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 용문객잔

 - 차이밍량, <안녕, 용문객잔>

장비

 

( 글은 2019 4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한 기획전 《영사, 영화와 극장의 모험에서 관람한 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 대한 글이다.)

 

 

혹시, 박제가 되어버린 극장들을 아십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호호 할아버지 호호 할머니가 되어, 나때는 말이야, 저기  큰길가 어디에 커다란 극장이 있었는데 말이야, 거기서  영화도 보고  영화도 보고, 팝콘도 먹고 오징어도 먹고,  앞에서 친구도 기다리고 새로 붙은 포스터도 보고, 어렸을  엄마  붙잡고 처음 갔는데 스크린도 크고 의자도 많고 그땐 어린 마음에 어찌나 놀라고 신이 났었는지 말이야,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을 법한 그런 극장. 지금은 대형 멀티플렉스니 다운로드니 스트리밍이니 하는 것들에 밀려 어느 순간 희미해지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져버린,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던 이들의 기억 속에 영영 박제되어 남은, 그런 극장들을 아십니까?

 

대만 감독 차이밍량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Goodbye, Dragon Inn)>(2003)에는 ‘그런 극장 나온다. 사실 ‘나온다 것은 훨씬 심심한 표현이고,  정확히는  영화가 그런 극장을 찍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맞겠다.  인터뷰에서 차이밍량은 오랜 유학길에서 돌아왔을  이미 예전의 대형극장들이 많이 사라져버린 것을 발견하고 타이페이 시에서 오래된 복화극장을 보았을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도 A4 1 남짓에, 별다른 사건도 캐릭터도 존재하지 않고 대사도 거의 없는  이상한 영화는 그러니까, 오직 복화극장이라는 오래된 극장을 오래도록 찍기 위해 태어났다. 차이밍량의 표현을 빌자면, ‘영화관이 주인공인 영화 것이다.

 

 

<안녕, 용문객잔>에서 복화극장은 내일이면 문을 닫을 극장으로, 영화는 복화극장의 마지막  마지막 상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는다. 상영작은 과거 홍콩 무협영화의 황금기에 영광을 누렸던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勇門客潺)>(1967)이다. <안녕, 용문객잔>  장면은 <용문객잔>  장면이 나오고 있는 극장의 풍경이고, 이후 카메라는 <용문객잔> 러닝타임과 찬찬히 발을 맞추어 관객이 들락날락하는 상영관을 비롯한 영화관 내부의 공간들을 오간다.

생각할수록  영화에서 ‘카메라가’ ‘오간다 표현은 적절하다. 차이밍량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영화에서 특히 , 카메라가 하나의 살아있는 주체가 되어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 스스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빤히, 그리고 집요하게 (주로 롱테이크로) 대상을 응시하는 카메라는 <흔들리는 구름>(2005)이나 <애정만세>(1994)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있는 특징이지만, <안녕, 용문객잔>에서의 응시는 공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의 특성상 카메라의 움직임을 수반한다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주로 다리를 저는 매표원 여자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매표원 여자는 복화극장에서 일하는(혹은 복화극장에 남은)   되는 직원  하나로, 여자가 화장실, 복도, 영사실, 창고를 오가며 우직하고 묵묵하게 맡은 일들을 하는 동안 카메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여자의 느리고 불편한 걸음을 좇는다.

