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플로리다
금송
들어가며
어떤 영화는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또 어떤 영화는 스스로 아름다워진다. 전자의 영화들이 벅차게 기억되는 아름다움이라면, 후자의 영화는 아리게 기억되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후자는 대체로 인간의 진실한 얼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두 시간 안에 ‘아름다워 질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때문이다. <무쉐뜨>에서 호수로 연거푸 몸을 굴리던 소녀, <로제타>에서 가스통을 들고 사라진 소녀가 이번엔 디즈니 동산을 향해 뛰어간다. 열 살 베기 소녀의 대책 없이 말간 표정에 그 모든 것들을 짊어 지우는 것은 도대체 어떤 작자들의 상상력이란 말인가?
웨스 앤더슨 풍의 연보라빛 건물과 멀리는 희미한 무지개가 보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포스터의 국내 배급사 AUD의 홍보문구는 다음과 같다.
“2018년 우리를 행복하게 할 가장 사랑스러운 걸작, 안심하세요 나랑 있으면 안전해요,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건너편 ‘매직 캐슬’에 사는 귀여운 6살 꼬마 무니와 친구들의 디즈니월드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
비록 이 영화가 주거 공간을 잃고 모텔에서 장기 투숙하는 히든 홈리스들의 삶을 다루기는 하지만, 이러한 홍보 전략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허름한 모텔에 산다고 해서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라는 배급사 대표의 변은 꽤나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성질의 것이냐는 것이다.
꿈의 동산, 초라한 삶
영화는 점점 오락이 되어가고 있다. 3D안경을 쓰고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다 보면 이 행위가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가령 비디오 게임은 그것이 얼마나 생생한 시각화에 성공했느냐 와는 별개로 우리 삶의 표피 그 이상으로 진입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비디오 게임의 소비자 자체가 요구하는 것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삶과 세계의 진면목을 보고자 비디오 게임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어떤 문화와 매체의 예술적 성취라는 것은 단지 그 수요자가 요구하는 범위 안에 머무는 것일까? 최근의 박스오피스를 보고 있자면 이것이 그렇게 틀린 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밝혔듯 그 와중에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충실한 모사가 아니라 그 영화가 보여주는 생생한 관점을 통해 드러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현실은 재현적 상징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재현적 상징이란 그것이 상징을 위한 상징이 아니라 재현을 바탕으로 둔 상징이라는 의미로 쓰고자 하는 용어이다. 가령 이런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무니와 아이들의 낮 시간은 대부분 어디론가 걸어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카메라는 건물의 구조와 아이들의 모습을 한 모습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먼 거리에서 이들을 찍고 있다. 당연히 구조물은 더 거대해지고 아이들은 더 왜소해진다. 그리고 이 건물들은 대부분 디즈니 동산과 관련이 있는 건물들이다. 이 극단적인 크기의 대조는 아이들을 소멸시키면서 동시에 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그 철 없는 환상성을 기형화 시킨다. 이 장면에서 영화가 조작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올랜도 – 디즈니 동산이 위치한 – 외곽은 건물들 사이로 아역 배우들을 걷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관점의 차이, 카메라의 위치 변화로 인해 이 장면은 영화가 포착하고자 하는 실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이 영화는 사실 어떤 관습에 얽매여 있지 않다. 아이들의 대화를 긴 롱 테이크로 보여주는 동시에 전형적인 헐리웃 가족 영화 스타일의 슬로우 모션으로 딸과 엄마가 빗속에서 뛰어노는 장면의 푸티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관습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음’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어떤 관습이 있어야 한다는 듯이 상정하며 말하는 것은 이 영화가 리얼리즘이라는 큰 맥락 속에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묘사없이 묘사하는 것을 택하고, 플롯에 대하여 사건이 우위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이야기를 직조해나가기 보다는 삶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데 애를 쓰고 있고, 그러다 보니 ‘별 것 없는 일상을 다룬다’는 이젠 조금 진부해지기까지 한 표현이 이 영화에도 적용 가능하다. 다르덴 형제 이후로 많은 리얼리스트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자기만의 언어로서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영화의 감독인 션 베이커도 분명 그 흐름을 이끄는 새로운 기수로 여겨질 만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전작들에서 다뤄온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뉴욕의 길거리 짝퉁 상인, 중국계 배달원, 마침내 캘리포니아로 건너와서는 트렌스젠더 성 노동자까지. 이러한 영화들에서 그가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과 목표는 언제나 동일하다고 느껴진다. 방식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시각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고, 목표는 그들을 스크린으로 드러내는 것 그 자체. 그는 줄곧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말해왔다. 결코 특정 그룹을 타겟으로 다뤄보겠다고 마음 먹은 적 없다고, 다만 덜 다뤄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이는 그가 얼마전에 내한했을 때 그의 눈을 보며 직접 들은 사실이기 때문에 신뢰해도 좋다. 그는 가장 특수한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계의 관객들에게 그들의 삶과 영화 속 주인공들을 연결시킬 수 있게 해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분명히 우리를 유년시절로 데려가기도 하고, 모성에 대해 생각해보게도 하고, 무엇보다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파견된 사회복지사들이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으로 딸과 엄마를 떼어놓으려고 할 때 눈물까지 흘린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무언가 찝찔함을 느꼈다.
