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검은 입김의 신>, 흔해빠진 불행의 세상에서

이르름



여기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검은 산, 검은 하늘, 검은 공기, 검은 집…… 몸도 마음도 마을도 검게 물들어 버린 이 동네에서는 말한 것이 거꾸로 되어버린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탄광을 지지하기 위한 나무는 뿌리가 위로, 가지가 아래로, 그러니까 거꾸로 심어지고, 이 비좁고 무더우며 위아래가 뒤바뀐 탄광의 검은 하늘 아래에서 광부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버린다는 믿음을 굳힌다.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가족은 퇴직금을 한 푼이라도 늘리려 무리하던 가장의 부상 앞에 한 발짝을 떼지 못하고 돌아온다. 남편 상진과 함께 갓 마을에 온 새댁 남희에게 이 마을에서 부부는 서로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그러니까 이곳은 떠나야 하는 곳이라고 빨래터에 나란히 앉아 말하던 광부의 아내들. 그들의 남편이 탄광에 갇히자, 구조작업에 대해 따지러 들어간 관리자의 사무실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운 좋았던 일들, 유난히 행복해서 불길하게 돋보였던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 보인다. 요 며칠간은 큰 소리로 싸우지 않아서 살만 하더라고, 생전 안 그러더니 찌개 간을 봐주더라, 아이들이 요즘엔 아빠를 안 피하더라니…. 그들에게 이런 작은 행복들, 익숙하지 않은 행복은 경계의 대상이며 오히려 마을의 검은 빛깔처럼 항존하는 위험이 터져나올 전조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다고, 지금이 좋다고 말하길 주저한다. 이곳은 좋은 일에 뒤이어 반드시 불행이 닥치고 그래서 결국에는 나쁘게 되어 버리는, 모든 것이 거꾸로 이루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행복에 겁먹게 만들었는가? 이것은 사방에 널려있는 불행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막장에 들어가길 택한 남편들은 숨막히는 깊이의 어둠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검은 하늘 아래서 매일을 보낸다. 하루가 끝나고 땅 위로 돌아오면 죽었다 살아난 기분을 느끼면서도, 오늘도 내일도 탄광으로 향하는 기나긴 차량 칸에 몸을 싣는다. 아내들은 빨아도 빨아도 검은 물이 나오는 빨래를 하며 서로의 가족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삶에 깊게 잠식한 가난과 고단함을 술에, 노래에 담아 견뎌낸다. 가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힘든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이들에게 희망이란 이름으로 부담을 주고, 배려란 이름으로 상처를 입힌다. 부상을 당해 병원비가 드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보상금을 받아 새 삶을 꾸린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은 여자들의 입에서도, 남자들의 입에서도 서슴없이 나온다. 신입 시절 ‘돼지’라고 불리며 무시 당하던 상진이 자기는 돼지가 아닌 사람이고, 어엿한 광부이며, 막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항의하자 반장은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사람이고 싶으면 막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좋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럴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사람 목숨보다 보상금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돼지는 그들이 죽어서야 쓸모가 있다는 씁쓸한 자기비하다. 선량하고 평범하던,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결혼하여 이 마을에 도달한 사람들이 검은 탄 가루에 뒤덮이며 일어나는 변화들을 보면 ‘비참하다’는 말이 남용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불행이 닥쳐도 어떻게든 참고 살아내야 하고, 살기 위해 가족을 탄광에 밀어 넣어야 하며, 불합리에 맞서면 거세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광업소의 사람들의 삶은 그 무엇보다, 비참하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살아간다. 이들의 연대는 삶을 살아낼 만한 것으로 만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상진은 처음에는 배척당하고, 나중에는 어영부영 관리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며 따돌림을 당하고, 다같이 용기를 낸 파업이 끝나자 망치로 손을 내려치겠다는 위협에 주동자를 말해버리지만, 절대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다. 광부들은 검은 하늘이 검은 진주처럼 보이는, 건드리기만 해도 탄이 쏟아져 나오던 그런 운수 좋은 날 도리어 탄광에 갇힌다. 그들은 탄광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농담을 나누며 몰려오는 두려움을 이긴다. 보상금을 받으면 솜씨 좋은 우리 아내가 드디어 떡볶이 집을 열 수 있겠지, 나만 보면 방긋방긋 웃는 예쁜 딸이 학교를 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좋다며 함께 차를 마신 천사 같은 아가씨는 나를 완전히 잊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들은 탄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처절한 목소리로 이어진다. 차라리 죽어서 보상금이 낫지,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억척스런 아주머니들은 그들의 남편들이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으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것은 폐쇄된 탄광에서 들려오는 망령들의 목소리도, 하나님의 손발이라 믿으며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신의 손발도, 그 어떤 신적인 존재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로의 존재와 마음이었다. 그리고 결국 탄광에 갇힌 세 명의 동료를 구하는 것은 파업의 주동자로 붙잡혔다 가석방된 반장과 부상을 입고 마을을 떠나지 못한 또 다른 광부다.


<검은 입김의 신>은 실제로 탄광같이 비좁고 어두운 소극장에서 이런 짠하고 뜨뜻미지근한 연대의 소중함을 전혀 식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들의 불행은 마을을 뒤덮은 검은 탄 가루처럼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것이며, 그래서 절절하기보다는 체념적인 정서 속에 조용히 흐른다. 파업의 결과로 얻은 것은 월급제 대신 약간 오른 보상, 산소통 같은 안전조치 대신 목욕탕과 괴물 같은 공용 세탁기일 뿐인 이 마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에게 가혹한 세상은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3억 년 전의 먼지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시커먼 탄광에서 인류에게 불을 전한 프로메테우스처럼 매일을 죽고 또다시 매일을 부활하며 모두에게 따뜻함을 전할 것이다.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 조금만 참자는 간절한 바람이 사랑하는 이를 위험한 현장으로 내모는 무서운 무기가 되는 이 마을에서, 희망은 사치스럽고 죄스럽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갈 것이다. 행복 뒤에는 반드시 불행이 뒤따르곤 하는 깊은 어둠의 존재에도 이들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함께 싸우고 서로를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에 기댄다면, 행복이 이어지지 않는대도 불행을 감히 두려워하지는 않을 수 있다.




