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곡을 하는가

마노

 

#0. 다단조의 발견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작곡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상의 단서가  만한 무언가가 전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어린 시절, 나는 특별히 음악적이라고  수도 없고 아니라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직업 음악인도 아니고 딱히 음악 애호가도 아니었지만, 그때 집에는 모차르트도 있었고, 산울림도 있었고, 키스 자렛도 있었다. 나의 ‘본격적 음악 인생의 시작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피아노 학원에 떨어진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피아노 연주는  체질에  맞았다.

나의  번째 작곡은 어머니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분명치가 않아서 2 혹은 4 때의 일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데,  이유는 (어머니의 기억이 맞는다면)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작업물의 ‘악보 보시고서는 ‘얘는 가르치지도 않은 다단조를 발견했다라는 식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체르니 단계로 넘어간 초등학교 4학년  학원 선생님께서 다단조를 ‘가르치지도 않았을 없으니, 스스로도 믿기 힘들지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처음 작곡이란   것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이와 관련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사실을 알게  계기도 어머니께서 악보든 녹음이든 남겨놨어야 했다는 후회 뒤섞인 회상을 나에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따르면 나는 백합을 소재로  가곡 비슷한 성악곡과 봄을 소재로  피아노 연주곡을 작곡했다고 하며, 누가 가르치지도 않은 다단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소재만 놓고 보면 그게 어떻게 단조랑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보다 다장조 사장조 바장조 정도만 알았을 초등학교 2학년짜리 어린애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팠길래 단조를 ‘발견하는데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란 힘든 법이다.

 이후의 나는 아마도 작곡이란 행위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같다. 아마 자신이  행위가 ‘작곡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나는 곡을 만드는 것보다는 악기를 연주하는 쪽에 조금  흥미를 느꼈던  같다. 제대로 기억이 남아 있는 이후를 돌이켜보면, 나는 오카리나를 굉장히 열심히 가지고 놀았고, 지판에 아무런 표시도 없는 바이올린을 들고 낑낑댔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생물학자가 되겠다라는 결심을  이후에도 나는 취미 삼아 이런저런 악기들을 놓지 않았다.

 

#1. 서태지피타고라스일렉기타

 

피아노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악기를 연주하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까지 나에게 청취의 측면에서 음악이란 ‘들리는 것을 듣는수동적인 것이었다. 예컨대 부모님께서는 드라이브를  때마다 산울림 음반 카세트테이프를 트셨다. 나에게는 선곡권이 없었고, ‘드라이브를  때는 당연히 산울림의 음악을 듣는 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런 면에서는 아마 선곡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다.

 

청취의 측면에서 음악을 능동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한 계기는 작곡보다 분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2004년이니 초등학교 3학년 때였고, 정확한 날짜를 검색해보면 5 23일인데, 그날 MBC에서 서태지 블라디보스토크 공연 실황을 방영한 것이다. 일요일을 맞아 별다른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마주한 서태지의 공연 실황에 ( 곡은 아마도 <Heffy End>였을 것이다) 나는 문자 그대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같은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에 의해 열심히 듣던 산울림이  음악을 거부감 없이 들을  있게   기반을 마련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여하튼 내가 원하는 특정 음악을 ‘찾아서듣기 시작한 계기는 서태지 7집이었다.

이후  년간 나의 연주와 청취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 같은  있었는데, 한쪽은 애들 장난에 가까운 클래식이었고, 다른 한쪽은 서태지를 중심으로   음악이었다. 여하튼 둘은 나의 음악적 생활에서 커다란  개의 축이었다.  둘의 균형이 깨져버린 , 과학고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면서 자발적으로 악기 연주를 취미로 돌려버린 중학교 때였다. 서태지가 8집을 들고 돌아와 활동하던 2008~2009 사이까지, 나는  음악을 열심히 들었지만 그걸 내가 연주하게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렉트릭 기타에 입문하게  계기는 아마도 가장 황당하게 느껴질 텐데, 피타고라스의 정리 때문이다. 원체 ‘체질적으로 수학을  했던 나는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제집 같은데 으레 있는 ‘읽을거리같은 데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점토판에 피타고라스  여럿(적어도  자릿수 단위의) 남겨놨다는  읽고서 ‘고대인들도 하는   나는  하고 있지?’ 하는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서는 불현듯 ‘일렉기타를 배워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수적인 질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니, 너는 다른 길을 찾아보라 피타고라스의 계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 고등학교 – 음악적 암흑기

수학적 상상력은커녕 수학적 사고력 자체가 심각한 정도로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나의 생물학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향한 항해는 나름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표때문에 음악이  뒷전으로 밀려버리긴 했었지만 말이다.