자유를 느낄 권리
이 영화는 션 베이커의 이전 영화들과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무니의 모녀는 객관적으로 삶이 매우 힘겨운 사람들이다. 그 힘겨움은 이전 영화들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힘겨움과 차원을 달리 한다. 한 주의 모텔 숙박비를 내기가 버겁고, 무니는 그토록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구걸을 해야만 하는 소녀이다. 돈이 없는 그들에게 하루를 버텨내는 것은 그 자체가 미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삶을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는 우리가 그들의 소소한 행복과 거대한 절망을 보면서 공감을 하고, 나아가 홍보 문구에 의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온당한가이다. 아니, 누가 그들을 영화의 캐릭터로 만들 수 있는가. 즉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감상자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 자유의 윤리성 또한 같이 묻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리얼리즘의 태생적인 논쟁을 재소환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예술을 보며 느낄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문제 의식이기도하다. 좋은 영화의 좋은 감상자는 영화가 제공하는 계기에 따라 스스로를 깨워내고 자신의 생명성 그 자체를 유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름 하에 누리는 자유, 그 자체의 윤리성에 대해서 고민해보아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 속 생생함 앞서 분명히 존재했던 그 재현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자연스레 전에 읽었던 책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고통을 유발한 폭력이 재현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게 표현되더라도 참을 만한 자극이 된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극장에 들어와 안전한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최악의 사태는 영화의 재현된 폭력을 감상하고 나서,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안전한 분노가 그 이해의 증거로 내밀어진다. 고통의 이해가 분노를 낳는 게 아니라, 안전한 그래서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거의 잊혀질 분노가 고통의 이해를 사후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객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 윤리의 문제다. 또한 폭력의 재현을 변호하는 데 동원된 언어의 문제다.
이창동이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공범 의식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중략) 밀양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 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강, 2010. “고통의 심연, 찰나의 빛”
물론 이 영화가 명확히 (폭력에 의한) 가해자-피해자 구도에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무니 모녀는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홈리스가 된 것이고 결국은 공권력에 의해 모녀 사이가 갈라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거대 구조의 피해자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지나친 표현이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그들의 삶의 형태는 도시 빈민이며 일반적 의미의 불행과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굳이 밀양에 대해 쓰여진 이 글을 가져온 이유는 사실 이창동이 이 영화를 만드는 태도에서 션 베이커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만드는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한 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언급한 영화는 이창동의 오아시스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어느 정도 립서비스성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전의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도 밀양을 그에게 강한 영감을 준 영화로 꼽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창동의 영화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음을 꾸준히 외쳐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공감하되 연민하지 않는다는 션 베이커의 태도도 조금 더 와 닿는다.
다시 영화 속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니의 엄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성매매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모녀가 살고 있는 모텔 방이다. 무니의 엄마는 남자 손님들이 방문할 때마다 무니에게 목욕을 시킨다. 우리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 실재 성매매 장면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 무니가 한가롭게 목욕을 하며 물장난을 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욕조 밖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이 상상은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깨워낸다.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현실들, 딸을 욕조에 둔 채 성매매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현실과 그 심정, 나아가 영화 밖의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을 수 있는 진짜 사람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에 대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런데 감독은 이 자유를 오랫동안 허용하지 않는다. 한 남자가 프레임 안으로 불쑥 들어와 무니와 눈이 마주친다. 이 조마조마한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자유란 것을 논할 수 없고 그저 무니가 상처받지 않기를, 어떤 상황인지 인식하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무니는 감상자에게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 이상의 존재감을 가지게 된다. 강력하게 확보된 영화 안의 자유가 강력한 공감으로 치환되는 놀라운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마치 현실이 영화로 침투하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우리가 손쉽게 누려왔던 예술이란 세계의 자유라는 권력이 얼마나 나약한 것이지 상기시켜준다.
