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만큼은 아니어도


예청그릴스



덕심도 문장력도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창간호의 한 바닥이 주어졌다. 시작이라는 부담감을 재미난 소재로라도 극복해보자는 생각에 머리를 굴린다. 근래의 나를 돌이켜보니 최근 그나마 ‘열의를 가지고’ 하는 일은 인스타그램이다.


정신 없이 계정의 바다를 떠돌다 보면 지극히 관음증적인 ‘나’ 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는 자신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그것을 본다. 손가락을 잘못 놀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내가 본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스크롤을 쭉쭉 내리면서 누군가 올리는 사진이나 영상을 마음껏 감상하면 된다. 작은 네모들의 모자이크로 된 세계는 내 안의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요즘 ‘훔쳐보는’ 대상은 설리다.







우선 그녀는 예쁘다.

이건 그 세계의 암묵적인 공식이라도 되는 것인가? 예쁘거나 매력적이거나 멋있어 보이면 우선은 팔로우하고 본다. 초창기에만 해도 팬들에게 ‘셀카고자’ 라는 짓궂은 별명을 들었던 설리가 이젠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한 것인지 올라오는 사진마다 예뻐서 ‘팔로우할’ 맛이 난다.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재밌어서다. 그녀가 올리는 사진들은 심심찮게 화제가 된다. 하도 논란거리가 되어서인지 잠시 계정을 닫기도 했던 그녀가 이제는 대놓고 대중의 반응을 노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활발하게 사진을 올리고, 대중은 그것들에 반응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빠지게 된 결정적 계기를 꼽자면 그건 그녀의 ‘ㅉㅉ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얇은 옷을 입은 채로 찍힌 사진 속에서 그녀의 가슴의 ‘그’ 부분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던 것이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설리가 과연 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에 대해 열띤 논의를 펼쳤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의 사진에 대한 여러 편의 온라인 기사와 사진 아래 각자의 추측과 확신 혹은 비난과 감탄으로 달렸던 수많은 댓글들이다.

‘누군가가 브래지어를 착용했는지 안 했는지’가 엄청난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새삼 평소 좋아하던 할리우드의 연예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온몸을 노출하거나 음식에 침을 뱉는 식의 물의를 일으켜 논란이 되던 그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연예인으로 살기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인들도 패션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가슴을 드러내고는 하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논란거리가 될 수 있기는 할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해외 여행을 할 때마다 한번씩 우리나라가 유독 가슴에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선 노출이 항상 성적이다. 내가 드러내는 것은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 버린다. 신체의 굴곡과 라인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와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더울 때에는 벗어야 한다는 주의여서 여름에 민소매를 입는 것을 좋아하는데, 입을 때마다 엄마의 잔소리는 덤으로 따라 온다. 엄마 말에 따르면 외국에선 되는데 우리나라에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냥 한 귀로 흘려 버리는 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살을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는 날이면 나부터 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볍고 시원해서 좋기는 해도 민소매를 입는 날이면 사람이 많은 길거리를 지날 때에는 얇은 겉옷이라도 걸쳐야 마음이 놓인다. 내가 더워서, 내가 좋아서 조금 더 살을 드러낸 것뿐인데, 그들을 위해, 마음껏 보라고 입은 것처럼 구는 시선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아래위로 훑는 시선이 싫어서 치마도 잘 못 입는 내게 그런 시선은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다. 속옷이 보일 듯 말듯한 길이의 치마를 입고도 씩씩하게 잘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민소매를 입을 때에는 속옷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우리나란 남이 속옷을 착용했는지 안 했는지도 상당히 중대한 관심사인 곳이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너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맞춰 보겠어’ 라는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민소매를 입을 때에는 속옷도 제대로 차려 입어줘야 한다. 만일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내 의도와 상관없이 헤픈 사람이 되어버리거나 살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벗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설리를 보고 ‘너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맞춰 보겠어’ 라는 식으로 맹렬히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이 곳은 가슴 한번 드러내고 다니기 피곤한 곳임을 깨달았다. 내가 내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왜 이상한 일 혹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맨 살을 드러냈을 때에는 왜 남이 내 몸을 훑는 시선을 감당해야 하며,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극도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버리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사는 걸 한층 더 피곤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설리를 다룬 어떤 기사에서는 그녀가 우리 사회의 ‘리트머스’ 같다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암암리에 작동하는 무언의 금기들을 노출한다는 점에서다. 그녀는 연예인이기도 하지만 여자 연예인이기도 하다. 그녀를 향한 시선은 연예인을 보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여자를 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에게 작동하는 시선이 그녀에게 작동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제 설리는 자신의 행동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대중의 모습에 질리다 못해 역으로 그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어떤 의도에서든 (혹은 아무런 의도가 없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드러내주는 것은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이건 그저 개인적인 단상이다. 사회에 팽배한 남성중심적 시선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요즘 소소한 덕심을 키우고 있는 설리에 대해 떠들어 본 것이다. 많이 피곤할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도 아니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쓸데 없는 일이 연예인 걱정이라는 말을 들은 후로 그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단지 얘기해보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다. 해외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만 들어서면 느끼게 되던 그 압박감들. 00 살이면 당연히 해야 하고 끝내야 하는 일들. 한국에서 나이와 학벌과 성별이 결정하는 모든 임무들에 대한 피곤함. 그 모든 것들은 내가 결정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원치 않은 시선들이 내 인생에 던져진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 적도 그것들을 바란 적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관음증이라 부르겠다. 한 연예인이 노브라인지 유브라인지가 진지하게 논란이 되어버리는 곳에서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는 것, 내 멋대로 살면서도 정상적이고 보통의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타인을 훔쳐보고 훔쳐봄을 당한다.