*<검은 입김의 신>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의 <세월호 2017 기획>의 일부다. 7월 6일부터 8월 13일까지 총 여덟 개의 극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극을 쓴 고연옥은 작가의 글에서 ‘세월호 앞에 모든 이야기는 죽었다’고 밝힌다. <검은 입김의 신>은 표면적으로는 세월호와 멀리 떨어진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 권력이 굳건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날을 경험한 우리 모두에게 세월호는 자꾸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세상 모든 ‘가장 보통의 존재’들을 위하여[각주:1]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푸른수염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관객의 정동을 양떼 몰듯 몰아간다. 슬픈 장면에서는 슬픈 음악이, 즐거운 장면에서는 즐거운 음악이 관객이 슬퍼하거나 기뻐하기도 전에 먼저 슬퍼하고 기뻐한다. 마치 개그 프로에서 가상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계속해서 틀어주는 것처럼. 실체 없는 웃음소리가 ‘진짜’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듯, 영화 음악 역시 디에게시스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후적으로 삽입되는 것임에도 영화 내부의 세계와 효과적으로 밀착되어 관객에게서 특정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때 양치기가 되어 선두에 서는 것은 단연 주인공의 감정이다. 언제 울고 언제 웃을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주인공을 보면 된다. 물론 그러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영화가 음악을 통해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따라가도록 ‘몰아’ 줄 것이다. 주인공이 고난에 처할 때 흘러나오는 슬픈 음악과,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그가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었을 때 나오는 즐거운 음악. 여기에 악당이나 주변부 인물들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악하거나 비중 없는 자들은 결코 배경음악의 선택권을 장악하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을 대신하여 슬퍼해주거나 기뻐해주지 않는, 메마른 무음(無音)의 세계. 그것이 그들이 처한 가혹한, 그러나 평범한 세계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음악이 없는 영화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그 대신, 영화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장들만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목과 갈등의 연속인데, 영화의 반절 가량이 재판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소송 장면으로, 여기서 딸을 외국에서 교육시키고자 하는 씨민의 입장과 모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나데르의 입장이 충돌한다. 그리고 이후에 진행되는 영화의 주된 갈등 부분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씨민, 나데르, 테르메, 라지에, 라지에의 남편, 가정교사 등―의 입장이 뒤얽힌다. 이 수많은 입장들 사이의 간극은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사실, 방패처럼 내세우는 입장들 뒤에는 사연들이 있다.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 소송에서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외국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의 입장 차이이지만, 그 이면에는 딸을 사랑하고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어머니의 사연과, 아내와 딸만 데리고 훌훌 외국으로 떠나기엔 치매 걸린 늙은 아버지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한 아들의 사연이 있다. 영화의 뒷부분에서 사연들은 좀 더 촘촘하게 얽히고설킨다. 예컨대, 씨민이 떠나자 치매노인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일할 사람을 구하게 된 나데르의 사연과 갑작스럽게 남편이 직장을 잃어 돈을 벌어야 하는 라지에의 사연은 일견 서로 잘 들어맞는 듯하며, 그 결과 라지에는 나데르의 집에서 순조롭게 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라지에의 유산은 간단해보이던 라지에와 나데르의 이해관계에 배는 되는 씨실과 날실들을 추가한다. 나데르의 사연에는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씨민의 사연과 부모의 별거를 막기 위해 집에 남는 것을 택한 딸 테르메의 사연이 얽혀 있다. 라지에 쪽에는 갑작스런 해고와 돈 없는 설움으로 인한 울화가 불쑥불쑥 욕지기마냥 치미는, 하지만 결국 그 몇 푼 안 되는 돈과 처자식 때문에 더러운 꼴 보며 사는 남편의 사연이 있다. 가로세로로 마구 얽혀 있는 모두의 이야기들은 갑자기 생겼다기보다는 사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다만 라지에의 유산, 그리고 나데르에게 덧씌워진 살인혐의가 이 모든 것들을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짐짓 공정한 눈으로 모든 상황을 담아낸다. 울고, 악쓰고, 삿대질하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건조하게 바라본다. 모두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감정의 소요에 오직 카메라만은 동요하지 않고 인물들을 응시한다. 마치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무의지에의 의지를 가진 어떤 존재처럼. 재판장 혹은 신처럼. 음악의 부재는 이 비-인간적이고 초월적이기까지 한 의지의 실현을 돕는다.




  모두에게 공정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똑같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린다. 영화는 어느 누구를 대신해서 울어주지도, 누군가와 함께 울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인물들은 혼자서 운다. 끝끝내 자신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테르메의 말에 혼자 짐을 챙겨 친정으로 가는 씨민이, 나데르의 거짓말을 질책했지만 막상 재판장에서 아버지인 나데르에게 유리한 거짓말을 해버린 테르메가, 아내가 떠나고 온갖 사건들에 휘말린 상태로 거동이 힘든 아버지를 씻기던 나데르가, 운다. 울음을 흘려보낸다, 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울음은 속엣 것이 차고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온 무언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우는 나데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화 음악의 비중이 높은 영화들에서 주인공의 눈물은 일상의 맥락을 끊어버린다. 진행되던 일들은 일시정지 되고, 슬픈 음악이 눈물을 예고하며, 주인공은 예정된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음악은 고조되고 카메라는 관객들이 반짝이는 눈물을 잘 볼 수 있도록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눈물로 대표되는 모든 희로애락은 온전히 일상에 속한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무표정으로 있던 인물이 갑자기 눈물을 한 방울 흘린다. 예고도 클로즈업도 없다. 심지어 눈물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인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복귀한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눈물이 나오든 말든, 느끼는 감정이 어떻든 간에 하던 일은 마저 해야 하는 것이다. 운전을 하고 있었으면 운전을 해야 하고, 노인을 씻기고 있었으면 마저 씻겨야 한다. 그들, 그리고 우리가 속한 무음의 세계에선 감상에 빠질 여유조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인물들이 살아내는 세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우리 자신들의 것만큼 평범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누구도 누구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누구의 이야기에 특별히 더 공감해주지도 않은 채, 딱 자기 자신의 몫만큼의 삶을 이어간다. 각자의 사연은 각자의 안에 품고, 겉으로는 매끄럽고 견고한 입장들만 내세운다. 그리고 입장들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말랑한 속살 같은 사연을 감추고 보호하기 위해 가끔 자기 보호적 거짓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거짓말을 했듯이. 계속 나데르를 몰아붙이던 라지에가, 그러면 자신 때문에 유산되었음을 코란에 맹세하라던 나데르의 말에 갑자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듯이.


