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P PICK

 

 

레몬밤 - <오션스 8>

 

 

산드라 블록, 케이트 블란쳇, 민디 캘링, 사라 폴슨, 아콰피나, 리한나, 헬레나 본햄 카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
산드라 블록과 케이트 블란쳇은 2018년 최고의 듀오가 아닐까. 그들의 투샷은 정말이지... 사람을 감격하게 한다. 그 외 킬링 파트를 꼽자면 결말 부분 주인공들의 모습. 다만 스펙터클하거나 다이나믹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과 번역가가 박지훈이란 점은 꼭 알고 볼 것.

 

레몬밤 - <선택! 줌보의 디저트(Zumbo's Just Desserts)>

 

영국의 요리 연구가 레이첼 쿠와 호주의 디저트 왕 아드리아노 줌보 앞에서 펼쳐지는 디저트 “덕후”들의 디저트 경연. 파티시에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히 디저트를 만드는 일이 너무 좋은 후보들이 모여 매 주 한 명씩 탈락하는 스릴 넘치는 대결을 펼친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을 연상시키는 세트장. 화려한 색감과 센스 있는 소품들,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디저트 재료들은 내 마음 속 “찰리”를 불러온다. 단순히 저 세트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연을 하는 후보들이 부러울 정도.

비 전공자에 아마추어일지라도 누구보다 창의력 넘치고 누구보다 실력있다. 주제에 맞는 창의력 발휘하기, 단순하지도 그렇다고 조잡하지도 않은 디스플레이 보여주기, 맛의 밸런스 맞추기, 시간에 맞게 완성하기, 기본 요리법에 충실하기 등 멀티태스킹을 한번에 해 내야 하는 상황속에서 약간의 스릴도 느낄 수 있다. “저게 맛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기하다못해 기괴한 재료 조합을 보여주는 줌보 테스트 미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호주 예능의 뻔하지만 반전있는 편집은 보너스.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하다.

 

 

익명 z - 이영도 판타지 장편들

 

 

군대에서 힘들어하는 전(前)동거인한테 드래곤 라자 양장본 시리즈(무려 9만원이었다. 중고는 8만 5천원.중고? ㅋ?)를 사줬다. 일주일 뒤, 다 읽었으며 이제 눈물을 마시는 새를 주문할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집에 가보니 미모의 50대 여인, 우리 엄마가 두 시리즈를 끝장내고 피를 마시는 새를 주문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읽고 있다. 중학교 때 텍스트본에서 시작해서 5번쯤 읽고 있는거 같은데 언제 봐도 명작이다. 우리 학교 관정도서관 7층인지 8층인지에도 있으니 추천한다. 이제 우리 아버지만 읽는다면… 이영도 당신… 우리 가족의 마음을 겟-또…….

 

 

사이숏 - 네이버 완결 웹톤 <마스크걸> (글 매미/ 그림 희세)

 

1부 7화 <모미 vs 아름>(위)과 1부 28화 <죄와 벌>(아래) 중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일어나는 분위기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소개) ‘끝내주게 못생기고 끝내주게 몸매 좋은 여자’, 김모미는 평범한 20대 후반 여성 직장인으로 밤이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마스크를 쓰고 인터넷 성인 방송을 진행하는 BJ ‘마스크걸’이다. 얼굴이 못생긴 그녀에게 이 사회는 유독 혹독하고 적대적이지만, 정작 모미 자신도 주변 여성들에 대한 혐오적 시선과 편견 안에 갇혀 있다. 성형 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직장 상사와 남성 동료들의 온갖 ‘빻은’ 소리들을 견뎌 가며, ‘잘생긴 품절남’ 부장님과 열애하는 공상으로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보내던 모미는 어느 날, 한 사내 동료로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협박성 쪽지를 받게 되는데…

총평) 1, 2부의 <마스크걸>은 주인공 모미를 비롯한 작중 여성들을 무조건 피해자화하거나, 남성을 일방적으로 가해자화하는 문법을 채택하는 대신에 개별 캐릭터들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여러 모순적인 측면들을 재치 있는 통찰력으로 그려내는 데 역점을 둔다(이것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반응은 현실에서 여성들이 당면한 생존과 폭력의 문제를 손쉽게 뭉뚱그리는 담론 틀을 제공할 뿐이다). 여성의 몸을 둘러싼 문제적 상황 및 현상 들에 대한 희극적 스케치로 출발한 소극이 2, 3부에 이르러서는 서사적 무게감을 한층 더하게 되면서, 초반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스러운 활력을 잃고 어쩐지 한 편의 모성 멜로드라마 대장정으로 마무리된 듯한 인상이 없지 않아 들기도 하지만, 결국 딸과 어머니의 관계가 두 세대에 걸쳐 단절 혹은 실패로 끝난 자리에 여성 연대의 또 다른 가능성이 대안 가족의 형태로 제시되는 대목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나름의 타협점을 찾고자 하는 이 작품 고유의 역량을 보여 준다. 별점은 다섯 개 만점 중 세 개 반.

 

 

 

콩브레과자점 - 2018상반기 밴드 내한 공연 中 Mogwai

 

 

밴드 내한은 Mogwai - Ride - Arch Enemy - Phoenix - Pvris - Turnstile 정도를 봤다. (일본 밴드와 국내 밴드를 보지를 못한 게 조금 아쉽다.)
Mogwai가 내가 본 2018 첫 내한 공연이었는데, 양일로 진행되었으나 Ride 공연일자와 겹쳐 하루밖에 보지 못했다. 솔직히 이전 한국 내한에서 티켓이 거의 팔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이나 공연하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이제 안 올 생각일지도 모른다.
본지 6개월 정도 된 Mogwai를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건.. 그들이 출력하는 평균 130db(준 제트엔진;;)의  소음의 경험과, 몸을 죽기살기로 울리는 그 드럼소리가 아직도 떠오른다. 미소를 머금고 허공을 바라보며 몸을 흔들고 있는 기타리스트와 발을 무대에 박고 같은 동작만 반복하는 베이시스트가 만들어내는 소리도 물론 아름다웠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처음 곡부터 이를 악물고 죽기살기로 탐이랑 베이스를 때리고 있는 드러머의 얼굴 표정이 아직도 무브홀에 서려있다! Pvris 공연을 보러 무브홀에 갔는데, 그곳에서 다시 한번 그녀(?)/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원래 드러머는 남자인데, 이상하게 내가 본 날에는 드러머가 아팠는지…. 중성적으로 성별이 잘 구분이 안 되시는 분이 드럼을 치고 계셨다. 여자로 추정. 아닐 수도 있음.)

 

 

달 - 다음 완결 웹툰 <바토리의 아들> (글 호르자 / 그림 영광)

네이버 연재 웹툰 <그 판타지 세계에서 사는 법(그판세)> (촌장)

 

<바토리의 아들> 썸네일(위) / <그 판타지 세계에서 사는 법> 13. 수도의 겨울 편(아래)

 

그대, 판타지를 좋아하는가? 중세풍이면 더 환장하는가? 그렇다면 이 웹툰들을 봐야한다!

<바토리의 아들>은 피의 백작여인 바토리 에레제베트에 관한 전설을 각색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인의 아들인 미겔은 식인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시체를 공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녀의 재산을 노리고 있던 세력들은 시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추문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렇듯 작품은 “어쩔 수 없음”과 그 부조리 때문에 무너져 내려가며, 이에 저항하기도 하는 캐릭터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외에도 신의 이름으로 부를 쟁취하고자 하는 자(주교 베르나르 기), 형제들 간의 권력 다툼에서 살아남아 이후에도 생존을 위해 탑을 오르는 인물(페렌츠 공작) 등 여러 인물들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들어가면서 스토리의 감칠맛을 더한다. 작화도 훌륭하고 인물들과 스토리의 격정성 때문에 볼 때 마다 피가 끓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품과는 관계 없을 수도 있지만 재학중인 두 대학생이 만든 작품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퀄리티를 자랑한다.
<그 판타지 세계에서 사는 법(그판세)>의 어법은 <바토리의 아들>보다는 덜 비극적이다. 하지만 거대한 시류 아래에서 휘둘리는 가운데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나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금지된 마법에 대한 이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왕가의 두 세력 가운데 주인공들은 모험을 이어나간다. 아내를 찾고자 하는 아크 메이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로얄 가드를 나와 일개 길드에서 보수를 받는 검성이, 신의 이름으로 금지된 마법을 막고자 하지만 이해관계에 휘말려 수렁에 빠지는 성기사 마크, 그리고 수녀보다 도적이 더 어울리는 마크의 동생 체니 이 네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첨예하게 엇갈리는 이해관계, 모호한 선악의 경계, 액션 씬에 있어서 탁월한 디테일이 그판세의 매력이다.

 

 

이르름 - <권정열 고영배의 십란한 밤>    https://youtu.be/2CxwFQ9q9Ts

 

 

브이앱에서 매주 화요일 ‘십’센치의 권정열과 소’란’의 고영배가 한 시간 남짓 진행하는 일종의 보이는 라디오. 브이앱이란 머나먼 요즘 애들의 문물이라 생각했으나 콘서트 이후로 10cm 사랑은 멈출 줄 몰랐고… 한편으로는 한동안 종현의 발자취를 찾아 유투브에서 <푸른밤 종현입니다>의 클립들을 찾아 들었다. 게스트는 소란의 고영배와 커피소년. 자연스레 십란한 밤이 추천영상에 떴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되게 별 거 안하고, 가끔 게스트 나오면 놀려먹고, 자기들 노래 서로 틀고 부르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각도 하고 (권피치씨,,), 그러니까 그냥  친한 친구들끼리 떠드는 내용인데, 재밌다. 그래서 없는 용량에 브이앱도 깔고, 시간 맞춰 하트 눌러 보내며 방송도 봤다. 덕분에 혼자 떠난 해외여행, 숙소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유투브에 틀어놓고 다른 창 띄워서 단순작업하기에도 딱! 이번 학기 십란한밤 들으며 행정업무 버텨냈다^^! 권정열과 고영배의 팬이 아니더라도, 권정열의 귀여움과 대중적인 고영배의 입담, 그리고 십년이 넘은 이들의 우정에서 묻어나는 애정어린 드립들은 누구에게나 재밌으리라고 자신한다.

>전체를 듣고싶다면 브이앱 깔아서 ‘캐스퍼 라디오’를 추가한 후 매주 기다리기!
나처럼 집중력이 부족하거나, 일/공부하며 듣고 싶다면 유투브에 편집된 영상들이 많다. 유투브의 ‘CASPER RADIO’ 공식 채널, 그리고 자막과 *씹덕 포인트*가 깔끔한 채널 ‘십란’의 영상들을 추천한다. 추가적으로 <푸른밤 종현입니다>중 고영배와 커피소년의 코너는 유투브의 ‘채널48’에 야속할 정도로 유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시나인 - <미션 임파서블: 폴 아웃>

  

 

진부한 액션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클리셰들을 전부 새롭게 엄청나게 근사하게 만들어냈다. 미션 임파서블(이하 미임파) 시리즈의 장르는 ‘톰 크루즈’다. 그가 선보이는 고난이도의 액션은 앉아있는 나를 움찔거리게 만들고 땀나게 한다. 오프닝 테마곡 하나로 한 시리즈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이 시리즈와 같은 시기를 살고 있음에 감사를 느낀다. 이렇게나 노력하는 캐릭터(에단)의 존재는 뭐든 쉽게 해결하는 히어로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열심히 달리는 에단과 함께 달리는 톰 크루즈의 발전하는 액션은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이번 시즌을 본인이 더 주목한 이유는 멋진 카메라 연출에 있다. 런던과 파리를 격렬하게 여행하고 온 듯 착각을 일으킨다. 유명한 장소를 뛰고 달리는 에단과 함께 말이다.
새롭고 참신한 향기가 나는 영화가 아니라 정직하고 땀냄새나는 영화이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다!

 

 

양장피 - <허스토리>

 

 

왜 지금까지 이 대배우들을 ‘엄마’ 역으로밖에 만날 수 없었을까. 그리고 왜 여태껏 역사의 피해자들을 이렇게 담담하게 그려낼 수 없었던 걸까. 허스토리 이전 내가 봐온 영화 속 역사 인물들은 드라마를 위한 양념 정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여성 서사와 역사라는 소재를 숙고를 거쳐 섬세하게 어우른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이 아닐까 싶다. 부산 사투리로 거칠게 소리치는 김희애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심장이 뛴다.

 

 

아게추 - <언내추럴>

 

 

TBS 드라마 <언내추럴>. 부자연스러운(unnatural)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부검팀 UDI의 이야기이다. 보다 보면 주 스토리의 흐름이 조연인 남자 캐릭터의 서사에 있는데도 철저히 여성 주인공 미코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시점의 균일함, 여러 가지 사회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흡인력이 있는 점들이 좋아서 날 잡고 하루만 앉아 있으면 금방 다 볼 수 있다. 일본 드라마들이 거의 그렇듯이 10부작. 주연 배우 이시하라 사토미의 웃는 모습이 무척 행복하게 해준다. 다 보고 나면 ost인 레몬을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흥얼거리게 된다.

 

 

민쵸 - The Script의 <The Script>

 

 

벌써 발매된 지 10년이 넘은 음반을 아직도 전곡 재생하게 만드는 명반. 어떻게 내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The Man Who Can’t Be Moved>를 듣다가 지하철에서 입을 틀어막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노래가 수록된 <The Script> 앨범은 아일랜드 얼터너티브 록밴드 The Script의 데뷔 앨범. 데뷔하자마자 영국을 씹어먹은 이 앨범 덕에 밴드는 미국 진출뿐만 아니라 전세계 공연을 다니고 있다.

지금까지 발매된 앨범이 많지만 <Talk You Down> - <The Man Who Can’t Be Moved> - <Breakeven>으로 이어지는 이 앨범의 345 트랙은 다른 앨범들과 비교할 수 없는 최강 클린업 트리오다. 밴드 특성상 노래에 팝적인 요소가 많아 진성 락 덕후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편하게 듣기 좋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 앨범은 전주부터 멜로디에 홀리는 경험을 하게 해 줄 것이라 자신한다.

 

 

푸른수염 - 유덕화

양조위, 주윤발, 금성무, 장국영 등 8-90년대 홍콩영화계가 배출한 보석같은 남배우들을 다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그 중간지의 영역에서 최고는 아무래도 유덕화가 아닌가 싶다. 그의 전성기 시절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멋짐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조각 같은 미남들이 득시글대는 고전기 헐리우드에서도, 온갖 아이돌 및 배우들이 대세에 맞는 미모들을 각기 뽐내는 2018년의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미감이라고 감히 말한다. 여기까지 읊었는데도 고개를 갸우뚱거릴지 모를 당신을 위해, 이번 핍픽에서는 유덕화 덕질에 입문하기 좋은 영화 네 편을 꼽아보았다.

 

1. <무간도>, 2002

 

기가 맥히는 수작이다. 네 영화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가장 최근작으로, 중년이 된 유덕화의 중후한 멋을 감상할 수 있다. 홍콩 느와르가 낳은 명작이며 <신세계>가 이 영화를 리메이크 했다고들 한다.(실제로 둘 다 보면 많이 비슷하다고들 하던데, <신세계>는 안 봐서 모르겠다.) 비록 여기서 고른 네 편의 영화들이 영화의 퀄리티보다는(그렇다고 구리다는 말은 아님) 철저히 유덕화의 멋이라는 순수한 미적 기준에 따라 선택된 것들이지만, 그 중에서 <무간도>만은 영화의 만듦새와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덕질 입문용으로 권한다.
 
* 주의 : 뜻밖에 유덕화 대신 양조위에 치일 수 있다.
 
2. <열혈남아>, 1987

필자가 유독 편애하는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이다. 왕가위는 말할 것도 없이 홍콩 최고의 감독이므로(ㅎ)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왕가위와 유덕화의 만남은 1990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도 목격할 수 있으나 <아비정전>은 누가 뭐래도 장국영의 영화이기 때문에 유덕화 덕질이라는 목적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사실 필자는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아비정전>의 무매력 경찰이 유덕화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열혈남아>의 유덕화는 정말이지 아름답다. 스토리도 괜찮고, 왕가위답지 않게 액션씬이 많아 그 시기 홍콩영화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무엇보다도 유덕화와 장만옥의 리즈시절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다.
 
* 주의 : 장학우의 진상짓과 유덕화의 호구짓이 초래할 답답함과 분노로 잠이 오지 않을 수 있다.


3. <지존무상>, 1989

<영웅본색>류의 으리으리-한 홍콩영화를 좋아한다면 답은 <지존무상>이다. 두 친구의 우정과 도박 이야기를 다룬 볼거리 많은 영화. 하지만 홍콩영화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입문용으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다른 많은 홍콩영화들처럼 약간의 항마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현대적 감각의 <무간도>나 왕가위 특유의 세련된 스타일로 다듬어진 <열혈남아>보다는 좀더 보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홍콩영화 특유의 어이없음에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보기 몹시 즐거운데다가, 필자가 이 영화를 유덕화 덕질용으로 추천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어마어마한 유덕화의 자켓핏... 이 영화에서 유덕화는 청자켓과 가죽자켓, 온갖 종류의 항공잠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켓을 돌려가며 입고 나오는 자켓부자로 나온다. 매 씬마다 엄청난 핏을 자랑하며 카지노에서 총을 쏘는 젊은 유덕화의 모습을 박제했다는 데에 이 영화의 숨겨진 의의가 있다.
 
* 주의 : 막 엄청나게 큰 재미가 있고 그렇지는 않다. (☆713☆ 장면 예외)
 
 
4. <천장지구>, 1990

필자의 이번 핍픽이 이 영화 때문에 기획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망의 <천장지구>. 왠지 개연성을 개나 줘버린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이다. 유덕화가 바로 개연성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절대로 이 세상 간지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몇몇 아끼는 장면들과 사랑하는 포인트들이 있지만, 직접 볼 때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해칠까봐 말을 아낀다. 스토리와 만듦새와 완성도 등등을 다 떠나서 유덕화의 미를 무목적적으로 감상하고 싶다면, 무조건 이 영화다.
 
* 주의 : 여기 나오는 유덕화가 좀 많이 못되게 굴어서 얄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있어서 더 얄밉다. 옛날 영화임을 감안하고 봐야 화가 덜 나는 장면들이 조금 있다.

 

 

금송 - 뱃사공의 첫 번째 정규 앨범 <탕아>

 

뱃사공이라는 랩퍼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조금의 애정과 인정이었음이 드러났다. 몇 년을 걸쳐 서서히 수면으로 올라오던 그와 그의 친구들의 음악은 이번 앨범을 통해서 고유의 멋을 거침없이 폭발시킨다. 한국힙합 씬의 많은 랩퍼들은 이중의 기믹을 가지게 된다. 힙합이라는 장르에서 살아 남기 위한 고유의 캐릭터가 그 첫번째 기믹이라면 그 캐릭터를 실제 삶에서 구현하기 힘든 데서 오는 곤란이 두번째일 것이다. 이 두번째 곤란에 대해 랩퍼들은 그들 삶에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음악에 전부 드러나기 마련이다.

뱃사공은 자신에게 기믹 따위는 없음을 앨범 전체를 걸쳐 뱉어내는데 그것은 단지 그가 캐릭터와 삶을 일치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캐릭터라는 것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혹자가 랩퍼의 캐릭터는 힙합의 가장 원천적인 요소라고 말한다면 뱃사공은 과감히 힙합이 자신을 떠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심 혹은 정체성의 확립은 음악의 스타일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로 검정치마를 꼽았던 그는 실제로 ‘축하해’ ‘돈이 없어도’ ‘진심’과 같은 곡들과 기타 곡에서도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밴드 사운드로 정형화된 사운드에서 벗어난다. 이로서 그의 음악은 뱃사공이라는 사람이 느끼는 삶에 대한 감성이 진하게 담기게 되었고 그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엄청난 ‘힙합’ 이 되었다. 진심의 힘을 본인의 스웨거로 삼는 독보적인 랩퍼.