어찌 보면 이건 투정이다. 내게 던져지는 시선들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에 유독 설리를 훔쳐보는 것이 더 재밌을지 모른다. 설리의 사진은 먹이처럼 던져지고 사람들은 반응한다. 설리는 그것을 통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지겨워하는 것 같기도, 사람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기에 상처받은 설리는 없는 것 같다. 진짜 설리는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위안을 받고는 한다. 설리를 바라보는 희한하고 왜곡된 시선들을 가리켜 관음증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웃어넘겨버리면서.



어떤 고백: 내 안의 un-PC함에 대하여


레몬밤




머리를 감는 시간은 일상적인만큼이나 비일상적이라서, 샴푸로 시원하게 두피 구석구석을 닦아내다 보면 바깥에서 가져온 먼지들과 함께 숨어있던 기억들이 거품에 하나 둘 섞여 나오곤 한다. 그토록 기억해내고 싶던 순간에는 절대 떠오르지 않았던 노래의 제목이라든지, n년 전에 배웠던 수학 공식이라든지, 잊고 싶었던 과거의 순간들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더불어 머리를 감는 순간만큼은 인간의 창의력이 배가 되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것들에 반짝하는 통찰력이 발휘되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샴푸와 함께 씻겨 내려가지만 다른 것들은 오랜 시간 머릿속을 맴돈다. 이 글은 샴푸와 트리트먼트와 샤워기의 물에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머리에 들러붙어 그를 간지럽히던 생각에 대한 글이다.

그가 머리를 감고 나서도 개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의 가치관을 그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가치관이 무엇이길래 그러느냐 묻는다면 그는 아마 PC라는 짧은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인 올바름. 조금 더 설명해달라 부탁하면 그는 한 번에 정리되지 못한 말들을 고르며 자신만의 기준을 나열할 것이다. 그러니까, 혐오발언에서 자유로운 것.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 대상화 하지 말 것. 예컨대 칭찬을 포함한 외모 평가 하지 않고, 여자는~ 남자는~ 하면서 인간을 생물학적 성별로 환원 시키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것.