  신기한 점은, 영화가 마법처럼 모두의 사정을 관객에게 이해시킨다는 점이다. 분명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주장들을 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모두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그것은 이들의 거짓이 ‘입장’의 차원에서는 거짓일지 몰라도 ‘사연’의 차원으로 파고 들어가면 각자 나름의 정의와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사연의 차원으로까지 파고들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은, 다시 말해 누구도 섣불리 단죄하지 않는 카메라 덕분일 것이다. 카메라 덕에,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흔히 영화적 세계에 부여되는 특권적 특징들을 갖지 않은 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곳에는 절대적 정의나 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각자 나름의 정의만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모두는 딱 그만큼의 거짓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의 결말 부분에서 흔히 권선징악적 단죄가 이루어진다면, 현실에서, 그리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는 그렇지 않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진실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진실인 세계는 ‘진리언표적인 인간’, 즉 진리를 원하는 인간을 전제하지만,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인간을 감추고 있기라도 하는 양, 이상한 동기들, 예를 들면 복수심 같은 것을 품고 있다. (...) 진리언표적인 인간은 삶을 심판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더 상위의 가치, 즉 선을 기치로 세우고 바로 이 선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고자 하며 심판을 내리고자 갈급해 있고, 삶에서 악, 즉 속죄해야 할 과오만을 본다. 이것이 바로 진리 개념이 갖는 도덕적 기원이다. 니체처럼 웰스는 끊임없이 판단체계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삶보다 상위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삶은 판단되거나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무구한 것이고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생성의 무구함"을 갖고 있는 것이다.[각주:2]



  들뢰즈에 따르면, 절대적 ‘진리’ 혹은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나 선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왜냐하면 진리 혹은 선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이 삶을 단죄함으로써 삶이 지니는 생성의 무구함을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것. 이것이 들뢰즈가 추구하는 바이자,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도 특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정의, 선, 진리와 같은 가치는 부재하고, 그저 ‘개별적으로만’ 정당한 사연들이 제 목소리를 내며 난립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삶은 ‘선’보다는 ‘최선’에 가깝다. 대단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매 순간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가장 나은 선택을 하고자 아등바등하는 것. 이것이 스스로의 울음은 스스로의 힘으로 감내해야 하는 ‘가장 보통의 존재들’에게 주어진 책무이다. 그리고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고 할 때 담기는 것은 결국 구구절절 구질구질한 우리네 생(生) 그 자체이다.


  마지막 장면. 다시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소송이 진행 중이다. 판사는 테르메에게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살겠냐고 묻는다. 테르메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판사는 씨민과 나데르에게 잠시 밖에 나가있으라고 주문한다. 둘은 말없이 나와 각자 다른 쪽에 앉는다. 씨민은 왼쪽에, 나데르는 오른쪽에. 씨민은 문 뒤에, 나데르는 문 앞에. 씨민은 나데르를 잠시 바라보지만, 나데르가 자신 쪽을 쳐다보자 시선을 돌려버린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앞으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마구 지나다니고, 복도 끝에서 나는 말다툼 소리와 아기 우는 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듯 울린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데르와 씨민은 재판장 복도의 풍경에, 이 거대한 일상에 금세 흡수되듯 섞여버린다. 끝까지 이 영화에는 주인공이 없다. 영화는 끝내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테르메의 결정은 마지막까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일과 유리된 허구적 이야기가 아닌, 이들이 살아온 생의 한 토막이 된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도 이들의 삶이 지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테르메는 무언가를 말했을 것이고, 그 말의 내용에 따라 세 사람과 할아버지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고, 그들은 계속해서 매순간 나름대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들을 하면서, 때로는 혼자 눈물을 훔치면서 이 보통의 일상을 살아내고 버텨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라지에의 가족도, 가정교사도, 이웃과 시누이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화려한 영화들처럼 멋진 해피엔딩을 약속할 수는 없어도, 삶이 영화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지리멸렬한 삶이나마 꿋꿋이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가장 보통의 존재들에게 건네는 ‘최선’의 위로이다.

  1.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차용 [본문으로]
  2. 질 들뢰즈, 『시네마 II : 시간-이미지』, 이정하 역, 시각과 언어, 2005, 275쪽 [본문으로]

야기꾼 찰리 카우프만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방법, <Adaptation>


르네오








   <Adaptation>(2002)은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이터널 선샤인>(2004)의 각본가로 잘 알려진 찰리 카우프만의 두 번째 영화다. <존 말코비치 되기>로 카우프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보았는데 하나 같이 상상력이 돋보이는 각본이 눈에 띄었다. 카우프만의 각본은 주로 판타지적인 설정을 통해 인물들의 의식, 기억과 무의식을 드나들고, 서로 다른 시간들이 겹쳐 있는 복잡한 플롯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카우프만의 각본은 주로 ‘어떻게 저런 상상을 했을까?’와 같은, 그의 아이디어가 갖는 독창성과 신선함에 대한 감탄과 찬사를 받는다.


  그렇지만 카우프만의 영화들을 다 보고 나니 그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가 오로지 그의 상상력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우프만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적 설정을 품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지만 또 항상 숨기고 싶어 하는 모습들을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평범하다 못해 우울에 빠져있거나 소심하고 치졸한 행동들을 하고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에 빠져 중요한 일들을 그르친다. 그런 평범하고 실수투성이인 사람이 누군가를 욕망하고 혼자만의 상상에 빠지고 착각하고 질투와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 부끄러워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초라한 모습들이 사실은 나 역시 갖고 있는 모습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꼭꼭 숨기고 싶으면서도 또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공감 받고 싶기도 한 나의 내밀한 모습들이기 때문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카우프만 영화의 찌질한 캐릭터들은 불편하면서도 애정이 간다.



