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방인> 후기

 


녹턴

 

 


 ‘치인다는 것은, 항상 교통사고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극을 보고 치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험한데, 노래처럼 여러 번 들을 수도, 영화처럼 다운 받아놓고 돌려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머릿속에 극 속의 장면을 수없이 떠올리며 앓을 수밖에.



 한 달 전, 알베르 까뮈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 <이방인>이 내게 그랬다. 그저 좋아했던 소설이라 호기심에 예매해 본 극이, 몇 주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말한 자체의 일회적인 속성 때문에, 나 같은 경우는 최대한 많은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며 연극이 끝난 후 바로 몇 마디 핸드폰 메모장에 끄적이거나, 희곡집을 구매하거나, 장면을 기억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편인데, <이방인>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하고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을 만큼 날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서 글을 써야만 했다. 조용히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렇게 그 객석에서 내 심장이 뛰었는지, 왜 그 대사들이 숨을 못 쉬게 했는지,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극장을 빠져나왔는지. 대체 이 극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길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나름 프랑스어과라고 프랑스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것인데, 처음 읽었을 때의 내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들에 공감할 수 없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했다. 어떻게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 그렇게나 아무 감정이 없을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고, 실제로 뫼르소 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과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두세 번 더 읽게 되었는데, 읽을수록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증오하던 뫼르소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어느 날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뫼르소는 위악적이라고. 부조리한 사회가 만들어낸 위악적인 인물이라고. 위악적? 거짓으로 착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거짓으로 악한 모습을 보이는 위악적인 인물. 그 말을 듣고 격하게 공감한 후, ‘위악적이라는 말 안에는 사실 그 사람의 껍질을 벗기고 나면 선한 본질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죽은 다음 날 애인과 함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옆집 남자와 싸운 아랍인을 햇빛 때문에쏴 죽인 뫼르소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모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그가 선하다니.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뫼르소의 위악적인 모습에 반해버리고 말았고,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뫼르소를 동정하고 그에게 격하게 공감하며 고등학교 때의 그 서평을 마쳤다.



 자그마치 2년이 지난 후 연극으로 만난 <이방인>, 뫼르소는 내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고 그 이유를 고민하게 했다. 내가 극에서 주로 관심 있게 보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얼마나 연극이라는 포맷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냈는지, 연기뿐 아니라 배경음이나 무대 등을 잘 사용했는지, 캐릭터가 명확하게 하나의 노선을 걷고 있는지 등이다.[각주:1] 이런 면에서 연극 <이방인>은 아무리 천천히 생각해봐도 이 모든 것들에 있어 완벽한 극이었고, 내가 한 번밖에 볼 수 없는[각주:2] 이 극에 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연극 <이방인>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이틀 밤을 꼬박 새워야겠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독백얘기를 주로 하고자 한다. 이 연극이 원작의 1인칭 시점 문장들을 꽤나, 그것도 많이, 그대로, 뫼르소의 독백으로 살린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뫼르소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극은, 뫼르소의 독백으로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진행되고 결국 결말까지도 독백으로 끝난다.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독백 위주의 극 진행은 오히려 <이방인>에서는 장점이었다. 온전한 뫼르소의 입장에서, 그의 (물론 크지 않은) 표정 변화와 행동 등을 관찰할 수 있었고 이는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더욱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인물 간의 대화가 나오는데, 이 대화의 비율 역시 적당했다. ‘적당했다고 하면 굉장히 애매한 기준 같은데 적어도 내게는 지루하지 않게 독백과 대화를 적절히 섞어 배치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독백의 주도성 덕분에, 모든 인물이 뫼르소의 이야기 안에서 움직이는 상상 속 인형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작은 산울림 극장에서 큰 무대 장치도 없이, 단순히 소리와 벽에 쏘여지는 영상, 장소를 표현한 간단한 조명과 함께 진행되는 뫼르소의 독백은 까뮈의 소설이 주는 그 잿빛의 느낌과 묘한 긴장을 모두, 완전히 포함하고 있었다. 아랍인을 총으로 쏘기 직전, 그 작열하는 태양과 그에 비치는 칼날, 그리고 뫼르소의 차분하지만 흥분된 목소리, 필름이 끊긴 것 같은 전자적인 소음. 단언컨대 이 장면 이후에는, 누구도 뫼르소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독백을 위해서는 당연히 배우의 연기력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번 뫼르소를 연기했던 전박찬 배우를 처음 본 건 연극 <맨 끝줄 소년>이었는데, 이 연극 역시 독백 위주로 진행되는 극이었다. 그때도 차분하지만 모든 공기를 압도하는 그의 연기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전박찬 배우에게 연출이 먼저 <이방인>의 뫼르소 역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명확한 발성과 딕션, 연기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어쨌든 그는 누구보다도 감정의 변화가 적은 뫼르소를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애인 마리와 있을 때 짓는 활기차지는 않지만 가식적이지도 않은 미소, 사제와의 대화에서 부르짖는 울음 섞인 목소리, 잠에서 막 깨어나 누운 채로 뱉는 독백, 마지막 죽음 앞에서 비로소 위악을 벗어 던진 채 불안에 떠는 인간적인모습. 전박찬 배우는 이 모든 장면에서 묘한 차분함을 잃지 않는 뫼르소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냈다.

