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P PICK - 키워드 ‘시작’>





푸른수염 :

조르주 멜리에스, <달세계 여행>,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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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의 시작점에 위치한 작품들 중 가장 아끼는 영화. 사람들이 우주선을 뚝딱뚝딱 만들어서 달에 도착하지만 달에 사는 외계인들에게 된통 당하고 지구로 다시 돌아온다는 매우 귀여운 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 있으면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 상상력이 구현된 결과물은 더더욱 사랑스럽다.




이르름 :

어퓨 물광 틴트 CR01_덜익은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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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끼와 낮은 채도가 안 받는 나는 주구장창 쨍한 색을 발라왔다. 하지만 이제는 발랄함만을 추구하는 것을 멈춰야할 때…… 자연스러우면서 차분한 덜익은자몽과 함께 나의 이십대 중반이 시작되었다.



네이버웹툰 <계룡선녀전> (글/그림 돌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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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늘어난 몇 안되는 것을 꼽아보자면 nerdy함을 빼놓을 수 없다. 오랜 인연의 시작점을 찾아가는 선녀의 전생과 관련된 사람들이 (하필이면) 대학 교수와 대학원생들이기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은 너디함이 느껴지는 유머를 맛볼 수 있다. 따뜻한 그림체와 귀여운 캐릭터들은 덤!




레몬밤 :

하이라이트 - 시작 ♬


‘시작이 설레지만은 않을 그대들에게’


하이라이트의 첫 번째 미니앨범 “Can you feel it?”의 수록곡.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가사처럼 보이지만, 오랫동안 함께했던 ‘비스트’와 이별한 뒤 새 이름으로 시작해야 했던 이들의 마음이 담긴 노래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것을 두고 새 시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다. 변화와 시작이 조금은 두렵지만, 웃으며 옛 것을 추억할 수 있도록. 특히 용준형의 담담한듯 담담하지 않은 송랩이 일품.




왕수박 :

Perfume - One Room Disco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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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거주 단위인 ‘원룸’은 새로운 시작을 앞둔 젊은이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혼자 살기 시작하며 느끼는 설렘과 두려움. 모든 고민을 떨쳐내고 원룸에서 디스코를 춘다는 가사는 우리 모두의 풋풋하고 또 힘겨웠던 시작을 응원한다. 새학기 즈음 일본 음악방송에 단골로 등장하는 오리콘 1위 넘버로, 16비트의 단순하지만 웅장한 인트로 드랍 이후 반전되는 청량한 디스코 사운드가 매력포인트.


DAY6 - 아 왜 (I Wai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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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한 순간. 음악을 파는 그룹은 수명이 길다.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상술로 만드는 탄탄하고 두터운 디스코그래피가 있다면 금상첨화. 공연 수익은 더욱 장기전으로 간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돌 보이밴드의 형식을 빌어 새로운 셀링포인트를 모색하는 밴드가 있다. 모던 락을 내세우던 기존 타이틀에서 벗어나 대중성을 한껏 가미한 편곡과 멜로디로 2017년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린, 첫 싱글 다운 첫 싱글. 아 왜 더 잘안됐을까. 아 왜…






이제로 :

다음웹툰 <두번째 집> (글/그림 우현)



관계의 시작에 관한 웹툰. 그림체도 화려하지 않고, 대사도 거의 없으며 박진감 넘치는 서사도 없지만 시선과 침묵, 그리고 빛이 그 모든 것을 압도한다. 작가는 이제 막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예민하게 그려낸다. 또한 작가는 상당한 수준으로 빛을 묘사하는데, 빛의 온도차로 그만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특기인 듯하다. 감성적인 웹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추천!




방탄소년단-Save Me (2016)



필자가 방탄소년단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다. 방탄소년단 특유의 애절한 분위기가 폭발하는 곡. 사운드, 가사, 보컬 어느 하나 애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떨어지기 전에 그 손을 내밀어달라는 그들의 외침은 귀에, 그리고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황량한 벌판 위에서 처절하게 춤추는 그들의 원테이크 퍼포먼스는 덤이다. 2016년 10월, Save me M/V를 클릭함과 함께 내 덕질인생도 시작되었다.






Kㅏ구 :

스니커즈 맥스(高) 카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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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정판 + 은색 포장지

2.카카오 ‘MAX/高’함량이 주는 다크 초콜릿 풍미! 약간의 씁쓸함이 지나친 단맛을 중화.

3 ... 알잖아요 초코바 맛있는 거 이건 더 맛있음.


  누군가의 작업은 한 밤중에 시작한다. ‘시작’이 조금 늦은(?) 이들에게 바치는 PEEP PICK템. 사실 우리도 알고는 있다. 밤은 새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밤새 붙잡았던 일들은 실상 몇 시간 전의 자신이 (그것도 더 효율적으로) 끝낼 수도 있던 것이고, 밤새 불태운 모든 덕질에는 타인의 인정이나 금전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밤샘이란, 다 알면서도 빠져드는 개미지옥 같은 것.

 이러한 ‘밤샘 작업’들은 ‘초코바’라는 비상식량을 먹어야만 하는 명분으로 삼기엔 소박하고 염치없지만, (초코바가 무엇인가. 그 태생은 체력 소모가 심한 운동을 하거나, 전투 중 제대로 식사하기 어려운 군인들이 먹는 비상식량이 아닌가) 그래도 밤새 당 떨어진 자신에게 맥스 카카오를 먹여 보면 어떨까. 꾸덕하고 달달한 이것을 우물대는 순간만큼은 한명의 치열한 생존자가 될 것이다.

 맥스 카카오는 구하기도 쉽다. 한정판이라더니 필자 눈에 띈 것만 몇 달 째이다. 한정판이라면서 한정판이 아닌 초코바. 어디에서는 ‘MAX CACAO’고, 어디에서는‘最高の カカオ’인 이름. 폴리페놀 향(?)이 나는 맛있는 고칼로리 초코바. 늦은 시작을 앞두고 자조와 환멸이 교차할 때, 내일의 피폐함이 두려울 때. 이럴 때에는 맥스 카카오를 한 손에 쥐고 앙 베어 물자. 우걱우걱 씹어 삼키자. 이 이율배반적이고 맛있는 것을. 오늘도 누군가는 밤을 지새운다.



예청그릴스 :

FKJ- Instant Need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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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은 종종 특별한 한 곡에서 시작된다. FKJ의 Instant Need 역시 바로 그런 곡. “Take me in yours ~” 라고 몇번이고 외쳐대는 절절한 가사와 멜로디는 당시 실연의 아픔을 음악으로 이겨내던 누군가의 달팽이관을 후벼팠더랬다. FKJ의 뜻을 알고 나면 더욱 충격적인 이 아티스트는 올해 한국에 온다. 아싸!




르네오 :

박우진 춤 영상 'Crush'




  돌이켜보니 본격적으로 우진이 덕질을 시작하게 만든 영상. 프로듀스 101 무대를 가벼운 마음으로 보다가 섹베오레(십점 만점에 십점 무대) 장면을 보고 충격 받아서 누군지 검색해봤는데 정보도 거의 없고 당시 방송에서 그렇게 주목을 받는 연습생도 아니었어서 떡밥이랄게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관심이 덕질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와 이 사람 너무 좋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만든 영상. 워낙 춤을  좋아하고 오래 춰 온 사람이라 youtube에 과거 춤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다. 긴 팔이 돋보이는 의상을 입고 팔을 휘적거리고 흐느적거리는데 그게 또 각이 딱딱 맞아서 보고 있으면 따라서 내적 댄스를 추게 된다.





#0. 굿-즈 물어오는 사람들[각주:1]


 Kㅏ구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 좋아한다. 그들의 이러한 버릇은 어엿한 한 종의 습성으로 사전에 기재되어있다. 다른 새들이 집을 짓기 위한 재료나 새끼를 먹이기 위한 것들을 물어오는 동안, 까마귀들은 반짝이는 것들로 방을 가득 채운다. 물론 까마귀가 집을 짓지 않거나 새끼를 굶긴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쓸모에 있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을 그들의 둥지로, 끊임없이 물어올 뿐이다.

앞으로의 글들은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있다면 살아가는데 밀도 높은 행복이 될 것들을 물어오는, 까마귀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쓰는 것들이다. 이번 글로 그 시리즈를 시작한다. 앞으로 내가 쓸 굿-란 것이 무엇이며, 이 시리즈에 임하는 다짐은 어떠한지 따위를 전하는 가벼운 인사말 정도로 읽어준다면 좋겠다.///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다 같이 발음해 보자. 구우-.

 


굿즈란 단어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떠올렸는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형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아이돌 팬덤이 만들어낸 2차 창작물 내지는 응원봉같은 것들을, 누군가는 사람만한 다키마쿠라를 떠올릴 수도 있고, 혹은 텀블벅이나 과자전, 언리미티드 에디션같은 플랫폼에서 볼 법한 창작물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분기마다 나오는 다른 디자인의 스타벅스 텀블러, 전시를 보고 난 후 아트샵에서 구경하는 에코백이나 엽서. 이 외에 책을 주문하고 받는 보틀이나 베개, 레플리카 유니폼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대통령 취임 우표까지도 떠올릴 수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굿즈라 부른다.

 


굿즈?

 


굿즈Goods의 사전적 정의는 상품이다. 실체를 가진 유형의 물품이라면,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그 굿즈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단 소리다.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굿즈들이 존재한다. 비단 브로마이드나 포토카드, 등신대 베개, 동인지 뿐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굿즈란 용어는 종종 아이돌 산업이나 서브컬처에서 파생된 상품만을 상기시키곤 하는데, 왜냐하면 굿즈를 전파한 일본에서 이 용어를 서브컬처계의 관련 상품을 한정하는 데 쓰기 때문이다. 보통은 넓게 대중문화의 파생상품을 일컬어 머천다이즈Merchandise(md)라 칭한다.

굿즈란 엄밀히 말하자면, 일차적으로는 영화나 만화·애니메이션 등의 원작에 바탕을 두고 제작한 팬시 상품이나 기념품 등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는 md로 대체될 수 있을만한 것들이다. 그런데 점점 발달하는 팬 문화와 제작사가 원하는 퀄리티의 굿즈를 내주지 않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팬들이 자급자족의 형태로 동인지나 등신대 베개 등 2차 창작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굿즈의 확장된 이차적 의미이다. 이렇듯 굿즈와 md는 미묘하게 태생이 다른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커뮤니티를 통해 굿즈란 단어가 먼저 알려졌으며 서브컬처계의 문법을 빌려와 서브컬처계의 파생상품이나 2차 창작물뿐만 아니라 여타 파생상품, 기획 상품까지도 굿즈라 부른다. 글의 소재가 서브컬처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굳이 따지자면 이 글에는 굿즈보다 머천다이즈가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더 굳이 따지자면(2)창작물과 (기획)상품의 경계가 모호한, 한국의 특수한 굿즈실정이 이 시리즈와 가장 맞춤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필자는 구우-의 발음을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이 시리즈에서는 굿즈를 다룰 것이다.

 


이것도 굿즈?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굿즈이다지난달 17일 발매한 19대 대통령 취임 우표이다. 330원이면 얻을 수 있는이니굿즈(문재인+goods)”로 알려져 발매 전부터 큰 화제를 얻고 있다. 500만장이라는 대규모 발행에도 불구하고예약 주문이 폭주함에 따라 인터넷 주문까지 폐쇄한 상황이다.



앞으로도 이 글을 읽어주()다면, 글에 나올 물건들 중에는 이것도 굿즈라고?’ 반문할 만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만큼 굿즈라 묶이는 것들 안에서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는 것인데, 이는 굿즈의 본질적인 성격에서 기인한다. 무엇보다도 굿즈는 파생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 굿즈는 저마다 그것이 참여하는 모체가 있다. 그 모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모체의 성질을 분유한 굿즈의 결도 달라지는 것이다.

넓게는 산업 분야가 무엇인, 장르가 무엇인지에 따라 좁게는 작가·멤버·캐릭터·인물 등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다 달라진다. 더군다나 팬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아이돌문화나 서브컬처계의 굿즈 산업만 하더라도 내부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 스타나 캐릭터의 얼굴이 박혀있는 물건만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팬의 연령대가 넓어짐에 따라 굿즈도 일코(일반인 코스프레)가 가능하도록 품목을 다양하게 세분화하여 제작되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굿즈를 소유하는 갈래는 더욱 세세하게 나뉘고 있으며, 물건의 외양만으로는 굿즈를 판별해내기 어려워졌다.




 


= 이마트식품 코너에서 굿즈를 만났다. SM엔터테인먼트와 가공식품브랜드 PEACOCK이 콜라보한 걸그룹 레드벨벳 음료.




이 들쭉날쭉한 물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특징은, 바로 굿즈가 덕질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덕질이라는 용어는 오타쿠에서 파생한 ()에 행위에 비하하는 뜻을 접하는 접미사 ‘-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오타쿠オタク는 광의로서, 특정한 분야에 열중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처음에는 일종의 멸시와 배척의 의미를 담아 쓰였던 덕질이 스스로의 취향 내지는 타 집단과 구별되는 특수성을 드러내는 말로 전환되어 퍼졌듯이, 이제는 굿즈 역시 넓은 의미의 취향을 드러내는 유형의 물질이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취향과 기호, 내지는 애정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굿즈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소비 형태가 사물의 효용성이나 유용성이 아니라 사물이 상징하는 기호에 대한 소비로, 곧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소비로 전환되었다는 맥락에서 굿즈는, 어떤 이에겐 현대 소비문화의 첨단, 그 자체로 여겨질 수 있다. 여기까지는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말이다.

