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임씬>의 세계, 우리 모두의 역할놀이
이르름
여름. 찐득한 더위와 맥주, 열대야, 그리고 납량특집의 계절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나는 온갖 분장한 귀신들과 어둠을 비추는 적외선 카메라, 으시시한 배경음악의 조합이 만드는 무서움이 어떻게 더위를 식힌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꽁꽁 숨어 들어가 더 더워질 뿐이었다. 이런 류의 공포물은 연출을 통해 주로 깜짝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반면 추리는 일종의 능동적인 공포라 할 수 있다. 추리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것에 대해 추측하는 것으로, 추리물은 범죄나 사건에 대해 단서를 모아 결론을 내리는 장르다. 즉, 안전한 위치에서 두렵고 기이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두려움을 해결해줄 실마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추리의 핵심이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숨겨진 진실을 추구하며 공포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진실을 발굴하고 나면 성취감과 더불어 서늘하고 짙은 여운이 남는다. 그래서 기나긴 여름방학마다 나의 선택은 추리소설이었다. 인간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공포를 파헤치고자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은 마음 속 온도가 조금 낮아지는 듯도 했다.
JTBC의 <크라임씬>은 추리를 예능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출연자들은 각 에피소드마다 롤 카드를 뽑아 하나의 역할을 맡고, 본인만의 진범/결백 여부와 해당 사건에서 본인이 가지는 위치와 이야기를 알게 된다. 범인만이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용의자들은 끊임없이 발견되는 불리한 증거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각 출연자는 역할에 걸맞은 분장과 의상을 착용한 후 범죄 현장 및 용의자들의 근거지로 구성된 세트장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증거를 수집하고 다른 용의자들과 소통하며 진범을 밝혀내야 한다. 이 만들어진 세계에서 범죄 사건에 얽힌 인간의 극단적인 욕망을 읽어내고 숨겨진 것을 찾는 추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추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수적이다. <크라임씬>의 기초가 되는 이야기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제작진이다. 이야기의 큰 흐름에 따라 단순화된 범죄 현장이 만들어지고, 사건과 관련된 역할, 그리고 각 인물의 역사가 제시된다. 그리고 제작진에 의해 점이나 흉터, 타투나 상처 같은 신체적 특징이나 각자의 생활 공간에 놓인 편지와 일기장, 계약서 등의 물리적 증거들이 사건 현장에 작위적으로 흩뿌려진다. 그리고 출연자들은 주어진 역할 안에서 공통적으로 성실하고 재치 있게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인공적인, 그래서 반드시 답이 존재하는 <크라임씬>의 세계는 하나의 추리게임을 해나가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의도적이고 논리적인 <크라임씬>의 세계에서 각각의 역할들은 피해자를 둘러싸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범인검거라는 단일한 목적을 지닌다.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결국 서로의 발견을 공유하고 함께 진실에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제작진이 부여한 역할과 관계 이상의 연결고리들이 생성되는데, 여기서 <크라임씬>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등의 특성을 빗겨나간다. 출연자들의 역량에 따라 주어진 상황 이상으로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더 풍부한 결과물을 낳게 되는 것이다.
각각의 출연자에게 역할이 주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다양한 속성들이 무너지며 나타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출연자 자연인의 나이나 경력에서 오는 권력들이 상당히 무력화된다. <크라임씬>이라는 역할놀이에서만 주어지는 새로운 권력인 나이나 재력 등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달라지고, 현실의 위계를 뒤집는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크라임씬>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중년의 장진이 20대의 인기 DJ가 되기도, 아이돌 정은지가 30대 박지윤의 예비 시어머니로 분하기도 하며, 김지훈은 매 화마다 온갖 충격적인 정체의 인물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 놀이는 외모나 지능에 대한 비하로 이어지기 쉬운 출연자들 간의 멘트가 덜 위험하게 느껴지는 안전장치로도 작용한다. 나름의 평등해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악의 없는 장난이자 역할이 갖는 전형성과 반전된 지위에 대한 비틀린 농담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하나씩 입게 되면서 출연자들은 설정 안에서 도리어 행동과 발언의 자유를 얻는다.
