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에는 꿈틀거리는 검은 큐브가 있다 _ 신촌 극장에서 올려진 세 개의 공연을 보고
밤톨뿡
1.
변화하는 검은색 네모큐브. 신촌 극장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기찻길 옆에 있는 작고 검은 공간은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차고에서 티켓을 받고, 옥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부터 연극은 시작된 것 같다. 꽤 많은 계단을 오르다보면 입에서는 훅 훅 소리가 나고 다리는 저려온다. 그리고, 옥탑에 도착하면 눈앞에는 조명과 함께 검은 공간이 펼쳐진다. 관객석의 위치도 항상 변화한다. 원하는 자리 아무 곳에나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 공간에 완벽하게 나를 스며들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조명이 꺼지면 아주 천천히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배우는 잔상처럼 서 있다가 조명이 다시 켜지면 첫 대사를 던진다.
2. <액트리스 원>
<액트리스 원>은 2029년에 등장한 연기하는 로봇 ‘액트리스 원’에 대한 이야기다. 스토리보다는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대부분의 연극은 상상력의 공간인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씨를 뿌리면 무엇이든 자라나는 정원처럼, 배우가 어떤 대사를 뱉고,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에 비해 관객석은 현실적 공간이다. 관객들은 무대보다 낮은 곳에서 무대 위를 바라보며 배우들이 전달하는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구성하며 감상할 뿐이다.
하지만, 신촌 극장에는 무대와 관객석 사이의 단차가 없다. <액트리스 원>에서 관객석과 무대는 그저 하얀색 선으로 구분되며, 배우와 관객은 수평적인 관계에 놓인다. 배우는 하얀색 선 안과 밖을 상당히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왔다갔다하며 현실과 가상을 옮겨 다닌다. 이는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무대 밖으로 나가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배우가 흰 선 밖으로 나와도 연극은 계속된다.
이렇게 흰 선이 무대와 관객석, 즉 극적 상황과 현실을 나누는 기능은 미약하다. 가상의 이야기는 무대 밖, 즉 현실의 공간에서도 진행되고 경계는 허물어진다. 어두컴컴하고 작은 공연장 안에서 현실과 가상이 뒤섞였다. 둘이 혼재되면서 소용돌이를 만들고 관객들을 2029년으로 이끈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이 아니라, 그 상황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극이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쯤, 현실과 극적 상황의 경계는 더욱 분명하게 무너진다. 마치 극이 끝난 것처럼 객석에 불이 켜지고 배우와의 대화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하는 장면은 관객을 또 다시 헷갈리게 만든다.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인가? 아니면 아직 극적 상황인가? 극이 완전히 끝나도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액트리스 원>은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경계의 애매모호함을 선사해주었다.
공간의 애매함뿐만이 아니다. 인간이 연기하는 로봇, 로봇이 연기하는 인간이 등장하며 인간과 로봇사이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액트리스 원이 연기를 하는 메커니즘은 모방과 자기만의 해석을 거치는 것인데, 이는 인간이 연기를 하는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존재한다. 바로 로봇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인간만큼’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액트리스 원은 성수연 배우의 죽음으로 인해 인간의 생사에 대한 조금의 느낌을 얻을 뿐이다. 로봇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power off/power on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평생 태어남과 죽음은 평생 해결할 수 없는 숙제로 주어지며, 그에 대해 끝없이 고민한다. 여기서 로봇 배우와 인간 배우의 차이가 드러나고, 관객으로 하여금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3. <폴라 목>
“눈을 감고 바다에 잠겼을 때 발 끝에 닿은 건 차가운 빙하였다. 귀에서는 계속해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극의 분위기가 가장 잘 표현된 대사라고 생각한다. <폴라 목>에서 스토리는 없다. 이름 모를 주인공의 이야기 속에서 눈알이 파인 토끼와 목 잘린 닭, 목 폴라 티셔츠, 청소도구함에서 나온 아이가 등장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대 위에 존재한다. 그것들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구성되고, 관객은 자신이 구성한 그 상황 안에 빠지게 된다.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배우의 대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파도처럼 가슴을 때린다. 계속해서 곱씹게 되고, 새로운 상(像)들이 만들어진다.
<액트리스 원>에 비해 더욱 실험적인 극이었다. <액트리스 원>이 스토리를 따라 진행되었다면, <폴라 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미만이 가득한 극이다. 상황은 단절되어 주어지고 개연성은 찾을 수 없다. 그들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이라고 하면 적절할 것 같다. 어지럽다. 불확실한 것들과 상징들이 범람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건 관객의 몫이었다.
목이 잘린 닭과 눈알이 파인 토끼에게서는 버섯이 자란다. 목 폴라티는 버섯 모양으로 변한다. 청소도구함의 아이는 출석부에 이름이 없다. 오랜 시간 방안에 멍하니 있으면 그곳은 아무도 없는 방이 된다. 이렇게 우리가 무관심한 대상들은 사라지기도 하고, 그것들에서 버섯이 자라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조차 모르기에 버섯이 자라는 줄도, 사라지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이름 모를 주인공은 모두가 무관심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한다. 다들 듣고 흘려버리는 노래를 찾으려고 애쓰고, 청소도구함의 아이를 챙겨준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과, 평소에 생각조차 안하는 것들이 나열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관심했던 것들에 대한 사유를 일으킨다.
