성하게 되며, 뫼비우스를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 모여 본격적으로 다른 소녀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먼저 차원 이동 능력을 지닌 멤버 최리가 에덴과 지구를 오가며 나머지 멤버들의 각성을 돕고, 새롭게 각성한 소녀는 오드아이써클과 함께  다른 소녀를 돕는다. 이러한 크고 작은 노력들을 통해 12명의 소녀들은 마침내 서로를 모두 알아볼  있게 되고, 데뷔곡 <Hi High> 바로 그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관한 곡이다. (각주 :  글에서는 루나버스의 A to Z 대한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원한다면 차라리 나무위키에 들어가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며, 사실은 필자도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이달의 소녀의 영문명은 ‘LOONA’이다. 그리고  글의 제목처럼 ‘이달의 소녀라는 이름은 ‘이달(this month)’ ‘ (this moon)’,  가지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루나버스에서 ‘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를 떠올려본다면, 우리는 이들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세계관을 전제하고 출범한 팀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있다. 어디 그뿐이랴. 정규 데뷔 전부터 수차례 진행한 ‘상영회 뮤비와 부가영상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대놓고 유도하는 자리이고, 자체 컨텐츠인 ‘이달의소녀탐구’(각주 : 멤버들의 일상을 담은 짤막한 영상 시리즈로, 유튜브의 공식 채널을 통해 업로드된다.)에서도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본인들의 세계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있다. 상술한 루나버스가  이상 팬들끼리만 공유하는 허무맹랑한 추측이 아니라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단서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연출된 메타포이며, 회사에서도 분명  장대한 픽션을 써내려가는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달의 소녀는 너도 나도 뛰어든  세계관 열풍 속에서 가장 본격적으로 이를 전개해나갔던 팀들  하나이다.(각주 : 굳이 과거형을  이유는 데뷔 전까지의 전투적인 화력과는 달리, 지난 <Butterfly> 활동 이후로 회사에서는  어떠한 떡밥도 던져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요, 그래서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지금? 솔직히  세계관이라는 , 말해주기 전까진 전혀 모르겠거든요.” 당장 지금도 다음 스토리를 구상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누군가는 대번에 힘이 빠지겠지만, 사실은 아주 예리한 지적이다. 물론 루나버스가 충성도 높은 코어 팬덤 구축에  공을 세웠다는 것은 십분 인정한다. 실제로 세계관은 새로운 ‘유입 불러일으키기에  괜찮은 미끼니까. 어느 정도의 항마력만 있다면야  ‘12소녀 판타지물 분명 흥미로운 컨텐츠이고, 순수하게  내용이 궁금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가랑비에  젖듯 스며들어버린 경우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필자 본인의 얘기는 절대 아니고 아는 사람 얘기이다. 아는 사람.) 뿐만 아니라 수용자가 능동적으로 이야기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작업은  자체로  하나의 즐거운 게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 간과해서는    가지가 있으니, 그건 바로 세계관이 어디까지나 철저히 서브컬쳐라는 사실이다. 바다 속에 전복과 새우가 차고 넘쳐봤자 뭍사람의 몸을 적시는 노력 없이는 찜도 구이도 없다.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하지만, 대부분의 대중들은 애초에  소녀들의 절절한 사연에 대해 굳이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지금의 루나버스는 어지간한 관심과 노력 없이는 절대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멀리 와버렸다. 이는 루나버스보다도 훨씬  심오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EXO처럼 어마무시한 화력이 뒷받침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아쉽게도 이달의 소녀의  위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과연 문제라면 문제이다.(각주 : 이와 관련하여  관계자는 ‘이달의 소녀가 폐쇄적인 걸그룹을 지향한다 밝힌  있다. (놀랍게도 실제로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걸그룹이 철저히 대중성을 타깃으로 기획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대단히 참신하고 도전적인 발상이 아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세계관에 대해 그닥 알고 싶지 않아 한다.  글의  문단만 읽고도 손발이 뒤틀려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을 수많은 누군가들을 기억하자. 집에서   먹고 건강히 자란 성인이 사실은 안드로이드이고, 초능력자이고, 태양을 삼킨 죄수라니. 멀리서 보면 그저 애들 장난처럼 보이는  ‘세계관 놀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사람은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알고 보면 엄청난 ‘진입장벽 셈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달의 소녀가 직면한  다른 난관은 앞으로의 행보가 그들의 세계관에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팀의 근원적인 정체성부터 이미 철저히 루나버스에 귀속되어 있으므로, 추후에 발표하게  곡들 또한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없다. 모든 곡은 이제까지 펼쳐온, 혹은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이야기들을 설명해줄  있는 단서로서 만들어져야 하고, 선택되어야 한다. 그저 ‘듣기에 좋은곡을 발굴해내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 하물며 부수적인 스토리를 짜내고, 각각의 곡과 뮤비를  내용에 끼워 맞추어 (세계관을 모르는 사람이 접하기에도) 설득력 있는 결과물을 선보인다는 것이 과연 말처럼 간단할까. 더군다나 루나버스는 한시적으로 반짝 고생하고 해치워버릴  있는 ‘n부작프로젝트도 아니다. 결국 이달의 소녀가 지금의 전략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다시 말해 좋은 음악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각종 세계관 떡밥을 함께 뭉쳐서 던져주려면, 반드시 2, 3, 혹은  이상의 품을 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미 야심차게 루나버스를 선포해버린 이상, 이는 멋진 족쇄가 되어 오래도록 그들의 걸음을 무겁게  것이다.

 

  이건 비단 이달의 소녀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 열풍의 가장  맹점은 바로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양질의 컨텐츠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내가 ‘결코  수가 얄팍해선  된다 지적한  있다. 이는 내러티브의 짜임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드러내는 컨텐츠 자체의 퀄리티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계관은 절대 만만히  상대가 아니다. 치밀한 서사 구조는 물론이요, 감상자들의 높아진 안목을 충족시켜줄  있는 정교한 수준의 음악과 비디오,  밖의 모든 것들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우랴. 컨텐츠가 무슨  속에서 뚝딱!하고 나오거나 착한 황새가 냉큼 물어다주는 거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결국 컨텐츠는 전적으로 회사가 지닌 역량의 문제인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혹은 영혼을 갈아 넣는 기획력?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부내 나는 사운드를 자랑하는 EXO 음악, 뮤직비디오보다도  공들여 제작한 것만 같은 NCT 세계관 영상, 시작부터 호쾌하게 99억을 쏟아 부은 이달의 소녀의 데뷔 프로젝트. 요컨대 ‘때깔 좋은컨텐츠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자본을 필요로 한다.

  앨범, 뮤직비디오, 안무, 홍보, 헤메스, 식대, 숙소, 그리고 기타 등등등등등. 아이돌 프로듀싱에 있어  나갈 구멍은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미 안정적인 수익 창구가 확보된 대형기획사야 뭐가 무섭겠느냐마는, 중소기획사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익히 알려져 있듯 대부분의 아이돌이 빚더미 위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으며, 어느 회사 대표는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노래를 받기 위해 월세 집으로 거처를 옮겨가면서까지 주머니를 털어야 했다. 그런가하면 활동을 지원해줄 돈이 없어 음악방송   나가보지도 못하고 뒤안길로 사라진 팀은  얼마나 많았나. 이것이 바로 중소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역할놀이에까지 돈을 써야 한다니. 뒤에서 쫓아가는 것도 버거운 그들에게  ‘()음지문화 유행은 너무나도 가혹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으려면 시류에 따라야하지만, 높은 문턱 앞에서 어설픈 도전은  다시 바스러지고야 만다. 세계관의 딜레마란 이토록 눈물겨운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음악 산업 내의 소비가 대부분 아이돌 시장에 쏠려 있음은 자못 분명하다. 그리고  속에서 아이돌 음악에 대한 기대는 끝을 모르고 커져가는 중이다. 예컨대 최근   새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자체 프로듀싱타이틀만 봐도 그렇다. 춤과 노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아이돌은 작사/작곡까지 잘하는 짱짱 아티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세계관 열풍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될  있을 것이다. K-pop 단순히 듣고 즐겁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호시절은 한참 지났다.  무겁게,  심오하게,  거창하게. 동시대 아이돌 음악의 방향성을 정리하자면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음악은 무거워질수록 점점  대중과 멀어질 수밖에 없고, 이에 결국 생존의 전략은    바뀌게 되었다. 리스너, 특히 (실질적 구매력이 있는) 코어 팬덤의 수요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이제,  이면에 대단한 의미를 숨겨둔 음악과 뮤직비디오가 필요하다. 세계관은 전적으로 회사의 역량에 달려있고, 역량의 다른 말은  자본이다. 하지만 개천은 이미 오래 전에 말랐으며, 용이 떠난  자리에서 뱁새는 이제 다리를 찢다 못해 뜯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왕관을 쓰는 자는 누구이고, 무게를 버텨야 하는 자는 누구인가. 별안간 들이닥친 세계관 열풍은 지금,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나.

 

안녕, 안녕 용문객잔

 - 차이밍량, <안녕, 용문객잔>

장비

 

( 글은 2019 4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한 기획전 《영사, 영화와 극장의 모험에서 관람한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 대한 글이다.)

 

 

혹시, 박제가 되어버린 극장들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호호 할아버지 호호 할머니가 되어, 나때는 말이야, 저기  큰길가 어디에 커다란 극장이 있었는데 말이야, 거기서  영화도 보고  영화도 보고, 팝콘도 먹고 오징어도 먹고,  앞에서 친구도 기다리고 새로 붙은 포스터도 보고, 어렸을  엄마  붙잡고 처음 갔는데 스크린도 크고 의자도 많고 그땐 어린 마음에 어찌나 놀라고 신이 났었는지 말이야,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을 법한 그런 극장. 지금은 대형 멀티플렉스니 다운로드니 스트리밍이니 하는 것들에 밀려 어느 순간 희미해지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져버린,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던 이들의 기억 속에 영영 박제되어 남은, 그런 극장들을 아십니까?

 

대만 감독 차이밍량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Goodbye, Dragon Inn)>(2003)에는 ‘그런 극장 나온다. 사실 ‘나온다 것은 훨씬 심심한 표현이고,  정확히는  영화가 그런 극장을 찍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맞겠다.  인터뷰에서 차이밍량은 오랜 유학길에서 돌아왔을  이미 예전의 대형극장들이 많이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하고 타이페이 시에서 오래된 복화극장을 보았을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도 A4 1 남짓에, 별다른 사건도 캐릭터도 존재하지 않고 대사도 거의 없는  이상한 영화는 그러니까, 오직 복화극장이라는 오래된 극장을 오래도록 찍기 위해 태어났다. 차이밍량의 표현을 빌자면, ‘영화관이 주인공인 영화 것이다.

 

 

<안녕, 용문객잔>에서 복화극장은 내일이면 문을 닫을 극장으로, 영화는 복화극장의 마지막  마지막 상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는다. 상영작은 과거 홍콩 무협영화의 황금기에 영광을 누렸던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勇門客潺)>(1967)이다. <안녕, 용문객잔>  장면은 <용문객잔>  장면이 나오고 있는 극장의 풍경이고, 이후 카메라는 <용문객잔> 러닝타임과 찬찬히 발을 맞추어 관객이 들락날락하는 상영관을 비롯한 영화관 내부의 공간들을 오간다.

생각할수록  영화에서 ‘카메라가’ ‘오간다 표현은 적절하다. 차이밍량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영화에서 특히 , 카메라가 하나의 살아있는 주체가 되어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 스스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빤히, 그리고 집요하게 (주로 롱테이크로) 대상을 응시하는 카메라는 <흔들리는 구름>(2005)이나 <애정만세>(1994)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있는 특징이지만, <안녕, 용문객잔>에서의 응시는 공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의 특성상 카메라의 움직임을 수반한다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주로 다리를 저는 매표원 여자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매표원 여자는 복화극장에서 일하는(혹은 복화극장에 남은)   되는 직원  하나로, 여자가 화장실, 복도, 영사실, 창고를 오가며 우직하고 묵묵하게 맡은 일들을 하는 동안 카메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여자의 느리고 불편한 걸음을 좇는다.

일상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보지만 그것은 스쳐지나가는 것들, 휘발되는 것에 가깝고 응시의 대상이 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안녕, 용문객잔> 비롯한 차이밍량의 영화들에서 카메라는 끈질기게 응시함으로써 관객들 역시 하여금 꼼짝없이 응시하도록 만든다. 때때로 나는 차이밍량의 롱테이크를   다게레오타입(각주 2: 1839 프랑스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가 발표한 초창기의 사진 기법으로, 은판사진법이라고도 한다. 얇은 은막으로 코팅된 구리판 표면에 광택을  다음 표면에 요오드화은 감광막을 만들어 빛에 노출시키고, 뜨거운 수은증기로 현상하여 양화를 만드는 기법이다.) 같은 초창기의 사진술을 떠올린다. 다게레오타입으로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찍을 때는 30분의 노출 시간이 필요했다.  30분을 상상하면 묘하다. 피사체도 카메라도 숨죽이고 정지한  서로 마주보고 있는 30분을,  고요한 응시의 시간을. 그동안 빛은 천천히 피사체의 잔상을 각인시킬 것이다. <안녕, 용문객잔>에서 다리가 불편한 매표원이라는 설정도 아마 조만간 잊혀질 복화극장의 공간들을 차분히 각인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테다. 당연히 그때의 호흡과 시간의 흐름은 비일상적일 수밖에 없다. 일상적인 순간들은 각인되기 이전에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느림 단순한 진행속도가 아닌 하나의 화법이다. 차이밍량은 <안녕, 용문객잔> 대한 인터뷰에서, “만약에 느림이라는 속도를 이용해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영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녕, 용문객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느릿느릿 유영하는 것에 가깝다. 구천을 떠도는 미련 많은 유령처럼, 카메라는 느리게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며 복화극장의 공간들을 담는다. 미련을 한가득 안고 극장을 떠돈다는 점에서 카메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유령들과 동질적인 존재가 된다. ‘유령들이란 <용문객잔> 스크린에 상영되는 동안 상영관에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는   남짓한 인물들을 말한다. 이들은 시끄럽게 쩝쩝대며 무언가를 먹는 커플이었다가, 앞좌석에 발을 올리는 아저씨였다가, 구두를 달랑거리며 ,  견과류를 깨먹는 여자였다가 하며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애초부터 다소 의심스럽던 이들의 존재는 담배 피우던 남자가 내뱉는, “ 극장에 귀신 들린  아느냐 대사(각주 3:  대사는   없는 영화에 등장하는   번의 대사   번째로, 영화가 시작한  40분을 넘기고서야 등장한다.) 의해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꽤나 귀여운 구석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은 흔히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무서운 귀신과는 거리가 멀다.(각주 4: 그럼에도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자기가 아는 최고의 공포영화로  영화를 꼽았다.) 이들은 누구에게도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조용히 객석  구석에 앉아있다 이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아끼던 망자의 묘소에 잠시 들러 인사를 하고 떠나는 이들처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극장에 얽혀 있는 기억 조각들 같은 이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극장의 마지막을 기념한다.

영화는 이들   명의 이야기를 좀더 세심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상영관에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일본인 남자는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파트너를 찾으러  게이로, 우리는 자신이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와 상대방들의 반응, 남자화장실에서의 작은 에피소드 등을 통해 점차  극장이 아주 오래 전부터 게이들의 비밀스런 모임 장소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각주 5: 차이밍량 역시 인터뷰에서 퀴어적 만남의 장소로서의 극장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있으며, 이전 작품인 <하류>에서는 게이 사우나라는 공간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있다.) 또한 우리는 유일하게 영화의 러닝타임 끝까지 앉아 있던 평범해 보이는 할아버지  명이 사실은 호금전의 <용문객잔> 출연했던 주연들이었다는 사실 역시 나중에야 알게 된다. 마침 스크린에 둘의 대련 장면이 펼쳐지고, 배우들은 고개를 돌려   극장에 앉아있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응시하고,    명의 클로즈업된 얼굴에 작은 눈물방울이 반짝인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남은 이들도  , 그리고    명의 손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전부이다.

 

- 선생님,  영화 보러 오셨습니까?

- 오랫동안  영화를  봤어.

- 이제  영화 보러 아무도  옵니다. 우릴 기억하는 사람도 없죠.

 

복화극장은 그러니까, 떠도는 유령들과 비밀스런 만남을 꿈꾸는 음지의 게이들과 이제는 잊혀진 배우들이 한데 모이는 곳인 셈이다. 아니,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이제 이들이 전부, 라고 말해도 되겠다. 지워지고 잊혀지고 보이지 않는 이들이 점유하는 공간. 복화극장은 어쩌면 없어지기 전부터 원래 ‘없었던곳이자 이미 한껏 희미해져가던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이밍량은 이곳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공간의 잔상이라도 박제해두려 이런 영화를 찍었나보다.

 

그리고 영화관을 찍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있다는 경험의 특이성 때문인지, <안녕, 용문객잔> 초상이나 풍경사진과 같은 여타의 기록물들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보통의 경우 렌즈를 통한 기록이 피사체-렌즈-촬영자·관람자의 A-B-C 구도를 전제한다면,  영화에서 A C 종종 데칼코마니된  또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메라가 복화극장의 객석을 들여다볼 때마다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영화  객석과 마주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없었다.  기이한 감각은 영화 상으로 <용문객잔> 상영이 끝나고, 매표원 여자가 극장을 정리하고   2분가량 지속된 침묵에서 극대화된다.