  <존 말코비치 되기>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고 몇 년 동안의 공백기를 가진 카우프만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그에 대한 부담감 속에서 내놓은 두 번째 각본인 <Adaptation>은 바로 그 찌질한 캐릭터들이 사실은 모두 카우프만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백하는 것 같은 영화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부터가 <존 말코비치 되기>로 할리우드에서 인정을 받은 그 후의 찰리 카우프만이다. 영화 속에서 찰리 카우프만은 난초에 빠져 인생을 바친 남자 존 라로쉬에 대한 논픽션 에세이인 <난초 도둑>을 영화 대본으로 각색(영화 제목인 Adaptation의 한 가지 뜻은 ‘각색’이다)하는 일을 맡게 되어 창작의 고통을 겪게 되고 자괴감에 빠진다. 극 중에서 찰리는 ‘난 뚱뚱하고 대머린데 괜찮을까? 그녀가 내가 대머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까? 내가 우습다고 생각하겠지?’와 같은 독백을 자주 하고, 침대 위에 책들과 함께 널브러져 부담감과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시간들을 보낸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촬영장에서 실제로 배우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데 찰리는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으며, 그마저도 촬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쫓겨난다. 어렵게 데이트 신청을 한 에밀리와 파티에 갔다 돌아오는 길 그녀의 집 앞에서 에밀리는 함께 로맨틱한 밤을 보내자는 사인을 보내지만, 뚱뚱하고 대머리인 자기 모습이 부끄러운 찰리는 이를 모른 척하고, 에밀리가 실망하여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이렇게 따라가서 그녀에게 키스하면 영화 속 한 장면 같을 텐데...’하고 상상할 뿐이다. 또 찰리는 수잔의 글을 읽다 그녀의 솔직함에 반해 책 표지 안쪽 수잔의 사진을 보면서 자위를 하지만 정작 수잔을 직접 만나기 위해 찾아가서 그녀의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드디어 마주치게 되지만 말 한 번 걸지 못하고 땀만 뻘뻘 흘리다 돌아온다. (이런 식의 보는 나도 왠지 부끄러워지는 장면들이 다 쓰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어댑테이션>에서 찰리 카우프만이 자기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켰다고 해서, 이 영화를 찰리 카우프만이 자신의 부담감과 열등감, 초라한 모습과 그 당시의 경험들을 그대로 털어놓는 자전적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댑테이션>은 카우프만의 실제 경험과 의식의 흐름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카우프만이 만들어낸 허구의 설정과 사건들 역시 담고 있는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이후 실제로 찰리 카우프만은 <난초 도둑>을 각색하여 시나리오를 쓰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난초 도둑>을 각색하는 작업을 하면서 카우프만은 존과 수잔의 열정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각본을 쓰지 못하겠다는 부담감을 느꼈고, 그런 부담감 속에서의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또 다른 각본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 <어댑테이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댑테이션>에는 분명 카우프만이 난초 도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의 경험과 의식의 흐름이 영화의 주요한 줄거리로 녹아들어가 있다. 그러나 <어댑테이션>의 전체 각본은 결국 그러한 경험들을 토대로 카우프만이 각색한 이야기, 즉 허구적 설정과 사건들이 섞인 이야기이다. 찰리 카우프만은 도널드 카우프만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자신의 쌍둥이 동생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어댑테이션>의 각본은 실제와 허구가 혼재하는 구조를 갖는다. 카우프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실제 인물들이 벌이는 허구의 사건을 꾸며내거나, 허구의 인물과 실제 인물이 같은 공간에서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등 실제와 허구를 교묘하게 뒤섞어서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카우프만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찰리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실제 영화배우인 존 말코비치를 그대로 영화 속 인물로 등장시킴으로써 지어낸 이야기지만 어쩐지 실제 이야기 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과 같이, <어댑테이션>에서 역시 <존 말코비치 되기>의 주연 배우들을 실제 그들 자신의 역할로 등장시키고, 카우프만 자신과 수잔, 존 등 현존하는 인물들을(물론 연기는 배우들이 했지만) 등장시킨다. 그 결과 분명 가상의 인물인 도널드 카우프만까지도 실제 인물들과 같은 시공간에서 상호작용한다는 점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심지어 도널드 카우프만의 실제와 허구 사이의 애매한 위상은 영화 밖으로까지 이어진다. 찰리 카우프만은 <어댑테이션>의 엔딩 크레딧에 도널드 카우프만의 이름을 공동 각본가로 올렸고, 그 결과 카우프만 형제가 함께 아카데미상 각본 부문 시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댑테이션>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과 설정(난초수집가 존과 그를 취재한 수잔과 그들의 이야기를 각색하는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실제의 설정) 은 각본 곳곳에 숨겨진 허구의 사건들을 구별해내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카우프만 형제의 시간과 수잔과 존의 시간이 겹쳐지면서 불륜, 마약, 추격전, 불의의 죽음 등 사실과는 다른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들이 펼쳐지게 되는데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사건들이 실화인지 카우프만의 각색인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후에 여담을 찾아보니 수잔이 자신을 실제와는 다른 이상한 이미지로 그린 것에 대해 항의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찰리가 수잔의 사진을 보며 자위를 하는 장면은 제발 카우프만의 각색이었으면 하는 장면이지만 진실은 카우프만밖에 모른다. <어댑테이션>은 이처럼 현실과 허구, 실제 사건과 꾸며진 각본을 모호하게 섞어놔 어떤 장면도 실제 혹은 허구라고 확신할 수 없도록 만든다.



   <어댑테이션>의 각
에서 인물과 설정, 사건들이 갖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애매하고 모호한 위상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이 확고한 한 가지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달리 말하면 각본의 줄거리, 인물, 사건 등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어댑테이션>에서 찰리(극 중 인물을 지칭할 때는 찰리로, 감독을 지칭할 때는 카우프만으로 부르려 한다) 가 도널드 때문에 겪게 되는 생각과 행동의 변화들이 실제로 카우프만이 난초도둑의 각색을 하는 동안 겪은(또는 적어도 겪고자 희망한) 변화인지 아니면 다른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허구의 이야기인지에 대해 상반되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도널드 카우프만이 어떤 캐릭터인지, 영화 속에서 도널드와 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도널드 카우프만은 영화의 주요 인물들 중 유일하게 완전한 가상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찰리 카우프만이 왜 굳이 이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를 고민해보면 카우프만이 <어댑테이션>을 통해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는지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카우프만은 찰리 카우프만과 겉모습은 똑같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똑같이 대머리에 배가 나왔지만 도널드는 항상 여유가 넘치고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걱정하지 않는다. 도널드는 찰리를 따라 시나리오 쓰는 일에 도전하는데, 걱정이 많고 예민한 찰리와는 달리 도널드는 시나리오도 거침없이 써낸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너무 어렵고 두려운 찰리는 자신은 인사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존 말코비치 되기>의 영화배우들과도 어느새 친해져있는 도널드를 속으로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찰리는 도널드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주로 부정적이지만) 자의식이 강하고 예민한 완벽주의자인 찰리와는 달리 도널드는 어떻게 보면 아무 생각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진다. 찰리의 집에 얹혀살고 있던 도널드는 갑자기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다짐하고는 시나리오 쓰기 원칙들을 가르치는 스타 강사 맥키의 강의를 들으면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뻔한 이야기들을 만들고 찰리에게 의견을 묻는다. 찰리는 그런 도널드가 귀찮아서 농담으로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를 제안하는데 도널드는 그게 마음에 든다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처럼 도널드 카우프만이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찰리에게 이중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도널드는 찰리가 갖고 싶어 하는 모습들을 갖고 있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평소에 바보 같이 행동할 뿐만 아니라 틀에 박힌 할리우드식 각본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찰리는 도널드를 부러워하지만 그를 인정하거나 존경하지는 않는다.


