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보컬로이드 음악의 방향을 묻다.

- wowaka ≪world0123456789≫ 음반 리뷰 -

마노

 

#0. 읽기 전에

* 보컬로이드가 일본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이다 보니 이 글에서는 일본어가 빈번하게 사 용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한문 또는 가나 문자로 표기된 일본어는 한 번 ‘한글(원어)’의 형 식으로 표기한 후, 한글로만 표기하겠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로마자를 사용해서 표기하는 고유명사의 경우, 창작자가 한문 또는 가나 문자로 표기하지 않는 의도를 존중하여 있는 그 대로 표기하겠습니다. 특히 로마자 표기의 경우 고유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첫 글자를 소문자 로 표기하는 사례가 몇몇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의도를 존중하여 그대로 표기하겠습니 다.

* 이 글에서 음반명은 ≪≫안에, 곡명은 <>안에, 음악이 아닌 영화와 TV 시리즈 등의 작 품명은 안에 표기하겠습니다.

#1. 보컬로이드

‘보컬로이드’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2차원에 관심이 아예 없으시다면 관련된 지식이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청록색 양갈래머리의 하츠네 미쿠(初音ミク)라 는 캐릭터는 어디선가 한 번 정도 보신 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7년 8월 31일에 공개된 후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옛날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인기 있 는 이 캐릭터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보컬로이드는 야마하에서 개발하여 2003년에 처음 발표한 음성 합성 프로그램입니다. 인 간의 음성을 합성하는 기술은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보컬로이드는 일상 언어가 아닌 노래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초기의 보컬로이드는 보컬리스트를 구하기 어려운 환경의 아마추어 작곡가를 위한 툴 정도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05년 마 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의 정규음반 ≪Light + Shade≫에 인간 보컬 대신 보컬로이 드가 사용되는 등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어색한 기계 합성음 때문에 보컬로이드가 실제로 사용된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2. 흥망성쇠

그러다가 2007년 크립톤 사의 하츠네 미쿠를 기점으로 ‘이미지 캐릭터’가 본격적으로 도 입되면서, 보컬로이드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일종의 악기이자 작곡 도구 였던 보컬로이드가 캐릭터 상품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2007년 9월 초에 <Ievan Polka> 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위 ‘파돌리기송’이 일본의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 동화(ニコニコ 動画)에 업로드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하츠네 미쿠를 필두로 한 보컬로이드는 엄청난 인기 를 누리게 됩니다. 2007년부터 활동한 작곡가들인 ryo1)나 cosmo@폭주(暴走)P 등의 초기 보컬로이드 음악들도 분명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보컬로이드의 황 금기는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진(자연의 적P)(じん(自然の敵P))이 아지랑이 프로젝트 (カゲロウプロジェクト)의 첫 번째 곡 <인조 에네미(人造エネミ-)>를 투고한 2011년 초 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보컬로이드는 소위 오와콘2) 위기론이 제기될 정도로 점점 내리막길을 겪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마추어 작곡가를 위한 음성 합성 프로그램이었던 보컬로이드가 인기 를 끌게 되면서 점차 진입장벽이 높아졌고, 이와 더불어 상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점차 ‘캐릭 터 상품’화 된 것이 위기의 단초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앞서 언급한 아지 랑이 프로젝트의 애니메이션 메카쿠시티 액터즈(メカクシティアクターズ)(2014)가 작품 성과 상업성 양쪽에서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확실히 보컬로이드 기 술은 점점 발전하고 있습니다만, 이를 바탕으로 한 보컬로이드 문화는 오히려 쇠퇴하고 있 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보컬로이드 문화사 자체(흥망성쇠?)에 관해서 하고 싶은

1) 이후 supercell이라는 팀을 만들어서 활동하게 됩니다.
2) 일본에서 끝장난 콘텐츠(終わったコンテンツ)를 의미하는 인터넷 줄임말입니다.

