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소녀의 판타지 – 케이팝 마법소녀의 연대기

우주소녀의 판타지 – 케이팝 마법소녀의 연대기

양장피

최근 케이팝에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특수한 영역을 구성해 차별성을 갖추고자 하는 그룹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때 영역이라 함은 곡, 무대, 비주얼, 뮤직비디오를 통해 구성되는 ‘컨셉’, ‘세계관’, 또는 ‘이미지’를 말한다. 그 그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혹은 그 그룹이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관의 존재는 코어 팬들은 모으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 그룹의 개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아이돌 시장이 커질수록 컨셉은 세분화된다. 섹시, 큐티, 청순의 세가지 카테고리 내에서 걸그룹이 정의되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다. 

우주소녀는 그 중에서도 판타지라는 장르를 독점하고자 쉬지 않고 달려왔다. 우주소녀의 이미지는 그 이름에서도 확연하게 다가온다. 보라색 우주의 은하수를 건너서 세 개의 달이 뜨는 행성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마법소녀들. 이 정도의 묘사로 우주소녀의 대략적인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우주소녀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해 우주소녀만의 판타지가 성립되고 발전된 과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필자와 같은 취향을 가진 이라면 부디, 우주소녀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기를 바라면서.

• 미니 1집 <WOULD YOU LIKE?> 

데뷔 앨범인 미니 1집 <WOULD YOU LIKE?>의 인트로 <Space Cowgirl>의 몽환적인 신디사이저는 우주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혜성을 연상시키며, 우주소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컨셉의 방향이 확고함을 알린다. 타이틀 <MoMoMo>의 뮤직비디오에는 이후 우주소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은하계 스케일의 CG가 등장하지도 않고, 곡도 여느 걸그룹 데뷔곡과 큰 차별성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소속사 스타쉽 엔터테인먼트는 데뷔 앨범을 발매하며 앞으로 우주소녀는 12궁 별자리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우주적 상징을 적극 활용하여 우주소녀만의 판타지를 펼쳐낼 것이며, 듣고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웰메이드 걸스팝’을 제시할 것이라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스타쉽은 후속작에서 그 약속을 확실하게 지켰다.

• 미니 2집 <THE SECRET>

미니 2집의 타이틀 <비밀이야>의 뮤직비디오는 마법진을 연상시키는 배경 위에 쓰여진 ‘네 안의 코스모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그 의미를 가늠해볼 시간도 주지 않고 오르골 테마와 함께 행성에 운석이 떨어진다. 붉고 거대한 달이 뜬 보라색 하늘에 수많은 별똥별이 떨어지고 그 아래 광대한 초원에서 소녀들이 등장한다. 멤버별 컨셉을 보여주는 개인 샷에는 엘프 귀, 늑대, 날개와 같은 판타지적 요소들, 우주를 달리는 자동차와 우주인 헬멧을 쓴 채 추락하는 소녀, 스카우터 등의 SF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뮤직비디오 전반에서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마법진에는 12궁 별자리를 상징하는 기호들이 들어있다. 넘쳐나는 상징들은 그 사이의 연관성을 추리하고자 하는, 소위 말하는 ‘뮤직비디오 해석’을 놓고 열띤 토론을 하고만 싶은 오타쿠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요소들 중 상당수가 다양한 서브컬쳐 장르의 오마주라는 사실도 오타쿠 몰이(?)에 한 몫을 한다. 상당한 퀄리티의 CG로 구성된 우주적 스케일의 배경과 스토리의 완성도는 미니 1집에서 예고되었던 우주소녀의 방향성을 확실하게, 아니 비장하게 보여준다. <비밀이야>는 우주소녀 타이틀곡의 음악적 색깔을 결정지은 곡이기도 하다. <비밀이야> 이후 우주소녀는 작곡가 그룹 e.one과 Full8loom에게 꾸준히 타이틀곡을 받아왔고, 이들을 통해 정교한 구성과 스트링의 활약, 세련된 신스사운드라는 우주소녀 타이틀곡의 특색이 정립되었다.

• 미니 3집 <From. 우주소녀>

<From. 우주소녀>의 타이틀 <너에게 닿기를>은 <비밀이야>의 후속편이라 말해도 무방해 보인다. <너에게 닿기를>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여전히 미지의 행성을 연상시키는 무지갯빛 하늘과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등장한다. <비밀이야>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밝고 순수한 분위기이다. <비밀이야>의 우주소녀가 은하계를 구하는 사명을 띤 비장한 마법소녀였다면 <너에게 닿기를>의 우주소녀는 판타지스러운 공간에 떨어진 평범한 소녀들이다. 멤버들은 파스텔 톤의 캐주얼 룩과 교복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폴더 핸드폰을 통해 서로와 소통하며 신비롭고 아름다운 공간들을 누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여 그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고, 관람자와 자신들의 세계를 분리하지만 그 곳에 닿고자 하는 욕구를 계속해서 자극하는 것. <비밀이야>와 <너에게 닿기를>을 통해 우주소녀는 팬들을 끌어당기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확정한 듯 했다. 정규 1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정규 1집 <HAPPY MOMENT>

