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검은 입김의 신>, 흔해빠진 불행의 세상에서
이르름
여기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검은 산, 검은 하늘, 검은 공기, 검은 집…… 몸도 마음도 마을도 검게 물들어 버린 이 동네에서는 말한 것이 거꾸로 되어버린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탄광을 지지하기 위한 나무는 뿌리가 위로, 가지가 아래로, 그러니까 거꾸로 심어지고, 이 비좁고 무더우며 위아래가 뒤바뀐 탄광의 검은 하늘 아래에서 광부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버린다는 믿음을 굳힌다.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던 가족은 퇴직금을 한 푼이라도 늘리려 무리하던 가장의 부상 앞에 한 발짝을 떼지 못하고 돌아온다. 남편 상진과 함께 갓 마을에 온 새댁 남희에게 이 마을에서 부부는 서로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그러니까 이곳은 떠나야 하는 곳이라고 빨래터에 나란히 앉아 말하던 광부의 아내들. 그들의 남편이 탄광에 갇히자, 구조작업에 대해 따지러 들어간 관리자의 사무실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운 좋았던 일들, 유난히 행복해서 불길하게 돋보였던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 보인다. 요 며칠간은 큰 소리로 싸우지 않아서 살만 하더라고, 생전 안 그러더니 찌개 간을 봐주더라, 아이들이 요즘엔 아빠를 안 피하더라니…. 그들에게 이런 작은 행복들, 익숙하지 않은 행복은 경계의 대상이며 오히려 마을의 검은 빛깔처럼 항존하는 위험이 터져나올 전조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다고, 지금이 좋다고 말하길 주저한다. 이곳은 좋은 일에 뒤이어 반드시 불행이 닥치고 그래서 결국에는 나쁘게 되어 버리는, 모든 것이 거꾸로 이루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행복에 겁먹게 만들었는가? 이것은 사방에 널려있는 불행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막장에 들어가길 택한 남편들은 숨막히는 깊이의 어둠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검은 하늘 아래서 매일을 보낸다. 하루가 끝나고 땅 위로 돌아오면 죽었다 살아난 기분을 느끼면서도, 오늘도 내일도 탄광으로 향하는 기나긴 차량 칸에 몸을 싣는다. 아내들은 빨아도 빨아도 검은 물이 나오는 빨래를 하며 서로의 가족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삶에 깊게 잠식한 가난과 고단함을 술에, 노래에 담아 견뎌낸다. 가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힘든 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이들에게 희망이란 이름으로 부담을 주고, 배려란 이름으로 상처를 입힌다. 부상을 당해 병원비가 드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서 보상금을 받아 새 삶을 꾸린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은 여자들의 입에서도, 남자들의 입에서도 서슴없이 나온다. 신입 시절 ‘돼지’라고 불리며 무시 당하던 상진이 자기는 돼지가 아닌 사람이고, 어엿한 광부이며, 막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항의하자 반장은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사람이고 싶으면 막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좋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럴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사람 목숨보다 보상금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돼지는 그들이 죽어서야 쓸모가 있다는 씁쓸한 자기비하다. 선량하고 평범하던,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결혼하여 이 마을에 도달한 사람들이 검은 탄 가루에 뒤덮이며 일어나는 변화들을 보면 ‘비참하다’는 말이 남용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불행이 닥쳐도 어떻게든 참고 살아내야 하고, 살기 위해 가족을 탄광에 밀어 넣어야 하며, 불합리에 맞서면 거세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광업소의 사람들의 삶은 그 무엇보다, 비참하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살아간다. 이들의 연대는 삶을 살아낼 만한 것으로 만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상진은 처음에는 배척당하고, 나중에는 어영부영 관리자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며 따돌림을 당하고, 다같이 용기를 낸 파업이 끝나자 망치로 손을 내려치겠다는 위협에 주동자를 말해버리지만, 절대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버려지지 않는다. 광부들은 검은 하늘이 검은 진주처럼 보이는, 건드리기만 해도 탄이 쏟아져 나오던 그런 운수 좋은 날 도리어 탄광에 갇힌다. 그들은 탄광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농담을 나누며 몰려오는 두려움을 이긴다. 보상금을 받으면 솜씨 좋은 우리 아내가 드디어 떡볶이 집을 열 수 있겠지, 나만 보면 방긋방긋 웃는 예쁜 딸이 학교를 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좋다며 함께 차를 마신 천사 같은 아가씨는 나를 완전히 잊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들은 탄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처절한 목소리로 이어진다. 차라리 죽어서 보상금이 낫지,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억척스런 아주머니들은 그들의 남편들이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으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것은 폐쇄된 탄광에서 들려오는 망령들의 목소리도, 하나님의 손발이라 믿으며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신의 손발도, 그 어떤 신적인 존재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로의 존재와 마음이었다. 그리고 결국 탄광에 갇힌 세 명의 동료를 구하는 것은 파업의 주동자로 붙잡혔다 가석방된 반장과 부상을 입고 마을을 떠나지 못한 또 다른 광부다.
<검은 입김의 신>은 실제로 탄광같이 비좁고 어두운 소극장에서 이런 짠하고 뜨뜻미지근한 연대의 소중함을 전혀 식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들의 불행은 마을을 뒤덮은 검은 탄 가루처럼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것이며, 그래서 절절하기보다는 체념적인 정서 속에 조용히 흐른다. 파업의 결과로 얻은 것은 월급제 대신 약간 오른 보상, 산소통 같은 안전조치 대신 목욕탕과 괴물 같은 공용 세탁기일 뿐인 이 마을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에게 가혹한 세상은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3억 년 전의 먼지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시커먼 탄광에서 인류에게 불을 전한 프로메테우스처럼 매일을 죽고 또다시 매일을 부활하며 모두에게 따뜻함을 전할 것이다.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굳은 믿음, 조금만 참자는 간절한 바람이 사랑하는 이를 위험한 현장으로 내모는 무서운 무기가 되는 이 마을에서, 희망은 사치스럽고 죄스럽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갈 것이다. 행복 뒤에는 반드시 불행이 뒤따르곤 하는 깊은 어둠의 존재에도 이들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함께 싸우고 서로를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에 기댄다면, 행복이 이어지지 않는대도 불행을 감히 두려워하지는 않을 수 있다.
*<검은 입김의 신>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의 <세월호 2017 기획>의 일부다. 7월 6일부터 8월 13일까지 총 여덟 개의 극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극을 쓴 고연옥은 작가의 글에서 ‘세월호 앞에 모든 이야기는 죽었다’고 밝힌다. <검은 입김의 신>은 표면적으로는 세월호와 멀리 떨어진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를 바라는 권력이 굳건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날을 경험한 우리 모두에게 세월호는 자꾸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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