일단 가장  문제는 중학교 이후 가벼운 취미로 전락해버린 다른 악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심지어 ‘메인악기로 삼은 일렉기타 연주마저 도저히 참고 봐줄  없는 실력이었다는 점이다. 결과 고등학교 밴드동아리에서 떨어졌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사건이 내게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음악은 취미로 하면 되지하는 생각을 용납할  없게  결정적 계기가  사건이 아닐까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흔히 ‘모던록으로 분류되는 초기 넬이나  같은 암울한 음악을 많이 들었었다. 밴드에서 떨어진 나의 취미 생활은 시를 쓰는 거였는데, 말이 작시지 실상은 작사에 가까웠고,  솔직히 말하자면 ‘가사 바꾸기 놀이 가까웠다. 여하튼,  시기는 여전히 음악에서 가사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운문 창작에 매달리던 때였다.

 

#3. 단과대 밴드

새내기 시절 활동 기수로 거의 살다시피 했던 단과대 밴드는, 내가 본격적으로 일렉기타를 연주하게  계기이기도 하고, 내가 음악적으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학기 중에는  5 하루 3시간, 방학 때는  5 하루 8시간씩 연습을 했는데, 지금 보면 이걸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기간 사이에 나는 청취와 연주 양쪽 모두에서 음악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유명한 국내 록이나 겨우 듣던 꼬맹이가 프로그레시브  덕후로 발돋움한 시기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동아리도  들어갈 수준의 취미 삼아 깔짝대던 연주가 밴드에서 합을 맞출  있는 수준으로 적지 않은 도약을  시기이기도 하다.

<새벽감성> (2014)(각주 :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dawn-emotion-gp-demo, 커버 이미지의 QR 코드를 스캔하면 연결됩니다.)

 

무엇보다 작곡 측면에서 이때가 중요한 , 본격적으로 ‘자작곡 만들어 보려고 시작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밴드 하면 자작곡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카피 겨우 하는 수준의 아마추어 밴드에서 끊임없이 자작곡이랍시고 뭔가를 들이밀었다. 처음에는 코드 진행과 간단한 녹음 정도였는데, 명확한 악보가 없으면 연주를   없다는 저항(?) 부딪혀, 나중에는 모든 파트의 기타프로 악보와 거기서 추출한 끔찍한 수준의 음원까지 만들어서 들고 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곡의 수준과 멤버들의 취향 모두에서 결코 합격점을 받을 수는 없는 결과물들이었다. 아쉽게도 단과대 밴드 활동 기수를 마무리하는 공연에서까지 자작곡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시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4.  입대  방황기

지금  시대에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음원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런 쓸데없는 부분에서 묘하게 보수적인 나는 형식을 확정하는 것까지를 ‘작곡’, 이후의 과정을 ‘작업으로 끈질기게 구분해서 부른다.  글을 쓰다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형식 ‘(음악) 재료라는 단어를   번도 명확하게 정의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는데, 앞으로 ‘형식 일단 ‘어떤 노트를 어느 시점에 연주하면 되는지를 확정한 정도로 해두자. 유의해야  점은  ‘형식 실제의 ‘소리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청각 없이 시각만 가지고도 악보를 통해 확인할  있는 정보들이 ‘형식 해당할 것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예술철학(특히 음악철학)에서 통용되는 ‘형식 비교하자면  생뚱맞지만  혼자서는  쓰고 있는 ‘(음악) 재료라는 단어는, 신입생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미학 뭔지도 모르고) 학점 채우려는 생각으로 듣게  교양 강의에서 접한 아도르노에 한창 심취해 있을  내용물은 거의 흡수하지 못하고 껍데기만 주워다가 멋대로 의미부여를 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단어는 정의하기가 더더욱 힘든데, ‘음색을 포함한 실제의 소리정도의 부족한 설명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줬으면 한다. 그림으로 거칠게 비유하자면, 스케치에 해당하는 형식을 만드는 것이 ‘작곡’, 이후 물감에 해당하는 재료를 치덕치덕해 무언가 내보일만한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을 ‘작업이라고   있겠다. 여기서 하나 주지시키고 싶은 점은, 분명 토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사 문학의 영역이지 ‘음악 재료 간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소리를 했냐면, 단과대 밴드 활동 기수가 끝난 이후, 거의 2  동안 개인적으로 심각한 방황을 겪는데, 그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기의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그때까지 인생의  축이었던 생물학과 음악이 균형을 잃고 깨져버린 것이었다. 여기서 ‘생명과학 아닌 ‘생물학으로 굳이 옛날 단어를 쓰고 있는 이유는, 내가 꿈꾸던 미래가 19세기까지나 유효하던 ‘박물학자였지 현대의 ‘생명과학자 아니었다는 사실을 전공 진입한 이후에나 깨달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건과 내면 갈등들을 요약하자면, 현대의 생명과학에 적응하고자 했던 시도와 음악을 취미 삼아 하는 일로 돌리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정도로 정리할  있을 것이다. 여하튼,   가지 시도가 거의 실패했음이 명확해지는 시점에서 나는  입대로 인생 1막을 내려버리고 잠시간의 인터미션을 보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단과대 밴드에서 독립 아닌 독립을  이후, 아무 데도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던 2  사이에도 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우선 ‘형식을 만들어가면 재료를 채워 넣는  연주자와 엔지니어들이 해주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으로부터  발짝 양보해 ‘작업 하기 위한 각종 음향장비와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배웠다. 배우는 과정은 거의 독학에 가까웠는데,  시기의 자작곡들을 보면 재료에 천착하고 있다는 특성을 띤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없다. 서투른 녹음을 통해 확보한 ‘재료 가지고, 별다른 계획 없이 음악이랍시고 뭔가 만들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Polar Twilight》 (2015-2016)(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sets/2015-16-polar-twilight)

