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 아끼던 현대 미술관에 대한 단상들 1
르네오
0.
나는 미술관이 좋다.
정확히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 MMCA나 서울시립미술관처럼 크고 넓은 곳일수록 가는 길에서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잔뜩 기대하고 찾아간 현대미술관은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어준다.
내가 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간단하게 설명하는 일은 명절에 친척들에게 또는 택시 운전사에게 미학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설명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책이나 수업에서, 운이 좋을 때는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좋아하는 작품들, 어떤 작품이 왜 좋았고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설득하는 비평의 작업들, 더 넓게는 작품을 미술사적 이론이나 미술 밖의 이론을 적용하여 의미화하고 맥락화하는 미술 담론들. 모두 나의 관심의 대상이고 앞으로 계속 배우고 느끼고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은 것들이다. 그렇지만 내가 현대미술과 미술 이론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미술관에서 내가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설명하려 하다 보면 어딘지 딱 들어맞지 않고 무언가 새어나가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미술관에 직접 갔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일련의 과정들, 감각적 경험과 생각들의 총체가 좋다. 직접 그 공간 속에서 발에는 통증을 느끼면서 주변의 다른 모든 배경과 맥락들(다른 작품들까지 포함해서) 사이에서 실제로 공간을 차지하면서 놓여 있는 작품들을 보고 거니는 경험이 좋다. 그런 경험을 한 이후로 그 공간은 내 공간이 된다. 그러면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어느 날 불현듯, 아니면 비평문을 쓸 만한 작품이 있나 의식적으로 기억을 되돌려 볼 때면 바로 그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졌던 경험들이 - 그때의 감각과 장면들, 스쳐갔던 생각들이 - 재현된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의 합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각 미술관이 그 건물의 전체 구조와 작품들을 통해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 작품들을 특정 담론이나 비평을 통해 의미화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큐레이팅 방식 등이 미술관의 컬렉션만큼이나 그 미술관에서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야말로 각 미술관이 스스로에게 어떤 역할과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공간 자체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만드는 고유한 특성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1.
작년 하반기 네덜란드로 교환을 가 있던 동안, 그리고 혼자 오랜 시간 여러 도시들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서울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아주 많은 미술관들을 가보았다. 특히 교환을 가게 된 대학에서 미술관학/ 박물관학(Museology) 수업을 들었던 11월에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현대 미술관들을 도장 깨기 하듯이 혼자 열심히도 찾아다녔다.
미술관학은 미술관의 제반 활동들의 목적과 실현 방법들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미술관은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개별 작품과 작가에 대한 비평이나 미술사적 담론들, 예술 철학만 접해보았지 ‘미술관’이라는 실제 공간이자 제도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나에게 필요한 공부다, 하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강 신청을 했다.
기대와는 달리 실제 수업은 실용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네덜란드의 경우 (아마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예술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활동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미술관 역시 공적 보조금과 정책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예술을 위해 (특히 네덜란드 미술관의 방문객은 학생이나 3, 40대의 비율이 매우 적고, 부유한 노년층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공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점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전시 방식과 이벤트성 행사들을 활용하여 다양한 층의 관람객들을 끌어들이고 어느 정도의 수익성을 확보함으로써, 미술관의 공적 가치를 증명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공적인 것’이 단순히 얼마나 많은 수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지의 문제라는 생각, 그리고 수익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통해 미술관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에 대응하겠다는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많았다. 이 수업에서는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 예술이 사회에서 갖는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모든 예술은 즐겁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험 경제에서의 상품의 일종으로 동질화되고 경제와 실증주의의 논리에 따라 재단 되고 수단화된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토론들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었고, 참여할 의욕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수업에서 말하는 것들 외에 미술관에 대해 어떤 말들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넘쳐나는 여유시간 동안 미술관을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습관이 시작되었다. 당일치기라고 해도 기차와 버스를 타고 3-4 시간 걸리는 곳들이었지만 그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즐거웠다. 한 달 남짓한 그 기간이 어쩌면 관심이 가는 무언가를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시간을 바쳤던 기간인 것 같다.