영화가 끝나고   카메라는 상영관의 모든 객석을 화면에 거의  차게 잡고 있다. 여자는   상영관의 불을 모두 켜고 오른쪽 하단의 문으로 들어와 매우 느린 속도와 균일하게 어긋나는 박자로, 간간히 보이는 쓰레기를 쓸어 담으면서 반대편의 문까지 걷는다. 체감상  오랜 시간이 흘러 여자가 상영관을 나가고 나면 한동안 외화면에서 여자의 발소리만 들린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다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도 카메라는   상영관을 오래도록 담겠다는  고요히 응시한다. 완전한 침묵과 부동(不動) 속에서의 2.  2분은 설명하기도 다른 영화와 비교하기도 어려운,  자체로 독특한 영화적 체험이다. 나는  장면에서 예상치 못했던 침묵에 당황하면서 스크린에 펼쳐진  객석들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순간 스크린이 거울처럼 이쪽을 비추고 있는  같다고 생각했다. 이편에서 저편을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저편에서 이편을 바라보는 어떤 응시, 거울처럼 올곧게 마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유 모를 전율에 휩싸인  나는 지표에 대한  작품을 떠올렸다. 먼저 떠오른 것은  케이지의 <4 33>, 아방가르드 작곡가  케이지가 1952년에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한 작품이다. 그는 연주 시간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았고, 4 33초는 순전히 침묵, 그리고 당황한 관객들의 헛기침과 웅성대는 소리로 채워졌다.  케이지의  작품은 친구였던 미술가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흰색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라우셴버그는 완전히 비어있는 캔버스를 전시한 적이 있었다.  작품은 걸려 있는 곳의 조명이나 지나가는 관객들의 그림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말하자면  작품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비로소 관람자를 향할  있고, 순간순간 변화하는 외부의 풍경이 남기는 흔적들을 작품의 형태로  순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장면에서  작품을 떠올린 직접적인 이유는 사운드였다. <4 33>에서처럼, 영화에서 갑자기 찾아온 침묵이  이쪽 관객들의 부스럭대는 소리, 미세하게 뒤척이는 소리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불현듯 지금  쪽의 소음이 영화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시를 떠올린 것은  다음의 일이다. 보여주기 위한 일방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마주보고 대치하는 이미지라고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비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렌즈처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쪽에서 채워나가기도 하는 영화라고도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니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거울 바깥의 실체와 거울  이미지가 결코 서로 닿을  없듯,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옛날 무협영화와  영화를 보는 차이밍량의 관객들과 지금 우리 사이에도 시간적 단절과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단절이 존재한다. 비추되 닿지 못하게 하는 거울처럼, 차이밍량의 영화들에서 단절은 항상 중요한 화두였다. <안녕, 용문객잔>에서도 찐빵이  도시락을 들고 서로를 찾아다니는 매표원과 영사기사는 결국  번도 만나지 못하고, ‘유령들’, 아마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점유했을 기억들은 마지막 날조차 각자의 자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대사도 없는 침묵 속에서, 스쳐지나갈 뿐인 관계들과 닿지 않는 기억들은 홀로 조용히 외로워할 뿐이다.

촌스럽고 뻔한 글이 될까 지금까지 영화의 감정들에 대한 언급은 짐짓 피해왔지만, 이제 좀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이때껏 이야기해온 것처럼  영화의 많은 부분을 좋아하고  많은 부분에 감탄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촌스럽다면 촌스럽고 뻔하다면 뻔할 상념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무얼 찾아 헤매는지 자기도  모르면서 하릴없이 배회하는 이들이 주는, 젊었을  화려하던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배우가 주는, 계속해서 엇갈리기만 하다 끝내 만나지 못한  빗속을 걸어가는 남녀가 주는, 내일이면 문을 닫을 영화관의 마지막 상영 마지막 순간이 주는, 그런 상념들. <안녕, 용문객잔> 감정들을 전달하는 방식은 말없는 바라봄이고, 나는 그런  영화를 다시  조용히 보면서 영화를 만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틀림없이 촌스럽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 느린 사람, 주로 홀로 슬퍼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구석구석 오래오래 바라보는 법이다. 이제는 점점 그런 종류의 사람들마저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 슬퍼진다. 그래도 아름답고 서글픈 것들이 완전히 희미해져버리기 전에,  잔상이나마 영화 속에 박제되어 언제든 꺼내볼  있다고 생각하면 적지 않게 위안이 된다.

 

2D 3D 사이 어디쯤을 덕질한다

- 흔한 연뮤덕1 주저리주저리

녹턴

 

아마도 글은 아주 솔직한 글이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다. 누군가는 공감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별로 상관 없다. 그러니 아무쪼록 넓은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글의 주제를 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고,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가 아마도 자체가 주는 힘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회전문을 도는) 극을 낱낱이 파헤쳐 (착즙해서) 길고 리뷰를 적을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훌륭한 텍스트의 극을 비루한 언어로 담기는 버거웠으며, 한편으로 이유 없이 (텍스트의 구멍이 많은데도 이상하게) 매력적인 극을 설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더군다나 공연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현장감을 멋진 수식어로 담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이런 저런 변명을 대며 미루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습관적으로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내리다 주제를 정해버렸다. 내가 공연을 회전문을 돌고, 배우의 퇴근길에 가서 싸인을 받고, 선물을 주고, 사진을 찍고 다운로드 받는 그런 것들. 발걸음을 대학로의 공연장으로 이끄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가장 강력한 무엇. 가장 많은 시간을 곳에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일코하게 되었던 이유. PEEP 모토가부끄러운 덕질은 없다 아니었나. 트위터 계정에 쌓인 수많은 트윗들이 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덕질에 가장 부분을 차지하는 2D 3D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특정배우 연기하는캐릭터. 

 

사실 어느 덕질이 그렇겠냐마는, 좋아하기 시작하면 콩깍지가 씌고 좋아하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아니, 모든 행동이 좋다. 귀엽다. 이미 하나의 필터를 씌우는 셈이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정말로 캐릭터의 가면을 쓰고 나온다. 나는 내가 만든 콩깍지라는 필터와, 무대 위의 캐릭터의 가면 필터를 이리저리 뒤섞어 본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을보고 싶은 부분만보는 . 배우의 본체가 크게 궁금하지도 않다. 사실 종종 매거진 인터뷰 등에서, 퇴근길에서 본체가 드러나긴 하지만 모습이 멋진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라면 (그동안의 필터를 깨부수는 것이라면) 더더욱 반갑지 않다. 쓸데없이 많이 알아 봤자 독이 있다는 안다. 공연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에게 치인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다른 배우가 아닌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 배우의 고민과 연구로 점점 추가되는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 그런 공부를 하는 배우의 배우로서 좋은 모습 등이다. 물론 공연에서 내게 맞는 연기를 배우는 다른 공연에서도 그럴 확률이 높다. 그래서 대개 특정 공연에서 좋아하던 배우의 차기작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극이 너무 재미가 없다거나, 캐릭터가 매력이 없으면 아무리 연기와 노래를 잘하고 내가 아끼던 배우라 한들 공연을 찾아보지 않게 되니 자연스럽게 애정이 식을 수밖에 없다. (각주 : 그래서 연뮤덕들 사이에서는 본진이 노잼극에서 너무 하는 제일 가슴이 찢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렇다 보니, 일명철새’(각주 : 2000년대에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였던 같은데, 여기서 부정적으로 것은 아니다.) 되기 십상이다. 연뮤덕 사이에서는 회전문 문화가 활발한데, 이는 그만큼 특정 극을 자주 많이 보는 얼마나 색다르고 흥미로운 경험인지를 설명해준다. 역시 지옥에서 회전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모르겠지만, 확실히 배우보다는 여러 배우가 기억에 남고 애정도 많이 가게 된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는 , 좋아해서 여러 보았던 배우도, 배우가 취향이 아닌 극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극을 자주 보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다시 새로운 극을 찾고, 새로운 캐릭터를 찾고, 캐릭터를 연기하는 새로운 배우를 찾고. 

분명 나는 특정 배우를 좋아하는데 배우의 모든 연기와 모든 필모그래피를 사랑하는 아니라는 . 내가 좋아하는 특정 안에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좋다는 . 그렇다고 해서 누가 연기하든 똑같이 특정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의 이유를 찾고 이렇게 말로 표현하고 인정(?)하기까지 이상하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왠지 발끝만 담근 덕질하는 같은 느낌, 나는 분명히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있는데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그런 기분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만 누가 덕질에 정도와 순위를 매길 있겠는가. 그저 오묘한 경계선, 배우도 캐릭터도 아닌 사이를 덕질하는 것이 적어도 나라는 연뮤덕의 운명인 것을. 그래서 나는 얇은 경계에 , 언제든 자리를 옮겨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덕후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별이 유쾌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별의 방식도 다양하다. 공연이 바뀌거나, 배우가 바뀌거나, 내가 바뀌거나. 명제가 함께 가지 않는 이상 이별은 슬퍼진다. 바뀌거나, 바뀌지 않으면 공연을 보거나 보지 않으면 된다. 사랑을 주거나 주지 않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배우가 3D 본체의 사정, 혹은 잘못으로 인해 달라지면 나는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에서배우 잃는다. 공연이 바뀌면캐릭터 잃는다. 내가 바뀌면 그냥 공연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이전에 쏟아 부었던 사랑을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겨놓는다. 그리고 이런 덕질은 머릿속에만 담아두어야 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각주 :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이게 슬프긴 하지만서도, 바로 이런 점이 연뮤 덕질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좋은 공연을 보고, 잊어버리고, 다시 다른 좋은 공연을 보는 . 이전에 보았던 좋은 공연 자체는 잊어버린다 해도 순간의 감상과 느낌은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감정을 가진 채로 시간을 보낸 나는 좋은 사람으로서 이후의 좋은 공연들을 있게 된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초연, 재연, 삼연 혹은 이상까지 같은 극이 번째 공연되어도 연출, 무대, 배우 등이 언제든 바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절대로 2018년의 A극과 2019년의 A극은 같을 없다. 하물며 매일의 공연도 다른데, 만드는 이들이 바뀌면 오죽할까. 영상이나 음원 박제도 많지 않다. 내가 A극의 A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좋아서 A 회전문을 돌았다고 해도, 결국 OST 영상에 A배우의 더블캐스트인 B배우가 박제되었다면 그건 극이 끝날 오히려 잔인한 이별을 선사한다. 그러니까 결국 정리하자면, 당시 때의 좋아하는특정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 다시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매일매일이 다른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순간에 온전히 사랑을 쏟아 붓고 이별한다. 그렇게 이별할 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지만, 여느 덕질이 그렇듯이 순간에 내가 행복하면 그만인걸, .

무엇보다 2.5D 덕질하는 재밌다. 내가 상상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는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내가 상상할 여지가 너무나도 풍부하고 넓고 열려있다. 특히 이건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등의연성 매우 신나는 부분인데, 새로운 이미지를 무에서부터 창조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존재하는 이미지를 나의 해석과 감상에 따라 변형하여 새로운 장면에 대입 시키는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각주 :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 점은 배우 본체에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대입해선 된다는 것이다. 배우도 사람이기 때문에, 배우나 팬을 불편하게 만들 있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2.5D 기반의 연성은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연성물들은 주로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캐릭터를 연기할 하는 디테일이나 손짓, 해석과 창작자의 추가적인 상상력이 합쳐져 만들어진다. 캐릭터만 있는 것도, 배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이 함께 있는 상태에서 창작자의 기발한 발상이 첨가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박제도 적고, 언제나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덕후의 입장에서 이런 연성들은 반갑지 않을 없다. 나름대로 나의 최애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방식이랄까. 이를 생산하는 사람에게든 소비하는 사람에게든, 연성으로서 2 창작 되었을 2.5D 장르만이 가질 있는 이런 장점은 그래서 너무나 매력적이다.

구구절절 적어보았으나, 덕질의 가장 부분을 차지하는 일부분을 말한 것뿐이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아쉽긴 하다. 그렇지만 적는 것은 아마 평생 불가능할 것이기에 정도로 끝을 맺어보려 한다. 수만 수천 가지의 덕질 분야 중에 그저 하나일 뿐인 나의 덕질 분야와 방식을 털어놓자니 내가 오히려 낯선 기분이지만, 평면 이미지도, 그렇다고 해서 실제 사람도 아닌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아니 적어도 알게 되었다면 그걸로 왠지 뿌듯할 같다. 무엇보다 덕후의 운명 하나는 영업 아니겠는가. 이런 마음이 신기하고 궁금하고 흥미로워진 당신, 2D 3D 사이 어디쯤에 발을 번쯤 들여보기를. 

아이묭(あいみょん)순애가 ~들어~

(아이묭 노  <貴方解剖純愛歌 ~死ね(당신해부순애가 ~죽어~)> 패러디, 원곡의 의미는 ‘너를 해부하는 순애의 노래’)

후추도깨비소년들

 

* 글에서는 일본어로  가수의 표기에 있어서 영어와 한국어   가독성이 좋은 쪽으로 선택하여 표기하였다.

 

 일본 노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음식, 일본 만화, 일본 영화  일본의 다른 문화에 대해서는  어떤 거부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서, 심지어 일본의 문화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서 이상하게도 노래만은 듣지를 않았다. 그러던 내가 2017년부터는 일본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을 주변에 두며 일본 노래를 하나  추천받아 듣기 시작했다. Spitz Bump of Chicken(バンプオブチキン) 추천받아 들으며 amazarashi 카미키타 (kk), 요네즈 켄시 등을 들으며 취향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어느 순간  재생목록에는 일본 노래가 가득하게 되었다.  그동안  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일본 노래들은  감성에  들어맞았다.

 

 일본 노래를 자주 듣던 사람에게 추천받았던 <> 라디오 FM802 TSUTAYA 진행하는 드림 프로젝트 ‘ACCESS!’ 캠페인 송이다.  여섯 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곡이었는데 아이묭, Creephyp 오자키 세카이칸, sumika 카타오카 켄타, 04 Limited Sazabys GEN, Unison Square Garden 사이토 코스케, 스가 시카오가 그들이었다.  거물들이 모인 캠페인 송이었는데 여섯 명의 목소리  귀에  들어오는 독특한 음색이 있었다. 그렇게 아이묭을 처음 만났다.

 

 아이묭. “여자애들과 있을   얘기가 없을 때에는 아이묭을 화제로 던져봐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즘 가장 핫한 여성 싱어송라이터. 동시에 신세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아이묭. 남자 중에서는 요네즈 켄시가 가장 핫하다면 여자는 아이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이묭은 데뷔 3 만에 홍백가합전(각주 : 일본을 대표하는 연말 음악 가요제이자 인기와 경력을 나타내는 상징이기에 함께 모든 일본 가수들이 꿈꾸는 꿈의 무대) 출전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아이묭을 인기의 반열에 올려놨을까? 첫째는 음색이다. 실제로 아이묭의 음색은  하나의 특징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노래마다 목소리가 주는 느낌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노래마다 목소리도 창법도 바뀌고  차이가  편이다. 대표적으로는 <○○ちゃん> <二人の世界>, <今夜このまま> 들어보면 아예 다른 가수가 부른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모든 노래에서 느껴지는 아이묭의 중성적이고 퇴폐적인 듯한 목소리 톤은 독보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역시 아이묭의 독보적인 매력은  노래의 가사에 있지 않을까? 적당히 쿨하고 시니컬하지만 사실은 외롭고 사랑받고 싶은 순정. 그런 마음은 꽤나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가사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누구나 쿨한  한다. 괜찮은 , 아프지 않은 .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지 않은가. 우리는 ‘사랑을 하고 ’(<青春と青春と青春>) ‘행복의 가로획을 하나 정도 채워보고 ’(<今夜このまま>). 사실 우리는 원하는 것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런 우리의 숨겨진 욕심, 욕심이라는 왠지 모를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 하에 묶여버린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아이묭은 노래한다.  마음은 때로는 여자의 목소리로, 때로는 남자의 목소리로 이야기 된다. 그렇게 아이묭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감각적이면서 적나라하게 풀어낸다.  이야기들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그렇기에 아이묭의 노래도 변덕스럽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대한 완벽한 묘사가 아닐까?

 

 그러한 아이묭의 노래  필자의 마음에  노래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노래들이 여러분의 마음에도 가닿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꺼내본다.

 

 夜行バス(야간 버스)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을 끝내거나 공부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밤길은 쓸쓸하고 씁쓸하다. 야간 버스, 우리로 치면 심야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 기분은 어떨까? 아이묭은 사회에 내던져진 힘든 청춘을 노래한다.

夢を追うって こんなにも

꿈을 좇는다는  이렇게

怖いのつらいのさみしいの

무서워? 괴로워? 외로워?

 그렇게 덜컹거리는 버스에 타서 우리는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다.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같기에. 우리는 그렇게 노래로 슬픔과 외로움, 두려움을 잊으려 한다. 아이묭은 비틀즈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있다. ‘다섯 가지 소리 노래를  당시 비틀즈가 다섯 명인줄 알았던 아이묭의 비틀즈 노래 표현 방식이다. 이제는 자신까지 합쳐서 다섯 명이라 보고 있다는 인터뷰 말도 꽤나 맞는 말이다.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우리 내면의 소리에  기울이고 있을 테니까.

揺れる揺れる箱の中で

흔들리고 흔들리는 상자 안에서

 

ギターかかえて イヤフォンをつけて

기타를 껴안고 이어폰을 끼고

涙こらえ聞いていたのは 

눈물을 참으며 듣고 있던  

 

大好きな五つの音

사랑하는 다섯 가지 소리

 

生きていたんだよな(살아있던 거겠지)

 

 노래는 읊조리듯이 시작한다. 읊조리는 아이묭의 목소리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투신자살한 여학생에 관한 뉴스와 그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며  여학생의 죽음은 옆으로 밀려나버린다. “떨어져주세요.”라는 말은   사람을 끌어 모아버리는 것일까?

 

二日前このへんで

이틀   근처에서

 

飛び降り自殺した人のニュースが流れてきた

투신 자살한 여자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血まみれセーラー 濡れ衣センコー

피투성이인 교복 누명을  선생

 

たちまちここらはネットの餌食

순식간에 이곳은 인터넷의 먹잇감으로

 

危ないですから離れてください

위험하니 떨어져주세요

 

そのセリフが集合の合図なのにな

라는 대사가 집합을 가리키는 신호인데도

 

馬鹿騒ぎした奴らが

야단법석을 떨던 녀석들이 

 

アホみたいに撮りまくった

바보처럼 사진을 찍어댔어

 

 읊조림은 자연스럽게 노래로 연결된다. 그리고 아이묭은 죽은 여학생에 주목한다. 그녀가 흘린 피에 슬퍼하고 울어버린다. 여학생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서 그녀가 죽게 만든 상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살아가고 있던  사람으로서 미안해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아이가 살아있었던 흔적인 피마저 ‘그녀의 고통을 모르고 살고 있던어른들에게 지워져버린 것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今ある命を精一杯生きなさい

지금  생을 열심히 살아가라는  

 

なんて綺麗事だな

아름다운 일이지

 

精一杯勇気を振り絞って彼女は空を飛んだ

힘껏 용기를 내서 그녀는 하늘을 날았어

 

鳥になって 雲をつかんで

새가  구름을 잡고

 

風になって 遥遠くへ

바람이    곳에

 

希望を抱いて飛んだ

희망을 안고선 날았어

 그리고 아이묭은 그녀의 죽음을 그녀가   있었던 최고의 용기이자 그녀 스스로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고 희망한다. 죽음마저 의미 없는 일로 치부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아닐까? 그래서 아이묭은 여학생을 용기를 내서 하늘을 나는 새로 본다. 그리고 아이가 새롭게 시작할 무엇인가는 그녀가 용기를 내어 하늘을  덕분에 아름다운 것이 되지 않을까 바란다.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아이묭의 목소리이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노래이다.

 

 愛を伝えたいだとか(사랑을 전하고 싶다든가)

 남성 화자의 입을 빌어 아이묭은 노래한다. 흔들리는 커튼도 조금  앞머리도 전부 기분이 좋다고. 하지만 ‘거기에다 달고 바로 이어져 나오는 문장은 조금 다르다.