  도널드에 대한 찰리의 태도는 두 가지 사건에 의해 급격하게 변한다. 먼저 찰리가 시나리오를 쓰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도널드는 자기 각본을 완성하고,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천재 각본가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 그 후 찰리는 도널드에게 강한 질투를 느끼면서도 도널드를 인정하게 되고, 결국에는 도널드가 들었던 맥키의 시나리오 쓰기 강의마저 듣게 된다. 찰리의 이러한 태도 변화는 영화 초반 찰리가 <난초 도둑>의 각색을 부탁하는 영화 관계자에게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엄청난 태세 전환이다. 찰리는 자신은 러브라인, 섹스, 마약, 총, 차량 추격씬, 캐릭터들 간의 극적인 화해와 교훈 같은 익숙하면서도 극적인 요소들이 난무하는 할리우드식 각본이 아니라, <난초 도둑>에서 이야기하는 난초의 아름다움과 그에 대한 존 라로쉬의 순수한 열정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각본을 쓰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랬던 그가 할리우드식 시나리오를 쓰는 법칙들을 가르치는 강의를 듣고 그때까지 무시해왔던 도널드와 맥키에게 자기 각본에 대한 조언을 청하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찰리가 시나리오 강의를 듣는 장면 이후로 그때까지 아무런 접점이 없던 카우프만 형제와 존/수잔이 만나 불륜, 미행, 마약, 살인, 차량 추격씬과 같은 온갖 할리우드의 공식들이 난무하는 해프닝이 펼쳐지게 된다. 마치 이 장면부터는 찰리 대신 도널드가 펜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찰리와 도널드는 존과 수잔에게 쫓기며 죽을 위험을 앞두고 생뚱맞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더니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된다. 이 극적인 화해를 계기로 도널드에 대한 찰리의 태도는 더욱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즉 찰리는 도널드를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 대신, 도널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도널드를 진심으로 인정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 후반부의 이러한 극적 전개를 두고, 카우프만의 의도는 도널드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식 각본을 비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각본에는 드라마가 필요하고 인물들의 변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극적인 결말이 필요하다는 맥키의 조언대로 이야기를 짰을 때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억지스러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항의와 조롱을 카우프만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카우프만의 이야기에서는 항상 묘한 진실성이 느껴졌는데, 이번에도 그저 재치 있는 비틀기가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난초의 아름다움과 난초수집가의 열정을 진지하게 담아내는 각본을 쓰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결국에는 그런 글을 쓰지 못해서 쩔쩔 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쓴 찰리 카우프만이 이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식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을 비판하려고 했다는 설명은 어딘지 뻔뻔해 보이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를 제외하면 <어댑테이션>은 줄곧 찰리 카우프만의 열등감과 불안,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과정에서의 히스테릭한 의식의 흐름을 1인칭 시점의 독백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유일하게 확실한 허구의 인물 또한 찰리 카우프만과 같은 얼굴의(둘 다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 쌍둥이 동생이다. 그런 점에서 <어댑테이션>을 통해 찰리 카우프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자기 이야기인 것 같다. 자기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들과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능력들에 대한 푸념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찰리와 도널드가 갑자기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는 사건은 당연히 허구의 사건이고, 이야기 흐름상으로도 뜬금없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현실과 허구가 뒤섞여 카우프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호한 전체 이야기 속에서 어쩌면 가장 솔직한 장면일 수도 있다. 항상 스스로의 모습이 못마땅하고 남들의 시선이 두려운 찰리가 도널드에게 갖는 열등감과 질투는 찰리의 가장 내밀한 본심이기 때문이다. 도널드는 찰리와 넝쿨 뒤에 숨어 어릴 적 짝사랑하던 여자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럼에도 그 사랑은 자기 것이었고 누군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말을 한다. 도널드와의 그 마지막 대화 이후에 찰리는 도널드에 대한 마음뿐 아니라 인간관계, 시나리오 쓰기 등 자기 앞의 문제들에 대한 태도와 행동들에서 변화를 보인다. 대머리에 뚱뚱하고 재미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남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 등에 짓눌려 있던 찰리는 그 모든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끝난 후에 처음으로 에밀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전하고(에밀리는 이미 새 애인이 생겨서 그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지만 찰리는 개의치 않는다.) 맥키가 절대 쓰지 말라고 했던 독백으로 ‘카우프만은 처음으로 희망이란 것을 느낀다.’라고 말하며 이 이야기를 끝내야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실행한다. 이 마지막 장면을 보았을 때 극 중 찰리뿐 아니라 실제로 카우프만 역시 조금은 바보 같지만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고 남들의 시선에 갇히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일단 하고 보는 도널드와 같은 캐릭터에 대해 불편한 열등감을 가지면서 동시에 부러움과 질투를 느껴왔던 것 같다.


  이처럼 찰리의 변화가 카우프만의 진심(실제로 카우프만이 이렇게 변했다기보다는 나도 좀 그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 바로 전 찰리의 대사에 있다. 찰리는 기껏 할리우드 공식에 딱 맞는 사건들로 이야기를 각색해놓고 마지막에는 맥키가 절대 하지 말라며 당부했던 독백으로 끝을 맺으려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한다. “젠장 독백이네. 맥킨이 인정 안 할 텐데. 그럼 다르게 어떻게 표현하지? 에이 몰라. 그가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이야. 난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정답이야.” 그러고는 생각해둔 마지막 대사를 한 후에 “I like this. This is good.”이라고 말한다. 물론 누군가는 찰리의 이 대사들이 사람들이 기대하는 할리우드식의 극적인 이야기 대신 찰리 카우프만 식의 담담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당찬 포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포부는 이미 영화 전반부에서 좌절되었다. 오히려 자신감 없고 남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하고 싶은 것들을 머릿속에서밖에 하지 못하고 아무도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온 지금까지의 찰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마지막 장면의 대사들은 ‘나는 못나고 서툰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이건 내 이야기니까 내가 보기에 좋은(“I like this”) 그대로 해 보겠다’는, 자기 긍정의 첫 발을 내딛는 변화를 담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댑테이션>은 기본적으로 찰리 카우프만과 도널드라는 가상의 인물 간의 에피소드, 그리고 수잔과 존 사이의 가상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구상된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카우프만 자신이 실제로 빠져있던 부담감과 열등감, 그가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능력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변화Adaptation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열망) 등을 담아낸 아주 솔직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카우프만은 그런 자기 이야기들을 도널드라는 자기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가상의 인물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카우프만이 <어댑테이션>에서 도널드라는 캐릭터를 빌려 털어 놓는 자기 이야기들은 과연 그것이 현실인지 허구/각본인지, 카우프만의 진심인지 비꼬는 농담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모호하다. 남들 앞에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항상 힘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야 마는 찰리를 떠올려 보면, 그런 모습에 딱 어울리는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구나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댑테이션>은 결국 자기 문제에 빠져 결국에는 자기 얘기 밖에는 할 수 없는 카우프만이 그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영화인 것 같다. 카우프만이 털어 놓는 이야기들이 이번에도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이어서 불편하면서도 애정이 간다.