그럼에도 약간의 아쉬웠던 점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바로 공간적 배경이 바뀌다 보니, 암전이 조금 많았던 것. 극에서 암전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암전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준비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어떤 감정의 여운을 느끼는 시간 역시() 제공할 때도 있고. 하지만 암전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관객은 그 시간 동안 잠시 극에서 벗어나 집중력을 잃게 된다. 재빨리 바뀌는 시공간 때문에 이를 표현하기 위해 암전을 사용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게까지 많을 필요가 있나 싶은 장면도 더러 있었다. 무대의 전환이 크게 필요한 장면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이 아쉬운 점은 정말 아쉬운점일 뿐, 큰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긴 했지만.


 원작이 있는 것을 다른 장르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함은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작을 완전히 그대로 옮길 수는 없기에 보수와 혁신을 적절히 섞어야 하는 그 지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태 많은 소설들이 연극, 뮤지컬화 되었지만 단연 <이방인>은 최근 내가 본 그런 종류의 공연 중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뫼르소 입장을 잘 살려냈고, 연출도 참신했고, 음향이나 조명의 사용도 적절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결국에는 관객이 뫼르소에게 공감하게 했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극의 형식으로서도, 내용으로서도 두루 좋은 점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게 뭘까.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모습과 거리가 먼 뫼르소의 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끔찍이도 인간적인사람들뿐이었다. 사랑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동정하고, 증오하는. 그런 감정들로 똘똘 뭉친 사람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었던 건 뫼르소일지도 모른다. 그만의 방식으로, 그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세상이 그를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 아주 작은 가면까지 벗고 나면 뫼르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친 감정 한 구석에는 세상에 대한 냉소함과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 그리고 주변에 어떠한 것들에도 흔들리지 않다가도 사소한 것으로 무너져버리고 마는 얇고 단단한 어떤 것이 자리잡고 있을지도. 그리고 그 어떤 것이 무너져버린 인간적인 뫼르소의 마지막 독백으로 이 글을 끝맺어본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 세상이 나와 너무도 닮아서 꼭 형제 같다고 느끼며, 나는 내가 행복했었고 또 여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남은 바람은 내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분노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1. 사실상 전부인 듯. 좋은 극인데 한 번밖에 보지 못한다면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럴수록 다른 방향에서 고민하게 된다. 또 여러 번 볼 수 있는 환경이라면 매번 볼 때마다 다른 것에 주목하게 된다. 그렇게 의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뮤지컬 동아리에서 연출로 일하다가 생긴 직업병 같기도 하고. [본문으로]
  2. 관극(극 관람)이 가능한 다른 날들에는 약속이나 다른 관극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능하다고 해도 불가능 했던 것이, 이미 남은 회차가 전석 매진이었다. 적은 객석 수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 샌가 소문이 멀리 퍼졌더라. 좋은 극을 한 번으로 끝낸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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