 

それに割れてしまった目玉焼き

거기에다 깨져버린 달걀 프라이

 

ついてないなあ

재수 없어

 좋은 일들만 있지 않다. 좋지만 동시에  운은 따라주지 않는 날도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좋은 날도 싫은 날도 없다. 그렇게 하루는,

 

少し辛くて

조금 맵고

 

少し酸っぱくて甘ったるかったりさ

조금 시큼하고 달기도 

 하루뿐만 아니라  삶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어렵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지만 외로움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과 외로움은 서로 지독히도 얽혀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에 외로워진다. 외로워지면 사랑받고 싶어진다. 외로움은 싫지만 사랑은 하고 싶다. 복잡한 세상이 싫다.   없는  마음도 싫다.

 

僕は

나는

 

愛が何だとか言うわけでもないけど

사랑이 무어라고 말할  아니지만

 

ただ切ないと言えば キリがないくらいなんだ

그저 외로워서 끝이 없을 정도야

 

もう嫌だ

이제 싫어

 

 マリーゴールド(메리골드)

 

 멜로디, 가사, 심지어 뮤직비디오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아이묭을 오늘날의 자리로 이끈 노래가 바로  노래이다.

 

麦わらの帽子の君が

밀짚모자를  너는

 

 

揺れたマリーゴールドに似てる

흔들리는 메리골드와 닮았어

 아이묭의 사랑 노래 중에 하나로 밝은 멜로디와 귀엽고 솔직한 가사가 들어온다. 화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말하는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밀짚모자를  ‘ (각주 : 인터뷰에 따르면 밀짚모자를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금잔화처럼 보인 것에 영감을 받은 노래라고 한다.) 금잔화를 닮았다니 귀엽고 사랑스럽고 애정 어리다. 사랑은 완벽하지 않고 서툴다. 언어는 마음을  담지 못하고  표현되지 못한 마음은 어쩔  모른다. 그렇지만 좋다.  마음을 표현하려 애쓰고 있는 서로가 좋다.

 

柔らかな肌を寄せあい

부드러운 피부를 맞대고

 

少し冷たい空気を2

조금 차가운 공기를 둘이서

 

かみしめて歩く今日という日に

느끼며 걷는 오늘에

 

何と名前をつけようかなんて話して

어떤 이름 붙일까 얘기하면서

 

ああ アイラブユーの言葉じゃ 

아아 아이 러브 유라는 말로는

 

足りないからとキスして 

부족하다며 키스하고

 

雲がまだ2人の影を残すから

구름이 아직 우리의 그림자를 남겨두니까

 

いつまでも いつまでも このまま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대로

 

 

 夢追いベンガル(꿈을 좇는 벵골)

 학창 시절, 소위 말하는 ‘일진 그런 과거는 처음부터 없었던  마냥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을 SNS에서 우연히 보았다. 몇몇은 심지어 연예인이나 SNS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선과 악의 경계, 세상에서 인생에서 그건 과연 중요한 것일까?  얄궂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裏切ったはずのあいつが笑ってて 

배신했던  녀석이 웃고 있으니까

 

裏切られた自分がこんなに不幸だ 

배신당한 내가 이렇게 불행한 거야

 

 

ああ なんて 無様で皮肉なんだ 

, 얼마나  사나운 모양인가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노래. 타이틀은 아이묭이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andymori <ベンガルトラとウィスキ(벵골호랑이와 위스키)> 오마주했다고 밝혔다. 노래의 구상과는 다르게 활기찬 사운드에 부르다보면 분위기를 띄울 법한 신나는 노래. 노래도  얄궂다.

 폭발하는 듯한 노래. 열등감이 기저에 깔려있는 가사. 보편적이지만 찝찝한 감정. 인간적이라면 인간적이지만  감정은 너무 찝찝하다. 그런 감정을 아이묭은 직설적으로 말해버린다. 자격지심이라 말해도 좋지만  받는 것은  받는 거잖아?

走る 走る

달려 달려

 

遠くの方へこの脚振り上げて

 멀리  다리를 들어 올려서

 

回る 回る

돌아 돌아

 

目が回るくらい この日駆け抜けて

눈이  정도로  날들을 앞질러 가자

 

明日になって 朝が来た時 

내일이 되어 아침이 왔을 

 

見えるものはなんだろう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자격지심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펀치드렁크 러브, 찌질함과 답답함

널봐나

 

지인은 많은데 친구는 없더라.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들어줄 사람은 없더라.

대학에 들어  이후로 대다수의 시간을 답답해하면서 보냈다.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대학은  같은 진성 아싸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환경이다. 고등학교 때까지야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다. 기숙사실이든 교실이든, 하나의 공간에서 붙어서 지내다 보니 반강제적으로 친해졌었다. 성격적으로 모두와  맞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들은 우정, 또는 우정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위해서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했었던  같다. 무엇이 됐든  고등학교의 교우 관계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유지했고, 대학 생활에 대한 자신감도 그럭저럭 있었다. 고등학교 때처럼 적당히 선만 지키면, 친구들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물론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말수는 줄어들었다. 불편한 사람은 없지만, 딱히 편안한 사람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남아돌았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같은,  아싸스러운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나을  같았다.

 

기대감을 품고 PTA 『펀치 드렁크 러브 다운 받았다. (각주: 물론 정품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담 샌들러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쎄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주인공이  정도로 한심한 놈일 줄은 몰랐다. 나도 딱히 잘난 놈은 아니지만, 이건  아니지 않냐는 생각이  정도였다. 7명의 누나들한테 구박받으며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폰섹스를 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넘겼다가 문제들에 휘말린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레나라는 여인이 먼저 다가와 주지만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이건(각주: 아담 샌들러는   ‘베리 이건역으로 분한다.) 주저할 뿐이다. 정말 답답해서 영화를 보다 화가  정도였다.

 

문제는 연출마저  답답함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경 음향은 신경에 거슬리고, 정신 사나운 핸드헬드 카메라는 미친 듯이 산만하다. 샌들러의 얼굴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만행을 보면, 감독이 관객들한테 시비를 거는  아닌지 의심이  정도다. 솔직히 조금  받았다. PTA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젊고 잘생긴감독이다. (각주: 적어도 펀치 드렁크 러브가 개봉했을 2002년에는 그랬다.) 그런 사람이  안다고 이런 영화를 만드는가? 인싸들이  아싸들의 삶을 뺏어 가는구나 싶었다.

 

 

 

 

사실 주인공과 연출에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줄거리에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길가에 풍금은 갑자기  떨어지고, 여주인공은  이런 한심한 주인공한테 반하는가? 베리 이건은  생기지도 않았고, 성격이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니다. 푸딩에 딸린 쿠폰으로 비행기 마일리지를 쌓는다는 생각을 하는  보면, 현실 감각도 조금 떨어지는  같다. 폰섹스 업체에 개인정보를 전부 넘기는 멍청이가 갑자기 달라져서 사랑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버린다고? 줄거리의 전개 과정  무엇 하나가 충분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일일이 시비를 걸자면 끝도 없이 불만족스러울 영화이다. 그러나 참으로 우스운 점은, 나는  영화가 해피엔딩이라는 사실에 안도해버렸다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이건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그가 변화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마치 스스로가 변화한 것처럼 흐뭇해하고 있었다. 뭔가 감독한테 조련당한  같아 자존심 상했지만, 아무튼 그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개연성에 대해 조금만  얘기해 보자.  영화는 분명 개연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정말 단점인가? 애초에 우리 삶에 개연성이라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실제 현실에서 우리들은 굳이 행동의 이유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소 충동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 다음 뒤늦게 거기에 이유를 부여할 뿐이다. 합리성은 대게의 경우 환상에 불과하다. 사랑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각주: 물론 딱히 제대로 사랑해본 적은 없다.)  깊은

관계는  깊은 상처를 가져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불나방처럼 서로에게 다가간다. 솔직함이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솔직해질  있는 상대를 갈구한다. 개연성이나 이유 따위를 일일이 따지다가는, 남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겁쟁이만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겁쟁이로서, 나는 이건과 레나의 사랑에서 개연성을 찾기보다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I don't know if there is anything wrong because I don't know how other people are.”

 

답답하게만 굴던 베리 이건은 모든 것을 버려둔  레나를 만나러 하와이로 떠난다. 찌질하기만 하던 이건은 사랑의 힘을 통해 시련을 극복한다. 혼자 훌쩍거리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화장실에서 깽판을 치며 스스로를 탓하던 주인공은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베리는 분명  나은 사람이  듯하다. 다소 씁쓸한 점은 이건과는 다르게 나는 영화를 보기 2시간 전과 달라진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나보다 한심했던 놈이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니 괜히 나만 비참해진다. 남들 눈을 신경 쓰면서 위축된 자신에게 자괴감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베리처럼 갑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바뀔  있었으면 진작에 바뀌었겠지!

 

나는 여전히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벌써  학기가 흘러갔다는 점에서 소름이 돋는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의 희망은 어느 정도 남아있는  같다.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법이다. ... 우선 영화는  그만 보고 대학에서 ‘진짜사람들을 만나러  움직여야  듯하다. 로또도 일단 긁는 놈이 당첨되는 법이라 하지 않는가.

 

¡Adiós, Samantha Jones! - <Sex and the City> 사만다를 보내며 -

레몬밤

  글은 드라마  영화 <Sex and the City> 내용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섹스하는 여자야!”

아부다비, 중동의 한복판. 히잡을 써야만 하는 여인들. 여자에게 금지된 , 가슴, 다리가 드러난 . 그런 옷을 입은  여자의 가방이 뒤집히며 콘돔이 쏟아진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에 대한 남성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이 이어진다. 그러자 그가 가운뎃손가락을 들며 외친다. “Yes, condoms! I HAVE SEX!”

이처럼  시원한 장면이  있을까. 영화 <Sex and the City 2> 후반부 장면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동 남자들에게 크나큰 엿을 날려준 주인공은 바로 사만다. <Sex and the City>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캐릭터다.

 

사만다에게 욕망의 발현과 충족은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사만다는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게  것이 서러워 미란다 어머니의 장례식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요가 수업 도중  남자에게 “Wanna fuck?” 외치기도 하며, 남자 수도승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사진] "남자가 보자마자  갈만한 거로 주세요." 속옷 가게 직원에게도 거침없는 사만다.

 

이렇게 단편적인 사실들만 늘어놓으니 마치 사만다가 성욕에 미친 소시오패스 같아 보이지만, 이는 연출에 불과하다. 사만다 역을 맡은 배우  캐트럴이 나머지 출연진과 스태프들에게 오랜 시간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드라마 초창기 이미 유명 배우로 사랑받은  캐트럴과 달리 라이징 스타였던 사라 제시카 파커(캐리 ) 킴을 질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사라는 친구 마이클 패트릭 킹과 함께 <Sex and the City>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드라마에 자신의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킴은 시즌이 흘러갈수록 점점  많은 노출을 감행하며 섹스에만 환장하는 듯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다. (: 이건 정말 사라 제시카 파커가 못됐다고밖에 설명할  없는 것이, 캐리를 제외한 나머지  주인공은 드라마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상당 수준의 노출 장면을 찍었는데, 캐리는 같은 상황에서도  속옷 차림이거나 다리만 나오거나 한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사만다를 매력적이라 말한다. 배배 꼬인 연출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스러운 것은 사만다라는 캐릭터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I am 50 fucking 2 and I will rock this dress.”

사만다는 나이에 대한, 섹스에 대한 모든 사회적 편견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사만다가 고정관념에 찌든(?) 가부장제의 공주 샬롯과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인 이유다. 사만다는  주인공  가장 나이가 많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나이 들어감 받아들인다. 36살이 되는 것에 기겁하는 샬롯과 달리 사만다는 안경을  자신을 멋진 45살로 칭한다. 52살이 되어서도 사만다는   스타가 입을만한 (혹은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게 시사회에 나간다.

[사진] 유방암에 걸린 여성들을 위한 격려 연설을  때도 “빌어먹을, (유방암에 걸린 여성) 그게 바로 나에요.”라고 시원하게 외치며 가발을 벗어 던지는 사람, 그가 사만다다.

자신의 건축가와 잠을  ‘헤픈 여자라서, ‘ 팔아서 일을 구한  같아서사만다를 고용하길 거부하는 리처드 라이트에게도 사만다는 자신이 남자였다면 진작에 리처드가 위스키  잔을 주면서 악수를 건넸을 거라고 쏘아붙인다. 뒤로 가서는 울고 말았지만, 거물급 사업가 앞에서도 당찬 사만다는 끝끝내 일을 따낸다.

[사진] 택배 기사에게 오랄 섹스를 해주다 캐리에게 들킨  말다툼을  때도 사만다는 “내가 숨을   있고 무릎을 꿇을  있는  오랄 섹스를 할거야!”라는 사만다다운 대사를 남긴다.

 

“I love you, but I love me more.”

결국, 사만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자가 아니라 ‘ 자신이다. 사만다는 순간순간 ‘ 자신 충실한 삶을 산다. 남자라는 것은 사만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의 ‘취사선택 가능한요소로 존재한다. (중간중간 사랑에 빠진 정말   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사만다는 ‘벤츠연하남 스미스 제로드에게 “I love you, but I love me more.” 같은 명언을 날리며 이별을 고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사만다의 친구들(특히 캐리) 남자와의 관계에 매인 삶을 보여준다. 하버드 법대를 나온 능력 있는 변호사 미란다는 바람까지  남편 스티브를 거둬주다 못해 그의 치매 걸린 시어머니까지 부양한다. (: 스티브는 <Sex and the City>  시즌을 통틀어 최고의 똥차다. 관계가 이어지는 내내 미란다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을 보면 아주 기가 찬다.) 그리고 원치도 않았던 남자아이를 낳고 키우기 위해 브루클린으로 이사를 가고, 좋은 직장에서 작은 직장으로 이직한다. 명문 스미스 여대를 나와 갤러리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샬롯은 모든 것을  그만두고 결혼 생활에 매진하다가 경력 단절이 된다. (: 샬롯의 경력이 너무 화려해서 다른 갤러리에서 샬롯을 채용하는 것을 꺼린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샬롯은 유대교로 개종까지 하는 노력 끝에 재혼에 성공하고, 그렇게 원하던 아이를 둘을 키우게 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크림색의 빈티지 발렌티노 치마를 제물로 바치게 된다. 캐리는 여전히 작가 생활을 이어가지만, 자신의  무기였던 ‘싱글  생활을  이상   없게 되면서, 칼럼 Sex and the City 정체성은 사라지게 된다. (: 그리고 캐리는 이미 작가의 수입으로 자신의 집을  만큼의 재산을 모으지 못해 미스터 빅을 찾아가 돈을 빌린 적이 있으며, 알렉산드르 페트로브스키를 따라 직장, , 친구  모든 것을 포기하고 파리로 떠난 적도 있다.) 굳이 드라마의 결말이 아니더라도, 사만다의 친구들과 사만다는 정말 다른 인간관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사진] 캐리의 약혼 소식을 들은 사만다의 하소연

 

“We have it all? Samantha has it all!”

친구들이 이러한 길을 걸을  홀로 남아  백만  가까이 되는 집세를 내면서 자신의 사업체를 꾸준히 운영하는 사람은 사만다만이 유일하다. 사만다야말로 모든  가진 “Fabulous” 싱글 걸의 삶을 사는 것이다. (: <Sex and the City> 비혼주의 드라마는 아니지만, 주인공들이 결국 어떠한 관계에 매여버린 삶을 산다는 것은 화려한 싱글 걸들을 동경하며 바라봐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배신이 아닐까. 결국 ‘화려한 싱글  유통기한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싱글 로서의 미래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사진] 사만다는 자신이 멋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기 없는 베이비 샤워(I don’t have a baby shower)” 여는 여자다.

 

“We are soulmates.”

사만다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우정을 중요시하는 인물이다. 사만다는 리처드 라이트의 바람기를 의심하며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를 일찍 떠나기도 하지만, “남자와 자식 때문에 우정을 버리지 않기로 했지 않냐라면서 친구들과의 시간을 위해 남자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기도 한다. 사만다는 약혼했다는 캐리에게 “Fuck you” 내뱉지만, 뒤에선 캐리의 남자친구가 프로포즈 반지를 고르는 것을 도와주며 누구보다 캐리를 응원한다. 사만다는 미란다의 아이가 브런치 자리에  있는 것을 대놓고 불편해하지만, 자신이   전부터 예약해  미용실을 미란다에게 양보하며 아이를 대신 봐준다. 셰익 칼리드가 아부다비에 있는 자신의 호텔에 사만다를 초대한다고 하자 그가 유일하게   조건이 “자신의  친구(캐리, 미란다, 샬롯) 함께 초대하라 것만 보아도 사만다가 친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있다.

사만다는 그만의 방식으로 친구들을 사랑하고 위로한다. 사만다가 있기에 보수적인 샬롯은 수줍지만 편하게 친구들에게 자신의 욕구를 드러낼  있고, 캐리는 남자관계에 있어서   자신에게 솔직한 선택을   있으며 미란다는 ‘미혼모라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일  있다. 그래서 사만다는 철부지 친구 같기도, 든든한 언니 같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사만다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뒤틀린 듯하지만 뒤틀리지 않은 당당함 때문이며,  속에 숨어있는 인간적인 면모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과한 자신감과 자기표현을 통해 우리는 대리만족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인간적인 따뜻함을 보며 동질감을 느끼고 말이다.

<Sex and the City> 영화 3 제작이 지난 2018 최종무산 되었다. (: 애초에 영화 2편부터 개연성이라고는 개나  전개가 계속되었고, 영화 3편의 시작이 미스터 빅의 죽음이었다는 데에서 판단하건대 3편이 만들어졌다 한들 완성도가 높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무산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캐트럴은 <Sex and the City> 리부트에 대해 자신의 나이가 이미 61살이며, 이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 때가 되었다고 밝힌  있다. 드라마의 오랜 팬으로서  명의 싱글 걸들의 이야기를  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은 아쉽지만, 수년간 지속된 따돌림이라는 수난 속에서 킴이 만들어  사만다를 이제는 놓아줄 때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만다는   마음속 ‘최애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사만다로서의  캐트럴이 아닌 배우  캐트럴을 응원한다.

아디오스, 사만다!

Road to Vntrve Kvlt

콩브레과자점

 

Trve Kvlt 대해서

배의  쪽에는 “Trve Kvlt”라는 단어가 무지갯빛 그레이디언트로 새겨져 있다. 보는 사람마다 “어떻게 읽어?” 혹은 “무슨 뜻이야?”라고 물어본다.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만,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   타투 어떻게 읽어? 트루브 크불트? 독일어야?”

아니, 브이를 유처럼 읽으면 . 트루 컬트. 독일어는 아니야.”

 정말? 그게 무슨 뜻인데?”

내가 듣는 음악 장르에서 자기들끼리의 집단을 가리키는 거야.”

,  듣는 메탈?”

. 조금  정확하게는 블랙메.”

 

 그리고 대화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주제로 흘러간다.

