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Letter #1: 여인들의 초상[각주:1]





사이숏






하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를테면 A B처럼. A B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평범한연인이다. (물론 A B 다자간 연애를 지향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A B 차이는 너무나 결정적인 탓에 둘은 자주 어긋나기도 하는데, A 애초에사랑하는 관계라고 하는 것을 번도 의심해 적이 없는 반면 B 그것을 끝없이 심문에 부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성과 그것의 필연적인 변화(변화는 예정된 필연의 다른 이름이므로,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앞에서, A B 각각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상의 흐름과 변주, 사랑의 운동성에 순응적이고, 사건의 다른 ()실현 가능태들에 열려 있으며, 따라서 예측하기 어려운 앞으로의 변화들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있는 쪽은 단연 A이다. A사랑하는 남녀의 영원한 결합이라는 근대의 신화로부터 자유롭다. 삶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A 목적은 오직 다가오는 기쁨을 맞이하는 것이며,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한 세계와의 접속과 무한한 승화 가능성을 꿈꾼다. 그렇다면 B? B 사랑에 대해 훨씬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전망을 내세우길 좋아하지만 기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거대한 형이상학적 충동(혹은 반동)이다. 단지 순간 속에 머무르며 영원처럼 살기를 욕망하는 B A와는 반대로 한없이 역행하고 퇴보하는 쪽에 가깝다. 마치 거울 속의 그것을 바라보는 마술적으로 상응하는 모습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거울 단계의 어린아이처럼, B 사랑(또는, 후술하게 사랑의 이념’) 구조적 폐쇄성과 그것이 구현하는 ()완전함을 믿는다. 말하자면 B, 사랑 앞에서 계몽주의자의 탈을 열성 신자가 된다[1].









 

[1] 레이디 가가의 데뷔 앨범 수록곡 Teeth」의 가사 일부이기도 하다. (출처: anonymousartofrevolution.com)




, ‘사랑이라는 낱말이 지니는 헐거움, 혹은 불충분함에 대해 생각한다.[각주:2] 내가 방금 글자에다 따옴표를 둘러쳐야만 했듯이, ‘사랑 다만 욕망과 친밀성의 어떤 대타적인 양식들을 비끄러매기 위한 수사적 갈고리에 불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사랑 삭제하거나 대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기에, 사랑을 찬미하고 저주했던 수많은 연인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울림이 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남기고 무수한 사랑 이야기의 존재는 사랑을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기 위한, 사랑이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속화되는 것에 저항하고자 했던 처연한 기록의지[각주:3] 증거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A B, 그러니까 당신과 나를 위한 글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당신에게 들려줄 있는 것은 사랑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고작이므로, 나름대로사랑 우회하고자 했던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시도의 흔적은 언제까지 수취인 불명으로 남을 것이다.



이곳은 드레스 룸으로 보이는 공간[2]. 예상 가능한 가지 시나리오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오가는 상황이다. 웨딩 가운을 반쯤 걸친 채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항변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소리친다. 그럼 어디 증명해 ! 전날 밤의 섹스가 주는 여운이 가시고 의혹과 냉소, 질투 따위의 해묵은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할 ,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는 이미 안팎으로 위협에 처한 사랑의 현실을 반영하기에 뼈아프다.




 

[2] “I love you!” “Prove it!” (MISS DIOR - The new Eau de Parfum 영상 중에서)



한편, 질주하고, 밀쳐내고, 환희하는 여자의 매혹적인 움직임을 연출하는 낭만화된 사랑 서사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관객들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 익숙한 여배우의 얼굴이 있다[3]. 그녀가 입을 연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있나요? (이때, ‘연인을 위해 아닌사랑을 위해라는 어구에 주목하길 바란다. 사랑에 빠진 이는 자신의 연인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이 관계항으로서 종속되어 있는 3 대상에 봉사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랑의 이념이다. 주지하다시피 사랑의 이념은 자주 숭고한 , 무조건적인 , 심지어 성스럽기까지 것을 표상하는 대중적 이미지들로 재현되곤 한다. 설령 정체가 이데올로기적이며 허구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랑을 예찬하고 이를 향유할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보다 다층적인 양태(modal) 물음이 함축되어 있는데, 같은 질문을 다음과도 같이 고쳐 물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혹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환언컨대 사랑은 당위성의 영역인 동시에 가능성의 영역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현재성, 러니까지금 여기 영역이다.



