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와 3D 사이 어디쯤을 덕질한다
- 흔한 연뮤덕1의 주저리주저리
녹턴
아마도 이 글은 아주 솔직한 글이 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다. 누군가는 공감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별로 상관 없다. 그러니 아무쪼록 넓은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글의 주제를 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왜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연극과 뮤지컬을 좋아하고,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아마도 극 자체가 주는 힘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회전문을 도는) 극을 낱낱이 파헤쳐 (착즙해서) 길고 긴 리뷰를 적을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훌륭한 텍스트의 극을 비루한 내 언어로 담기는 버거웠으며, 한편으로 이유 없이 (텍스트의 구멍이 많은데도 이상하게) 매력적인 극을 설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더군다나 공연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 현장감을 멋진 수식어로 담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이런 저런 변명을 대며 미루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습관적으로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내리다 주제를 정해버렸다. 내가 공연을 회전문을 돌고, 배우의 퇴근길에 가서 싸인을 받고, 선물을 주고, 사진을 찍고 다운로드 받는 그런 것들. 내 발걸음을 대학로의 공연장으로 이끄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가장 강력한 무엇. 가장 많은 시간을 그 곳에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일코하게 되었던 이유. PEEP의 모토가 ‘부끄러운 덕질은 없다’ 가 아니었나. 트위터 계정에 쌓인 수많은 트윗들이 나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덕질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2D와 3D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특정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다.
사실 어느 덕질이 안 그렇겠냐마는, 좋아하기 시작하면 늘 콩깍지가 씌고 좋아하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아니, 모든 행동이 좋다. 귀엽다. 이미 하나의 필터를 씌우는 셈이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정말로 캐릭터의 가면을 쓰고 나온다. 나는 내가 만든 콩깍지라는 필터와, 무대 위의 캐릭터의 가면 필터를 이리저리 뒤섞어 본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을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것. 배우의 본체가 크게 궁금하지도 않다. 사실 종종 매거진 인터뷰 등에서, 퇴근길에서 본체가 드러나긴 하지만 그 모습이 더 멋진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라면 (그동안의 필터를 깨부수는 것이라면) 더더욱 반갑지 않다. 쓸데없이 많이 알아 봤자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공연 속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 배우에게 치인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건 다른 배우가 아닌 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 그 배우의 고민과 연구로 점점 추가되는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 그런 공부를 하는 배우의 배우로서 좋은 모습 등이다. 물론 한 공연에서 내게 잘 맞는 연기를 한 배우는 다른 공연에서도 그럴 확률이 높다. 그래서 대개 특정 공연에서 좋아하던 배우의 차기작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극이 너무 재미가 없다거나, 캐릭터가 매력이 없으면 아무리 연기와 노래를 잘하고 내가 아끼던 배우라 한들 공연을 찾아보지 않게 되니 자연스럽게 애정이 식을 수밖에 없다. (각주 : 그래서 연뮤덕들 사이에서는 본진이 노잼극에서 너무 잘 하는 걸 볼 때 제일 가슴이 찢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렇다 보니, 일명 ‘철새’(각주 : 2000년대에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였던 것 같은데, 여기서 부정적으로 쓴 것은 아니다.)가 되기 십상이다. 연뮤덕 사이에서는 회전문 문화가 활발한데, 이는 그만큼 특정 극을 자주 많이 보는 게 얼마나 색다르고 흥미로운 경험인지를 설명해준다. 나 역시 지옥에서 온 회전러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한 번 본 배우보다는 여러 번 본 배우가 기억에 남고 애정도 많이 가게 된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는 즉, 한 때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던 배우도, 그 배우가 내 취향이 아닌 극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극을 자주 보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또 다시 새로운 극을 찾고, 새로운 캐릭터를 찾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새로운 배우를 찾고.