 생활을 하던 시절에 휴가 나올 때마다 잠깐씩 작업했던 음원들을 포함해서, 대체로 하드에 봉인되어있는  시기의 음악들은 대체로 보컬 없는 연주곡들이며, ‘프로그레시브  내걸고 있지만 이건 내가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솔직히 누군가가 장르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해 들어온다면 이길 자신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기에는 특히 컴프레서로 짓누른 스네어 드럼의 질감을 싫어했었고, 이걸 음악 재료에서 스네어 드럼(나아가  밴드의 드럼 세트) 제외해버리는 말도  되는 방법으로 해결했었다. 물론 드럼 없는  음악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나의 결과물은  밴드 편성을 위한 음악이면서도 실제로  밴드에서 연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계획 없이 재료를 다층적으로 쌓는 방법 역시 실제 연주 가능성을 떨어뜨렸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어느  저녁노을이 내게 말을 걸었어>(각주 : https://youtu.be/pqp1AXGUuKM) 실제로 연주하려면 7대의 일렉트릭 기타가 필요하다.

장르 논란은 일단 젖혀두고,  시기의 자작곡들에서 내가 견지하던 것들이  가지 있다. 우선 ‘사람이 실제로 연주할  없는 음악을 만드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라는  기타리스트 특유의 고집 같은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사람 가상의 연주자를 상정하는 편이 옳았겠지만, 그때는 ‘혹은 ‘주변 사람정도를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전제했던  같다.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재료만 사용한다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도 내걸고 있었다. 이는 일종의 직업으로 보수를 받으면서 하는 일이라면 절대로 내걸어서는   간판이지만, 당시에는 ‘진짜로 좋아하는 일이라면 취미로 하는 것이 낫다 것을 스스로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반쯤은 손발을 묶는 기분으로 그것을 내세웠던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재료들만 엄선해 골라 담듯이 만든 곡으로 오카리나를 위한 연주곡인 <하늬바람숲>(각주 : https://youtu.be/KqQQW7U9xio) 있는데, 이건 입대  마지막으로 작업한 곡이기도 하다. 하나 문제가 있었다면,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기질이 있지만) 당시의 나는 ‘보컬이라는 재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기의 연주곡들은 초보적인 수준 때문에라도 들어줄 것이  되지만, 자신도 별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일종의 자족적 행위에 불과했다. 그래도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만약 내가 조금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아마도 이런 부류의 음악을 추구하는 작곡가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5. 인터미션

 생활을 하는 동안은, 당연하게도 별다른 결과물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과학자가 되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확실히 결정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고 자평한다. 그래서 뭐가 되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요원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보랏빛에 대한단상,  번째> (2016)(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about_violet_part1)
<보랏빛에 대한 단상,  번째> (2016)(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about_violet_part2)

<원시림> (2017)( https://soundcloud.com/chorock_mano/virgin_forest)