그러나 나 같은 일개 덕후에게 굿즈는 호빵맨의 빵조각이나 영혼을 쪼개어 넣는 호크룩스 내지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것이다. (또한 굿즈라고 다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의 퀄리티도 중요하다. 퀄리티 자체가 굿즈를 갖고 싶은 맘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앞에 분유니 참여니 하는 해학적인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호빵맨의 조각을 얻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호빵맨의 온기. 비록 파편일 뿐이지만, 파편만으로도 전체를 상기시킬 수 있는 힘 그것이 굿즈에 있다.




= 심지어 호빵맨은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떼어준다. 선후관계가 뒤엎어지긴 했지만. (호빵맨이 스스로 영업에 나선 것 역시 아니지만) 필자만 하더라도, 만일 직접 저 호빵 조각을 받았더라면 그를 마음으로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굿즈를 사는사람만 있나

 


한편 이 물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굿즈는 소비문화의 해악으로 읽히곤 하며, 굿즈를 다루는 글의 포커스는 소비하는 행위 그 자체에 조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굿즈 시장이 활성화되는 동향을 분석하거나, 소비행위를 저격하는 양상이다. 이를 언급하는 것이 그러한 비판을 교정하고자 함은 아니다. 실제로 굿즈의 방점은 소비에 있다. 그러나 굿즈를 사는 사람이 있다면 필히 파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 이전에 만드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굿즈의 또 다른 방점은 소비가 아닌 생산, (판매목적이 아니라 자급자족하여 굿즈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정말 말할 것도 없이)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요지이다.

물론 양산되는 대부분의 굿즈가 쓴 소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굿즈의 다른 이름은 기획 상품, 판촉물이다. 그렇다. 대부분 굿즈의 역할은 소비자를 낚기 위한 미끼이다. 예컨대 알라딘이나 영화 배급사에서 한정판 굿즈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목적은 따질 것 없이 명료하다. ‘관련 상품인 굿즈가 곁가지를 친 그것, 즉 책과 영화 티켓 등 메인 상품의 수익이다.

 굿즈를 샀더니 책을 주더라.”는 상황이 누군가에겐 우스갯소리로, 누군가에겐 씁쓸한 상황으로 읽힐 수 있는 까닭은 주객전도라는 상황을 전제로 했고, 주객전도는 부조리한 아이러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에 대해서 역설하는 글들은 이보다 훨씬 좋은 글들이 많으니 이 글에서까지 다루진 않도록 하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뒤엎어졌다 하더라도 굿즈는 여전히 객의 입장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역으로 굿즈는 객이기 때문에, 주가 누구냐에 따라 그 맥락이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위의 말은 누군가(=나 같은 사람)에게는 진정 기쁨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도 있다. 주객전도가 그래서 왜 나쁜데?’ 라고 반문하면 다 해결될 문제지만 그것이 쟁점은 아니니...)

다시, 어떠한 맥락은 옳고 다른 맥락은 그르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객들만큼이나 다양한 들이 존재하며, 그리하여 굿즈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대규모 기업 자본에 의지하는 경우만 있지 않음을 짚고자 하는 것이다.

앞서 우리나라의 굿즈 실정은 조금 특수하다고 적어 놓았는데, 이는 굿즈의 2차적 의미인, 2창작물로서의 맥락에 관한 것이다. 서브컬처계의 문법이었던 굿즈가 머천다이즈까지 포괄하는 꼴이 되면서, 굿즈의 창작물로서의 의미와 굿즈의 용례가 전방위한 상황이 맞물렸다. 굳이 모체가 되는 1차 창작물이 코믹스나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니더라도 일종의 본부가 있는 2차 창작물, ‘덕질의 산물이라면 굿즈로 통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굿즈는 판매되는 상품일지라도, 그것을 만들어 낸 자의 덕질대상이 무엇인지 역시 관건이 된다. 그들은 굿즈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이 열중하는 무형의 가치, 이념까지도 물질화하여 유형의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고, 이를 판매를 통해 유포할 수 있다. 즉 굿즈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생산자가 몰두하는 분야와 대상의 대리 표상이 된다.

 




=‘조크든요스티커 (제작 :텐시)

작년 8, 웹진 아이즈에서는 페미니즘 전쟁│④ 페미니즘 굿즈 온리전이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행사 부스에 나왔던 굿즈들을 조명한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위 사진은 기사에서 소개되었던 굿즈 중 하나이다. (사진 제공: 이로)

굿즈가 마냥 상품 판매를 본 목적으로 하는 기업 자본의 끄나풀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페미니즘 관련 굿즈는 개인과 단체를 막론하고 점점 더 활발하게 제작되는 추세이며, 목표는 1차적인 수익보다도 그 후에 파생되는 담론에 있다. 기사의 대목을 그대로 옮기자면, “여기에는 이 굿즈들을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써 계속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데 기꺼이 돈을 쓰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래서 굿즈를 물어온다는 것은

 


그래서 굿즈를 물어오는 일은 나의 최애와 나, 그리고 존잘님(내지는 제작사)간의 공고한 삼각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제 최애는 연예인이나 캐릭터에 국한되지 않으며, 어떠한 대상이 최애로 등극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정도에, 즉 덕심에 달려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굿즈들은 그만큼의 다양한 덕심들을, 그리고 다시 덕심은 그만큼의 기호와 취향을 나타낸다.

세상엔 이 취향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삼각형들이 존재하여 관계를 이루어 나간다. 결국 굿즈를 물어온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 삼각관계의 한 꼭짓점이 되고 동시에 다른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는 일이다. 점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다른 점들과 선을 이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간다. 새롭게 마주하는 세계로부터의 기념품은 굿즈이다.

모 잡지에서 굿즈를 다루며 팬들이 비공식 굿즈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원동력을 한 문장으로 추려놓은 것을 본 적 있다. 그게 다 너무 사랑해서다.”라고. 사랑해서 만들어낸다는 말은 애정과 관계가 결핍된 현대인만의 편집증적 증상이 아니라, 그림의 기원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부타데스의 딸은 떠날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벽에 그의 그림자를 따라 새겼고, 아버지는 딸을 위해 그 흔적의 형상을 흙으로 빚어주지 않았는가.

그래봤자 청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혹은 굿즈를 소유하여 최애의 정체성을 나눠가질 수 있을 것이란 바람이 허깨비라고 욕한다면 사실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림자와 구운흙이 회화와 조각의 시작이더라는 전설(플리니우스, 《박물지35XLIII, 151)을 떠올릴 때마다, 본인처럼 까마귀 같은 사람은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그것은 비록 애잔함도 아니고 안도감도 아닌 미묘한 것이지만, 이 이야기는 사랑해서만들어 내거나, 만들어진 것을 물어오는 까마귀 같은 사람들의 축제를 마무리하기엔 충분하다.

 


굿즈를 물어오는 일을 적다보면 덜 부끄러워질 수 있을까

 


우리 문집의 모토는 세상에 부끄러운 덕질은 없다.”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덕질은 곧 특정한 분야에 열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분야에 버닝하는 행위이다.

열중. 자신의 덕질을 자유롭게, 그리고 무겁지 않게 기록하는 이 필집은 나에게 한구석을 할애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공간에 굿즈에 열중하노라.” 고백한 셈이다. 세상에 부끄러운 덕질은 없다지만, 사실 나의 덕질은 아직 부끄럽다. 미지근한 인간으로서 굿즈 덕후가 되기에 결핍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열정, 노력, 여유, 집요함, 사실 덕후가 되기에도 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덕후의 본질에도 맞지 않고, 우스운 소리지만. 나에게는 어떤 덕후 콤플렉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나는 굿즈를 좋아하노라 말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자꾸 보고, 생각하고, 써보려 한다. 이것이 나의 사랑 방식이다. 분명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소극적이지만 내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고, 덕질을 하기에는 천성이 조금 게으르지만, 영업할 때만큼은 열렬한 그런 사람이 분명. 앞으로 써 나갈 굿즈 시리즈는, 나의, 그리고 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콤플렉스 극복기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굿즈에 대해 쓰겠습니다.’ 이 한 문장이 이렇게까지 길어졌지만. 인사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추신



  1.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을 물어오는 버릇은 사실 어떤 불가항력적인 습성은 아니라고 한다. 강박적으로 보이는 이 버릇이 유전자에 새겨진 영구한 성질의 것은 아니며, 특수한 조건이 유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특수한 조건이란 호기심이다. 까마귀도 노화되어 호기심을 잃으면, 물어오는 것을 멈추기도 한다고.

  2. 내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굿즈는 세일러 문 캐릭터가 일렬로 그려져 있던 노란 베개이고, 최근의 굿즈는 지인을 위해(그를 덕질하는 마음가짐으로) 소량 제작한 티셔츠이다. 당신의 추억이 담긴 굿즈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3.  ‘예쁜 쓰레기란 말도 있으나 한 철 쓰이던 용어 같기도 하고, 용어에 담긴 자조적인 뉘앙스가 주관에 맞지 않아 쓰지 않았다.

  4. 극복기의 성과가 좋을 것 같지는 않다.

  5. 당신이 꼭 그래야할 일은 아니지만, 다음에도 만났으면 좋겠다. 다음엔 조금 더 촘촘하면서도 편안한 글로 돌아오는것을 다짐하며. 물어가고 싶은 굿즈와 함께.


  1. 굿-즈 시리즈 : 굿즈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 혹은 탐닉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에 대하여 끄적거립니다. [본문으로]

연극 <검은 입김의 신>, 흔해빠진 불행의 세상에서

이르름



여기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검은 산, 검은 하늘, 검은 공기, 검은 집…… 몸도 마음도 마을도 검게 물들어 버린 이 동네에서는 말한 것이 거꾸로 되어버린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탄광을 지지하기 위한 나무는 뿌리가 위로, 가지가 아래로, 그러니까 거꾸로 심어지고, 이 비좁고 무더우며 위아래가 뒤바뀐 탄광의 검은 하늘 아래에서 광부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버린다는 믿음을 굳힌다.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가족은 퇴직금을 한 푼이라도 늘리려 무리하던 가장의 부상 앞에 한 발짝을 떼지 못하고 돌아온다. 남편 상진과 함께 갓 마을에 온 새댁 남희에게 이 마을에서 부부는 서로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그러니까 이곳은 떠나야 하는 곳이라고 빨래터에 나란히 앉아 말하던 광부의 아내들. 그들의 남편이 탄광에 갇히자, 구조작업에 대해 따지러 들어간 관리자의 사무실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운 좋았던 일들, 유난히 행복해서 불길하게 돋보였던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 보인다. 요 며칠간은 큰 소리로 싸우지 않아서 살만 하더라고, 생전 안 그러더니 찌개 간을 봐주더라, 아이들이 요즘엔 아빠를 안 피하더라니…. 그들에게 이런 작은 행복들, 익숙하지 않은 행복은 경계의 대상이며 오히려 마을의 검은 빛깔처럼 항존하는 위험이 터져나올 전조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다고, 지금이 좋다고 말하길 주저한다. 이곳은 좋은 일에 뒤이어 반드시 불행이 닥치고 그래서 결국에는 나쁘게 되어 버리는, 모든 것이 거꾸로 이루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행복에 겁먹게 만들었는가? 이것은 사방에 널려있는 불행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막장에 들어가길 택한 남편들은 숨막히는 깊이의 어둠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검은 하늘 아래서 매일을 보낸다. 하루가 끝나고 땅 위로 돌아오면 죽었다 살아난 기분을 느끼면서도, 오늘도 내일도 탄광으로 향하는 기나긴 차량 칸에 몸을 싣는다. 아내들은 빨아도 빨아도 검은 물이 나오는 빨래를 하며 서로의 가족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삶에 깊게 잠식한 가난과 고단함을 술에, 노래에 담아 견뎌낸다. 가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힘든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이들에게 희망이란 이름으로 부담을 주고, 배려란 이름으로 상처를 입힌다. 부상을 당해 병원비가 드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보상금을 받아 새 삶을 꾸린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은 여자들의 입에서도, 남자들의 입에서도 서슴없이 나온다. 신입 시절 ‘돼지’라고 불리며 무시 당하던 상진이 자기는 돼지가 아닌 사람이고, 어엿한 광부이며, 막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항의하자 반장은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사람이고 싶으면 막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좋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럴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사람 목숨보다 보상금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돼지는 그들이 죽어서야 쓸모가 있다는 씁쓸한 자기비하다. 선량하고 평범하던,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결혼하여 이 마을에 도달한 사람들이 검은 탄 가루에 뒤덮이며 일어나는 변화들을 보면 ‘비참하다’는 말이 남용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불행이 닥쳐도 어떻게든 참고 살아내야 하고, 살기 위해 가족을 탄광에 밀어 넣어야 하며, 불합리에 맞서면 거세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광업소의 사람들의 삶은 그 무엇보다, 비참하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살아간다. 이들의 연대는 삶을 살아낼 만한 것으로 만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상진은 처음에는 배척당하고, 나중에는 어영부영 관리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며 따돌림을 당하고, 다같이 용기를 낸 파업이 끝나자 망치로 손을 내려치겠다는 위협에 주동자를 말해버리지만, 절대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다. 광부들은 검은 하늘이 검은 진주처럼 보이는, 건드리기만 해도 탄이 쏟아져 나오던 그런 운수 좋은 날 도리어 탄광에 갇힌다. 그들은 탄광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농담을 나누며 몰려오는 두려움을 이긴다. 보상금을 받으면 솜씨 좋은 우리 아내가 드디어 떡볶이 집을 열 수 있겠지, 나만 보면 방긋방긋 웃는 예쁜 딸이 학교를 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좋다며 함께 차를 마신 천사 같은 아가씨는 나를 완전히 잊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들은 탄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처절한 목소리로 이어진다. 차라리 죽어서 보상금이 낫지,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억척스런 아주머니들은 그들의 남편들이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으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것은 폐쇄된 탄광에서 들려오는 망령들의 목소리도, 하나님의 손발이라 믿으며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신의 손발도, 그 어떤 신적인 존재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로의 존재와 마음이었다. 그리고 결국 탄광에 갇힌 세 명의 동료를 구하는 것은 파업의 주동자로 붙잡혔다 가석방된 반장과 부상을 입고 마을을 떠나지 못한 또 다른 광부다.