분명 나는 특정 배우를 좋아하는데 그 배우의 모든 연기와 모든 필모그래피를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것. 내가 좋아하는 특정 극 안에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때 좋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누가 연기하든 똑같이 특정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의 이유를 찾고 이렇게 말로 표현하고 인정(?)하기까지 이상하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왠지 발끝만 담근 채 덕질하는 것 같은 느낌, 나는 분명히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있는데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그런 기분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만 누가 덕질에 정도와 순위를 매길 수 있겠는가. 그저 이 오묘한 경계선, 배우도 캐릭터도 아닌 그 사이를 덕질하는 것이 적어도 나라는 연뮤덕의 운명인 것을. 그래서 나는 늘 얇은 경계에 선 채, 언제든 자리를 옮겨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덕후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별이 유쾌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별의 방식도 다양하다. 공연이 바뀌거나, 배우가 바뀌거나, 내가 바뀌거나. 이 세 명제가 함께 가지 않는 이상 이별은 슬퍼진다. 셋 다 바뀌거나, 셋 다 바뀌지 않으면 공연을 보거나 보지 않으면 된다. 사랑을 주거나 주지 않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배우가 3D 본체의 사정, 혹은 잘못으로 인해 달라지면 나는 그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에서 ‘배우’를 잃는다. 공연이 바뀌면 ‘캐릭터’를 잃는다. 내가 바뀌면 그냥 공연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이전에 쏟아 부었던 사랑을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겨놓는다. 그리고 이런 내 덕질은 내 머릿속에만 담아두어야 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각주 :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이게 슬프긴 하지만서도, 바로 이런 점이 연뮤 덕질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좋은 공연을 보고, 잊어버리고, 다시 다른 좋은 공연을 보는 것. 이전에 보았던 좋은 공연 자체는 잊어버린다 해도 그 순간의 감상과 느낌은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가진 채로 시간을 보낸 나는 더 ‘좋은 사람’으로서 이후의 좋은 공연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초연, 재연, 삼연 혹은 그 이상까지 같은 극이 몇 번째 공연되어도 연출, 무대, 배우 등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절대로 2018년의 A극과 2019년의 A극은 같을 수 없다. 하물며 매일의 공연도 다른데, 만드는 이들이 바뀌면 오죽할까. 영상이나 음원 박제도 많지 않다. 내가 A극의 A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좋아서 A극 회전문을 돌았다고 해도, 결국 OST나 영상에 A배우의 더블캐스트인 B배우가 박제되었다면 그건 그 극이 끝날 때 오히려 더 잔인한 이별을 선사한다. 그러니까 결국 정리하자면, 그 당시 그 때의 ‘내’가 좋아하는 ‘특정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매일매일이 다른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그 순간에 온전히 사랑을 쏟아 붓고 이별한다. 그렇게 이별할 것을 시작부터 알고 있지만, 여느 덕질이 그렇듯이 그 순간에 내가 행복하면 그만인걸, 뭐.
무엇보다 2.5D를 덕질하는 건 재밌다. 내가 상상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에 떠오르는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내가 상상할 여지가 너무나도 풍부하고 넓고 늘 열려있다. 특히 이건 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등의 ‘연성’을 할 때 매우 신나는 부분인데, 새로운 이미지를 무에서부터 창조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존재하는 이미지를 나의 해석과 감상에 따라 변형하여 새로운 장면에 대입 시키는 게 더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각주 : 물론 여기서 늘 주의해야 할 점은 배우 본체에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대입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배우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배우나 팬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2.5D 기반의 연성은 늘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 ‘연성물’들은 주로 내가 좋아하는 그 배우가 그 캐릭터를 연기할 때 하는 디테일이나 손짓, 해석과 창작자의 추가적인 상상력이 합쳐져 만들어진다. 캐릭터만 있는 것도, 배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이 함께 있는 상태에서 창작자의 기발한 발상이 첨가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박제도 적고, 언제나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덕후의 입장에서 이런 연성들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나름대로 나의 최애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방식이랄까. 이를 생산하는 사람에게든 소비하는 사람에게든, 연성으로서 2차 창작 되었을 때 2.5D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이런 장점은 그래서 너무나 매력적이다.
구구절절 적어보았으나, 내 덕질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일부분을 말한 것뿐이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아쉽긴 하다. 그렇지만 다 적는 것은 아마 평생 불가능할 것이기에 이 정도로 끝을 맺어보려 한다. 수만 수천 가지의 덕질 분야 중에 그저 하나일 뿐인 나의 덕질 분야와 방식을 털어놓자니 내가 오히려 낯선 기분이지만, 평면 이미지도, 그렇다고 해서 실제 사람도 아닌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아니 적어도 알게 되었다면 그걸로 왠지 뿌듯할 것 같다. 무엇보다 덕후의 운명 중 하나는 영업 아니겠는가. 이런 마음이 신기하고 궁금하고 흥미로워진 당신, 2D와 3D 사이 어디쯤에 발을 한 번쯤 들여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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