우리가 대만 청춘영화에 설레는 이유

-‘나의 소녀시대’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이제로



대만 청춘 영화는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 대만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대만 청춘 영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청설(2009)’,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 ‘나의 소녀시대(2015)’가 있다. 이중 우리나라에 대만 청춘 영화라는 것을 알린 영화는 아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일 것이다. 나의 학창시절 때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친구들은 책상에 화이트로 하트를 그리곤 했고, 피아노 꽤나 친다는 친구들은 말할 수 없는 비밀ost를 연주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최근작 두 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와 ‘나의 소녀시대’를 조명하고자 한다. 두 작품은 대만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제목이 알려진 꽤 유명한 영화이다. 두 영화는 학창시절 첫사랑이라는 주제 하에 매우 닮아있지만, 한편으론 매우 다르다. 나는 내가 소위 애정하는 두 영화를 글로써 분석하여,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설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미리 경고하자면, 본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 자전거와 교복


대만 청춘 영화에는 반드시 자전거와 교복이 등장한다.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말간 얼굴은 우리들을 학창시절로 소환시킨다. 첫사랑은 새하얀 교복과 나른한 자전거 소리처럼 그 나이대만이 갖고 있는 때묻지 않은 그 무엇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첫사랑을 말하기에 앞서 대만 청춘 영화는 학교와 학생, 그리고 사춘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만 청춘 영화 속 학교에는 모범생, 문제아, 인기학생 등 어느 학교에나 있었을 법한 다양한 학생들이 등장한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임진심(여자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은 공부보다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학생들인 반면, 서태우(남자 주인공) 무리는 문제아 집단이다. 또 다른 주연인 구양과 도민민은 학교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모범생들이다. 마찬가지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하 그 시절)’에서 션자이(여자 주인공)는 학교 최고 모범생이자 인기학생인 반면 커징텅과 그의 친구들은 장난끼 많은 평범한 학생들이다. 이처럼 다양한 성격의 학생들은 영화 속 학창시절에 현실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현실과는 괴리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일진과 평범한 학생, 모범생이 한 무리로 어울리는 모습은 응당 비현실적이지만 일단 보기에는 좋다.


학생들의 순수함은 학교의 경직된 제도와 선생님의 권위에 대비된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자의적으로 체벌을 내리고,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권위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 권위의 부당함이 극에 달했을 때 학생들은 반항하고 도전하고 바꿔나간다. 이 과정에서 평범하고 모범적이었던 학생들은 변화하고, 또 성장한다. 즉 대만 청춘 영화는 그저 공부만 하고, 연예인만 좋아할 줄 알았던 학생들을 성장시킨다.



# 유덕화와 왕조현


나의 소녀시대와 ‘그시절’에서는 9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나의 소녀시대의 경우는 행운의 편지, 주성치의 영화, 롤러장, 프로필자료, 서점, 야영과 진실게임 등 끊임없이 90년대를 추억할만한 소재를 등장시키며 보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많이 닮아있다. 응답하라 1997에서 정은지가 HOT의 광팬이었듯, 나의 소녀시대에서 임진심은 유덕화의 열렬한 팬이다. 유덕화는 90년대 대스타로 그 시절을 추억하는 장치이자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한 소재이다. 유덕화 스티커로 두 주인공의 인연이 시작되고, 서태우는 유덕화 열쇠고리와 입간판으로 임진심에게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언젠간 유덕화가 너를 위해 노래하게 해줄게’라는 대사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그 시절’은 나의 소녀시대만큼 시대적인 소재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남자주인공은 장만옥을 보며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이소룡을 사부라 칭하며 격투왕이 되길 꿈꾼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시대를 정확히 재현해내며 향수를 불러일으켰듯이, 그리고 당시의 순수한 첫사랑을 예쁘게 그려내었듯이, 두 영화는 1990년대 대만을 소환하며 그 시절을 미화시킨다. 그 시절 대만이 아시아의 문화 중심지였고, 대만 스타가 곧 아시아 스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만 청춘 영화가 그토록 우리에게 인기 있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그 시절 유덕화 노래 한 번 안 듣고 왕조현 한 번 안 좋아해 본 남자가 어디 있으랴. 대만 청춘영화가 대만을 넘어 온 아시아에 사랑 받는 이유가 있다.



# 도시 괴담


‘나의 소녀시대’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는 공통적으로 특이한 장면이 등장한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학생들이 야영을 다녀온 직후, 뜬금없이 임진심의 가족들이 미스터리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스터리 전문가는 학생들의 야영 사진을 보고 서태우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임진심을 비롯한 친구들은 그 말을 믿고 서태우를 걱정한다. ‘그 시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날 방영한 미스터리 프로그램에 대해 션자이와 후지웨이가 심각하게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극중에서 강시에 대한 괴담이 꽤나 비중 있게 다뤄져, 강시가 산을 넘어오다 요구르트 병을 밟고 넘어지는 신이 삽입되기도 한다. 선뜻 극의 흐름을 깨는 듯한, 이해하기가 힘든 이러한 장면들은 그 시대를 추억하기 위함이자 학생들의 순수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90년대 대만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강시, 홍콩할매 등의 도시괴담이 대유행 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학창시절에 빨간마스크가 대유행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얼핏 수긍이 간다. 그 시절 우리가 빨간마스크를 피하기 위해 손등에 犬을 쓰고, 분신사바를 하며 펜이 스스로 움직일까 걱정했듯이, 이들은 강시가 밤중에 산을 넘어올까 마음 졸였던 것이다.



# 예쁜 장면

대만 청춘 영화에는 예쁜 장면이 등장해야 한다. 우리들의 청춘과 첫사랑은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소녀시대는 그야말로 예쁜 장면들로 가득 차있다. 임진심과 서태우는 서점에서 처음으로 서로에게 두근거림을 느끼는데, 이 장면에서 해질 무렵의 따뜻한 햇빛이 말 그대로 쏟아진다. 서태우가 임진심을 데려다 주는 장면에서는 밤 골목이 주는 특유의 감성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두 사람이 밤에 빈 공원에 가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예쁘게 연출되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은 놀이공원의 야경처럼 로맨틱하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아름다운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최고의 명장면인 유성에게 소원을 비는 장면은 설명도 필요 없이 그저 예쁘다.









‘그 시절’에서도 예외 없이 예쁜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둘이 함께 공부하는 장면, 친구들이 다같이 해변에 앉아 꿈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데이트 하는 장면, 지진 후 두 주인공이 밤하늘을 보며 통화를 하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의 소녀시대'가 빛과 분위기를 통해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면, ‘그 시절’에서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배우들의 맑고 순수한 얼굴이다. 극중 아허가 션자이에게 ‘유치하다고 말을 하는 너의 모습이 너무 예뻤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 션자이 역의 배우의 깨끗한 피부와 솜털 같은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청춘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 그 시절엔 알지 못했던


