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K-POP을 소비하는 지극히 잔인한 방식에 대하여

가수 · 아이돌 · 아티스트


왕수박




 쟤네는 가수라는 애들이 노래를 왜 이렇게 못해?’ 음원과 음반을 발표하고 무대에 서는 모든 이들에게 가수라는 잣대가 들이밀어지는 것에는 얼핏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가수라고 일컫는가? 한국인들이 가수라는 직업에 부여하는 의미는 사실 조금 특별하다. 가수의 사전적 정의는 노래 부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나, 한국인들의 노래와 업에 대한 잣대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이 동네 노래방에 그득그득 들어차있는 한국에서 노래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특별한 일인 것이다. 나도, 내 친구도, 내가 아는 누구도 할 만큼 하는 노래로 그 돈을 번다는데, 타고난 음역대와 성량이 무조건 기본이 되어야 하며, 외모와 잘 빠진 커리어는 그저 옵션일 뿐. 발성과 고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가 엄격한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기준은 히트 작곡가들을 보유한 음반사들을 중심으로 발라드, 포크 등 가창력을 뽐낼만한 장르를 입혀 훌륭한 가창인들을 스타로 만들던 과거 한국 대중음악계와 쿵짝이 딱 맞아 떨어졌다.



제주도에서의 일상을 공개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금 끌어모은 이효리, 예쁜 소녀의 전형들을 모아 단번에 폭발적인 인기를 끈 트와이스, 대국민 오디션으로 데뷔한 윙크남박지훈, 칼군무 퍼포먼스와 10대를 대변하는 가사로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수상한 방탄소년단. 해외에서 K-POP 아티스트로 소개되고 있을 이들은 모두 자국에서 가수라는 카테고리로 평가받는다.




 물론 화려한 고음과 음색을 유감없이 뽐내는 가수들은 언제나 환호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지만, 한국 음반시장이 막 틀을 갖춰나가기 시작할 무렵 인기를 끌었던 유형과 장르는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 사실 그 뿐이다. 가수는 가창력이 좋아야 한다는 인식의 뿌리가 이렇게나 단단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고음 위주의 가창력이 너무나도 당연한 가수의 필요조건으로 굳어지면서 기이한 모순이 하나 탄생했다. 무대 위 가수의 활동 영역과 장르가 너무나 다양함에도, 춤이나 외모 등 음악활동의 다른 조건들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스탠딩 상태로 뛰어난 가창력을 보여주는 이들이 가수 카테고리에서 언제나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가수의 뜻이 노래하는 사람이니 노래로 평가하는 것이 왜 문제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무대 위에 선 모든 이들을 가수라고 통칭하지 않는가. 초기에는 좁은 의미의 어휘가 확장된 실제를 포괄하지 못하는 현상이었을 수도 있겠다.

 

 물론 한국인들이 고음을 뽐내는 발라드만 주구장창 들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과거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도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가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대중적으로 엄청난 사랑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가창력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저 춤으로 성적 매력을 뽐내는 대상, 춤추며 립싱크하는 뻐끔이 정도로 평가받은 한국의 댄스 가수들은 댄서도 퍼포먼서도 아니었으며, 가수도 아니었다. 일부는 춤과 노래를 동시에 소화할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진정한 의미의 가수 지위는 얻지 못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을 가수라고밖에 부르지 않으면서, 미디어와 대중들은 가수와 고음 가창 사이의 이상하리만큼 과한 유착을 만들어 낸 뒤 가수 개념 자체를 편협하고 비좁은 일종의 고급 자격으로 왜곡시켰다. 또한 가창력의 상품화는 점점 신격화하는 동시에 퍼포먼스와 댄스 어필은 기이하리만큼 상품이라며 비난했다. 비좁은 한국 음악 시장에서 음악은 곧 보컬이라는 편협한 초기의 인식과 시장구조가 모든 음원, 음반을 발표하는 뮤지션, 연예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의 틀은 너무나도 견고해진 나머지 지금까지도 음원, 음반을 발표하는 모든 대상에게 적용되고 있다. 퍼포먼스 중심의 아티스트는 댄스 가수, 10대들에게 인기를 끄는 비주얼 중심의 밴드는 아이돌 가수로 인식된다. 래퍼도 가수고 락 밴드의 드럼 멤버도 무대에 서니까 가수란다. 결국 노래를 잘해야만 가수이고 뮤지션이 될 수 있으며 음악 활동의 필요조건은 곧 고음 가창이 되어버렸다.