그런데 이토록 재현과 자유가 갖고있는 한계에 대해 경계해 왔던 션 베이커는 왜 결국엔 무니의 ‘매직캐슬’에 무지개를 띄우는가. 왜 그들의 일상을 이토록 귀엽게 그려내고, 심지어는 즐길 만할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가. 그리고 왜 결국에는 그들에게 디즈니월드로의 도피를 허락하는가. 이러한 영화적 환상으로의 도피가 그의 영화가 여타 리얼리스트들과 차별점을 가져온 부분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의문이 제기되어야 마땅하고, 껄쩍지근해야 마땅하다. 그는 정말 조심성을 잃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서 현실의 고통을 교묘하게 외면하고자 한 것일까? 예상했겠지만 앞으로의 글은 이러한 혐의에 맞서 션 베이커와 그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대한 변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작품 그 자체 이전의 태도를 논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느끼거나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출자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없는가, 그 경계에 대해 스스로 알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물음이라고 믿는다. 더욱이 삶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영화들이라면 이 물음은 당위의 문제를 넘어 작품의 진정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다시 한 번 논점을 짚어보자, 이 영화에 대해 제기되는 의문은 다음의 두 질문의 대립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들을 행복할 만한 삶으로 그리는 것이 맞는가? 와 그들이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또한 오만한 생각아닌가? 하는 두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질문이 사실은 같은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들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션 베이커는 이 명백한 모순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그들의 행복 여하를 멀찍이서 판단하지 않았다.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스토리나 캐릭터를 찾아 특정 지역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최근 몇 작품은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 관한 영화여서 외부자로서 리서치가 필요했다. 가장 대상을 존중하는 리서치 방식은, 그들이 사는 곳에 직접 가보고 아무것도 모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해당 지역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현상, 거기 사는 주민들을 소재로 픽션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널리스트가 그러하듯 사람들에게 다가가 가능한 한 인터뷰를 많이 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대답했지만 그의 영화적 입장의 정수는 줄곧 여기에 있었던 듯하다. 매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직접 해당 커뮤니티에 자신의 몸을 담궜고 이는 통상적인 영화 만들기를 위한 자료 수집의 수준을 넘어섰다. 실제로 탠저린의 두 주인공은 이 과정에서 그가 사귀게 된 친구들이다. 즉 그는 윤리학적 실험을 하는 영화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치열함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치열함은 고통과 불행 이전에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어코 증명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의 ‘프로젝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맹인을 보며 션 베이커라면 저 사람을 어떻게 그렸을까를 감히 상상해본 적 있다. 그는 아마 맹인의 행복과 불행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그의 삶을 통째로 겪어낼 것이다. 모든 삶은 멀리서 볼 때는 짐작할 수 있을 만 해 보여도 가까이서 지켜볼수록 점점 특수해져서 그 자체로 반짝이는 형식이 되곤 한다. 가령 무니는 어른들이 울기 직전의 표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눈은 반짝임을 잘 포착해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무니의 눈으로 무니를 보는 영화이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한다. 이 영화는 히든 홈리스라는 계층의 전형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작품이다. 오직 완전히 개별화된 인물들을 현실에서 발견하고 찾아내면서 더 엉겨 붙은 상태의 현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냥 그 상태의 예술 작품으로서 남겨두는 것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그저 영화로서(예술로서) 머무는 것을 거부하는 듯 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이 영화의 제작 방식과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션 베이커가 해왔던 영화 작업들은 그 자체로 하나하나의 사회적인 프로젝트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만큼 ‘실제로 어떠한가?’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션 베이커 감독은 영화가 사회적인 생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서 자주 다뤄지는 사람들이 있고, 자주 이야기되는 계층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영화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계급적 위치와 산업적인 특징에 기인할 것이다. 그와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은 이러한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한다. 그는 예술가로서 덜 이야기 되어지는 존재들에 본능적으로 흥미를 느끼면서 동시에 필름메이커로서 덜 이야기 되어지는 존재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그가 예술가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운동가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 이유일 것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관련된 행사에서 그가 매번 빼먹지 않는 코멘트는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니 모녀에 대해 생각해달라는 말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감상자를 영화 속 실재의 세계에 연루시키면서, 스스로의 자유를 의심케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한다. 동시에 예술이 현실 사회 속 생산물이라는 건조한 명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예민함을 요구한다. 이제 우린 다시 마지막 장면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젠시의 손에 이끌려 디즈니 월드로 달려가는 무니의 모습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가짜 세계로의 도피도 아니고 손쉬운 영화적 환상으로의 도피도 아니다. 션 베이커의 작은 프로젝트가 건네는 진심의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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