인연의 시작은 늘 그렇듯 악연이다. 영화 초반의 두 사람은 늘 다투지만 일련의 소소한 사건들을 거치며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대신해 혼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여자 주인공들은 처음으로 남자주인공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위해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용감한 행동들을 감행하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반하게 된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임진심은 서태우에게 부당한 벌을 내리는 선생님에 대항하여 전교생 앞에서 당당한 발언을 한다. ‘그 시절’에서 모범생이었던 션자이는 친구들을 서로 의심하라는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결국 남자주인공 무리와 함께 벌을 받는다. 이처럼 남녀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변화하고 가까워지며 닮아간다. 그리고 결국 서로를 좋아하게 되지만, 첫사랑 영화가 늘 그러하듯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변해버린 자신의 마음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상대방의 마음을 알 길이 있으랴. 사춘기인 그들에게 진심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늘 진심을 숨기고, 늘 돌려 말한다. 우리의 첫사랑이 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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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소녀시대’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두 영화를 본 후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의 소녀시대는 두 학생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라면, ‘그 시절’은 우리의 아름다운 청춘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나의 소녀시대는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 시절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며, 나의 소녀시대가 사랑에 좀 더 집중했다면, 그 시절은 청춘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나의 소녀시대’는 온전히 두 사람의 관계와 두 사람의 감정에 주목한다. 영화는 여자 주인공 임진심의 시선을 따라가기 때문에 처음 볼 때는 자연스레 임진심에 감정 이입하여 그녀의 시선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보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남자의 시선과 감정변화에 주목하게 된다(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서야 비로소 알 수 없었던 남자의 행동과 표정을 이해하게 된다. 즉 ‘나의 소녀시대’는 다시 볼 때 보이는 것이 많은 영화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소녀시대는 예쁜 장면들로 점철된 영화이다. 그래서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현실감이 떨어지는 장면이 너무나 많다. 평범한 학생과 일진의 우정과 사랑, 선생님에 대한 전교생의 반항과 도전 등 이 영화는 사실 판타지에 가깝다. 이 영화가 유치하다는 평가는 아마 이러한 장면들 때문에 나오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판타지이기에 아름답고, 판타지이기에 설렌다. 우리에게 있었을 것 같지만 절대 없던 첫사랑의 이야기이다. “학창시절을 기억 조작시켜주는 영화”라는 누군가의 리뷰는 이 영화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반면 ‘그 시절’은 두 사람 위주로 서사를 이끌어가면서도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있다. 커텅의 친구인 아허, 쉬보춘, 라오차오, 랴오잉홍과 션자이의 친구인 후지웨이까지 영화는 일곱 명의 청춘을 빼놓지 않고 그려낸다. 그래서 제목의 “좋아했던”은 커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섯 남학생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첫사랑을 앓았고, 영화는 예민한 시선으로 이를 포착한다. 커텅은 짓궂게, 아허는 성숙하게, 쉬보춘은 멍청하게, 라오차오는 엉뚱하게, 랴오잉홍은 유쾌하게 션자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소녀”가 아니라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다. 마지막 션자이의 결혼식에 다섯 명이 모두 모여 션자이를 좋아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 시절’ 두 사람의 첫사랑은 ‘사랑’보다는 ‘첫’에 방점이 찍혀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청춘과 사춘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2차 성징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수업시간에 자위하는 장면, 쉬보춘이 발기하는 장면, 나체 장면 등 자칫하면 더러워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을 영화는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성적인 장면은 되려 순수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끊임없이 이들이 이제 막 2차 성징을 시작한 어수룩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그래서 이들의 사랑도 미숙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대사 중, “그 시절 여자는 남자보다 성숙하고, 그 성숙함을 견딜 남자는 없다는 것이다”라는 대사는 청춘의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커진텅과 달리 션자이는 너무나도 성숙하다. 션자이는 커진텅의 유치한 모습에 끌리지만, 결국 그들은 유치함의 차이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션자이는 커진텅이 마음이 진지한 것이 아닐까 봐 두려웠고, 남자는 여자의 진지한 모습에 겁을 먹는다.


그러나 실상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커진텅에게 션자이는 청춘 그 자체였으며, 커진텅이 좋아했던 것은 션자이를 사랑한 자기 자신이었다. 커진텅의 대사 중 “만약에 너가 사라지면 내 추억도 사라지는 거니까”, “나도 널 좋아했던 그 시절의 내가 좋아”라는 대사는 이 영화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있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그 시절’은 ‘나의 소녀시대’와 같은 둘만의 에필로그가 필요가 없다. 첫사랑은 그 시절일 뿐이다.


요컨대 ‘나의 소녀시대’는 예쁜 첫사랑 판타지라면, ‘그 시절’은 우리 모두에게 있었을 법한 첫사랑 이야기이다. 두 영화를 비교하자면, ‘나의 소녀시대’는 더 재미있는 영화고, ‘그 시절’은 더 좋은 영화이다. 나는 분명 ‘그 시절’에 더 높은 평점을 줄 것이지만, ‘나의 소녀시대’를 더 자주 꺼내보게 될 것 같다.



<크라임씬>의 세계, 우리 모두의 역할놀이


이르름


여름. 찐득한 더위와 맥주, 열대야, 그리고 납량특집의 계절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나는 온갖 분장한 귀신들과 어둠을 비추는 적외선 카메라, 으시시한 배경음악의 조합이 만드는 무서움이 어떻게 더위를 식힌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꽁꽁 숨어 들어가 더 더워질 뿐이었다. 이런 류의 공포물은 연출을 통해 주로 깜짝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반면 추리는 일종의 능동적인 공포라 할 수 있다. 추리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것에 대해 추측하는 것으로, 추리물은 범죄나 사건에 대해 단서를 모아 결론을 내리는 장르다. 즉, 안전한 위치에서 두렵고 기이한 사건들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두려움을 해결해줄 실마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추리의 핵심이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숨겨진 진실을 추구하며 공포를 극복하고 안정적인 진실을 발굴하고 나면 성취감과 더불어 서늘하고 짙은 여운이 남는다. 그래서 기나긴 여름방학마다 나의 선택은 추리소설이었다. 인간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공포를 파헤치고자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은 마음 속 온도가 조금 낮아지는 듯도 했다.


JTBC의 <크라임씬>은 추리를 예능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출연자들은 각 에피소드마다 롤 카드를 뽑아 하나의 역할을 맡고, 본인만의 진범/결백 여부와 해당 사건에서 본인이 가지는 위치와 이야기를 알게 된다. 범인만이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용의자들은 끊임없이 발견되는 불리한 증거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각 출연자는 역할에 걸맞은 분장과 의상을 착용한 후 범죄 현장 및 용의자들의 근거지로 구성된 세트장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증거를 수집하고 다른 용의자들과 소통하며 진범을 밝혀내야 한다. 이 만들어진 세계에서 범죄 사건에 얽힌 인간의 극단적인 욕망을 읽어내고 숨겨진 것을 찾는 추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추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수적이다. <크라임씬>의 기초가 되는 이야기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제작진이다. 이야기의 큰 흐름에 따라 단순화된 범죄 현장이 만들어지고, 사건과 관련된 역할, 그리고 각 인물의 역사가 제시된다. 그리고 제작진에 의해 점이나 흉터, 타투나 상처 같은 신체적 특징이나 각자의 생활 공간에 놓인 편지와 일기장, 계약서 등의 물리적 증거들이 사건 현장에 작위적으로 흩뿌려진다. 그리고 출연자들은 주어진 역할 안에서 공통적으로 성실하고 재치 있게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인공적인, 그래서 반드시 답이 존재하는 <크라임씬>의 세계는 하나의 추리게임을 해나가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의도적이고 논리적인 <크라임씬>의 세계에서 각각의 역할들은 피해자를 둘러싸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범인검거라는 단일한 목적을 지닌다.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결국 서로의 발견을 공유하고 함께 진실에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제작진이 부여한 역할과 관계 이상의 연결고리들이 생성되는데, 여기서 <크라임씬>은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등의 특성을 빗겨나간다. 출연자들의 역량에 따라 주어진 상황 이상으로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더 풍부한 결과물을 낳게 되는 것이다.