적어도 그는 대외적으로 PC한 삶을 표방하고 있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어느 수준 요청하며 지내왔다. 사실 남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아직 그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 자신도 un-PC함[각주:1] 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매일매일 스스로의 사고와 언행을 돌아보며 조심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자신이 정한 기준 이상으로 친밀한 사람들에게는 속으로 어느 정도의 기준을 들이미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 그 사람의 PC 수치가 기대보다 낮으면 속으로 실망하거나 혹은 그 사람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un-PC함을 목도한 경우에는 조용히 연을 끊기도 했다. un-PC함이 부재하는 세계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바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소우주일지언정 PC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 필요했고, 작게나마 자신의 어항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조금 더 깊은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숨을 시원하게 쉴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일과를 모두 마친 저녁 머리를 감던 그가 본 것은 그의 내면에 깊게 뿌리내린 un-PC함이었다. 사실 un-PC함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왜 올바르지 않은지 알아냈다면 마음에 새기고는 다음부터 조심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그는 돌이 아니라 깊은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그 나무는 10년 이상 그의 삶에 뿌리 내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쉽게 뽑히지 않을 나무였다.


         “내 삶은 덕질로 점철되어 있어.” 그는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좋아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최초의 덕질은 아이돌덕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그의 아이돌 덕질은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어 그의 삶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그는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면 그저 앓고 좋아하고 새우젓이 되어 버리는 것이 덕질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개 방송 방청을 간다든지 하는 적극적인 덕질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덕질에 꾸준하게 지출을 하고 있었다.



         아이돌은 상품이지.


머리를 감던 도중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간단하게 이 한 문장이었다. 김이 샐 만큼 당연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뭐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PC함을 추구하던 자신이 너무나 당연하게, 무비판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덕질에 임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어느 시기부터 그는 뭐랄까, 일종의 심사위원, 평론가 같은 느낌으로 아이돌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이돌 산업의 상품으로써, 아이돌들은 조금이라도 더 잘 ‘팔리기’ 위해 자신의 상품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들이 증명에 실패하면, 그는 가차없이 지갑을 닫았고, 일기장에 아무도 보지 않을 비판들과 개선 방안을 적어 내려가곤 했다.



그가 생각하던 아이돌의 상품가치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1순위는 외모였다. 외모보다는 실력으로 주목받는 멤버라도 어느 정도 그가 수긍할 수 있는 얼굴과 몸매를 가져야 했고, 소위 ‘방송물’을 먹은 티가 나야 했다. 얼굴이나 키, 몸매가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 그는 속으로 “쟤는 아이돌을 할 애가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활동기에 외모 관리를 하지 않은 티라도 난다면 그것은 아이돌로서 실격이었다. 그는 아무리 콩깍지를 끼고 봐도 “00가 휴식기 동안 잘 먹어서 얼굴 살이 붙었다. 볼살 오른 모습도 귀여워!”와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에게 외모로 먹고 사는 자가 관리를 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인 셈이었다.


