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의 미소를 빌려

우리는 어디쯤에 있게 될까? 

이르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공녀> 속 쉽지만 않은 세상에서 가볍고 사랑스럽게 생존해내는 미소(이솜)를 보며,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선택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저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을 찾아갈까?

 

당신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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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는 사만 오천원의 일당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가사도우미다. 대학은 등록금이 없어 그만 뒀다. 사랑하는 남자친구 한솔(안재홍)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겹겹이 입은 옷을 벗고 (무려 30초에 걸쳐 끊임없이 옷을 한 겹씩 벗는다) 살을 맞대며 잠들기엔 미소의 텅 빈 방은 너무 춥다. 그래서 한참을 투자해 옷을 벗어놓고도, 봄에 하기로 하며 서로를 안고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하루 일해서 번 돈을 위스키와 담배에 쓰고 나면 남는 약간의 돈은 세금과, 집세와, 희귀병으로 하얗게 세는 머리를 막기 위한 약을 사기 위해 금고에 차곡차곡 놓인다. 그러나 집주인이 집세를 한 달에 오만원이나 올리고, 새해를 맞아 담뱃값이 이천원이나 오르게 되면서 미소가 이룩한 나름의 평화는 슬금슬금 깨지기 시작한다. 새롭게 일할 집을 얻은 어느 하루가 끝나갈 때, 미소는 문득 생각한다. 


어라, 집세를 없애면 적자가 해결되네?

  




도움요청


미소는 짐을 싸며 대학시절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밴드 멤버들에게 차례로 연락하기 시작한다. 1.최문영, 2.정현정, 3.한대용, 4.김록이, 5.최정미. 순서까지 야무지게 매겨 친구들을 하나 둘 찾아나서는 미소의 여정이 이어진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차례로 한때의 친구들을 만나 그들이 현재 가진 것들을 마주할수록, 집을 버린 미소의 독특한 선택은 더욱 선명해진다.

 


 


문영(강진아)은 만약을 위해 따 둔 조무사 자격증 덕에, 휴게실에서 스스로에게 포도당을 놓아가며 번듯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한편 자신의 요리 실력을 탓하고(나 요리 졸라 못하는거 같아’), 너무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는 남편과 시댁에서 복닥복닥 살아가는 현정(김국희)의 삶은 어쩌면 정반대이다.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미소를 잔뜩 반기며, 미소의 자취방과 새벽까지 술을 처먹던‘ 시절을 떠올리다가도 요즘도 곡을 쓰냐는 미소의 질문이 닿기도 전 잠들어버린다. 대용(이성욱)은 결혼에 실패한 채 엉망이 된 집에서 살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술과 담배에 기대어 살고 있는 그조차 출근하는 날 아침에는 영락없이 멀끔한 회사원의 모습이다. 해가 진 후 미소 앞에서는 누나라는 말 이후 눈물을 참지 못하는 마냥 연약한 동생인 그는, 평생을 갚아나가야 하는 아파트와 8개월 만에 헤어진 아내의 기억에 갇혀 있다. 록이(최덕문)는 부모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고 싶어하고, 마침 적절한 상대로 보이는 미소에게 온 가족은 깜찍한(…) 계략들을 세우나 실패하고 만다. 정미(김재화))는 부잣집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몰입하고 있다. 그의 남편에게 미소가 대학시절의 정미를 기타 잘 치던 뜨거운 사람으로 묘사하자 눈빛이 흔들리던 정미는 결국 품위를 잃지 않는 목소리로 미소에게 나가줬으면 한다고 통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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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이 부모님의 깜찍한 계략. 어 집에 남는 방이 없네? 이걸 어쩐다

 



대학 시절의 치기를 잊고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좇아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가볍고 무해한, 그래서 현실감이 없는 미소의 삶과는 분명 다르지만 꽤나 낯익다. 돈이 없지 취향이 없냐고 외치는 미소의 말이 새롭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하룻밤 신세를 지고자 하는 미소의 부탁에 대한 거절을 통해서든, 미소와 보내는 시간을 통해서든, 자신의 선택과 나이 들어감이 낳은 무게와 현실에서의 결핍을 내비친다. 기대수명이 100세를 훌쩍 넘기고, 수많은 청년들이 서른 즈음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되기 위한 지난한 준비과정을 끝마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고 설명하기에도 지겨운 이런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홀로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홀로 서기란 우리라는 따사롭고 해맑고 때로는 느슨한 경계를 좁게 끌어와 꼭 맞는 몇 명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아니라 연인을, 파트너를 찾고 또 하나의 가정을 꾸리는 것.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정감을 찾아 스스로를 먹여 살리는 것. 그래서 그 시절의 우리에 기댄 미소의 해맑은 방문에 이들은 당황했으리라.

