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가장 보통의 존재’들을 위하여[각주:1]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푸른수염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관객의 정동을 양떼 몰듯 몰아간다. 슬픈 장면에서는 슬픈 음악이, 즐거운 장면에서는 즐거운 음악이 관객이 슬퍼하거나 기뻐하기도 전에 먼저 슬퍼하고 기뻐한다. 마치 개그 프로에서 가상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계속해서 틀어주는 것처럼. 실체 없는 웃음소리가 ‘진짜’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듯, 영화 음악 역시 디에게시스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후적으로 삽입되는 것임에도 영화 내부의 세계와 효과적으로 밀착되어 관객에게서 특정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때 양치기가 되어 선두에 서는 것은 단연 주인공의 감정이다. 언제 울고 언제 웃을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주인공을 보면 된다. 물론 그러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영화가 음악을 통해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따라가도록 ‘몰아’ 줄 것이다. 주인공이 고난에 처할 때 흘러나오는 슬픈 음악과,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그가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었을 때 나오는 즐거운 음악. 여기에 악당이나 주변부 인물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악하거나 비중 없는 자들은 결코 배경음악의 선택권을 장악하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을 대신하여 슬퍼해주거나 기뻐해주지 않는, 메마른 무음(無音)의 세계. 그것이 그들이 처한 가혹한, 그러나 평범한 세계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음악이 없는 영화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그 대신, 영화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장들만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목과 갈등의 연속인데, 영화의 반절 가량이 재판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소송 장면으로, 여기서 딸을 외국에서 교육시키고자 하는 씨민의 입장과 모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나데르의 입장이 충돌한다. 그리고 이후에 진행되는 영화의 주된 갈등 부분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씨민, 나데르, 테르메, 라지에, 라지에의 남편, 가정교사 등―의 입장이 뒤얽힌다. 이 수많은 입장들 사이의 간극은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사실, 방패처럼 내세우는 입장들 뒤에는 사연들이 있다.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소송에서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외국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의 입장 차이이지만, 그 이면에는 딸을 사랑하고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어머니의 사연과, 아내와 딸만 데리고 훌훌 외국으로 떠나기엔 치매 걸린 늙은 아버지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한 아들의 사연이 있다. 영화의 뒷부분에서 사연들은 좀 더 촘촘하게 얽히고설킨다. 예컨대, 씨민이 떠나자 치매노인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일할 사람을 구하게 된 나데르의 사연과 갑작스럽게 남편이 직장을 잃어 돈을 벌어야 하는 라지에의 사연은 일견 서로 잘 들어맞는 듯하며, 그 결과 라지에는 나데르의 집에서 순조롭게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라지에의 유산은 간단해보이던 라지에와 나데르의 이해관계에 배는 되는 씨실과 날실들을 추가한다. 나데르의 사연에는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씨민의 사연과 부모의 별거를 막기 위해 집에 남는 것을 택한 딸 테르메의 사연이 얽혀 있다. 라지에 쪽에는 갑작스런 해고와 돈 없는 설움으로 인한 울화가 불쑥불쑥 욕지기마냥 치미는, 하지만 결국 그 몇 푼 안 되는 돈과 처자식 때문에 더러운 꼴 보며 사는 남편의 사연이 있다. 가로세로로 마구 얽혀 있는 모두의 이야기들은 갑자기 생겼다기보다는 사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다만 라지에의 유산, 그리고 나데르에게 덧씌워진 살인혐의가 이 모든 것들을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짐짓 공정한 눈으로 모든 상황을 담아낸다. 울고, 악쓰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건조하게 바라본다. 모두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감정의 소요에 오직 카메라만은 동요하지 않고 인물들을 응시한다. 마치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무의지에의 의지를 가진 어떤 존재처럼. 재판장 혹은 신처럼. 음악의 부재는 이 비-인간적이고 초월적이기까지 한 의지의 실현을 돕는다.




  모두에게 공정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똑같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어느 누구를 대신해서 울어주지도, 누군가와 함께 울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인물들은 혼자서 운다. 끝끝내 자신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테르메의 말에 혼자 짐을 챙겨 친정으로 가는 씨민이, 나데르의 거짓말을 질책했지만 막상 재판장에서 아버지인 나데르에게 유리한 거짓말을 해버린 테르메가, 아내가 떠나고 온갖 사건들에 휘말린 상태로 거동이 힘든 아버지를 씻기던 나데르가, 운다. 울음을 흘려보낸다, 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울음은 속엣 것이 차고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온 무언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우는 나데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화 음악의 비중이 높은 영화들에서 주인공의 눈물은 일상의 맥락을 끊어버린다. 진행되던 일들은 일시정지 되고, 슬픈 음악이 눈물을 예고하며, 주인공은 예정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음악은 고조되고 카메라는 관객들이 반짝이는 눈물을 잘 볼 수 있도록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눈물로 대표되는 모든 희로애락은 온전히 일상에 속한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무표정으로 있던 인물이 갑자기 눈물을 한 방울 흘린다. 예고도 클로즈업도 없다. 심지어 눈물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인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한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눈물이 나오든 말든, 느끼는 감정이 어떻든 간에 하던 일은 마저 해야 하는 것이다. 운전을 하고 있었으면 운전을 해야 하고, 노인을 씻기고 있었으면 마저 씻겨야 한다. 그들, 그리고 우리가 속한 무음의 세계에선 감상에 빠질 여유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인물들이 살아내는 세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우리 자신들의 것만큼 평범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도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누구의 이야기에 특별히 더 공감해주지도 않은 채, 딱 자기 자신의 몫만큼의 삶을 이어간다. 각자의 사연은 각자의 안에 품고, 겉으로는 매끄럽고 견고한 입장들만 내세운다. 그리고 입장들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말랑한 속살 같은 사연을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가끔 자기 보호적 거짓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거짓말을 했듯이. 계속 나데르를 몰아붙이던 라지에가, 그러면 자신 때문에 유산되었음을 코란에 맹세하라던 나데르의 말에 갑자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듯이.