다음으로는 실력이었다. 엄청난 실력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실력이어서도 안 됐다. 또 데뷔 이후 꾸준히 실력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심이 없던 아이돌 그룹 멤버도 실력이 는 것이 눈에 띄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곤 했다. 적어도 퍼포먼스에서 못해서 튀는 것은 그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콘서트에서 가사나 안무를 숙지하지 못한 것이 티가 나서도 안 됐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포장이 될 수 있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돈 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그는 외모나 실력 어느 한 쪽이 부족할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아이돌들이 둘 다 평균 이상을 갖추기를 바랬다. 그가 가장 애정을 쏟는 멤버들만 봐도 그룹에서 외모와 실력 모두가 아쉬운 소리를 듣지 않는 멤버들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남들을 재단하고 있었고 아이돌들에게 자기가 가진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이미지 관리였다. 그는 아이돌의 인성을 보고 좋아한다거나, 유사연애처럼 덕질을 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이돌은 그저 판타지와 이미지를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도 철저하게 그들의 이미지만을 소비했다. 아이돌이 뒤돌아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공개되지 않는다면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임을 들키지 않는 것. 그저 보여지는 존재. 대중에게는 항상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그의 또다른 자아로 –그것이 자신의 본래 성격과 닮았든지 닮지 않았든지 간에- 나타날 것. 그것이 그가 아이돌에게 암묵적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인간미’는 아이돌에게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아이돌은 항상 완벽하게 만들어진, 하지만 닿을 수 없는 곳에 진열된 제품이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던 그의 덕질 기제였다. 막상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바로 나올 수 있는 답안들이었으니까. 어쩌면 그가 un-PC함에 대한 항체를 너무나도 적게 가지고 있기에 심각하게 생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상품이 되면 어떤가?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금액을 벌어가는데. 어찌됐든 간에 이론적으로 PC함을 추구하는 그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해야만 했다. 어떻게 인간을 상품으로 볼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외모 평가를 할 수 있는가? 아이돌이 이미지로 먹고 살지언정 ‘사람’인 티를 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이성의 언어로 자신의 덕질을 표현하는 버릇이 있어서 아이돌을 평가하는 위치에서 덕질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정제된 언어로 왜 그 노래가 좋은지, 왜 그 가수가 좋은지를 정리하고 싶어하던 그였으니까. 새로운 ‘떡밥’이 뜨면 하염없이 앓았지만, 끝까지 새우젓으로 남기에는 그의 평론가적 기질이 너무 강했다. 혹은 그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방어할 기제를 만드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이돌의 인성을 좋아하거나 아이돌을 유사 연인처럼 생각하면 나중에 실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소위 ‘현타’라 불리는 현실 자각 시간을 맞고 지난 세월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이돌보다 우위에 놓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이런 자신이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덕질과 un-PC함은 떨어질 수 없었고 그는 덕질과 떨어질 수 없었으니까. 그는 생각했다. 그들을 ‘사람’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그들의 외모가 아니라 퍼포먼스만을 멋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들과 나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리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아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에는 먼지들이 들러붙기 마련이고 두피에서는 기름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몸을 씻는다. “덕질 할 때 나의 un-PC함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는 말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은 아이돌을 완벽한 상품으로 생각하는 입장을 버리고 덕질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러한 un-PC함을 머리 유분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머리에 기름이 돈 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적어도 매일 깨끗하게 샴푸를 하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머리를 감으며 구석구석 숨어있는 un-PC함과 마주한다.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크게 틀어놓은 채.


  1. 이미 명사화 된 것에 또다시 명사형 접미사를 붙이는 것은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거슬리지만 많이들 이렇게 쓰고 있고, 본인 입에도 붙은 형태라서 어쩔 수 없다고, 그렇지만 꼭 이 내용을 글에서 언급해 달라고, 그는 말했다. 의외의 곳에서 고지식한 그다. 아마 un-PC함라는 단어도 문법적으로 이상하다며 속으로 찝찝해 할 것이다. [본문으로]

국내에서 K-POP을 소비하는 지극히 잔인한 방식에 대하여

가수 · 아이돌 · 아티스트


왕수박




 쟤네는 가수라는 애들이 노래를 왜 이렇게 못해?’ 음원과 음반을 발표하고 무대에 서는 모든 이들에게 가수라는 잣대가 들이밀어지는 것에는 얼핏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가수라고 일컫는가? 한국인들이 가수라는 직업에 부여하는 의미는 사실 조금 특별하다. 가수의 사전적 정의는 노래 부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나, 한국인들의 노래와 업에 대한 잣대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이 동네 노래방에 그득그득 들어차있는 한국에서 노래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특별한 일인 것이다. 나도, 내 친구도, 내가 아는 누구도 할 만큼 하는 노래로 그 돈을 번다는데, 타고난 음역대와 성량이 무조건 기본이 되어야 하며, 외모와 잘 빠진 커리어는 그저 옵션일 뿐. 발성과 고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가 엄격한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기준은 히트 작곡가들을 보유한 음반사들을 중심으로 발라드, 포크 등 가창력을 뽐낼만한 장르를 입혀 훌륭한 가창인들을 스타로 만들던 과거 한국 대중음악계와 쿵짝이 딱 맞아 떨어졌다.