밴드 멤버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는 현실은 어쩌면 정상성에 대한 이러한 욕망이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발현된 결과다. 배타적인 관계 안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돈이든, 정서적인 안정이든, 부모의 기쁨이든, 젊은 시절 한때 그랬듯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따라 미소처럼 염치 없이 살기에는 그들은 너무 커버렸고 세상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미소니까,

이런 세상이니까. 대책 없이 담배를 태우고 위스키를 홀짝이는 미소,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최우선에 놓는 미소를 보며 대리만족으로 양심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사실 영화 내내 마음을 울렸던 것은 미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나 짠하면서도 우습게 그려진 주변 인물들의 서사보다는, 대책 없고 구김살 없는 미소의 상냥함이었다. 그는 친구들의 집에 갈 때 계란 한 판을 꼬박꼬박 사 들고 가서 건네며, 떠날 때는 잘하는 요리나 청소를 해주고는, 밴드 시절의 사진 뒷면에 정성스런 말들을 써넣고 나온다. 누군가의 거절에도 그냥 네가 보고 싶었다고 답하고, 하룻밤 신세를 지면서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밥을 해주고서야 떠난다. 또 누군가의 황당한 프로포즈에서 벗어나 도망치면서도 (정말 말 그대로 도망인 것이, 자고 일어나니 온 집안의 문과 창문이 잠겨 있었다) 미소는 감사인사를 담은 쪽지를 잊지 않는다. 제멋대로고 개성 있고 그래서 매력적인 수많은 세상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조심스럽고, 상냥하고, 남에게 빚지지 않고, 언제나 온기를 잃지 않는 미소가. 불안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안정적이고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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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인간관계에서 보기 힘든 것들, 그런 따사로움. 그것이 <소공녀>의 가장 동화 같은 부분이며, 내가 이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으로 읽기 시작한 부분이다. 미소의 상냥함은 어린 시절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공녀>를 읽으며 느꼈던 주인공 새라의 대책 없는 상냥함과 고상함과도 닮아있다. 아버지에게 은혜 입은 부자 아저씨가 짠하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라는 미소처럼 마냥 맑게 부유하듯 살아가지 않았을까. 미소는 음악을 들으며 논문을 쓰고, 시간이 나면 첼로를 연주하기도 할 친구(김예은)의 집을 청소하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는 대학 졸업사진이 담긴 액자를 덮어놓고 밤에 일하며 스폰서들에게 돈을 받아 살아가는 여자(조수향)의 집을 청소하면서도, 타인의 그 어떤 것도 쉬이 재단하거나 질투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글쓰기 힘들면 차 마실래? 라고 말을 건네거나, 임신한 후 일을 정리하고 네일샵을 차릴 거라며 눈물을 흘리는 아가씨에게 백숙을 해주고 조용히 같이 닭고기를 뜯어먹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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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그럴만한데도, 미소는 좀처럼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당당함일 것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지, 반쯤은 자신이 없다. 나는, 미소가 아니며 미소일 수 없다. 그것은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문영의 욕망, 부모를 만족시키려는 록이의 작은 계획, 타인에 대한 마음을 따라 관계의 끈을 악착같이 붙잡거나 결국 놓쳐버린 다른 이들의 분투와도 비슷하다. 원망하지 않고,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고, 미소처럼 무해하게 살기엔 조금 힘든 세상이다.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나도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너무 애쓰거나 힘겨워하지 않고 그냥 상냥할 수 있는 삶. 앞선 두 가지의 전제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수많은 연습에도 나는 상처를 주기도, 상처를 받기도 했다가, 그런 것쯤이야 아무렴 뒤로 미뤄둘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작은 목표의 성취와 실패를 돌이키는 것보다, 때론 지겨웠던 그 과정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미소가 짐을 꾸리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살펴보게 만들었던 대학 시절의 사진 몇 장과 같은 것들. 나와 당신들이 해사하게 웃고 있는 그런 순간들.

누군가의 가족 장례식에서야, 미소가 남기고 간 사진을 보며 홀로 웃음짓던 밴드 멤버들은 모이게 된다. 연락이 끊긴 미소의 소식을 서로에게 물으며 그들은 미소에게 남은 후회와 애정을 나눈다. 미소는 결국 백발의 모습으로 도시를 배회한다. 가격이 오른 위스키를 마시며. 전화도 끊긴 지 오래. 한강변의 텐트에서 불을 끄는 미소의 실루엣은, 이 영화의 현실성 없는 결말을 비춘다. 그럴 법한 삶을 살고 있는 밴드 사람들의 삶과 그럴 법하지 않은 미소가 병치되는 도시 동화에서, 나 자신과 우리들을 보았다. 

<소공녀> 속의 사람들은, 친구들을 찾아 나섰던 미소조차도 모두 자신의 삶을 혼자 열심히 지탱하게 된다. 각자의 작고도 어쩌면 핵심적인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없이 정상적인 이 사회의 어른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발을 뗀 우리는?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이 당당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이 철없고 염치 없으며 마냥 반가운 것이 될 수 없을지라도. 이 거친 세상에서 자신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켜낸다면 오히려 우리의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 경조사나, 누군가의 별난 선택을 통하지 않아도 기대해볼 법한 그런 우리, 자신이 포기한 이전의 가치들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피하지 않아도 될 서로. 어설프게 청춘의 고달픔을 담는 영화보다 이런 비현실적이고 아기자기한 우주의 <소공녀>가 더 빛나는 이유다. 이 시대에서 희망의 부재와 힘겨움을 걸러 내고도 무언가를 놓치지 않는 주인공과 감독의 시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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