이야기도 정말 많습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글을 써보도록 하고, 서론은 이쯤에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3)

#3. wowaka

2010년 2월 7일 발표된 wowaka의 두 번째 인디 음반 ≪world0123456789≫는 제가 정 말로 좋아하는 음반입니다. 안타깝게도 판매처인 토라노아라에서 품절되어 현재 신품으로는 구할 길이 없고, 제가 아는 한 국내에서 음원 서비스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튜브에 음반 제목을 검색하면 전곡을 들을 수 있는 영상이 하나 나오기는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큰 노력 없이 이 음반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차고 넘치는 음반들 가운데 ≪world0123456789≫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정말 좋은 음악들이 수록된 음 반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모로 저평가는커녕 평가받을 기회조차 별로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상업적으로 잘 팔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적인 관점에서 보기 엔 전통적으로 권위 있는 장르들에 밀리는 음악을 누군가는 선입견 없이 들어줬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3) 사족입니다만, 보컬로이드 음악은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작품들부터 음원 동영상이 인터 넷에 공유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음악 스타일이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완벽하게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사족의 사족으로 저는 ‘보컬로이 드 음악’은 여러 장르의 음악이 보컬로이드라는 악기를 공통분모로 하여 묶여있을 뿐 하나의 장르로 간주해서 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보컬로이드 작곡가 시절(2009년에서 2011년 사이)의 wowaka를 정말로 좋아합니 다. 그때가 보컬로이드의 초창기를 막 넘어 황금기에 접어드는 시대이기도 했고, 다른 뛰어 난 작곡가와 명곡들도 많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특히 wowaka를 좋아하는 이유는 개성이 상 당히 분명한 작곡가인데다가 보컬로이드를 인간 보컬리스트의 하위 호환 대체재 느낌이 아 닌 독자적인 가치를 가진 악기의 느낌으로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 BPM 정도의 몰아치는 듯한 속도감, 일반적인 인간의 안정 음 역대를 벗어난 고음이 보통 wowaka 보컬로이드 음악의 특성으로 정의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다는 아니라고 봅니다. 분명 보컬로이드도 안정 음역대와 BPM이 제시되어있는 음성 합성 프로그램이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여러모로 버거워지기 때문에 이런저런 재가공이 필 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오토튠으로 떡칠을 한 상업적 음악하고 이게 뭐가 다른가?' 하는 딜 레마에 부딪힙니다. 보컬로이드 음악의 퀄리티는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오히려 인기는 감소 하는 원인 중 하나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감정이 없는, 확실히 인간이 아닌 것이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 는 것이 wowaka 보컬로이드 음악 전반에 깔려있는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위에 서 말한 속도감과 고음도 포함되겠네요. '혼자서 이렇게 완벽한 음악을 만들 수 있구나' 하 는 생각에 보컬로이드 음악에 뛰어들었다는 wowaka의 이야기를,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이 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디스코그래피

보컬로이드 애호가들에게 wowaka의 대표곡을 뽑으라고 하면, 아마도 <롤링걸(ロ-リン ガ-ル)>, <겉과 속의 러버즈(裏表ラバ-ズ)>, <월즈 엔드 댄스홀(ワ-ルズエンド・ダンス ホ-ル> 정도가 거론될 것 같습니다. wowaka의 두 번째 인디 음반인 ≪world0123456789 ≫의 치명적인 한계라면 소위 ‘대표곡’이 한 곡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니코니코 동화에 공개적으로 업로드된 음악은 두 곡밖에 없습니다. 이 음반이 희귀반 아닌 희귀반이 되어버린 데는 이런 이유가 한몫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world0123456789≫를 wowaka의 음반 중에 가장 좋아합니다. wowaka가 록 밴드 히토리에(ヒトリエ)로 프로 데뷔한 후의 음반들까지 모조리 합치더라도 이 음반을 가장 좋아합니다.