<폴라 목>에서 공간은 축소되고 확장된다. 작은 케비닛 하나가 무대의 중앙에 있었고, 불이 꺼지자 배우는 그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손전등을 켰다. 그러자 케비닛의 문틈 사이로 빛이 새어나와 문의 윤곽만 보이게 되었다. 마치 암흑 속을 걷다가 발견한 저 멀리의 집처럼. 배우는 그 안에서 노래를 불렀다. 목이 없이 태어난 소녀가 나중에 머리를 찾았지만 붙일 수 없었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알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닫힌 케비닛 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굉장히 기묘했다. 큐브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움츠러들었다. 문의 윤곽과 나 사이의 좁고 긴 터널이 형성되었고, 어둠 속에서 찾아갈 수 있는 곳은 그 문 밖에 없었다.
어느새 케비닛에서 나온 배우는 문틈 사이로 바깥을 볼 수 있다며 손전등으로 벽을 비춘다.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건 벽에 비친 손전등 불빛이었다. 손전등이 만든 하얀 동그라미는 케비닛 밖의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 된다. 그 구멍을 바라보는 순간, 검은 큐브는 좁은 터널에서 케비닛 안의 공간으로 변화하고 관객들은 케비닛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4. <춤추는 것은 먼지>
<춤 추는 것은 먼지>는 암흑 속에서 배우의 몸동작만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에 가까운 작품이다. 두 번 관람했는데 문이 열리면서 빛이 들어오는 장면에서 배우의 몸짓이 미묘하게 달랐고 그것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다. 배우는 어둠 속에서 시종일관 무언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빈 눈으로 응시한다. 그러다가도 좌절하고 고개를 숙이지만 다시, 허공을 바라본다. 이렇게 그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는 듯이 움직이지만 빈 공간 안에는 그림자와 어둠, 먼지뿐이다. 한동안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무대 한쪽에 위치한 바깥으로 통하는 문 틈 사이로 밖에 설치된 조명의 빛이 들어온다. 문을 조금씩 열면서, 배우는 몸을 최대한 늘려 많은 면적이 빛에 닿게 한다. 갈구하는 듯한 몸짓이다. 새어 들어오는 빛을 온몸으로 느낀다. 문이 완전히 열리면 빛이 강해지고 배우는 밖으로 나가 조명 앞에서 움직인다. 관객들이 멍하니 앉아있는 검은 큐브 안에는 배우의 그림자가 엄청나게 커다란 크기로 만들어진다. 자코메티의 <walking man>이 생각나는 형상이었고 존재의 슬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배우가 다시 큐브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문은 빠른 속도로 닫힌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 배우는 가만히 앉아있고, “있다. 없다. 있나? 없다.”이라는 내레이션이 조용히 깔린다.
빛을 갈구하는 몸짓을 보여준 첫 번째 공연은, 언어 습득 이전에 경험하던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언어 습득 이후, 빛은 사라져버렸고 어둠과 그림자만이 존재한다. ‘결핍’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가끔, 언어 이전의 것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찾아오지만, 한계적이며 그 문은 금방 닫히고 만다. 빛이 더욱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커지고 어둠은 더욱 짙게 느껴진다. 그리고 언어 이전의 세계에 대한 환상도 커진다.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배우의 눈이 초점이 없고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공연에서는 문이 천천히 열림과 동시에 ‘꼬로로록’하는 물소리가 들렸고, 바깥 세상이 극장 안으로 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배우는 문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며 밀려나는 듯한 몸짓을 보여줬고 이는 갈망하는 몸짓을 보여줬던 첫 번째 공연과의 확연한 차이였다.
빛에 밀려나는 몸짓을 보여준 두 번째 공연은, ‘페르소나(persona)’를 떠올리게 했다. 하루가 끝나고 어둠 속에서 페르소나를 벗는다. 그것을 벗는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아주 길고 무거운 과정이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도 진정한 ‘나’가 존재하는지, 가면을 완전히 벗는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암흑 속에서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며 계속 움직이고 가면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가면을 벗지도, ‘나’로 돌아오지도 못했지만 다시 하루는 물처럼 밀려오고, 뒷걸음질 치지만 다시 잠기게 된다. 우리 모두 가면을 쓴 채, 물에 잠겨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공통적인 것은 ‘있고 없음’과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부터 있었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동일했다.
또 특별했던 점은 신촌 극장 근처에 있는 기찻길에서 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차의 소리가 음향효과인줄 알았으나 아니었고. 우연적인 요소들이 배우의 몸동작과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효과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배우의 퍼포먼스는 연극 무대라는 제약을 벗어나 세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관객 또한 단순하게 연극을 보는 입장이 아니라 어떠한 현상을 바라보는 인간으로서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배우의 행위 또한 단지 연기가 아닌, 그 어떤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몸짓으로서의 연극(퍼포먼스)이었다.
5.
이렇게 검은 큐브는 극마다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며, 이러한 변화는 극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한다. <액트리스 원>에서는 흰색 선을 사용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었다. <폴라 목>에서는 케비닛과 손전등을 통해 공간을 축소시키고, 확장시켰다. <춤추는 것은 먼지>에서는 기차소리와 같은 우연적 요소와, 무대 밖의 공간과 조명을 활용하여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연극 무대로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끌어들였다. 그 곳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버린다. 이러한 공간과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비(非)고정성은 신촌 극장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신촌 극장, 이 검은 큐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잊고 살아가던 것들을 일깨워준다.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성, 무관심했기에 무관심한 줄도 몰랐던 것들.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에 우리가 경험하던 세계, 그리고 페르소나.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이 검은 큐브가 어떻게 변화할지와, 어떤 극적 경험을 선사해줄지 매번 기대하게 된다. 예상할 수 없기에 더욱 즐겁다. 신촌 기찻길 옆에는 꿈틀거리는 검은 큐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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