Crystal Castles I에서 Amnesty(I)까지

 

콩브레과자점

 

 

나는 2016년 이후로 Crystal Castles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17년 겨울, 일렉트로니카 그룹 Crystal Castles(이하 CC)의 전(前)보컬 Alice Glass가 현(現)프로듀서 Ethan Kath의 성적, 예술적 착취를 폭로했다[각주:1][각주:2]. 새로운 보컬 Edith Frances에 익숙해져 팬들의 기억 속 저편으로 잊힌 Alice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진행 중이던 CC의 투어는 중단되었고 현재는 Alice와 Ethan 모두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Crystal Castles I에서 Amnesty(I)까지

2014년 Alice가 CC를 나간 뒤 CC는 휴식기를 가졌다. 많은 팬들은 ‘Alice 향수병’에 걸려 그녀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Alice는 응답하지 않았고 CC가 2015년 4월 Edith와 함께 돌아오자 팬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들의 ‘고스 돌(Goth doll)’ Alice를 부르짖는 자들과 Edith의 등장을 긍정하는 이들.

나는 전자에 해당했다. CC(사실상 Alice)가 가진 소위 ‘B급 감성’, (II)의 ‘Baptism’ 이후 Alice가 쌓아 올린 CC의 보컬 이미지(단발 생머리, 눈 전체를 뒤덮은 까만 아이섀도우, 아무렇게나 발라 입술이 어디인지 구분되지 않는 스칼렛 립스틱)가 붕괴되었다.

십대의 나는 스스로를 Emo(포스트하드코어 음악을 즐겨 듣고, 밴드티셔츠를 입고, Body Modification을 하는 사람-대체로 십대-을 일컫는 말)로 정체화했다. 정체화했다는 말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런 카테고리로 스스로가 분류되기를 희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Alice는 전형적인 Emo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내게는 굉장히 실험적이고 ‘멋진[쿨한]’ Emo로 비춰졌다.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B급 감성’은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대체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Baptism에서의 Alice Glass


요즘 Emo Kid – Johnnie Guilbert (유명 유투버)

CC는 Amnesty(I)를 발표한 이후 묘한 길을 걷고 있다. 변화한 지점은 두 개. Alice에서 Edith로의 변화, 그리고 음악의 변화이다.

음악그룹의 멤버 중 보컬이 바뀌었을 때, 대체로 팬들은 가장 큰 변화를 느낀다. 장르가 바뀌지 않더라도 그 그룹이 음악으로 구현하는 분위기와 에너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보컬이 아닌 다른 파트가 달라져도 음악에는 차이가 생긴다. 하지만 우리의 포커스는 대체로 보컬에게 향하지 않는가? *아무리 우리가 다른 파트에 주목한다고 해도 우리 바로 앞에서(라이브가 아닌 이상 앞은 아니고 몇 만 킬로미터 떨어진 스튜디오일 테지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주목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보컬리스트가 세 번 바뀐 심포닉메탈밴드 Nightwish

 

어느 순간 Alice가 Edith로 대체되었다. 나는 Edith에게서 Alice와의 유사성을 찾기도 하고, 그녀만의 특징도 보았다. 처음 Frail를 보고 느낀 ‘Alice 향수병’은 Amnesty(I)을 들은 후 완전히 사라졌다. Edith 그 자체를 보다 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연 중 Edith Frances

 

Edith는 CC의 새로운 보컬 이미지를 쌓아올렸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아무렇게나 자른 곱슬머리, 아무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입술만 칠한 얼굴, 공연 중 스스로에게 물 끼얹기. Alice가 (고스)인형(Doll)으로 불렸던 것과 다르게 Edith는 아무런 별칭이 없다. 보컬로 활동한 기간이 짧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Edith는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어떤’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Edith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러운 그녀의 공연 중 모습과 CC가 구현하는 인공적인 사운드는 양극단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공연 중 Alice Glass와 Edith Frances

 


한편 Edith의 모습에서 Alice를 찾게되기도 한다. 2017년 5월 CC의 내한 공연에서 Edith에게서 예전 CC 보컬의 흔적을 찾는 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이크를 온몸에 휘감고, 마이크스탠드를 들고 뛰어다니기. Alice에게서 보아왔던 것들이었다. 아,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도.

 

2017년 5월, 무브홀 옆 타코벨에서 만난 CC


그러나 공통점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차이는 음악의 변화와 연결된다. CC의 음악은 이전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직전 앨범인 III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났던 위치하우스(Witch house) 사운드는 줄어들고 Fleece, Enth 같은 트랙에서 드러나는 인더스트리얼/테크노 사운드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흡사 Gesaffelstein을 떠오르게 한다[각주:3]) II의 Celestica와 Suffocation, III의 Transgender 트랙에서의 앰비언트 사운드는 여전히 나타나지만 보컬의 토크박스(이펙터를 통해 보컬 사운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 사용이 거의 사라졌다[각주:4]. 토크박스를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Edith의 목소리는 날것 그대로 출력된다. 보컬 샘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Amnesty(I)의 강력한 에너지를 뒷받침하지만 CC는 첫 정규 앨범 이후로 보컬 샘플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것이 꼭 Edith로 인한 변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CC의 음악이 가진 ‘힘’의 변화에는 공연에서 보이는 Edith 자체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Alice가 공연 도중 관객밀착적으로 팬들과 접촉한 것에 반해 Edith는 ‘보컬 존’이라도 있는 듯 그 자리를 지킨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수직으로 뛰며 에너지를 공연장 전체로 확산시킨다. Alice의 퍼포먼스가 관객들과 엉겨 같은 분위기에 녹아들어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Edith는 한 자리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CC 머천다이스

 


Edith Frances Announcement



강한 힘의 발산은 CC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의 앨범이 보내는 메시지와도 깊게 연관된다. 새로운 앨범의 등장과 함께 CC는 인권운동(아동,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죄수 등의 인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보였고 그들의 머천다이스에도 ‘LGBTQ RIGHTS ARE HUMAN RIGHTS’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또한 앨범명인 Amnesty에서도 드러나듯, 그들이 음악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국제 앰네스티에 기부된다[각주:5].

한편 Amnesty에 (I)를 붙인 것이 흥미롭다. 별칭 I로 불리는 Crystal Castles를 암묵적으로 부인해버린 것이다. ‘부인’이라는 조금 강한 단어를 쓰기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Alice가 아닌 Edith와 함께 내는 첫 앨범을 I로 붙인 것, 이것은 그들이 이전에 Crystal Castles라는 밴드 이름으로 그들의 정규 앨범의 시탄을 발사한 것과는 다른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Alice의 #metoo 선언 이후 현재의 Crystal Castles에 대한 생각

Alice가 지난해 Ethan에 대한 #metoo 선언을 한 후 나는 혼란스러웠다. CC의 Crystal Castles에 수록된 Alice Practice가 Alice의 음악적 역량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Alice가 보컬일 당시 많은 사람들이 ‘Coolest Icon’이라는 이름 하에 CC 음악의 우울함에 열광했다. 그게 Alice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고? 내가 열광한 대상의 실체가 그런 것이었는가? CC가 어떤 새로운 입장을 가지고 다시 등장할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특히나 Alice)가 억울하게 될 결과는 아니었으면 한다. 결과가 명백해진 이후 팬들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대립할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CC는 내게 ‘십대 전반을 함께 보낸 유리성’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의 음악만 즐긴 게 아니라, 그들이 가수로서 밟아온 역사에도 열광했다. (이때, 역사의 서술자는 나다. 내가 성장하면서 바라본 그들의 발자취이기에.) 이 역사는 음악적 행보에만 한정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삶, 이미지를 포괄한다. Alice의 #metoo 선언이 진실로 드러난다면, 그들의 역사 자체가 재건될 것이다. Edith가 선 공연의 체험도 수정되어 기억될 것이다. 그들이 지어놓은 유리성에 나도 이끌려 들어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와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이전에 유리성은 깨져버리고 모래만 남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과거에 내가 유리성 속에서 보낸 시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모래로 사라져버린 유리성을 보고 유감스러워 하는 것은 현재, 혹은 미래의 몫이다. 그들과 함께한 기억은 늘 내 안에 품어져 있다.

 

영화 <타이타닉> 속 푸른 보석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푸른 보석은 결국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의 추억이었다.

 

 

모래성

KEROSENE by Crystal Castles: I’ll protect you from all the things I’ve seen. 십대였던 내가 믿었던 유리성의 주문이었다.


  1. Alice Glass Statement: http://www.alice-glass.com/cc/ [본문으로]
  2.  Alice Glass Instagram Evidences: https://www.instagram.com/p/Ba-dHxDlxo9/?taken-by=_alice_glass [본문으로]
  3. 참고: Destinations by Gesaffelstein (https://youtu.be/uGGcLJBkqHM) [본문으로]
  4. 참고: Crystal Castles Fleece/Empathy live in Saint Petersberg (https://www.youtube.com/watch?v=Y6fmPJ54tZA) [본문으로]
  5. 전부인지 일부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본문으로]

※ 이 글은 영화 <120 BPM>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120BPM : 뜨겁게 박동하는 生의 속도

영화 <120BPM> 리뷰

푸른수염

 

1. ACT UP 

 

 

    1981년 미국, 갑자기 건강하던 남성 동성애자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과 암 증상을 보이며 하나 둘씩 사망에 이르기 시작했다. 처음 이 질병은 ‘동성애 남성들의 독특한 폐렴’으로 불리다가 이듬해인 1982년 ‘AIDS(후천성면역결핍 증후군)’라는 이름으로 정식 명명되었다. 질병의 이름이 정해진 다음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지만, 레이건 정부와 당시 언론은 무관심과 동성애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최초 감염자가 나타난 지 6년이 지난 1987년 3월, 조직적으로 에이즈에 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이 창설되었다. 액트업은 뉴욕에서 처음 결성되었고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 미국 내 도시들로 퍼져나갔으며, 뒤이어 런던, 파리, 베를린과 같은 유럽 도시들에도 속속들이 지부를 늘려나갔다.

 

 

 

2. ▲

     1987년 액트업 뉴욕이 결성된 직후 열렸던 초반의 시위들은 금세 언론과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여기에는 그들의 복장, 플랜카드, 포스터, 빌보드 등에 인쇄된 새로운 로고와 강렬한 문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검은 바탕의 하단에 흰 글씨로 “SILENCE = DEATH(침묵은 곧 죽음)”라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 이 문구는 두말할 것 없이 정부의 무책임한 대처와 그로 인한 끔찍한 결과들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내보인다. 그리고 그 문구 바로 위, 포스터나 플랜카드 등의 정중앙에는 항상 분홍색 삼각형이 위치했다.
     분홍색 삼각형의 기원은 동성애 탄압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나치는 강제 수용소 내의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표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강제했는데, 이 표지를 단 사람들은 같은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저주받은 존재’로 여겨졌다. 액트업 뉴욕은 그 역삼각형을 거꾸로 뒤집은 분홍색 정삼각형을 엠블럼으로 차용함으로써 탄압의 역사를 전복시키고자 하였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들에 대한 혐오를 표출했던 자들이 강요했던 죽음의 표지를 그대로 가져와 뒤집은 채 사용한다는 것은 이 운동의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목소리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우리는 당신들의 혐오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며, 심지어는 당신들이 혐오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
둘째, 당신들이 우리의 존재 자체마저 혐오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치열하게 존재하고자 할 것이라는 것.

 

     이 태도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면돌파의 태도라 할 수 있겠다. 1989년의 액트업 파리를 다룬 영화 <120 BPM>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 그룹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요란한 방식으로 혐오에 대응한다. 에이즈 환자의 피를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정부관계자나 제약회사에 가짜 피를 던지고, 사방에 붙일 포스터에는 항문성교의 삽입 장면을 크게 확대 인쇄하고[각주:1],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동성과 키스를 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이것일 테다: ‘보란 듯이.’
     이들은 결코 자신의 존재를 변명하거나, 은폐하거나, 축소시키지 않는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틀에 스스로를 맞추는 대신 그 틀을 부숴버리고자 한다. 사회가 이들을 타자화할 때, 이들은 사회의 입맛에 맞는 말랑말랑하고 얌전하며 소화되기 쉬운 타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대신 이 사람들은 ‘보란 듯이’ 그대로 혹은 더 치열하게 존재하고 그들의 존재방식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현대의 게이프라이드가 택하는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왜 그들은 섹슈얼한 표지들을 나서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LGBT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스스로 논란과 비난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그들은 조금 더 사회의 입맛에 맞춘, 막힘없이 소화됨으로써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기에 더 유리한 방식의 축제를 택하지 않는가? 그들의 한 세대 이전 선배들이 나치의 분홍색 삼각형을 뒤집어 자신들의 가슴에 스스로 붙일 때부터, 지금과 같은 저항의 태도는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혐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가장’ 살아있어야 한다.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3. <120 BPM>

     이것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톤과 그의 죽어가는 연인 션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맥스와 션이, 션과 나톤이, 나톤과 티부가, 그리고 그룹 내의 다른 사람들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열에 들뜨기라도 한듯 서로 사랑을 나누고 섹슈얼한 눈짓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가볍다가도 진지하게, 분노에 가득 차 있다가도 한없이 즐겁게, 마지막 축제 혹은 해내야만 할 숙제처럼. 그들의 사랑에는 왠지 지금 여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비장함이 감돈다.

     아니, 이것은 죽음을 앞둔 이들의 절절한 사랑을 다루는 멜로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에 그들의 사랑은 너무도 쉽게 흘러가고 움직인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이나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션은 맥스에서 나톤으로, 나톤은 션에서 티부로 흘러간다.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문법 하에서였다면, 션의 애인이 바뀌는 것, 그리고 션이 죽은 날 나톤이 티부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불친절한 설명으로 물 흐르듯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영화는 연애와 사랑의 피고 짐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크고 작은 사랑들은 마치 더 거대한 흐름 혹은 운동의 일부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멜로드라마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신 이것은 어쩌면 투쟁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투쟁은 핏빛의 거대한 강줄기처럼, 사랑과 연애와 섹스를 모두 끌어안고 요동치며 흘러간다. 투쟁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식하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쟁하고, 싸우고, 깨부수고, 저항한다. 사실상 이 영화는 그들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를 두 시간 이십 분 동안 압축해서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 영화는 투쟁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다.

 

 

 


     아니, 이것은 투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에 투쟁의 불꽃은 죽음이 내뿜는 냉기 앞에 너무도 쉽게 사그라든다.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제약회사와 정부 기관과 보험업자들을 찾아다니고 가짜 피와 동지의 뼛가루를 던지며 거리에 나와 가두행진을 벌이는 사람들, 이 사람들 중 누구도 ‘뼛속까지 투쟁가’는 되지 못한다. 죽음의 공포에 몸서리치는 어리고 약한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사실 이들의 투쟁은 절규에 가깝다. 투쟁 현장에서 이들이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은 “우리는 시간이 없어!”이다. 매주 한 명씩 동지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에서 굳세게 투쟁을 이어나가기에 이들은 딱 우리만큼이나, 초연하지 못하다. 영화 초반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투쟁에 앞장서던 션은 병이 진행될수록 점차 토론에서 말수가 줄어들다가, 어느 날인가는 토론장을 박차고 나와 버린다. 그리고 션은 다시는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다 한들 그러지도 못했을 것이다. 죽어가던 어느 날 그는 병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뉴스를 본다. 뉴스에는 뜨거운 시위현장 속 동지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꺼 버린다. 그리고 얼마 뒤 션의 숨 역시 티브이 전원만큼이나 허망하게 꺼져 버린다.

 

죽음이 제일 힘이 세다. 어쩌면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다.

 

     아니,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에 생은 너무나 허무하게도 계속된다. 사실 죽음은 영화의 초반부터, 아니면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이들과 함께해왔다. 첫 회의 장면에서 회의의 첫 번째 소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활동가의 부고이다. 그룹의 사람들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는 죽음이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 이전에도 줄기차게 있어왔다는 방증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잊을 만하면 죽음이 엄습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신의 죽음이 있을 거라는 걸, 누구도 잠시도 잊을 수 없다. 연이은 주변인들의 죽음만큼 확실한 메멘토 모리가 있을까. 영화가 액트업이라는 기나긴 싸움의 역사에서 한 토막을 잘라낸 것이라고 할 때, 죽음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안에도 존재하며, 그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첫 번째 회의 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고가 전달된 그 다음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액트업 파리의 초창기 멤버였다는, 당시 그룹에 컴퓨터를 두 대나 장만해주었다는 죽은 이의 사진을 함께 본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적힌 엽서를 에이즈 확산에 대한 경고로서 미테랑 대통령에게 보내기로 한다. 다음 안건이 회의에 오르고, 토론은 재개된다. 망자의 사진이 담긴 기사와 그의 이름이 적힌 엽서를 옆에 두고서, 사람들은 환호하거나 비난하면서, 울분을 터뜨리거나 농담을 던지면서 한껏, 정말 말 그대로 한껏 ‘살아있다.’ 결국 영화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을 옆에 혹은 목전에 두고 숨 쉬는 이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영화가 죽음과 그 이후를 다루고 그리는 방식은 션의 죽음 장면에서 조금 더 명확해진다. 투병 중이던 션은 결국 어느 날 밤 나톤의 아파트에서 허망하게 숨을 거둔다. 새벽에 이를 발견한 나톤은 울부짖으며 옆방에서 자던 션의 모친을 깨운다. 아주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둘은 잠시 후부터 들이닥칠 조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톤과 션의 모친, 그리고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는 그룹의 동지들은,

 

션의 옷을 입히는 일에서부터 애를 먹고(죽은 몸이 뻣뻣해 한 명이 들어 올리면 한 명이 잽싸게 옷을 입혀야 했다), 의사를 불러 사망을 확진받고(철자 불러주시겠어요? S-E-A-N D-A-L-M-A-Z-O), 힘을 합쳐 션의 모친이 눈을 붙이던 라꾸라꾸 침대를 들어올리고(보기보다 무거워 최소 세 명은 달라붙어야 했다), 조문객을 맞이하려 커피를 끓이고(커피 말고 다른 것은 없냐는 까탈스런 동지가 있어 모친은 과자를 내왔다), 조의문의 단어를 조금 손보고(션의 모친은 조의문에 ‘용감한’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골 처리 문제와 장례 절차를 논의하고(션은 보험업자들에게 자기 재를 뿌리는 정치 장례를 원했다), 시시껄렁한 농을 하며 웃는다(그룹과 션의 모친은 그의 유골을 6:4 혹은 8:2로 나눠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질구레한 일상, 징글징글한 이승의 일들은 션의 죽은 몸이 놓인 바로 옆방에서 진행된다.

     사람들은 아침이 올 때까지 나톤의 아파트를 지켰다.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올 무렵, 나톤과 티부가 부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더 내리네 마네, 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나톤이 티부에게 오늘 밤에 자기 아파트에 올 수 있겠냐고 묻는다. 티부는 올 수 있다고 하면서 같이 잠도 자는 거냐고 되묻는다. 나톤은 그렇다고 말하고 티부는 웃는다. 나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순간, 카메라는 아마도 나톤의 시선이 닿을 아파트의 반대편, 그러니까 거실과 방이 함께 담기는 쪽을 화면에 담기 시작한다. 오른쪽의 방에는 유독 작아 보이는 션의 몸뚱어리가 덩그러니 침대에 눕혀져 있다. 두꺼운 벽이 중간에 있고, 왼편에 위치한 거실에는 션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누군가는 애인을 끌어안고 있고, 누군가는 손짓을 섞어가며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고, 누군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듣는다. 고요함과 소음, 정지와 운동, 죽음과 삶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뉜다. 혹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바로 옆방에 죽음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톤은 왜 애인이 죽은 바로 그 날 밤 같은 그룹 내의 인물 티부를 불러 섹스를 하는가? 이것은 더 이상 사랑과 배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가장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영화 내에서 그가 션의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암시가 등장함에도.) 만약 나톤에게 죽음이란 것이 저 멀리, 어디 다른 나라 이야기거나, 다른 도시, 아니면 최소한 다른 동네쯤에나 있는 이야기였다면 그는 티부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옆방에 죽음을 두고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섹스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확인이다. 자기 앞의 생에 필사적으로 타인의 온기를 끌어들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나토스의 대척점, 혹은 그 뒷면에는 하필 에로스가 있는 것이다.