wowaka의 첫 번째 인디 음반인 ≪the monochrome disc≫(2009)는 wowaka가 초기에 니코니코 동화에 업로드했던 음악들을 단순히 모아놓았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음질이 최악입 니다. 분명 음악을 음질로 듣는 건 아닙니다만, 인디 음악인 걸 감안해도 ≪the monochrome disc≫는 심각합니다. 의도적으로 로우파이 음악 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21세기에 발표 된 음원의 음질에 대한 제 개인적인 마지노선인

supercell의 인디 시절 첫 번째 셀프 타이틀 음반(2008)과 넬 인디 1집 ≪Reflection of≫ (2001) 보다 심각한 수준입니다. 지금은 잘 나가는 아티스트의 초창기 덜 다듬어진 음악을 들으면서 ‘그래, 나도 음악 할 수 있어!’라는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저는 어느 정도 즐기면 서 듣는 음반입니다만, 강력하게 추천하기는 어려운 음반입니다.

 

 

세 번째 인디 음반인 ≪Seven Girls' Discord
≫(2010)는, wowaka의 대표곡이라고 할 만한
<롤링걸>과 <월즈 엔드 댄스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니코니코 동화에 업로드된 적
은 없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곡인 <천칭, 시계,
전화(天秤・時計・電話)>라는 곡도 있습니다.
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장르인 일렉트릭 기타를
중심으로 한 연주곡인 <도쿄 조크(東京ジョ-
ク)>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곡의
다른 표현으로 봐도 무방한 느낌의 두 곡, <의식의 가격(意識の値段)>으로 열어서 <비밀 의 가격(秘密の値段)>으로 닫는 수미상관 구조도 멋집니다. 하지만 제가 ≪Seven Girls' Discord≫를 ≪world0123456789≫의 뒤로 미루는 이유는, 트랙 개수를 음반 타이틀로 가 져온 것부터 해서 수미상관 구조와 연주곡이 삽입된 것까지, 전부 ≪world0123456789≫에 서 먼저 시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Seven Girls' Discord≫의 성취한 것들의 영광은 거 의 ≪world0123456789≫에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까지 wowaka의 유일한 보컬로이드 정규 음반인 ≪Unhappy Refrain≫(2011)은, 분명 컴 필레이션이 아닌데도 컴필레이션이란 느낌입니 다. 분명 음질이 인디 음반에 비교하자면 엄청나 게 개선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비인간적인 것 특 유의 날카로운 느낌을 잃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으로 히토리에 데뷔 후 나오는 곡들은 그런 면 에서 조금 아쉽습니다.) 특히나 마이 블러디 발 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의 라이브를 연상

시키는 Disc1의 8번째 트랙인 <라인 아트(ラインアート)>는 큰 볼륨으로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곡은 ≪the monochrome disc≫에 수록된 초기버전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 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박살 내버릴 듯한 느낌의 슈게이징 음악을 필수 교육과정에 넣어서 라도 전 세계인이 꼭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보 통은 이쪽부터 들어보라고 권할 만한 ≪Unhappy Refrain≫이 뒤로 밀리는 이유는, ‘음반’으 로서의 구성은 ≪world0123456789≫에 비해 재미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첫 곡이 타이틀인 신곡이고, 앞의 두 인디 음반에서의 재미였던 연주곡도 수미상관 구조도 없어졌습니다. 그 러다 보니 분명 컴필레이션 음반이 아닌데도, ‘지금까지 잘 팔렸던 곡들’을 기계적으로 모아 서 나열해놓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wowaka의 보컬로이드 음악을 곡 단위로 들을 거라면 분 명 ≪Unhappy Refrain≫을 권하겠습니다만, 음반을 듣는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 world0123456789≫입니다.