 

[3] “And you, what would you do for love?” ([2] 같음)



아이러니하게도 당신과 사랑을 나누게 이후 나를 곧잘 절망감에 빠뜨리곤 하는 사실은 바로 같은 사랑의 교차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에 있다. 존재론적 합일과 조화로서의 사랑의 이념은 일체의 특수적인 것을 초월하도록 상정되지만, 사랑을 위한 어떤 실천도 우연적이고 장소-한정적인 조건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역설. 이를 통해사랑의 본질이란 것을 재건해 있다면, 사랑은 당신과 나로 하여금 운명의 주인이자 영혼의 통솔자로 세상을 군림하게끔 만들어 주는상승의 사다리 아니라[4], 오히려 통제할 없는 상황들의 돌발적 연쇄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 가면서, 모든 도래하는 사건의 폭력(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 앞에 나는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속수무책으로 해제되고 파편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만을 점지해 뿐이다.


 

[4] “’Cause we’re the masters of our own fate / We’re the captains of our own souls / So there’s no need for us to hesitate / We’re all alone, let’s take control / And I was like…” (라나 레이의 Lust for Life 뮤직비디오 중에서)



이렇게 재건된 사랑의 본질을 염두에 , 관객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향한 에로스의 몸짓으로 충만한 이자벨이 어찌하여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쟁취하려 들지 않고행운의 방문했던 것인지[5], 신경증적 불안에 잠식된 가엾은 영혼 지니는 자기 환상에 배반당한 불운의 파토스를 그토록 열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비로소 납득하게 된다[6]. 이자벨과 지니는 앞서 말한예감 가지 상반된 극화 방식을 보여 주는 인물들이다. 이자벨이 미지의 앞일을 점쳐 과거의 인연과 결별하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했다면(‘마음의 준비’, 아마도 이것이 그녀와 나에게 주어진 최선책일 것이다), 지니는 어느 마을(코니 아일랜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남편의 친딸과 자신의 애인이 정분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현실화되자 폭주하는 광기와 뒤틀린 욕망의 성난 불길이 스스로를 집어삼키게끔 내버려둔다. 사랑 앞에 누구보다 무방비한 이들이기에, 이자벨과 지니는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모종의 애틋한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사랑의 실현 또는 부재를 둘러싼 문제는 개별 관계항으로서의 당신과 나의 독립된 의지와 자유 너머에 있으며, 따라서증명해 보일 있는 ’, 실증적인 차원과는 더욱 거리가 것이다.


 

[5] 환멸과 배신의 경험을 반복한 끝에 점쟁이(fortune teller) 남성을 찾아간 이자벨(줄리엣 비노쉬). 우습게도 관객들은 남성 또한 실연의 고배를 마신 전적이 있음을 바로 직전의 신을 통해 알게 된다. (영화 Let the Sunshine in」의 엔딩 시퀀스 중에서)




[6] 애인과 연적을 향한 불타는 질투심은 지니(케이트 윈슬렛) 히스테릭한 추락을 부추기고, 그녀는 끝내 줌의 재로 화하고 만다. 아마도 지니는 내가 아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사랑스럽고 경멸스러운 여인일 것이다[각주:4]. (영화 Wonder Wheel 중에서)



사랑은 많은 경우 무질서하고, 때때로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징후들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결코 발화하지 못하는 폭력의 외상과 닮아 있다. 이것은 사랑이 자기 존재 증명에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따라서 언제나 위협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이는 당신과 나를 대칭적으로 결합시키는 관계 맺음의 안정적인 토대가 사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각주:5] 사실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라, 타인과 맺는 모든 관계들이 실상은 그러하지 않은가?) 이러한토대 없음 조건 아래서, 사랑의 윤리적 형식은 어떻게 마련될 있는가? 또한, 어떤 형태의 근거 지음도 없이 사랑의 지속성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없는 물음들이다. 결국 시공간적 유한자로서의 당신과 내가 만끽할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부표들 간의 마주침에 지나지 않으며, 뿌리 잃은 부표에게는 오직 흔들림[, 혹은 나부낌]만이존재 이유[각주:6] 것이기에.