 

4. △

     영화는 (유형의) 삼각형으로 시작하여 (무형의) 삼각형으로 끝난다.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그룹 멤버들의 티셔츠와 포스터와 시위 장면의 플랜카드에서 다양한 크기의 분홍색 삼각형들을 만날 수 있다. 삼각형은 그룹 내의 모든 감염자와 비감염자, 재소자와 비재소자, 당장 죽어가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모든 게이와 레즈비언과 약물중독자들을 연결한다. 또한 이 삼각형을 통해 그룹의 멤버들은 처음 운동을 시작한 뉴욕을 비롯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베를린과 런던의 사람들과도 연결된다.
     영화 곳곳에 놓인 삼각형들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 전체가 그리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삼각형을 만날 수 있다. 이 삼각형의 윤곽은 처음에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가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선명해진다. 삼각형의 세 꼭지점에는 투쟁과 섹스와 춤이 있다. 투쟁-섹스-춤이라는 세 가지 재료는 영화 내내 번갈아 가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완연한 삼위일체를 이루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우리는 이 삼각형의 테두리 안에서 매일매일 옆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스스로도 죽어가는 사람들, 매일같이 세상에 의해 존재가 부정당하고 지워지는 사람들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요란하게 싸우고 섹스하고 춤추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표현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들보다 조금 빠르고 격렬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옆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으니, 불에 달군 신발을 신고 춤추는 동화 속 마녀처럼 계속해서 투쟁하고 섹스하고 춤추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는 동안, 아직 그들은 1분에 120비트로 박동치는 生의 한가운데에 머물 수 있을 테니.

 

 

 

  1. 알다시피 항문성교란 동성애 탄압의 유구한 역사를 지나면서 ‘저쪽’ 진영에서 늘 가장 먼저 걸고넘어지는, 그런 어떤 것이었다. 심지어 2018년에도! 궁금하다면 네이버 영화에서 <120 BPM>을 검색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자칫 눈이 썩어버릴 수 있으니 추천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배신하는 문장: 모든 것들은 어떤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게추

 

 

Dana Marin on Unsplash



글쓰기 자체에 대해서 쓰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쓸 수 없을 거라는 아주 사적이고 내적인 저항을 느낀다. 독서의 질은 둘째 치고 다독만이 자랑이었던 과거의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책은 사르트르의 『구토』였다. 그 책에서 분열하는 의식이 뱉는 문장과 번복하는 문장이 “가능하다는” 것을(정당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각주:1].

 

이후 읽게 된 사르트르의 자전적 소설 『말』은 꼬마 사르트르가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들을 탐식하고 자신만의 글쓰기를 통해 언어로 세상을 붙잡아 두는 황홀경을 겪은 경험을 묘사한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씨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의 실상화였다. 내가 호명만 하면 사자도 제2 제정 시대의 대장도 또 사막 지대의 베두인도 어김없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글자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사로잡혀 있게 될 운명이었다.”

 

나는 글로써 세상의 본질, 혹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까지도 포착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문장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언어로 세상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아름답고 치명적인 오해인지.

 

언어는 경험 이후에 그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덧붙여진다. 비록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묘사하고자 해도 기존의 경험에서 빌어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언어는 부차적이고 사후적이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과거를 다시 만들어내고, 현재는 언어에 의해 다시 쓰인다. 더군다나 이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라면, 언어가 세상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는 이따금 나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대로 기록으로 옮길 수 있는 기계를 공학계의 누군가가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는데, 그것은 기록하는 속도에 비해 생각은 너무 빨리 지나가기 때문이고, 나는 기록하는 동시에 망각하고 있어서 생각을 완벽하게 언어로 남겨두는 것을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펜을 쥐고 글자를 쓰는 속도는 언제나, 뒤처진다. 그것은 내가 펜을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움켜잡고 쓰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담배는 끝에서부터 안쪽으로 타들어간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진다.”

 

언어로 완벽히 전사될 예정이었던 생각과 기억은 문장으로 옮겨지는 사이 왜곡되고 만다. 그렇게 문장은 우리의 믿음을 배신한다.

 

 

한유주의 글은 이러한 상황을 정면돌파하려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다. 한유주의 「허구 0」이라는 작품 전체는 동시 글쓰기에 대한 실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7월 1일에서부터 7월 17일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형태의 글로 실현된다.

 

▷ 오후 1시 10분, 클라스 애비뉴 역 승강장의 딱딱한 나무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한 쌍의 남녀가 벤치의 맞은편 끝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펜을 바꾸었다. 붉은 수성 펜이다. (중략)

3번가와 9번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서점으로 가고 있다. 글쓰기는 곧, 당분간, 중단된다.

로리머스트리트 역 맨해튼 방향 전광판에 씌어 있는 것:

 

Friday, July 4 (붉은 글씨)

1 : 25 P.M. (초록 글씨)

 

곧이어,

 

L. Manhattan 4 min.

L. Manhattan 7 min. (초록 글씨)

 

▷ 7월 6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 지미 헨드릭스를 들었다. 이 글은 어제의 노트에 어제의 펜으로 어제의 오른손을 사용해 쓰고 있다. (미래의 노트에, 미래의 펜으로, 미래의 오른손을 사용하여) 식탁 위에는 립스틱, 술을 산 영수증, 알약 상자, 열쇠고리와 열쇠뭉치, 충전기, 수첩, 모자, 단추, 요요, 술병, 담뱃갑, 양초가 있다. 어제의 물건들이다. 고무줄. 뉴욕매거진. 펜. 자리를 옮기겠다. 창가로 간다. 오전 9시 35분. 262 Taaffe Place 405호, 주차장으로 면한 창가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걸터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동시적 글쓰기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들.

 

한유주는 이 글에서 글을 쓰고 있는 상황과 환경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며, 심지어 이동 중에도, 야외에서도 기록은 계속된다. 이른바 서술시와 사건시의 간극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실험을 통해 우리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을 포함하여, 글자들이 고정되는 순간, 모든 것들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순간을 글로 적는 동안에 시간은 흘러 버리고 사람들은 움직인다(적어도 숨이라도 쉬고 피부 아래에서는 피가 돌고). 우리는 지금 놓여 있는 사물이 어제도 그 자리에 놓여 있던 것이며 미래의 어느 순간에도 놓여 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모든 것들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떤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때문에 한유주는 어떤 대상, 행위, 상황에 단 하나의 언어를 부여하여 단정짓는 것을 포기한다.

 

 

            

「허구 0」이 수록된 소설집의 제목은 얼음의 책이다. 투명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상의 온도가 되기만 하면 빠르게 녹기 시작하는 책, 문장.

사진: Bryan Rodriguez on Unsplash


 

한유주에 따르면 “모든 대화는 매우 직설적이거나,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암시들로 충만해 있다.” 언어에서 하나의 의미만을 취하는 사람에게 모든 대화는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질 뿐이지만 세상이, 감정이, 시간이 분리하거나 절단할 수 없는 연속체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대화가 무한한 의미로 가득할 것이다. 하나의 언어는 그것이 가리키는 부분과 연결된 전체로 확장될 테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간을 연속체로 이해한다면 양립할 수 없는 상태들이 사실은 공존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녹는 것을 하나의 시간 축 위에서 일어나는 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항대립은 성립하지 않고,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에 고심하지만, 모든 단어들은 언제나 적절하지 않거나, 그래,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한유주의 문장들에는 긍정과 부정이,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혼재한다.

 

▷ 다음 날이 되었다. 혹은, 다음 날이 된다.

▷ 오늘은 너무 걸었다. 아니, 오늘은 충분히 걸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 “늦은, 빠른, 빠르게, 더 빨리, 느리게, 더욱 느리게, 따위의 부사들에 대해 생각한다. 크레셴도, 데크레셴도. 그 어떤 부사도 정확한 시간을, 혹은 시각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시제의 혼재, 긍정과 부정의 혼재. 오늘 누군가가 약 6000보를 걸었다고 할 때 이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부사가 가장 ‘적절한’ 것일까?

 

결국 모든 “설명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 한유주가 이 지난한 실험을 통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사전을 하나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한때 이 글의 제목을 「유사 감정어 사전」으로 하려고도 했다(금방 단념했지만).

 

“내가, 당신이, 무슨 말인가를 할 수 있다면, 그리움에 대해 아니, -움의 형태로 끝나는 모든 감정 명사들에 대해, 말쑥하고도 완벽한 사전을, 만들 수 있다면, 혹여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더라도, 그 말들의 기원과 변천사에 대해,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면.” 

 

모든 단어들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는 사전. 그리고 나는 에서 내 문장을 사용하기보다 최대한 많이 인용하고 다시 쓰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허구 0」을 이 글의 잠정적인 ‘사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허구 0」의 실험대로라면 우리는 아예 쓰지 않거나 모든 것을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쪽이든 불가능하다. 이 글의 제목이 결국 사전이 아니라 「허구 0」이 된 이유도 수필이나 관찰 기록에 더 가까운 이 글이 결국에는 소설로서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즉 머릿속의 생각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적확하고 정확한 언어로 기록하는 동시 글쓰기는 허구이다(왜냐하면 불가능하니까).2 우리의 회의처럼, 한유주는 써 나가는 중에도 번번이 좌절을 겪는다.

 

▷ 이 글에서 가장 큰 사건은 점진적 실패가 될 것이다.

▷ 이런 것에 대해 묘사, 혹은 기술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중략) 세상에 존재하는 페이지들을 모두 소진하게 될 때까지,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 더 이상 쓰는 것이 무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실패의 예감과 좌절의 흔적.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쓰는 행위를 그만두지는 않는다. 이 지독한 행위는 “부질없는 짓이지만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 혹여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쓰는 행위를 사랑하지 않을, 혹은 계속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부질없는 혹은 부질없지 않은 일들을 하며 과제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듯이, 부질없는 짓으로 삶을 가득 채우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닐 테니까.3 아무튼 한유주의 실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을 언어로 포착하고 붙잡아 두는 일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고, 하지만 누군가(쓰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이들, 문장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 말하자면 이미 나를 배신해버린, 그리고 끊임없이 배신하고 있는 문장들이라도 붙잡고서 글을 쓸 수바에 없는 이들.)는 본인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써 나간다. 우리 모두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가듯이 말이다. 이 글도 그 무한한 실패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서툴고 인내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쓴다, 아니 썼다 그리고 쓸 것이다(다시는 이런 글은 쓰지 말아야지 매번 다짐하면서).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고(태고의 시간에서부터,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까지)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아니야, 일종의 저항이 아니다) 한 줌의 믿음과 한 줌의 불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언어로 생각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날이 올까? 그런 기계가 만들어질까? 하지만 그 기계가 사용하는 언어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면? … 믿으면서도 믿지 않기, 쓰면서도 쓰지 않기, 명명하면서도 명명하지 않기. 그러니 “어떠한 문장도 마지막 문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1. 이것은 『구토』에 대한 거대한 오독일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많은 글들을 아주 개인적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본문으로]

영화 <소공녀>의 미소를 빌려

우리는 어디쯤에 있게 될까? 

이르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공녀> 속 쉽지만 않은 세상에서 가볍고 사랑스럽게 생존해내는 미소(이솜)를 보며,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선택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저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을 찾아갈까?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

 








포기


<!--[endif]-->


미소는 사만 오천원의 일당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가사도우미다. 대학은 등록금이 없어 그만 뒀다. 사랑하는 남자친구 한솔(안재홍)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겹겹이 입은 옷을 벗고 (무려 30초에 걸쳐 끊임없이 옷을 한 겹씩 벗는다) 살을 맞대며 잠들기엔 미소의 텅 빈 방은 너무 춥다. 그래서 한참을 투자해 옷을 벗어놓고도, 봄에 하기로 하며 서로를 안고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하루 일해서 번 돈을 위스키와 담배에 쓰고 나면 남는 약간의 돈은 세금과, 집세와, 희귀병으로 하얗게 세는 머리를 막기 위한 약을 사기 위해 금고에 차곡차곡 놓인다. 그러나 집주인이 집세를 한 달에 오만원이나 올리고, 새해를 맞아 담뱃값이 이천원이나 오르게 되면서 미소가 이룩한 나름의 평화는 슬금슬금 깨지기 시작한다. 새롭게 일할 집을 얻은 어느 하루가 끝나갈 때, 미소는 문득 생각한다. 


어라, 집세를 없애면 적자가 해결되네?

  




도움요청


미소는 짐을 싸며 대학시절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밴드 멤버들에게 차례로 연락하기 시작한다. 1.최문영, 2.정현정, 3.한대용, 4.김록이, 5.최정미. 순서까지 야무지게 매겨 친구들을 하나 둘 찾아나서는 미소의 여정이 이어진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차례로 한때의 친구들을 만나 그들이 현재 가진 것들을 마주할수록, 집을 버린 미소의 독특한 선택은 더욱 선명해진다.

 


 


문영(강진아)은 만약을 위해 따 둔 조무사 자격증 덕에, 휴게실에서 스스로에게 포도당을 놓아가며 번듯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한편 자신의 요리 실력을 탓하고(나 요리 졸라 못하는거 같아’), 너무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는 남편과 시댁에서 복닥복닥 살아가는 현정(김국희)의 삶은 어쩌면 정반대이다.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미소를 잔뜩 반기며, 미소의 자취방과 새벽까지 술을 처먹던‘ 시절을 떠올리다가도 요즘도 곡을 쓰냐는 미소의 질문이 닿기도 전 잠들어버린다. 대용(이성욱)은 결혼에 실패한 채 엉망이 된 집에서 살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술과 담배에 기대어 살고 있는 그조차 출근하는 날 아침에는 영락없이 멀끔한 회사원의 모습이다. 해가 진 후 미소 앞에서는 누나라는 말 이후 눈물을 참지 못하는 마냥 연약한 동생인 그는, 평생을 갚아나가야 하는 아파트와 8개월 만에 헤어진 아내의 기억에 갇혀 있다. 록이(최덕문)는 부모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고 싶어하고, 마침 적절한 상대로 보이는 미소에게 온 가족은 깜찍한(…) 계략들을 세우나 실패하고 만다. 정미(김재화))는 부잣집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몰입하고 있다. 그의 남편에게 미소가 대학시절의 정미를 기타 잘 치던 뜨거운 사람으로 묘사하자 눈빛이 흔들리던 정미는 결국 품위를 잃지 않는 목소리로 미소에게 나가줬으면 한다고 통보한다.


<!--[endif]-->

록이 부모님의 깜찍한 계략. 어 집에 남는 방이 없네? 이걸 어쩐다

 



대학 시절의 치기를 잊고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좇아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가볍고 무해한, 그래서 현실감이 없는 미소의 삶과는 분명 다르지만 꽤나 낯익다. 돈이 없지 취향이 없냐고 외치는 미소의 말이 새롭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하룻밤 신세를 지고자 하는 미소의 부탁에 대한 거절을 통해서든, 미소와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든, 자신의 선택과 나이 들어감이 낳은 무게와 현실에서의 결핍을 내비친다. 기대수명이 100세를 훌쩍 넘기고, 수많은 청년들이 서른 즈음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되기 위한 지난한 준비과정을 끝마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고 설명하기에도 지겨운 이런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홀로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홀로 서기란 우리라는 따사롭고 해맑고 때로는 느슨한 경계를 좁게 끌어와 꼭 맞는 몇 명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아니라 연인을, 파트너를 찾고 또 하나의 가정을 꾸리는 것.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정감을 찾아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것. 그래서 그 시절의 우리에 기댄 미소의 해맑은 방문에 이들은 당황했으리라.

밴드 멤버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는 현실은 어쩌면 정상성에 대한 이러한 욕망이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발현된 결과다. 배타적인 관계 안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돈이든, 정서적인 안정이든, 부모의 기쁨이든, 젊은 시절 한때 그랬듯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따라 미소처럼 염치 없이 살기에는 그들은 너무 커버렸고 세상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미소니까,

이런 세상이니까. 대책 없이 담배를 태우고 위스키를 홀짝이는 미소,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최우선에 놓는 미소를 보며 대리만족으로 양심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사실 영화 내내 마음을 울렸던 것은 미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나 짠하면서도 우습게 그려진 주변 인물들의 서사보다는, 대책 없고 구김살 없는 미소의 상냥함이었다. 그는 친구들의 집에 갈 때 계란 한 판을 꼬박꼬박 사 들고 가서 건네며, 떠날 때는 잘하는 요리나 청소를 해주고는, 밴드 시절의 사진 뒷면에 정성스런 말들을 써넣고 나온다. 누군가의 거절에도 그냥 네가 보고 싶었다고 답하고, 하룻밤 신세를 지면서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밥을 해주고서야 떠난다. 또 누군가의 황당한 프로포즈에서 벗어나 도망치면서도 (정말 말 그대로 도망인 것이, 자고 일어나니 온 집안의 문과 창문이 잠겨 있었다) 미소는 감사인사를 담은 쪽지를 잊지 않는다. 제멋대로고 개성 있고 그래서 매력적인 수많은 세상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조심스럽고, 상냥하고, 남에게 빚지지 않고, 언제나 온기를 잃지 않는 미소가. 불안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안정적이고 사랑스러웠다. 


<!--[endif]-->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보기 힘든 것들, 그런 따사로움. 그것이 <소공녀>의 가장 동화 같은 부분이며, 내가 이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으로 읽기 시작한 부분이다. 미소의 상냥함은 어린 시절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를 읽으며 느꼈던 주인공 새라의 대책 없는 상냥함과 고상함과도 닮아있다. 아버지에게 은혜 입은 부자 아저씨가 짠하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라는 미소처럼 마냥 맑게 부유하듯 살아가지 않았을까. 미소는 음악을 들으며 논문을 쓰고, 시간이 나면 첼로를 연주하기도 할 친구(김예은)의 집을 청소하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는 대학 졸업사진이 담긴 액자를 덮어놓고 밤에 일하며 스폰서들에게 돈을 받아 살아가는 여자(조수향)의 집을 청소하면서도, 타인의 그 어떤 것도 쉬이 재단하거나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글쓰기 힘들면 차 마실래? 라고 말을 건네거나, 임신한 후 일을 정리하고 네일샵을 차릴 거라며 눈물을 흘리는 아가씨에게 백숙을 해주고 조용히 같이 닭고기를 뜯어먹을 뿐이다.


<!--[endif]-->


충분히 그럴만한데도, 미소는 좀처럼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당당함일 것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지, 반쯤은 자신이 없다. 나는, 미소가 아니며 미소일 수 없다. 그것은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문영의 욕망, 부모를 만족시키려는 록이의 작은 계획, 타인에 대한 마음을 따라 관계의 끈을 악착같이 붙잡거나 결국 놓쳐버린 다른 이들의 분투와도 비슷하다. 원망하지 않고,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고, 미소처럼 무해하게 살기엔 조금 힘든 세상이다.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나도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너무 애쓰거나 힘겨워하지 않고 그냥 상냥할 수 있는 삶. 앞선 두 가지의 전제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수많은 연습에도 나는 상처를 주기도, 상처를 받기도 했다가, 그런 것쯤이야 아무렴 뒤로 미뤄둘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작은 목표의 성취와 실패를 돌이키는 것보다, 때론 지겨웠던 그 과정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미소가 짐을 꾸리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살펴보게 만들었던 대학 시절의 사진 몇 장과 같은 것들. 나와 당신들이 해사하게 웃고 있는 그런 순간들.