<검은 입김의 신>은 실제로 탄광같이 비좁고 어두운 소극장에서 이런 짠하고 뜨뜻미지근한 연대의 소중함을 전혀 식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들의 불행은 마을을 뒤덮은 검은 탄 가루처럼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것이며, 그래서 절절하기보다는 체념적인 정서 속에 조용히 흐른다. 파업의 결과로 얻은 것은 월급제 대신 약간 오른 보상, 산소통 같은 안전조치 대신 목욕탕과 괴물 같은 공용 세탁기일 뿐인 이 마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에게 가혹한 세상은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3억 년 전의 먼지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시커먼 탄광에서 인류에게 불을 전한 프로메테우스처럼 매일을 죽고 또다시 매일을 부활하며 모두에게 따뜻함을 전할 것이다.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 조금만 참자는 간절한 바람이 사랑하는 이를 위험한 현장으로 내모는 무서운 무기가 되는 이 마을에서, 희망은 사치스럽고 죄스럽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갈 것이다. 행복 뒤에는 반드시 불행이 뒤따르곤 하는 깊은 어둠의 존재에도 이들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함께 싸우고 서로를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에 기댄다면, 행복이 이어지지 않는대도 불행을 감히 두려워하지는 않을 수 있다.




*<검은 입김의 신>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의 <세월호 2017 기획>의 일부다. 7월 6일부터 8월 13일까지 총 여덟 개의 극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극을 쓴 고연옥은 작가의 글에서 ‘세월호 앞에 모든 이야기는 죽었다’고 밝힌다. <검은 입김의 신>은 표면적으로는 세월호와 멀리 떨어진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 권력이 굳건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날을 경험한 우리 모두에게 세월호는 자꾸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세상 모든 ‘가장 보통의 존재’들을 위하여[각주:1]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푸른수염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관객의 정동을 양떼 몰듯 몰아간다. 슬픈 장면에서는 슬픈 음악이, 즐거운 장면에서는 즐거운 음악이 관객이 슬퍼하거나 기뻐하기도 전에 먼저 슬퍼하고 기뻐한다. 마치 개그 프로에서 가상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계속해서 틀어주는 것처럼. 실체 없는 웃음소리가 ‘진짜’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듯, 영화 음악 역시 디에게시스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후적으로 삽입되는 것임에도 영화 내부의 세계와 효과적으로 밀착되어 관객에게서 특정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때 양치기가 되어 선두에 서는 것은 단연 주인공의 감정이다. 언제 울고 언제 웃을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주인공을 보면 된다. 물론 그러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영화가 음악을 통해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따라가도록 ‘몰아’ 줄 것이다. 주인공이 고난에 처할 때 흘러나오는 슬픈 음악과,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그가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었을 때 나오는 즐거운 음악. 여기에 악당이나 주변부 인물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악하거나 비중 없는 자들은 결코 배경음악의 선택권을 장악하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을 대신하여 슬퍼해주거나 기뻐해주지 않는, 메마른 무음(無音)의 세계. 그것이 그들이 처한 가혹한, 그러나 평범한 세계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음악이 없는 영화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그 대신, 영화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장들만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목과 갈등의 연속인데, 영화의 반절 가량이 재판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소송 장면으로, 여기서 딸을 외국에서 교육시키고자 하는 씨민의 입장과 모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나데르의 입장이 충돌한다. 그리고 이후에 진행되는 영화의 주된 갈등 부분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씨민, 나데르, 테르메, 라지에, 라지에의 남편, 가정교사 등―의 입장이 뒤얽힌다. 이 수많은 입장들 사이의 간극은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사실, 방패처럼 내세우는 입장들 뒤에는 사연들이 있다.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소송에서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외국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의 입장 차이이지만, 그 이면에는 딸을 사랑하고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어머니의 사연과, 아내와 딸만 데리고 훌훌 외국으로 떠나기엔 치매 걸린 늙은 아버지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한 아들의 사연이 있다. 영화의 뒷부분에서 사연들은 좀 더 촘촘하게 얽히고설킨다. 예컨대, 씨민이 떠나자 치매노인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일할 사람을 구하게 된 나데르의 사연과 갑작스럽게 남편이 직장을 잃어 돈을 벌어야 하는 라지에의 사연은 일견 서로 잘 들어맞는 듯하며, 그 결과 라지에는 나데르의 집에서 순조롭게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라지에의 유산은 간단해보이던 라지에와 나데르의 이해관계에 배는 되는 씨실과 날실들을 추가한다. 나데르의 사연에는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씨민의 사연과 부모의 별거를 막기 위해 집에 남는 것을 택한 딸 테르메의 사연이 얽혀 있다. 라지에 쪽에는 갑작스런 해고와 돈 없는 설움으로 인한 울화가 불쑥불쑥 욕지기마냥 치미는, 하지만 결국 그 몇 푼 안 되는 돈과 처자식 때문에 더러운 꼴 보며 사는 남편의 사연이 있다. 가로세로로 마구 얽혀 있는 모두의 이야기들은 갑자기 생겼다기보다는 사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다만 라지에의 유산, 그리고 나데르에게 덧씌워진 살인혐의가 이 모든 것들을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짐짓 공정한 눈으로 모든 상황을 담아낸다. 울고, 악쓰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건조하게 바라본다. 모두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감정의 소요에 오직 카메라만은 동요하지 않고 인물들을 응시한다. 마치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무의지에의 의지를 가진 어떤 존재처럼. 재판장 혹은 신처럼. 음악의 부재는 이 비-인간적이고 초월적이기까지 한 의지의 실현을 돕는다.




  모두에게 공정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똑같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어느 누구를 대신해서 울어주지도, 누군가와 함께 울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인물들은 혼자서 운다. 끝끝내 자신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테르메의 말에 혼자 짐을 챙겨 친정으로 가는 씨민이, 나데르의 거짓말을 질책했지만 막상 재판장에서 아버지인 나데르에게 유리한 거짓말을 해버린 테르메가, 아내가 떠나고 온갖 사건들에 휘말린 상태로 거동이 힘든 아버지를 씻기던 나데르가, 운다. 울음을 흘려보낸다, 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울음은 속엣 것이 차고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온 무언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우는 나데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화 음악의 비중이 높은 영화들에서 주인공의 눈물은 일상의 맥락을 끊어버린다. 진행되던 일들은 일시정지 되고, 슬픈 음악이 눈물을 예고하며, 주인공은 예정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음악은 고조되고 카메라는 관객들이 반짝이는 눈물을 잘 볼 수 있도록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눈물로 대표되는 모든 희로애락은 온전히 일상에 속한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무표정으로 있던 인물이 갑자기 눈물을 한 방울 흘린다. 예고도 클로즈업도 없다. 심지어 눈물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인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한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눈물이 나오든 말든, 느끼는 감정이 어떻든 간에 하던 일은 마저 해야 하는 것이다. 운전을 하고 있었으면 운전을 해야 하고, 노인을 씻기고 있었으면 마저 씻겨야 한다. 그들, 그리고 우리가 속한 무음의 세계에선 감상에 빠질 여유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인물들이 살아내는 세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우리 자신들의 것만큼 평범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도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누구의 이야기에 특별히 더 공감해주지도 않은 채, 딱 자기 자신의 몫만큼의 삶을 이어간다. 각자의 사연은 각자의 안에 품고, 겉으로는 매끄럽고 견고한 입장들만 내세운다. 그리고 입장들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말랑한 속살 같은 사연을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가끔 자기 보호적 거짓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거짓말을 했듯이. 계속 나데르를 몰아붙이던 라지에가, 그러면 자신 때문에 유산되었음을 코란에 맹세하라던 나데르의 말에 갑자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듯이.


  신기한 점은, 영화가 마법처럼 모두의 사정을 관객에게 이해시킨다는 점이다. 분명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모두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그것은 이들의 거짓이 ‘입장’의 차원에서는 거짓일지 몰라도 ‘사연’의 차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각자 나름의 정의와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사연의 차원으로까지 파고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은, 다시 말해 누구도 섣불리 단죄하지 않는 카메라 덕분일 것이다. 카메라 덕에,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흔히 영화적 세계에 부여되는 특권적 특징들을 갖지 않은 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절대적 정의나 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각자 나름의 정의만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모두는 딱 그만큼의 거짓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의 결말 부분에서 흔히 권선징악적 단죄가 이루어진다면, 현실에서, 그리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그렇지 않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진실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진실인 세계는 ‘진리언표적인 인간’, 즉 진리를 원하는 인간을 전제하지만,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인간을 감추고 있기라도 하는 양, 이상한 동기들, 예를 들면 복수심 같은 것을 품고 있다. (...) 진리언표적인 인간은 삶을 심판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더 상위의 가치, 즉 선을 기치로 세우고 바로 이 선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고자 하며 심판을 내리고자 갈급해 있고, 삶에서 악, 즉 속죄해야 할 과오만을 본다. 이것이 바로 진리 개념이 갖는 도덕적 기원이다. 니체처럼 웰스는 끊임없이 판단체계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삶보다 상위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은 판단되거나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무구한 것이고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생성의 무구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각주:2]



  들뢰즈에 따르면, 절대적 ‘진리’ 혹은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나 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왜냐하면 진리 혹은 선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삶을 단죄함으로써 삶이 지니는 생성의 무구함을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 이것이 들뢰즈가 추구하는 바이자,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도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정의, 선, 진리와 같은 가치는 부재하고, 그저 ‘개별적으로만’ 정당한 사연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난립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삶은 ‘선’보다는 ‘최선’에 가깝다. 대단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가장 나은 선택을 하고자 아등바등하는 것. 이것이 스스로의 울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감내해야 하는 ‘가장 보통의 존재들’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그리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고 할 때 담기는 것은 결국 구구절절 구질구질한 우리네 생(生) 그 자체이다.


  마지막 장면. 다시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소송이 진행 중이다. 판사는 테르메에게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살겠냐고 묻는다. 테르메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판사는 씨민과 나데르에게 잠시 밖에 나가있으라고 주문한다. 둘은 말없이 나와 각자 다른 쪽에 앉는다. 씨민은 왼쪽에, 나데르는 오른쪽에. 씨민은 문 뒤에, 나데르는 문 앞에. 씨민은 나데르를 잠시 바라보지만, 나데르가 자신 쪽을 쳐다보자 시선을 돌려버린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앞으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마구 지나다니고, 복도 끝에서 나는 말다툼 소리와 아기 우는 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듯 울린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데르와 씨민은 재판장 복도의 풍경에, 이 거대한 일상에 금세 흡수되듯 섞여버린다. 끝까지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영화는 끝내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테르메의 결정은 마지막까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일과 유리된 허구적 이야기가 아닌, 이들이 살아온 생의 한 토막이 된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도 이들의 삶이 지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테르메는 무언가를 말했을 것이고, 그 말의 내용에 따라 세 사람과 할아버지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고, 그들은 계속해서 매순간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들을 하면서, 때로는 혼자 눈물을 훔치면서 이 보통의 일상을 살아내고 버텨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라지에의 가족도, 가정교사도, 이웃과 시누이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화려한 영화들처럼 멋진 해피엔딩을 약속할 수는 없어도, 삶이 영화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지리멸렬한 삶이나마 꿋꿋이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가장 보통의 존재들에게 건네는 ‘최선’의 위로이다.

  1.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차용 [본문으로]
  2. 질 들뢰즈, 『시네마 II : 시간-이미지』, 이정하 역, 시각과 언어, 2005, 275쪽 [본문으로]

야기꾼 찰리 카우프만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방법, <Adaptation>


르네오








   <Adaptation>(2002)은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이터널 선샤인>(2004)의 각본가로 잘 알려진 찰리 카우프만의 두 번째 영화다. <존 말코비치 되기>로 카우프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았는데 하나 같이 상상력이 돋보이는 각본이 눈에 띄었다. 카우프만의 각본은 주로 판타지적인 설정을 통해 인물들의 의식, 기억과 무의식을 드나들고, 서로 다른 시간들이 겹쳐 있는 복잡한 플롯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카우프만의 각본은 주로 ‘어떻게 저런 상상을 했을까?’와 같은, 그의 아이디어가 갖는 독창성과 신선함에 대한 감탄과 찬사를 받는다.