#5. 트랙가이드

 

≪world0123456789≫에는 총 10개 트랙이 수록되어 있고, 그걸 음반 타이틀이 0~9까지 의 숫자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뒷면에는 0~8까지의 트랙이 표기되어 있고, 5분간의 묵음 후 하나의 파일로 묶인 히든 트랙 2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추천하는 트랙은 ★을 붙이겠습니다만,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0. 흰 탑(白塔)

음반을 여는 2분 11초 분량의 오프닝입니다. 피아노 반주의 느긋한 록 발라드라는 점에 서 <손바닥>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번호도 0번이고, 뭔가 미완성인 느낌입니다만, 이 트랙 이 재미있는 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

1. 지반 침하(地盤沈下) ★

하츠네 미쿠가 아닌 메구포이드(통칭 GUMI)가 사용된 트랙입니다. 앞의 <흰 탑>에서는 따뜻한 느낌으로 들리던 이디오폰으로 불안한 느낌을 주는 F#-G-E-B의 멜로디를 연주 하며 페이드인 되다가, 이어서 잔뜩 뭉개진 퍼즈 기타 소리가 작렬합니다. 이 사이키델릭한 기타 소리는 곡 전체를 지배합니다. 여기에 신시사이저로 어지러운 기타 소리와는 아무 상 관없는 듯이 기계적으로 연주된다는 인상을 주는 D-C-A-C-D, F#-E-C, D-C-A-C-D, A 테마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디오폰과 피아노 반주가 곡을 보조합니다. 여 기에 GUMI의 절규하는 듯한 보컬이 끼어듭니다. 템포와 사용된 악기들을 놓고 봤을 때는 <흰 탑>과 연속되는 트랙입니다만, 분위기가 180도 반전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더 큐어 (The Cure)의 <Want>라는 곡을 연상하게 되는 트랙입니다. 특히 반쯤 인사불성인 상태에 서 연주한 것 같은 기타 소리에 절규하는 듯한 보컬을 아주 좋아합니다.

2. 집짓기 놀이의 인형(積み木の人形)

이 음반의 두 곡뿐인(Retake 버전인 <손바닥(テノヒラ)>을 제외하면 유일한) 니코니코 동화에 업로드된 트랙입니다. 전반적으로 wowaka 특유의 빠른 템포에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로 연주되는 트랙인데, 앞의 두 곡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오히려 전작 ≪the monochrome disc≫에 더 어울릴 것 같은 느낌입니다.

3. 흔들흔들(ゆらりふらり)

<집짓기 놀이의 인형>이 끝나고, ≪world0123456789≫는 실험적 재즈 즉흥 연주를 연 상시키는 불안한 느낌을 주는 피아노 소리로 문을 열며 다시 피아노와 금속성 이디오폰의 발라드 트랙으로 돌아옵니다. 곡의 느낌은 <흰 탑>이나 <손바닥>과 비교해도 더 깔끔하 고 읊조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4. 소녀에 대하여(少女について) ★

다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트랙입니다. 그럼에도 이 곡은 <집짓기 놀이의 인형>과는 다 르게 음반에 유기적으로 어우러집니다. <흔들흔들>에서의 선명한 피아노 소리에 대비해 아 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로 시작되는 이 곡은 이내 신시사이저를 포함한 풀 세션 의 록 트랙으로 변모합니다. <지반 침하>와 비교하면 더 깔끔하고 일반적인 일본 펑크 (Funk)/얼터너티브 록 느낌입니다. 상대적으로 평범할 수 있는 곡이지만, 저는 이 곡을 정

말로 좋아합니다. 후렴에서 ‘笑って(웃어줘)’를 반복하며 절규하는 보컬은 <지반침하>를 연 상시키고, 깔끔한 세션 느낌의 펑키한 기타 소리와 지저분한 느낌으로 연주되는 록 기타 소 리가 곡 전반에 혼재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산탄총과 텔레캐스터'4)의 소리입니다. 개인 적으로 ≪world0123456789≫에서 단 한 트랙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소녀에 대하여>를 뽑고 싶습니다. 초기 wowaka의 곡에서 사용되던 신시사이저와 시간이 지나면서 도입된 기 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에는 <롤 링걸>과 같이 잘 알려진 곡에도 밀리지 않을 만한 트랙입니다.