각각의 출연자에게 역할이 주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다양한 속성들이 무너지며 나타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출연자 자연인의 나이나 경력에서 오는 권력들이 상당히 무력화된다. <크라임씬>이라는 역할놀이에서만 주어지는 새로운 권력인 나이나 재력 등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달라지고, 현실의 위계를 뒤집는 방식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크라임씬>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중년의 장진이 20대의 인기 DJ가 되기도, 아이돌 정은지가 30대 박지윤의 예비 시어머니로 분하기도 하며, 김지훈은 매 화마다 온갖 충격적인 정체의 인물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 놀이는 외모나 지능에 대한 비하로 이어지기 쉬운 출연자들 간의 멘트가 덜 위험하게 느껴지는 안전장치로도 작용한다. 나름의 평등해진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악의 없는 장난이자 역할이 갖는 전형성과 반전된 지위에 대한 비틀린 농담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하나씩 입게 되면서 출연자들은 설정 안에서 도리어 행동과 발언의 자유를 얻는다.


출연자와 역할의 성별이 거의 대부분 고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여성 출연자가 남자 역할을 한 경우도 존재했으나, 아무래도 몰입 측면에 방해가 되므로 잘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연자들에게 주어지는 역할들은 상당히 다양한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다양한 애정관계나 가족관계가 등장하며, 퀴어도 여러 차례 다뤄진다. 살아온 궤적 또한 흔한 삶의 형태를 보이기보다는 극적이고 낯선,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은 형태를 띤다.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이야기 또한 매우 극단적이고 단순화된 상태지만, 출연자들의 플레이를 통해 살이 붙여지고 생명을 얻는다. 다채로운 일련의 역할들을 통해 <크라임씬>은 자연스레 낯설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정체성과 욕망들을 조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의 다양성과 의외성은 흥미로운 비밀들과 단서들, 그리고 복잡한 관계설정을 통해 흥미를 유발해야 하는 추리의 장르적 특성 덕분이기도 하다. 추리물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개연성 대신 충격과 재미를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를 하나의 역할 놀이로 제작하는 것은 범죄 상황을 단순히 게임으로 환원시킬 일말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크라임씬>은 악한 피해자를 전면에 세워 이런 부담을 일부 빗겨나간다. 이는 각 플레이어에게 동기(원한관계)를 부여해주고 추리에 혼선을 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이번 시즌 우승자는 상금을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기부했다.) 더불어 <크라임씬> 안에서의 역할놀이는 여러 차원에서 현실 세계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크라임씬>의 세계는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세계가 아닌, 화면 밖의 실제 세계와 연결된 허구일 뿐이라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전달된다.


일례로 출연자들은 사건현장 안에서도 방송에 대해 걱정하며 제작진을 언급하거나, 편집이나 실제 세계에서의 반응과 비평을 의식하는 등의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 과정에서 출연자의 자연인으로서의 성격적인 면모나 연예인으로서 가지는 이미지적 면모들이 주어진 역할이라는 껍데기를 비집고 나온다. 또한 각 에피소드들의 시간배경에서 오는 차이를 이용하여 동일한 인물이 서로 다른 에피소드에 재등장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는 언뜻 연속성을 통해 <크라임씬>만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가상의 이야기보다는 재등장한 인물과 그를 연기하는 출연자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20년 가량의 시간차를 둔 에피소드에서 박지윤이 둘 다 탐정을 맡자 나중 에피소드에서 그는 유명한 탐정 고모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세계관의 연속보다는 박지윤이라는 연기자 자체의 반복과 그리고 별개의 두 사건에서 다른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이전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농담을 던지는 동료 출연자들이다. 마찬가지로 하니가 출연했을 때 EXID 멤버들을 졸업앨범에 합성하는 등 현실에서의 출연자와 관련된 정보들이 소품에서 깨알같이 활용된다. 그리고 이런 장난스러운 조작들이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크라임씬 작가 살인사건을 다루는 시즌3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이런 특성들이 총 집합한다. 해당 시즌의 지난 사건들에서 각 출연자들이 맡았던 인물들의 오마주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출연자들은 본인의 이름을 걸고 실제와 가상이 섞인 세계에서 추리를 진행한다.




(JTBC 캡처)




출연자들이 제 4의 벽을 넘나드는 것은 더 나아가 시청자들의 능동적인 개입을 돕는다. 시청자는 <크라임씬>의 무대 안팎에서 독특한 위치에 놓인다. 따로 연기할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으나, 시청하며 출연자/이야기 속 인물들과 함께 추리할 수 있는 능동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크라임씬>은 시청자들이 범인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실시간으로 지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이 발견한 단서들만을 조합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겪지만, 무대 위의 용의자들이 가지는 의심의 흐름과 시청자들의 투표 결과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추리는 또다시 책이나 영화 같은 완결된 형태에서 벗어난다.


시청자들에게 열려있다는 점은 시청자들 사이의 소통이 활발해질 때 가장 매력적이다. <크라임씬>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기사를 찾아보기는 힘든 반면, 나무위키와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에서는 각 화의 전개와 인물들 설명, 알리바이와 단서를 통한 추리 과정, 그 에피소드 전체에 대한 분석과 평이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평가에 제작진은 민감하게 반응하며, 많은 불만사항이 반영되어 시청자들은 추리의 토대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들이 모여 더 즐거운 덕질을 낳는다.


<크라임씬>에서는 하나의 정돈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큰 규모의 역할놀이가 펼쳐진다. 다채로운 캐릭터 플레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우리 모두는 직접 추리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이 개입한 역할극은 스크린 안팎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추리와 이야기, 예능과 두뇌싸움 등 폭넓은 재미를 낳는다. 무더운 여름 밤, <크라임씬>을 한 회씩 꺼내본다면 누구든 이 거대한 판에서 탐정이 되어 집중하며 키득거리는 100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역할놀이이자, 추리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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