  그렇지만 카우프만의 영화들을 다 보고 나니 그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가 오로지 그의 상상력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우프만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적 설정을 품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지만 또 항상 숨기고 싶어 하는 모습들을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평범하다 못해 우울에 빠져있거나 소심하고 치졸한 행동들을 하고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에 빠져 중요한 일들을 그르친다. 그런 평범하고 실수투성이인 사람이 누군가를 욕망하고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고 착각하고 질투와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 부끄러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초라한 모습들이 사실은 나 역시 갖고 있는 모습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꼭꼭 숨기고 싶으면서도 또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공감 받고 싶기도 한 나의 내밀한 모습들이기 때문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카우프만 영화의 찌질한 캐릭터들은 불편하면서도 애정이 간다.



  <존 말코비치 되기>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고 몇 년 동안의 공백기를 가진 카우프만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그에 대한 부담감 속에서 내놓은 두 번째 각본인 <Adaptation>은 바로 그 찌질한 캐릭터들이 사실은 모두 카우프만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백하는 것 같은 영화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부터가 <존 말코비치 되기>로 할리우드에서 인정을 받은 그 후의 찰리 카우프만이다. 영화 속에서 찰리 카우프만은 난초에 빠져 인생을 바친 남자 존 라로쉬에 대한 논픽션 에세이인 <난초 도둑>을 영화 대본으로 각색(영화 제목인 Adaptation의 한 가지 뜻은 ‘각색’이다)하는 일을 맡게 되어 창작의 고통을 겪게 되고 자괴감에 빠진다. 극 중에서 찰리는 ‘난 뚱뚱하고 대머린데 괜찮을까? 그녀가 내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까? 내가 우습다고 생각하겠지?’와 같은 독백을 자주 하고, 침대 위에 책들과 함께 널브러져 부담감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시간들을 보낸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촬영장에서 실제로 배우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데 찰리는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으며, 그마저도 촬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쫓겨난다. 어렵게 데이트 신청을 한 에밀리와 파티에 갔다 돌아오는 길 그녀의 집 앞에서 에밀리는 함께 로맨틱한 밤을 보내자는 사인을 보내지만, 뚱뚱하고 대머리인 자기 모습이 부끄러운 찰리는 이를 모른 척하고, 에밀리가 실망하여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이렇게 따라가서 그녀에게 키스하면 영화 속 한 장면 같을 텐데...’하고 상상할 뿐이다. 또 찰리는 수잔의 글을 읽다 그녀의 솔직함에 반해 책 표지 안쪽 수잔의 사진을 보면서 자위를 하지만 정작 수잔을 직접 만나기 위해 찾아가서 그녀의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드디어 마주치게 되지만 말 한 번 걸지 못하고 땀만 뻘뻘 흘리다 돌아온다. (이런 식의 보는 나도 왠지 부끄러워지는 장면들이 다 쓰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어댑테이션>에서 찰리 카우프만이 자기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켰다고 해서, 이 영화를 찰리 카우프만이 자신의 부담감과 열등감, 초라한 모습과 그 당시의 경험들을 그대로 털어놓는 자전적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댑테이션>은 카우프만의 실제 경험과 의식의 흐름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카우프만이 만들어낸 허구의 설정과 사건들 역시 담고 있는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이후 실제로 찰리 카우프만은 <난초 도둑>을 각색하여 시나리오를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난초 도둑>을 각색하는 작업을 하면서 카우프만은 존과 수잔의 열정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각본을 쓰지 못하겠다는 부담감을 느꼈고, 그런 부담감 속에서의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또 다른 각본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 <어댑테이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댑테이션>에는 분명 카우프만이 난초 도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의 경험과 의식의 흐름이 영화의 주요한 줄거리로 녹아들어가 있다. 그러나 <어댑테이션>의 전체 각본은 결국 그러한 경험들을 토대로 카우프만이 각색한 이야기, 즉 허구적 설정과 사건들이 섞인 이야기이다. 찰리 카우프만은 도널드 카우프만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자신의 쌍둥이 동생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어댑테이션>의 각본은 실제와 허구가 혼재하는 구조를 갖는다. 카우프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실제 인물들이 벌이는 허구의 사건을 꾸며내거나, 허구의 인물과 실제 인물이 같은 공간에서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등 실제와 허구를 교묘하게 뒤섞어서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카우프만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찰리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실제 영화배우인 존 말코비치를 그대로 영화 속 인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지어낸 이야기지만 어쩐지 실제 이야기 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과 같이, <어댑테이션>에서 역시 <존 말코비치 되기>의 주연 배우들을 실제 그들 자신의 역할로 등장시키고, 카우프만 자신과 수잔, 존 등 현존하는 인물들을(물론 연기는 배우들이 했지만) 등장시킨다. 그 결과 분명 가상의 인물인 도널드 카우프만까지도 실제 인물들과 같은 시공간에서 상호작용한다는 점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심지어 도널드 카우프만의 실제와 허구 사이의 애매한 위상은 영화 밖으로까지 이어진다. 찰리 카우프만은 <어댑테이션>의 엔딩 크레딧에 도널드 카우프만의 이름을 공동 각본가로 올렸고, 그 결과 카우프만 형제가 함께 아카데미상 각본 부문 시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댑테이션>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과 설정(난초수집가 존과 그를 취재한 수잔과 그들의 이야기를 각색하는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실제의 설정) 은 각본 곳곳에 숨겨진 허구의 사건들을 구별해내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카우프만 형제의 시간과 수잔과 존의 시간이 겹쳐지면서 불륜, 마약, 추격전, 불의의 죽음 등 사실과는 다른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들이 펼쳐지게 되는데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사건들이 실화인지 카우프만의 각색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후에 여담을 찾아보니 수잔이 자신을 실제와는 다른 이상한 이미지로 그린 것에 대해 항의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찰리가 수잔의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하는 장면은 제발 카우프만의 각색이었으면 하는 장면이지만 진실은 카우프만밖에 모른다. <어댑테이션>은 이처럼 현실과 허구, 실제 사건과 꾸며진 각본을 모호하게 섞어놔 어떤 장면도 실제 혹은 허구라고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든다.



   <어댑테이션>의 각
에서 인물과 설정, 사건들이 갖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애매하고 모호한 위상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확고한 한 가지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달리 말하면 각본의 줄거리, 인물, 사건 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어댑테이션>에서 찰리(극 중 인물을 지칭할 때는 찰리로, 감독을 지칭할 때는 카우프만으로 부르려 한다) 가 도널드 때문에 겪게 되는 생각과 행동의 변화들이 실제로 카우프만이 난초도둑의 각색을 하는 동안 겪은(또는 적어도 겪고자 희망한) 변화인지 아니면 다른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허구의 이야기인지에 대해 상반되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도널드 카우프만이 어떤 캐릭터인지, 영화 속에서 도널드와 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도널드 카우프만은 영화의 주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완전한 가상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찰리 카우프만이 왜 굳이 이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를 고민해보면 카우프만이 <어댑테이션>을 통해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는지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카우프만은 찰리 카우프만과 겉모습은 똑같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똑같이 대머리에 배가 나왔지만 도널드는 항상 여유가 넘치고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걱정하지 않는다. 도널드는 찰리를 따라 시나리오 쓰는 일에 도전하는데, 걱정이 많고 예민한 찰리와는 달리 도널드는 시나리오도 거침없이 써낸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너무 어렵고 두려운 찰리는 자신은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존 말코비치 되기>의 영화배우들과도 어느새 친해져있는 도널드를 속으로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찰리는 도널드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주로 부정적이지만) 자의식이 강하고 예민한 완벽주의자인 찰리와는 달리 도널드는 어떻게 보면 아무 생각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진다. 찰리의 집에 얹혀살고 있던 도널드는 갑자기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다짐하고는 시나리오 쓰기 원칙들을 가르치는 스타 강사 맥키의 강의를 들으면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뻔한 이야기들을 만들고 찰리에게 의견을 묻는다. 찰리는 그런 도널드가 귀찮아서 농담으로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는데 도널드는 그게 마음에 든다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처럼 도널드 카우프만이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찰리에게 이중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도널드는 찰리가 갖고 싶어 하는 모습들을 갖고 있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평소에 바보 같이 행동할 뿐만 아니라 틀에 박힌 할리우드식 각본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찰리는 도널드를 부러워하지만 그를 인정하거나 존경하지는 않는다.


  도널드에 대한 찰리의 태도는 두 가지 사건에 의해 급격하게 변한다. 먼저 찰리가 시나리오를 쓰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도널드는 자기 각본을 완성하고,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천재 각본가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 그 후 찰리는 도널드에게 강한 질투를 느끼면서도 도널드를 인정하게 되고, 결국에는 도널드가 들었던 맥키의 시나리오 쓰기 강의마저 듣게 된다. 찰리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영화 초반 찰리가 <난초 도둑>의 각색을 부탁하는 영화 관계자에게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엄청난 태세 전환이다. 찰리는 자신은 러브라인, 섹스, 마약, 총, 차량 추격씬, 캐릭터들 간의 극적인 화해와 교훈 같은 익숙하면서도 극적인 요소들이 난무하는 할리우드식 각본이 아니라, <난초 도둑>에서 이야기하는 난초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존 라로쉬의 순수한 열정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각본을 쓰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랬던 그가 할리우드식 시나리오를 쓰는 법칙들을 가르치는 강의를 듣고 그때까지 무시해왔던 도널드와 맥키에게 자기 각본에 대한 조언을 청하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찰리가 시나리오 강의를 듣는 장면 이후로 그때까지 아무런 접점이 없던 카우프만 형제와 존/수잔이 만나 불륜, 미행, 마약, 살인, 차량 추격씬과 같은 온갖 할리우드의 공식들이 난무하는 해프닝이 펼쳐지게 된다. 마치 이 장면부터는 찰리 대신 도널드가 펜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찰리와 도널드는 존과 수잔에게 쫓기며 죽을 위험을 앞두고 생뚱맞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더니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된다. 이 극적인 화해를 계기로 도널드에 대한 찰리의 태도는 더욱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즉 찰리는 도널드를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 대신, 도널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도널드를 진심으로 인정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 후반부의 이러한 극적 전개를 두고, 카우프만의 의도는 도널드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식 각본을 비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각본에는 드라마가 필요하고 인물들의 변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극적인 결말이 필요하다는 맥키의 조언대로 이야기를 짰을 때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억지스러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항의와 조롱을 카우프만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카우프만의 이야기에서는 항상 묘한 진실성이 느껴졌는데, 이번에도 그저 재치 있는 비틀기가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난초의 아름다움과 난초수집가의 열정을 진지하게 담아내는 각본을 쓰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결국에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해서 쩔쩔 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이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식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을 비판하려고 했다는 설명은 어딘지 뻔뻔해 보이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를 제외하면 <어댑테이션>은 줄곧 찰리 카우프만의 열등감과 불안,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과정에서의 히스테릭한 의식의 흐름을 1인칭 시점의 독백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유일하게 확실한 허구의 인물 또한 찰리 카우프만과 같은 얼굴의(둘 다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 쌍둥이 동생이다. 그런 점에서 <어댑테이션>을 통해 찰리 카우프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자기 이야기인 것 같다. 자기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들과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능력들에 대한 푸념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찰리와 도널드가 갑자기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는 사건은 당연히 허구의 사건이고, 이야기 흐름상으로도 뜬금없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현실과 허구가 뒤섞여 카우프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호한 전체 이야기 속에서 어쩌면 가장 솔직한 장면일 수도 있다. 항상 스스로의 모습이 못마땅하고 남들의 시선이 두려운 찰리가 도널드에게 갖는 열등감과 질투는 찰리의 가장 내밀한 본심이기 때문이다. 도널드는 찰리와 넝쿨 뒤에 숨어 어릴 적 짝사랑하던 여자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럼에도 그 사랑은 자기 것이었고 누군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말을 한다. 도널드와의 그 마지막 대화 이후에 찰리는 도널드에 대한 마음뿐 아니라 인간관계, 시나리오 쓰기 등 자기 앞의 문제들에 대한 태도와 행동들에서 변화를 보인다. 대머리에 뚱뚱하고 재미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남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 등에 짓눌려 있던 찰리는 그 모든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끝난 후에 처음으로 에밀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전하고(에밀리는 이미 새 애인이 생겨서 그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지만 찰리는 개의치 않는다.) 맥키가 절대 쓰지 말라고 했던 독백으로 ‘카우프만은 처음으로 희망이란 것을 느낀다.’라고 말하며 이 이야기를 끝내야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실행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보았을 때 극 중 찰리뿐 아니라 실제로 카우프만 역시 조금은 바보 같지만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고 남들의 시선에 갇히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일단 하고 보는 도널드와 같은 캐릭터에 대해 불편한 열등감을 가지면서 동시에 부러움과 질투를 느껴왔던 것 같다.