그때 갔던 많은 미술관들 중 몇몇에 대해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작품 소개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다. 전시 기획이나 미술관학적 관점에 따른 분석이라고 장황하게 말하기에도 어려운 소소한 경험담이다. 미술관이란 작품을 포장하고 정리해두는 용기나 빈 공간으로서의 역할 이상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주려 시도하는 미술관들 (그러한 시도의 방향이 나의 생각과 같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야기할 거리들이 있는 곳들)에서의 나의 경험과 두서없는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2.
마스트리트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아인트호벤 Eindhoven이라는 도시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 미술관들 중 하나라는 (마침 작년이 설립 80주년이었다) 반 아베 Van Abbe 미술관이 있다. 아인트호벤 자체가 한적한 도시인데 미술관 건물이 전시 관련 포스터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채 주택가에 위치해 있어서 처음에는 지나치면서 미술관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미술관학 수업에서 한 번 단체로 가게 되었고, 미술관 규모도 크고 기획 전시도 자주 바뀌는 편이라 그 후에도 몇 번 더 찾아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건물이 미술관인지도 몰랐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건물의 형태는 적어도 공연장이나 문화공간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는 비정형적이고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기하학적인 구조물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회색 건축물이 보이고 그 앞에는 작은 연못이 건물의 형태를 비춘다. 연못 바로 앞에는 투명한 유리 벽 안으로 비치는 모던한 느낌의 카페가 보이고 야외 테라스도 있다. 건물 내부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금 내가 몇 층에 있는 건지도 헷갈릴 만큼 계단과 복도들이 비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각 층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열린 구조여서 다른 층의 공간들도 부분적으로 볼 수 있고, 건물의 꼭대기까지 천장이 뻗어 있어 안 그래도 넓은 공간이 더 넓게 보인다. 의도적으로 전시실 벽면에도 넓은 빈 공간을 뚫어 옆 전시실에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반 아베 미술관은 개방적이면서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건물 구조를 활용하여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모든 층에서 보이는 넓고 높은 벽면에는 웃음소리인 HAHA의 철자 모양으로 화려한 색의 조명들이 깜박이며 빛나는 대형 오브제로 설치되어 있다. 또 다른 벽면에는 댄 퍼잡스키 Dan Perjovski의 낙서화 작품이 그려져 있다. 퍼잡스키의 작업은 쉽고 단순한 낙서로 사회적 문제를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인데, 그림 하나하나를 액자에 넣어 전시하는 것보다 이렇게 넓은 벽면에 정말 낙서처럼 그려 넣은 것이 더 작품의 취지나 분위기와도 맞고, 건물의 구조를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서로 다른 층이면서 교차하는 방향의 두 복도에서는 각각 한 남자와 여자가 단순한 선율을 반복하면서 (마치 계란말이 김칫국 아카펠라처럼) 화음을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도 정기적으로 상연된다.
