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짝사랑의 기록
-쉴레에 대하여-
예청그릴스
2014년 7월 20일. 비엔나의 뜨거운 햇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스물한 살의 나는 길거리의 아무 카페로나 들어간다. 구글 맵을 다시 보니 아직도 20분 정도를 더 걸어가야 한다. 결코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작열하는 태양 덕분에 한낮의 길바닥은 타오르는 듯이 뜨겁고 한달 여간 질질 끌고 다녀 얇아질대로 얇아진 버켄스탁은 길바닥의 열을 발바닥으로 여과 없이 전달한다.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절실하다. 한 모금만 마시면 이 갈증과 더위를 조금이라도 더 참아볼 수 있을텐데.
그늘진 실내에 자리잡고 열심히 메뉴판을 뒤적여보지만 이곳은 스타벅스가 아니다. 손님보다 주문을 받는 종업원이 더 도도한 이곳은 비엔나. 이렇게 더운 날씨인데 아이스 커피는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따뜻한 에스프레소 위에 아이스크림과 생크림이 올라간 선데. 그저 시원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이토록 힘들다니. 아이스크림은 먹는 둥 마는 둥 나름의 아이스(크림) 커피를 후르륵 몇 입에 삼키고 다시 일어난다.
오늘 제체시온은 가야지. 현금이 딱 입장료만큼 남았으니 내일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곳만 들리면 나는 이번 유럽여행은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마음먹고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금 나의 체력을 시험한다. 뙤약볕을 그렇게 다시 이십여 분 가량 걸어서 도착한 제체시온.
비엔나 제체시온의 모습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주머니에 남은 현금 몇 유로로는 입장료를 구입할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입장료는 금액이 맞는데 이곳을 방문한 목적인 클림트의 벽화를 보기 위해선 돈이 더 필요했다. 한 달여 간의 여행 동안 흥청망청 돈을 써버릴 대로 다 써버린 나는 돌아가기 일주일 전쯤부터 씀씀이가 엄청나게 소심해진 상태.
갑자기 만 오천원 남짓한 금액 앞에서 소심해진다. 갑작스런 더위에 아침 댓 바람부터 벨베데레까지 갔다 온 터라 온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이 상태로라면 전시장에 들어가도 제대로 관람할 힘도 없을거야’ 주문처럼 되내이며 들어왔던 입구 그대로 나온다.
이것이 나의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두고두고, 지금까지로 딱 3년동안 후회하는 순간이다. 그래 봤자 스물 넷이지만 그 중에도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을 뽑아본다면 Top 5에는 속하지 않을까 싶다.
음악, 무용, 오페라 등에는 딱히 집착스런 부분이 없는 내가 비엔나를 유럽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도 빠뜨리지 않고 방문한 데에는 딱 두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바로 에곤 쉴레와 구스타브 클림트. 그런 그들의 작품을 마지막 날, 그 유명한 제체시온의 입구까지 들어갔다가 그대로 돌아나온 경험은 나에게 거의 트라우마에 가깝다.
이들에 대한 애정을 좀 더 분해해보자면,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희한하게도 쉴레를 먼저 좋아하게 되면서 클림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중학교 삼학년 때인가, 예술의 전당인지 세종 문화회관인지 어딘가에서 나름 큰 규모의 클림트 전시가 있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당시에도 클림트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키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구나 하고 끝.
그런데 한참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에 빠져있던 사춘기의 나에게 쉴레의 그림은 한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드로잉을 처음 봤을 때, 심마니가 “심봤다!” 를 외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이거다 싶었다.