 

아무도  물어봐 주지는 않아서, 그리고 물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수줍어서 밝히지 않은,  타투의 비밀이  가지  있다. 일단 “Trve Kvlt” 블랙 메탈 팬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팬덤이 아니다. (물론 많은 팬덤들이 이미 컬트적인-종교집단 같은- 성향을 보이기는[→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밴드의 팬이라거나 블랙메탈의 청취자라는 이유로 “Trve Kvlt” 속할 수는 없다. (또한, “Trve Kvlt”라고 스스로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Trve Kvlt” 일반 팬덤과 다른 점은, 팬덤은 내가 어떤 아티스트가 좋다고 인정하고 선언하면, 본인을  팬덤의 일원이라고 선언할  있지만, “Trve Kvlt”에서는 “Trve Kvlt” 자처하는 다른 사람들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 서로의 승인으로 연결된 집단이다.

 

 승인은, 우습게도 매우 현대적인 방식으로, 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블랙 메탈 자체가 메탈 가운데 강세인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찾고자 하는 욕망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Trve Kvlt” 페이스북 그룹이라던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이상의, 실재하는 이념인  여겨졌다.

 

“Trve Kvlt” 가장 중요한 특징은 트루 블랙 메탈(True Black Metal) 듣는 사람만이  이름을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트루 블랙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블랙 메탈은  트루하지 않은지,  판단 기준이 없다. 그저 “Oh man, that’s so trve.(오우 , 그것  트루한걸.)”라는 말이 향하는 대상이면, 트루한 앨범, 밴드, 팬으로 격상된다.

 

“Trve Kvlt” 우상시하는, 혹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최소한의 요건으로 “추위에 강함”, “자연 친화”, “늑대 같은 바이킹등을 찾아볼  있기는 하다. 한겨울에 나무가 빽빽한 산에서 반팔티-물론 밴드 티셔츠다- 입고  머리를 휘날리며-남녀   없이- 징이 가득 박힌 아대는 팔에, 탄띠는 허리에 차고 (소위 알통 자랑이라고 부르는)있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각주: 숲을 좋아하는 차원에서의 자연 친화도 있지만, 자기 몸에 대해서도 매우 자연 친화적이다. 남녀   없이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Emo, Scene, Grunge 등의 음악에서 파생된 스타일처럼, “Trve Kvlt” 일단은 특정한 종류의 모습을 갖고 있고, 그것에 속하기 위해서는  모습을 하고 있기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Fvlse(false) 배척된다. “트루하지 않으면 “폴스 되며, “폴스 (그들끼리의 농담으로는) 처벌, 처단의 대상이다.

 

수줍어서 친구에게 말하지 못한  다른 비밀은, “Trve Kvlt” 무지개색으로 새기는 것은 엄청난 “폴스라는 것이다. “Trve Kvlt” 오직 검정과 하양만을 허용한다. 얼굴을 시체처럼 분장하는 “콥스 페인팅(Corpse Painting)”, 블랙 메탈 리스너의 전리품인 밴드티셔츠도 오직 검정과 하양으로만 만들어진다. 이분법적인 색의 규칙에서 벗어난 “Trve Kvlt” 사용은 반역이었다.

 

이런 모반을 작게나마 배에 품게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터놓고 말하면, “Trve Kvlt”  장르에 심취한 사람들이 만든, 심심풀이 집단이다. 다만 어느 집단이 그렇듯,  집단만의 다소 오그라드는 전통과 콘셉트가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Trve Kvlt”라는 종교집단 같은 이름은 메탈 리스너 간의 유대감을 강화할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Trve Kvlt (meme)에서 드러나듯, 약간은 우스운 집단으로 전락하기까지 했다.

 

 

모반 개시

 

그렇다면 나는  “Trve Kvlt” 대해 은밀한 반란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Trve Kvlt” 단순히 온라인 친목 단체였다면, 반감을 갖진 않았을 것이다. “Trve Kvlt” 친목 단체 같은 느슨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때때로 아주 숭고한 정신으로서 실체를 갖곤 했다. 숭고한 정신으로 드높여진 “Trve Kvlt” 구성원을 옥죄는 굵은 밧줄이었다.

 밧줄의 주름에는 반기독교적인 색채가 서려 있다. 이것은 “Trve Kvlt” 시초라고   있는 “트루블랙 메탈 밴드의 영향이다. “Trve Kvlt” 줄줄 읊는 (신들의 계보와 같은) 그들의 족보의 제일 위에는  Burzum Mayhem 있다. “트루 옛날의 블랙 메탈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완고히 거부하는 “Trve Kvlt” 별수 없이 옛날 블랙 메탈의 동향인, 반기독교적이고 사타닉한 길을 걷게  수밖에 없었다. (각주: 블랙 메탈 모두가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띠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이념과는 관계없이 중세적인 분위기나 자연을 주제로 하는 블랙 메탈의 분파가 대부분이며, 현대에 들어서는  분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요즘 들어서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농담으로 소비하기에도  신념이 개조되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색깔을 허용하지 않고, 오직 흑과 백만이 허용되는 컬트. 이것은 비단 블랙  메탈뿐만 아니라 메탈 자체의 문제이기는 하나, 유색 인종의 음악은 “트루하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 집단의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가?”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배척적인 “Trve Kvlt” 이런 분위기는, 비유럽권 메탈 레이블에게는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신념으로서의 “Trve Kvlt” 화두에 오르기만 하면, 나의 음악 취향은 어떤 방식으로든 “폴스”(“fvlse”) 것이 되었고, 나의 지역적 위치 때문이든, 인종 때문이든, 성별 때문이든 나는 Fvlse 판정되어 수없이 많이 (*장난으로)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평화로운 “Trve Kvlt”  동안에는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음악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는, 유대감으로 얽힌 단체일 뿐이었다. 그런데, 밤이 오면 이상함을 계속 맞닥뜨려야 했다. 재미있지 않았던 교회 방화에 대한 농담, Burzum 범죄에 대한 영웅적 추앙, “폴스로의 매도. 그래도 이게 위협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달이 높이 솟으면, 나는 조금 숨었다. 위협은 나에게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Myrkur라는 여성 블랙 메탈 원맨밴드가 등장했다. 그녀의 음악은 굉장히 “트루하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미는 예쁘지 않아요. 미는 피부에  닿는, 잔인한 자연과 같은 것이에요.”(각주: “Beauty isn't pretty, beauty hits you in the face, beauty is like nature - it's just brutal.” New York Post Interview with Myrkur.)라고 말하는데, 이런 종류의 비인공성, 자연성이 “트루 블랙 메탈의 기본 조건이다[기본 조건인  알았다]. 그런데 Myrkur 처음 메탈 씬에 나타났을 , 그녀는 “트루 칭송되기는 커녕, 블랙 메탈 순수주의자-이들이 사실상 “Trve Kvlt”라고 말할  있다.-들에게 지독한 살해 협박을 받았다.(각주: “Danish multi-instrumentalist Amalie Bruun has endured an onslaught of Internet hate and even death threats from black-metal purists since she formed her Myrkur project in 2014.” Revolver Magazine Interview with Myrkur.) 그녀는 “Trve Kvlt” 더럽히는 어두운 마녀(각주: “Myrkur” 아이슬란드어로 어둠이라는 뜻이다.)라고 조롱당했다.

이때의 사건 이후로, “Trve Kvlt” 그저 친목 단체로써 이용하고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Trve Kvlt”라는 이름표를 붙이기가 곤란해졌다. 암묵적으로 “Trve Kvlt” 인종적, 성적인 배제를 약간은 품고 있었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적은 처음이었다. “Trve Kvlt” 블랙 메탈의 음악적 고립을 넘어 인종적, 성적 혐오를 낳았고, 결국  뿌리에서 NSBM (National Socialist Black Metal - 사실상 나치 블랙 메탈로 알려져 있다) 낳아버리고야 말았다. 이런 극단을 마주한 “Trve Kvlt”, 고립적인 늑대 놀이만을 즐기던 많은 구성원들은  이상 자랑스럽게 “Trve Kvlt” 외칠  없게 되었다.

 

 

Vntrve Kvlt

 

나는 완전히 “Trve Kvlt” 속하지는 못했던 사람이었다. (“Trve Kvlt” 광신적인 달이 떠오르면, 나는 배제되었다고 앞서 말하지 않았는가.) 애초에 어느 정도 “폴스였던 내가 “트루하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폴스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트루하지 않을 , “폴스 아니다.

 

그럼에도 “Trve Kvlt” 완전히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완전히 속해있지도 못하면서, 일부의 극단주의와 가끔씩 떠오르는 달의 악몽이 “Trve Kvlt” 전체를 오염시키는 , 얼룩지게 만드는 것은 블랙 메탈 씬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은 “Vntrve Kvlt”였다.  이상 “Trve Kvlt” 지지하지 않지만, 그것의 역사, 존재는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부정의 방식.....

 

나의 무지개색 “Trve Kvlt”, “Trve Kvlt” 대항하는, 은밀한 반발이었고, “Vntrve Kvlt”로의 이행의 선언이었다.

우주소녀의 판타지케이팝 마법소녀의 연대기

양장피

최근 케이팝에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특수한 영역을 구성해 차별성을 갖추고자 하는 그룹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역이라 함은 , 무대, 비주얼, 뮤직비디오를 통해 구성되는컨셉’, ‘세계관’, 또는이미지 말한다. 그룹이 아니면 없는, 혹은 그룹이 가장 수행할 있는 독자적인 세계관의 존재는 코어 팬들은 모으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룹의 개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아이돌 시장이 커질수록 컨셉은 세분화된다. 섹시, 큐티, 청순의 세가지 카테고리 내에서 걸그룹이 정의되던 시절은 지난 오래다. 

우주소녀는 중에서도 판타지라는 장르를 독점하고자 쉬지 않고 달려왔다. 우주소녀의 이미지는 이름에서도 확연하게 다가온다. 보라색 우주의 은하수를 건너서 개의 달이 뜨는 행성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마법소녀들. 정도의 묘사로 우주소녀의 대략적인 이미지를 설명할 있으리라 생각한다. 글은 우주소녀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우주소녀만의 판타지가 성립되고 발전된 과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필자와 같은 취향을 가진 이라면 부디, 우주소녀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기를 바라면서.

  • 미니 1 <WOULD YOU LIKE?> 

데뷔 앨범인 미니 1 <WOULD YOU LIKE?> 인트로 <Space Cowgirl> 몽환적인 신디사이저는 우주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혜성을 연상시키며, 우주소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컨셉의 방향이 확고함을 알린다. 타이틀 <MoMoMo> 뮤직비디오에는 이후 우주소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은하계 스케일의 CG 등장하지도 않고, 곡도 여느 걸그룹 데뷔곡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소속사 스타쉽 엔터테인먼트는 데뷔 앨범을 발매하며 앞으로 우주소녀는 12 별자리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우주적 상징을 적극 활용하여 우주소녀만의 판타지를 펼쳐낼 것이며, 듣고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웰메이드 걸스팝 제시할 것이라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스타쉽은 후속작에서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다.

  • 미니 2 <THE SECRET>

미니 2집의 타이틀 <비밀이야> 뮤직비디오는 마법진을 연상시키는 배경 위에 쓰여진 안의 코스모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의미를 가늠해볼 시간도 주지 않고 오르골 테마와 함께 행성에 운석이 떨어진다. 붉고 거대한 달이 보라색 하늘에 수많은 별똥별이 떨어지고 아래 광대한 초원에서 소녀들이 등장한다. 멤버별 컨셉을 보여주는 개인 샷에는 엘프 , 늑대, 날개와 같은 판타지적 요소들, 우주를 달리는 자동차와 우주인 헬멧을 추락하는 소녀, 스카우터 등의 SF 요소들이 등장한다. 뮤직비디오 전반에서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마법진에는 12 별자리를 상징하는 기호들이 들어있다. 넘쳐나는 상징들은 사이의 연관성을 추리하고자 하는, 소위 말하는뮤직비디오 해석 놓고 열띤 토론을 하고만 싶은 오타쿠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요소들 상당수가 다양한 서브컬쳐 장르의 오마주라는 사실도 오타쿠 몰이(?) 몫을 한다. 상당한 퀄리티의 CG 구성된 우주적 스케일의 배경과 스토리의 완성도는 미니 1집에서 예고되었던 우주소녀의 방향성을 확실하게, 아니 비장하게 보여준다. <비밀이야> 우주소녀 타이틀곡의 음악적 색깔을 결정지은 곡이기도 하다. <비밀이야> 이후 우주소녀는 작곡가 그룹 e.one Full8loom에게 꾸준히 타이틀곡을 받아왔고, 이들을 통해 정교한 구성과 스트링의 활약, 세련된 신스사운드라는 우주소녀 타이틀곡의 특색이 정립되었다.

  • 미니 3 <From. 우주소녀>

<From. 우주소녀> 타이틀 <너에게 닿기를> <비밀이야> 후속편이라 말해도 무방해 보인다. <너에게 닿기를> 뮤직비디오에서도 여전히 미지의 행성을 연상시키는 무지갯빛 하늘과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등장한다. <비밀이야>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밝고 순수한 분위기이다. <비밀이야> 우주소녀가 은하계를 구하는 사명을 비장한 마법소녀였다면 <너에게 닿기를> 우주소녀는 판타지스러운 공간에 떨어진 평범한 소녀들이다. 멤버들은 파스텔 톤의 캐주얼 룩과 교복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폴더 핸드폰을 통해 서로와 소통하며 신비롭고 아름다운 공간들을 누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여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고, 관람자와 자신들의 세계를 분리하지만 곳에 닿고자 하는 욕구를 계속해서 자극하는 . <비밀이야> <너에게 닿기를> 통해 우주소녀는 팬들을 끌어당기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확정한 했다. 정규 1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정규 1 <HAPPY MOMENT>

2017 우주소녀는 드디어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전작들의 독창성에 매료된 팬들(필자를 포함한) 정규 앨범이 시도할 있는 스케일의 확장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규 1 <HAPPY MOMENT> 성격은 장의 미니앨범을 거쳐 우주소녀가 구성한 세계를 완전히 벗어났다. 타이틀곡 <HAPPY> 전형적인 데뷔 걸그룹의 이미지인 치어리더를 메인 컨셉으로 캐주얼하고 한없이 밝은 스쿨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주소녀 뮤직비디오의 트레이드 마크인 판타지적 CG 찾을 없었다. 팬들은 <HAPPY> 아닌 2 트랙 <기적 같은 아이> 앨범에서 가장 우주소녀 다운 곡이라고 생각하며, <기적 같은 아이> 타이틀이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적 같은 아이> <비밀이야> 작곡한 e. one 작품이었다. 정규 1집의 반응이 미니 앨범들보다 확연히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스타쉽은 미니 4집에서 우주소녀가 가야 길을 다시 찾았다. 

  • 미니 4 <Dream your Dream>

 

 

<Dream your Dream>부터 우주소녀는 타이틀과 수록곡 전체가 하나의 테마 아래 완결성을 갖추고 이어지는 미니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감을 잡았다. 마디로 이후 우주소녀의 행보를 설명할 있을 것이다. <Dream your Dream> 앨범 커버에서 다시 등장한 마법진은 프로듀서들의 확신을 보여준다. <Dream your Dream> 컨셉은 마법학교로, 전작보다 구체적인 설정과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 <Dream your Dream> 마법학교 1학년이자 꿈의 배달부인 포레우스 유닛, 꿈을 수집하는 마법학교 2학년 아귀르떼스 유닛, 꿈을 현실로 완성시키는 마법학교 3학년 에뉩니온 유닛으로 멤버들을 나누어 스토리를 진행한다. 뮤직비디오와 수록곡에서 구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처럼 극도로 디테일한 설정을 넣은 앨범을 만들었다는 것은 스타쉽이 <HAPPY MOMENT> 방향 전환을 그만큼 후회하며, 그렇기에 이를 갈고 우주소녀의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각오로 보인다. 

 타이틀곡 <꿈꾸는 마음으로> 뮤직비디오는 판타지 학원물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킨다. 쨍한 대비와 채도에 푸른빛이 감도는 화면에서 평범한 학생들처럼 거닐던 우주소녀는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고 계시를 받은 달려간다. 거대한 악이 다가올 것처럼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소녀들은 옥상에서 결의에 눈빛으로 춤춘다 안되면 되게 .’ ‘우린 어떻게든 만나 찾아낼게 달려갈게 강해져 땜에 같이 모호하지만 단호하고, 어딘가 아련한 메시지는 세계의 멸망을 막아내겠다는 마법소녀의 결의와 같다. ‘돌고 돌아갈수록 애틋해질수록 좋아라는 마지막 가사는 마법소녀가 가진 연약함 속의 강인함과 사랑에 대한 믿음에 눈물 흘리는 오타쿠의 심금을 울린다. 이처럼 우주소녀가 음악과 컨셉 뿐만 아니라 가사에서도 특유의 판타지스러움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 <Dream your Dream>이다. <비밀이야> <너에게 닿기를>에서 확립된 음악적 특성을 활용하면서, 전작과 달리 비유 위주의 모호한 가사에 성별 지칭 단어를 없애면서 우주소녀의 판타지가 완성되었다. 수록곡 중에서는 <르네상스> 스트링 테마의 화려한 사용과 독특한 소재, 파워풀한 연정의 보컬이 어우러져 타이틀과 함께 앨범의 축을 잡는다. 

  • 미니 5 <WJ PLEASE?>

<Dream your Dream> 완성도는 놀랍게도 <WJ PLEASE?>에서 더욱 성장했다. 수록곡 전체의 퀄리티가 전작들과 비교할 없게 발전했다. 뿐만 아니라 감당하기에 과해 보였던 마법학교 컨셉까지도 제대로 소화해냈다. 타이틀 <부탁해> 뮤직비디오는 뛰어난 그래픽으로 마법학교라는 배경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Dream your Dream>에서 나눈 유닛 별로 뮤직비디오에서 씬을 나눠 연출했으며, 실물 앨범도 유닛에 맞춰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었다. <부탁해> 몽환적인 신스 사운드는 풍성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수록곡들과 절묘하게 이어진다. <, , > <아이야>, <가면무도회> 이어지는 트랙은 자기복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사운드를 포용하며 분위기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부탁해> 전작들과 비교해 매우 마이너한 사운드를 펼친다. <부탁해> 사운드와 진행은 안무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더욱 힘을 얻는다. 이는 뮤직비디오의 연출에서도 강조된다. 벌스에서 댄스 파트는 파란 하늘 아래 신비로운 마법학교 건물에서 교복을 입고 수행되지만, 분위기가 고조되는 후렴구에선 어두운 실내로 배경이 전환되고 고스로리를 연상시키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안무가 진행된다. 가장 폭발적인 사운드가 사용되는 마지막 후렴구에서는 수많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의 야외를 배경으로, 일렬 대형을 유지하며 멤버들이 고고하게 걸어오는 안무를 선보인다. 또한 벌스에서 여러 등장하는 멤버들 간의 스킨십을 활용한 안무는 사운드의 강약과 몽환적인 보컬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 미니 5 <WJ STAY?>

 

 

 

<WJ PLEASE?> 성공은 <WJ STAY?> 이어졌다. 타이틀 <La La LOVE> 역대 우주소녀의 타이틀 가장 드라마틱한 진행과 풍성한 사운드를 선보인다. <부탁해> 마이너한 감성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파트를 늘려 이전과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La La LOVE> 전작들의 가장 차이점을 컨셉의 성숙함이라 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교복 의상이 완전히 사라졌고, 어두운 색조 위주의 화려한 드레스 의상이나 깃털과 레이스가 달린 화이트 의상을 사용하여 <부탁해> 보다도 더욱 고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뮤직비디오의 컨셉은 미스터리한 카니발로, 화려하게 빛나는 오브제들과 다양한 색조의 서커스 공간이 더욱 다듬어진 사운드와 어우러진다. 전작에서 마법학교라는 컨셉을 차용해 성장의 레파토리를 보여주었으니 <WJ STAY?>에서는 성숙이라는 테마를 보여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WJ PLEASE?> 우주소녀가 상대가 먼저 말해주기를 부탁하는 소녀와 성인의 경계에 놓여있었다면, <WJ STAY?> 우주소녀는 누군가에게 옆에 머물러주길 바라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밝힐 있는 어른이 것이다. 