자기 초월과 존재 일치를 경유하여 당신과 (다시) 하나-되기를 꿈꾸는 나의 은밀한 바람 속에는 다분히 플라톤적 색채를 띠는 회귀주의의 망령이 깃들어 있다[7]. (정작 플라톤은 이것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랑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노스탤지어는, 실제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실체 없는 대상을 그리워하는 행위라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하나에서 둘로의쪼개짐 불가피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분화(또는 분리) 과정, 이행은 자체 완전할 없는 까닭에(아니, 문장은 필히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글에서우리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는가? 니체의 논의를 빌리자면, ‘하나에서 둘로의 쪼개짐 단지 문법적 습관의 구성적 효과에 지나지 않은우리라는 주어에하나’(One)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신기루를 덧입힌다), 거기에는 끊임없는 내적 불화와 온갖 잡음들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거울 단계의 어린아이가 상상계적 환상에서 벗어나 상징계적 질서로 진입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가령 주의 끝에서 당신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 , 나는 하나-되기와 -되기 사이에서 수도 없이 진동하며 이미 셋으로, 넷으로 분열하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내가 결코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이질적인 무엇이 당신과 함께 머무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사람이 다른 이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연인 관계에서조차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경험은 폭력에 가까울 만큼 나를 뒤흔들어 놓곤 한다.

당신으로 인해 삶의 의미와 활력이 모두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고백한 데는, 단언컨대 조금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다.




[7] 플라톤의 『향연』 4 「에로스」에 등장하는 쌍체 인간(hermaphrodite) 신화를 극화하였다. 아주 오래 당신과 나는 본디 몸을 이루고 살았으나, 번개 신의 형벌을 받아 신체적인 분리를 겪게 되고 언제고 다시 합치되기를 갈망하는데, 이것이 바로사랑의 기원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육체적 사랑의 한계를 지적하고 정신적 사랑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영화 Hedwig and the Angry Inch」의 수록곡 The Origin of Love」의 극중 애니메이션 중에서)


이쯤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전환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 보길 바란다[8].


사랑의 급진성은 일상적으로 여겨지는 바와 달리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결정적으로 지워 버리는, 다른 존재에 대한 배타적인 지향성에 있지 않다. 오직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Beyond Good and Evil, 1886)에서 보여 주었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하면서 행하는 것이므로 야만적 행위의 일부이다. 그러나 니체가 아포리즘에 추가하고 있는 ,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점은 종종 잊혀진다. 혁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혁명이 우리의 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인도주의적인 이상으로 선언될 있더라도, 사실상 다른 모든 이들을 희생함으로써 (굴라그 등으로) 실행될 수도 있다. 진정으로 급진적인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알랭 바디우의 말대로 사랑은최소의 코뮤니즘형태이다. 사랑은 사람을 위한 코뮤니즘이다. 그러나 사랑은 코뮤니즘만큼 도달하기 힘들고, 종종 코뮤니즘처럼 비극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혁명처럼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다.

물론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중략) 사랑과 혁명 사이의 영속적인 불화 (후략) 교착 상태는 어느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둘의 결합으로만 해결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각주:7]


[8] 위와 같은 호르바트의 진술은 사랑에 관한 생텍쥐페리의 유명한 잠언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출처: gaytwogether.com)


둘의 결합 갖는배타적인 지향성 극복하고, 내가 당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당신은 나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을 추구하는 에로스의 경험, 소위사랑의 재발명 요청하는 담론과 이론이 산개해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도 결국 말과 말을 대결시키고 속에서 내가 철저하게 부서지기를 의도하는 지난한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끝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나는 번이고사랑 다시 쓰고 고쳐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서로의 골을 맞대던 ,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아니면, 나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았던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오염된 언어가 당신의 입에서 황망히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서 나는 환멸과 동시에 우스꽝스러움을 느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각주:8]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을 때쯤에는 천천히 베갯잇을 적시기 시작했다.


