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에 대한 소고 – 왜 나는 무용을 사랑하는가?

 

 자취방 문을 열고 신발을 벗은 뒤 걸어 들어가 흰 옷장 문을 열고 겉옷을 벗어 넣는다. 그리고 침대 사이와 책상 사이에 있는 작은 공간에 요가 매트 한 장을 깐 뒤 스트레칭 밴드를 든다. 타이머를 2분으로 맞추고, 양다리를 옆으로 벌린 뒤 스트레칭 밴드를 양발에 걸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다. 사이드 스플릿 스트레칭. 언젠가 180도로 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몇 달 해봤는데 잘 안 된다. 실제로 늘어나지는 않고 찢어지듯 아프기만 한 햄스트링을 주무르며 갑자기 드는 생각은, 내가 이걸 지금 왜 하고 있는 거지? 그야 발레를 더 잘 하고 싶어서. 왜? 발레가 좋으니까.

그러니까, 왜?

나는 왜 무용을 좋아하는가? 이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처럼 답 없는 물음일 지도 모른다. “그냥.”이라는 반응이 가장 적절한 대답인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묻고 싶다. 자의식을 파헤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변태 같은 성정 탓이다. 수상소감에서 나올 법한 “좋아합니다. 그냥, 다 좋아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같은 멘트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왜, 라는 물음은 지워지지 않고 머리를 맴돈다. 결국 되든 안 되든 내 취향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않고서는 내 의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나는 왜 무용을 좋아할까. “소질이 있어서.”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1여 년간 발레를 배웠다. 글쎄, 소질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전문 무용수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기에 나 자신을 좀 너그럽게 대한다면, 1년 동안 배운 것 치고는 꽤 만족스러운 편이다. 발레라는 것이 피아노와 비슷해 몇 번 배웠다고 해서 배웠다는 티도 내기 어려운지라 아직도 동작이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것이 실감이 나기 때문이다. 겉 근육이 아니라 속 근육을 쓴다는 것, 몸에 힘을 바짝 주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전달하여 표현한다는 것, 그런 것들을 배워가는 중이다.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배운다는 사실은 나를 우쭐하게 만들고, 엄밀히 말하면 나는 춤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춤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이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다. 잘 하지 않아도 좋아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잘해야만 좋아할 수 있다면 100m를 뛰는 도중 중간에 넘어져버릴 것만 같은,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중년의 남성이 야구 경기나 축구 경기에서 열광적인 응원을 하진 않을 것 아닌가. 또는 자신이 춤을 잘 추거나 노래를 잘 부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외모 천재라서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결국에 내가 무용을 좋아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있어 소질은 설득력 있는 요인이 아니다. 춤을 추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몸을 가지더라도 얼마든지 춤추는 것을 좋아할 수 있다.

Erik Cavanaugh, from his Instagram.

예를 들자면 에릭 카바나우(Erik Cavanaugh)는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춤을 추며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다양한 미가 존중되는 현대 사회라 할지라도, 마르고 단단한 체격이 여전히 선호되는 무용의 세계에서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나는 왜 무용을 좋아하는가. 아마도 무용이 갖는 원초적인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용에는 그 어떤 기구도, 장비, 매체도 필요하지 않다. 물론 사용할 순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당신이 춤을 추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당신의 육체만 있으면 된다. 팔을 뻗고, 젓는다. 다리를 구부리고, 땅을 밟고, 구르고, 대지를 박차고 뛴다. 몸의 중심을 잡고 호흡을 느낀다.

James Whiteside - American Ballet Theatre - photo by Nisian Hughes

인간의 의식이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확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인간이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가장 확실한, 태초부터 있어왔던 사실. 그건 인간이 육체를 가진 유기체라는 것. 무용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각인한다. 책상 앞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키보드만을 두드려온 내게 무용은 내가 이 세상을 발 딛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데카르트적 인간이 아닌 하이네적 인간이니, 아폴론적인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니, 어려운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다만 모든 생각을 잊고 자신의 온 몸에 집중하는 경험, 자신을 잊는 경험을 하게 되면 알 수 있는 진실이 하나 있다.

춤을 출 때 나는 살아있다.