5. 손바닥 -retake-(テノヒラ -retake-)

<손바닥>은 니코니코 동화에도 투고되었고, 음반에 수록된 것만 무려 3가지 버전이 존 재하는 곡입니다. ≪the monochrome disc≫의 3번째 트랙으로 수록되었고, ≪ world0123456789≫에는 retake 버전으로 다시 수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컴필레이션 음반 같은 ≪Unhappy Refrain≫에도 6번째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흰 탑>에서 설명했 듯, 피아노 반주의 느긋한 발라드곡입니다. 무슨 아쉬움이 남아서 3번이나 같은 곡을 다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보컬로이드 작곡가 시절 wowaka의 스타일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에 유념하면서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발라드라서 그런지 보컬로이드 팬들 사 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이라는 사실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6. 미주 불꽃놀이(迷走花火)

정해지지 않은 길로 달리는 불꽃놀이가 뭘까요? 속도감이 느껴지는 록 트랙입니다. 곡의 50초부터 1분 17초까지의 신시사이저 솔로가 인상적입니다. 2분 18초의 짧은 러닝 타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는 곡입니다만, <집짓기 놀이의 인형>과는 다른 의미로 이 음 반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Seven Girls' Discord≫의 <천칭, 시계, 전화> 나 <리버시블 돌(リバシブルドール)>과 함께 있어야 더 빛을 발할 트랙인 것 같습니다.

7. 세계의 전부(せかいのすべて)

다시 느긋한 발라드입니다. 앞에서 발라드라고 설명한 모든 트랙과 유사하게 피아노와 신 시사이저의 반주에 느긋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곡입니다.

8. 쫓아가다(追いかける)

도입부에서 익숙한 이디오폰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흰 탑>에서 들었던 그 소리입니다. <흰 탑>과 <쫓아가다>는 러닝 타임도 2분 11초로 같고, 곡의 형식과 '追いかける(쫓아가 다)'를 반복하는 가사, 미쿠를 포함한 사용된 악기 등, 모든 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같은 곡 의 서로 다른 표현 같은 느낌입니다. <흰 탑>을 ‘쫓아간다’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아직 미완성이라 1이 아닌 0이었던 곡이 <쫓아가다>를 통해 완성된다는 인상도 줍니다. 한 곡 을 쪼개서 음반의 시작과 끝에 배치하는 게 그렇게까지 새로운 시도는 아닙니다만, 곡 단위 로 음악이 소비되는 21세기에 이런 식으로 완성된 느낌을 주는 음반은 보기 드물다고 생각 합니다.

4) ≪Unhappy Refrain≫에 수록된 동명의 타이틀곡의 첫 번째 구절입니다.

9-10. omake ★

<쫓아가다>가 끝난 후, 정확히 5분간의 묵음이 계속된 후에 또렷한 느낌을 주는 피아노 반주가 나오고, 클린 톤의 기타가 뒤를 따릅니다. 곧이어 드럼, 베이스, 신시사이저가 소리 의 탑을 쌓았다가 해체했다를 반복합니다. 발라드가 많이 수록된 ≪world0123456789≫에 선 드물게 활기찬 느낌을 주면서도 피아노와 기타의 절묘한 솔로를 들을 수 있는 연주곡입 니다. 이 피아노와 클린 기타의 곡은 7분 35초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묵음이 흐르다가 7분 58초에 갑작스럽게 <지반 침하>를 연상시키는 잔뜩 왜곡된 기타 소리가 튀 어나옵니다. 사람이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포함한 반주가 곡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지만, 기타 소리가 곡을 압도해버리는 느낌입니다. <지반 침하>에 사용하기 위해 녹음되었지만 너무 마구잡이로 연주되어서 버려진 파일 중 하나를 재활용한 것 같다는 인상도 줍니다. 개 인적으로 이런 사이키델릭한 느낌의 기타 연주곡을 아주 좋아하는데,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 는 비인기 장르라서 아쉽습니다. 말 그대로 선물 같은 느낌으로 ‘끼워주는’5) 히든 트랙이지 만, 일반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상반된 느낌의 두 연주곡은 일부러라도 꼭 들어볼 가치가 있 습니다. 어쨌거나 제목이 암시하는 ‘10개의 트랙’은 omake를 2곡으로 간주했을 때도 성립 하고, 0에서 시작해 9로 끝나는 숫자는 <흰 탑>이 <쫓아가다>로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설명이 됩니다.