Dune Fall, Ryan Mcginley
다들 사춘기 때 한 번쯤 그렇지 않나.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오롯이 나만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맨다. 중이병 컨텐츠라 해야하나. 그것들이 마치 나의 특별함을 증명해 주듯이. 부모님도, 또래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예민한 감성들을 이해하는 (것 같은) 예술가를 맞닥뜨리는 순간에는 그것들을 두 팔 벌려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 시절의 나는 노골적이고 날 것에 가까운 것들에 꽂혀있었다. 사지가 꺾여 보이는 신체와 이상하게 구부정한 자세들. 피 멍이 든 것 같기도, 곰팡이가 핀 것 같기도 한 창백한 피사체의 피부의 유혹적인 자태의 여자들. 다 벗고 있지만 야하기보다는 위태롭고 처절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뿌리치기 힘든 매력을 느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단 생각에 진절머리치던 격동의 시기여서일까,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리를 벽에 처박고 울고 나서야 속이 시원해지던 시기여서일까. 쉴레의 그림은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혼자만은 아니라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는 나처럼 미치지 못해 속이 요동치는 사람이 한 명은 더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유난히 더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고흐처럼 누구나 다 아는 화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클림트에 비해 덜 유명한 쉴레는 희귀템을 혼자 득템한 느낌을 주면서 쓸데없는 으쓱한 기분을 주기도 했다.
Self Portrait with Physalis, Egon Schiele, 1912
그 시절 내 책상에는 ‘수능이 끝날 때까지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을 다짐한 책꽂이 한 칸이 있었는데, 그 칸에는 이를테면 <On the Road>,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상실의 시대> <키친> <무진기행>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와 같은 당시 ‘나의 감성’이라 정의하던 책들이 한 뭉치 정갈하게 꽂혀있었다. (절반은 읽고 절반은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을 나의 감성이라 우기곤 했다.) 쉴레의 그림이 실린 책 한 권도 그 사이에 꽂혔음은 당연하다.
사춘기 이후 쉴레가 다시 인생에 등장했던 건 뜬금없는 대학교 입학 면접 때였다. 수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으로 계시던 두 교수님 중 한 분이 돌발 질문으로 좋아하는 화가를 물어보셨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쉴레가 떠올랐다. 1 그 분은 동양미학을 전공하신 분이어서 이름을 듣고 나서는 정작 내 대답에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질문들은 거의 다 까먹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그 질문과 나의 대답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혹시 합격하게 되면 쉴레에게 고마워해야지 했고, 훗날 유럽 여행을 떠날 때에는 그렇게 면접에서까지 우려먹은 작가의 작품의 실물을 한번은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2학년 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다. 2
오스트리아에서는 레오폴드 뮤지엄, 벨베데레 궁전, 알베르티나 미술관등을 전전했다. 거의 쉴레와 클림트 패키지였달까. 미술관은 대부분 혼자 돌아다녔는데, 쉴레와 클림트의 작품들을 며칠 내내 연속해서 보다 보니 공통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손가락과 가슴이었다.
Nude Self Portrait, Egon Schiele, 1910
손가락
쉴레의 손가락은 유난히 아파 보인다. 손의 마디는 불긋불긋하여 벽에 주먹질을 몇 번 한 느낌이다. 울퉁불퉁 못난 손가락에 살도 거의 붙어있지 않다.
동시에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한다. 남녀가 뒤엉켜 누워있는 그림 속에서는 성적인 욕망이 손가락의 끝 마디까지 뻗쳐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화상에서는 바짝 말라 볼품 없어 보이는 육체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그의 강한 자의식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쉴레의 손가락은 그가 그림에 표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하는 도구로 느껴진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칭찬할 때 우리는 그들이 숨 쉬는 것, 손가락, 발가락 하나 하나까지 섬세하게 연기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나는 그것을 쉴레의 모델에게서 본다.
Lovemaking, Egon Schiele, 1915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의 손가락은 얼굴의 표정보다도 더 정확히 그녀의 욕망을 연기하고 있다. 손가락이 빠져버린다면 이 장면이 지닌 힘의 절반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오스트리아에는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가 함께 전시된 경우가 많았다. 3 비슷한 시기, 비슷한 장소에서 활동한 이들이다 보니 비슷한 레퍼토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굶고만 살았나 싶게 유난히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의 여인들, 뒤엉켜 있는 연인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은 서로 닮아있는 부분도 많았다.