누군가의 가족 장례식에서야, 미소가 남기고 간 사진을 보며 홀로 웃음짓던 밴드 멤버들은 모이게 된다. 연락이 끊긴 미소의 소식을 서로에게 물으며 그들은 미소에게 남은 후회와 애정을 나눈다. 미소는 결국 백발의 모습으로 도시를 배회한다. 가격이 오른 위스키를 마시며. 전화도 끊긴 지 오래. 한강변의 텐트에서 불을 끄는 미소의 실루엣은, 이 영화의 현실성 없는 결말을 비춘다. 그럴 법한 삶을 살고 있는 밴드 사람들의 삶과 그럴 법하지 않은 미소가 병치되는 도시 동화에서, 나 자신과 우리들을 보았다. 

<소공녀> 속의 사람들은, 친구들을 찾아 나섰던 미소조차도 모두 자신의 삶을 혼자 열심히 지탱하게 된다. 각자의 작고도 어쩌면 핵심적인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없이 정상적인 이 사회의 어른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발을 뗀 우리는?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이 당당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철없고 염치 없으며 마냥 반가운 것이 될 수 없을지라도. 이 거친 세상에서 자신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켜낸다면 오히려 우리의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경조사나, 누군가의 별난 선택을 통하지 않아도 기대해볼 법한 그런 우리, 자신이 포기한 이전의 가치들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피하지 않아도 될 서로. 어설프게 청춘의 고달픔을 담는 영화보다 이런 비현실적이고 아기자기한 우주의 <소공녀>가 더 빛나는 이유다. 이 시대에서 희망의 부재와 힘겨움을 걸러 내고도 무언가를 놓치지 않는 주인공과 감독의 시선 덕분에.


 




<!--[endif]-->



프로젝트-플로리다

 

 

금송

 

 

 

들어가며

 어떤 영화는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또 어떤 영화는 스스로 아름다워진다. 전자의 영화들이 벅차게 기억되는 아름다움이라면, 후자의 영화는 아리게 기억되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후자는 대체로 인간의 진실한 얼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두 시간 안에 ‘아름다워 질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때문이다. <무쉐뜨>에서 호수로 연거푸 몸을 굴리던 소녀, <로제타>에서 가스통을 들고 사라진 소녀가 이번엔 디즈니 동산을 향해 뛰어간다. 열 살 베기 소녀의 대책 없이 말간 표정에 그 모든 것들을 짊어 지우는 것은 도대체 어떤 작자들의 상상력이란 말인가?

 

 

 웨스 앤더슨 풍의 연보라빛 건물과 멀리는 희미한 무지개가 보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포스터의 국내 배급사 AUD의 홍보문구는 다음과 같다.

 

“2018년 우리를 행복하게 할 가장 사랑스러운 걸작, 안심하세요 나랑 있으면 안전해요,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건너편 ‘매직 캐슬’에 사는 귀여운 6살 꼬마 무니와 친구들의 디즈니월드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

 

 비록 이 영화가 주거 공간을 잃고 모텔에서 장기 투숙하는 히든 홈리스들의 삶을 다루기는 하지만, 이러한 홍보 전략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허름한 모텔에 산다고 해서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라는 배급사 대표의 변은 꽤나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성질의 것이냐는 것이다.

 

 

꿈의 동산, 초라한 삶

 영화는 점점 오락이 되어가고 있다. 3D안경을 쓰고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다 보면 이 행위가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가령 비디오 게임은 그것이 얼마나 생생한 시각화에 성공했느냐 와는 별개로 우리 삶의 표피 그 이상으로 진입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비디오 게임의 소비자 자체가 요구하는 것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삶과 세계의 진면목을 보고자 비디오 게임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어떤 문화와 매체의 예술적 성취라는 것은 단지 그 수요자가 요구하는 범위 안에 머무는 것일까? 최근의 박스오피스를 보고 있자면 이것이 그렇게 틀린 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밝혔듯 그 와중에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충실한 모사가 아니라 그 영화가 보여주는 생생한 관점을 통해 드러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현실은 재현적 상징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재현적 상징이란 그것이 상징을 위한 상징이 아니라 재현을 바탕으로 둔 상징이라는 의미로 쓰고자 하는 용어이다. 가령 이런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무니와 아이들의 낮 시간은 대부분 어디론가 걸어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카메라는 건물의 구조와 아이들의 모습을 한 모습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먼 거리에서 이들을 찍고 있다. 당연히 구조물은 더 거대해지고 아이들은 더 왜소해진다. 그리고 이 건물들은 대부분 디즈니 동산과 관련이 있는 건물들이다. 이 극단적인 크기의 대조는 아이들을 소멸시키면서 동시에 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그 철 없는 환상성을 기형화 시킨다. 이 장면에서 영화가 조작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올랜도 – 디즈니 동산이 위치한 – 외곽은 건물들 사이로 아역 배우들을 걷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관점의 차이, 카메라의 위치 변화로 인해 이 장면은 영화가 포착하고자 하는 실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이 영화는 사실 어떤 관습에 얽매여 있지 않다. 아이들의 대화를 긴 롱 테이크로 보여주는 동시에 전형적인 헐리웃 가족 영화 스타일의 슬로우 모션으로 딸과 엄마가 빗속에서 뛰어노는 장면의 푸티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관습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음’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어떤 관습이 있어야 한다는 듯이 상정하며 말하는 것은 이 영화가 리얼리즘이라는 큰 맥락 속에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묘사없이 묘사하는 것을 택하고, 플롯에 대하여 사건이 우위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이야기를 직조해나가기 보다는 삶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데 애를 쓰고 있고, 그러다 보니 ‘별 것 없는 일상을 다룬다’는 이젠 조금 진부해지기까지 한 표현이 이 영화에도 적용 가능하다. 다르덴 형제 이후로 많은 리얼리스트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자기만의 언어로서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영화의 감독인 션 베이커도 분명 그 흐름을 이끄는 새로운 기수로 여겨질 만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전작들에서 다뤄온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뉴욕의 길거리 짝퉁 상인, 중국계 배달원, 마침내 캘리포니아로 건너와서는 트렌스젠더 성 노동자까지. 이러한 영화들에서 그가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과 목표는 언제나 동일하다고 느껴진다. 방식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시각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고, 목표는 그들을 스크린으로 드러내는 것 그 자체. 그는 줄곧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말해왔다. 결코 특정 그룹을 타겟으로 다뤄보겠다고 마음 먹은 적 없다고, 다만 덜 다뤄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이는 그가 얼마전에 내한했을 때 그의 눈을 보며 직접 들은 사실이기 때문에 신뢰해도 좋다. 그는 가장 특수한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계의 관객들에게 그들의 삶과 영화 속 주인공들을 연결시킬 수 있게 해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분명히 우리를 유년시절로 데려가기도 하고, 모성에 대해 생각해보게도 하고, 무엇보다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파견된 사회복지사들이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으로 딸과 엄마를 떼어놓으려고 할 때 눈물까지 흘린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무언가 찝찔함을 느꼈다.

 

 

자유를 느낄 권리 

 이 영화는 션 베이커의 이전 영화들과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무니의 모녀는 객관적으로 삶이 매우 힘겨운 사람들이다. 그 힘겨움은 이전 영화들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힘겨움과 차원을 달리 한다. 한 주의 모텔 숙박비를 내기가 버겁고, 무니는 그토록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구걸을 해야만 하는 소녀이다. 돈이 없는 그들에게 하루를 버텨내는 것은 그 자체가 미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삶을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는 우리가 그들의 소소한 행복과 거대한 절망을 보면서 공감을 하고, 나아가 홍보 문구에 의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온당한가이다. 아니, 누가 그들을 영화의 캐릭터로 만들 수 있는가. 즉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감상자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 자유의 윤리성 또한 같이 묻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리얼리즘의 태생적인 논쟁을 재소환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예술을 보며 느낄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문제 의식이기도하다. 좋은 영화의 좋은 감상자는 영화가 제공하는 계기에 따라 스스로를 깨워내고 자신의 생명성 그 자체를 유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름 하에 누리는 자유, 그 자체의 윤리성에 대해서 고민해보아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 속 생생함 앞서 분명히 존재했던 그 재현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자연스레 전에 읽었던 책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고통을 유발한 폭력이 재현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게 표현되더라도 참을 만한 자극이 된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극장에 들어와 안전한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최악의 사태는 영화의 재현된 폭력을 감상하고 나서,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안전한 분노가 그 이해의 증거로 내밀어진다. 고통의 이해가 분노를 낳는 게 아니라, 안전한 그래서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거의 잊혀질 분노가 고통의 이해를 사후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객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 윤리의 문제다. 또한 폭력의 재현을 변호하는 데 동원된 언어의 문제다. 

이창동이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공범 의식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중략) 밀양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 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강, 2010. “고통의 심연, 찰나의 빛”

 

 물론 이 영화가 명확히 (폭력에 의한) 가해자-피해자 구도에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무니 모녀는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홈리스가 된 것이고 결국은 공권력에 의해 모녀 사이가 갈라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거대 구조의 피해자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지나친 표현이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그들의 삶의 형태는 도시 빈민이며 일반적 의미의 불행과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굳이 밀양에 대해 쓰여진 이 글을 가져온 이유는 사실 이창동이 이 영화를 만드는 태도에서 션 베이커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만드는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한 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언급한 영화는 이창동의 오아시스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어느 정도 립서비스성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전의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도 밀양을 그에게 강한 영감을 준 영화로 꼽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창동의 영화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음을 꾸준히 외쳐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공감하되 연민하지 않는다는 션 베이커의 태도도 조금 더 와 닿는다.

 

 

 다시 영화 속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니의 엄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성매매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모녀가 살고 있는 모텔 방이다. 무니의 엄마는 남자 손님들이 방문할 때마다 무니에게 목욕을 시킨다. 우리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 실재 성매매 장면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 무니가 한가롭게 목욕을 하며 물장난을 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욕조 밖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이 상상은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깨워낸다.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현실들, 딸을 욕조에 둔 채 성매매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현실과 그 심정, 나아가 영화 밖의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을 수 있는 진짜 사람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에 대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런데 감독은 이 자유를 오랫동안 허용하지 않는다. 한 남자가 프레임 안으로 불쑥 들어와 무니와 눈이 마주친다. 이 조마조마한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자유란 것을 논할 수 없고 그저 무니가 상처받지 않기를, 어떤 상황인지 인식하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무니는 감상자에게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 이상의 존재감을 가지게 된다. 강력하게 확보된 영화 안의 자유가 강력한 공감으로 치환되는 놀라운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마치 현실이 영화로 침투하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우리가 손쉽게 누려왔던 예술이란 세계의 자유라는 권력이 얼마나 나약한 것이지 상기시켜준다.

 

 그런데 이토록 재현과 자유가 갖고있는 한계에 대해 경계해 왔던 션 베이커는 왜 결국엔 무니의 ‘매직캐슬’에 무지개를 띄우는가. 왜 그들의 일상을 이토록 귀엽게 그려내고, 심지어는 즐길 만할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가. 그리고 왜 결국에는 그들에게 디즈니월드로의 도피를 허락하는가. 이러한 영화적 환상으로의 도피가 그의 영화가 여타 리얼리스트들과 차별점을 가져온 부분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의문이 제기되어야 마땅하고, 껄쩍지근해야 마땅하다. 그는 정말 조심성을 잃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서 현실의 고통을 교묘하게 외면하고자 한 것일까? 예상했겠지만 앞으로의 글은 이러한 혐의에 맞서 션 베이커와 그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대한 변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작품 그 자체 이전의 태도를 논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느끼거나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출자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없는가, 그 경계에 대해 스스로 알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물음이라고 믿는다. 더욱이 삶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영화들이라면 이 물음은 당위의 문제를 넘어 작품의 진정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다시 한 번 논점을 짚어보자, 이 영화에 대해 제기되는 의문은 다음의 두 질문의 대립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들을 행복할 만한 삶으로 그리는 것이 맞는가? 와 그들이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또한 오만한 생각아닌가? 하는 두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질문이 사실은 같은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들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션 베이커는 이 명백한 모순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그들의 행복 여하를 멀찍이서 판단하지 않았다.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스토리나 캐릭터를 찾아 특정 지역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최근 몇 작품은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 관한 영화여서 외부자로서 리서치가 필요했다. 가장 대상을 존중하는 리서치 방식은, 그들이 사는 곳에 직접 가보고 아무것도 모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해당 지역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현상, 거기 사는 주민들을 소재로 픽션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널리스트가 그러하듯 사람들에게 다가가 가능한 한 인터뷰를 많이 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대답했지만 그의 영화적 입장의 정수는 줄곧 여기에 있었던 듯하다. 매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직접 해당 커뮤니티에 자신의 몸을 담궜고 이는 통상적인 영화 만들기를 위한 자료 수집의 수준을 넘어섰다. 실제로 탠저린의 두 주인공은 이 과정에서 그가 사귀게 된 친구들이다. 즉 그는 윤리학적 실험을 하는 영화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치열함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치열함은 고통과 불행 이전에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어코 증명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의 ‘프로젝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맹인을 보며 션 베이커라면 저 사람을 어떻게 그렸을까를 감히 상상해본 적 있다. 그는 아마 맹인의 행복과 불행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그의 삶을 통째로 겪어낼 것이다. 모든 삶은 멀리서 볼 때는 짐작할 수 있을 만 해 보여도 가까이서 지켜볼수록 점점 특수해져서 그 자체로 반짝이는 형식이 되곤 한다. 가령 무니는 어른들이 울기 직전의 표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눈은 반짝임을 잘 포착해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무니의 눈으로 무니를 보는 영화이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한다. 이 영화는 히든 홈리스라는 계층의 전형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작품이다. 오직 완전히 개별화된 인물들을 현실에서 발견하고 찾아내면서 더 엉겨 붙은 상태의 현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냥 그 상태의 예술 작품으로서 남겨두는 것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그저 영화로서(예술로서) 머무는 것을 거부하는 듯 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이 영화의 제작 방식과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션 베이커가 해왔던 영화 작업들은 그 자체로 하나하나의 사회적인 프로젝트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만큼 ‘실제로 어떠한가?’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션 베이커 감독은 영화가 사회적인 생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서 자주 다뤄지는 사람들이 있고, 자주 이야기되는 계층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영화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계급적 위치와 산업적인 특징에 기인할 것이다. 그와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은 이러한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한다. 그는 예술가로서 덜 이야기 되어지는 존재들에 본능적으로 흥미를 느끼면서 동시에 필름메이커로서 덜 이야기 되어지는 존재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그가 예술가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운동가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 이유일 것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관련된 행사에서 그가 매번 빼먹지 않는 코멘트는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니 모녀에 대해 생각해달라는 말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감상자를 영화 속 실재의 세계에 연루시키면서, 스스로의 자유를 의심케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한다. 동시에 예술이 현실 사회 속 생산물이라는 건조한 명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예민함을 요구한다. 이제 우린 다시 마지막 장면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젠시의 손에 이끌려 디즈니 월드로 달려가는 무니의 모습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가짜 세계로의 도피도 아니고 손쉬운 영화적 환상으로의 도피도 아니다. 션 베이커의 작은 프로젝트가 건네는 진심의 위로이다.

 

 

 

 

 


기획사사장인데_연예인이랑_연애한_.txt

- 스타프로젝트 온라인 후기




익명 z










Figure 1 아바타스타 슈(본명 수희. 10세) 뮤직비디오 전격 공개



   비비빅(VVVic. Viva Victory(승리 만세...) 약자)이라고 2000년대쯤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플래시게임 사이트가 있다. 캐쉬를 충전해 아바타를 꾸미고, 커뮤니티가 있고, 다양한 도트 게임을 즐길 있는데 분식왕( 그대로 분식집 게임), 뿌띠빠띠( 굽는 게임) 등등, 아기자기한 타이쿤 위주로 어린 중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역시도 쥬니어네이버를 통해 몇번 플레이했지만, 당시의 나는 브라보닷컴에 미쳐 있었고(거기에는 아바타스타 슈가 있었기 때문이지. 오른쪽 참고) 그렇게 비비빅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질 했으나 무려 고등학교 때를 기점으로 비비빅은 마음 속의 1위에 등극하고 말았다. 이유는 바로 이름도 찬란한 '스타프로젝트 온라인.' 전국민이 프로듀서가 되던 2016년보다 일찍, 나는 아이돌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Figure 2 스타프로젝트온라인(이하 스프온) 오픈 화면

  

한창 네이버 게임이 활발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성적이 바닥을 치던 시절 여름, 네이버 게임을 뒤지는 재미로 살고 있던 나를 보다못한 부모님은 강제로 넣은 독서실에 보내셨다. 하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었으니... 아아, 독서실 사장님, 대체 독서실에 컴퓨터를 대씩이나 놔두셨나이까.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컴퓨터를 있게 했나이까. 나는 그렇게 하루에 시간씩 컴퓨터를 하는, 구석자리 컴퓨터 지박령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누가 오면 인강을 다운받는 척하며 매일 거기에 앉아 있었는데 ( 컴퓨터 요정 하나 때문에 인강을 들은 친구들 다들 지내고 있니...?) 일어날 머리가 - 돌면 왠지 모를 뿌듯함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하여튼, 비비빅의 스프온은 와중에 발견한 게임이다. 나에게 스프온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호화로운 일러스트와 빵빵한 성우진(무려 메이플스토리 에반과 루미너스 성우다) 거느린, 타이쿤과 연애 시뮬레이션을 합친 형태의 게임으로, 다시 말해,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미소년 연애 시뮬레이션(흔한 미연시는 여성 캐릭터를 공략하는 남성향 게임이므로 풀어썼다)이라 칭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오타쿠 같은 말투, 혹은 어느 정도는 '덕질'이라 불리는 취미 활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평생에 걸친 덕질은 친구들이 '어디가서 말하지 말라' 정도로... 진성 오타쿠의 그것에 가까운 편이다. 흑염룡이 날뛰던 중학교 시절은 그게 너무 심해서 아무리 일코(일반인 코스프레. 오타쿠가 아닌 하는 행동) 하려고 해도 주변에서 모두 정체를 알아차릴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사실 이걸 주제로 글을 쓰려다가 후세에 남겨질까 두려워 포기했다. 노년에 계획) , 이런 성향의 사춘기 여자애가 스타프로젝트 온라인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자. 남자 캐릭터들은 잘생겼고, 완벽해보인다. 그러면서 다들 여주인공(플레이어, ...!?!?) 안아줘야할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성우 덕후가 아닌지라 호화 캐스팅인 몰랐지만, 어쨌거나 목소리도 좋다. 이것만 봐도 공략할 가치는 충분한데, 각자의 능력치를 올리고 탑급 연예인으로 만드는, 육성 게임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니... 얼마나 설레는 게임인가! 심지어 게임이 진행될 때마다 공개되는 일러스트는 일러스트레이터분의 피와 땀을 갈아넣은게 분명했다. 일종의 프린세스 메이커(이하 '프메'), 아니, 아이돌 메이커에 미연시를 합친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진성 헤테로 여성향 오타쿠였던 내가 게임을 싫어할 만무하다. (심지어 나는 항마력도 높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일코를 하던 나는 그대로 만난 것처럼 스타프온 남정네들에게 빠져들었고, 그렇게 나는 그놈의 인강을 3개월 뒤에 들어야할 것들까지 다운받으며 그들의 미소 속에서 헤엄치는, 아주 멋지고 걱정스러운 여름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렇게 여름방학이 끝나고는 기회가 없었다. 집에서는 부모님께서 미래의 암담함에 한숨을 내쉬셨고, 학교에서는 (모두가 내가 오타쿠인걸 알았지만) 일코 중이라서 시간이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던가. 중에서도 사춘기 여자애의 마음이란 좋아하는 자취생의 지갑보다 가벼워 팔딱팔딱 날뛰는 법이다. 5번의 중간, 기말고사와 수능까지 치르는 동안 스프온에 집중할 시간 따위는 없었고, 성인이 되고 나니,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정말 상상도 없게 많았다. 이렇게 스프온의 아이돌들을 졸업하고 글의 주인은 영원히 행복하게 덕질 없는 삶을 보냈답니다로 끝맺는다면, 그저 남들보다 만화를 조금 좋아하는 사춘기를 지냈던 여자애의 한때의 추억팔이로 글이 끝나겠지. 하지만 나는 아주 일관성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학창시절의 관성을 유지한 아직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심심하거나, 시험기간이거나 덕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학기 시험기간의 덕질은, 바로 ...이었다. 여고생의 심장은 나를 스프온으로 이끌었고, 손에는 성인(까지는 아니고 대학생) 재력이 들려 있었다. 드디어 매일 적자인 비비빅이 미친듯이 유도하는 현금 결제에 모른척 넘어가줄 있다. 여기서 내가 취해야 했던 올바른 행동은? 당연하게도 나는 유혹에 모두 넘어갔으며, 시험기간은 (그러면 안됐지만) 아주아주 즐거웠다. 이렇게 스타프로젝트 온라인은 고등학생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2018 나의 인생의 상반기까지 조지며 나의 삶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이놈의 게임이 대체 무엇이길래 여자는 나이에 이러고 있나 싶을 것이다. (물론, 관심이 1 없었다면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 말로만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보다야 직접 보여주는 나을 같아서 캡쳐 화면을 가져오긴 했는데, 뭔가 나에게만 아픈 손가락인 개망나니 자식을 세상에 보여야 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유쾌하진 않다. 바로 왼쪽의 화면이 스프온 사이트에 들어가면 곧장 보이는 화면으로, 일반적인 게임 사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캐릭터(라고 해봤자 2012 업데이트된... 다시 말하지만 비비빅은 심각한 적자 상태다) 서빈이 화면에 보이고, 사대주의 뽕인지 스타 경영 게임이라고 영어로 적혀 있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스타를 경영하는, 망한 기획사를 물려 받은 17(...? 미성년자 상속법이 궁금해지는 부분) 주인공이 빚을 갚기 위해(빚쟁이들이 회사에 깽판치러 온다...... 학교도 다닌다...) 스타가 될만한 재목을 찾아내서 탑스타로 키워내는 것이다. 둥근 네모 안에는 아이디가 적혀 있고,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라는 아래에 게임 내에서 불리는 주인공 이름이 적혀 있다. ( 이름을 부르는 게임 캐릭터들을 발견할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항상 본명을 적어놓는다. 행복해진다) 플레이어는 기획사 사장이자 스타들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되어 회사를 운영하게 된다. 일본의 프린세스 메이커와 상당히 유사한데, 날짜가 매일 흐르는 , 학원을 다녀서 능력치를 올리는 ,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능력치를 가져야 하는 등등 당장이라도 고소당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본틀을 가지고 있다. 일러스트를 모으는 재미가 있는 것도 프메 시스템과 유사하다.