가창과 춤이 모두 A인 가수보다 가창이 A+인 가수가 진정한 가수가 된다.






 이 틈에서 어차피 아이돌도 가수라면 노래도 춤도 외모도 잘 해보자라는 식의 하이엔드 K-POP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LP 음악을 사랑하는, ‘나는 가수다를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세대들에게 저게 가수냐며 비난받던 아이돌들은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고, 해외에서 미친듯이 팔려나갔다. 화려한 외모, 칼군무로 대표되는 퍼포먼스, 팝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세련된 편곡과 캐치한 멜로디를 모두 라이브로 소화하는 K-POP 밴드들이 해외에서 줄줄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세계적인 팝스타가 됐을 것이라는 팬들의 공허한 절규는 점차 현실이 됐다.


 그러나 정작 국내 대중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하기 짝이 없다. 그래봤자 해외에서의 K-POP의 성공은 허위이고 국뽕이 낳은 환상이며, 아이돌 문화는 여전히 대중문화 안에서도 외모나 성을 파는 가짜 가수들의 오타쿠 하위문화이다. 심지어는 싸이의 성과도 국뽕이란다. 대중들은 미국 팝계를 추종하지만 정작 현지에서 성공한 그는 여전히 벼락 맞은 B급 댄스 가수이다. 유명해졌기에 대우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처럼 대중들은 K-POP에 대한 객관화를 미룬 채 여전히 진정한 가수가 아닌 이들에 대한 사랑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한다. 물론 해외에서 일부가 인정받는다는 이유로, 상업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이들의 영역에 꼭 긍정적 평가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개별 아티스트, 음반의 객관적인 완성도 또한 별개의 문제이다. 추가적으로 90년대 청소년들의 저항 문화가 아이돌에 대한 열광으로 이식되면서 광적인 팬덤 문화가 탄생했고, 이것이 K-POP 시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여전히 한 몫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돌을 연예인 혹은 퍼포먼서나 엔터테이너로 소비하면서 동시에 보컬 중심의 가수 개념으로 인식하고 비난하는 것은 분명한 아이러니이다. 왜 우리는 무대에 서있는 모두를 여전히 가수로 남겨두며 그들과 그들을 남몰래 소비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가?

 



 이 지점에서 가수에 대한 기존 정의의 한계를 반성하기라도 하듯, 동시에 아티스트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내면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고전적인 예술가 개념이 대중음악계로 아주 간편하고 경제적으로 이식되었다. 기존의 가수 개념이 기계적인 가창력을 강조했다면, 아티스트는 표현위주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기존의 가수와 가창력에 대한 관념이 트렌드에 맞게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 뮤지션들의 표현은 뛰어나고 섬세한 가창력을 통해, 스스로의 음악적 능력인 작곡 작사 역량을 통해 발휘된다. 자연스레 아티스트 개념은 가창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작곡 작사를 하거나 음원 성적이 뛰어난 가수, 춤을 추긴 하지만 나름의 퍼포먼스 능력을 인정받는 가수들을 변호하는 동시에 K-POP 아이돌이 절대 넘어오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국내에는 ‘artist’라는 영어 어휘가 주는 왠지 모를 무게가 함께 수입된 것이다. 결국 아티스트의 칭호는 대형 기획사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인형처럼 조종해대는 아이돌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되었다. 이에 반항하듯 K-POP의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으나 아티스트 개념의 확장은 계획이라도 한 듯이 양쪽의 접점에서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가창력 중심의 기성 가수들은 거대 자본과 상업성에서 자유로운가? 그들은 과연 스스로 모든 것을 프로듀싱하고 표현하는가? 그들은 정말 미디어가 만들어내지 않은 진정한(?) 예술가들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절대 ‘No’이다. 기성 가수들 역시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음반사들의 철저한 기획에 의해 성공했다. 그들은 연습생 시스템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티스트의 환상을 부여받기도 했다. 물론 이후에도 개인적 창작물이 거듭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소수의 가수들은 칭송받기 마련이지만, 아이돌의 유사한 노력은 폄하되거나 비웃음을 사는 데 그친다. 사실 기성 가수들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작곡 작사, 프로듀싱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특권에 불과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애초에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이들의 표현에 대한 기회는 상업적 성공 여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상업적으로 실패하는 앨범을 계속해서 발매해줄 수 있는 레이블이 과연 존재할까. 아마도 그건 기획사가 없는 인디 뮤지션들의 특권일 것이다. 결국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발생한 아티스트형 뮤지션의 개념은 아이돌과 기성가수를 똑같은 칼로 겨눈다. 일부 평론가들은 특정 상업 가수들을 보호하고 대중문화 내에서의 고급 취향을 계속해서 구별짓기 위해 예술성, 음악성 등 실체 없고 그럴 듯한 개념으로 새로운 포장지를 내놓았을 뿐이다. 이는 애초에 순수예술도 아닌 대중문화를 소비하면서 고급 취향을 가졌다고 믿고 싶은 대중들의 유사한 심리를 정확히 겨냥했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대중음악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자신의 작업물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진정한 아티스트의 모습은 과거 팝 씬을 왜곡하여 수입한 환상이며, 국내에서 굳이 찾자면 자본과 온전히 분리된 인디 씬에나 적합한 개념일 것이다.