하지만 원초성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내가 직립 보행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필라테스나 요가, 또는 체조만으로도 충분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굳이 무용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세를 교정한다든가, 코어 근육을 단련한다든가, 그러기 위해 내 의식을 몸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이런 것들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Akua Noni Parker and Jamar Roberts in After the Rain Pas de Deux, photo by Paul Kolnik

 

그렇다면 무용을 좋아하는 이유는 좀 더 확실해진다. 그건 무용이 몸을 통해 무엇을 전달한다는 사실이다. 무용은 몸으로 말한다. 아니, 온 몸으로 전달한다. 언어로 명확히 규정될 수 없는 어떤 기운, 감정, 에너지, 좀 더 과장하자면 혼, 그런 것들이 뒤섞여 온 신경으로 전달한다. 언어는 필요 없다. 악기도 필요 없다. 춤은 온 몸으로 실감하는 것이며, 그런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그런 사실을 서로의 몸과 몸을 통해 공명하는 것이다. 춤을 출 때의 나는 다른 행위에서 얻을 수 없는 흥분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아아, 이것이 내가 무용을 사랑하는 진정한 까닭인 것 같다.

무용의 소통은 분명 인간의 원초성과 맞닿아 있다. 언어를 사용하기 이전의 인류가 북소리에 흔들리는 심장과 함께 서로의 것들을 몸짓으로 나누는 비슷한 경험을 2018년 맥북을 만지작거리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것이다. 무용은 가장 솔직한 의사소통이다. 몸짓의 세계엔 언어의 기만이 관여하지 못한다. 의식이 모두 관장할 수 없는 무의식, 무정형의 덩어리들을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가 무용인 까닭이다.

그러나 내가 무용을 사랑한다 해서 언어로서의 의식을 평가 절하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무용이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무엇을 전달한다 할지라도, 분명히 언어로써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무정형의 덩어리들을 언어로 설명하기를 완전히 포기해버린다면, 전달되는 대상의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의 의사소통 수단이 하나밖에 존재 하지 않는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몸짓은 어쩌면, 무용이라는 예술장르로 포장된 고상한 서커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Cacti choreographed by Paul Ekman, Netherlands Dans Theater 1.

 

현대무용이 가지는 피상성에 대한 논의는 NDT 안무가 중 한 명 알렉산더 에크만의 <Cacti>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몸짓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지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안무가가 아닌 무용수는 그 몸짓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이런 본질적 논의를 그는 아름답게, 그리고 조금은 짓궂게 제시한다. 그는 무용수들이 안무를 연습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삽입한다. 무용수들은 동작의 의미를 탐색하지 않고 단지 카운트를 세며 순서를 외우고 연습한다. 미니멀리즘 전시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흰색의 큐브들이 무대에 널려 있다. 작가정신의 파괴라는 성취를 거둔 역사적 조형물이 물화(物化)되어, 그 역사성은 사라지고 단순함이라는 미학 하에 아름다운 조형물로 가공된다. 무용수들은 명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은 선인장 오브제를 가지고 춤을 춘다. 작품은 상징과 은유, 비정형으로 뒤덮여진 포스트모던 댄스가 정말로 유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의미의 모호함의 문제는 춤에 국한되지 않는다.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고 창작자로부터 감상자로 무게중심을 옮겨놓고자 하는 예술,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라면 언제나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인 것이다. 의미 해석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감상자에게 내맡겨버리고 번드르르한 스펙타클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상업성을 획득하게 되는 위기적 상황은 어느 예술 장르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Prince Credell in Stop-Motion choreographed by Sol León and Paul Lightfoot

 

무용이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한 매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안무가가 의미를 뜯어보고 표현하는 과정을 신중하게 거쳤다면 그 작품은 반드시 무언가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솔 레옹과 폴 라이트 풋의 <Stop Motion>은 막스 리히터의 음악과 함께 이별의 의미를 탐색한다. 무용수는 기억의 잿더미 가운데로 뛰어 든다. 재만이 남은, 버려진 기억들 속에서 몸부림에 가까운 무엇을 춘다. 그가 돌고, 차고, 뛰는 가운데 흩날리는 재들은 온몸을 덮는다. 마치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며 회개했던 유대인처럼, 그는 기억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 눈물 젖은, 어쩌면 폭력적이다 싶을 정도로 아픈 애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 몸부림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정서는 다른 장르에서는 표현될 수 없는 차원인 것이며,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단순히 내가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이를 밝히며 다른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경험을 해보기를 권유하고 요청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춤을 통해 자신의 몸을 자각하는 경험. 말을 하지 않은 채 몸과 몸으로 무엇이 전달되는 경험, 오히려 말이 필요 없는 경험, 그럼으로써 살아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 경험. 당신도 나와 같이 몸을 가진 인간이라면 분명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험하길 바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