일상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을 보지만 그것은 스쳐지나가는 것들, 휘발되는 것에 가깝고 응시의 대상이 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안녕, 용문객잔> 비롯한 차이밍량의 영화들에서 카메라는 끈질기게 응시함으로써 관객들 역시 하여금 꼼짝없이 응시하도록 만든다. 때때로 나는 차이밍량의 롱테이크를   다게레오타입(각주 2: 1839 프랑스의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가 발표한 초창기의 사진 기법으로, 은판사진법이라고도 한다. 얇은 은막으로 코팅된 구리판 표면에 광택을  다음 표면에 요오드화은 감광막을 만들어 빛에 노출시키고, 뜨거운 수은증기로 현상하여 양화를 만드는 기법이다.) 같은 초창기의 사진술을 떠올린다. 다게레오타입으로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찍을 때는 30분의 노출 시간이 필요했다.  30분을 상상하면 묘하다. 피사체도 카메라도 숨죽이고 정지한  서로 마주보고 있는 30분을,  고요한 응시의 시간을. 그동안 빛은 천천히 피사체의 잔상을 각인시킬 것이다. <안녕, 용문객잔>에서 다리가 불편한 매표원이라는 설정도 아마 조만간 잊혀질 복화극장의 공간들을 차분히 각인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테다. 당연히 그때의 호흡과 시간의 흐름은 비일상적일 수밖에 없다. 일상적인 순간들은 각인되기 이전에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느림 단순한 진행속도가 아닌 하나의 화법이다. 차이밍량은 <안녕, 용문객잔> 대한 인터뷰에서, “만약에 느림이라는 속도를 이용해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영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녕, 용문객잔>에서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느릿느릿 유영하는 것에 가깝다. 구천을 떠도는 미련 많은 유령처럼, 카메라는 느리게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며 복화극장의 공간들을 담는다. 미련을 한가득 안고 극장을 떠돈다는 점에서 카메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유령들과 동질적인 존재가 된다. ‘유령들이란 <용문객잔> 스크린에 상영되는 동안 상영관에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는   남짓한 인물들을 말한다. 이들은 시끄럽게 쩝쩝대며 무언가를 먹는 커플이었다가, 앞좌석에 발을 올리는 아저씨였다가, 구두를 달랑거리며 ,  견과류를 깨먹는 여자였다가 하며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애초부터 다소 의심스럽던 이들의 존재는 담배 피우던 남자가 내뱉는, “ 극장에 귀신 들린  아느냐 대사(각주 3:  대사는   없는 영화에 등장하는   번의 대사   번째로, 영화가 시작한  40분을 넘기고서야 등장한다.) 의해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꽤나 귀여운 구석들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은 흔히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무서운 귀신과는 거리가 멀다.(각주 4: 그럼에도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자기가 아는 최고의 공포영화로  영화를 꼽았다.) 이들은 누구에게도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조용히 객석  구석에 앉아있다 이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아끼던 망자의 묘소에 잠시 들러 인사를 하고 떠나는 이들처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극장에 얽혀 있는 기억 조각들 같은 이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극장의 마지막을 기념한다.

영화는 이들   명의 이야기를 좀더 세심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상영관에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일본인 남자는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파트너를 찾으러  게이로, 우리는 자신이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와 상대방들의 반응, 남자화장실에서의 작은 에피소드 등을 통해 점차  극장이 아주 오래 전부터 게이들의 비밀스런 모임 장소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각주 5: 차이밍량 역시 인터뷰에서 퀴어적 만남의 장소로서의 극장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있으며, 이전 작품인 <하류>에서는 게이 사우나라는 공간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있다.) 또한 우리는 유일하게 영화의 러닝타임 끝까지 앉아 있던 평범해 보이는 할아버지  명이 사실은 호금전의 <용문객잔> 출연했던 주연들이었다는 사실 역시 나중에야 알게 된다. 마침 스크린에 둘의 대련 장면이 펼쳐지고, 배우들은 고개를 돌려   극장에 앉아있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응시하고,    명의 클로즈업된 얼굴에 작은 눈물방울이 반짝인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남은 이들도  , 그리고    명의 손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전부이다.

 

- 선생님,  영화 보러 오셨습니까?

- 오랫동안  영화를  봤어.

- 이제  영화 보러 아무도  옵니다. 우릴 기억하는 사람도 없죠.

 

복화극장은 그러니까, 떠도는 유령들과 비밀스런 만남을 꿈꾸는 음지의 게이들과 이제는 잊혀진 배우들이 한데 모이는 곳인 셈이다. 아니,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이제 이들이 전부, 라고 말해도 되겠다. 지워지고 잊혀지고 보이지 않는 이들이 점유하는 공간. 복화극장은 어쩌면 없어지기 전부터 원래 ‘없었던곳이자 이미 한껏 희미해져가던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이밍량은 이곳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공간의 잔상이라도 박제해두려 이런 영화를 찍었나보다.

 

그리고 영화관을 찍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있다는 경험의 특이성 때문인지, <안녕, 용문객잔> 초상이나 풍경사진과 같은 여타의 기록물들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보통의 경우 렌즈를 통한 기록이 피사체-렌즈-촬영자·관람자의 A-B-C 구도를 전제한다면,  영화에서 A C 종종 데칼코마니된  또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메라가 복화극장의 객석을 들여다볼 때마다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영화  객석과 마주앉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없었다.  기이한 감각은 영화 상으로 <용문객잔> 상영이 끝나고, 매표원 여자가 극장을 정리하고   2분가량 지속된 침묵에서 극대화된다.

