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만큼은 아니어도


예청그릴스



덕심도 문장력도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창간호의 한 바닥이 주어졌다. 시작이라는 부담감을 재미난 소재로라도 극복해보자는 생각에 머리를 굴린다. 근래의 나를 돌이켜보니 최근 그나마 ‘열의를 가지고’ 하는 일은 인스타그램이다.


정신 없이 계정의 바다를 떠돌다 보면 지극히 관음증적인 ‘나’ 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는 자신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그것을 본다. 손가락을 잘못 놀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이상 내가 본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스크롤을 쭉쭉 내리면서 누군가 올리는 사진이나 영상을 마음껏 감상하면 된다. 작은 네모들의 모자이크로 된 세계는 내 안의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요즘 ‘훔쳐보는’ 대상은 설리다.







우선 그녀는 예쁘다.

이건 그 세계의 암묵적인 공식이라도 되는 것인가? 예쁘거나 매력적이거나 멋있어 보이면 우선은 팔로우하고 본다. 초창기에만 해도 팬들에게 ‘셀카고자’ 라는 짓궂은 별명을 들었던 설리가 이젠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한 것인지 올라오는 사진마다 예뻐서 ‘팔로우할’ 맛이 난다.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재밌어서다. 그녀가 올리는 사진들은 심심찮게 화제가 된다. 하도 논란거리가 되어서인지 잠시 계정을 닫기도 했던 그녀가 이제는 대놓고 대중의 반응을 노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활발하게 사진을 올리고, 대중은 그것들에 반응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빠지게 된 결정적 계기를 꼽자면 그건 그녀의 ‘ㅉㅉ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얇은 옷을 입은 채로 찍힌 사진 속에서 그녀의 가슴의 ‘그’ 부분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던 것이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설리가 과연 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에 대해 열띤 논의를 펼쳤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의 사진에 대한 여러 편의 온라인 기사와 사진 아래 각자의 추측과 확신 혹은 비난과 감탄으로 달렸던 수많은 댓글들이다.

‘누군가가 브래지어를 착용했는지 안 했는지’가 엄청난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새삼 평소 좋아하던 할리우드의 연예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온몸을 노출하거나 음식에 침을 뱉는 식의 물의를 일으켜 논란이 되던 그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연예인으로 살기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반인들도 패션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가슴을 드러내고는 하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논란거리가 될 수 있기는 할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해외 여행을 할 때마다 한번씩 우리나라가 유독 가슴에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선 노출이 항상 성적이다. 내가 드러내는 것은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 버린다. 신체의 굴곡과 라인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와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더울 때에는 벗어야 한다는 주의여서 여름에 민소매를 입는 것을 좋아하는데, 입을 때마다 엄마의 잔소리는 덤으로 따라 온다. 엄마 말에 따르면 외국에선 되는데 우리나라에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냥 한 귀로 흘려 버리는 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살을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는 날이면 나부터 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볍고 시원해서 좋기는 해도 민소매를 입는 날이면 사람이 많은 길거리를 지날 때에는 얇은 겉옷이라도 걸쳐야 마음이 놓인다. 내가 더워서, 내가 좋아서 조금 더 살을 드러낸 것뿐인데, 그들을 위해, 마음껏 보라고 입은 것처럼 구는 시선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아래위로 훑는 시선이 싫어서 치마도 잘 못 입는 내게 그런 시선은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다. 속옷이 보일 듯 말듯한 길이의 치마를 입고도 씩씩하게 잘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민소매를 입을 때에는 속옷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우리나란 남이 속옷을 착용했는지 안 했는지도 상당히 중대한 관심사인 곳이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너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맞춰 보겠어’ 라는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민소매를 입을 때에는 속옷도 제대로 차려 입어줘야 한다. 만일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내 의도와 상관없이 헤픈 사람이 되어버리거나 살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벗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설리를 보고 ‘너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맞춰 보겠어’ 라는 식으로 맹렬히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이 곳은 가슴 한번 드러내고 다니기 피곤한 곳임을 깨달았다. 내가 내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왜 이상한 일 혹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맨 살을 드러냈을 때에는 왜 남이 내 몸을 훑는 시선을 감당해야 하며,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으면 한 순간에 ‘극도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버리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사는 걸 한층 더 피곤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설리를 다룬 어떤 기사에서는 그녀가 우리 사회의 ‘리트머스’ 같다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 암암리에 작동하는 무언의 금기들을 노출한다는 점에서다. 그녀는 연예인이기도 하지만 여자 연예인이기도 하다. 그녀를 향한 시선은 연예인을 보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여자를 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에게 작동하는 시선이 그녀에게 작동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제 설리는 자신의 행동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대중의 모습에 질리다 못해 역으로 그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어떤 의도에서든 (혹은 아무런 의도가 없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드러내주는 것은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이건 그저 개인적인 단상이다. 사회에 팽배한 남성중심적 시선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요즘 소소한 덕심을 키우고 있는 설리에 대해 떠들어 본 것이다. 많이 피곤할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도 아니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쓸데 없는 일이 연예인 걱정이라는 말을 들은 후로 그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단지 얘기해보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다. 해외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만 들어서면 느끼게 되던 그 압박감들. 00 살이면 당연히 해야 하고 끝내야 하는 일들. 한국에서 나이와 학벌과 성별이 결정하는 모든 임무들에 대한 피곤함. 그 모든 것들은 내가 결정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원치 않은 시선들이 내 인생에 던져진다. 나는 그것에 동의한 적도 그것들을 바란 적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관음증이라 부르겠다. 한 연예인이 노브라인지 유브라인지가 진지하게 논란이 되어버리는 곳에서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는 것, 내 멋대로 살면서도 정상적이고 보통의 인간으로 여겨지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타인을 훔쳐보고 훔쳐봄을 당한다.


어찌 보면 이건 투정이다. 내게 던져지는 시선들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에 유독 설리를 훔쳐보는 것이 더 재밌을지 모른다. 설리의 사진은 먹이처럼 던져지고 사람들은 반응한다. 설리는 그것을 통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지겨워하는 것 같기도, 사람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기에 상처받은 설리는 없는 것 같다. 진짜 설리는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위안을 받고는 한다. 설리를 바라보는 희한하고 왜곡된 시선들을 가리켜 관음증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무시하고 웃어넘겨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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