Figure 4 내 최애의 능력치인데, 별로 높진 않다



   위의 스타레벨은 가수, 모델, 배우 레벨을 합친 것으로, 레벨은 가수, 모델, 배우 일을 하면 올라가고, 이런 일들은 아래의 스테이터스, 보컬, 댄스, 연기, 암기, 센스, 화술의 스테이터스가 어느 정도 되면 맡을 있으며, 스테이터스는 학원을 다니면서 올릴 있다. 예를 들어, 모델 레벨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터뷰, 표지 모델, CF 모델, 패션쇼 등의 일을 맡아야 한다. 일은 난이도가 높을수록 높은 능력치를 요구하는 대신 좋은 보상을 받을 있는데, 레벨 1이면 아무 조건 없이 체력 100 사용하면 일을 있지만 150 경험치만 주고, 레벨 9 체력 500 더해서 가지의 능력치가 각각 504, 396, 300 넘어야하지만 경험치는 무려 950 주는 식이다. 하지만 레벨 9 능력치를 채우는 것은 정말 오랜 기간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학원에서 얻을 있는 능력치는 최대가 18이다... 18...) 공략 하나로 캐릭터 고유 능력치에 들어 맞는 배우, 가수, 모델 '' 찾아 하나만 주구장창 하는 것이 제시된다.  올릴 필요 없이 그냥 개에만 집중하고 능력에 맞는 일을 시켜 레벨을 올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플레이어는 일일이 도장깨기를 하게 되는데, 이유는 바로 옆에 보이는 일러스트 때문이다. (이름이 노랑이인 이유는 머리카락이 노란색이어서다. 너무 사람 이름 같이 해놓으면 현생에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기에...) 게임에서 '출연' 때는 캐릭터의 능력치, 그리고 기분에 따라 성공 확률이 달라진다. 성공, 실패에 더하여 '대성공'이라는 결과가 나올 때가 있는데, 때는 이렇게 이벤트와 일러스트가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스프온을 훌륭한 여성향 게임이라 부를 있는 이유다. 솔직히 표정, 의상, 색감 완벽해....... 심지어 이게 그냥 보고 지나가는게 아니라 사진첩에 하나하나 차곡차곡 모인다. 그래서 뭔가 빈칸을 채워야할 같은 욕망에, 다시 들어와서는 똑같은 출연을 하고 하는 것이다. 일러스트를 얻을 때까지. 일러스트는 같아도 이벤트는 가끔 바뀌기에 이벤트를 찾는 맛도 쏠쏠하다. 그러니 어떻게 그냥 무시하고 있는 일만 하겠는가?



Figure 5 댄스쇼 대성공 일러스트. 잘생긴건 크게 보자


  자꾸 연예인 만들기 얘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육성이 필요했는지를 설명하겠다. 연애하려고다. 아래에 사진첩을 가져와봤는데, 저기에 보면 앞머리로 눈을 가린, 단발머리 여자애가 보일 것이다. 저게 바로 , 아니 플레이어다. 수치스러울 같아서 일부러 작은 사진으로 가져왔는데, 이젠 수치심을 잃어가고 있다. 덕질을 해본 , 나에게 돌을 던져라. 그럼 플레이어가 저기에 나와있는가. 그건 바로! 데이트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건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데이트를 해서 호감도를 쌓고, 데이트도 대성공하면 일러스트가 쌓인다고! 놀이공원, 극장, 카페, 레스토랑, 공원, , 수영장에서 게임 머니를 내고 데이트를 즐길 있으며, 비쌀수록 체력이 깎인다. (호감도는 똑같이 올라감) 일러스트는 똑같아도 대성공 때마다 두세가지 패턴으로 이벤트가 다르게 나오는데, 그게 성우 목소리로 나온단 말이지. (오열) 캐릭터마다 성격에 따라 부끄러워하거나 츤츤거리거나 귀엽거나 멋지거나 아니면 부끄러워서 츤츤거리는데 그게 귀여운 대사로 매니저(바로 !) 부르며 데이트를 하는데, 처음에는 유치해도 계속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넋놓고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있다. (그래서 밖에서는 절대 못한다. 고등학생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인가) 저번에는 놀이동산으로 데이트를 갔다가 관람차에서 내가 잠들어버리고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찌르는 같자 차애가 그런 앞머리를 털어주려하는(...) 에피소드로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 데이트가 끝나고 순간 검게 바뀐 화면 위에 욕망에 물든 내가 보였다. , 사족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게 정말 인터넷 소설과도 같은, 아니 그거보다 더한 2 감성과 2 로맨스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데이트 에피소드 보고 좋아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호감도 올리려고 데이트를 하다보면 대사를 외워버리고, 읽는 귀찮아지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게임이 질려서 이상 하기 싫어지지 않을까? 그건 정말 - 걱정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선호도와 스타 레벨을 올리는 이유는 따로 있으니까.



Figure 6 노랑이의 사진첩




  비비빅이 게임을 만들었다고 내가 감히 평하는 이유는, 바로 시나리오 때문이다. 앞에 언급한 학원은 능력치를 올리기 위한 미니게임으로 진행되는데 그게 재미가 있고, 데이트나 일은 일러스트와 이벤트를 보는 재미가 있지만, 시나리오에 비하면 모든 것들은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 나도 아직 끝까지는 보지 못했지만(끝을 보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심지어 어떤 유저는 몇일 걸리는지 계산하는 엑셀을 만들어서 게시판에 올렸다. 캐릭터는 매일매일 키워도 걸린다) 지금 절반 넘게 진행 중인 상황인데도 시나리오를 보겠습니까 화면이 나올 때마다 아직도 떨려하면서 클릭하고 있다. 설레... 캐릭터들의 에피소드는 31개로 마무리되는데, 처음 스타와 계약(스타를 매니징하는 . 나름 계약서도 쓰고 예명도 정한다. 캐릭터들의 예명은 머리색으로 통일) 나타나는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모두 스타 레벨, 매니저 레벨(활동을 열심히 하면 매니저 경험치도 쌓인다), 그리고 호감도가 일정 조건을 넘을 등장한다. 그리고 표정도 점점 다양해지고,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점점 꽁냥대고. 원래 사귀기 전이 제일 재밌는 법이라고! 하여튼 꽁냥거리는 애들 보며 하루하루 설렘을 충전하고 있다. 오른쪽의 은발청안의 한국 사람은 요즘 최애인데,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자신을 돌봐주시는 큰아버님, 큰어머님, 그리고 자신의 사촌 여동생과 살고 있다가 사촌동생이 죽자 죽음을 큰엄마가 받아들이지 못해 동생 대신 동생 옷을 입고 다니는...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성정체성을 확립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배경에서 꿋꿋하게 주인공과 데이트를 하는 인물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자신이 이걸 플레이하고 있고 심지어 글까지 쓰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려고 한다. 지금 시나리오 16화쯤에서 친구는 주인공의 소꿉친구(남자)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고 여장한 모습이 아닌,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주인공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이다. (... 현타의 흔적이다. 이거 근데 핍에 올려도 괜찮은 글입니까. 다른 의미로 독보적이지 않나요) 그런데 첩첩산중으로 하양이의 배경은 평범한 . 지금 7 캐릭터들이 하나는 가출한 조폭가 양자, 하나는 형한테 복수하려고 하는 재벌가 서자, 하나는 차원을 넘어온 파란머리 용기사, 하나는 10(아청아청해서 도저히 플레이 못하겠다. 아니 얘한테 사탕주는거 말고 대체 무슨 데이트를 하란 말인가), 하나는 가식 쩌는 오드아이 모델, 하나는 준다는 말에 따라온 거지라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절반 넘게 미성년자라... 얘네가 나를 우쭈쭈할 때마다기분이 묘하지만, 세상 고뇌 짊어진 척하는 재벌가 아들래미도 겨우 20살이지만... 잠깐 지금 아예 멘탈 나갈거 같은데?




Figure 7 맥락은 까먹었는데 캡쳐해뒀더라


왠지 영업글이 까임글이 같다. 사실 2018년의 감수성으로는 2010년에 나온 게임하기가 많이 힘든 것은 사실인데(ex. 매니저(17. 소녀가장)에게 대쉬하는 용기사(25. 다른 차원 사람) 바라보며 이러면 되는게 아닐까 고민하는 ) 여성향 게임은 오글거리고 말도 되는 맛에 하는 아니겠습니까 껄껄. 그렇게 따지자면 쥐뿔도 없는 캔디형 주인공한테 사랑에 빠지는 재벌가 2세도 판타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주인공한테 감정이입해서 하면 할만 하다. 그리고 일러스트랑 목소리가 열일해서 결국 잘생긴게 최고야를 외치며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매일 발견하고 있다. 사실 너무 수치스러울 같아서 주제는 안하려고 이것저것 생각해봤는데, 여태까지 태어나서 덕질한 이래서(고스펑크 덕질도 했었다. feat.버클 달린 롱부츠. 50cm) 가장 있는 소재를 가져왔다. 관련 소재가 정말... 쓸데없이 무궁무진하지만 글로 남겨 후세에 이름으로 전하기 조금 당혹스러운지라 고이고이 모셔두고 있었는데, 핍을 통해서 익명의 힘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낯을 가리고 현생에서는 항마력이 낮은 인간이니 제발 나를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기를... 설령 누구인지 알겠어도 제발 물어보지마라. 나는 그저 이런 갓게임으로 인생을 망치러 나의 구원자 비비빅이 비록 매일매일 적자지만 서버를 종료하지 않고 쥐꼬리만한 지갑의 도움이라도 받아 서버 업데이트를 하고 2018년에 걸맞는 신캐릭터를 내주길, 그리고 과년한 딸래미가 철드는 것을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 우리 부모님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할 . 졸작이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글을 마친다.




Twinkle 

L'Arche de Noé racontée par Van Cleef & Arpels 
















시나인








1.

옅은 푸른 빛이 흐르는 어두운 공간에 도착했다. 트기 새벽 같은 느낌이었다. 반짝임은 아직 숨어있었다. 어디 있는 것인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돌연 공간을 울리는 천둥 소리에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멈추어 서버렸다. 어둠을

무서워하기 때문이기도, 천둥을 무서워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간은 이런 나의 두려움을 눈치채기라도 듯이 조용해졌고 고요함에 나는 추워졌다.. 어둠에서 나를 보호해줄 무언가가 절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반짝임을 빨리 찾아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렁거리는 푸른 빛을 따라서 작고 좁은 터널을 지나서야 반짝이는 것들을 마주할 있었다.




 : <반클리프 아펠이 들려주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 전시






2.

나는 분명 반짝임을 쫓아 곳에 왔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어둠과 비를 피해 들어온 공간은 조금 갑갑할 만큼이나 포근하였다. 바닥과 그리고 천장까지도. 눈으로만 봐도 부드러웠다. 벽을 따라서 공간을 더듬으며 반짝임을 향해 걸어갔다.. 어떤 것들은 눈높이에서, 다른 어떤 것들은 위에서, 다른 어떤 것들은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반짝임을 쫓는 모습이 아마도 출렁이는 파도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아니다. 마치 배가 파도를 만나 울렁거리는 모양새와 비슷했겠다. 




 :<반클리프 아펠이 들려주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 전시





3.

나를 다독이는 포근함과 반짝임도 잠시, 천둥과 함께 번개가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반짝이는 것들을 비추던 빛은 요동쳤다. 그와 동시에 그것들을 잃어버릴까 걱정되었다. 다시 찾지 못하게 될까 불안했다. 이곳에 존재하는 반짝임들도 결국 선택받았기 때문이었다. 선택은 우연하고 깊은 이유라곤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곳까지 침범한 천둥과 번개가 미웠다. 차례 소동이 끝나고 은은하게 다시 반짝임은 나타났다. 잃어버린 알았던 반지를 장갑 속에서 찾는 기분이 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안도감과 함께 다시 빛나게 손가락을 보며 미소가 피어나는 기분. 어둠으로 인해 반짝임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금 영롱한 빛을 내주었다. 그저 반짝임 자체에 매료되어 흐르듯 바라보았다. 그곳의 반짝임과 일렁임에 익숙해졌을 때쯤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졌다.




4.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빛이었고 발자국 다가갔을 때에는 반짝임이었으며, 뼘보다도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는 눈을 맞출 있었다. 반짝임들은 제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쌍을 이루고 있었다. 손에 쥐어질 정도로 작은 그것들은 힘을 갖고 있었다. 마구 움직이다가 멈춘 유연하고 역동적이었다. 저마다의 얼굴을 갖고 있었는데 눈의 빛깔도 모두 달랐다. 쌍을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눈이 나로 하여금 자체와 마주하게 만들도록 하는 같았다.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기도, 걱정 말라며 위로를 하기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과시하기도. 마흔 여덟 쌍의 반짝임이 각자의 언어로 어둠으로부터 다독여주었다.




5.

 반짝임이라고 부른 것들은 모두 동물들이었다. 그것들을 하나같이 빛나고 있었고 자체로 유일함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는 같았다. ‘노아의 방주라는 거대한 이야기가 없이도 어둠으로부터 나를 위로해줄 있는 존재였으며 세상에서 오래도록 존재 가치를 지닐 것들이었다. 어쩌면 이야기보다 경험을 주는 반짝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눈을 맞추고 오래도록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하나하나 천천히 바라보며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형태와 빛깔 그리고 섬세함으로.



: 반클리프 아펠의 하이주얼리 컬렉션 '라크 노아' 미국 LA 게티 미술관에 있는 브뤼헬의 그림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는 동물들'(1613)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6.

반짝임은 서로 얼굴을 기대고 발의 끝부분이 애정 어리게 맞닿아 있었다. 그들이 딛고 서있는 코랄 컬러는 그들의 사랑스러움을 돋보이게 하는 하였다. 도톰한 검은 몸통은 사실적으로 그것을 나타내주었고 투명한 눈빛에서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존재로 버텨낼 같은 의지를 보여주는 하였다.

 




: <펭귄 클립>





다음 반짝임은 생기 가득한 노란빛이었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처럼 눈에 띄는 뾰족한 귀와 무언가 궁금한 곧게 세운 자세가 앙증맞았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는 다른 반짝임은 잔뜩 움츠린 자세는 긴장을 풀어주어야 같은 당혹스러움이 아니라 함께 휴식을 했으면 하는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그들의 까만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길가에서 만난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렸다. 나를 경계하다가도 만남에 대한 정중한 인사를 받아들이고 다가와주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없다.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좋을 뿐이다. 반짝임을 만난 그때에도 머릿속이 노란 반짝임으로, 애교를 부리는 듯한 작고 까만 눈빛으로 가득해지는 기분이었다.




 : <페넥스 클립>





귀여운 동그라미는 명랑한 색깔로 빛났다. 작고 소중해서 손에 고이 안아주어야 같은 모양새였다. 반쯤 펼친 날개는 날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사려 깊은 표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거리가 만남의 설렘을 느끼게 했다.


 

: <코치넬 클립>


   이외에도 많은 반짝임이 있었고 각각이 있는 행복을 나에게 주었다. 많은 동물들 가운데 비슷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섬세하게 빛깔과 표정, 눈빛이 달랐다. 이를 눈으로 직접 만나볼 있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토록 감성적으로 그들과 교감한 말이다. 문득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위적인 감상은 아닌지 의심스러워 졌다.












: <카나드 클립>, <지브라 클립>, <카카토에스 클립>





7.

동물들의 섬세한 표현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이 내뿜는 사랑스러움과 반짝임에 나는 빠져들었다. 사진과 글로 전할 없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들은 동물 자체가 아니다. 사람을 장식하는 반짝이는 장신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토록 집중하여 감상하는게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반찍이는 그들과의 교감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체로 아름다운 것과 함께 그것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감성에 젖어 감상을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을 만든 사람의 노고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 작은 것이 모여 반짝임을 만든 기막힌 기술력은 숨막힐 정도였다. 이토록 반짝일 있었던 것은 그저 그런 돌부터 하나하나 깎아나가는 , 거칠고 단단한 어떤 것을 반짝이고 유려하게 원하는 형태대로 다듬어 나가는 때문이다. 시간을 담고 있는 반짝임이기 때문에 어둠과 천둥 속에서도 자리에서 계속 빛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삶에서의 소란과 어둠에도 나의 빛을 잃지 않는 법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마음 가득히 반짝거리는 같았다. 




8.