다음은 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인용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그에 대한 단상이다[9]. 영화는 사랑의 지속 ()가능함의 조건이 당신과 나에게 강제할 있는 여러 위기들과 관련해 가지 가능한 대응 방식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들의 역할로 남는다.


 


[9] 엘마(비키 크리엡스) 거칠고, 고집이 세며, 예의나 교양이 부족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속한상류 사회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Phantom Thread 중에서)



너무나도 상이한 경험 또는 지각 방식,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거듭된 충돌 속에서 마침내 관계 자체가 내파할 위기가 그들을 찾아왔을 , 사랑을 보전하기 위해 엘마가 취한 선택은 일견 폭력적인 , 심지어 귀기 어린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레이놀즈가 침상에서 그녀의 간병을 받을 별안간 나타난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영(phantom) 떠올려 보라.) 아마도 다수 관객들은 엘마가 사랑을 쟁취하는 방식에 순전한 동의나 지지를 보내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저녁 식탁에서의 격앙된 대화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내심 그녀가 일말의 가차나 미련도 없이 레이놀즈로부터 떠나가 주길 바랐었다. 그러나 그가 사귀어 과거의 숱한 애인들과 독보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였던 그녀는, 그러한 패배주의적인 기대와 예상을 단번에 좌절시켜 버린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의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엘마는 레이놀즈에게 먹일 독버섯 요리를 준비하는데, 이때 그녀는 그가 느끼한 음식을 질색하는 알면서도 천연히 그것을 버터에 볶는 과정을 보여 준다. 엘마는 레이놀즈가 오로지 자신의 안에서 쓰러져 주기를, 그리고 바로 자신으로 말미암아 강인함을 되찾게 되기를 원한다. 사실 지금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취약성을 독점하고 그에게 치유의 권능을 행사하려는 욕망에 대한 엘마의 고백이 그렇게 섬뜩하거나 엽기적으로 들리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판단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1. 이 글은 영화 「Let the Sunshine in」, 「Wonder Wheel」, 「Phantom Thread」의 결말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본문으로]
  2. A와 B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범죄나 계약과 같이 사랑을 성립시키는 보편적 조건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면, A와 B는 무엇에 의지해서 자신들의 사랑을 선언할까? 적어도 A가 B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B가 A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A의 ‘사랑한다’와 B의 ‘사랑한다’는 서로 동일한 의미론적 값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단어의 용법과 용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사랑’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통일되어야 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A의 ‘사랑한다’와 B의 ‘사랑한다’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랑하는’의 결격 사유가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위 결론에 따를 경우 A와 B는 서로 간에 결코 소통될 수 없는 문장과 몸짓, 즉 단절과 균열의 징후들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를 이해한다고 열심히 착각하고, 또 착각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와 존재의 심연은 사랑의 증명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숱한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3. “시가 여전히 아름다움에의 기록의지라고 믿는다”던 김선우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였다. [본문으로]
  4. 만약 다음에도 지면이 허락된다면, 나는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나무를 위해 기꺼이 숲을 희생하는,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죽으라고 하면 보란 듯 몸을 내던지는 전혀 ‘미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쓸 것이며, 이 예술 장르의 이름은 가장 에고-트립한 비극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5. 사랑은 언제부터 정상 연애 및 결혼의 역사와 교섭하게 되었는가? [본문으로]
  6. 심보선, 「나의 댄싱 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본문으로]
  7.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pp. 123-124, p. 133. 호르바트의 저작이 ‘두 사람을 위한 코뮤니즘’ 형태로서의 사랑 개념을 제안한 바디우의 『사랑예찬』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정치(여기서는 ‘혁명’)가 사랑과 맺는 ‘영속적인 불화’ 관계에 대해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본문으로]
  8. ‘너’를 ‘사랑한다’는 ‘나’의 말하기는 ‘나’가 사랑한다고 믿는 이, 즉 ‘너’와 그 외 낯선 타인들에 대하여 ‘나’의 사랑(혹은 믿음)을 재확인시키고자 하는 자기 선언적 행위이며, 미래에 대해 어떤 효력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의미 없고 무력한 언약에 다름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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