제주도에서의 일상을 공개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금 끌어모은 이효리, 예쁜 소녀의 전형들을 모아 단번에 폭발적인 인기를 끈 트와이스, 대국민 오디션으로 데뷔한 윙크남박지훈, 칼군무 퍼포먼스와 10대를 대변하는 가사로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수상한 방탄소년단. 해외에서 K-POP 아티스트로 소개되고 있을 이들은 모두 자국에서 가수라는 카테고리로 평가받는다.




 물론 화려한 고음과 음색을 유감없이 뽐내는 가수들은 언제나 환호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지만, 한국 음반시장이 막 틀을 갖춰나가기 시작할 무렵 인기를 끌었던 유형과 장르는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 사실 그 뿐이다. 가수는 가창력이 좋아야 한다는 인식의 뿌리가 이렇게나 단단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고음 위주의 가창력이 너무나도 당연한 가수의 필요조건으로 굳어지면서 기이한 모순이 하나 탄생했다. 무대 위 가수의 활동 영역과 장르가 너무나 다양함에도, 춤이나 외모 등 음악활동의 다른 조건들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스탠딩 상태로 뛰어난 가창력을 보여주는 이들이 가수 카테고리에서 언제나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가수의 뜻이 노래하는 사람이니 노래로 평가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무대 위에 선 모든 이들을 가수라고 통칭하지 않는가. 초기에는 좁은 의미의 어휘가 확장된 실제를 포괄하지 못하는 현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한국인들이 고음을 뽐내는 발라드만 주구장창 들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과거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도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가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대중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가창력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저 춤으로 성적 매력을 뽐내는 대상, 춤추며 립싱크하는 뻐끔이 정도로 평가받은 한국의 댄스 가수들은 댄서도 퍼포먼서도 아니었으며, 가수도 아니었다. 일부는 춤과 노래를 동시에 소화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가수 지위는 얻지 못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을 가수라고밖에 부르지 않으면서, 미디어와 대중들은 가수와 고음 가창 사이의 이상하리만큼 과한 유착을 만들어 낸 뒤 가수 개념 자체를 편협하고 비좁은 일종의 고급 자격으로 왜곡시켰다. 또한 가창력의 상품화는 점점 신격화하는 동시에 퍼포먼스와 댄스 어필은 기이하리만큼 상품이라며 비난했다. 비좁은 한국 음악 시장에서 음악은 곧 보컬이라는 편협한 초기의 인식과 시장구조가 모든 음원, 음반을 발표하는 뮤지션, 연예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너무나도 견고해진 나머지 지금까지도 음원, 음반을 발표하는 모든 대상에게 적용되고 있다. 퍼포먼스 중심의 아티스트는 댄스 가수, 10대들에게 인기를 끄는 비주얼 중심의 밴드는 아이돌 가수로 인식된다. 래퍼도 가수고 락 밴드의 드럼 멤버도 무대에 서니까 가수란다. 결국 노래를 잘해야만 가수이고 뮤지션이 될 수 있으며 음악 활동의 필요조건은 곧 고음 가창이 되어버렸다.



가창과 춤이 모두 A인 가수보다 가창이 A+인 가수가 진정한 가수가 된다.






 이 틈에서 어차피 아이돌도 가수라면 노래도 춤도 외모도 잘 해보자라는 식의 하이엔드 K-POP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LP 음악을 사랑하는, ‘나는 가수다를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세대들에게 저게 가수냐며 비난받던 아이돌들은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고, 해외에서 미친듯이 팔려나갔다. 화려한 외모, 칼군무로 대표되는 퍼포먼스, 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세련된 편곡과 캐치한 멜로디를 모두 라이브로 소화하는 K-POP 밴드들이 해외에서 줄줄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세계적인 팝스타가 됐을 것이라는 팬들의 공허한 절규는 점차 현실이 됐다.