  • 스페셜 1 <For the Summer>

  2019 발매된 <For the Summer> 우주소녀의 앨범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음악방송 연속 1위에 성공했다. 스페셜 앨범이라는 분류와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For the Summer> 시즌송으로 구성된 앨범이다. 그렇기에 판타지라는 우주소녀의 정체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지만, 우주소녀를 만드는 하나의 정체성이웰메이드 걸스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주소녀의 특색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타이틀 <Boogie up> 풍성한 레트로 사운드와 청자를 이끄는 확실한 강약 조절은 이전 우주소녀의 음악에서 찾을 있는 요소들이다. <For the Summer>에서 판타지적 요소의 부재는 우주소녀의 방향성을 바꾼 것이라기 보단, 스페셜 앨범이기에 가능한 하나의 시도 또는 이벤트라고 있다. <Boogie up> 성공은 우주소녀가 충분히 대중성을 획득할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무리 없이 높은 퀄리티의 사운드를 소화해낼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증명한 것이다. 

우주소녀스러움 확고하게 구축한 상황에서 이러한 전환은 도리어 반갑다. 케이팝에서 세계관의 구축이 초기 코어 팬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을 유지하는 것을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세계관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은 결국 아이돌의 생사를 결정하는 대중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있기 때문이다. 우주소녀의 판타지가 적절한 선의컨셉으로 성공한 것은 그들의 세계관이 그들의 활동 전체를 정의하는 스케일과 정교함, 연속성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였다. 우주소녀는판타지라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장르를 활용할 , 완전히 독자적인 그들의 세계관을 연속적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Dream your Dream> <WJ PLEASE?>에서 사용된 마법소녀 세계관은 코어 팬들을 만족시켰지만 대중이 우주소녀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즐기기 위해 컨셉을 필수적으로 알아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WJ STAY?>에서 마법학교 설정은 졸업이란 이름 하에 폐기되었다. 우주소녀는 다른 판타지를 모색했다. 우주소녀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설정과 상징을 달달 외울 필요는 없다. 현실에서 벗어난아름답고 신비로운이미지를 보면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하다. 우주소녀의 세계는 모두에게 열려있다.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마시고, 마법소녀들의 노래를 들어보시길. 

김윤아가 노래하는 모순의

- 김윤아 <노래가 슬퍼도 인생은 아름답기를> 후기

 

블루문

 

 

0. 노래가 슬퍼도 인생은 아름답기를

 노래가 슬퍼도 인생은 아름답기를이라는 거짓된 문장이 공연의 시작부터 관객에게 던져진다.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인생이 슬프기에 노래는 아름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생이 슬플수록 노래는 아름답다. 그러나 김윤아는 시작부터 거짓과 모순의 문장을 던지며 공연을 시작했다. 그는 인생과 예술이 모순이라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모순에 관한 노래를 불러보이고 싶었던 걸까.

 

1.

 

 그는 <Summer garden> <증오는 나의 >으로 공연을 열었다. 영원히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버리지 말아달라는 애원을 담담하게 뱉어내는, 옷을 입은 여름정원 안의 소녀와, 내일이면 아버지를 죽이리라고 다짐하는 증오에 가득 . 대조적인 오프닝이었지만 꽃에 둘러싸인 옷을 입은 무대 위의 김윤아와 어울리는 오프닝 곡들은 공연이라는 거대한 시를 알리는 거대한 서론과 같았다.

 먼저 <Summer Garden>에서는 여린 소녀가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애원섞인 말을 뱉는 내용이지만, 반주는 느리고, 음색은 담담하면서도 몽환적이다. 말로는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미 놓아주고 상대에게 미련을 갖지 않은 것만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속이라고 해도 믿을 있을 법한, 신비로운 여름정원에 있는 소녀가 실제로 가진 마음이 무엇인지, 소녀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는 상상하기 나름이지만, 확실한 것은 김윤아는 소녀가 되어 모순과 거짓을 품고 노래했다는 점이다.

 <증오는 나의 > (각주 : 매일 내일은 당신을 죽이리라 / 마음에 마음을 새겼어 / 만의 생각이 / 머리 속을 헤엄치며 / 무력한 비웃고 // 매일 내일은 구차한 생을 / 고요히 끝내리라 꿈꿨어 / 만의 생각이 / 머리 속을 헤엄치며 / 비겁한 비웃고 / 고맙고 고마운 아버지 / 당신을 죽도록 이토록 / 증오한 덕에 아직 살아있고 / 증오는 나의 / 배신하지 않을 나의 아군 / 나의 주인 나의 // 나는 자아를 잃은 증오의 하수인 / 눈엔 칼을 심고 / 가슴엔 독을 품은 / 꿈에도 잊지 않을 / 사무치는 증오 / 당신을 해하리라 날이 오면 / 증오는 증오를 낳고 / 증오는 증오를 낳고 / 증오는 증오를 낳고 / 증오는 증오를 낳고 // 검은 증오의 불길이 언젠가는 / 삼키고 멸하고 말겠지 / 이미 지옥 가운데 발을 딛고 / 웃으며 가려 파국에 - 김윤아 <증오는 나의 >) 에서 딸이 김윤아는 매일 같이 아버지를 죽이리라 다짐한 덕분에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증오가 결국 새로운 증오를 낳고 언젠가 자신을 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웃으며 파국에 나아갈 것이라 다짐한다. 자신의 영혼을 죽어가게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에 대한 복수의 다짐이 삶의 원동력이 되고, 다시 삶은 파괴와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그에게 고마워하고, 다시 그를 미워하고, 인정할 없지만 그를 사랑하는, 딸의 이러한 복잡한 감정은 증오가 사랑과 맞닿아있고, 죽음이 삶과, 그리고 삶이 다시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모순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있다. 일관되지 않아 거짓되게 보이는 감정들이 역설적으로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김윤아는 이렇게 삶의 진실이란 모순되어 있고 때로 거짓되기 까지 하며, 그런 모순과 거짓을 온몸으로 체화하여 드러내는 것이 노래이고 예술이라는 것을 서론에서부터 암시했다.

 

2.

 서론의 곡을 부른 김윤아는 공연의 구성을 증오/파괴, 사랑, 죽음, (자아) 등의 카테고리로 나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카테고리의 시작에서 준비해 시나 , 혹은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앞으로 부를 곡들을 소개했다는 점이다. 글에서는 여러 카테고리 특히 사랑 카테고리와 죽음 카테고리에 주목해 보려고 한다.

 사랑의 파트를 열며 김윤아는 자신이 공연에서 부를 곡들을 분류하며 그동안 사랑에 관한 노래를 생각보다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자신은 아름답고 상대에 대한 믿음만이 가득한 사랑을 경험해 적이 없고, 또한 그런 사랑을 아직은 믿을 수도 없기에 그런 사랑 노래들을 없었다고 한다. 그가 사랑 카테고리에서 부른 <> 가사를 보자.

 

우리 사이엔 낮은 담이 있어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 닿지 않아요

내가 말하려 했던 것들을

당신이 들었더라면

당신이 말할 없던 것들을

내가 알았더라면

(중략)

 

<>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지만, 연인 사이에는 낮은 담이 있기에 서로의 내밀한 말도, 부서진 마음도, 진실도 없다. 완전히 서로를 수도 없도록 높게 뻗은 담이 아니라낮은 이기에,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자리한 담은 때로는 보고 지나쳐지고,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중요한 삶의 순간에서 존재를 빼꼼히 드러낸다. 전통적으로 사랑은 상대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서로가 둘이 아니게 되는 인간의 최고의 진실된 감정인 것처럼 찬양되어 왔다. 그러나 김윤아는 결국 사랑의 감정은 이별과 거리, 나아가 죽음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모순된 감정임을 알고 있다. 그가 카테고리를 열며 말했던 것처럼 사랑은 아름답기만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악하고 슬프며 외롭고, 언제나 소멸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감정인 것이다.

 사랑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던 다른 , <비밀의 정원>에서도 사랑이 내포하는 진실은 위와 같다. “다른 모든 이야기처럼 시작은 소녀와 소년이 다른 모든 사람들 몰래 사랑에 빠지는 이지만, 영원을 꿈꾸고 사랑을 구하는 그들의 소원과 달리 사랑의 시작과 함께슬픔의 열리고 '사랑의 이름을 잔인한 놀이 서로를 부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결론은 순결하던 소년과 소녀가 어른이 되는 것으로 끝난다. 아이와 같은 순결함, 무구함에서 시작한 사랑은 맑은 특성으로 인해 더욱 잔인하고, 그렇기에 사랑에 빠졌던 아이 같은 영혼들의 결말은 사랑의 진실을 모두 알아버린, 지치고 무딘 어른의 영혼이 되는 . 달콤하게 보이는 사랑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이러한 쓰디 진실이, 바로 김윤아의비밀의 정원 들어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김윤아는 사랑에 대한 모순된 진실을 알고 있으므로, 마치 태엽을 돌리면 반복되어 흘러나오는 오르골 소리처럼 섬뜩하고도 달콤한 목소리로 비밀의 정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언제든 당신이 원한다면 가혹하고 잔인한 사랑의 진실에 대해 들려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죽음 카테고리의 도입부에서 김윤아가 읽은 시를 인용해 보려고 한다.

 

이렇게 늦게 어둠 속의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리는 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아이를 따뜻하게 품에 안고 

말을 타고 달리는 아버지이다. 

 

아가, 너는 무엇이 그리 무서워서 얼굴을 가리느냐? 

 

아버지, 아버지는 마왕이 보이지 않습니까? 

관을 쓰고 옷을 늘어뜨린 마왕이... 

 

귀여운 아가, 이리 오너라.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 

 

곳에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어 있고 

너의 어머니는 많은 금으로 옷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는 들리지 않습니까?

마왕이 귀여운 소리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

 

가만히 있거라 아가. 걱정하지 말아라. 

마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이다. 

 

귀여운 아가. 

나와 같이 가자. 

소녀들이 너를 즐겁게 주리라. 

밤에 춤추는 가서 즐겁게 줄테니...

 

아버지, 아버지, 어두운 곳에 

마왕의 소녀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가. 아가. 아무 것도 아니란다. 

그것은 잿빛의 오래 버드나무란다. 

 

나는 네가 제일 좋다. , 오라.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 

 

아버지, 아버지, 지금 마왕이 나를 잡아요. 

마왕이 나를 심하게 해요.

 

아버지는 무서워서 급히 말을 달린다.

팔에는 떨면서 신음하는 아이를 안고서...

지쳐 집에 도착했을

사랑하는 아들은 품에서 이미 죽어 있었다.

 

김윤아는 별다른 부연 설명도 없이 오로지 시를 통해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자 했다. 우리의 주변에, 삶에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함께 하고 있고, 때로 죽음의 유혹은 무서우면서도 너무나 달콤하다는 . 특히나 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세계에 예민한 존재에게서 더욱 그렇다는 . 세상의 흘러감에 적응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들에게 죽음을 보는 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는 자체로 거짓말이고 모순이지만, 결국 그러한 망상이 세계에 대한 진실인 것이다. 김윤아는 자신도 마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서도, 잿빛의 오래된 버드나무에서도 죽음을 발견하는 연약한 영혼의 존재임을 은유적으로 고백하며, 죽고자 하는 욕망,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추모, 죄의식, 다시 없다는 알면서도 기다리는 남겨진 이들의 감정을 노래한다.

 

3.

 <노래가 슬퍼도 인생은 아름답기를> 이렇게 공연 내내 거짓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슬픈 인생에 대한 노래로 가득 있었으며, 노래들은 담담하게 아름다웠다. 김윤아는 공연 내내 거짓과 모순이 실은 삶에 대한 가장 진실한 태도이자 진술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목소리로 보여준 것이다. 그는 언젠가 아름답기만 사랑 노래를 불러보는 것이 꿈이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나는 안다. 그가 세계의 거짓과 진실을 모두 보는 연약한 영혼의 소유자로 남는 이상, 모순이 없이 아름다움만 있는 노래는 결코 울려퍼지지 않을 것이다.

 

 

섬섬옥수: 모은 같은 록곡

레몬밤

 

누구에게나 전세계에 들려주고 싶은 가수의 수록곡이 있다. 타이틀곡 위주로 돌아가다 못해 점점 디지털 싱글화 되고 있는 한국 음악 시장에서, 프로모션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간 타이틀곡보다 수록곡이 좋은 경우도 왕왕 존재한다. 그래서 가끔은 외치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여, 앨범 속에 숨어있는 띵곡 들어달라고. 필자의 띵곡리스트를 오늘 공개해본다. 타이틀이 아닌 이상한 노래들, “근데 이게 수록곡이죠?” 외치게 만드는 노래들, 그만큼 매력 있는 수록곡의 세계로 -수록곡샬트 붕괴가 오기 전에- 들어가보자.

* 타이틀곡이 아니더라도 2 이상 방송 무대에 오른 노래는 수록곡 리스트에서 제외하였다.

 

 

(여자)아이들-MAZE

신인 아이돌 (여자)아이들의 데뷔 앨범 <I am> 3번째 트랙. 데뷔 앨범 자체가 꽤나 괜찮다. (그룹 이름 빼고 괜찮은 같기도.) 분위기도 세련됐다. (그렇다. 필자는 다시 큐브에 치여버린 것이다.) 리더 소연의 찰진 랩핑이 곡과 너무나 어울린다. 우기와 미연의 보컬도 몫하고.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곡은 소연의 랩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 찰떡같이 곡에 붙는 그의 랩이 궁금하다면 어서 들어보시길.

 

 

청하-Drive

인트로의 경쾌한 기타 소리가 바다 고속도로에서 맞는 바람처럼 청량하다. 번째 미니앨범을 발매하는 청하에게 필요했던 것은 “Why don’t you know” – “Rollercoaster” – “Love U” 이어지는 비슷비슷한 느낌의 타이틀곡 3연타가 아니라 분위기 전환이었다. (물론 이런 노래 스타일로 청하가 것은 맞지만) 조금 색다르게 “Drive” 타이틀로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믿고 듣는 청하라면 어차피 음원 순위도 충분히 높았을텐데.

 

 

SHINHWA-SUPER POWER

도대체 이게 수록곡이죠? (억울) 신화의 13 타이틀 “Touch” 함께 끝까지 타이틀 경쟁을 했던 . 신화 측에 의하면 “SUPER POWER” 이전 앨범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주고자 “Touch” 타이틀곡으로 정했다고 하는데, 제대로 선택 미스다. 이전 타이틀 곡들과 같은 느낌을 전혀 주지 않을 뿐더러 후렴구도 -기존 신화의 곡들과는 달리- 귀에 들어와서 “Touch”처럼 어렵지도 않다. 나중에 콘서트 무대를 보고 타이틀 곡으로 선정하지 않았는지 이해는 갔지만…(- 신화는 주변 고인물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다시 흥할 없다. 여기엔 안무가도 포함이다. 좋은 안무를 그렇게 지루하게 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무대 영상 보는 것보다 노래만 듣는 훨씬 지루할 정도.) 다소 유치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강렬한 신화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곡이다. 신화 13 <UNCHANGING> 3번째 트랙.

 

하이라이트-Take on me

하이라이트 미니앨범 <CELEBRATE> 3번째 트랙. 하이라이트가 했던 기존 댄스곡과는 느낌이 다르다. 대세에 맞게 (사실 발짝 느리게) 나름대로 트로피컬한 느낌의 곡을 내놓았는데, 후렴구도 귀에 쉽게 들어오고 반복되는 멜로디도 신이 나서 쿠바에서 모히또 먹고 흔들고 싶은 느낌을 준다. 트로피컬 스타일이라 그런지 중남미로 날아가 살사를 추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런 풍의 음악이 먹히던 여름 케이팝 시장에 등장했어도 선방했을 . 전체적인 일관성이 부족한 <CELEBRATE> 앨범에서 눈에 띄는 수작. <CELEBRATE> 타이틀 어쩔 없지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이어) B 감성 2연타였기 때문에 식상하게 느껴졌는데, 그런 타이틀 곡에 밀리기엔 너무나 아까웠던 .

 

NELL-타인의 기억

NELL 멤버들(특히 김종완) 지금처럼 행복에 안주한 작곡을 하기 일보 직전에 나온 6 <Newton’s Apple> 3번째 트랙. (- 요즘 NELL 하는 음악을 들으면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음악을 듣는 같은 기분이 들어 너무나 아쉽다.) ‘섬섬옥수 꼽힌 곡들은 주로 선율적인 측면에서 타이틀 곡을 능가하거나 타이틀곡에 맞먹는 곡들이 많은데, 곡은 선율적인 측면에서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다. 그렇다고 가사도 심금을 울릴 정도는 아닌 같은데, 이별을 하고 나면 결국 모두가 타인의 기억으로 남아버린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후에 노래를 들으면 괜히 마음이 뭉글뭉글해진다. 보편적인 감정과 생각을 집어냈기 때문일까.

 

SHINHWA-Midnight Girl

신화(혹은 신혜성) X 박창현 = 진리공식을 다시 보여주는 . 신혜성 혼자 부른 어쿠스틱 버전도 있지만 원래 버전이 낫다. 타이틀을 대체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화의 비트감 있는 발라드 중에서는 TOP 3 안으로 꼽을 있다. 글을 쓰면서 다시 들어도 너무 좋다. 발매된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세련됐다. 중독성 있는 코러스 “Love for midnight girl, every day I feel” 꿈만 같은 피아노 선율. 좋다. 뭐라 형용할 없어서 안타까울 지경. 필자가 꼽은 수록곡들 중에서도 강력 추천하는 곡이니 들어보시길. 신화 8 <State of the art> 8 트랙.

