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린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
-윤이형의 「루카」
오버더펜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을 즐기는 데에는 각자 수많은 이유를 갖고 있겠지만, 나의 경우 문학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글 자체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기 위해서, 또는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진실을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성취한 작품을 접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어느 편을 선호하는 지에 따라 어떤 이는 시집을, 어떤 이는 소설을 집어들 것이다. 진실의 향유라고 썼지만, 그 진실들은 대체로 편하게 앉아서 받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얼떨떨하면서 뜨겁고, 아리면서 차갑다. 황정은은 지난 『AXT』 9월호에서 “소설가의 임무란 현실적 대안의 제시가 아니라, 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감’을 확장시키는 것, 다시 말해 세계와 자아의 경계를 무한히 잡아당기는 것”이라 적었다. 결국 최고의 문학작품은 아름다운 문체로 타인들의 진실을 산출해내는 작품일 것이다.
윤이형은 주로 SF나 판타지 작품들을 써낸 이력으로 인해, 지나치게 장르문학적인 시각으로 편협하게 이해되어온 감이 있다. 지난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에 실린 「루카」에서 두드러졌던 그녀의 아름답고 처연한 세계를 돌아보고자 한다.
소설은 “너는 루카다. 내가 딸기인 것처럼.”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끝난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사랑이 끝나고 난 뒤, 그것을 돌아보는 기존의 많은 이야기들과 맥을 같이 한다. 구체적으로는 성소수자(라고 우리가 부르는)들의 위태했던 사랑과 어쩔 수 없었던 이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사랑은 그 과정에 따라 대체로 평범하고 약간 특별했다. 목사인 루카의 아버지와 그(‘루카’)의 연인이었던 ‘나’(‘딸기’)가 각자 잃어버린 루카에 대해 돌아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버지의 (심리적인) 복원과 딸기의 성찰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작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루카의 목소리는 소설 안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아버지와 연인의 편협한 이해들이 점차 무겁고 불편한 진실이 되어 그를 대신해 <루카>를 채운다.
그렇다면 루카는 딸기에게 어떤 존재였나. 루카는 “‘나’에게 신이자 종교이며 사회”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너는 나를 유일한 시민으로 갖는 사회가 되어야 했다. 네가 내 사회의 유일한 시민이었으니까. 너는 나를 온전해지게 하는 가족이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단 한 명의 친구였으며, 주기적으로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지인이었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좀 더 나은 삶이었다. 나는 너라는 한 사람 속에서 그 모두를 찾고 구했다. 그 일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사랑한 너의 어떤 얼굴은 내게 낯설어졌다.
사랑은 어떻게 지치고 사소해지고 마는가. 너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인식은 처음엔 서로를 이끌리게 하는 마법이자 환상이지만,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타자라는 결정적인 간극이기도 하다. 신형철은 <러스트 앤 본>을 보고, 사랑은 “결여의 발견으로서의 응답”이기도 하다고 했다. 상대방의 결여를 목격하고, 나의 결여를 발견하면 나는 그의 사랑에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카와 딸기의 경우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같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딸기와 가족에 의해 강제로 아웃팅을 당한 루카. 모태신앙으로 주일학교를 다니며 대학을 다녔던 루카와 퀴어와 관련한 일에만 매달리는(정체성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나. 나는 자신의 결여를 매 순간 떠올렸지만, 루카에게서 그 결여를 발견해내지 못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 모든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 너의 교회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했던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내 동료들이 너의 교회 같은 교회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는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너의 경제적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품는 감정이 관계되어 있었다.
결여의 화답은 사랑으로 이어지지만, 그 불균형은 결국 사랑을 침식하게 만들 뿐이다. 루카는 딸기와 만나면서 작별했던 세계 - 자신 안에 죽어있던 것들 - 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들이 헤어지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둘만이 공유하고 있던 세계에서 한 명이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 그것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웠으며, 그렇기에 더 오래도록 남아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딸기의 성찰은 반성인 동시에 인식이다. 그는 자신을 가해자이자 관계의 종결을 앞당긴 사람으로 지목하고, 사랑의 당사자로서 그 과정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하려 했다.
아버지라는 캐릭터의 작위성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소수자나 차별과 같은 단어들에 가려져 있던 희미하고 따스한 온기를 온전히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루카와 딸기, 그들은 마냥 착했다. 싸우기도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는 다정한 사람들. “죽었던 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라는 연인이 던진 독백에 홀로 뒤돌아 숨죽여 울었던 사람들. 그럼에도 끝내 되돌릴 수는 없던 그 과정들.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엄정함과 그 안의 따뜻한 사람들. 많은 사랑의 서사들이 눈물을 자아내왔던 지점이지만, 작가는 또 한 번 우리를 울리는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윤이형이 쓴 사랑 이야기의 특별한 점은 무엇 일까. 그것은 그녀가 말하는 사랑의 진실이 따뜻한 문체와는 달리 우리를 한껏 무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해선 수많은 정의들이 매일 생겨나고 또한 기각된다. 그러나 어떠한 명제도 모두에게 평등한 시효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사랑에 관한 아포리즘은 이것이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종교를 택한 딸기와 다시금 신에게 돌아간 루카. 이들의 필연적이었을 이별을 목격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마지막 딸기의 말은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릴 단절에 대해 더욱 씁쓸함을 갖게 한다. 그의 말로 이번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였던,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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