2017년 우주소녀는 드디어 첫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전작들의 독창성에 매료된 팬들(필자를 포함한)은 정규 앨범이 시도할 수 있는 스케일의 확장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규 1집 <HAPPY MOMENT>의 성격은 세 장의 미니앨범을 거쳐 우주소녀가 구성한 세계를 완전히 벗어났다. 타이틀곡 <HAPPY>는 전형적인 데뷔 초 걸그룹의 이미지인 치어리더를 메인 컨셉으로 해 캐주얼하고 한없이 밝은 스쿨 걸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주소녀 뮤직비디오의 트레이드 마크인 판타지적 CG도 찾을 수 없었다. 팬들은 <HAPPY>가 아닌 2번 트랙 <기적 같은 아이>가 이 앨범에서 가장 우주소녀 다운 곡이라고 생각하며, <기적 같은 아이>가 타이틀이었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적 같은 아이>는 <비밀이야>를 작곡한 e. one의 작품이었다. 정규 1집의 반응이 미니 앨범들보다 확연히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한 스타쉽은 미니 4집에서 우주소녀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찾았다. 

• 미니 4집 <Dream your Dream>

 

 

<Dream your Dream>부터 우주소녀는 타이틀과 수록곡 전체가 하나의 테마 아래 완결성을 갖추고 이어지는 미니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감을 잡았다. 이 한 마디로 이후 우주소녀의 행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Dream your Dream>의 앨범 커버에서 다시 등장한 마법진은 프로듀서들의 확신을 보여준다. <Dream your Dream>의 컨셉은 마법학교로, 전작보다 더 구체적인 설정과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 <Dream your Dream>은 마법학교 1학년이자 꿈의 배달부인 포레우스 유닛, 꿈을 수집하는 마법학교 2학년 아귀르떼스 유닛, 꿈을 현실로 완성시키는 마법학교 3학년 에뉩니온 유닛으로 멤버들을 나누어 스토리를 진행한다. 뮤직비디오와 수록곡에서 그 구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처럼 극도로 디테일한 설정을 넣은 앨범을 만들었다는 것은 스타쉽이 <HAPPY MOMENT>의 방향 전환을 그만큼 후회하며, 그렇기에 이를 갈고 우주소녀의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각오로 보인다. 

 타이틀곡 <꿈꾸는 마음으로>의 뮤직비디오는 판타지 학원물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킨다. 쨍한 대비와 채도에 푸른빛이 감도는 화면에서 평범한 학생들처럼 거닐던 우주소녀는 서로의 존재를 발견하고 계시를 받은 듯 달려간다. 곧 거대한 악이 다가올 것처럼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소녀들은 옥상에서 결의에 찬 눈빛으로 춤춘다 ‘난 안되면 되게 해.’ ‘우린 어떻게든 꼭 만나 찾아낼게 달려갈게 난 강해져 너 땜에’와 같이 모호하지만 단호하고, 어딘가 아련한 메시지는 세계의 멸망을 막아내겠다는 마법소녀의 결의와 같다. ‘돌고 돌아갈수록 애틋해질수록 좋아’라는 마지막 가사는 마법소녀가 가진 연약함 속의 강인함과 사랑에 대한 믿음에 눈물 흘리는 오타쿠의 심금을 울린다. 이처럼 우주소녀가 음악과 컨셉 뿐만 아니라 가사에서도 특유의 판타지스러움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 <Dream your Dream>이다. <비밀이야>와 <너에게 닿기를>에서 확립된 음악적 특성을 활용하면서, 전작과 달리 비유 위주의 모호한 가사에 성별 지칭 단어를 없애면서 우주소녀의 판타지가 완성되었다. 수록곡 중에서는 <르네상스> 가 스트링 테마의 화려한 사용과 독특한 소재, 파워풀한 연정의 보컬이 어우러져 타이틀과 함께 앨범의 축을 잡는다. 