#6. 정리

5) omake는 값을 깎음, 덤, 경품이라는 뜻의 일본어 お負け와 발음이 같습니다.

≪world0123456789≫는 상당히 재미있는 음반입니다. 아직 덜 다듬어진 전자음 위주의 ≪the monochrome disc≫와 이후 히토리에로 데뷔한 후의 음악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은 ≪Seven Girls' Discord≫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음반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보 다 ‘보컬로이드 작곡가로서 wowaka의 완성’이라고 감히 정의하고 싶습니다.

≪world0123456789≫의 수록곡 대다수가 웬만한 보컬로이드 팬이라고 해도 익숙하지 않 은 니코니코 동화에 업로드되지 않은 곡들이고, wowaka하면 연상되는 빠른 템포의 록이 아 닌 발라드 트랙이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렇다고 발라드 음반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이 키델릭하고 거친 느낌을 주는 <지반 침하>와 wowaka의 숨겨진 명곡 <소녀에 대하여> 같 은 곡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적으로는 전자음 일변도였던 전작에서 발전해 피 아노와 기타가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world0123456789≫가 발표된 지 정확히 1주 일 뒤인 2010년 2월 14일에 업로드된 <롤링걸>은, 개인적으로 이 음반에서의 피아노와 기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가 응축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던 곡이라 고 생각합니다.

#7. 뒷이야기

≪world0123456789≫ 이후 wowaka의 음악은 점점 기타 위주의 록 음악으로 색채가 변 해갑니다. <월즈 엔드 댄스홀>을 포함한 ≪Seven Girls' Discord≫는 전반적으로 트윈 기 타를 앞세운 전형적인 일본 록이라는 느낌입니다.6) 저는 이러한 사실이 전곡을 기계적으로 모아 재가공하여 만들어진 음반 ≪Unhappy Refrain≫ 때문에 간과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wowaka 음악의 발전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보컬로이드 인디 음반 3장을 순서 대로 들은 다름 히토리에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wowaka가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 음반 ≪Re:Start≫(2017)의
타이틀 트랙 <언노운 마더 구스(ア
ンノウン・マザ-グ-ス)>를 발표
하면서 Deco*27와 함께 했던 인터
뷰에서 그때 당시 ‘(보컬로이드 음
악으로 성공하려면) wowaka처럼
음악 만들면 되겠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던 상황이 더
이상 보컬로이드 음악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7) ≪ world0123456789≫를 듣다 보면 이 음반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보고자 했던 일종의 실험을 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wowaka 하면 당장 생각나지는 않는 슬로 템 포의 발라드 트랙들과 히든 트랙 <omake>를 들으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이후 트윈 기타 를 앞세운 록 밴드 히토리에로 데뷔하면서 보컬로이드 작곡가 시절에 보여주던 특유의 비인 간적이고 날카로운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쉽습니

6) 피아노가 상대적으로 강조된 <롤링걸>은 예외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이 곡은 ≪world0123456789≫와 더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7) 인터뷰 원문은 https://natalie.mu/music/pp/wowaka_deco27