꿈같은 감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이 마주하고 있는 것들은 꿈과 너무나 달랐다. 지금까지의 감상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길 바라며 조금 딱딱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반클리프 아펠이 들려주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 전시는 장신구 전시이다. 과연 장신구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 있는가? 기획 전시를 할만한 것이 되는가? 아마도 이러한 하이 주얼리나 경제적 가치가 높은 반짝임이 아니라면 미술관에서 만나기란 어렵다. 오히려 지나가는 길에서 쉽게 들어갈 있는 액세서리 가게 뿐만 아니라 문구점에서 만나는 일상이 자연스럽다. 예술작품 중에 일상에서 많이 소비되고 생산되는 장신구의 영역에 대한 작은 바람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다. 스스로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라 한번쯤 반짝임이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있는 반짝임과 만나는 경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남자 발레 무용(舞踊)












하체는 파쎄(Passe). 상체는 뒤로 캄브레(Cambre) 다리는 옆으로 아웃, 몸을 뒤로 젖히더라도 허리는 뒤로 넘어가지 않고 꼿꼿이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깜블레(cambré). 끝까지 내려가요. 엉덩이 빠지지 않게! (En bas), 아방(En avnat) (En haut) 거쳐서, 뒤로 깜블레. 반대쪽 어깨는 내리고! 몸은 비틀리지 않고 정면 바라보게 하세요. 뻗어서 뒤로 젖혀요. 배는 내밀지 말고! 골반 세워요! 다시 쑤쉬(sous-sus), , 발란스! 팔꿈치 벌려주세요. 위로 뻗어줘요. 다리 붙이고, 어깨 내리고, 모아주고, 내뱉어서 흉골은 조여줘요. 나무가 듯이. 다리를 땅에 꽂아주세요. 당기고. 좋아요. 꽃봉오리가 터지듯이, 알롱제(allonger), 그리고 . 시선 () 바깥쪽! 좋아요. 수고하셨어요. 


  12카운트, 시간으로 치자면 15~20 남짓의 동작이 끝났다. 비로소 코어에 힘을 풀고 숨을 크게 몰아 내쉰다. 식은 땀이 등으로 흘러 타이즈로 스며든다. 위의 동작들은 발레의 매우 기본적인 동작들 하나다. 지난 10월부터 나는 발레를 꾸준히 배우기 시작했다. 참고로 필자는 현재 27살이고, 남자. 어디를 가더라도 클래스에서 거의 유일한 남자다. 


무용에 관심을 가지게 것은 작년, 그러니까 2017 1학기 <무용 미학> 수업을 수강한 때였다. 나는 무용을 본적도, 적도 없었다.  춤이라고는 초등학교 성경학교에서의 율동이 거의 전부였고 대학교 신입생 선배의 재즈댄스 공연을 말곤 무용 공연에 대해서도 딱히 기억이 없다. 수업 또한 전공을 채우기 위해 듣고자 했던 것이다. 까짓것이 어떻게 무용 작품을 비평하고 무용에 대해서 논하겠는가. 나는 내가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글을 때엔 아는 척은 해야 터인데, 생각을 하니 수업을 듣기도 전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저 3학점만 채우자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는 다행히 기대이상으로 재미 있었다. 교수님의 강의 덕분이기도 했지만 같이 감상했던 무용작품의 덕도 컸다. 로이드 뉴슨(Lloyd Newson) 댄스필름 <Enter Achilles>,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etherland Dance Theater, NDT) 안무가인 이어리 킬리안(Jiri Kylian) <Petite Mort>, 샤샤 발츠(Sasha Waltz) <Körper>, 드미트리 체르니아코프(Dmitri Tcherniakov) <Metamorphosis>같은 작품들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이해 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 아니, 어쩌면 이해는 했을지라도 말로 표현할 없었기에 이해 못했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잡아서 말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무엇. 연예인들의 방송댄스처럼 사람들을 자극적으로 사로잡는 매력은 없을지언정 분명 몸짓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있었다. 작품이 멋있다고 생각하기보다 무용수들을 동경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같다. 능구렁이 같이 굴러가는 무용수 신체적 능력은 탁월했다. 그들의 몸은 길고 가늘면서도 강인했다. 뛰고, 구르고, 넘고, 팔을 뻗으며 몸을 없이 움직였다. 미학을 공부했으면서 이런 진부한 표현을 써도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체가 조각이요 예술 작품이었다. 

 


영화 <Dancer>에서의 세르게이 폴루닌. Photograph by David LaChapelle



무용 미학을 듣던 학기 발레 댄서 세르게이 폴루닌(Sergei Polunin)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Dancer> 봤고, 무용수들에 대한 동경은 정점을 찍었다. 나이도 살밖에 차이 안나는 동년배 발레리노는 영화 대사를 빌리자면, “스텝은 사자같이 대범 했고 점프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그는 거침없이 스텝을 밟다가도 날아 오르는 순간 시간이 멈춘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호지어(Hozier) <Take me to church> 맞춘 4 남짓의 격정적인 몸짓은 완전히 매료시켰다. 점프나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흔들거리는 것만으로도 아우라를 뿜어냈다. 세르게이는 내게 새로운 차원의 몸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인류였으며, 단숨에 이상향이 되었다. 

나는 무용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시작은 발레여야 했다. 







내가 마치 계집애가 기분이에요

It’s just, I feel like a right sissy

 

영화 <빌리 엘리어트> 장면



영화 주인공인 빌리는 발레에 흥미를 보이지만 흥미를 보이는 자신을 인정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발레리노는 게이일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발레를 하면 게이가 되는 아닐지 걱정한다. 그는 발레 슈즈를 몰래 받아 와선 침대에 숨기고 발레 수업 대신 권투 수업을 가는 것이라 아버지를 속인다. 보통의 경우라면 장면을 보고 그저 웃고 넘겼겠지만 나는 사뭇 진지했다. 발레는 여자만 하는 것이니, 발레를 하는 남자는 게이일 것이라니, 그런 말들 고정관념이고 게이면 어떠하고 틀린 말인 나도 안다, 아는데, 그래도 실제로 발레를 시작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빌리 엘리어트> 봤다. 비록 영화라 할지라도 소년은 아빠가 알면 후들겨 맞을 알면서도 몰래몰래 발레를 배우기라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있나 싶은 심정이 들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실 발레를 하면 꽤나 어울릴 같은 몸이라 생각했다. 180센티미터에 66킬로그람, 짧지는 않은 팔다리를 가졌다. 하지만 자신이 발레에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나는 터질듯한 근육질의 몸보다 길게 쭉쭉 뻗는 근육을 가진 몸을 원하는 걸까. 몸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가진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발레 배운다고 말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라는 질문이 날아온다면 당당하게 대답할 용기가 없었다.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한테는 도저히 말할 없었다. 나는 글로만 페미니즘을 배웠지 박스에 단단히 갇혀 있었다. 영화를 봐도 용기는 부족했다. 빌리는 아무래도 픽션이지 않은가.

그래서 네이버에 검색했다. “키스는 어떻게 하는거죠 막막한 심정과애인 집에서 변기가 막혔을 부끄러움을 담아남자 발레 검색했다. 내가 미쳤지 싶었을 <멘즈 헬스(Men’s Health)>에서 생각지도 못한 기사 하나를 찾아볼 있었다. 기사의 주인공은 마흔 직장인 장지웅씨. 그는 서른 살에 발레를 시작해 9년동안 3 2시간씩 꾸준히 발레를 배워 왔다고 한다. 주짓수를 해오다가 발레로 종목을 바꾼 5킬로그람이 빠졌지만 몸은 건강해지고 근육에는 힘이 생겼다는 장지웅씨를 보았을 그래, 사람이다 싶었다. 영화부터 남성잡지 기사를 뒤져보기까지 궁색한 과정이었지만 나는 충분한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학원을 검색했고 가까이에 있는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아라베스크(Arabesque) 동작. 다리를 올리더라도 허리를 굽히지 않고 최대한 꼿꼿하게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는 받습니다



 발레 학원에 수업 문의를 했을 처음 받았던 답변이었다. 학원이 작아 남자가 이용할 시설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혹시 추천해주실 있는 곳이 있나요.” 나는 용기를 냈다. 

모르겠네요.” 돌아왔다. 

힘껏 짜낸 용기는 그대로 주르륵 흘러 내려가버렸다. 남자나 여자나 배우면 되는 것이지 이렇게 야멸차게 퇴짜를 놓을 뭐람.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다시 학원을 찾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곳에 연락을 봤자 퇴짜를 맞지 않을까? “ 남자가 새삼스럽게 발레 수업을 문의해?” 들은 적도 없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다시 용기를 있을 때는 달이나 지나 종강을 하고 여름이 되었던 때다. 나는 거리는 멀지만 학원을 찾아갔고, 거기서 왕초보 클래스를 끊어서 수강했다. 

수업을 영원히 잊지 못할 같다. 선생님은 유니버설 발레단 출신의 러시아인 무용수였는데 시간 수업 중에 시간을 요가 매트에서 조져 놨다. 정말, 조지다라는 비속어를 쓰지 않고서는 그때의 고통을 표현할 없을 같다. 크로스핏을 했을 때의 근육통과 힘듦도 정도는 아니었다. 배를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코어를 짜내고, 식은 땀이 줄줄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스트레칭을 했다. 탈수 증세가 와서 중간에 뛰쳐나와 물을 마셨다. 선생님은 씨익 웃으며 유리문 너머로 나한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어서 오라고 말했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뒤로 잠깐 동작, 정확히 말하자면 워크(Barre Work) 마지막 단계인 림바링(Limbering) 했는데, 위로 다리를 얹은 선생님은 다리를 살짝 들어 옆으로 넘기는 자세를 요구했다. 해냈을 리가 없다. 발레 투투를 예쁘게 차려 입은, 근육이라곤 인간이 가져야 최소한의 단백질 말고는 없을 같은 수강생들은 얼굴이 찌푸려지는 적은 있어도 모든 동작을 소화해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발레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발레를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운동량을 소화해내야 한다. 발레는 흔히 생각하는 그런여성적인 운동이 아니다. 표정 관리를 하며 몸을 하늘하늘 움직이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구석구석 관절 사이에 존재하는 작고 미세한 근육들이 단단하게 자리잡아야 하고, 언제나 곧은 자세와 코어 근육에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필라테스에서 사용되는 코어 근육들을 고난도의 무용 동작과 함께 수행한다고 하면 이해하기가 쉬울까. 기본적인 자세만 하더라도 신경 써야 것이 수십 가지이며 동작과 시선에 리버스(reverse) 동작까지 고려하게 되면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단순히 몸이 유연하다고 능사가 아니다. 유연하기 위해서도 이쪽은 가만히 있고 저쪽은 뻗을 있도록 엄청난 코어 근육이 필요하다. 

수업에서의 좌절 오기가 생겼다. 수업은 듣지 않았다. 지금 배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같았다. 대신 평소 가던 헬스장에 운동을 때마다 시간씩 스트레칭으로 몸을 찢었고 코어 운동을 했다. 비싼 주고 웨이트 리프팅은 안하고 매번 신음 소리를 내며 다리를 찢는 꼴이 보기에는 웃겨 보였겠지만 나는 사뭇 진지했다. 그리고 달이 지나 10월이 되었고, 다시 유일한 남자 수강생으로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10개월이 흘렀다. 

앞서 말한 장지웅씨처럼 또한 발레를 하고 살이 4킬로그람이 빠졌다. 주위에선 때마다 이렇게 살이 빠졌냐고 말하기 일쑤다. 그래도 확실한 자세는 훨씬 곧아졌고, 몸은 강해짐과 동시에 부드러워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몸을 쓴다는 것보다 몸으로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젠 발레 하는 남자를 처음 보는 여자 수강생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서도 담담하게 대할 있게 됐다. 보통남자이신데 (몸이) 늘어나시네요.”, “어떻게 발레를 배우시게 됐어요?” 같은 질문이 날아오곤 하는데, 이전에는이런 편견에 가득 인간들!’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 요즘에는그러게요, 저도 신기하네요.” 재밌어 보여서요.” 정도로 대답하곤 한다.

 


그랑 쥬떼(Grand Jeté)




마지막으로 그랑 점프 하고 같이 레베랑스(reverence) 마치는 걸로 할게요. 5 and 6, 7 and 8 and 톰베(Tombe), 파도브레(Pas de bourre), 글리싸드(Glissade), 그랑 쥬떼(Grand Jeté).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번씩 번갈아 하세요. 순서 나가시면 바로 다음 가실게요. 

2(오른쪽 사선) 바라본다. 프리파라씨옹(Préparation). 5 and 6, 7 and 8. 톰베. 오른 다리를 접었다가 뻗는다. 뻗는 동시에 오른 팔도 뻗는다. 파도브레지만 샷세(Chasse)처럼 살짝 점프한다. 다시 오른발, 왼발, 살짝 플리에 글리싸드. 때는 왼쪽을 바라보며 왼쪽 또한 뻗는다. 글리싸드는 크게 뛰지 않는다. 대신 다음의 그랑 쥬떼에서 있게 날아오른다. 앞다리를 크게 차고(데벨로페, Développé) 곧바로 다리도 있는 힘껏 뻗는다. 허리는 펴고 몸은 사선을 바라보지만 시선은 관객쪽을 향하면서. 잠깐의 체공 시간이지만 모든 잡념을 잊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는다.  

글은 여기까지다. 언젠가 무용 작품 하나를 해내고 나서 다시 나의 무용(舞踊)담을 들려줄 날이 오길 소망한다. 




K-POP 함께 춤을




민쵸



  Choreography안무 뜻하는 단어다. 불과 5년전만 해도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인터넷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흔히 접할 있는 단어가 되었다. K-POP 세계로 뻗어나갈 있었던 것은 세계적인 동영상 채널 유투브가 존재했기 때문이고, 이와 맞물려 동영상이라는 매체를 가장 활용한 것은 한국 아이돌 그룹의안무라고 있다. 최근 미국 음악 시상식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수상하며 한국 가요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룹 방탄소년단 역시 채널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한 예라고 있다. 더욱이 세계 시장에서 많은 외국인들은 K-POP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로 세련된 음악과 비주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쉽게 찾아 없는 음악과 춤의 결합을 꼽는다. 특히나 K-POP 그룹들은 단순한 율동이 아닌 격렬한 춤을 추며 완벽한 라이브를 선보이기 때문에 안무란 단순히 무대 구성 요소 하나가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팬들을 사로잡을 주무기가 있는 것이다.


  또한 어릴 때부터 안무를 통해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 하나였다. 인터넷의 존재를 알게 가장 처음 것은 쥬니어네이버에서 뮤직비디오를 보는 일이었다. 이후 나와 함께 유투브가 성장하면서 많은 영상 콘텐츠를 접하게 되었고, 그중 나를 가장 흥미롭게 했던 시각적 요소는 바로 가수들의 안무 영상이었다. 

 오로지안무 위한 영상이 만들어진 지도 10년이 넘었고, 이는 내가 안무 영상들을 기간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간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뿐 아니라 웬만한 K-POP 가수들의 안무 영상은 모두 찾아보았다고 자부할 있다. 때문에 글을 통해 내가 안무 영상들을 보며 느꼈던 점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안무 영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유투브에는 국내, 해외의 많은 사람들의 안무 영상이 있고 그중에서도 가수들과 전문 안무팀들의 안무 영상으로 나뉘어지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들의 안무 영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접한 안무 영상 컨텐츠는 그룹 소녀시대의 영상이었다. 촌스러운 옷들과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쁜 화질, 그리고 SM엔터테인먼트의 팬들이라면 안다는 구름 벽지를 보고 예상했겠지만 영상은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안무 영상으로, 노래가 2009년에 발표되었으니 이미 10년은 영상이다. 물론 영상이 소녀시대의 안무 영상은 아니었다. 소녀시대의 메가 히트곡 ‘Gee’ 인기에 힘입어 뮤직비디오 안무 버전이 2가지나 유투브에 올라왔다. 하지만 영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무대 위에서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사복을 입고 연습실에서 진짜연습다운 연습 하고 있는 영상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사실 영상은 공식적으로 소속사에서 게시한 동영상이 아니다. 어디선가 유출된 것이 분명한데,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소원을 말해봐 최종 편곡 버전이 아닌 이전 버전의 노래가 들리기 때문이다. 소녀시대의 잡힌 군무와 색다른 버전의 소원을 말해봐가 담겨 있는 영상은 팬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인기를 끌었다. 소속사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안무 연습 영상이라는 매체의 힘을 사건을 통해 실감한 것인지 이후 ‘Oh!’, ‘MR. TAXI’, ‘THE BOYS’, ‘I GOT A BOY’ 발표하는 대부분의 안무 영상을 인터넷에 게시하며, 안무 영상을 마케팅 방법 하나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가수들이 안무 연습 영상을 내기 시작했다. 안무 영상은 K-POP 그룹들의 강점인 군무를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유투브를 통해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선보일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언어가 달라 노래를 따라부르지 못하고 가수들이 출연하는 다른 컨텐츠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팬들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할 있는안무라는 컨텐츠를 제공할 있었다. 또한 안무 영상은 그룹의 정체성과 특징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안무 영상의 효과를 알고 있던 SM 엔터테인먼트는 2012 데뷔시킨 그들의 야심작 그룹 EXO 정체성을 안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당시 12명이라는 많은 수의 멤버로 구성되었던 EXO 이를 이용하여 독특한 안무 구성을 사용했는데, 1, 2절에 각각 다른 6명의 멤버들만 무대에 서기도 하고, 앞만 보며 무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뒤를 보았다가 앞을 보았다가 대형으로 서서 모두 바깥쪽을 보는 다양한 대형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 뮤직비디오에 원테이크 기법을 사용했는데, EXO만의 차별성을 보여주는데에 제격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안무 구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EXO 안무 연습 영상을 선택했고, 나아가 안무 영상마저 뮤직비디오처럼 찍는 신기술(?) 선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수들의 안무 영상은 앞에 카메라를 하나 세워두고 멤버 모두가 나오게, 안무 동작과 동선이 보이게, 그리고 무조건 깔끔하고 정적인 방식으로 찍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EXO 으르렁안무 영상에서는 촬영하는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안무 대형에 맞추어 본인이 앞으로 뒤로, 좌우로 움직이고 때로는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영상을 처음 보고 느꼈던 생각은, ‘ 이렇게 다양한 안무와 대형의 구성이 가능하구나!’였다. 단순히 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무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안무의 구성을 부각시켜 촬영 기법 덕분이라고 있다. 그리고 안무 영상은 시각 이미지를 통한 홍보 효과뿐 아니라 가수만의 정체성, 다른 가수들과의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하는 효과까지 기대할 있는 컨텐츠가 되었다.



또한 안무 영상은 팬서비스 차원에서도 활용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고 싶은 것은 모든 팬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이를 고려하여 이제 소속사들은 안무 영상을 홍보를 위한 수단이 아닌 기존 팬덤을 관리하고 새로운 팬들을 유입하는 컨텐츠로 활용한다. 안무를 하는 도중 카메라에 가까이 와서 아이컨택을 하는 영상(흔히 아이컨택 버전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다), 혹은 멤버들끼리 자리를 바꾸어 안무를 하거나 일부러 안무를 틀리는 기존 안무 외의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또한 특별 무대용 안무를 보여주거나, 무대의상 혹은 사복에서 벗어나 루돌프와 산타, 그리고 다양한 캐릭터들의 코스튬 의상을 입는 팬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컨셉들을 준비하기도 한다. 

  


  안무 영상은 기존 데뷔한 가수들 외에도, 아직 데뷔하지 않는 그룹의 런칭에 있어서도 홍보의 효과가 매우 크다. YG 엔터테인먼트는 2016 걸그룹 블랙핑크를 런칭하면서 정식 데뷔 처음으로 멤버들을 공개하는 과정에 안무 영상을 사용했다. 영상은 공개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고 블랙핑크 데뷔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었다. YG 특유의 어두컴컴한 영상 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멤버들은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고 영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걸그룹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유투브를 통해 안무 영상들을 보면서 K-POP 접한 외국 팬들이 단순히 영상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따라하며 스스로 컨텐츠를 만들어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 , 기획사들뿐만 아니라 음반사, 방송사에서도 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대형 음반사와 기획사가 결합된 1theK 유투브를 통해 댄스 커버 콘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컨테스트는 해당 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유통하는 가수들이 출연하여 안무 영상을 촬영하고, 세계 각국에서 영상을 보고 안무를 따라한 영상을 보내면 시상하는 방식이다. 해당 채널에서는 기본 영상뿐 아니라 좌우반전된 영상(거울모드 버전이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Mirrored)까지 올려주어 콘테스트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쉽게 안무를 익힐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커버 콘테스트를 통해 음반사와 기획사들은 신곡 홍보의 효과를 얻을 있고,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 있는 K-POP 팬들의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능동적인 활동까지 이끌어낼 있다. 