  이처럼 찰리의 변화가 카우프만의 진심(실제로 카우프만이 이렇게 변했다기보다는 나도 좀 그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 바로 전 찰리의 대사에 있다. 찰리는 기껏 할리우드 공식에 딱 맞는 사건들로 이야기를 각색해놓고 마지막에는 맥키가 절대 하지 말라며 당부했던 독백으로 끝을 맺으려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한다. “젠장 독백이네. 맥킨이 인정 안 할 텐데. 그럼 다르게 어떻게 표현하지? 에이 몰라. 그가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야. 난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정답이야.” 그러고는 생각해둔 마지막 대사를 한 후에 “I like this. This is good.”이라고 말한다. 물론 누군가는 찰리의 이 대사들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할리우드식의 극적인 이야기 대신 찰리 카우프만 식의 담담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당찬 포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포부는 이미 영화 전반부에서 좌절되었다. 오히려 자신감 없고 남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하고 싶은 것들을 머릿속에서밖에 하지 못하고 아무도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온 지금까지의 찰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의 대사들은 ‘나는 못나고 서툰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이건 내 이야기니까 내가 보기에 좋은(“I like this”) 그대로 해 보겠다’는, 자기 긍정의 첫 발을 내딛는 변화를 담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댑테이션>은 기본적으로 찰리 카우프만과 도널드라는 가상의 인물 간의 에피소드, 그리고 수잔과 존 사이의 가상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구상된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카우프만 자신이 실제로 빠져있던 부담감과 열등감, 그가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능력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변화Adaptation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열망) 등을 담아낸 아주 솔직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카우프만은 그런 자기 이야기들을 도널드라는 자기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가상의 인물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카우프만이 <어댑테이션>에서 도널드라는 캐릭터를 빌려 털어 놓는 자기 이야기들은 과연 그것이 현실인지 허구/각본인지, 카우프만의 진심인지 비꼬는 농담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모호하다. 남들 앞에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항상 힘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야 마는 찰리를 떠올려 보면, 그런 모습에 딱 어울리는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구나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댑테이션>은 결국 자기 문제에 빠져 결국에는 자기 얘기 밖에는 할 수 없는 카우프만이 그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영화인 것 같다. 카우프만이 털어 놓는 이야기들이 이번에도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이어서 불편하면서도 애정이 간다.

우리가 대만 청춘영화에 설레는 이유

-‘나의 소녀시대’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이제로



대만 청춘 영화는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대만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대만 청춘 영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청설(2009)’,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 ‘나의 소녀시대(2015)’가 있다. 이중 우리나라에 대만 청춘 영화라는 것을 알린 영화는 아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일 것이다. 나의 학창시절 때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친구들은 책상에 화이트로 하트를 그리곤 했고, 피아노 꽤나 친다는 친구들은 말할 수 없는 비밀ost를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최근작 두 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와 ‘나의 소녀시대’를 조명하고자 한다. 두 작품은 대만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제목이 알려진 꽤 유명한 영화이다. 두 영화는 학창시절 첫사랑이라는 주제 하에 매우 닮아있지만, 한편으론 매우 다르다. 나는 내가 소위 애정하는 두 영화를 글로써 분석하여,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설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미리 경고하자면,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 자전거와 교복


대만 청춘 영화에는 반드시 자전거와 교복이 등장한다.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말간 얼굴은 우리들을 학창시절로 소환시킨다. 첫사랑은 새하얀 교복과 나른한 자전거 소리처럼 그 나이대만이 갖고 있는 때묻지 않은 그 무엇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첫사랑을 말하기에 앞서 대만 청춘 영화는 학교와 학생, 그리고 사춘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만 청춘 영화 속 학교에는 모범생, 문제아, 인기학생 등 어느 학교에나 있었을 법한 다양한 학생들이 등장한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임진심(여자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은 공부보다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학생들인 반면, 서태우(남자 주인공) 무리는 문제아 집단이다. 또 다른 주연인 구양과 도민민은 학교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모범생들이다. 마찬가지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하 그 시절)’에서 션자이(여자 주인공)는 학교 최고 모범생이자 인기학생인 반면 커징텅과 그의 친구들은 장난끼 많은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성격의 학생들은 영화 속 학창시절에 현실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현실과는 괴리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일진과 평범한 학생, 모범생이 한 무리로 어울리는 모습은 응당 비현실적이지만 일단 보기에는 좋다.


학생들의 순수함은 학교의 경직된 제도와 선생님의 권위에 대비된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자의적으로 체벌을 내리고,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권위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 권위의 부당함이 극에 달했을 때 학생들은 반항하고 도전하고 바꿔나간다. 이 과정에서 평범하고 모범적이었던 학생들은 변화하고, 또 성장한다. 즉 대만 청춘 영화는 그저 공부만 하고, 연예인만 좋아할 줄 알았던 학생들을 성장시킨다.



# 유덕화와 왕조현


나의 소녀시대와 ‘그시절’에서는 9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나의 소녀시대의 경우는 행운의 편지, 주성치의 영화, 롤러장, 프로필자료, 서점, 야영과 진실게임 등 끊임없이 90년대를 추억할만한 소재를 등장시키며 보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많이 닮아있다. 응답하라 1997에서 정은지가 HOT의 광팬이었듯, 나의 소녀시대에서 임진심은 유덕화의 열렬한 팬이다. 유덕화는 90년대 대스타로 그 시절을 추억하는 장치이자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한 소재이다. 유덕화 스티커로 두 주인공의 인연이 시작되고, 서태우는 유덕화 열쇠고리와 입간판으로 임진심에게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언젠간 유덕화가 너를 위해 노래하게 해줄게’라는 대사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그 시절’은 나의 소녀시대만큼 시대적인 소재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남자주인공은 장만옥을 보며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이소룡을 사부라 칭하며 격투왕이 되길 꿈꾼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시대를 정확히 재현해내며 향수를 불러일으켰듯이, 그리고 당시의 순수한 첫사랑을 예쁘게 그려내었듯이, 두 영화는 1990년대 대만을 소환하며 그 시절을 미화시킨다. 그 시절 대만이 아시아의 문화 중심지였고, 대만 스타가 곧 아시아 스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만 청춘 영화가 그토록 우리에게 인기 있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그 시절 유덕화 노래 한 번 안 듣고 왕조현 한 번 안 좋아해 본 남자가 어디 있으랴. 대만 청춘영화가 대만을 넘어 온 아시아에 사랑 받는 이유가 있다.



# 도시 괴담


‘나의 소녀시대’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는 공통적으로 특이한 장면이 등장한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학생들이 야영을 다녀온 직후, 뜬금없이 임진심의 가족들이 미스터리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스터리 전문가는 학생들의 야영 사진을 보고 서태우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임진심을 비롯한 친구들은 그 말을 믿고 서태우를 걱정한다. ‘그 시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날 방영한 미스터리 프로그램에 대해 션자이와 후지웨이가 심각하게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극중에서 강시에 대한 괴담이 꽤나 비중 있게 다뤄져, 강시가 산을 넘어오다 요구르트 병을 밟고 넘어지는 신이 삽입되기도 한다. 선뜻 극의 흐름을 깨는 듯한, 이해하기가 힘든 이러한 장면들은 그 시대를 추억하기 위함이자 학생들의 순수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90년대 대만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강시, 홍콩할매 등의 도시괴담이 대유행 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학창시절에 빨간마스크가 대유행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얼핏 수긍이 간다. 그 시절 우리가 빨간마스크를 피하기 위해 손등에 犬을 쓰고, 분신사바를 하며 펜이 스스로 움직일까 걱정했듯이, 이들은 강시가 밤중에 산을 넘어올까 마음 졸였던 것이다.



# 예쁜 장면

대만 청춘 영화에는 예쁜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 우리들의 청춘과 첫사랑은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소녀시대는 그야말로 예쁜 장면들로 가득 차있다. 임진심과 서태우는 서점에서 처음으로 서로에게 두근거림을 느끼는데, 이 장면에서 해질 무렵의 따뜻한 햇빛이 말 그대로 쏟아진다. 서태우가 임진심을 데려다 주는 장면에서는 밤 골목이 주는 특유의 감성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두 사람이 밤에 빈 공원에 가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예쁘게 연출되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은 놀이공원의 야경처럼 로맨틱하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아름다운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최고의 명장면인 유성에게 소원을 비는 장면은 설명도 필요 없이 그저 예쁘다.









‘그 시절’에서도 예외 없이 예쁜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둘이 함께 공부하는 장면, 친구들이 다같이 해변에 앉아 꿈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데이트 하는 장면, 지진 후 두 주인공이 밤하늘을 보며 통화를 하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의 소녀시대'가 빛과 분위기를 통해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면, ‘그 시절’에서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배우들의 맑고 순수한 얼굴이다. 극중 아허가 션자이에게 ‘유치하다고 말을 하는 너의 모습이 너무 예뻤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 션자이 역의 배우의 깨끗한 피부와 솜털 같은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청춘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 그 시절엔 알지 못했던


인연의 시작은 늘 그렇듯 악연이다. 영화 초반의 두 사람은 늘 다투지만 일련의 소소한 사건들을 거치며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대신해 혼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여자 주인공들은 처음으로 남자주인공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위해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용감한 행동들을 감행하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반하게 된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임진심은 서태우에게 부당한 벌을 내리는 선생님에 대항하여 전교생 앞에서 당당한 발언을 한다. ‘그 시절’에서 모범생이었던 션자이는 친구들을 서로 의심하라는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결국 남자주인공 무리와 함께 벌을 받는다. 이처럼 남녀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변화하고 가까워지며 닮아간다. 그리고 결국 서로를 좋아하게 되지만, 첫사랑 영화가 늘 그러하듯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변해버린 자신의 마음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상대방의 마음을 알 길이 있으랴. 사춘기인 그들에게 진심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늘 진심을 숨기고, 늘 돌려 말한다. 우리의 첫사랑이 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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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녀시대’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두 영화를 본 후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의 소녀시대는 두 학생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라면, ‘그 시절’은 우리의 아름다운 청춘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나의 소녀시대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 시절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며, 나의 소녀시대가 사랑에 좀 더 집중했다면, 그 시절은 청춘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나의 소녀시대’는 온전히 두 사람의 관계와 두 사람의 감정에 주목한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 임진심의 시선을 따라가기 때문에 처음 볼 때는 자연스레 임진심에 감정 이입하여 그녀의 시선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보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남자의 시선과 감정변화에 주목하게 된다(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서야 비로소 알 수 없었던 남자의 행동과 표정을 이해하게 된다. 즉 ‘나의 소녀시대’는 다시 볼 때 보이는 것이 많은 영화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소녀시대는 예쁜 장면들로 점철된 영화이다. 그래서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현실감이 떨어지는 장면이 너무나 많다. 평범한 학생과 일진의 우정과 사랑, 선생님에 대한 전교생의 반항과 도전 등 이 영화는 사실 판타지에 가깝다. 이 영화가 유치하다는 평가는 아마 이러한 장면들 때문에 나오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판타지이기에 아름답고, 판타지이기에 설렌다. 우리에게 있었을 것 같지만 절대 없던 첫사랑의 이야기이다. “학창시절을 기억 조작시켜주는 영화”라는 누군가의 리뷰는 이 영화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반면 ‘그 시절’은 두 사람 위주로 서사를 이끌어가면서도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있다. 커텅의 친구인 아허, 쉬보춘, 라오차오, 랴오잉홍과 션자이의 친구인 후지웨이까지 영화는 일곱 명의 청춘을 빼놓지 않고 그려낸다. 그래서 제목의 “좋아했던”은 커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섯 남학생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첫사랑을 앓았고, 영화는 예민한 시선으로 이를 포착한다. 커텅은 짓궂게, 아허는 성숙하게, 쉬보춘은 멍청하게, 라오차오는 엉뚱하게, 랴오잉홍은 유쾌하게 션자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소녀”가 아니라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다. 마지막 션자이의 결혼식에 다섯 명이 모두 모여 션자이를 좋아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 시절’ 두 사람의 첫사랑은 ‘사랑’보다는 ‘첫’에 방점이 찍혀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청춘과 사춘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2차 성징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수업시간에 자위하는 장면, 쉬보춘이 발기하는 장면, 나체 장면 등 자칫하면 더러워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을 영화는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성적인 장면은 되려 순수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끊임없이 이들이 이제 막 2차 성징을 시작한 어수룩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그래서 이들의 사랑도 미숙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대사 중, “그 시절 여자는 남자보다 성숙하고, 그 성숙함을 견딜 남자는 없다는 것이다”라는 대사는 청춘의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커진텅과 달리 션자이는 너무나도 성숙하다. 션자이는 커진텅의 유치한 모습에 끌리지만, 결국 그들은 유치함의 차이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션자이는 커진텅이 마음이 진지한 것이 아닐까 봐 두려웠고, 남자는 여자의 진지한 모습에 겁을 먹는다.


그러나 실상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커진텅에게 션자이는 청춘 그 자체였으며, 커진텅이 좋아했던 것은 션자이를 사랑한 자기 자신이었다. 커진텅의 대사 중 “만약에 너가 사라지면 내 추억도 사라지는 거니까”, “나도 널 좋아했던 그 시절의 내가 좋아”라는 대사는 이 영화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그 시절’은 ‘나의 소녀시대’와 같은 둘만의 에필로그가 필요가 없다. 첫사랑은 그 시절일 뿐이다.