이처럼 반 아베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관람자에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한 번에 한 작품씩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보다는 조금은 산만하게 공간들을 누비고 다니면서 여러 작품들을 동시에 마음대로 연결하고 뒤섞어 경험할 수 있는 떠들썩한 공간을 만들고자 의도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열이라면 열 사람 모두 저마다 다른 동선과 시선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돌아갈 것 같다. ‘이 전시에 정해진 순서나 방법 같은 것은 없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찾고 연결하고 즐겨라!’ 미술관의 공간 전체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 공을 들인 것 같은 1층 아카이브 전시실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반 아베 미술관은 꽤 넓은 공간을 관람자가 직접 사진과 포스터 작업들을 미닫이 서랍장에서 꺼내어 볼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작업들을 골라 벽면에 전시해볼 수 있는 DIY 아카이브 전시를 위해 쓰고 있었다. 더 안쪽에는 영상 작업들을 직접 고르고 앉아서 볼 수 있는 작은 상영관이 있었다. 여기서는 여유만 있으면 몇 시간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미술관 로비에는 관람자가 미술관 건물이나 전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배치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의 예를 들면, 미술관의 주요한 장소들을 다른 위치와 시점에서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가이드와 함께 관람자 스스로도 새로운 위치들을 발견하고 기록함으로써 공유할 수 있는 툴키트가 있었다. 그야말로 자유롭게 내 맘대로 관람할 수 있는 DIY 미술관!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 누구나 각자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비획일적인 공간. 그래서 작품들과 전체 공간을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보고 조합했을 때 어떤 새로운 의미나 경험의 지평이 열리는 것인지 궁금해지지만 그에 대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논의도 제시하지 않는 점이 조금 찜찜한 느낌 – 어쩌면 특정한 관점에 따라 의미화하고 주장을 하는 일 자체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이야기들만 떠다니는 느낌 – 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곳의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다 지하에서 발견한 한 작은 전시실은 반 아베 미술관이 내세우는 기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 지나침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였다. 멀리서 보이는 전시실 안에서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마도 작품인 것으로 보이는 오브제들을 만지며 놀고 있었고, 몇몇 어른들이 팔짱을 끼고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 엿들어보니 미술관에 전시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관람자는 만져볼 수 없고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누구나 (특히 아이들이나 시각장애인 등 기존의 미술관 전시에서 관람자로 고려되지 않고 시각예술의 향유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 만지고 즐길 수 있는 작업들을 모아두었다는, 그런 취지의 전시실이었다.
우선 그 안에 있는 작품들이 적어도 어떤 작가의 예술작품이 맞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단지 아이들의 감각 교실을 위한 재료들처럼 보여서 기획자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인 대상들과 구별할 수 없는 대상도 비평적 의미화를 통해서든 제도를 통해서든 예술이 될 수 있다고들 하지만, 이 작품들에 그럴 만한 역사적 의미나 숨겨진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작품들을 이리저리 만지고 갖고 돌아다녀 본다고 해서 그로부터 우리가 미술관에서 찾고 기대하는 경험들 - 비일상적인 감각의 경험, 새로운 지각과 사유를 하게 되는 경험 –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DIY 아카이브니, 툴키트니, 심지어는 이런 감각 체험 교실 같은 전시를 기획하면서 미술관 측에서 스스로 누구나 예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공공성과 다원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만족스러워할 상상을 하니 답답했다. 분명 그들이 하는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미술관이 왜 소위 교양과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춘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시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의미를 갖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지향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직접 작품을 만져보고, 자기만의 아카이브를 만들어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건물을 누비고 다니는’ 등 보여주기 식의 형식적 참여를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고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Do It Yourself라는 반 아베 미술관의 기조는 획일적인 상품을 소비하는 단계를 넘어서 직접 부품들을 선택하고 조립할 수 있는 대상을 통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소비하는, 경험 경제의 소비 행위와 너무나 닮아 있다. 미술관은 소비자-관람자가 각자 취향에 맞는 맞춤형 관광상품을 즐길 수 있도록 상품-작품들로 꽉 찬 공간을 열어 놓는다. 여기서 예술이 소비의 대상이 되고 미술관에 경험 경제의 논리가 도입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형식적인 참여와 다원성을 최종 목적으로 두는 미술관에서는 공통의 사회적 담론이나 문제의식, 가치판단에 관한 주장들이 모두 필요 없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관람자가 개인적 의미를 갖는 자기만의 경험을 구성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숨겨지고 지워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예술의 사회적 의미나 가치에 대한 주장들을 오히려 사장시키는 미술관이란 결국 미술관의 역할을 단순히 공간을 구획하고 작품을 늘어놓고 관람자에게 모든 해석과 의미화를 맡겨두는 텅 빈 공간으로 축소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반 아베 미술관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소비하고 싶을 만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스스로 생각하는 ‘공공성’을 얻기 위해 어떤 가치판단이나 주장도 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결국에는 경험의 소비만이 일어나는 텅 빈 공간을 내세우고 있는 것 아닐까?
(2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