 시기는 지금의 내가 확립되기 위한 일종의 준비 시기였다. 지금의 메인 기타와 보컬로이드를 구매하기도 했고, 내가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기도 했다. 여전히 서태지와 포큐파인 트리와 wowaka 합치되는 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고, 가사 없이 그저 재료의 아름다움에 천착하는 단편적인 음악과 마치  편의 소설과 같은 CD   분량의 대곡이라는 모순적인  개의 축을 화해시킬 방법 역시 찾지 못하고 있지만, 평생에 걸쳐 이뤄내야  목표를 설정한  정도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6. 현재

 

<나비의 일생 2018> (2018)(https://youtu.be/ABbKb7af3A4)
인터미션을 마치고 돌입한 인생 2막에서, 가장 처음  일은 방황기 시절 최고 걸작인 <나비의 일생> 들어줄 만한 수준으로 다시 작업하는 일이었다. 일종의 개인적인 ‘과거 청산같은 것이었는데, 언젠가 다시  지점으로 돌아가게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빙정> (2018)

 

이후로는 보컬로이드를 사용한  음악의 작곡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번째 곡은 <빙정>(https://youtu.be/JqdmBje6k98)이었는데,  곡은 단과대 밴드 시절 자작곡  하나인 <새벽감성> 고등학교 시절 썼던 동명의 시를 가사로 붙였다. <새벽감성> 직접 가사를 붙이는 행위는 곡에 담긴 다층적인 감성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해, 보컬리스트가 읽어낸 감성을 바탕으로 작사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완성을 미뤄두었었다. 결국 보컬로이드를 사용하게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본인이 노래를 부르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는 음악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  번째 곡인 <곁에>(https://youtu.be/_j8REEY8zN0)역시 단과대 밴드 시절 만든 곡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새벽감성> 초기 넬의 아류작이라면, <곁에> 못을 따라 해보려다 실패한 작품이라고 자평할  있을  같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듣던 음악이 단과대 밴드 시절 작곡을 시작할  단초를 제공했었다고   있겠다.

<당신을 위한 이세계행 트럭이 대기 중입니다> (2018)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곁에> 가사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기보다, 곡을 만든 다음 뭐라도 필요해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같은 느낌이라는 혹평을 듣고 나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당신을 위한 이세계행 트럭이 대기 중입니다>(https://youtu.be/l8fzDVvdCEM), ‘하고 싶은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곡이 나오기 전까지 내가 만든  어떤 곡과도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이세계행 트럭>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시도해본 적은 없었던 ‘소설 같은 음악  번째 결과물이기도 하고, 가장 록적인 분위기의 음악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세계행 트럭> (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주변 지인 몇몇뿐이지만) 논란과 호응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고, 심지어는 앞으로 내가 만들 음악의 성격을 구속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까지 했는데, 의외로 좋아할  같은 사람은  반응이 없었고, 싫어할  같았던 사람이 마음에 든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해서 당황하기도 했었다. 여하튼 <이세계행 트럭> 앞으로 내가 만들어나갈 음악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분명하게 밝힐  있을  같다.

 

 

#7. 나는  작곡을 하는가?

<이세계행 트럭> 이후로도 곡을 계속 만들고는 있지만, 아직 의미를 자평하기 이른  같기도 하고, 그보다는 지금까지 말한 선에서 각각의 곡들에 대해 정리할  있을  같다. <보랏빛에 대한 모티브>(https://youtu.be/h3iJYaaTQbE) 방황기 시절 음악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에 가깝고, <거미의 사랑>(https://youtu.be/ONFwzrQUC_I) 소설 같은 음악의 견지에서   ‘1970~80년대의 정통 프로그레시브 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였다. <사운드의 배반>( https://youtu.be/4J7qEHN4-l4) 음악이라기보다는 악의 없는 농담 같은 일종의 퍼포먼스인데, 르네 마그리트,  케이지, 아서 단토의 영향을 받았다.

 오래전부터 ‘마노라는 이름을 내걸고 음악을 만들고 있지만, ‘마노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당장 명확한 답을 하기가 힘들다. 앞서 밝혔듯이 스스로의 청취연주작곡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프로그레시브  애호가로서 나는  편의 장편 소설 같이  짜인 음악을 추구한다.  밴드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로서 나는 언어 없이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 재료를 만드는 것에 천착한다. 작곡가로서 나는  둘이 화해하고 합치될  있는 지점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배워버린 과학적 엄밀성과 철학적 미학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보니  글이 되었지만, 사실 좋아서 하는 일에 별다른 이유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다단조를 발견한  같이, 의미는   없지만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찾는 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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