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용기
: 영화 <한공주>에 관하여
빙구
매번 다른 답변을 하게 되는 질문들이 있다. 이를테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그렇다. 종종 영화 <한공주>를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거나 별로 기뻐하지 않는다. 나도 이 영화를 보는 일이 그다지 기쁘지 않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고단하고 괴롭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 <한공주>가 내 마음에 남기는 것은 상처나 비극이라기보다는 어떤 종류의 강인함이다.
우리가 영화 내내 보는 것은 강인한 한공주라기보다는 연약한 한공주다. 괴로워하고 도망치고 위축되고 전전긍긍해 하고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한공주. 이 영화는 부당한 패배와 모진 상처로 점철된 그의 삶을 집요하게 담는다. 삶이 그에게 주는 위협은 너무나 촘촘하고 무자비해서 그가 한강에 몸을 던질 무렵이 되면 이 모든 게 끝나서 차라리 다행스러울 정도다. <한공주>를 본다는 것은 일면 세계와의 싸움에서 아주 작은 승리조차 거두지 못하는 어린 소녀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함께 따라가며 한공주를 관찰하다 보면 그가 단지 괴로워하고 감당하는 것 외에도 줄곧 어떤 행동을 지속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수영을 배우는 것이다. 결코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수영한다. 서툴고 크게 첨벙거리며, 맹렬하고 절박하게 숨을 몰아쉬며. 영화는 한공주가 이렇게 절실하게 수영을 배우는 이유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 한공주의 투신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슬며시 다시 상기시킬 뿐이다.
물에 빠진 한공주의 몸이 물결에 떠밀려 위쪽으로 사라지는 동안 영화는 친구 이은희(정인선 분)의 목소리를 빌려 그에게 묻는다. 그것은 이전에 수영을 배우는 한공주에게 건넸던 질문이다.
"공주야, 왜 그렇게 수영을 열심히 해?"
한공주는 대답한다.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 봐. ...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이어 한공주가 친구들과 함께했던 짧고 찬란한 순간이 짤막하게 음향으로 삽입된다. 그것은 불과 며칠 전 연예 소속사로부터 받은 반가운 연락에 친구들이 환호하던 소리다. 한공주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들이 잔물결 위로 환하게 반짝거린다. 그 소리와 겹쳐서 한공주의 것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다시 강물 위로 떠오른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희미한 그 형상이 강물의 방향을 거슬러 힘차게 헤엄쳐 나가면서 영화는 끝난다.
다소 불분명한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한공주가 죽지 않았기를 깊이 바라게 된다. 그러나 사실성 없는 희망을 줄곧 차갑게 차단해온 이 영화의 끝에서 돌연한 행운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우리는 그 바람이 얼마나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반쯤은 알고 있다. 객석에 앉아서 한공주가 죽지 않았기를 바라는 그 누구도 한공주의 남은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살아주기만 바라기엔 삶이 그에게 얼마나 모질었는가.
반면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냉소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한공주는 죽었고 세상으로부터 패배했으며, 그런 환상은 그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이라고. 그러나 이런 단언은 너무 단편적이고 손쉬울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무익한 것이라 여겨진다. 황정은의 말을 빌려오자면 ‘삶이란 원래 이렇고 세계란 원래 이래’ 하는 식의 단념은 이미 세계에 충분히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낙담은 그저 또 다른 낙담을 퍼뜨리는 일일 뿐이라고, 이천십사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그런 마음은 ‘파렴치한’ 것이라고. (각주: 황정은·김봉곤 대담, 「새로운 원고지」, 『문학동네』 2019년 여름호 통권 99호)
그렇다면 <한공주>는 어떤 마음으로 만들어진 영화인가. 이 영화는 허위적인 희망을 경솔하게 내어주지도 않고, 동시에 한공주의 죽음을 ‘파렴치하게’ 확정 짓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가 갖는 어떤 진실은 더 이상 한공주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의 사실관계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가 어떻게 이 장면에 도달했는지를 상상해볼 때에 비로소 일별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공주>는 물에 잠겨 사라지는 한공주의 실제적 몸과 강을 수영하는 한공주의 허구적 몸을 교차시킨다. 그와 더불어 한공주가 수영을 배웠던 이유 역시 관객에게 뒤늦게 알려진다. 그것은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 봐”인데, 이 말은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나는 한공주의 마음에 언제나 죽음이 육박해있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토록 가까운 죽음을 넘어 너무 먼 삶으로 돌아가기를 몹시 바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공주의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 끝에 언제나 가능해 보였던 것으로서의 죽음과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으로서의 삶이 한공주를 두고 각축한다.
현실에 가까운 것은 물론 죽음일 것이나, 그 자리에 영화가 놓아두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수영하는 한공주의 모습이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영화는 한공주가 사는 내내 가장 치열하게 했던 행동을 다시금 상기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모든 괴로움과 고통에도 삶을 바라고 예비하던 한공주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한공주가 죽음을 거슬러 이쪽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영화의 마음을 투영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영화 속 한공주에게(혹은 그 영화를 보고 있을 세상의 다른 한공주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 내가 너의 고통을 다 보았다고. 그리고 화면 밖으로 사라져버린 다음에도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의 마음이 바뀌고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진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그러나 이 몇 마디의 마음을 비추기 위해서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한공주를 모두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 이후에도 삶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죽음의 문턱에서 생사를 오가는 한공주에 이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이름이 <한공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한공주에게 건네고자 하는 이 몇 마디 말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한공주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런 용기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 위해 그 고통을 한 번 살아버리려는 다정, 삶이 주는 두려움과 통증을 모르지 않으면서 타자의 두려움과 통증에 또다시 감응하는 기꺼움이 가지는 용기. 그리고 매번 그것에 깜짝 놀라고 마는데, 내가 모르는 그 용기가 너무 낯설고 부드럽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각주: 이런 종류의 용기에 관해 양효실은 이렇게 적었다. “환상 없이 현실을 끌어안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용기’는 주체적인 자아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힘, 그러므로 그냥 발휘하기만 하면 되는 내적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 용기는 그런 주체성이나 능력을 잃는 힘, 네게 함입되기 위해 내가 최소화되는 무력감을 뜻한다. 흔한 말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의 생존법 같은 것이다. 이 용기는 더 잃을 게 없기에 어디든 가는 사람들의 긍정법을 가리킨다.” 양효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현실문화, 2017, p. 44.)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난처하다. 남의 고통을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소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어떤 인물을 짓밟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어른들의 가혹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채로,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의 강인함이니 삶이니 하는 말을 적는 것은 사실 절반쯤 기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언제나 영화 <한공주>에 대해서 조금 더 잘 말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이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들에 종종 기대기 때문이다. 이따금 사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대체로 그 아픔을 잘 이겨내지는 못하면서 지낸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는 그 시간을 통과하기 위해 용기를 낸 적도 있었다. 그 용기의 일부는 영화 <한공주>에게서 받은 것이다. 언젠가 그런 용기가 되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모르는 용기에 관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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