 그러나 정작 국내 대중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기 짝이 없다. 그래봤자 해외에서의 K-POP의 성공은 허위이고 국뽕이 낳은 환상이며, 아이돌 문화는 여전히 대중문화 안에서도 외모나 성을 파는 가짜 가수들의 오타쿠 하위문화이다. 심지어는 싸이의 성과도 국뽕이란다. 대중들은 미국 팝계를 추종하지만 정작 현지에서 성공한 그는 여전히 벼락 맞은 B급 댄스 가수이다. 유명해졌기에 대우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처럼 대중들은 K-POP에 대한 객관화를 미룬 채 여전히 진정한 가수가 아닌 이들에 대한 사랑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한다. 물론 해외에서 일부가 인정받는다는 이유로,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이들의 영역에 꼭 긍정적 평가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개별 아티스트, 음반의 객관적인 완성도 또한 별개의 문제이다. 추가적으로 90년대 청소년들의 저항 문화가 아이돌에 대한 열광으로 이식되면서 광적인 팬덤 문화가 탄생했고, 이것이 K-POP 시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여전히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돌을 연예인 혹은 퍼포먼서나 엔터테이너로 소비하면서 동시에 보컬 중심의 가수 개념으로 인식하고 비난하는 것은 분명한 아이러니이다. 왜 우리는 무대에 서있는 모두를 여전히 가수로 남겨두며 그들과 그들을 남몰래 소비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이 지점에서 가수에 대한 기존 정의의 한계를 반성하기라도 하듯, 동시에 아티스트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내면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고전적인 예술가 개념이 대중음악계로 아주 간편하고 경제적으로 이식되었다. 기존의 가수 개념이 기계적인 가창력을 강조했다면, 아티스트는 표현위주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기존의 가수와 가창력에 대한 관념이 트렌드에 맞게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 뮤지션들의 표현은 뛰어나고 섬세한 가창력을 통해, 스스로의 음악적 능력인 작곡 작사 역량을 통해 발휘된다. 자연스레 아티스트 개념은 가창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작곡 작사를 하거나 음원 성적이 뛰어난 가수, 춤을 추긴 하지만 나름의 퍼포먼스 능력을 인정받는 가수들을 변호하는 동시에 K-POP 아이돌이 절대 넘어오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국내에는 ‘artist’라는 영어 어휘가 주는 왠지 모를 무게가 함께 수입된 것이다. 결국 아티스트의 칭호는 대형 기획사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인형처럼 조종해대는 아이돌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되었다. 이에 반항하듯 K-POP의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으나 아티스트 개념의 확장은 계획이라도 한 듯이 양쪽의 접점에서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가창력 중심의 기성 가수들은 거대 자본과 상업성에서 자유로운가? 그들은 과연 스스로 모든 것을 프로듀싱하고 표현하는가? 그들은 정말 미디어가 만들어내지 않은 진정한(?) 예술가들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절대 ‘No’이다. 기성 가수들 역시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음반사들의 철저한 기획에 의해 성공했다. 그들은 연습생 시스템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티스트의 환상을 부여받기도 했다. 물론 이후에도 개인적 창작물이 거듭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소수의 가수들은 칭송받기 마련이지만, 아이돌의 유사한 노력은 폄하되거나 비웃음을 사는 데 그친다. 사실 기성 가수들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작곡 작사, 프로듀싱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특권에 불과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애초에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이들의 표현에 대한 기회는 상업적 성공 여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상업적으로 실패하는 앨범을 계속해서 발매해줄 수 있는 레이블이 과연 존재할까. 아마도 그건 기획사가 없는 인디 뮤지션들의 특권일 것이다. 결국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발생한 아티스트형 뮤지션의 개념은 아이돌과 기성가수를 똑같은 칼로 겨눈다. 일부 평론가들은 특정 상업 가수들을 보호하고 대중문화 내에서의 고급 취향을 계속해서 구별짓기 위해 예술성, 음악성 등 실체 없고 그럴 듯한 개념으로 새로운 포장지를 내놓았을 뿐이다. 이는 애초에 순수예술도 아닌 대중문화를 소비하면서 고급 취향을 가졌다고 믿고 싶은 대중들의 유사한 심리를 정확히 겨냥했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대중음악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자신의 작업물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진정한 아티스트의 모습은 과거 팝 씬을 왜곡하여 수입한 환상이며, 국내에서 굳이 찾자면 자본과 온전히 분리된 인디 씬에나 적합한 개념일 것이다.