 

샤이니-...(Love Should Go On)

샤이니 데뷔 앨범 <누난 너무 예뻐 (Replay)> 4 트랙. 필자에게 SM 노래들, 특히 f(x) 샤이니의 노래들은 특히나 난해하게 다가오는데, 노래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꺼내 듣는다. 제목은 유치하고 (SM 원래 그렇지 않나.) 랩이 낯설게 느껴질 있지만 후렴구가 이를 상쇄시켜줄 것이다. 이런 곡이 데뷔 앨범에 실렸다니 놀라울 따름. 타이틀 곡이었어도 나갔을 같은 .

 

태연-Circus

태연 미니앨범 3 <Something New> 5 트랙. 아련한 피아노 반주와 함께 -가사처럼- “더없이 아름다운태연의 목소리가 잔잔히 깔린다. 노래는 선율적으로 좋아서 이상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달빛 아래 찬란하게 홀로 그네를 타는 곡예사의 빛나는 모습을 보는 같달까. 노래가 전체적으로 반짝인다.

 

비스트-dance with u

2014 비스트( 하이라이트) 6번째 미니앨범 <GOOD LUCK> 번째 트랙. 1 트랙 답게 앨범 세계로 청자를 이끈다. 그래서인지 노래만 들으면 괜히 판타지 소설의 도입부를 읽어야만 같다.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주니까. 타이틀 곡인 “Good Luck” 밀리지만 세컨 타이틀로는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방송에서 “We Up” 대신 무대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노래. 댄서들과 함께하는 커플 안무도 “We Up”보다 매혹적이다.

 

선미-곡선

선미의 미니앨범 <WARNING> 3 트랙. 선미의, 혹은 선미가 추구하고 있는 분위기와 어울린다. 앨범명인 <WARNING>과도 컨셉이 맞고 앨범 커버의 이미지와도 가장 어울리는 곡이다. 몽환적인 피아노 선율과 비트가 어우러져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 선미의 약점으로 꼽힐 수도 있는 보컬(혹은 음색) 또한 충분히 보완되었기 때문에 선미의 목소리가 부담스러웠던 이들도 번쯤 들어 만한 .

 

Wanna One(워너원)-묻고 싶다(One Love)

Wanna One(워너원) 번째 정규앨범이자 마지막 앨범 <1¹¹=1 (POWER OF DESTINY)> 5 트랙. 비트감이 좋다. Wanna One(워너원) 노래들은 보통 랩파트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노래는 랩을 뽑았다. 비트와 어우러지는 박우진의 랩이 노래를 계속 듣고 싶어지게 만들 정도. 보컬 파트 분배도 알맞게 이루어졌다. 각각의 파트가 멤버들의 목소리와 찰떡같이 어울린다. 마지막 앨범에 실린 곡들 가장 좋은 노래.

 

비스트-잘자요

비스트로서 마지막 앨범인 3 <Highlight> 11번째 트랙. 이름대로 자장가로 쓰기 좋다. 나른하게 반복되며 뒤에 깔리는 피아노 선율과 힘을 보컬들. 밑에 깔리는 비트도 부담스럽지 않다. 귀에 들어오는 후렴구인데 필자가 선호하는 파트는 verse 1, 그리고 화음이 깔리며 허밍(?)(- 정확하게 허밍은 아니다. ‘어어우워하는 부분이지.)하는 부분. 윤두준과 용준형의 보컬과 송랩 또한 비음기가 많이 빠졌기 때문에 보컬적인 측면에서의 단점도 크게 없다. 피곤에 몰려 침대에 쓰러진 채로 잠이 듣고픈 노래 1순위.

 

 

숨수(숨은 수록곡) 말고숨띵(숨은 명곡)”

수록곡 외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타이틀 혹은 후속곡들이 존재한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쉬워서 6곡만 뽑아보았다.

 

파란(PARAN)-Don’t Cry

앨범 전체를 추천하고 싶은 파란 3 <U.R.M.S> 4번째 트랙. 드디어 파란만의 색깔을 찾았다 싶어서 반가웠는데, 앨범을 마지막으로 파란은 해체와 다를 없는 (-작년에 라이언, 피오, 에이스가 뭉쳐서 음원을 발매하기도 했으니 정말로 해체는 아니다.) 기나긴 휴식기에 들어간다. (필자는 하필 입덕해서 10 제대로 라이브 보지 못했다고 한다…) 메인보컬 에이스의 음색, 폭발적인 성량 그리고 현악기의 웅장함이 어울리는 락발라드. 라이브 영상을 보면 AR 따위 깔지 않고 CD 씹어 먹는 모습을 있다. 파란과 관련해서는 단독으로 글을 하나 있을 정도로 애정이 깊지만 여기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발자국”, “양복 좋은 수록곡들도 많은 앨범이다. 가창력 좋은 남자 보컬 그룹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앨범을 정주행하길 바란다.

 

트리플H-365 FRESH

이제는 이상 없는 전설의(?) 그룹 트리플 H(현아, 펜타곤(후이, 이던)) 앨범 <199X> 타이틀곡. 컨셉도, 노래도, 안무도 역대급이었는데 떴다. 심지어 음악방송 의상도 예뻤는데! 노래 스타일이랑 발매 타이밍도 맞았는데! <프로듀스 101 시즌2>까지 출연하며 열일했는데! 떴다! 왜죠? (오열) 왜긴 왜야 같은 큐브가 이상한 언플만 했기 때문이지

진짜 좋아하면 좋아하는지는 구구절절 설명을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 제발 노래를 들어주세요. 음원으로만 들어도 좋고 청량한 안무 연습 영상을 봐도 좋고 의상 보는 재미가 있는 무대편집영상을 봐도 좋다. 섹시 컨셉이 아닌 현아의 모습을 마음껏 있다. 365 언제 들어도 이름대로 FRESH하다. 그러니까 제발 들어주세요. 아니, 지금 당장 들어라. (단호)

 

체리필터-head up

체리필터 1 <Head-up> 타이틀곡. 보컬 조유진의 엄청난 기교를 체감할 있다. 듣다보면사람 목소리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지?”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조유진의 휘슬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필수로 들어야 . 스크래치, 그로울링, 휘슬까지 그가 가진 모든 보컬 스킬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곡은 라이브 영상으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웃으면서 고음을 뽑아내고 목소리를 긁는 것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니까.

 

프리스틴 V- 멋대로(Get it)

프리스틴 유닛 프리스틴 V 싱글 <Like a V> 타이틀. 블랙 위도우 컨셉과 너무나 어울리는 곡이다. (- 프리스틴의 노래 “Black Widow” 곡이 있음.) 세련된 사운드, 친근한 verse 간단한 후렴구로, 다소 난해하게 들릴 있는 프리스틴의 다른 곡들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아 보이는데 화제가 많이 되지 않아 아쉬운 . 프리스틴 V 멤버에 시연까지 합세해서 곡으로 데뷔를 했다면 어땠을지?

 

에이핑크-내가 설렐 있게

에이핑크 3 <PINK REVOLUTION> 타이틀곡. 에이핑크치고는 성적이 많이 좋지 않았던 곡인데,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없다. (의상은 별로긴 했다.) 90년대 느낌 물씬 풍기며 센치함과 아련함, 청순함이 느껴지는 . 곡이 망하는(?) 바람에 핑순이들은 다시 “Five” 같은 발랄한 댄스곡으로 선회하게 된다. 언제까지나 발랄하고 신나는 노래만 수는 없을 , 이번에 “1 없어 흥한 만큼 다시 컨셉을 밀고 나오는 어떨런지. 겨울쯤 나오면 계절감도 맞고 좋겠다. ”LUV”내가 설렐 있게같은 성숙하면서도 아련한 컨셉으로 나오면 이번에는 흥할 같은데. 필자가 꼽은 베스트 파트는 verse 2.

 

스피카-러시안 룰렛(Russian Roulette)

스피카의 데뷔 앨범 러시안 룰렛(Russian Roulette) 타이틀 . 작곡가 스윗튠이 해내는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떠서 슬픈 노래. 이런 멋진 곡을 주고도 애들을 뜨게한 소속사 당신은 대체그룹은 해체했지만띵곡 남는다. 멤버들의 시원시원한 보컬과 하모니가 절경이고 장관이며 신이 주신 선물이다. 후렴에서 김보형과 김보아가 함께 화음 넣는 부분( 이렇게라도 너를 잡아야겠어 ) 킬링파트. 제목만 보면 자꾸 레드벨벳 노래가 떠오를 테지만 듣고 나면 확실히 스피카의러시안 룰렛으로 각인될 것이다.

 

 

이상 필자 혼자 마음 속으로 간직해온 수록곡 소개의 시간이었다. 소개랄 것도 없이 그냥 사담을 주절대는 전부였지만. 당신의 마음 켠에 자리잡은 숨은띵곡 무엇인가? 오늘만큼은 고이 모셔둔 노래를 꺼내 친구에게 스리슬쩍 이어폰을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베놈> 성공적인 히어로물 정착은 가능했는가?

-베놈의 재수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던지는 한풀이-

뜸부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지구 귀퉁이에 우주선이 불시착한다. 신고를 받고 달려간 구조원들은 정체불명의 생명체에게 습격당한다. ‘심비오트라는 이름의 외계 생명체는 여러 숙주에 기생하며 천천히 우리의 배경인 뉴욕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회 부조리를 취재하는 대담한 기자 에디( 하디)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이 자행하는 생체실험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도중, 극의 서막을 열었던 심비오트와 결합하기에 이른다. 한편 비밀리에 인간과 심비오트의 결합을 시도하던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회장 칼튼 드레이크(리즈 아메드) 또한 강력한 심비오트 라이엇과 결속하기를 자처한다. 베놈과 에디는 심비오트 행성으로부터 다른 심비오트 개체들을 불러오려는 칼튼과 라이엇의 지구 침공 계획을 저지하려 나선다.

<베놈> 소니픽쳐스 산하의 마블 영화로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와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해나갈 소니 유니버스 오브 마블 캐릭터스(SUMC) 속한다. 2018 10 <베놈> 치룬 극적인 데뷔식은 한국을 비롯해 세계에서 흥행 기록을 거두며 마무리되었지만, 서사 전개의 미진함과 어설픈 설정 탓에 일군의 팬에게는 실망을 안겼다. 애정을 갖고 기대해온 팬들은 눈물을 훔치며 1편의 실패를 한발 양보해 인정했고, <토르> 1, 2 또한 흥행 참패했으나 3 라그나로크로 화려한 재데뷔를 이룩했다는 전설을 해님 달님의 동아줄처럼 붙잡은 장래의 재기를 기도하는 샤머니즘에 기대고 있다.

언급했듯 팬들의 아쉬움은 <베놈> 캐릭터의 정체성 서사 구현의 미진에서 온다. 바로 봐도 모로 봐도 빌런을 연상시키는 괴기스러운 외모와 능력치를 가진 베놈이 히어로적인 사업을 감행하게 되는 필연적 논리와 논리를 촉발시킨 계기적 사건이 칼로 도려낸 구멍 있다는 것이다. 빌딩 꼭대기에 매달려서 보니지구가 아름답더라 베놈의 단마디 감상이 감독 딴에는 명시적인 지표였을까? 에디의 육체가 마음에 들었다는 베놈의 고백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했을까? 안타깝게도 관객 입장에서는설마 그게 다야?’ 싶다. 베놈과 에디의 치고 박고 쥐어박는 좌충우돌 공생관계를 한시라도 빨리 스크린에 띄워야겠다는 성급함 때문인지, 주연들만 100미터 달리기의 결승지점에 다가가고 있고 관객은 출발선에 남겨져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했다. 몇몇 팬들에게는 신세계가 열렸다. 신세계의 이름하야, 베놈과 에디가 사랑하는 사이였다더라 하는베놈에디였다. 개연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실망감이 누군가에게는 <베놈> 새로운 BL물로 엮어보자는 발상의 전환점이 것이었다. 물론 누군가 이름붙인 부녀자들은 시선이 닿는 모든 사물을 요리할 있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앉아있기 때문에, 애정의-애정에 의한-애정을 위한 명시적인 BL판은 물론이고 2D, 2.5D, 3D 차원 장르를 가리지 않는 활발한 행보를 보인다. 하물며 공식이 적극적으로 라이벌 내지 버디 관계를 떠먹이는 판에 그들이 커플로 재탄생하리라는 것은 2 BL판의 암묵적 규칙상 예견된 바였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영화의 부족한 개연성이 오히려 주인공들 간의 떼려야 없는 궁합 같은 있었다카더라식으로 풀어내는 모종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베놈은 설명 불가능하다, 설명 불가능한 것은 사랑이다, 베놈은 결국 애정물이었다 관객들의 낭만적인 유추가 작동한 것은 왜곡된 망상력(‘하여간 남자가 둘이 붙어있으면 붙어먹게 만들려고 하는군!’) 아니라 기실 서사의 구멍을 기우려는 독자의 본능으로까지 보인다.

 

주인공 측에서 베놈의 히어로 정체성이 모호했다면, 악역 칼튼 캐릭터는 본체 배우 리즈 아메드의 가련한 미모를 제하곤 KBS 8 30 아침드라마를 보듯 뻔할 자인 것이 문제였다. 대개 킬링 타임으로 소비되는 히어로물이 예측불허로 치닫는 인지적 난투극일 ,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나, <베놈> 마련한 선악의 이항 대립은 칼로 나누듯 극명했고, 칼튼의 매력적인 묘사를 위해 마련한알고 보면 사이코패스라는 반전은 유사한 설정이 범람하는 영화계에 짬이 굵어진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만무했다. , 우리는 세계에 관한 모종의현자타임덕택에 악역이 악역으로 인생 선로를 급선회할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작중 절대 악은 없다 영화의 차원을 계단 높이려는 기믹에 수없이 노출되어 왔다. 올해 세계인의 욕을 배불리 먹었던 <어벤져스 인피티니워>(2018) 타노스도공기 , 사람 반이 에코라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상처 어린 개인사를 끄집어낸 있다. <블랙팬서>(2017) 악역계의 행동 지침을 미온적 외교에 대한 강경파의 정치적 반발로 그럴싸하게 풀어낸 예외적인 전범이다.

게다가 관객에게 인식론적인 풍부함을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대개 공상과학 혹은 판타지 영화 문학은 실제 세계에 드리우고 있는 규칙을 걷어 자리에 다른 그럴듯한 규칙을 덧입힘으로써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베놈>으로 돌아오면 다음 질문에 대답할 있는 관객이 있는가?: 심비오트의 기원은 뭐고 정확한 능력의 목록은 뭘까? 숙주와의 공생관계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뭘까?

사실 공상 요소에 대한 설명을 불친절하게 덮어두는 것은 여타 마블 영화에서도 드러나는 현상이다. 가령 MCU에서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기점으로 온갖 히어로가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밝힌 이후로, 히어로 위계를 유발하지 않고 그들을 동등한 캐릭터로 다루기 위해 능력치 대조를 마다하거나 전말을 숨긴다. 그나마도 <토르: 라그나로크>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에서는 모든 사건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고, 히어로들의 슈퍼파워는 인피니티 스톤 6개로부터 기원했으며, 아스가르드 왕국 또한 결국 우주 행성 하나였다고 밝히는 판타지의 공상 과학으로의 편입을 통해 관객을 설득하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어벤져스>처럼 개별 인물의 뒷배경과 능력치에 관한 이론을 구구절절 설명하면 오히려 몰입도가 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히어로에게 강한 하이라이트 조명이 켜지는 독무대라면 시간을 할애해서 세계관을 기층부터 충실히 축조하고 설명해야 했다. 특히나 본래 정립된 설정을 기반 삼아 사건 중심의 전개에 매진하는 후속편도 아니고, 주인공 소개가 주가 되어야 편을 얼버무리면 곤란하다. 더군다나 빌런을 히어로로 끌어오는 대담한 도전 중에는 필요한 일이었다. 

인정하자. 감독은 히어로물로서의 완성도와 웅장한 스케일보다는, 버디 영화로서 주연 간의 케미스트리를 원했다. ‘베놈에디 커플은 1차가 한다 장난스러운 모략이 실은 감독이 제일 원했단 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티격태격하는 인물을 그려내고자 모든 줄거리와 인물 설정을 어설프게 봉합한 결과물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이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관객들은 감독의 숨은 의도를 기민하게 간파했고, ‘히어로물이 그렇지 라는 한마디 양보와 함께 서사를 한편으로 치우고 캐릭터의 관계성만 끄집어내서 요리조리 놀고 있다.

지금이라도 MCU 접선해 <스파이더맨> 부활에 업혀갈 방도를 강구하라거나, <데드풀>마냥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를 붙이고 나오라는 갖가지 대안이 등판하는 통에, 슬그머니 공감의 마음을 기울이면서도 가슴이 아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베놈> 캐릭터 자체의 매력 하나로 중박 이상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 자체로 자생할 잠재력은 얼마든지 있다. 역할 뛰어난 케미스트리와 서사의 완전성은 주지하듯 양립불가능하지 않다. <베놈> 마블 사촌들처럼 수작의 반열에 오르고 지금의 야유를 면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부재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덕후들의 2 창작계에서 작품 논의를 그치지 않고, 대중과 비평계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정신 차려야 시점이다.

사소한 말들로 부르는 보편적인 노래 - 브로콜리 너마저 1집의 언어

시몬느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은 ‘끝나버린 노래’들이다. 더 이상 음원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없고, 음반도 중고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가끔씩 팔린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컬인 계피가 소속사 문제로 밴드를 나간 이후로 계피 목소리가 들어간 1집 음원에 대한 접근이 전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가사에서도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없다며 앵콜요청금지를 외치는데, 사실 나는 그냥 계속 다시 불러줬으면 한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1집에는 보편적인 노래부터 안녕까지 총 12개의 수록곡이 실려있다. 대부분은 이별 노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슬프지는 않다.연극의 클라이맥스와 결말 이후, 등장인물이 나중에 어떻게 살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갈등이 결국 스쳐가고, 더 이상 인생이 극적이지 않을 때, 아주 잔잔하고 사소한 ‘아무거나’일 때. 그때의 순간을 포착하는 노래들이다.

 

 친구가 내게 말을 했죠, 기분은 알겠지만 시끄럽다고.