출연자와 역할의 성별이 거의 대부분 고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여성 출연자가 남자 역할을 한 경우도 존재했으나, 아무래도 몰입 측면에 방해가 되므로 잘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연자들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은 상당히 다양한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다양한 애정관계나 가족관계가 등장하며, 퀴어도 여러 차례 다뤄진다. 살아온 궤적 또한 흔한 삶의 형태를 보이기보다는 극적이고 낯선,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은 형태를 띤다.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이야기 또한 매우 극단적이고 단순화된 상태지만, 출연자들의 플레이를 통해 살이 붙여지고 생명을 얻는다. 다채로운 일련의 역할들을 통해 <크라임씬>은 자연스레 낯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정체성과 욕망들을 조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의 다양성과 의외성은 흥미로운 비밀들과 단서들, 그리고 복잡한 관계설정을 통해 흥미를 유발해야 하는 추리의 장르적 특성 덕분이기도 하다. 추리물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개연성 대신 충격과 재미를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하나의 역할 놀이로 제작하는 것은 범죄 상황을 단순히 게임으로 환원시킬 일말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크라임씬>은 악한 피해자를 전면에 세워 이런 부담을 일부 빗겨나간다. 이는 각 플레이어에게 동기(원한관계)를 부여해주고 추리에 혼선을 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이번 시즌 우승자는 상금을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했다.) 더불어 <크라임씬> 안에서의 역할놀이는 여러 차원에서 현실 세계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크라임씬>의 세계는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세계가 아닌, 화면 밖의 실제 세계와 연결된 허구일 뿐이라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전달된다.
일례로 출연자들은 사건현장 안에서도 방송에 대해 걱정하며 제작진을 언급하거나, 편집이나 실제 세계에서의 반응과 비평을 의식하는 등의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 과정에서 출연자의 자연인으로서의 성격적인 면모나 연예인으로서 가지는 이미지적 면모들이 주어진 역할이라는 껍데기를 비집고 나온다. 또한 각 에피소드들의 시간배경에서 오는 차이를 이용하여 동일한 인물이 서로 다른 에피소드에 재등장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는 언뜻 연속성을 통해 <크라임씬>만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가상의 이야기보다는 재등장한 인물과 그를 연기하는 출연자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20년 가량의 시간차를 둔 에피소드에서 박지윤이 둘 다 탐정을 맡자 나중 에피소드에서 그는 유명한 탐정 고모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세계관의 연속보다는 박지윤이라는 연기자 자체의 반복과 그리고 별개의 두 사건에서 다른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이전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농담을 던지는 동료 출연자들이다. 마찬가지로 하니가 출연했을 때 EXID 멤버들을 졸업앨범에 합성하는 등 현실에서의 출연자와 관련된 정보들이 소품에서 깨알같이 활용된다. 그리고 이런 장난스러운 조작들이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크라임씬 작가 살인사건을 다루는 시즌3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특성들이 총 집합한다. 해당 시즌의 지난 사건들에서 각 출연자들이 맡았던 인물들의 오마주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출연자들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실제와 가상이 섞인 세계에서 추리를 진행한다.
(JTBC 캡처)
출연자들이 제 4의 벽을 넘나드는 것은 더 나아가 시청자들의 능동적인 개입을 돕는다. 시청자는 <크라임씬>의 무대 안팎에서 독특한 위치에 놓인다. 따로 연기할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시청하며 출연자/이야기 속 인물들과 함께 추리할 수 있는 능동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크라임씬>은 시청자들이 범인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실시간으로 지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이 발견한 단서들만을 조합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겪지만, 무대 위의 용의자들이 가지는 의심의 흐름과 시청자들의 투표 결과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추리는 또다시 책이나 영화 같은 완결된 형태에서 벗어난다.
시청자들에게 열려있다는 점은 시청자들 사이의 소통이 활발해질 때 가장 매력적이다. <크라임씬>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기사를 찾아보기는 힘든 반면, 나무위키와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에서는 각 화의 전개와 인물들 설명, 알리바이와 단서를 통한 추리 과정, 그 에피소드 전체에 대한 분석과 평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평가에 제작진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많은 불만사항이 반영되어 시청자들은 추리의 토대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들이 모여 더 즐거운 덕질을 낳는다.
<크라임씬>에서는 하나의 정돈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큰 규모의 역할놀이가 펼쳐진다. 다채로운 캐릭터 플레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우리 모두는 직접 추리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이 개입한 역할극은 스크린 안팎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추리와 이야기, 예능과 두뇌싸움 등 폭넓은 재미를 낳는다. 무더운 여름 밤, <크라임씬>을 한 회씩 꺼내본다면 누구든 이 거대한 판에서 탐정이 되어 집중하며 키득거리는 100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역할놀이이자, 추리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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