 

 이렇게 아티스트 개념은 기존의 가수와 가창력이라는 굴레에 발목을 잡힌 채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재창조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만들어진 컨텐츠의 상업성을 표현하는 것이 포인트라면, 그 어떤 영역에서보다 헐렁해야 할 개념이 대중음악에서의 아티스트가 아닌가. 미국 팝 시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내한 공연이 열리면 우리가 눈에 불을 켜고 티켓팅하는 팝스타들은 한국으로 치면 아이돌에 가깝다. 한 줄의 멜로디에 탑 라이너 수 십 명이 달라붙고, 편곡과 엔지니어링의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들을 아티스트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이러한 창작 과정에의 참여 여부가 아니다. 물론 과정에 깊게 관여하는 모습을 마케팅에 활용하면 그의 상업적 가치가 더욱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아티스트가 모든 것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 그 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투입된 만큼의 거대하고 멋진 자본의 결과물을 끌고 갈 수 있는가. 그것이 발라드인지 댄스인지, 고음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라이브를 하지 않지만 잘 만들어진 무대와 춤으로, 누군가는 독특한 음색 하나로 아티스트라는 헐렁한 지위를 인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K-POP 아이돌들은 빌보드를 비롯한 각종 팝 매체에서 거창한 뜻 없이 아티스트로 일컬어진다. 아이돌이 음악적 역량에서 완전히 분리된 일본은 반대의 경우이다. 과거 일본에서도 아티스트형 아이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점차 아이돌의 존재가 엔터테이너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음악과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이제 일본의 대중들은 아이돌에게 어떠한 가창력이나 음악적 역량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돌의 음악은 사무소의 매상을 올려주는 하나의 굿즈일 뿐이며 대중성 있는 팝 음악으로서 기능할 의무가 없다. 오히려 애초에 없는 음악적 역량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은 극적인 셀링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엔터테인 요소들만을 당당히 내세우며 각종 미디어는 그들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소비할 뿐이다. 한국 대중들에게는 놀랍게도, 소녀시대는 일본에서 의심 없이 아티스트 혹은 가수의 취급을 받았다. 그들의 라이브와 안무 소화능력은 일본에서 아이돌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아티스트의 무언가로 비춰졌다.




AKB48의 음반은 언제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지만 정작음원 차트 최상위권에서 빈번하게 광탈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K-POP을 소비하는 방식은 좋게 말해 다층적이고, 실상은 매우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가수 혹은 아티스트의 역량을 갖춰야하며, 잘 만들어진 대중음악을 상업적으로 성공시켜 팝스타의 지위를 가져야 하는 동시에 연예인이자 엔터테이너로서 자신의 외모를 끊임없이 상품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이 모든 것을 해내더라도, 아이돌 혹은 댄스가수라는 이미 강등된 지위에 머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잔인함은 K-POP 컨텐츠의 질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누군가는 이것이 한국 아이돌 문화만의 특징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혹은 그들의 실제 역량과는 별개로 광적인 팬 문화나 외모가 상품화되는 방식 등 그들이 소비되는 방식 자체에 거부감이 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모순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는 아이돌 혹은 퍼포먼스 중심의 가수들을 한국에서 사용하는 아티스트 개념에 편입시켜달라거나 일본처럼 아이돌은 그저 아이돌로 봐달라는 구구절절한 요구가 아니다. 요컨대,