요컨대 ‘나의 소녀시대’는 예쁜 첫사랑 판타지라면, ‘그 시절’은 우리 모두에게 있었을 법한 첫사랑 이야기이다. 두 영화를 비교하자면, ‘나의 소녀시대’는 더 재미있는 영화고, ‘그 시절’은 더 좋은 영화이다. 나는 분명 ‘그 시절’에 더 높은 평점을 줄 것이지만, ‘나의 소녀시대’를 더 자주 꺼내보게 될 것 같다.



<크라임씬>의 세계, 우리 모두의 역할놀이


이르름


여름. 찐득한 더위와 맥주, 열대야, 그리고 납량특집의 계절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나는 온갖 분장한 귀신들과 어둠을 비추는 적외선 카메라, 으시시한 배경음악의 조합이 만드는 무서움이 어떻게 더위를 식힌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꽁꽁 숨어 들어가 더 더워질 뿐이었다. 이런 류의 공포물은 연출을 통해 주로 깜짝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반면 추리는 일종의 능동적인 공포라 할 수 있다. 추리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것에 대해 추측하는 것으로, 추리물은 범죄나 사건에 대해 단서를 모아 결론을 내리는 장르다. 즉, 안전한 위치에서 두렵고 기이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두려움을 해결해줄 실마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추리의 핵심이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숨겨진 진실을 추구하며 공포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진실을 발굴하고 나면 성취감과 더불어 서늘하고 짙은 여운이 남는다. 그래서 기나긴 여름방학마다 나의 선택은 추리소설이었다. 인간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공포를 파헤치고자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은 마음 속 온도가 조금 낮아지는 듯도 했다.


JTBC의 <크라임씬>은 추리를 예능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출연자들은 각 에피소드마다 롤 카드를 뽑아 하나의 역할을 맡고, 본인만의 진범/결백 여부와 해당 사건에서 본인이 가지는 위치와 이야기를 알게 된다. 범인만이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용의자들은 끊임없이 발견되는 불리한 증거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각 출연자는 역할에 걸맞은 분장과 의상을 착용한 후 범죄 현장 및 용의자들의 근거지로 구성된 세트장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증거를 수집하고 다른 용의자들과 소통하며 진범을 밝혀내야 한다. 이 만들어진 세계에서 범죄 사건에 얽힌 인간의 극단적인 욕망을 읽어내고 숨겨진 것을 찾는 추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추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수적이다. <크라임씬>의 기초가 되는 이야기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제작진이다. 이야기의 큰 흐름에 따라 단순화된 범죄 현장이 만들어지고, 사건과 관련된 역할, 그리고 각 인물의 역사가 제시된다. 그리고 제작진에 의해 점이나 흉터, 타투나 상처 같은 신체적 특징이나 각자의 생활 공간에 놓인 편지와 일기장, 계약서 등의 물리적 증거들이 사건 현장에 작위적으로 흩뿌려진다. 그리고 출연자들은 주어진 역할 안에서 공통적으로 성실하고 재치 있게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인공적인, 그래서 반드시 답이 존재하는 <크라임씬>의 세계는 하나의 추리게임을 해나가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의도적이고 논리적인 <크라임씬>의 세계에서 각각의 역할들은 피해자를 둘러싸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범인검거라는 단일한 목적을 지닌다.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결국 서로의 발견을 공유하고 함께 진실에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제작진이 부여한 역할과 관계 이상의 연결고리들이 생성되는데, 여기서 <크라임씬>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등의 특성을 빗겨나간다. 출연자들의 역량에 따라 주어진 상황 이상으로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더 풍부한 결과물을 낳게 되는 것이다.


각각의 출연자에게 역할이 주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다양한 속성들이 무너지며 나타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출연자 자연인의 나이나 경력에서 오는 권력들이 상당히 무력화된다. <크라임씬>이라는 역할놀이에서만 주어지는 새로운 권력인 나이나 재력 등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달라지고, 현실의 위계를 뒤집는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크라임씬>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중년의 장진이 20대의 인기 DJ가 되기도, 아이돌 정은지가 30대 박지윤의 예비 시어머니로 분하기도 하며, 김지훈은 매 화마다 온갖 충격적인 정체의 인물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 놀이는 외모나 지능에 대한 비하로 이어지기 쉬운 출연자들 간의 멘트가 덜 위험하게 느껴지는 안전장치로도 작용한다. 나름의 평등해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악의 없는 장난이자 역할이 갖는 전형성과 반전된 지위에 대한 비틀린 농담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하나씩 입게 되면서 출연자들은 설정 안에서 도리어 행동과 발언의 자유를 얻는다.


출연자와 역할의 성별이 거의 대부분 고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여성 출연자가 남자 역할을 한 경우도 존재했으나, 아무래도 몰입 측면에 방해가 되므로 잘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연자들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은 상당히 다양한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다양한 애정관계나 가족관계가 등장하며, 퀴어도 여러 차례 다뤄진다. 살아온 궤적 또한 흔한 삶의 형태를 보이기보다는 극적이고 낯선,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은 형태를 띤다.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이야기 또한 매우 극단적이고 단순화된 상태지만, 출연자들의 플레이를 통해 살이 붙여지고 생명을 얻는다. 다채로운 일련의 역할들을 통해 <크라임씬>은 자연스레 낯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정체성과 욕망들을 조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의 다양성과 의외성은 흥미로운 비밀들과 단서들, 그리고 복잡한 관계설정을 통해 흥미를 유발해야 하는 추리의 장르적 특성 덕분이기도 하다. 추리물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개연성 대신 충격과 재미를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하나의 역할 놀이로 제작하는 것은 범죄 상황을 단순히 게임으로 환원시킬 일말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크라임씬>은 악한 피해자를 전면에 세워 이런 부담을 일부 빗겨나간다. 이는 각 플레이어에게 동기(원한관계)를 부여해주고 추리에 혼선을 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이번 시즌 우승자는 상금을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했다.) 더불어 <크라임씬> 안에서의 역할놀이는 여러 차원에서 현실 세계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크라임씬>의 세계는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세계가 아닌, 화면 밖의 실제 세계와 연결된 허구일 뿐이라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전달된다.


일례로 출연자들은 사건현장 안에서도 방송에 대해 걱정하며 제작진을 언급하거나, 편집이나 실제 세계에서의 반응과 비평을 의식하는 등의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 과정에서 출연자의 자연인으로서의 성격적인 면모나 연예인으로서 가지는 이미지적 면모들이 주어진 역할이라는 껍데기를 비집고 나온다. 또한 각 에피소드들의 시간배경에서 오는 차이를 이용하여 동일한 인물이 서로 다른 에피소드에 재등장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는 언뜻 연속성을 통해 <크라임씬>만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가상의 이야기보다는 재등장한 인물과 그를 연기하는 출연자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20년 가량의 시간차를 둔 에피소드에서 박지윤이 둘 다 탐정을 맡자 나중 에피소드에서 그는 유명한 탐정 고모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세계관의 연속보다는 박지윤이라는 연기자 자체의 반복과 그리고 별개의 두 사건에서 다른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이전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농담을 던지는 동료 출연자들이다. 마찬가지로 하니가 출연했을 때 EXID 멤버들을 졸업앨범에 합성하는 등 현실에서의 출연자와 관련된 정보들이 소품에서 깨알같이 활용된다. 그리고 이런 장난스러운 조작들이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크라임씬 작가 살인사건을 다루는 시즌3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특성들이 총 집합한다. 해당 시즌의 지난 사건들에서 각 출연자들이 맡았던 인물들의 오마주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출연자들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실제와 가상이 섞인 세계에서 추리를 진행한다.




(JTBC 캡처)




출연자들이 제 4의 벽을 넘나드는 것은 더 나아가 시청자들의 능동적인 개입을 돕는다. 시청자는 <크라임씬>의 무대 안팎에서 독특한 위치에 놓인다. 따로 연기할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시청하며 출연자/이야기 속 인물들과 함께 추리할 수 있는 능동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크라임씬>은 시청자들이 범인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실시간으로 지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이 발견한 단서들만을 조합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겪지만, 무대 위의 용의자들이 가지는 의심의 흐름과 시청자들의 투표 결과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추리는 또다시 책이나 영화 같은 완결된 형태에서 벗어난다.


시청자들에게 열려있다는 점은 시청자들 사이의 소통이 활발해질 때 가장 매력적이다. <크라임씬>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기사를 찾아보기는 힘든 반면, 나무위키와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에서는 각 화의 전개와 인물들 설명, 알리바이와 단서를 통한 추리 과정, 그 에피소드 전체에 대한 분석과 평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평가에 제작진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많은 불만사항이 반영되어 시청자들은 추리의 토대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들이 모여 더 즐거운 덕질을 낳는다.


<크라임씬>에서는 하나의 정돈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큰 규모의 역할놀이가 펼쳐진다. 다채로운 캐릭터 플레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우리 모두는 직접 추리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이 개입한 역할극은 스크린 안팎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추리와 이야기, 예능과 두뇌싸움 등 폭넓은 재미를 낳는다. 무더운 여름 밤, <크라임씬>을 한 회씩 꺼내본다면 누구든 이 거대한 판에서 탐정이 되어 집중하며 키득거리는 100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역할놀이이자, 추리게임이다.



설리만큼은 아니어도


예청그릴스



덕심도 문장력도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창간호의 한 바닥이 주어졌다. 시작이라는 부담감을 재미난 소재로라도 극복해보자는 생각에 머리를 굴린다. 근래의 나를 돌이켜보니 최근 그나마 ‘열의를 가지고’ 하는 일은 인스타그램이다.


정신 없이 계정의 바다를 떠돌다 보면 지극히 관음증적인 ‘나’ 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는 자신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그것을 본다. 손가락을 잘못 놀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내가 본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스크롤을 쭉쭉 내리면서 누군가 올리는 사진이나 영상을 마음껏 감상하면 된다. 작은 네모들의 모자이크로 된 세계는 내 안의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요즘 ‘훔쳐보는’ 대상은 설리다.







우선 그녀는 예쁘다.

이건 그 세계의 암묵적인 공식이라도 되는 것인가? 예쁘거나 매력적이거나 멋있어 보이면 우선은 팔로우하고 본다. 초창기에만 해도 팬들에게 ‘셀카고자’ 라는 짓궂은 별명을 들었던 설리가 이젠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한 것인지 올라오는 사진마다 예뻐서 ‘팔로우할’ 맛이 난다.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재밌어서다. 그녀가 올리는 사진들은 심심찮게 화제가 된다. 하도 논란거리가 되어서인지 잠시 계정을 닫기도 했던 그녀가 이제는 대놓고 대중의 반응을 노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활발하게 사진을 올리고, 대중은 그것들에 반응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빠지게 된 결정적 계기를 꼽자면 그건 그녀의 ‘ㅉㅉ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얇은 옷을 입은 채로 찍힌 사진 속에서 그녀의 가슴의 ‘그’ 부분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던 것이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설리가 과연 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에 대해 열띤 논의를 펼쳤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의 사진에 대한 여러 편의 온라인 기사와 사진 아래 각자의 추측과 확신 혹은 비난과 감탄으로 달렸던 수많은 댓글들이다.

‘누군가가 브래지어를 착용했는지 안 했는지’가 엄청난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새삼 평소 좋아하던 할리우드의 연예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온몸을 노출하거나 음식에 침을 뱉는 식의 물의를 일으켜 논란이 되던 그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연예인으로 살기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인들도 패션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가슴을 드러내고는 하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논란거리가 될 수 있기는 할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해외 여행을 할 때마다 한번씩 우리나라가 유독 가슴에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선 노출이 항상 성적이다. 내가 드러내는 것은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 버린다. 신체의 굴곡과 라인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와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더울 때에는 벗어야 한다는 주의여서 여름에 민소매를 입는 것을 좋아하는데, 입을 때마다 엄마의 잔소리는 덤으로 따라 온다. 엄마 말에 따르면 외국에선 되는데 우리나라에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냥 한 귀로 흘려 버리는 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살을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는 날이면 나부터 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볍고 시원해서 좋기는 해도 민소매를 입는 날이면 사람이 많은 길거리를 지날 때에는 얇은 겉옷이라도 걸쳐야 마음이 놓인다. 내가 더워서, 내가 좋아서 조금 더 살을 드러낸 것뿐인데, 그들을 위해, 마음껏 보라고 입은 것처럼 구는 시선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아래위로 훑는 시선이 싫어서 치마도 잘 못 입는 내게 그런 시선은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다. 속옷이 보일 듯 말듯한 길이의 치마를 입고도 씩씩하게 잘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민소매를 입을 때에는 속옷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우리나란 남이 속옷을 착용했는지 안 했는지도 상당히 중대한 관심사인 곳이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너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맞춰 보겠어’ 라는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민소매를 입을 때에는 속옷도 제대로 차려 입어줘야 한다. 만일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내 의도와 상관없이 헤픈 사람이 되어버리거나 살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벗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설리를 보고 ‘너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맞춰 보겠어’ 라는 식으로 맹렬히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이 곳은 가슴 한번 드러내고 다니기 피곤한 곳임을 깨달았다. 내가 내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왜 이상한 일 혹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맨 살을 드러냈을 때에는 왜 남이 내 몸을 훑는 시선을 감당해야 하며,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극도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버리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사는 걸 한층 더 피곤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설리를 다룬 어떤 기사에서는 그녀가 우리 사회의 ‘리트머스’ 같다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암암리에 작동하는 무언의 금기들을 노출한다는 점에서다. 그녀는 연예인이기도 하지만 여자 연예인이기도 하다. 그녀를 향한 시선은 연예인을 보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여자를 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에게 작동하는 시선이 그녀에게 작동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제 설리는 자신의 행동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대중의 모습에 질리다 못해 역으로 그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어떤 의도에서든 (혹은 아무런 의도가 없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드러내주는 것은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이건 그저 개인적인 단상이다. 사회에 팽배한 남성중심적 시선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요즘 소소한 덕심을 키우고 있는 설리에 대해 떠들어 본 것이다. 많이 피곤할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도 아니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쓸데 없는 일이 연예인 걱정이라는 말을 들은 후로 그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단지 얘기해보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다. 해외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만 들어서면 느끼게 되던 그 압박감들. 00 살이면 당연히 해야 하고 끝내야 하는 일들. 한국에서 나이와 학벌과 성별이 결정하는 모든 임무들에 대한 피곤함. 그 모든 것들은 내가 결정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원치 않은 시선들이 내 인생에 던져진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 적도 그것들을 바란 적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관음증이라 부르겠다. 한 연예인이 노브라인지 유브라인지가 진지하게 논란이 되어버리는 곳에서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는 것, 내 멋대로 살면서도 정상적이고 보통의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타인을 훔쳐보고 훔쳐봄을 당한다.


