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하는 문장: 모든 것들은 어떤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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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자체에 대해서 쓰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쓸 수 없을 거라는 아주 사적이고 내적인 저항을 느낀다. 독서의 질은 둘째 치고 다독만이 자랑이었던 과거의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책은 사르트르의 『구토』였다. 그 책에서 분열하는 의식이 뱉는 문장과 번복하는 문장이 “가능하다는” 것을(정당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1
이후 읽게 된 사르트르의 자전적 소설 『말』은 꼬마 사르트르가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들을 탐식하고 자신만의 글쓰기를 통해 언어로 세상을 붙잡아 두는 황홀경을 겪은 경험을 묘사한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기쁨이 넘쳐흘러서 금방 펜을 놓았다. 속임수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꼬불꼬불한 작은 글씨가 도깨비불과 같은 빛을 잃고 차츰차츰 탁하고 단단한 물질처럼 굳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허상의 실상화였다. 내가 호명만 하면 사자도 제2 제정 시대의 대장도 또 사막 지대의 베두인도 어김없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글자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사로잡혀 있게 될 운명이었다.”
나는 글로써 세상의 본질, 혹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까지도 포착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문장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언어로 세상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아름답고 치명적인 오해인지.
언어는 경험 이후에 그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덧붙여진다. 비록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묘사하고자 해도 기존의 경험에서 빌어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언어는 부차적이고 사후적이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과거를 다시 만들어내고, 현재는 언어에 의해 다시 쓰인다. 더군다나 이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이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라면, 언어가 세상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는 이따금 나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대로 기록으로 옮길 수 있는 기계를 공학계의 누군가가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는데, 그것은 기록하는 속도에 비해 생각은 너무 빨리 지나가기 때문이고, 나는 기록하는 동시에 망각하고 있어서 생각을 완벽하게 언어로 남겨두는 것을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펜을 쥐고 글자를 쓰는 속도는 언제나, 뒤처진다. 그것은 내가 펜을 다소 이상한 방식으로 움켜잡고 쓰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담배는 끝에서부터 안쪽으로 타들어간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진다.”
언어로 완벽히 전사될 예정이었던 생각과 기억은 문장으로 옮겨지는 사이 왜곡되고 만다. 그렇게 문장은 우리의 믿음을 배신한다.
▽
한유주의 글은 이러한 상황을 정면돌파하려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다. 한유주의 「허구 0」이라는 작품 전체는 동시 글쓰기에 대한 실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7월 1일에서부터 7월 17일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형태의 글로 실현된다.
▷ 오후 1시 10분, 클라스 애비뉴 역 승강장의 딱딱한 나무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한 쌍의 남녀가 벤치의 맞은편 끝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펜을 바꾸었다. 붉은 수성 펜이다. (중략)
3번가와 9번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서점으로 가고 있다. 글쓰기는 곧, 당분간, 중단된다.
로리머스트리트 역 맨해튼 방향 전광판에 씌어 있는 것:
Friday, July 4 (붉은 글씨)
1 : 25 P.M. (초록 글씨)
곧이어,
L. Manhattan 4 min.
L. Manhattan 7 min. (초록 글씨)
▷ 7월 6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 지미 헨드릭스를 들었다. 이 글은 어제의 노트에 어제의 펜으로 어제의 오른손을 사용해 쓰고 있다. (미래의 노트에, 미래의 펜으로, 미래의 오른손을 사용하여) 식탁 위에는 립스틱, 술을 산 영수증, 알약 상자, 열쇠고리와 열쇠뭉치, 충전기, 수첩, 모자, 단추, 요요, 술병, 담뱃갑, 양초가 있다. 어제의 물건들이다. 고무줄. 뉴욕매거진. 펜. 자리를 옮기겠다. 창가로 간다. 오전 9시 35분. 262 Taaffe Place 405호, 주차장으로 면한 창가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걸터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동시적 글쓰기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들.
한유주는 이 글에서 글을 쓰고 있는 상황과 환경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며, 심지어 이동 중에도, 야외에서도 기록은 계속된다. 이른바 서술시와 사건시의 간극을 최대한으로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실험을 통해 우리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을 포함하여, 글자들이 고정되는 순간, 모든 것들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순간을 글로 적는 동안에 시간은 흘러 버리고 사람들은 움직인다(적어도 숨이라도 쉬고 피부 아래에서는 피가 돌고). 우리는 지금 놓여 있는 사물이 어제도 그 자리에 놓여 있던 것이며 미래의 어느 순간에도 놓여 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모든 것들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떤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때문에 한유주는 어떤 대상, 행위, 상황에 단 하나의 언어를 부여하여 단정짓는 것을 포기한다.