 음악 방송 프로그램들 또한 이러한 안무 영상의 인기를 인지하고 유투브 채널을 통해 무대 직캠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케이블 방송국 엠넷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채널을 이용하여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들을 대상으로 컨텐츠를 제작하였는데, 무대 TV 나오지 않은 모습들까지 보기 원하는 팬들을 위해 무대 전체를 찍은 직캠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방송국이라는 특성을 활용하여 기존 안무 영상들에서 없었던 초고화질의 영상들이 올라오면서 팬들은 엠카운트다운 방송뿐 아니라 엠넷의 유투브 채널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직캠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엠넷은 멤버들의 개인 직캠 영상을 제작했다. 보통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거나 비주얼 혹은 담당인 멤버를 찍는데, 인기가 많은 팀일 경우 멤버 수가 아무리 많아도 모든 멤버를 찍어주는 노력을 한다. 게다가 이러한 개인 직캠 영상은 세로 버전이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멤버가 핸드폰 화면에 가득 나올 있는,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형식의 컨텐츠였다. 

엠넷의 직캠이 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지자 최근에는 뮤직뱅크, 음악중심과 같은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이러한 직캠 영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공중파 방송국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은 유튜브와 네이버 티비캐스트 동영상 사이트에서 안무 영상들에 대한 수요가 꾸준하고 이들을 통한 광고 수익이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다양한 방송국에서 직캠 영상을 제작하면서, 팬들은 매주 다양한 무대 속의 가수들을 만날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안무 영상은 마약이다. 잠자기 유투브에서 ‘Dance Practice’, 혹은 ‘Choreography Video’ 검색하는 순간 30분은 기본이고 1시간은 그냥 없어진다고 보면 된다. 지인들은 노래만 나오면 들썩거리는 내가 아이돌 안무를 많이 알고 있는게 신기하다고 하지만, 비결은 바로 매일 1시간이 넘는 시간을 안무 영상을 보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글에 첨부한 안무 영상들은 모두 필자가 정말 좋아하는 영상들이다. 영업을 하기 위한 글은 아니었지만, 글을 읽은 독자들이 내가 언급한 안무 영상들 하나는 감상하기를 바란다. (물론 취향이 메이저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안무 영상들이기는 하다.) 그리고 외국 팬들이 열광하는, K-POP 세련되고 멋진 안무들의 매력에 눈을 뜨기 바란다.



15년차 아이돌의 New Chapter



양장피

 


출처: https://klyrics.net/boa-boa-one-shot-two-shot/



2018 2 21, 보아가 데뷔 18년만에 미니앨범  <One Shot, Two Shot> 발매했다. 같은 3 28 데뷔 15년차인 동방신기는 제대 국내 앨범인 정규 8 <New Chapter#1: The Chance of Love> 발매했다. 10 이상 정상의 위치를 지켜온 아티스트의 반가운 신보다. 물론 음원 순위만 따지자면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두터운 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요계에서 단순히 연차에만 기인하지 않는 존경을 받으며 력을 인정받고 있다. 데뷔 15년차의 오래된 가수가 새로운 커리어를 보여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티스트 모두 예전의 기량을 활용하여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8099


 보아는 미니앨범 발매에 앞서 <키워드 보아>라는 리얼리티를 브이앱으로 공개하였다. 보아의 오랜 팬인 샤이니 키가 보아의 일상과 음반 제작 과정을 관찰하는 형식이다. 보아는 키와의 대화에서, 앨범 프로듀서와의 대화에서 꾸준히대중성 말한다. 그는 높은 완성도의 어려운 음악이 보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지만 그만큼 대중과의 선을 긋게 되었다고 냉정히 자신의 커리어를 평가한다. 그는 시점에서 보아의 노래를 다시 들어야 하는지를 자문하며, 시점에서 자신의 신보에 대중의 흥미를 신선함이 절실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대중이 따라 있는 쉬운 안무를 후렴구에 넣기를 단호히 요구한다. 어려운 안무는 어디든 넣을 있으니 후렴구만은 쉽게 해달라는 말을 번이고 반복하고, 그에 맞춰 안무를 직접 수정하기도 한다. 수록곡은 힙합, 딥하우스 트렌디한 장르로 채웠다. 그러나 <CAMO> 곡만은 보아가 지금껏 해온 화려하고 강한 노래, 기존의 팬들이 보아에게 기대했을 법한 노래다. 

 

출처: https://klyrics.net/tvxq-the-chance-of-love-unmyeong/



 동방신기 또한 이번 앨범에서 보아가 집중한 대중성에 초점을 맞췄다. 스윙재즈 기반의 타이틀곡 <운명> 그간 동방신기가 선보인 강하고 비장한 댄스음악과 사뭇 다르다. 언뜻 들으면 소위뽕짝처럼 느껴질 만큼 중독성이 강하고 퍼포먼스도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 앨범 전반에서 힘을 빼되, 동방신기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도회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는 유지했다. 음악 활동 외에도 신비주의를 버리고 < 혼자 산다>등의 리얼리티 예능에 출연하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동방신기의 72시간>이라는 자체 예능도 9년만에 선보였다. 예능 출연은 그간 팬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멤버의 성격차와 관계성을 15 만에 대중에게 알렸다. 이러한 변화는 그들의 앨범에서 드러나는 음악적인 변화와도 맞물린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 하나인 <평행선> 동방신기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와 이미지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동방신기는 곡으로 미니멀한 미디엄 템포의 팝을 처음 시도했다. 가사 또한 예능에서 보여준 멤버의 이야기를 담아낸 듯하다.


하루종일 고민을 해봐도 너를 모르겠어
알듯 말듯
특이한
하루에도 번씩 나를 시험에 들게

Woo woohoo 우린 다르지만
이리 끌리는지
Woo woohoo
머리론 이해해도
말로는 설명 못해

너와 평행선 위를 따로 걷다
끝에서 함께할 길을 찾아
지금 너와 조금 서툴지만
내게 점점 다가와

동방신기-평행선  



출처: https://www.vlive.tv/video/65388


<평행선> 뮤직비디오에서 유노윤호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금발을 선보여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상 또한 격한 댄스 중심에 어두운 색감 위주였던 이전의 뮤직비디오와 달리 멤버의 일상을 청량한 색감으로 잡아낸다. <>, <Catch me>, <Humanoid> 같은 강렬하고 비장한 분위기의 퍼포먼스 곡들을 줄곧 타이틀곡으로 삼던 기존의 앨범 노선에서 동방신기가 변화를 것은 스윙 재즈 기반의 정규 7 타이틀곡 <Something>부터 이다. 8집의 타이틀곡 <운명> <Something> 이어 나온 <수리수리>, 그리고 입대 스페셜 앨범이었던 <Rise as god>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을 계속 이어간다. 이번 8집은 동방신기가 성숙한 30 남성의 노련함, 여유, 젠틀함이라는 컨셉을 그들의 새로운 상징으로 만들어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과도 같다.

<One Shot, Two Shot>에서의 보아의 새로운 음악 또한 번의 새로운 시도 정도로 기획한 것이 아니다. 보아만이 있는 퍼포먼스의 최종 단계라 있는 <Hurricane Venus> 이후 보아가 새로운 노선을 계속해서 고민해왔다는 흔적은 <Only One> <Kiss my lips> 이어지는 앨범 분위기의 변화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앨범 전체 트랙에서 자작곡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늘어나고 이지 리스닝을 목표로 하는 곡들도 많아진다. 특히 2015 발매한 <Kiss my lips>에서 보아는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하고 작사 작곡에 참여했는데, 기존의 앨범들보다 남성 가수의 피쳐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보아의 새로운 음악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동방신기와 같이 2018년에는 보아의 예능 출연도 늘어났다. 앞서 말한 <키워드 보아> 같은 자체 예능부터 시작해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다 올해 5월부터는 tvN <식량일기>에서 고정 출연을 하게 되었다. 그간 보아는 주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이나 진행자로 출연해왔기에, 버라이어티 고정 출연은 대중에게 보아의 새로운 이미지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수단이 된다. 보아가 그토록 원하던친근한이미지를 얻기에 잦은 예능 출연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 가수이자 방송인으로서 보아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보아는 SM 이사가 아닌 가수고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출처: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2&mode=sub_view&nkey=201802191014533



출처: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2&mode=sub_view&nkey=201802191014533



   보아와 동방신기는 어려운 음악을 하는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공통적인 이미지를 가졌다. (아직까진) 구설수 없는 사생활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대중에게 인정받지만, 인정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티스트 모두 충성도 높은 코어 팬덤으로 위치를 유지해왔다. 보아와 동방신기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대중성을 얻는,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데뷔 15년을 넘어선 현재 고민하고 있다. 고민의 결과가 바로 음원 성적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음반 모두 기존에 아티스트가 가지고 있던 음악적 개성과 일렉트로닉 장르를 접목시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SM 오래 잡아온 아티스트는 꾸준히 유지해온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른이 넘은 사회인,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진 성인으로서 커리어를 오래 끌어나가기 위해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타협한다. ‘마의 7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명이 짧은 아이돌 업계에서 아티스트의 고민과 그에 따른 커리어 수행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이돌은 잠시 반짝였다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며, 충실한 고민과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15년째에도 새로운 이미지와 팬층을 얻어낼 있다. 아마 아티스트 모두 미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20년차의 아이돌, 30년차의 아이돌을 기대하게 한다. 

다만 2018 그들의 행보를 소속사가 전력으로 푸시해 주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소속사의 다른 스케줄로 인해 보아는 1, 동방신기는 2주만에 음악방송 활동을 마무리해야 했다. 오랜 비즈니스 파트너에 대한 예우로서라도, 아티스트가 바라보는 미래를 걸어갈 있도록 소속사가 신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길 바란다. 


 


우울한 너에게[각주:1] : 또 다른 해나 베이커들을 위하여

-<루머의 루머의 루머> 리뷰 -

 

레몬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내용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즌 1 1화의 첫 장면. 해나 사물함에 해나를 추모하는 사진이 붙어있다.

 

prologue: “안녕, 해나 베이커야."

 

해나 베이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자살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학교에서는 형식적인 추모가 이루어진다. 어떤 이들은 흘러가듯 해나를 잊어간다. 어떤 이들은 이미 해나를 잊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그 마지막 어떤 이에 해나의 친구 클레이 젠슨이 있다. 약간은 멍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클레이는 해나로부터 발송된 택배를 받게 된다. 그 안에는 열 세 개의 테이프가 있다. 첫 번째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재생을 누르는 순간, 죽은 해나의 목소리가 귀 속에 울려퍼진다.

 

 

해나는 13개의 테이프 앞면과 뒷면에 자신이 자살하게 된 경위를 녹음해 두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원작 제목이 <13 Reasons Why>인것도 이 때문이다. 충격에 휩싸인 젠슨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테이프를 듣기 시작한다. 시즌 1의 각 에피소드들은 해나가 녹음한 테이프 한 면의 내용을 따라 펼쳐진다. 테이프의 각 면에는 해나의 자살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들 각각의 이야기가 녹음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클레이와 친구들, 그리고 해나의 부모님은 미처 알지 못했던 해나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이들의 일상에 변화가 시작된다.

 

시즌 1: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가진 엄청난 힘의 원천은 어느 드라마보다 빼어난 심리 묘사다. 해나가 자살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시청자는 해나의 모습과 나레이션을 통해 그 감정의 강도와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우울증을 겪어봤거나 애어른소리를 들어봤던 사람은 조금 더 쉽게 공감할 수도 있다[각주:2]. 아니, 그 정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해나의 감정선은 일상 생활에서 깊은 감정의 부침을 겪을 때 누구나 충분히 느낄만한, (그러나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감정의 흐름이다.

 

자살하던 날, 해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난 뒤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굳은 마음을 먹고 부모님 가게에 가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며 말하기를 포기한다. 부모님에게 자신마저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애어른의 심리. 부모님이 힘든 것이 결국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끔찍한 고독. 해나는 면도칼을 가져가면서도 참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해나가 왜 부모님을 위하려다가 자기 이야기를 못 했냐고 답답해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힘들 때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라는 명제는 생각보다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서 실제로 의지할 사람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당사자가 의지를 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가족과 친구가 수 백 명이 있다고 한들 모두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왜 당사자가 의지를 할 수 없다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해나가 왜 의지를 할 수 없었을까. 해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선뜻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해나의 문제가 아니다.

 

마침내 딸 해나의 테이프를 듣기 시작한 올리비아, 그리고 앤드류 베이커

 

해나는 말을 했다.

해나는 표현을 했다. 힘들다고 말했다. 그냥 그걸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해나는 분명히 힘든 티를 냈다. 해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살려달라 외쳤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소리치고 싶었다. 해나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못하는 이유도 우울증에 걸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는 이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어서 혼자 침전해 간 거라고. 젠장. 왜 다들 죽고나니까 후회하는 거야. 어떤 이의 마음이, 감정이, 아픔이, 극단적인 결말로 치닫고 나서야 그것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들어보려고 하는거야.

 

해나는 말을 했다.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의 얼굴과 몸매를 평가하며 작성한 리스트를 보고 분노했다고. 그리고 그런 해나에게 남자아이들은 꼴에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그래도 네 엉덩이는NICE라고 써 있지 않았냐고. 어쨌든 칭찬인데 좋은 거 아니냐고. 안타깝지만 남자 아이들은 해나의 마음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 성추행으로 이어졌음을 해나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돌고돌아 해나의 손까지 들어오게 된, 얼굴/몸매 품평 리스트

 

그렇지만 해나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그만큼 순진했을 수도 있고, 친구들을 믿었을 수도 있고, 외로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구들은 한결같이 같은 대답을 했다. “어쨌든 칭찬인데 좋은 거 아냐? 다른 애들은 욕도 써 있었잖아.힘들게 털어놓아도 공감 받을 수 없는 상황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외로움과 친구에 대한 배신감. 원망감.

 

 

또 다시 해나는 말했다.

 

자신의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고 있다고. 그러나 엄마는 그런 일들을 해나와는 관련없는 먼 세계의 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해나의 조심스런 구출 요청을 과대망상으로 치부해버렸다. 어렵게 세상 밖으로 나온 해나의 감정은 별 거 아닌 것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가장 믿을 만한 부모님에게 이해 받지 못한 감정을 온전히 떠 안아야 할 때의 외로움.

 

죽기 직전까지도 해나는 말했다.

 

브라이스 워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싶다고. 그러나 상담 선생님과 젠슨을 비롯한 나머지 친구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방어 심리 때문에, 혹은 무지해서, 혹은 둔감해서 해나의 마음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했다. 심지어 오해하기도 했으며 도우려 했으나 제대로 돕지 못했다. 서툰 도움의 손길은 종종 구원이 아니라 공격이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이라면 해나의 수많은 시도가 더욱 애처롭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꺼낸 말이 빈 공간으로 사라질 때의 허무함과 좌절감은 심장을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 푹 꺼지게 만든다. 그 감정. 반복된 좌절로 학습된 그 무력감과 체념.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졌을 때.

 

그 때 해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이 모든 것이 해나를 자살로 이끌었다.

 

해나야, 해나야, 해나야.

 

 

시즌 1 마지막 화, 해나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장면을 나는 아마 절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손목을 긋는 장면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살 장면이 너무 적나라해서가 아니다. 해나가 끝내 삶을 포기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잘 느껴져서 그렇다. 자살하려 면도칼을 손에 쥔 와중에도 너무나 살고 싶어하는 해나의 눈빛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 모든 과정을 돌이켜보며 눈물 흘리는 해나의 얼굴에서 죽음이라는 두려움마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을 읽을 수 있어서.

 

그렇게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해나는 모두의 마음 속에 심지어 나의 마음속에도- 짐이 되었다. 누군가는 죽고 나서야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참 슬프지 않은가.

 

 

시즌 2: 돌고 돌아 다시 추모로.

 

아니, 어쩌면 해나의 주변인들은 나름대로 해나를 도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 나름대로 해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행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방 변호사의 증인 심문을 바라보는 올리비아 베이커와 그의 변호사 데니스.

 

시즌2는 해나의 자살에 대한 학교 측의 책임 여부를 따지는 재판을 따라 진행된다. 시즌 1이 전적으로 해나의 관점에서 펼쳐졌다면 시즌 2는 해나가 언급한 당사자들이 자신의 시점에서 해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해나의 이야기가 공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테이프의 존재가 해나의 부모님께 알려지면서 증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테이프와 관련된 해나의 주변인들이 증인으로 채택되어 하나씩 재판에 출석하고, 학교 측 변호사는 해나의 자살에 대해 학교가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집요하게 증인들을 몰아간다. 이 과정에서 해나가 테이프에서 밝히지 않았던 내용들이 밝혀지게 된다[각주:3].

 

 

너와 나의 이야기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사실적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현실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역설적이게도- 현실 그 자체와 동치시키는 것이 이 드라마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강간 문화,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 문화를 뼛속까지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갑과 을의 권력 관계는 드라마 안에서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돈 많은 백인 남성 은 아시안 남성과 동성애자 남성을 짓누르고, 짓눌린 이들은 또 다시 백인 여성, 돈 없는 흑인 여성, 동양인 동성애자 여성을 억압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폭력과 폭력의 연속이며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악인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은 극도로 악한 사람 한 명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이것은 기득권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무지한 –혹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고자하는- 모두의 이야기이다. 비극은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해나의 죽음도 그렇다. 자신을 보호하려면 (혹은 자신이 즐거우려면) 누군가가 괴로울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감수한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것이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

 

거울: 딱 현실만큼, 아니 현실보다 조금 더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현실 그 자체만큼, 아니 현실 그 자체보다 고통스럽다. 폐부를 찔러오는 고통에 시청 내내 괴롭지만 동시에 그래도 드라마인데, 조금은 ‘드라마다운요소가 나오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쉽사리 멈춤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그 이상한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고집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당신이 그런 고집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이 드라마에 패배한 것일테니.

 

유능한, 혹은 잔인한 학교 측 변호사

 

시즌 2에서 학교 측 변호사는 저렇게까지 해야하나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해나를 걸레로, ‘정신이상자로, ‘썅년으로 프레이밍한다. 학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보는 입장에서는 Come on!’ 소리가 절로 나온다. 변호사가 증인들의 말을 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몰아가는 모습은 너무할 정도로 가혹하다. 학교 안의 무법자들은 학교 안에서나 날고 길 뿐이다. 증인 자격으로 법정 앞에 던져진 해나의 친구들은 법정의 무법자 앞에서 그저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그렇다. 정의구현이라는 말이 너무나 쉽게 사용되지만 뒤틀리고 기울어진 이곳에서 진정한 정의는 구현될 수 없다. 이 드라마가 특별히 잔인한 것이 아니다. 그냥 현실이 잔인한 것이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아이들이 점차 해나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시청자는 한 줄기 빛이 비추지는 않을지 자신도 모르게 기대한다. 사실 그들이 원하는 은 해나와 친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빛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시청자들이다. 한 줄기 빛에 대한 시청자의 바람은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사는 현실의 추악함을 마주하고 어떻게든 회피하고 거부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아니, 어쩌면 결말은 궁금한데 작품을 끝까지 보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함일지도.

안타깝게도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어둠과 어둠과 빛>이 아니다. 재판에서 승소하는 것은 학교 측이고 해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가해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내려 앉는다. 이후 제시카의 증언으로 강간범 브라이스 워커에 대한 재판이 따로 열리지만 역시나 워커 또한 말도 안 되는 형량으로 빠져나간다[각주:4].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새 출발을 위해 전학 갈 준비를 할 것이라며 학교로 돌아온다.