 

 이렇게 아티스트 개념은 기존의 가수와 가창력이라는 굴레에 발목을 잡힌 채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재창조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만들어진 컨텐츠의 상업성을 표현하는 것이 포인트라면, 그 어떤 영역에서보다 헐렁해야 할 개념이 대중음악에서의 아티스트가 아닌가. 미국 팝 시장의 경우가 그러하다. 내한 공연이 열리면 우리가 눈에 불을 켜고 티켓팅하는 팝스타들은 한국으로 치면 아이돌에 가깝다. 한 줄의 멜로디에 탑 라이너 수 십 명이 달라붙고, 편곡과 엔지니어링의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들을 아티스트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이러한 창작 과정에의 참여 여부가 아니다. 물론 과정에 깊게 관여하는 모습을 마케팅에 활용하면 그의 상업적 가치가 더욱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아티스트가 모든 것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 그 뿐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투입된 만큼의 거대하고 멋진 자본의 결과물을 끌고 갈 수 있는가. 그것이 발라드인지 댄스인지, 고음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라이브를 하지 않지만 잘 만들어진 무대와 춤으로, 누군가는 독특한 음색 하나로 아티스트라는 헐렁한 지위를 인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K-POP 아이돌들은 빌보드를 비롯한 각종 팝 매체에서 거창한 뜻 없이 아티스트로 일컬어진다. 아이돌이 음악적 역량에서 완전히 분리된 일본은 반대의 경우이다. 과거 일본에서도 아티스트형 아이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점차 아이돌의 존재가 엔터테이너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음악과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이제 일본의 대중들은 아이돌에게 어떠한 가창력이나 음악적 역량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돌의 음악은 사무소의 매상을 올려주는 하나의 굿즈일 뿐이며 대중성 있는 팝 음악으로서 기능할 의무가 없다. 오히려 애초에 없는 음악적 역량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은 극적인 셀링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엔터테인 요소들만을 당당히 내세우며 각종 미디어는 그들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소비할 뿐이다. 한국 대중들에게는 놀랍게도, 소녀시대는 일본에서 의심 없이 아티스트 혹은 가수의 취급을 받았다. 그들의 라이브와 안무 소화능력은 일본에서 아이돌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한, 아티스트의 무언가로 비춰졌다.




AKB48의 음반은 언제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지만 정작음원 차트 최상위권에서 빈번하게 광탈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에서 K-POP을 소비하는 방식은 좋게 말해 다층적이고, 실상은 매우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가수 혹은 아티스트의 역량을 갖춰야하며, 잘 만들어진 대중음악을 상업적으로 성공시켜 팝스타의 지위를 가져야 하는 동시에 연예인이자 엔터테이너로서 자신의 외모를 끊임없이 상품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이 모든 것을 해내더라도, 아이돌 혹은 댄스가수라는 이미 강등된 지위에 머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잔인함은 K-POP 컨텐츠의 질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기에, 누군가는 이것이 한국 아이돌 문화만의 특징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혹은 그들의 실제 역량과는 별개로 광적인 팬 문화나 외모가 상품화되는 방식 등 그들이 소비되는 방식 자체에 거부감이 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모순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는 아이돌 혹은 퍼포먼스 중심의 가수들을 한국에서 사용하는 아티스트 개념에 편입시켜달라거나 일본처럼 아이돌은 그저 아이돌로 봐달라는 구구절절한 요구가 아니다. 요컨대,