 음악 좀 줄일 수 없냐고. 네, 그러면 차라리 나갈게요.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으로 가득 찬 방과, 그 방에 담겨있는 ‘나’와 룸메이트의 실랑이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별 후 힘든 나날도 지나고 고통도 지났는데 왠지 모를 애틋함과 우울함이 남아서 음악을 듣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순간에, 주인공은 방을 박차고 나간다. 룸메이트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을 수도 있고, 환기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래 알고 있어 한심한 건 걱정 끼치는 건 나도 참 싫어서

 슬픈 노래 들으면서 혼자서 달리는 자정의 공원 그 여름날

 밤 가로등 그 불빛 아래 잊을 수도 없는 춤을 춰

 

 자정의 공원은 어떤 냄새가 날까, 하루가 마무리되어 모든 게 가라앉는 무거운 냄새가 날까, 혹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할 때 풍겨올 만한 상쾌한 냄새가 날까. 탄천을 걸을 때 맡았던 흙, 강, 풀 등의 냄새가 떠올랐다.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 날 것의 냄새들과 뒤섞여 정말 있었던 것인지 기억도 안 나는 오래전의 향수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노래를 들으며 가로등 불빛 아래서 춤을 추는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옛사람과 춤을 춘 적이 있을까? 그때는 둘이었고 지금은 혼자인 상태로 옛날을 추억해보는 걸까? 어찌 되었든, 주인공은 밤 가로등 아래에서 춤을 춘다. 이별 후의 클리셰, 울고,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후회하고, 그런 자잘한 감정들을 직설적으로 뱉어내기엔, 장면 혹은 순간 그 자체가 더 감각적이다. 별거 아닌 말다툼에서 시작하여 자정의 공원으로 이어지는 행동의 흐름은 강렬하지는 않지만 저절로 스며드는 무언가가 있다. 어딘가 묻어있는 구질구질함, 내가 아무리 슬퍼도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와야 하는 때가 있다는 민망함, 그럼에도 슬픈 건 어쩔 수 없는 짜증스러움. 이런 감정들은 표현되지는 않지만 가사를 통해, 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통해 어렴풋이 느껴진다.

 음악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선율도 뜬금없이 발랄하다. 이별 노래라고는 믿기지 않는 통통 튀는 리듬과 멜로디 라인이 보인다. 심지어 이 노래는 어린 유승호가 나오는 야쿠르트 CF의 주제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uMMkuf9WcU)

 밝은 멜로디는 노래의 정서와는 모순되지만 가사와는 잘 어울린다. 춤추는 박자대로 드럼과 피아노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굳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내키는 대로 이상한 춤을 추는 어떤 사람의 마음. 그 마음과 잘 어울리는 곡조다.

 

 안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더 이상.

 

 내 기준으로 너무 많이 인용돼서 쓰면 부끄러울 것만 같은 이 가사를 어떻게든 이 자리에 써본다. 이 말도 역시 헤어진 이후, 끝내고 싶은 마음 혹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그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담긴 말들이다. 상황이 있고, 대화가 있고, 잠시 멈췄다 입을 떼는 그 순간이 있다. 동시에 노래가 시작하고 ‘안돼요’라는 대답이 울리는 순간, 우리는 다시 그 순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차마 지나칠 수 없었던 사소한 순간들에 대해서, 구질구질하지만 애써 참고 숨기려고 했던 감정들에 대해서.

< Take this Waltz : 그 틈을 완전히 메울 수는 없겠지만 >

르네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의 원제는 <Take this Waltz>다. 4분의 3박자의 경쾌한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이 원을 그리며 도는 춤인 왈츠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과 같은, 인생의 행복한 순간들을 응축시켜 표현하는 낭만적인 춤으로 여겨진다. 이 영화에서도 왈츠는 사랑에 대한 비유이다. 그런데 영화가 왈츠에의 비유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응축된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축 늘어진 권태의 시간이다. 영화 속에서 왈츠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충만한 순간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충만함을 조금씩 풍화시키는 시간의 흐름 혹은 반복되는 일상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가 겹쳐지면서 왈츠는 두 사람 사이 강렬한 감정들로 꽉 채워졌던 시간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흩어지고 끝내 권태의 시간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Take this Waltz>는 이처럼 사랑의 시작이 곧 해피엔딩인 영화들이 보여주지 않는 사랑의 씁쓸한 이면, 열병 같은 사랑이 식고 난 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미 매력적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고 싶을 만큼 좋아한 이유는 영화의 주제 자체보다도 주제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었다. 영화는 분명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여러 상징적 장면들을 통해 사랑의 유효기간과 권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결국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이란 무의미한 것인지, 사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에 대해 단정내리지 않는다. 단지 권태의 시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괴로워하는 인물들의 감정 상태와 그들이 주저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후회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 속 여러 비유적 장면들은 사랑에 관하여 미리 정해진 결론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랑이 변색되어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감정 상태를 세밀하게 그려내는 과정 자체를 통해 사랑의 한계에 대해 사유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결론은 우리 각자가 내려야 할 것으로 열어둔 채 말이다. 따라서 이 글 역시 사랑은 어떤 것이라는 혹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관적 믿음은 일단 차치해 두고,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묘사하는 감정들을 따라가는데 주안점을 두려 한다.

   이쯤에서 밝혀야 할 사실은, 영화 속에서 왈츠가 스토리 전개를 위한 핵심적 소재로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마고와 남편 루가 왈츠를 추는 장면이나, 마고와 대니얼(각 - 마고가 루와의 결혼생활에서 권태를 느끼던 중 호기심을 갖게 된 남자이다. 루이스버그 여행 중 마주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옆 자리에 앉게 되며, 알고 보니 마고의 앞집에 살고 있었다는 우연이 겹치면서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진다.)이 왈츠를 추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왈츠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퀀스는 영화 후반부에, 마고가 루에게 이별을 고하고 대니얼을 찾아가 대니얼의 스튜디오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레오나드 코헨의 ‘Take this Waltz’가 배경음악으로 나오면서, 카메라는 마치 왈츠를 추듯, 서로를 애무하는 마고와 대니얼을 둘러싸고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카메라가 한 바퀴 돌아 건물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마치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초반의 장면들은 마고와 대니얼이 사랑을 나누는 나날들을 보여주지만, 카메라가 몇 바퀴 더 돌면서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마고와 대니얼의 몸동작은 점차 굼떠지고, 어느새 둘 다 옷을 걸치고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장면에 이르게 된다. 또 다음 턴에서는 마고와 대니얼이 각자 소파에 누워 책을 읽거나 쉬고 있는, 정적인 일상의 장면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두 사람이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대신 TV를 보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각 - 비슷한 장면이 영화 전반부에서 마고와 루의 권태에 빠진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때 마침 음악이 끝나고 그에 맞춰 카메라 움직임도 멈춘다. 이 왈츠 장면은 6분 정도의 음악이 재생되는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던 날들이 어느새 모든 긴장이 사라진 푹 퍼진 일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빨리 감기로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과 ‘일상의 반복’,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권태’. 이런 주제를 다루거나 암시하는 장면은 왈츠 장면 외에도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고와 제리(각 - 마고의 시누이, 즉 루의 누나이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가 수영장 샤워실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은 아주 직접적으로 그러한 주제를 다룬다. 제리가 자신의 외적 상태에 대해 무관심해진 남편 이야기를 하며 한탄하자, 그 옆의 친구가 “가끔은 새로운 것에 혹해. 새것들은 반짝이니까.”라고 말한다. 반대편에서 샤워를 하고 있던 노년의 여자들 중 한 명이 대화에 끼어들어, ‘새것도 헌 것이 된다’고 말한다. 제리는 잠깐 생각에 빠지더니 “그러네요. 헌 것도 원래는 새 것이었죠.”라고 말한다. 그러자 카메라는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늙은 그녀들의 몸을 보여준다. 그녀들의 몸은 마고나 제리의 몸과 분명히 대조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의아한 점은 ‘새 것도 헌 것이 된다’고 말하는 그녀들이 우울하거나 허무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새것이 헌 것으로 변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경험했고, 그녀들의 육체 역시 낡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표정은 허무하고 씁쓸하기보다는 담담하다. 오히려 그녀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면서 자신들이 한 말을 가볍게 넘겨버린다. 그에 반해 마고와 제리는 ‘새것도 헌 것이 된다’는 그 말에 동조를 하면서도 그녀들의 담담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해한다. 지금 추고 있는 왈츠가 점점 느려지고 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마고와 제리는 불안하고 두렵고 이미 조금은 허무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겪었을 저들은 허무해 하지 않는 걸까? 어떻게 저렇게 한 번도 상실을 겪지 않은 사람마냥 명랑한 걸까?

   새것도 언젠가는 헌 것이 된다는 주제는 영화의 또 다른 배경음악인 ‘Video Killed the Radio Star’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래 제목부터 이미 새것(비디오)이 오래된 것(라디오)을 대체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이 노래는 마고와 대니얼이 데이트의 마무리로 스크램블러를 타는 장면에서 삽입된다. 마고와 대니얼의 데이트 장면은 마고와 루 사이의 권태를 보여주는 장면 바로 다음에 나오기 때문에 그 대비가 더욱 두드러진다. 결혼기념일 5주년을 맞이한 마고와 루는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마고는 자신이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는 루에게 서운함과 외로움을 느끼고는 왜 아무런 말이 없냐고 루에게 불평한다. 루는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습관처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마고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다음날 마고는 대니얼을 찾아가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마고의 표정은 그 전날과는 달리 설렘으로 가득하다.

 

 

   데이트의 마무리로 마고와 대니얼은 스크램블러(각 - 2명이 앉을 수 있는 놀이기구들 여럿이 중앙기둥을 중심으로 빠르게 도는 놀이기구)를 타러 가는데, 이때 스크램블러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동시에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재생된다. 끊임없이 바뀌는 어두운 조명 아래 빠르게 돌아가는 기구 안에서 마고와 대니얼은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다 마고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며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갑자기 음악이 멈추고 창백한 흰 색 조명이 켜지면서 스크램블러가 멈추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러고는 마고와 대니얼이 어색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스크램블러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꽤 오랫동안 담긴다. 음악이 갑자기 끊긴 후 정적 속에서의 어색한 분위기는 마고와 대니얼의 사랑마저 진부해져 버리는 왈츠 장면을 예고하는 것 같다.

 

 

   마고와 대니얼이 스크램블러를 타는 장면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이 퇴색되어가는 점진적 과정을 보여주기보다는 긴장과 설렘이 넘치던 순간과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순간 사이의 간극을 부각시킨다. 그 결과 사랑과 열정이 응축된 시간으로서의 왈츠가 끝난 후에 찾아오는 공허함, 외로움, 불안과 같은 감정들이 전면에 드러난다. 그런데 왈츠 혹은 놀이기구가 끝나는 순간은 관계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찾아오는 순간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결합이 느슨해지고 그사이의 간격이 드러날 때마다 어김없이 불쑥 덮쳐오는 순간들일 것이다. 그리고 마고에게는 그처럼 느슨해진 관계에서 느끼는 불안과 외로움이 관계의 끝만큼이나 두렵고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 점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도 사랑일까>는 마고가 루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거리감과, 그로 인해 마고의 불안과 외로움이 불어나는 과정을 영화 곳곳에서 차곡차곡 묘사하고 있다.

   하염없이 짓궂은 농담들을 주고받는 마고와 루는 죽이 잘 맞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마고는 루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 더 정확히는 자신들의 관계가 정말 사랑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 불안해한다. (적어도 영화에서 비춰지는) 루는 그들 사이에 오가는 장난이 사랑의 확실한 징표라도 된다는 듯이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 루는 마고가 샤워할 때마다 몰래 찬물을 끼얹는 장난을 10년 후까지 계속하려 생각했을 만큼 마고와의 사랑에 대해 안정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마고는 루와 공유하는 장난스러운 일상들로는 메워지지 않는, 둘 사이의 간격을 종종 느끼고 불안해한다. 마고는 루가 닭 요리책을 쓰기 위해 등을 보이고 요리를 할 때마다 너무 쉽게 불안해져서, 자기를 봐 달라고 떼쓰는 아이처럼 루의 등에 매달리거나 화를 내버린다.  

 

   이 간격은 마고가 대니얼에게 흔들리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지치지 않고 마고의 뒤를 따라오고 마고의 사소한 행동들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대니얼과, 마고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둘이 껴안을 때 마고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요즘 마고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루가 분명히 대비되기 때문에, 그 간격은 마고에게 더욱 두드러져 보였을 것이다. 마침내 마고와 루가 크게 싸운 후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둘 사이에 더 이상 메울 수 없는 간극이 그려진다. 루는 창문 안쪽에서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는 마고를 바깥쪽 테라스에서 바라보면서 마고를 따라 고개를 흔들고 입 모양을 따라해 보지만, 마고가 듣는 음악은 루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마고는 루를 옆에 두고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는 걸까? 마고가 말하듯 루는 한결같은 좋은 남편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들로 그렇게나 불안해하는 마고가 너무 어리석거나 히스테릭해 보일 수 있다. 혹은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은 마고와는 달리, 루는 상대방과 반복되는 일상을 공유하면서 점점 그 자체로 일상이 된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둘은 처음부터 사랑의 방식이 너무 달랐던 것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은 잠시 제쳐두고 왜 그토록 마고가 쉽게 불안을 느끼고 외로워했는지 그 마음을 가늠해보자.

   마고가 루와의 관계에서 감지한 간격이 대니얼의 등장으로 점점 더 벌어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니얼을 알게 되기 전부터 이미 마고는 루와의 관계에 있어 불안정한 상태였던 것 같다. 마고와 루의 결혼생활을 보여주는 첫 장면에서부터 마고는 침대 위에서 루에게 등을 보인 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도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겠다’는 (거짓말인 게 분명한) 말을 한다.

 

   마고의 불안정한 상태는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강조된다. 영화는 마고와 대니얼이 루이스버그에서 처음 마주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만나 대화하는 시퀀스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마고는 이제 막 알게 된 대니얼에게 자신의 특이한 공포증에 대해 털어놓게 된다. 루이스버그 성에서는 멀쩡히 걸어 다니던 마고가 공항에서는 승무원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에 타는 모습을 본 대니얼이 그 이유를 물었기 때문이다. 마고는 적당히 둘러대다 결국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게 무서워요. 이 비행기에서 저 비행기로 가느라 잘 모르겠는 곳을 이곳저곳 뛰어다니고 시간 안에 갈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도 두려워요. 제 시간에 못 가면 길을 잃고는 공항의 버려진 터미널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서 썩어가겠죠?...[그렇지만] 비행기를 놓치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에요. 비행기를 놓칠까봐 걱정하는 상태가 두려워요. 사이에 끼어서 붕 떠 있는 게 싫어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상태가 제일 두려워요.’ 

 

마고가 느끼는 두려움은 비행기를 놓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결과를 예기하면서 느끼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그런 두려움의 감정을 느낄까봐 걱정하는 마음, 그런 감정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달리 말하면 마고는 언제든 길을 잃고 중요한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상태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마고는 루의 마음이 언젠가는 식을까봐, 언젠가는 둘 사이에 어떤 감정도 남지 않을까봐 불안해지는 상태를 견딜 수가 없어서 그토록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루와의 관계야말로 마고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런데 마고가 자신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장면을 보면, 마고의 불안은 루를 만나기 전부터도 항상 존재했던 것 같다. 대니얼은 마고와 몇 차례 만나면서 마고에게 장난스럽고 명량한 상태와 불안한 상태가 공존함을 발견한다. 대니얼은 마고에게 왜 그렇게 항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불안해하는지 묻는다. 이때 마고는 뜬금없이 사촌 토니의 이야기를 꺼낸다.

 

   ‘토니가 계속 우는데 왜 우는지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가끔 보도 위로 한 줄기 햇살이 떨어지면 그냥 눈물이 날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은 금방 끝나고, 어른이니까 순간적 멜랑콜리에 빠져 울면 안 된다고 마음먹어요. 토니도 아마 가끔 그런 순간에 처했던 것 같아요.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고, 누가 더 나아지도록 해줄 수도 없는 상태. 살아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상태...’ 

   이 대사는 마고의 당시 상황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루와의 관계에서 권태와 외로움을 느끼는 한편 대니얼에게 조금씩 흔들리는 과정에서 마고가 느끼게 됨직한 불안과 두려움은 이유가 분명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루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며 루와의 관계가 곧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루와의 관계가 이제는 식어버린 사랑을 감추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다는 두려움 등. 그렇지만 마고는 자신이 불안해하고 종종 울고 싶어지는 이유를 특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고의 불안은 특정한 종착지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느끼는 두려움, 혹은 구체적인 두 선택지 사이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면서 느끼는 불안이 아니다. (각 - 그런 점에서 마고의 불안을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대니얼은 사실은 마고의 불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니얼은 ‘사이에서 붕 뜬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을 루와 대니얼 사이에서 고민하는 마고의 상황이나 루와 마고 사이에 끼어서 애가 타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이라는 의미로 특정하여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고가 토니 이야기를 꺼내며 이유를 알 수 없이 엄습해오는 불안의 존재에 대해 말했을 때 대니얼은 ‘어쩌면 당신이 그 이유를 아직 모르는 걸 수도 있죠’라며 그 가능성을 일축해버린다.) 나아가 마고는 그처럼 문득문득 마주치게 되는 불안과 멜랑콜리의 상태가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는 보편적인 상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마고의 불안은 루와의 느슨해진 관계 때문에 비로소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그 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불쑥불쑥 찾아오는, 어떤 견디기 힘든 상태인 것 아닐까?

   마고가 느끼는 불안, 외로움, 멜랑콜리가 특정한 관계에서 느끼는 것이기 이전에, 살아있는 한 겪게 되는 ‘실존적 불안’ 같은 것이라면, 앞서 마고가 가장 두렵다고 말했던 ‘사이에 붕 뜬 상태’ 혹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상태’ 또한 비슷하게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고가 두려워하는 그 상태란 두려워할만한 무언가가 있는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감정상태가 아니라, 이미 항상 마고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다가도 금세 불쑥 찾아오는 감정상태인 것이다. 그 이유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마치 사이에 붕 뜬 것처럼 기반을 잃어버린 느낌을 주는 그 상태는 우리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얼른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붙잡아줄 구체적인 기반을 찾아 나선다. 마고에게는 그 기반이 사랑이었던 것일 테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사랑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기반이 되어주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반이 되어주길 바라는 관계에서 오히려 메워지지 않는 간격을 발견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그 감정상태가 다시금 마고를 덮쳐왔을 것이고, 그 때문에 마고는 항상 그토록 불안해했을 것이다.  

   이쯤 되니 처음의 주제였던 사랑과 권태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마고가 루와의 관계에서 외로움과 권태를 느끼게 된 이유가 소위 ‘실존적 불안’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마고는 분명 루의 특정한 행동과 말들로 인해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일상이 루로 하여금 마고를 관성적으로 대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혹은 설령 반복되는 일상이 루의 행동이나 속마음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마고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마고와 루 사이의 간격이 드러날 때마다 마고를 덮쳐온 불안은, 루가 더 이상 마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만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이 앞서 마고의 대사들에서 분명해졌다. 마고에게 사랑은 익숙해지고 진부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불쑥 찾아오는 불안의 상태만큼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의 상태야말로 사랑이 느슨해지는 권태의 시간이 못 견디게 두려운 이유다. 마고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권태의 시간 앞에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에 대해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즉 우리는 눈앞의 사랑이 언젠가 진부해질 것이고 그 결과 혼자가 되거나 혼자나 다름없는 외로움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듯 보이지만, 사실 불안과 외로움이라는 틈은 이미 항상 우리 안에 있었고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그 빈 공간을 잠시나마 채워주고 있던 것이라는 생각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이 이 영화에서 사랑만큼이나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사실이 더 이상 뜬금없지는 않은 것 같다.