  신기한 점은, 영화가 마법처럼 모두의 사정을 관객에게 이해시킨다는 점이다. 분명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모두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그것은 이들의 거짓이 ‘입장’의 차원에서는 거짓일지 몰라도 ‘사연’의 차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각자 나름의 정의와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사연의 차원으로까지 파고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은, 다시 말해 누구도 섣불리 단죄하지 않는 카메라 덕분일 것이다. 카메라 덕에,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흔히 영화적 세계에 부여되는 특권적 특징들을 갖지 않은 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절대적 정의나 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각자 나름의 정의만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모두는 딱 그만큼의 거짓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의 결말 부분에서 흔히 권선징악적 단죄가 이루어진다면, 현실에서, 그리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그렇지 않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진실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진실인 세계는 ‘진리언표적인 인간’, 즉 진리를 원하는 인간을 전제하지만,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인간을 감추고 있기라도 하는 양, 이상한 동기들, 예를 들면 복수심 같은 것을 품고 있다. (...) 진리언표적인 인간은 삶을 심판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더 상위의 가치, 즉 선을 기치로 세우고 바로 이 선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고자 하며 심판을 내리고자 갈급해 있고, 삶에서 악, 즉 속죄해야 할 과오만을 본다. 이것이 바로 진리 개념이 갖는 도덕적 기원이다. 니체처럼 웰스는 끊임없이 판단체계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삶보다 상위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은 판단되거나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무구한 것이고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생성의 무구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각주:2]



  들뢰즈에 따르면, 절대적 ‘진리’ 혹은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나 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왜냐하면 진리 혹은 선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삶을 단죄함으로써 삶이 지니는 생성의 무구함을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 이것이 들뢰즈가 추구하는 바이자,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도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정의, 선, 진리와 같은 가치는 부재하고, 그저 ‘개별적으로만’ 정당한 사연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난립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삶은 ‘선’보다는 ‘최선’에 가깝다. 대단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가장 나은 선택을 하고자 아등바등하는 것. 이것이 스스로의 울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감내해야 하는 ‘가장 보통의 존재들’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그리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고 할 때 담기는 것은 결국 구구절절 구질구질한 우리네 생(生) 그 자체이다.


  마지막 장면. 다시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소송이 진행 중이다. 판사는 테르메에게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살겠냐고 묻는다. 테르메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판사는 씨민과 나데르에게 잠시 밖에 나가있으라고 주문한다. 둘은 말없이 나와 각자 다른 쪽에 앉는다. 씨민은 왼쪽에, 나데르는 오른쪽에. 씨민은 문 뒤에, 나데르는 문 앞에. 씨민은 나데르를 잠시 바라보지만, 나데르가 자신 쪽을 쳐다보자 시선을 돌려버린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앞으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마구 지나다니고, 복도 끝에서 나는 말다툼 소리와 아기 우는 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듯 울린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데르와 씨민은 재판장 복도의 풍경에, 이 거대한 일상에 금세 흡수되듯 섞여버린다. 끝까지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영화는 끝내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테르메의 결정은 마지막까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일과 유리된 허구적 이야기가 아닌, 이들이 살아온 생의 한 토막이 된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도 이들의 삶이 지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테르메는 무언가를 말했을 것이고, 그 말의 내용에 따라 세 사람과 할아버지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고, 그들은 계속해서 매순간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들을 하면서, 때로는 혼자 눈물을 훔치면서 이 보통의 일상을 살아내고 버텨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라지에의 가족도, 가정교사도, 이웃과 시누이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화려한 영화들처럼 멋진 해피엔딩을 약속할 수는 없어도, 삶이 영화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지리멸렬한 삶이나마 꿋꿋이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가장 보통의 존재들에게 건네는 ‘최선’의 위로이다.

  1.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차용 [본문으로]
  2. 질 들뢰즈, 『시네마 II : 시간-이미지』, 이정하 역, 시각과 언어, 2005, 27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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