 



 ◎ 뮤지션으로서의 자질이 중요하다면, 왜 음악적 역량이 충분한 일부 K-POP 아티스트들은 이유 없이 평가절하 당하는 동시에 여러 외적인 잣대들로 평가받아야 하는가? 아이돌의 수동성이 문제라면 기성 가수들은 과연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운가? 동시에 아이돌은 음악적 영역에서 정말 온전히 수동적인가?



 ◎ 여기에 가창력이라는 기준을 또 다시 들이대고 싶다면, 음악적 역량과 표현은 그저 보컬에 한정된 것이냐는 물음에 답할 필요가 있다. 트와이스에게 어차피 노래 못하잖아라고 하는 것과 김범수에게 어차피 춤 못추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가? 물론 둘 다 엉뚱한 소리임에도 전자는 지나치게 합리화된다.



 ◎ 그럼에도 여전히 각자의 영역을 인정할 수 없으며 김범수의 가창이 훨씬 더 고급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돌의 외모와 퍼포먼스가 상품화되는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저급인가? 음색, 고음, 댄스, 예능감, 몸매, 얼굴 등의 갖가지 요소들은 자본 앞에서 모두 상품이자 구태한 소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우리는 연예인이 미디어의 상품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상품성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존엄한 인간이 상품화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아도르노를 읽으며 대중문화 전체를 겨누어 보라.



 ◎ 그럼에도 당신이 멜론차트를 듣는 와중에 순수한 음악의 영역으로 취급되는 진정한 가수들이 존재한다고 느낀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인디뮤지션들의 인기 요인은 과연 음악이 인디 성향을 띠기 때문일까? 레이블의 자본력이 인디펜던트 수준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음악이 거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는 않은가?



 ◎ 어떻게 보더라도 결국 음악적 역량이 부족한 것이 맞다면, 연예인 혹은 엔터테이너로서 충실하게 기능하고 있는 이들이 굳이 가수 혹은 (기이한 방식으로 신격화된) 아티스트 개념에 비추어 비난받아야 하는가? 왜 소위 일본식의 아이돌들까지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가수혹은 아티스트개념에 도달해야만 하는가?

 





  

덧붙임


 

 국가대표 아이돌을 뽑는다는 프로그램 프로듀스101’은 얼핏 일본 아이돌의 생존방식을 표방하며 K-POP의 지형을 새롭게 변형시켜준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요소들이 K-POP에 대한 대중들의 엄격한 시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제작진은 댄스, 보컬, 외모, 매력, 리더쉽, 예능, 인성, 프로듀싱 능력, 안무창작 능력을 누가 더 하나라도 많이 갖추었는가의 싸움을 붙이고 이를 지켜보는 모든 시청자들은 매우 엄정한 평가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결국 이러한 시선은 참가자들의 숨통을 옥죄었을 뿐만 아니라, 표를 손에 쥔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대단한 K-POP 가수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참가자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그 자격들은 자본의 논리와 상품성과는 전혀 별개라는 듯, 그저 아이들의 아름다운 꿈을 응원한다며 미친듯이 투표한다.

 동시에 굴레 밖 대중들은 쟤넨 어차피 가수도 아티스트도 아니라며, 일본 오타쿠 문화를 표방한 포맷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동시에 투표 참가자들까지 함께 손가락질한다. 와중에 고귀한 가수의 기준에 도달한 참가자들을 간신히 인정해보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을 너무나도 불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본인의 그 엄격하디 엄격한 잣대들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모른 채 대중들은 끊임없이 보고, 욕하고, 반복한다. 어쩌면 앞선 가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경계 논쟁은 이미 구닥다리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여전히 떠안은 채 K-POP 문화는 잔인한 채찍질 속에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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