   흥미롭게도 영화 속에서 불안이라는 주제를 마고와 공유하는 인물은 루도 대니얼도 아닌 제리이다. 앞서 언급했듯 수영장 샤워실 장면에서 제리는 새것이었던 남편과의 사랑이 헌 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불안하고 허무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당시 제리는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금주 중이었는데, 하루는 마고에게 자신이 잘 견디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누군가 자신이 결국 실패하기만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제리가 대체 무엇을 견디기 위해 술에 의존하게 되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그녀가 마고만큼이나 불안하고 비틀거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인다. 영화 중반부쯤 제리는 목표한 금주일수를 달성하여 축하파티를 열기도 한다. 그런데 마고가 루를 떠나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 제리는 다시 술에 취해 사고를 치게 되며, 이때 마고는 루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찾아온다. 제리는 오랜만에 마고를 보고 무척 반가워하다가 자신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마고에게 화가 나서는, 루를 떠난 마고야말로 자기보다 큰 실수를 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이렇게 말한다.

 

   ‘인생엔 당연히 빈틈이 있게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울 순 없어.’

 

 

   제리가 말하는 빈틈이 마고가 말하는 ‘사이에 붕 뜬 상태’와 같은 것이라면, 마고와 마찬가지로 제리 역시 그런 상태가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불안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 두려워 루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약간의 틈도 견딜 수 없었던 마고에게, 제리는 매번 새로운 것에 기댐으로써 그 틈을 메울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마고를 비난하는 제리 역시 자기 앞에 드러난 빈틈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술에 의존하는 선택을 해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제리의 비난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비난처럼 들리기도 한다. 혹은 그 틈을 일일이 다 메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틈 사이로 덮쳐오는 불안을 견디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나 역시 또 이런 선택을 해버렸다는 푸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처럼 제리가 가족들에게 기대어 불안이 새어나오는 빈틈을 메워보려 시도하지만 다시금 벌어지는 틈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술에 취한 채 나타나는 결말은, 마고가 자신의 틈을 메워줄 새로운 사랑을 선택하지만 결국에는 그 사랑 역시 권태에 빠져 다시금 불안과 외로움을 마주하게 되는 결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두 인물 모두 불안과 외로움의 상태에서 시작해서,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간다. 영화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통해 그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마고가 컵케이크를 구우면서 우울한 표정으로 오븐 속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동일한 장면으로 끝난다. 그동안 사랑의 상대는 바뀌었지만, 결국 마고는 그때와 같은 외로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결말은 앞으로도 마고의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떤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도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며, 잠시 메워졌던 틈이 벌어지면서 그 사이로 불안은 또 다시 덮쳐올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결국 사랑은 아무 의미 없다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영화의 진짜 마지막 장면은 마고 혼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스크램블러를 타는 상상적 장면이다. 스크램블러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마고는 두려운 듯 경직되어 주위를 살피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그러다 어느새 눈을 감더니 미소를 지으며 스크램블러에 몸을 맡긴다. 마고가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지 아니면 쓴웃음을 지으며 자포자기한 상태인지 분명치 않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음악이 끊기지 않은 채 바로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때문에, 어쩐지 마고가 타고 있는 스크램블러가 영원히 돌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마고는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마고의 표정은 결국 누구와 사랑을 하더라도 다시 자기 안의 불안을 오롯이 혼자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 표정 같기도 하다. 아니면 한결같았던 옛사랑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표정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고의 옅은 미소는 언젠가 끝날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불안을 덮어주는 관계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즐기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고는 앞으로도 자꾸만 벌어지려 하는 틈들을 잠시라도 메워줄 새로운 관계들에 기꺼이 뛰어들 수 있을까? 다시 왈츠를 추고 또 추고 또 추게 될까?

 

 

 

 

 

 알래스카는 안돼요! - 다시 시작된 검정치마의 공백을 맞이하여 되돌아보는 그의 앨범들.

밤톨뿡

 

 2017년 5월 30일, 그 날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바로 검정치마(본명: 조휴일)의 3집 <Team Baby>가 발매된 날이다. 무려 6년 만의 기다림 끝에 나온 정규앨범이었기에 헤드폰을 쓰고 첫 번째 트랙인 <난 아니에요>를 들으며 눈물을 세 방울 흘렸었다.

  2011년 정규 2집 <Don't you worry baby (I'm only swimming)> 이후 매해 ‘빠르면 올해 안에 앨범이 완성될지도’, ‘올해 여름에는 성실하게 일하겠다.’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작업물은 내놓지 않아 팬들을 애타게 하다가 2015년 4월 9일, 4년 만에 <Hollywood>라는 싱글앨범을 냈다. 팬들은 어마어마하게 화가 나있었지만 노래가 너무 좋아서 잠시 조용해지는 듯싶었으나.... (각 - 팬들이 얼마나 열이 받아있었는지는 당시 멜론 리뷰창에서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댓글이 ‘야 이 X 발 새 끼 야 앨범 내라’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벤트성 싱글 한 장을 뿌려놓고 다시 검정치마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올해에도 앨범을 못 내면 망해서 알래스카로 이주하겠다.’라는 말까지 했으나, 정규 앨범은 나오지 않았고 분노한 팬들은 ‘조휴일 빨리 알래스카로 떠나라’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계속해서 보내기 시작했다. 2015년 12월 16일, 조휴일은 이메일 폭탄에 자극(?)을 받았는지 블로그에 게시물을 남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저번 달부터 작업실 구해서 엄청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 3~4시나 되야 집에 들어가요. 출근 시간이 좀 늦긴 하지만, 그전에도 안 한건 아닌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공백이 좀 길었어요. 올해도 거의 다 끝나가고. 아 모르겠다. 새 앨범 정말 좋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해도 소용없겠죠. ‘조휴일 빨리 알래스카로 떠나라’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11월부터 지금까지 몇 통이나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중 반은 애증담긴 팬 메일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의 분노가 담겨있더군요.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 알래스카 날씨가 어떤 줄은 아세요? (중략) 곧 빠른 시일 내에 (wink) 기쁜 소식으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후략)

 

 그리고 2016년 1월, 13일, 하이그라운드 페이스북에서 ‘알래스카 가시겠다는 조휴일씨를 붙 잡아 저희 하이그라운드 식구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검정치마가 하이그라운드 소속이 되었음을 알리고, 검정치마는 그해 1월 29일에 <Everything>, 3월 15일에 <내 고향 서울엔>이라는 싱글앨범을 연달아 낸다. 사실 조휴일은 본인의 입으로 직접 자신은 정규앨범 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20년대의 purist라고 했으나, 분노한 팬들을 달래려면 싱글이라도 던져주는 것이 그에게도 이로웠다. 그토록 기다리던 정규앨범은 아니지만, 그래도 검정치마의 컴백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감에 팬들을 들떠있었다. 하지만 조휴일씨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마는데! 하이그라운드 공식 페이스북에 올라온 <알래스카의 눈물: 검정치마> 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검정치마 2집이 발매되고 지금까지 올림픽 두 번, 월드컵 한번, 총선 두 번이 지나갔다. (오바마 재임과, 트럼프 당선도 있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올해 발매예정이던 앨범이 내년으로 미루어질 것 같다는 (...) 슬픈 소식을 알린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몇 개월은 엄청 짧은 시간이었고, 팬들은 ‘일해라 조휴일!’을 외치며 다시 기다렸다. 그리고 <Team Baby>라는 3집 앨범이 나왔고 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3집이 총 세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있으며, <Team Baby>이후에 나올 노래가 20개 더 남았다는 사실이 팬들을 더욱 기쁘게 했다.

 

 

 

 

 

 

 

 

<알래스카의 눈물 : 검정치마>

 

 

정규 2집 자켓 사진.

 

  이렇게 오랜 시간 팬들을 기다리게 하고 나온 3집 앨범은 어땠을까? 확실히 1집과 2집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정규 1집 <201>이 나왔을 때, 조휴일의 나이는 26살,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1번 트랙 <좋아해줘>에서는 너무 당당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자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각 - 날 좋아해줘. 아무런 조건 없이 니 엄마 아니면 아빠보다 더), 6번 트랙 <Tangled>에서는 자신을 떠나는 여자친구를 향해 '사랑을 외던 끈적한 입술에 바르던 분홍색 다른 입술로 번지려 하네. X발 나 어떡해.' 라고 찌질하게 욕을 한다.

 이러한 검정치마 특유의 찌질한 감성은 12번 트랙 <Fling; Fig From France>에서 정점을 찍는데, 자신을 가지고 노는 여자에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좋다고 말하고, 밤에 그 여자를 찾아서 헤매기까지 한다. (각 - 날 가지고 노는 걸 알아. 그래서 난 니가 좋아, 푸른 달 아래 널 찾아 헤매.) 3번 트랙 <강아지>에서는 자신은 아직 개 나이로 3살 반이라며 극악무도한 가사로 젊음과 사랑을 노래한다. (각 - 실제로 조휴일은 방송에 이 노래가 나갈 때 일부 가사를 수정해서 불렀다. ‘우리가 알던 여자애는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개가 되려나봐 손을 댈 수 없게 자꾸 뜨거워 / 반갑다고 흔들어 대는 것이 내 꼬리가 아닌 거 같아 / 사랑은 아래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거야’ 라는 가사를 ‘우리가 알고 있던 애는 손만 쥐어주면 정말정말 좋아했고 / 나는 언제부터인가 곰이 되려나 봐 손을 델 수 없게 자꾸 뜨거워 / 반갑다고 흔들어 대는 것이 곰이 꼬리가 어디 있나 / 사랑은 발끝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거야’라는 이상한 내용으로 부른다.) 1집에서 <강아지>와 <tangled>는 다소 외설적인 가사와 욕설로 인해, <I like watching you go>도 ‘어느 아빠나 마음은 똑같겠지만 / 이게 어딜 봐서 비슷한 걸까 / 나는 이마 대신 입에 맞추네’라는 가사가 근친상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고 결국 이 세 곡 모두 19세 판정을 받는다.

 이렇게 1집에서 검정치마는 20대의 철없고 찌질한 사랑과 그 때의 아련함을 필터링 없이 과감한 언어로 노래했다. 검정치마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부른 <좋아해줘>가 자해공갈 느낌이라고 말했는데, 1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자는 1집을 전체 재생한 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길 정중앙에서 징이 박힌 라이더 자켓을 입고, 장발을 흔들며 불러야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악을 쓰거나 점프를 하면 더욱 신날 것 같다.)  

 

정규 1집 리패키지 버전 자켓사진

 

 

 

1집 초판본. 중고 시장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

 

 

 정규 2집 <Don't you worry baby (I'm only swimming)>을 냈을 때 조휴일의 나이는 29살, 거의 서른이었다. 2집의 트랙들을 순서대로 들어보면, 1집에 비해서 전반적인 노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가사도 많이 얌전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집에서는 젊은 날의 패기와 철없음을 노래하지만, 2집에서는 좀 더 달콤하게 사랑을 노래한다. 이는 <Ariel>, <젊은 우리 사랑>, <이별노래>, <international love song>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1집에서는 정말 찌질한 사랑을 노래한다면, 2집에서는 성숙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장난스럽게 사랑을 노래한다. 대표적으로 <기사도>와 <무임승차>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약간의 ‘장난기’는 검정치마의 노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요소이다.

 한편, <음악하는 여자>는 ‘음악하는 여자는 징그러 시집이나 보면서 뒹굴어 아가씨’라는 가사로 인해 논란이 된다. 팬들은 미술을 하는 아내에게 바치는 곡이라서 음악하는 여자가 싫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과거 검정치마의 구성원이었고, 현재는 따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뮤지션인 ‘야광토끼’를 저격한 곡이라고 한다. ( 각 - 실제로 야광토끼는 이 곡이 나온 이후에 <왕자님>이라는 역저격곡을 냈다. 또한 검정치마와 야광토끼가 연인 사이였다는 궁예도 있다.) 이 문제는 공론화되지 않은 채 팬들의 쉴드에 묻혀갔고, 조휴일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떠오르는 대로 노래를 만들고 수정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을 진지하게 누군가를 지목해서 훈수를 두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각 - 인터뷰 대답 전문: ‘음악하는 여자는 징그러’라는 가사 뒤에는 이런 노랫말도 나오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 안 하는 게 좋을텐데. ‘가삿말에 진심을 담지마’(웃음). 음악 하는 여자들 가운데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거나 자기 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오버다. 원래 떠오르는 대로 노래를 만들고 수정도 잘 안하는 성격이라 쭉 써내려갔지만 누군가를 지목해서 진지하게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노래로는 해석이 안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실제로 음악하는 여자들에게 매력을 못 느끼는 건 사실이다. 기자님도 글 쓰는 남자 싫지 않나? NBA선수도 WNBA선수랑 서로 안 사귀는 거랑 비슷하다. - W korea 2011.8.25. 인터뷰) 검정치마를 좋아하면서 유일하게 가려운 구석으로 남아있는 부분이다...

 정리하자면, 전체적으로 성숙해졌지만 조금은 장난스러운 2집은 1집처럼 길 중간에서 악을 쓰며 부르는 것이 아니라, 번화가에서 버스킹으로, 노래를 들어주는 관객들과 적당한 장난을 치면서 부르는 느낌이다.

 

  

정규 2집 자켓 사진. 현재 조휴일씨의 부인인 김신혜씨가 작업했다.

 

과거에 키보드를 맡았던 야광토끼

 

 그리고 3집 <Team Baby>, 검정치마는 결혼 후 자식까지 낳은 영향인지 이전의 앨범들과 비교했을 때 더욱 성숙해진 가사로 사랑을 노래한다. 자해 공갈단처럼 사랑을 노래하던 철없고 혈기왕성한 20대는 사라지고, 안정되고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36살의 남자만 남았다. 이 남자는 길고 긴 공백기 동안 어떤 여자의 남편이자 어떤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더 이상 찌질하고 장난기 넘치는 사랑노래는 하지 않는다. 진지하고, 진실된 사랑을 노래한다. 실제로 3집이 나오기 전 피키캐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전 앨범의 과감하고 공격적인 가사들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조휴일은 이제는 성숙해져서 그런 가사들은 기억이 안 난다며, 그 당시에는 홍대를 자양분 삼지 않고, 한국에 연고가 없어서 표현이 자유로웠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각 - https://r.pikicast.com/s?fr=&t=RALCKGn&m=lk&c=ws&v=sh&cid=on3&i8n=kr)

 <한시 오분>에서는 오래된 연인과의 관계를 ‘같은 템포, 다른 노래’로 비유하고, 매일 다른 이유로 연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Diamond>에서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다이아몬드와 자신의 사랑이라고 노래하고, <나랑 아니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임을 말한다. 이렇게 로맨틱한 가사들과 검정치마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 그리고 몽환적인 신시사이저 음이 합쳐져서 청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노래들을 모두 믹서기에 갈아서 뿅! 하고 만든 것 같은 노래가 있는데, 바로 <Everything>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3집의 베스트 트랙이며 <Antifreeze>를 이어 한국 인디음악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사랑 노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검정치마 3집 어때요?” 라는 질문을 하면 “<Everything>을 들어보세요. ^.^”라는 말이면 충분하다. 그가 노래하고자 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3집의 전체적인 노래분위기가 어떤지 설명할 수 있는 노래다.  

 3집을 들으면 그에게 연애편지를 받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의 연인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 필자는 이렇게 검정치마의 3집을 들으면서 연애에 대한 모든 로망을 형성했다. ( 각 - TMI: 필자는 조휴일이 결혼한 것을 뒤늦게 알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연인이 너무 부러워서! 방 커튼도 <Everything> 싱글앨범 커버에 나와 있는 분홍색 커튼으로 하려다가 가족의 만류로 인해 결국 암막커튼을 달았다.) 1,2집과 달리 3집은 더 이상 길에서 부르는 느낌이 아니다. 둘만 있는 방안에서, 연인과 누워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느낌이다. 방 안이 몽환적인 음으로 가득차고, 몸이 젖어들면 나른한 느낌과 함께 마음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verything> 싱글 앨범 자켓
3집 컴백 후 홍대 상상마당 공연 모습

 

 조휴일이 나이를 먹어감과 동시에 그가 만드는 음악의 느낌도 달라져왔다. 지금까지 나온 3개의 정규 앨범은 모두 다른 느낌이며 각각의 특징이 있다. 그리고 2집과 3집 사이의 텀이 길었던 만큼, 3집의 음악들은 기존의 검정치마의 음악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다. 그리고 어색하지 않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에 그의 새로운 앨범을 기다리는 것은 보람도 있고, 일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더 이상 괴로운 일이 아니라 팬들 사이에 하나의 재미로 자리잡았다.

 사실 괴로운 일이 아니라는 건 거짓말이다... 팬들은 검정치마의 신보를 항상 기다린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 노래를 하나씩 내줬으면 좋겠고, 이름은 휴일이지만 휴일 없이 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고 6년의 공백을 겪어봤기에 이제는 조휴일씨가 그냥 일하고 싶을 때 열심히 일해서 좋은 노래를 적당한 시기에 던져준다면 만족할 것 같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기존에 냈던 노래들을 복습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데, 왜 검정치마는 거의 6년의 긴 공백기를 만들면서 팬들의 속을 타게 한 것일까? 본인의 말로는 2집을 내고 새로운 취미를 갖고 싶어서 무턱대고 게임기를 샀는데 게임을 하다보니까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1년이 되고, 1년이 2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집에서 영화를 보며 지냈다고. 모든 팬들이 이 말을 듣고 속이 부글부글 거렸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사태를 겪은 후에 그는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다시는 긴 공백을 가지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각 -  https://r.pikicast.com/s?fr=&t=RALCKGn&m=lk&c=ws&v=sh&cid=on3&i8n=kr)

 3집 Part 1. <Team Baby> 이후 1년하고 반년 정도가 지난 이 시점에, 검정치마는 인스타그램으로 3집 Part 2.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히 전하고 있지만, 발매일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조휴일씨, 당신 덕분에 기다림에는 도가 텄습니다. 추워질 때 돌아온다고 했는데 이미 너무너무 춥습니다. 제발 파트 투를 빠른 시일 내에 던져주세요. 앨범 안 내고 알래스카로 떠나면 안 됩니다. 일해라 조휴일!!!

+) 3집 파트 투 <Thirsty>가 2월 말에 발매된다는 소식을 1월 11일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전했다. 일했다 조휴일!!! 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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