 



 ◎ 뮤지션으로서의 자질이 중요하다면, 왜 음악적 역량이 충분한 일부 K-POP 아티스트들은 이유 없이 평가절하 당하는 동시에 여러 외적인 잣대들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아이돌의 수동성이 문제라면 기성 가수들은 과연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운가? 동시에 아이돌은 음악적 영역에서 정말 온전히 수동적인가?



 ◎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기준을 또 다시 들이대고 싶다면, 음악적 역량과 표현은 그저 보컬에 한정된 것이냐는 물음에 답할 필요가 있다. 트와이스에게 어차피 노래 못하잖아라고 하는 것과 김범수에게 어차피 춤 못추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가? 물론 둘 다 엉뚱한 소리임에도 전자는 지나치게 합리화된다.



 ◎ 그럼에도 여전히 각자의 영역을 인정할 수 없으며 김범수의 가창이 훨씬 더 고급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돌의 외모와 퍼포먼스가 상품화되는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저급인가? 음색, 고음, 댄스, 예능감, 몸매, 얼굴 등의 갖가지 요소들은 자본 앞에서 모두 상품이자 구태한 소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우리는 연예인이 미디어의 상품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상품성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존엄한 인간이 상품화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아도르노를 읽으며 대중문화 전체를 겨누어 보라.



 ◎ 그럼에도 당신이 멜론차트를 듣는 와중에 순수한 음악의 영역으로 취급되는 진정한 가수들이 존재한다고 느낀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인디뮤지션들의 인기 요인은 과연 음악이 인디 성향을 띠기 때문일까? 레이블의 자본력이 인디펜던트 수준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음악이 거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는 않은가?



 ◎ 어떻게 보더라도 결국 음악적 역량이 부족한 것이 맞다면, 연예인 혹은 엔터테이너로서 충실하게 기능하고 있는 이들이 굳이 가수 혹은 (기이한 방식으로 신격화된) 아티스트 개념에 비추어 비난받아야 하는가? 왜 소위 일본식의 아이돌들까지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가수혹은 아티스트개념에 도달해야만 하는가?

 





  

덧붙임


 

 국가대표 아이돌을 뽑는다는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은 얼핏 일본 아이돌의 생존방식을 표방하며 K-POP의 지형을 새롭게 변형시켜준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요소들이 K-POP에 대한 대중들의 엄격한 시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제작진은 댄스, 보컬, 외모, 매력, 리더쉽, 예능, 인성, 프로듀싱 능력, 안무창작 능력을 누가 더 하나라도 많이 갖추었는가의 싸움을 붙이고 이를 지켜보는 모든 시청자들은 매우 엄정한 평가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결국 이러한 시선은 참가자들의 숨통을 옥죄었을 뿐만 아니라, 표를 손에 쥔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대단한 K-POP 가수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참가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그 자격들은 자본의 논리와 상품성과는 전혀 별개라는 듯, 그저 아이들의 아름다운 꿈을 응원한다며 미친듯이 투표한다.

 동시에 굴레 밖 대중들은 쟤넨 어차피 가수도 아티스트도 아니라며, 일본 오타쿠 문화를 표방한 포맷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동시에 투표 참가자들까지 함께 손가락질한다. 와중에 고귀한 가수의 기준에 도달한 참가자들을 간신히 인정해보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을 너무나도 불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본인의 그 엄격하디 엄격한 잣대들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대중들은 끊임없이 보고, 욕하고, 반복한다. 어쩌면 앞선 가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경계 논쟁은 이미 구닥다리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여전히 떠안은 채 K-POP 문화는 잔인한 채찍질 속에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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