어찌 보면 이건 투정이다. 내게 던져지는 시선들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에 유독 설리를 훔쳐보는 것이 더 재밌을지 모른다. 설리의 사진은 먹이처럼 던져지고 사람들은 반응한다. 설리는 그것을 통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지겨워하는 것 같기도, 사람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기에 상처받은 설리는 없는 것 같다. 진짜 설리는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위안을 받고는 한다. 설리를 바라보는 희한하고 왜곡된 시선들을 가리켜 관음증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웃어넘겨버리면서.



어떤 고백: 내 안의 un-PC함에 대하여


레몬밤




머리를 감는 시간은 일상적인만큼이나 비일상적이라서, 샴푸로 시원하게 두피 구석구석을 닦아내다 보면 바깥에서 가져온 먼지들과 함께 숨어있던 기억들이 거품에 하나 둘 섞여 나오곤 한다. 그토록 기억해내고 싶던 순간에는 절대 떠오르지 않았던 노래의 제목이라든지, n년 전에 배웠던 수학 공식이라든지, 잊고 싶었던 과거의 순간들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더불어 머리를 감는 순간만큼은 인간의 창의력이 배가 되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것들에 반짝하는 통찰력이 발휘되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샴푸와 함께 씻겨 내려가지만 다른 것들은 오랜 시간 머릿속을 맴돈다. 이 글은 샴푸와 트리트먼트와 샤워기의 물에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머리에 들러붙어 그를 간지럽히던 생각에 대한 글이다.

그가 머리를 감고 나서도 개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의 가치관을 그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가치관이 무엇이길래 그러느냐 묻는다면 그는 아마 PC라는 짧은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인 올바름. 조금 더 설명해달라 부탁하면 그는 한 번에 정리되지 못한 말들을 고르며 자신만의 기준을 나열할 것이다. 그러니까, 혐오발언에서 자유로운 것.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 대상화 하지 말 것. 예컨대 칭찬을 포함한 외모 평가 하지 않고, 여자는~ 남자는~ 하면서 인간을 생물학적 성별로 환원 시키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것.


적어도 그는 대외적으로 PC한 삶을 표방하고 있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어느 수준 요청하며 지내왔다. 사실 남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아직 그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 자신도 un-PC함[각주:1] 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매일매일 스스로의 사고와 언행을 돌아보며 조심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자신이 정한 기준 이상으로 친밀한 사람들에게는 속으로 어느 정도의 기준을 들이미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 그 사람의 PC 수치가 기대보다 낮으면 속으로 실망하거나 혹은 그 사람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un-PC함을 목도한 경우에는 조용히 연을 끊기도 했다. un-PC함이 부재하는 세계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바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소우주일지언정 PC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 필요했고, 작게나마 자신의 어항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조금 더 깊은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숨을 시원하게 쉴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일과를 모두 마친 저녁 머리를 감던 그가 본 것은 그의 내면에 깊게 뿌리내린 un-PC함이었다. 사실 un-PC함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왜 올바르지 않은지 알아냈다면 마음에 새기고는 다음부터 조심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그는 돌이 아니라 깊은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그 나무는 10년 이상 그의 삶에 뿌리 내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쉽게 뽑히지 않을 나무였다.


         “내 삶은 덕질로 점철되어 있어.” 그는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좋아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최초의 덕질은 아이돌덕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그의 아이돌 덕질은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어 그의 삶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그는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면 그저 앓고 좋아하고 새우젓이 되어 버리는 것이 덕질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공개 방송 방청을 간다든지 하는 적극적인 덕질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덕질에 꾸준하게 지출을 하고 있었다.



         아이돌은 상품이지.


머리를 감던 도중 그에게 떠오른 생각은 간단하게 이 한 문장이었다. 김이 샐 만큼 당연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뭐 이렇게 구구절절 늘어놓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PC함을 추구하던 자신이 너무나 당연하게, 무비판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덕질에 임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어느 시기부터 그는 뭐랄까, 일종의 심사위원, 평론가 같은 느낌으로 아이돌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이돌 산업의 상품으로써, 아이돌들은 조금이라도 더 잘 ‘팔리기’ 위해 자신의 상품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들이 증명에 실패하면, 그는 가차없이 지갑을 닫았고, 일기장에 아무도 보지 않을 비판들과 개선 방안을 적어 내려가곤 했다.



그가 생각하던 아이돌의 상품가치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1순위는 외모였다. 외모보다는 실력으로 주목받는 멤버라도 어느 정도 그가 수긍할 수 있는 얼굴과 몸매를 가져야 했고, 소위 ‘방송물’을 먹은 티가 나야 했다. 얼굴이나 키, 몸매가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 그는 속으로 “쟤는 아이돌을 할 애가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활동기에 외모 관리를 하지 않은 티라도 난다면 그것은 아이돌로서 실격이었다. 그는 아무리 콩깍지를 끼고 봐도 “00가 휴식기 동안 잘 먹어서 얼굴 살이 붙었다. 볼살 오른 모습도 귀여워!”와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에게 외모로 먹고 사는 자가 관리를 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인 셈이었다.


다음으로는 실력이었다. 엄청난 실력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실력이어서도 안 됐다. 또 데뷔 이후 꾸준히 실력이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관심이 없던 아이돌 그룹 멤버도 실력이 는 것이 눈에 띄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곤 했다. 적어도 퍼포먼스에서 못해서 튀는 것은 그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콘서트에서 가사나 안무를 숙지하지 못한 것이 티가 나서도 안 됐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포장이 될 수 있어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돈 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그는 외모나 실력 어느 한 쪽이 부족할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아이돌들이 둘 다 평균 이상을 갖추기를 바랬다. 그가 가장 애정을 쏟는 멤버들만 봐도 그룹에서 외모와 실력 모두가 아쉬운 소리를 듣지 않는 멤버들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남들을 재단하고 있었고 아이돌들에게 자기가 가진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이미지 관리였다. 그는 아이돌의 인성을 보고 좋아한다거나, 유사연애처럼 덕질을 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이돌은 그저 판타지와 이미지를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도 철저하게 그들의 이미지만을 소비했다. 아이돌이 뒤돌아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공개되지 않는다면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임을 들키지 않는 것. 그저 보여지는 존재. 대중에게는 항상 대중이 인식하고 있는 그의 또다른 자아로 –그것이 자신의 본래 성격과 닮았든지 닮지 않았든지 간에- 나타날 것. 그것이 그가 아이돌에게 암묵적으로 바라던 것이었다. ‘인간미’는 아이돌에게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아이돌은 항상 완벽하게 만들어진, 하지만 닿을 수 없는 곳에 진열된 제품이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던 그의 덕질 기제였다. 막상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바로 나올 수 있는 답안들이었으니까. 어쩌면 그가 un-PC함에 대한 항체를 너무나도 적게 가지고 있기에 심각하게 생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상품이 되면 어떤가?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금액을 벌어가는데. 어찌됐든 간에 이론적으로 PC함을 추구하는 그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해야만 했다. 어떻게 인간을 상품으로 볼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외모 평가를 할 수 있는가? 아이돌이 이미지로 먹고 살지언정 ‘사람’인 티를 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이성의 언어로 자신의 덕질을 표현하는 버릇이 있어서 아이돌을 평가하는 위치에서 덕질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정제된 언어로 왜 그 노래가 좋은지, 왜 그 가수가 좋은지를 정리하고 싶어하던 그였으니까. 새로운 ‘떡밥’이 뜨면 하염없이 앓았지만, 끝까지 새우젓으로 남기에는 그의 평론가적 기질이 너무 강했다. 혹은 그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방어할 기제를 만드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이돌의 인성을 좋아하거나 아이돌을 유사 연인처럼 생각하면 나중에 실망할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소위 ‘현타’라 불리는 현실 자각 시간을 맞고 지난 세월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아이돌보다 우위에 놓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는 이런 자신이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덕질과 un-PC함은 떨어질 수 없었고 그는 덕질과 떨어질 수 없었으니까. 그는 생각했다. 그들을 ‘사람’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그들의 외모가 아니라 퍼포먼스만을 멋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들과 나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리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아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몸에는 먼지들이 들러붙기 마련이고 두피에서는 기름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몸을 씻는다. “덕질 할 때 나의 un-PC함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는 말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은 아이돌을 완벽한 상품으로 생각하는 입장을 버리고 덕질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러한 un-PC함을 머리 유분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머리에 기름이 돈 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적어도 매일 깨끗하게 샴푸를 하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머리를 감으며 구석구석 숨어있는 un-PC함과 마주한다.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크게 틀어놓은 채.


  1. 이미 명사화 된 것에 또다시 명사형 접미사를 붙이는 것은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거슬리지만 많이들 이렇게 쓰고 있고, 본인 입에도 붙은 형태라서 어쩔 수 없다고, 그렇지만 꼭 이 내용을 글에서 언급해 달라고, 그는 말했다. 의외의 곳에서 고지식한 그다. 아마 un-PC함라는 단어도 문법적으로 이상하다며 속으로 찝찝해 할 것이다. [본문으로]

국내에서 K-POP을 소비하는 지극히 잔인한 방식에 대하여

가수 · 아이돌 · 아티스트


왕수박




 쟤네는 가수라는 애들이 노래를 왜 이렇게 못해?’ 음원과 음반을 발표하고 무대에 서는 모든 이들에게 가수라는 잣대가 들이밀어지는 것에는 얼핏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가수라고 일컫는가? 한국인들이 가수라는 직업에 부여하는 의미는 사실 조금 특별하다. 가수의 사전적 정의는 노래 부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나, 한국인들의 노래와 업에 대한 잣대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이 동네 노래방에 그득그득 들어차있는 한국에서 노래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특별한 일인 것이다. 나도, 내 친구도, 내가 아는 누구도 할 만큼 하는 노래로 그 돈을 번다는데, 타고난 음역대와 성량이 무조건 기본이 되어야 하며, 외모와 잘 빠진 커리어는 그저 옵션일 뿐. 발성과 고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가 엄격한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기준은 히트 작곡가들을 보유한 음반사들을 중심으로 발라드, 포크 등 가창력을 뽐낼만한 장르를 입혀 훌륭한 가창인들을 스타로 만들던 과거 한국 대중음악계와 쿵짝이 딱 맞아 떨어졌다.



제주도에서의 일상을 공개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금 끌어모은 이효리, 예쁜 소녀의 전형들을 모아 단번에 폭발적인 인기를 끈 트와이스, 대국민 오디션으로 데뷔한 윙크남박지훈, 칼군무 퍼포먼스와 10대를 대변하는 가사로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수상한 방탄소년단. 해외에서 K-POP 아티스트로 소개되고 있을 이들은 모두 자국에서 가수라는 카테고리로 평가받는다.