다. 개인적인 취향이기는 합니다만, <소녀에 대하여>에서 보여준 악기들의 절묘한 조합을 이후로도 선보였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8. 위기, 그리고 방향

wowaka는 2012년 이후로는 록 밴드 히토리에 활동에 집중하고 있고, 하츠네 미쿠 10주 년 기념 음반의 수록곡 <언노운 마더 구스>를 발표한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보컬로이드 음악을 작곡하지 않고 있습니다. wowaka 이외의 많은 작곡가에게도 보컬로이드는 음악의 최종 지향점이라기보다는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도약하기 위한 일종의 발사대에 가까웠던 것 으로 보입니다. 보컬로이드의 최초 목적이 보컬리스트를 구하기 어려운 아마추어 작곡가를 위한 음성 합성 프로그램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런 현상은 아쉽기는 해도 어느 정도는 당연 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보컬로이드가 음성 합성 프로그램 중에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된 요인 인 ‘이미지 캐릭터’의 도입이, 오히려 지금 와서는 보컬로이드 음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노래가 인간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만, 기술의 발달로 이러한 생각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보컬로이드는 그 런 관점에서 봤을 때 분명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기’가 아 닌 ‘캐릭터 상품’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는 보컬로이드 작곡가에게 작사, 작곡 뿐만이 아닌 이미지와 영상까지 요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입장벽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졌 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마추어의 진입이 힘들어지고 어느 정도의 자본이 투입되는 상업적 접 근을 부채질하게 되었습니다만, 이는 결코 건강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마추 어 작곡가들의 거칠지만 날카로운 인상을 주던 음악들을 접할 수 있었던 보컬로이드 음악계 는 시간이 지날수록 질적으로는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은 떠나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wowaka의 보컬로이드 작곡가 시절 음악들은 ‘확실히 인간이 아닌 것이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을 숨기려고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wowaka가 업로드한 영상들도 보컬로이드 음악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캐 릭터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흑백의 추상적인 정지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에 그치고 음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상도 거의 업로드하지 않고 완성 된 음반을 만드는데 집중한 ≪world0123456789≫는 ‘위기에 처한 보컬로이드 음악이 어디 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 릭터를 바탕으로 하여 일러스트,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의 수많은 파생 문화현상들을 낳 을 수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보컬로이드는, 그럼에도 근본적으로는 음악을 만들기 위한 ‘음성 합성 프로그램’입니다. 보컬로이드가 처해있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이 지점으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9-10. 덤

* wowaka가 보컬 겸 리듬 기타를 맡고 있는 록 밴드 히토리에의 공식 유튜브 계정(ヒトリ エ / wowaka)에서 wowaka가 니코니코 동화에 투고했던 11곡 및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 으로 작곡한 <언노운 마더 구스>를 들을 수 있습니다. 따로 재생목록이 만들어져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서 wowaka의 보컬로이드 작곡가 시절 음악들을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들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 2차원은 아무래도 취향이 아니라거나 하는 여러 가지 장벽이 더 있겠지만, (특히나 초기 의) 보컬로이드 음악을 들을 때는 기계적으로 합성된 음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 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취향에 안 맞는다고 바로 음악을 끄기보다는 지금 들리는 멜로 디라인이 보컬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악기라고 생각하면서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들어보기를 권해드립니다. 당신에게 신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wowaka의 음반 의외에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음반은 보컬로이드를 록 음악에 도입하려는 최초의 시도 정도에 해당하는 supercell의 ≪supercell≫, 확실히 인간 아닌 것이 노래하고 있다는 측면 에서 wowaka와 더불어 언급할 만한 작곡가인 cosMo@폭주P의 ≪하츠네 미쿠의 소실(初音 ミクの消失)≫(2010), ≪별의 소녀와 환주낙토(星ノ少女ト幻奏楽土)≫(2012) 정도가 있습 니다. 보컬로이드 기술이 어느 정도 발전한 후 황금기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진(자연의 적 P)의 ≪MEKAKUCITYRECORDS≫(2013)를 권해드립니다. 심지어 이 음반은 국내 정발되 어 있습니다. 최근 보컬로이드 음악이 처한 상황을 알고 싶다면 요네즈 켄시(米津玄師)라는 이름으로 프로 데뷔한 하치(ハチ)가 하츠네 미쿠 10주년 기념으로 발표한 곡 <모래의 행성 (砂の惑星)> 영상을 찾아서 가사와 더불어 감상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개인적으로 블로그에 작성했던 리뷰를 바탕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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