반복적으로 보다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4 누군가 나에게 너가 그렇게 좋아하는 쉴레와 클림트를 구분해보라고 퀴즈를 낸다면 나는 어떻게 이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한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그로테스크함의 차이 외에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다른 구분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특히 채색되지 않은 드로잉 만을 가지고 누군가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맞출 수 있을까? 어떻게?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의 특권은 바로 이들의 드로잉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완성작 외에도 작은 규모의 드로잉 습작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작가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로잉을 좋아하는 터라, 이들이 아무렇게나 휘갈겼는데 엄청나게 잘 그려버린 (?) 연필이나 콩테 드로잉 들을 열심히 봤다.
똑같은 여성의 누드여도 클림트와 쉴레의 선은 많이 달랐다. 쉴레의 드로잉에서는 그의 채색화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손가락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심지어 여성의 뒷모습을 담아낸 스케치 속에서도 손가락은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게 쉴레 것일 수밖에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반대로 클림트에서는 가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Two Studies of a Seated Nude with Long Hair, Gustav Klimt, 1901
확실히 그의 선은 훨씬 부드러웠다. 둥그스름한 선들이 그리는 곡선, 그것들로 표현되는 여성의 신체는 쉴레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신기할 정도로 그의 여성 누드 모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여신처럼 느껴졌다. 한 여자에게 사랑에 빠져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을 때 남성의 눈으로 여자의 몸을 묘사한다면 그런 선이 나올까.
특히 클림트 팬이라면 공감할지 모르겠는데, 클림트의 여자들은 어깨가 무척 아름답다. 이상적인 직각 어깨와 군살 없이 늘씬한 팔의 실루엣이 너무 아름답다. 특히 겨드랑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평가적 차원에서 ‘예술이다’ 할 만하다.
나는 클림트가 여자의 옆모습을 그린 드로잉에서 다시금 ‘심봤다’를 외쳤다. 클림트에서는 가슴인 것 같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풍만한 가슴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못해 부담스럽다. 하지만 클림트의 드로잉에서 여성의 젖가슴은 과장이 없다. 약간 처져 빈약해 보이기도 하는 이 아담한 가슴들은 남성들이 원하는 가슴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Study from 'The Beethoven Frieze', Gustav Klimt
그리고 이렇게 솔직하고 그래서 더 여성스러운 가슴을 묘사할 정도면 왠지, 정말, 진짜로 많은 여성의 누드를 봤을 것 같았다. 5 그리고 이런 상상은 소설 <클림트> 속에서 묘사된 클림트의 여성편력적인 이미지와도 맞아 떨어졌다. 그때부터 그냥 클림트에서는 가슴을 놓치지 않고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다. 좋아하는 것들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 여행지에서, 미술관에서, 쉴레와 클림트를 마주친 일은 좋은 것들만 똘똘 뭉쳐진 행복 그 자체였다.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아!’ 하고 남겼던 메모에 적힌 ‘쉴레의 손가락과 클림트의 젖가슴’ 이라는 네 단어를 바탕으로 이렇게 또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기록해본다.
- 정확히 말하면 쉴레밖에 안 떠올랐다. [본문으로]
- 고백하자면 당시에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성덩어리였던 나는 쉴레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내가 그를 좋아하던 온갖 이유를 떠올리게 되었고, 감정이 차올라 울먹이며 대답했다가 거의 울면서 면접장을 걸어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정서가 많이 불안정했구나 너 (?) [본문으로]
- 코코슈카는 이름이 매우 귀여움에도 이미 내 마음엔 다른 두 남자가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터라 엄청난 임팩트는 주지 못했다. [본문으로]
- 혼자 전시를 감상할 때면 딴 생각과 상상을 무지 많이 한다. 그게 특히 좋은 점! [본문으로]
- 솔직하다는 건 본인이 평소 목욕탕에서 보던 그런 가슴에 가까웠다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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