• 미니 5집 <WJ PLEASE?>

<Dream your Dream>의 완성도는 놀랍게도 <WJ PLEASE?>에서 더욱 성장했다. 수록곡 전체의 퀄리티가 전작들과 비교할 수 없게 발전했다. 뿐만 아니라 감당하기에 과해 보였던 마법학교 컨셉까지도 제대로 소화해냈다. 타이틀 <부탁해>의 뮤직비디오는 뛰어난 그래픽으로 마법학교라는 배경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Dream your Dream>에서 나눈 유닛 별로 뮤직비디오에서 씬을 나눠 연출했으며, 실물 앨범도 세 유닛에 맞춰 세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었다. <부탁해>의 몽환적인 신스 사운드는 풍성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수록곡들과 절묘하게 이어진다. <너, 너, 너>와 <아이야>, <가면무도회>로 이어지는 트랙은 자기복제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사운드를 포용하며 분위기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부탁해>는 전작들과 비교해 매우 마이너한 사운드를 펼친다. <부탁해>의 사운드와 곡 진행은 안무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더욱 힘을 얻는다. 이는 뮤직비디오의 연출에서도 강조된다. 벌스에서 댄스 파트는 파란 하늘 아래 신비로운 마법학교 건물에서 교복을 입고 수행되지만, 분위기가 고조되는 후렴구에선 어두운 실내로 배경이 전환되고 고스로리를 연상시키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안무가 진행된다. 가장 폭발적인 사운드가 사용되는 마지막 후렴구에서는 수많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의 야외를 배경으로, 일렬 대형을 유지하며 멤버들이 고고하게 걸어오는 안무를 선보인다. 또한 벌스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멤버들 간의 스킨십을 활용한 안무는 사운드의 강약과 몽환적인 보컬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 미니 5집 <WJ STAY?>

 

 

 

<WJ PLEASE?>의 성공은 <WJ STAY?>로 이어졌다. 타이틀 <La La LOVE>는 역대 우주소녀의 타이틀 중 가장 드라마틱한 진행과 풍성한 사운드를 선보인다. <부탁해>의 마이너한 감성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랩 파트를 늘려 이전과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La La LOVE>와 전작들의 가장 큰 차이점을 컨셉의 성숙함이라 할 수 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교복 의상이 완전히 사라졌고, 어두운 색조 위주의 화려한 드레스 의상이나 깃털과 레이스가 달린 올 화이트 의상을 사용하여 <부탁해> 보다도 더욱 고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뮤직비디오의 컨셉은 미스터리한 카니발로, 화려하게 빛나는 오브제들과 다양한 색조의 서커스 공간이 더욱 다듬어진 사운드와 어우러진다. 전작에서 마법학교라는 컨셉을 차용해 성장의 레파토리를 보여주었으니 <WJ STAY?>에서는 성숙이라는 테마를 보여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WJ PLEASE?>의 우주소녀가 상대가 먼저 말해주기를 부탁하는 소녀와 성인의 경계에 놓여있었다면, <WJ STAY?>의 우주소녀는 누군가에게 옆에 머물러주길 바라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밝힐 수 있는 어른이 된 것이다. 

• 스페셜 1집 <For the Summer>

  2019년 발매된 <For the Summer>은 우주소녀의 앨범 중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음악방송 연속 1위에 성공했다. 스페셜 앨범이라는 분류와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For the Summer>는 시즌송으로 구성된 앨범이다. 그렇기에 판타지라는 우주소녀의 정체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지만, 우주소녀를 만드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 ‘웰메이드 걸스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주소녀의 특색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타이틀 <Boogie up>의 풍성한 레트로 사운드와 청자를 이끄는 확실한 강약 조절은 이전 우주소녀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요소들이다. <For the Summer>에서 판타지적 요소의 부재는 우주소녀의 방향성을 바꾼 것이라기 보단, 스페셜 앨범이기에 가능한 또 하나의 시도 또는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Boogie up>의 성공은 우주소녀가 충분히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무리 없이 높은 퀄리티의 사운드를 소화해낼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증명한 것이다. 

‘우주소녀스러움’을 확고하게 구축한 상황에서 이러한 전환은 도리어 반갑다. 케이팝에서 세계관의 구축이 초기 코어 팬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을 유지하는 것을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 세계관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은 결국 아이돌의 생사를 결정하는 대중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소녀의 판타지가 적절한 선의 ‘컨셉’으로 성공한 것은 그들의 세계관이 그들의 활동 전체를 정의하는 스케일과 정교함, 연속성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였다. 우주소녀는 ‘판타지’라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장르를 활용할 뿐, 완전히 독자적인 그들의 세계관을 연속적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Dream your Dream>과 <WJ PLEASE?>에서 사용된 마법소녀 세계관은 코어 팬들을 만족시켰지만 대중이 우주소녀의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즐기기 위해 그 컨셉을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WJ STAY?>에서 마법학교 설정은 졸업이란 이름 하에 폐기되었다. 우주소녀는 또 다른 판타지를 모색했다. 우주소녀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설정과 상징을 달달 외울 필요는 없다. 현실에서 벗어난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보면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하다. 우주소녀의 세계는 모두에게 열려있다.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마시고, 한 번 이 마법소녀들의 노래를 들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