 물론 화려한 고음과 음색을 유감없이 뽐내는 가수들은 언제나 환호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지만, 한국 음반시장이 막 틀을 갖춰나가기 시작할 무렵 인기를 끌었던 유형과 장르는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 사실 그 뿐이다. 가수는 가창력이 좋아야 한다는 인식의 뿌리가 이렇게나 단단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고음 위주의 가창력이 너무나도 당연한 가수의 필요조건으로 굳어지면서 기이한 모순이 하나 탄생했다. 무대 위 가수의 활동 영역과 장르가 너무나 다양함에도, 춤이나 외모 등 음악활동의 다른 조건들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스탠딩 상태로 뛰어난 가창력을 보여주는 이들이 가수 카테고리에서 언제나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가수의 뜻이 노래하는 사람이니 노래로 평가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무대 위에 선 모든 이들을 가수라고 통칭하지 않는가. 초기에는 좁은 의미의 어휘가 확장된 실제를 포괄하지 못하는 현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한국인들이 고음을 뽐내는 발라드만 주구장창 들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과거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도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가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대중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가창력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저 춤으로 성적 매력을 뽐내는 대상, 춤추며 립싱크하는 뻐끔이 정도로 평가받은 한국의 댄스 가수들은 댄서도 퍼포먼서도 아니었으며, 가수도 아니었다. 일부는 춤과 노래를 동시에 소화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가수 지위는 얻지 못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을 가수라고밖에 부르지 않으면서, 미디어와 대중들은 가수와 고음 가창 사이의 이상하리만큼 과한 유착을 만들어 낸 뒤 가수 개념 자체를 편협하고 비좁은 일종의 고급 자격으로 왜곡시켰다. 또한 가창력의 상품화는 점점 신격화하는 동시에 퍼포먼스와 댄스 어필은 기이하리만큼 상품이라며 비난했다. 비좁은 한국 음악 시장에서 음악은 곧 보컬이라는 편협한 초기의 인식과 시장구조가 모든 음원, 음반을 발표하는 뮤지션, 연예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너무나도 견고해진 나머지 지금까지도 음원, 음반을 발표하는 모든 대상에게 적용되고 있다. 퍼포먼스 중심의 아티스트는 댄스 가수, 10대들에게 인기를 끄는 비주얼 중심의 밴드는 아이돌 가수로 인식된다. 래퍼도 가수고 락 밴드의 드럼 멤버도 무대에 서니까 가수란다. 결국 노래를 잘해야만 가수이고 뮤지션이 될 수 있으며 음악 활동의 필요조건은 곧 고음 가창이 되어버렸다.



가창과 춤이 모두 A인 가수보다 가창이 A+인 가수가 진정한 가수가 된다.






 이 틈에서 어차피 아이돌도 가수라면 노래도 춤도 외모도 잘 해보자라는 식의 하이엔드 K-POP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LP 음악을 사랑하는, ‘나는 가수다를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세대들에게 저게 가수냐며 비난받던 아이돌들은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고, 해외에서 미친듯이 팔려나갔다. 화려한 외모, 칼군무로 대표되는 퍼포먼스, 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세련된 편곡과 캐치한 멜로디를 모두 라이브로 소화하는 K-POP 밴드들이 해외에서 줄줄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세계적인 팝스타가 됐을 것이라는 팬들의 공허한 절규는 점차 현실이 됐다.


 그러나 정작 국내 대중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기 짝이 없다. 그래봤자 해외에서의 K-POP의 성공은 허위이고 국뽕이 낳은 환상이며, 아이돌 문화는 여전히 대중문화 안에서도 외모나 성을 파는 가짜 가수들의 오타쿠 하위문화이다. 심지어는 싸이의 성과도 국뽕이란다. 대중들은 미국 팝계를 추종하지만 정작 현지에서 성공한 그는 여전히 벼락 맞은 B급 댄스 가수이다. 유명해졌기에 대우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처럼 대중들은 K-POP에 대한 객관화를 미룬 채 여전히 진정한 가수가 아닌 이들에 대한 사랑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한다. 물론 해외에서 일부가 인정받는다는 이유로,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이들의 영역에 꼭 긍정적 평가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개별 아티스트, 음반의 객관적인 완성도 또한 별개의 문제이다. 추가적으로 90년대 청소년들의 저항 문화가 아이돌에 대한 열광으로 이식되면서 광적인 팬덤 문화가 탄생했고, 이것이 K-POP 시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여전히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돌을 연예인 혹은 퍼포먼서나 엔터테이너로 소비하면서 동시에 보컬 중심의 가수 개념으로 인식하고 비난하는 것은 분명한 아이러니이다. 왜 우리는 무대에 서있는 모두를 여전히 가수로 남겨두며 그들과 그들을 남몰래 소비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이 지점에서 가수에 대한 기존 정의의 한계를 반성하기라도 하듯, 동시에 아티스트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내면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고전적인 예술가 개념이 대중음악계로 아주 간편하고 경제적으로 이식되었다. 기존의 가수 개념이 기계적인 가창력을 강조했다면, 아티스트는 표현위주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기존의 가수와 가창력에 대한 관념이 트렌드에 맞게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 뮤지션들의 표현은 뛰어나고 섬세한 가창력을 통해, 스스로의 음악적 능력인 작곡 작사 역량을 통해 발휘된다. 자연스레 아티스트 개념은 가창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작곡 작사를 하거나 음원 성적이 뛰어난 가수, 춤을 추긴 하지만 나름의 퍼포먼스 능력을 인정받는 가수들을 변호하는 동시에 K-POP 아이돌이 절대 넘어오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국내에는 ‘artist’라는 영어 어휘가 주는 왠지 모를 무게가 함께 수입된 것이다. 결국 아티스트의 칭호는 대형 기획사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인형처럼 조종해대는 아이돌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되었다. 이에 반항하듯 K-POP의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으나 아티스트 개념의 확장은 계획이라도 한 듯이 양쪽의 접점에서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가창력 중심의 기성 가수들은 거대 자본과 상업성에서 자유로운가? 그들은 과연 스스로 모든 것을 프로듀싱하고 표현하는가? 그들은 정말 미디어가 만들어내지 않은 진정한(?) 예술가들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절대 ‘No’이다. 기성 가수들 역시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음반사들의 철저한 기획에 의해 성공했다. 그들은 연습생 시스템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티스트의 환상을 부여받기도 했다. 물론 이후에도 개인적 창작물이 거듭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소수의 가수들은 칭송받기 마련이지만, 아이돌의 유사한 노력은 폄하되거나 비웃음을 사는 데 그친다. 사실 기성 가수들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작곡 작사, 프로듀싱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특권에 불과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애초에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이들의 표현에 대한 기회는 상업적 성공 여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상업적으로 실패하는 앨범을 계속해서 발매해줄 수 있는 레이블이 과연 존재할까. 아마도 그건 기획사가 없는 인디 뮤지션들의 특권일 것이다. 결국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발생한 아티스트형 뮤지션의 개념은 아이돌과 기성가수를 똑같은 칼로 겨눈다. 일부 평론가들은 특정 상업 가수들을 보호하고 대중문화 내에서의 고급 취향을 계속해서 구별짓기 위해 예술성, 음악성 등 실체 없고 그럴 듯한 개념으로 새로운 포장지를 내놓았을 뿐이다. 이는 애초에 순수예술도 아닌 대중문화를 소비하면서 고급 취향을 가졌다고 믿고 싶은 대중들의 유사한 심리를 정확히 겨냥했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대중음악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자신의 작업물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진정한 아티스트의 모습은 과거 팝 씬을 왜곡하여 수입한 환상이며, 국내에서 굳이 찾자면 자본과 온전히 분리된 인디 씬에나 적합한 개념일 것이다.



 

 이렇게 아티스트 개념은 기존의 가수와 가창력이라는 굴레에 발목을 잡힌 채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재창조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만들어진 컨텐츠의 상업성을 표현하는 것이 포인트라면, 그 어떤 영역에서보다 헐렁해야 할 개념이 대중음악에서의 아티스트가 아닌가. 미국 팝 시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내한 공연이 열리면 우리가 눈에 불을 켜고 티켓팅하는 팝스타들은 한국으로 치면 아이돌에 가깝다. 한 줄의 멜로디에 탑 라이너 수 십 명이 달라붙고, 편곡과 엔지니어링의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들을 아티스트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이러한 창작 과정에의 참여 여부가 아니다. 물론 과정에 깊게 관여하는 모습을 마케팅에 활용하면 그의 상업적 가치가 더욱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아티스트가 모든 것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 그 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투입된 만큼의 거대하고 멋진 자본의 결과물을 끌고 갈 수 있는가. 그것이 발라드인지 댄스인지, 고음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라이브를 하지 않지만 잘 만들어진 무대와 춤으로, 누군가는 독특한 음색 하나로 아티스트라는 헐렁한 지위를 인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K-POP 아이돌들은 빌보드를 비롯한 각종 팝 매체에서 거창한 뜻 없이 아티스트로 일컬어진다. 아이돌이 음악적 역량에서 완전히 분리된 일본은 반대의 경우이다. 과거 일본에서도 아티스트형 아이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점차 아이돌의 존재가 엔터테이너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음악과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이제 일본의 대중들은 아이돌에게 어떠한 가창력이나 음악적 역량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돌의 음악은 사무소의 매상을 올려주는 하나의 굿즈일 뿐이며 대중성 있는 팝 음악으로서 기능할 의무가 없다. 오히려 애초에 없는 음악적 역량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은 극적인 셀링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엔터테인 요소들만을 당당히 내세우며 각종 미디어는 그들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소비할 뿐이다. 한국 대중들에게는 놀랍게도, 소녀시대는 일본에서 의심 없이 아티스트 혹은 가수의 취급을 받았다. 그들의 라이브와 안무 소화능력은 일본에서 아이돌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아티스트의 무언가로 비춰졌다.




AKB48의 음반은 언제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지만 정작음원 차트 최상위권에서 빈번하게 광탈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K-POP을 소비하는 방식은 좋게 말해 다층적이고, 실상은 매우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가수 혹은 아티스트의 역량을 갖춰야하며, 잘 만들어진 대중음악을 상업적으로 성공시켜 팝스타의 지위를 가져야 하는 동시에 연예인이자 엔터테이너로서 자신의 외모를 끊임없이 상품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이 모든 것을 해내더라도, 아이돌 혹은 댄스가수라는 이미 강등된 지위에 머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잔인함은 K-POP 컨텐츠의 질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누군가는 이것이 한국 아이돌 문화만의 특징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혹은 그들의 실제 역량과는 별개로 광적인 팬 문화나 외모가 상품화되는 방식 등 그들이 소비되는 방식 자체에 거부감이 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모순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는 아이돌 혹은 퍼포먼스 중심의 가수들을 한국에서 사용하는 아티스트 개념에 편입시켜달라거나 일본처럼 아이돌은 그저 아이돌로 봐달라는 구구절절한 요구가 아니다. 요컨대,

 



 ◎ 뮤지션으로서의 자질이 중요하다면, 왜 음악적 역량이 충분한 일부 K-POP 아티스트들은 이유 없이 평가절하 당하는 동시에 여러 외적인 잣대들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아이돌의 수동성이 문제라면 기성 가수들은 과연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운가? 동시에 아이돌은 음악적 영역에서 정말 온전히 수동적인가?



 ◎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기준을 또 다시 들이대고 싶다면, 음악적 역량과 표현은 그저 보컬에 한정된 것이냐는 물음에 답할 필요가 있다. 트와이스에게 어차피 노래 못하잖아라고 하는 것과 김범수에게 어차피 춤 못추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가? 물론 둘 다 엉뚱한 소리임에도 전자는 지나치게 합리화된다.



 ◎ 그럼에도 여전히 각자의 영역을 인정할 수 없으며 김범수의 가창이 훨씬 더 고급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돌의 외모와 퍼포먼스가 상품화되는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저급인가? 음색, 고음, 댄스, 예능감, 몸매, 얼굴 등의 갖가지 요소들은 자본 앞에서 모두 상품이자 구태한 소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우리는 연예인이 미디어의 상품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상품성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존엄한 인간이 상품화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아도르노를 읽으며 대중문화 전체를 겨누어 보라.



 ◎ 그럼에도 당신이 멜론차트를 듣는 와중에 순수한 음악의 영역으로 취급되는 진정한 가수들이 존재한다고 느낀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인디뮤지션들의 인기 요인은 과연 음악이 인디 성향을 띠기 때문일까? 레이블의 자본력이 인디펜던트 수준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음악이 거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는 않은가?



 ◎ 어떻게 보더라도 결국 음악적 역량이 부족한 것이 맞다면, 연예인 혹은 엔터테이너로서 충실하게 기능하고 있는 이들이 굳이 가수 혹은 (기이한 방식으로 신격화된) 아티스트 개념에 비추어 비난받아야 하는가? 왜 소위 일본식의 아이돌들까지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가수혹은 아티스트개념에 도달해야만 하는가?

 





  

덧붙임


 

 국가대표 아이돌을 뽑는다는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은 얼핏 일본 아이돌의 생존방식을 표방하며 K-POP의 지형을 새롭게 변형시켜준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요소들이 K-POP에 대한 대중들의 엄격한 시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제작진은 댄스, 보컬, 외모, 매력, 리더쉽, 예능, 인성, 프로듀싱 능력, 안무창작 능력을 누가 더 하나라도 많이 갖추었는가의 싸움을 붙이고 이를 지켜보는 모든 시청자들은 매우 엄정한 평가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결국 이러한 시선은 참가자들의 숨통을 옥죄었을 뿐만 아니라, 표를 손에 쥔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대단한 K-POP 가수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참가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그 자격들은 자본의 논리와 상품성과는 전혀 별개라는 듯, 그저 아이들의 아름다운 꿈을 응원한다며 미친듯이 투표한다.

 동시에 굴레 밖 대중들은 쟤넨 어차피 가수도 아티스트도 아니라며, 일본 오타쿠 문화를 표방한 포맷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동시에 투표 참가자들까지 함께 손가락질한다. 와중에 고귀한 가수의 기준에 도달한 참가자들을 간신히 인정해보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을 너무나도 불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본인의 그 엄격하디 엄격한 잣대들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대중들은 끊임없이 보고, 욕하고, 반복한다. 어쩌면 앞선 가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경계 논쟁은 이미 구닥다리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여전히 떠안은 채 K-POP 문화는 잔인한 채찍질 속에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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