영화가 끝나고   카메라는 상영관의 모든 객석을 화면에 거의  차게 잡고 있다. 여자는   상영관의 불을 모두 켜고 오른쪽 하단의 문으로 들어와 매우 느린 속도와 균일하게 어긋나는 박자로, 간간히 보이는 쓰레기를 쓸어 담으면서 반대편의 문까지 걷는다. 체감상  오랜 시간이 흘러 여자가 상영관을 나가고 나면 한동안 외화면에서 여자의 발소리만 들린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다 이윽고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도 카메라는   상영관을 오래도록 담겠다는  고요히 응시한다. 완전한 침묵과 부동(不動) 속에서의 2.  2분은 설명하기도 다른 영화와 비교하기도 어려운,  자체로 독특한 영화적 체험이다. 나는  장면에서 예상치 못했던 침묵에 당황하면서 스크린에 펼쳐진  객석들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순간 스크린이 거울처럼 이쪽을 비추고 있는  같다고 생각했다. 이편에서 저편을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저편에서 이편을 바라보는 어떤 응시, 거울처럼 올곧게 마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유 모를 전율에 휩싸인  나는 지표에 대한  작품을 떠올렸다. 먼저 떠오른 것은  케이지의 <4 33>, 아방가르드 작곡가  케이지가 1952년에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한 작품이다. 그는 연주 시간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았고, 4 33초는 순전히 침묵, 그리고 당황한 관객들의 헛기침과 웅성대는 소리로 채워졌다.  케이지의  작품은 친구였던 미술가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흰색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라우셴버그는 완전히 비어있는 캔버스를 전시한 적이 있었다.  작품은 걸려 있는 곳의 조명이나 지나가는 관객들의 그림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말하자면  작품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비로소 관람자를 향할  있고, 순간순간 변화하는 외부의 풍경이 남기는 흔적들을 작품의 형태로  순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장면에서  작품을 떠올린 직접적인 이유는 사운드였다. <4 33>에서처럼, 영화에서 갑자기 찾아온 침묵이  이쪽 관객들의 부스럭대는 소리, 미세하게 뒤척이는 소리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불현듯 지금  쪽의 소음이 영화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시를 떠올린 것은  다음의 일이다. 보여주기 위한 일방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마주보고 대치하는 이미지라고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비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렌즈처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쪽에서 채워나가기도 하는 영화라고도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니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거울 바깥의 실체와 거울  이미지가 결코 서로 닿을  없듯,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옛날 무협영화와  영화를 보는 차이밍량의 관객들과 지금 우리 사이에도 시간적 단절과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단절이 존재한다. 비추되 닿지 못하게 하는 거울처럼, 차이밍량의 영화들에서 단절은 항상 중요한 화두였다. <안녕, 용문객잔>에서도 찐빵이  도시락을 들고 서로를 찾아다니는 매표원과 영사기사는 결국  번도 만나지 못하고, ‘유령들’, 아마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점유했을 기억들은 마지막 날조차 각자의 자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대사도 없는 침묵 속에서, 스쳐지나갈 뿐인 관계들과 닿지 않는 기억들은 홀로 조용히 외로워할 뿐이다.

촌스럽고 뻔한 글이 될까 지금까지 영화의 감정들에 대한 언급은 짐짓 피해왔지만, 이제 좀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이때껏 이야기해온 것처럼  영화의 많은 부분을 좋아하고  많은 부분에 감탄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촌스럽다면 촌스럽고 뻔하다면 뻔할 상념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무얼 찾아 헤매는지 자기도  모르면서 하릴없이 배회하는 이들이 주는, 젊었을  화려하던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는 배우가 주는, 계속해서 엇갈리기만 하다 끝내 만나지 못한  빗속을 걸어가는 남녀가 주는, 내일이면 문을 닫을 영화관의 마지막 상영 마지막 순간이 주는, 그런 상념들. <안녕, 용문객잔> 감정들을 전달하는 방식은 말없는 바라봄이고, 나는 그런  영화를 다시  조용히 보면서 영화를 만든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틀림없이 촌스럽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 느린 사람, 주로 홀로 슬퍼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구석구석 오래오래 바라보는 법이다. 이제는 점점 그런 종류의 사람들마저 사라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 슬퍼진다. 그래도 아름답고 서글픈 것들이 완전히 희미해져버리기 전에,  잔상이나마 영화 속에 박제되어 언제든 꺼내볼  있다고 생각하면 적지 않게 위안이 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