 

해나의 두 번째 추모식

 

그렇게 다시 한 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은 흘러간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드라마 맨 처음처럼 추모로 끝난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즌 1의 추모는 가짜 추모, 시즌 2의 진짜 추모라는 점일터. 추모에서 추모로, 몇 개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남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세상에 녹아들고자 한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인물들의 마음 속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클레이가 시즌 1에서 테이프 대신 라디오를 들은 것처럼, 시즌 2에서 해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상징의 문신을 팔에 새긴 것처럼, 진짜 추모를 통해서 모든 이들은 해나에게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까?

글쎄. 아닌 것 같다. 진짜 추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들은 영원히 해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해나는 그들의 삶 구석에 조용히 서 있을 것이고, 종종 잠잠해지려 노력했던 호수에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과유불급

아쉬운 것이 있다면 결말이다. 시즌 2가 시즌 3을 암시하며 끝나는데 굳이 시즌 3을 만들어야 했을지. 시즌 3까지 나온다면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아니라 <비극의 비극의 비극>일 뿐인데. 게다가 해나의 이야기로 시작했다면 해나의 이야기에서 적당히 끝맺음을 했어야 할텐데 초점이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져 간다. 어쩌면 해나가 주인공이었던 것은 시즌 1에 불과했고, 시즌2는 해나의 친구들이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시즌 3에서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비극이 사회에 미치는 여파가 이렇게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총기난사까지 넣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을지. 시즌 3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다. 또 과하다. 그래서 지친다.

 


해나의 다양한 추억이 담긴 영화관 crestmont. 글의 주제에서 어긋나기에 서술하지 않았으나, 작품의 영상미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긴하다.

 

epilogue: 또 다른 모든 해나 베이커들에게

 

시즌 2에서 다른 인물들의 속사정을 들을 수 있다할지라도 내게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어찌됐든 해나 베이커의 이야기다. 해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해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해나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 해나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막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해나와 함께 상처받은 시청자들에게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따뜻한 위로 한 마디 조차 건네지 않는다. 에피소드 시작 전에 우울증, 자살, 폭력 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있으니 시청자의 주의가 요구된다는 자막을 내보내는 것과 각 배우들이 나와 드라마를 소개하면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드라마 홈페이지(http://13reasonswhy.info)를 방문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이 작품이 베푸는 최고의 친절이다

그렇지만 지금 바로 내 옆과 뒤, 혹은 내 안에 또 다른 해나 베이커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수도 있다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면 도움을 청하는 게 맞는 거라고, 혼자 감당하느라 버거웠을텐데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것이 어떤 해나 베이커들에게는 필요하다. 크나큰 위로가 된다. 그래서 또 다른 모든 해나 베이커들에게 다음 노래를 바친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전해주지 못한 위로를 담아.

 

 

 없는 사랑은 진실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두려운 믿음은 너를 지치게 할 것도 알잖아

여전히 내딛고 있는 그 마음을 돌려

때론 행복은 내겐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고

허전한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때

여전히 힘들어 하는 그 마음을 돌려

 

너도 가끔씩은 그런 네 모습을 벗고 싶겠지

때론 누군가가 벌여놓은 장난인 것 같겠지

하지만 그렇지않아

하지만 그렇지않아

 

원하지 않는 아픔이 내 맘을 조여왔었다는걸 잘 알잖아

그 맘은 나도 잘 알아

돌이킬 수 없이 너무도 멀리 돌아와 이제는 힘들거라고

오늘을 그저 보내고

세상은 너무 외롭고 나 홀로 남겨진 사람이라고 느낄 

그럴 땐 돌아서 내 손을 잡아주기를, 내게로 돌아오기를

 

메이트 - 우울한 너에게


  1. 메이트의 노래 <우울한 너에게>에서 따왔음을 밝힘. [본문으로]
  2. 오히려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이 드라마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 드라마 각 에피소드 시작 전에도 이를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3. 시즌 2가 시즌 3을 암시하면서 끝나는데, 굳이 시즌 3을 만들어야 했나 싶다. [본문으로]
  4. 제시카의 증언 장면이 시즌 2 최고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제시카의 경험은 제시카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여성의 것이다. 내가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문으로]

Love Letter #1: 여인들의 초상[각주:1]





사이숏






하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를테면 A B처럼. A B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평범한연인이다. (물론 A B 다자간 연애를 지향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A B 차이는 너무나 결정적인 탓에 둘은 자주 어긋나기도 하는데, A 애초에사랑하는 관계라고 하는 것을 번도 의심해 적이 없는 반면 B 그것을 끝없이 심문에 부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성과 그것의 필연적인 변화(변화는 예정된 필연의 다른 이름이므로,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앞에서, A B 각각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상의 흐름과 변주, 사랑의 운동성에 순응적이고, 사건의 다른 ()실현 가능태들에 열려 있으며, 따라서 예측하기 어려운 앞으로의 변화들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있는 쪽은 단연 A이다. A사랑하는 남녀의 영원한 결합이라는 근대의 신화로부터 자유롭다. 삶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A 목적은 오직 다가오는 기쁨을 맞이하는 것이며,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한 세계와의 접속과 무한한 승화 가능성을 꿈꾼다. 그렇다면 B? B 사랑에 대해 훨씬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전망을 내세우길 좋아하지만 기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거대한 형이상학적 충동(혹은 반동)이다. 단지 순간 속에 머무르며 영원처럼 살기를 욕망하는 B A와는 반대로 한없이 역행하고 퇴보하는 쪽에 가깝다. 마치 거울 속의 그것을 바라보는 마술적으로 상응하는 모습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거울 단계의 어린아이처럼, B 사랑(또는, 후술하게 사랑의 이념’) 구조적 폐쇄성과 그것이 구현하는 ()완전함을 믿는다. 말하자면 B, 사랑 앞에서 계몽주의자의 탈을 열성 신자가 된다[1].









 

[1] 레이디 가가의 데뷔 앨범 수록곡 Teeth」의 가사 일부이기도 하다. (출처: anonymousartofrevolution.com)




, ‘사랑이라는 낱말이 지니는 헐거움, 혹은 불충분함에 대해 생각한다.[각주:2] 내가 방금 글자에다 따옴표를 둘러쳐야만 했듯이, ‘사랑 다만 욕망과 친밀성의 어떤 대타적인 양식들을 비끄러매기 위한 수사적 갈고리에 불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사랑 삭제하거나 대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기에, 사랑을 찬미하고 저주했던 수많은 연인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울림이 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남기고 무수한 사랑 이야기의 존재는 사랑을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기 위한, 사랑이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속화되는 것에 저항하고자 했던 처연한 기록의지[각주:3] 증거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A B, 그러니까 당신과 나를 위한 글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당신에게 들려줄 있는 것은 사랑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고작이므로, 나름대로사랑 우회하고자 했던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시도의 흔적은 언제까지 수취인 불명으로 남을 것이다.



이곳은 드레스 룸으로 보이는 공간[2]. 예상 가능한 가지 시나리오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오가는 상황이다. 웨딩 가운을 반쯤 걸친 채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항변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소리친다. 그럼 어디 증명해 ! 전날 밤의 섹스가 주는 여운이 가시고 의혹과 냉소, 질투 따위의 해묵은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할 ,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는 이미 안팎으로 위협에 처한 사랑의 현실을 반영하기에 뼈아프다.




 

[2] “I love you!” “Prove it!” (MISS DIOR - The new Eau de Parfum 영상 중에서)



한편, 질주하고, 밀쳐내고, 환희하는 여자의 매혹적인 움직임을 연출하는 낭만화된 사랑 서사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관객들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 익숙한 여배우의 얼굴이 있다[3]. 그녀가 입을 연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있나요? (이때, ‘연인을 위해 아닌사랑을 위해라는 어구에 주목하길 바란다. 사랑에 빠진 이는 자신의 연인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이 관계항으로서 종속되어 있는 3 대상에 봉사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랑의 이념이다. 주지하다시피 사랑의 이념은 자주 숭고한 , 무조건적인 , 심지어 성스럽기까지 것을 표상하는 대중적 이미지들로 재현되곤 한다. 설령 정체가 이데올로기적이며 허구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랑을 예찬하고 이를 향유할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보다 다층적인 양태(modal) 물음이 함축되어 있는데, 같은 질문을 다음과도 같이 고쳐 물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혹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환언컨대 사랑은 당위성의 영역인 동시에 가능성의 영역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현재성, 러니까지금 여기 영역이다.



 

[3] “And you, what would you do for love?” ([2] 같음)



아이러니하게도 당신과 사랑을 나누게 이후 나를 곧잘 절망감에 빠뜨리곤 하는 사실은 바로 같은 사랑의 교차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에 있다. 존재론적 합일과 조화로서의 사랑의 이념은 일체의 특수적인 것을 초월하도록 상정되지만, 사랑을 위한 어떤 실천도 우연적이고 장소-한정적인 조건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역설. 이를 통해사랑의 본질이란 것을 재건해 있다면, 사랑은 당신과 나로 하여금 운명의 주인이자 영혼의 통솔자로 세상을 군림하게끔 만들어 주는상승의 사다리 아니라[4], 오히려 통제할 없는 상황들의 돌발적 연쇄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 가면서, 모든 도래하는 사건의 폭력(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 앞에 나는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속수무책으로 해제되고 파편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만을 점지해 뿐이다.


 

[4] “’Cause we’re the masters of our own fate / We’re the captains of our own souls / So there’s no need for us to hesitate / We’re all alone, let’s take control / And I was like…” (라나 레이의 Lust for Life 뮤직비디오 중에서)



이렇게 재건된 사랑의 본질을 염두에 , 관객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향한 에로스의 몸짓으로 충만한 이자벨이 어찌하여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쟁취하려 들지 않고행운의 방문했던 것인지[5], 신경증적 불안에 잠식된 가엾은 영혼 지니는 자기 환상에 배반당한 불운의 파토스를 그토록 열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비로소 납득하게 된다[6]. 이자벨과 지니는 앞서 말한예감 가지 상반된 극화 방식을 보여 주는 인물들이다. 이자벨이 미지의 앞일을 점쳐 과거의 인연과 결별하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했다면(‘마음의 준비’, 아마도 이것이 그녀와 나에게 주어진 최선책일 것이다), 지니는 어느 마을(코니 아일랜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남편의 친딸과 자신의 애인이 정분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현실화되자 폭주하는 광기와 뒤틀린 욕망의 성난 불길이 스스로를 집어삼키게끔 내버려둔다. 사랑 앞에 누구보다 무방비한 이들이기에, 이자벨과 지니는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모종의 애틋한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사랑의 실현 또는 부재를 둘러싼 문제는 개별 관계항으로서의 당신과 나의 독립된 의지와 자유 너머에 있으며, 따라서증명해 보일 있는 ’, 실증적인 차원과는 더욱 거리가 것이다.


 

[5] 환멸과 배신의 경험을 반복한 끝에 점쟁이(fortune teller) 남성을 찾아간 이자벨(줄리엣 비노쉬). 우습게도 관객들은 남성 또한 실연의 고배를 마신 전적이 있음을 바로 직전의 신을 통해 알게 된다. (영화 Let the Sunshine in」의 엔딩 시퀀스 중에서)




[6] 애인과 연적을 향한 불타는 질투심은 지니(케이트 윈슬렛) 히스테릭한 추락을 부추기고, 그녀는 끝내 줌의 재로 화하고 만다. 아마도 지니는 내가 아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사랑스럽고 경멸스러운 여인일 것이다[각주:4]. (영화 Wonder Wheel 중에서)



사랑은 많은 경우 무질서하고, 때때로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징후들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결코 발화하지 못하는 폭력의 외상과 닮아 있다. 이것은 사랑이 자기 존재 증명에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따라서 언제나 위협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이는 당신과 나를 대칭적으로 결합시키는 관계 맺음의 안정적인 토대가 사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각주:5] 사실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라, 타인과 맺는 모든 관계들이 실상은 그러하지 않은가?) 이러한토대 없음 조건 아래서, 사랑의 윤리적 형식은 어떻게 마련될 있는가? 또한, 어떤 형태의 근거 지음도 없이 사랑의 지속성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없는 물음들이다. 결국 시공간적 유한자로서의 당신과 내가 만끽할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부표들 간의 마주침에 지나지 않으며, 뿌리 잃은 부표에게는 오직 흔들림[, 혹은 나부낌]만이존재 이유[각주:6] 것이기에.


자기 초월과 존재 일치를 경유하여 당신과 (다시) 하나-되기를 꿈꾸는 나의 은밀한 바람 속에는 다분히 플라톤적 색채를 띠는 회귀주의의 망령이 깃들어 있다[7]. (정작 플라톤은 이것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랑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노스탤지어는, 실제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실체 없는 대상을 그리워하는 행위라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하나에서 둘로의쪼개짐 불가피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분화(또는 분리) 과정, 이행은 자체 완전할 없는 까닭에(아니, 문장은 필히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글에서우리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는가? 니체의 논의를 빌리자면, ‘하나에서 둘로의 쪼개짐 단지 문법적 습관의 구성적 효과에 지나지 않은우리라는 주어에하나’(One)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신기루를 덧입힌다), 거기에는 끊임없는 내적 불화와 온갖 잡음들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거울 단계의 어린아이가 상상계적 환상에서 벗어나 상징계적 질서로 진입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가령 주의 끝에서 당신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 , 나는 하나-되기와 -되기 사이에서 수도 없이 진동하며 이미 셋으로, 넷으로 분열하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내가 결코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이질적인 무엇이 당신과 함께 머무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사람이 다른 이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연인 관계에서조차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경험은 폭력에 가까울 만큼 나를 뒤흔들어 놓곤 한다.

당신으로 인해 삶의 의미와 활력이 모두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고백한 데는, 단언컨대 조금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다.




[7] 플라톤의 『향연』 4 「에로스」에 등장하는 쌍체 인간(hermaphrodite) 신화를 극화하였다. 아주 오래 당신과 나는 본디 몸을 이루고 살았으나, 번개 신의 형벌을 받아 신체적인 분리를 겪게 되고 언제고 다시 합치되기를 갈망하는데, 이것이 바로사랑의 기원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육체적 사랑의 한계를 지적하고 정신적 사랑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영화 Hedwig and the Angry Inch」의 수록곡 The Origin of Love」의 극중 애니메이션 중에서)


이쯤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전환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 보길 바란다[8].


사랑의 급진성은 일상적으로 여겨지는 바와 달리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결정적으로 지워 버리는, 다른 존재에 대한 배타적인 지향성에 있지 않다. 오직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Beyond Good and Evil, 1886)에서 보여 주었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하면서 행하는 것이므로 야만적 행위의 일부이다. 그러나 니체가 아포리즘에 추가하고 있는 ,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점은 종종 잊혀진다. 혁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혁명이 우리의 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인도주의적인 이상으로 선언될 있더라도, 사실상 다른 모든 이들을 희생함으로써 (굴라그 등으로) 실행될 수도 있다. 진정으로 급진적인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알랭 바디우의 말대로 사랑은최소의 코뮤니즘형태이다. 사랑은 사람을 위한 코뮤니즘이다. 그러나 사랑은 코뮤니즘만큼 도달하기 힘들고, 종종 코뮤니즘처럼 비극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혁명처럼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다.

물론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중략) 사랑과 혁명 사이의 영속적인 불화 (후략) 교착 상태는 어느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둘의 결합으로만 해결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각주:7]


[8] 위와 같은 호르바트의 진술은 사랑에 관한 생텍쥐페리의 유명한 잠언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출처: gaytwogether.com)


둘의 결합 갖는배타적인 지향성 극복하고, 내가 당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당신은 나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을 추구하는 에로스의 경험, 소위사랑의 재발명 요청하는 담론과 이론이 산개해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도 결국 말과 말을 대결시키고 속에서 내가 철저하게 부서지기를 의도하는 지난한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끝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나는 번이고사랑 다시 쓰고 고쳐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서로의 골을 맞대던 ,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아니면, 나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았던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오염된 언어가 당신의 입에서 황망히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서 나는 환멸과 동시에 우스꽝스러움을 느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각주:8]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을 때쯤에는 천천히 베갯잇을 적시기 시작했다.


다음은 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인용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그에 대한 단상이다[9]. 영화는 사랑의 지속 ()가능함의 조건이 당신과 나에게 강제할 있는 여러 위기들과 관련해 가지 가능한 대응 방식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들의 역할로 남는다.


 


[9] 엘마(비키 크리엡스) 거칠고, 고집이 세며, 예의나 교양이 부족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속한상류 사회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Phantom Thread 중에서)



너무나도 상이한 경험 또는 지각 방식,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거듭된 충돌 속에서 마침내 관계 자체가 내파할 위기가 그들을 찾아왔을 , 사랑을 보전하기 위해 엘마가 취한 선택은 일견 폭력적인 , 심지어 귀기 어린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레이놀즈가 침상에서 그녀의 간병을 받을 별안간 나타난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영(phantom) 떠올려 보라.) 아마도 다수 관객들은 엘마가 사랑을 쟁취하는 방식에 순전한 동의나 지지를 보내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저녁 식탁에서의 격앙된 대화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내심 그녀가 일말의 가차나 미련도 없이 레이놀즈로부터 떠나가 주길 바랐었다. 그러나 그가 사귀어 과거의 숱한 애인들과 독보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였던 그녀는, 그러한 패배주의적인 기대와 예상을 단번에 좌절시켜 버린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의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엘마는 레이놀즈에게 먹일 독버섯 요리를 준비하는데, 이때 그녀는 그가 느끼한 음식을 질색하는 알면서도 천연히 그것을 버터에 볶는 과정을 보여 준다. 엘마는 레이놀즈가 오로지 자신의 안에서 쓰러져 주기를, 그리고 바로 자신으로 말미암아 강인함을 되찾게 되기를 원한다. 사실 지금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취약성을 독점하고 그에게 치유의 권능을 행사하려는 욕망에 대한 엘마의 고백이 그렇게 섬뜩하거나 엽기적으로 들리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판단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1. 이 글은 영화 「Let the Sunshine in」, 「Wonder Wheel」, 「Phantom Thread」의 결말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본문으로]
  2. A와 B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범죄나 계약과 같이 사랑을 성립시키는 보편적 조건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면, A와 B는 무엇에 의지해서 자신들의 사랑을 선언할까? 적어도 A가 B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B가 A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A의 ‘사랑한다’와 B의 ‘사랑한다’는 서로 동일한 의미론적 값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단어의 용법과 용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사랑’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통일되어야 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A의 ‘사랑한다’와 B의 ‘사랑한다’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랑하는’의 결격 사유가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위 결론에 따를 경우 A와 B는 서로 간에 결코 소통될 수 없는 문장과 몸짓, 즉 단절과 균열의 징후들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를 이해한다고 열심히 착각하고, 또 착각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와 존재의 심연은 사랑의 증명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숱한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3. “시가 여전히 아름다움에의 기록의지라고 믿는다”던 김선우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였다. [본문으로]
  4. 만약 다음에도 지면이 허락된다면, 나는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나무를 위해 기꺼이 숲을 희생하는,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죽으라고 하면 보란 듯 몸을 내던지는 전혀 ‘미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쓸 것이며, 이 예술 장르의 이름은 가장 에고-트립한 비극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5. 사랑은 언제부터 정상 연애 및 결혼의 역사와 교섭하게 되었는가? [본문으로]
  6. 심보선, 「나의 댄싱 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본문으로]
  7.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pp. 123-124, p. 133. 호르바트의 저작이 ‘두 사람을 위한 코뮤니즘’ 형태로서의 사랑 개념을 제안한 바디우의 『사랑예찬』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정치(여기서는 ‘혁명’)가 사랑과 맺는 ‘영속적인 불화’ 관계에 대해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본문으로]
  8. ‘너’를 ‘사랑한다’는 ‘나’의 말하기는 ‘나’가 사랑한다고 믿는 이, 즉 ‘너’와 그 외 낯선 타인들에 대하여 ‘나’의 사랑(혹은 믿음)을 재확인시키고자 하는 자기 선언적 행위이며, 미래에 대해 어떤 효력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의미 없고 무력한 언약에 다름 아니다.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