「허구 0」이 수록된 소설집의 제목은 『얼음의 책』이다. 투명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상의 온도가 되기만 하면 빠르게 녹기 시작하는 책, 문장.
사진: Bryan Rodriguez on Unsplash
한유주에 따르면 “모든 대화는 매우 직설적이거나,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암시들로 충만해 있다.” 언어에서 하나의 의미만을 취하는 사람에게 모든 대화는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가질 뿐이지만 세상이, 감정이, 시간이 분리하거나 절단할 수 없는 연속체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대화가 무한한 의미로 가득할 것이다. 하나의 언어는 그것이 가리키는 부분과 연결된 전체로 확장될 테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간을 연속체로 이해한다면 양립할 수 없는 상태들이 사실은 공존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다시 녹는 것을 하나의 시간 축 위에서 일어나는 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항대립은 성립하지 않고,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에 고심하지만, 모든 단어들은 언제나 적절하지 않거나, 그래,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한유주의 문장들에는 긍정과 부정이,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혼재한다.
▷ 다음 날이 되었다. 혹은, 다음 날이 된다.
▷ 오늘은 너무 걸었다. 아니, 오늘은 충분히 걸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 “늦은, 빠른, 빠르게, 더 빨리, 느리게, 더욱 느리게, 따위의 부사들에 대해 생각한다. 크레셴도, 데크레셴도. 그 어떤 부사도 정확한 시간을, 혹은 시각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시제의 혼재, 긍정과 부정의 혼재. 오늘 누군가가 약 6000보를 걸었다고 할 때 이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부사가 가장 ‘적절한’ 것일까?
결국 모든 “설명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 한유주가 이 지난한 실험을 통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사전을 하나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한때 이 글의 제목을 「유사 감정어 사전」으로 하려고도 했다(금방 단념했지만).
“내가, 당신이, 무슨 말인가를 할 수 있다면, 그리움에 대해 아니, -움의 형태로 끝나는 모든 감정 명사들에 대해, 말쑥하고도 완벽한 사전을, 만들 수 있다면, 혹여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더라도, 그 말들의 기원과 변천사에 대해,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면.”
모든 단어들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는 사전. 그리고 나는 ▽에서 내 문장을 사용하기보다 최대한 많이 인용하고 다시 쓰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허구 0」을 이 글의 잠정적인 ‘사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허구 0」의 실험대로라면 우리는 아예 쓰지 않거나 모든 것을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쪽이든 불가능하다. 이 글의 제목이 결국 사전이 아니라 「허구 0」이 된 이유도 수필이나 관찰 기록에 더 가까운 이 글이 결국에는 소설로서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즉 머릿속의 생각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적확하고 정확한 언어로 기록하는 동시 글쓰기는 허구이다(왜냐하면 불가능하니까).2 우리의 회의처럼, 한유주는 써 나가는 중에도 번번이 좌절을 겪는다.
▷ 이 글에서 가장 큰 사건은 점진적 실패가 될 것이다.
▷ 이런 것에 대해 묘사, 혹은 기술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중략) 세상에 존재하는 페이지들을 모두 소진하게 될 때까지,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 더 이상 쓰는 것이 무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실패의 예감과 좌절의 흔적.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쓰는 행위를 그만두지는 않는다. 이 지독한 행위는 “부질없는 짓이지만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 혹여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쓰는 행위를 사랑하지 않을, 혹은 계속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부질없는 혹은 부질없지 않은 일들을 하며 과제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듯이, 부질없는 짓으로 삶을 가득 채우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닐 테니까.3 아무튼 한유주의 실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을 언어로 포착하고 붙잡아 두는 일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고, 하지만 누군가(쓰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이들, 문장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 말하자면 이미 나를 배신해버린, 그리고 끊임없이 배신하고 있는 문장들이라도 붙잡고서 글을 쓸 수바에 없는 이들.)는 본인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써 나간다. 우리 모두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가듯이 말이다. 이 글도 그 무한한 실패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서툴고 인내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쓴다, 아니 썼다 그리고 쓸 것이다(다시는 이런 글은 쓰지 말아야지 매번 다짐하면서).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고(태고의 시간에서부터,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까지)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아니야, 일종의 저항이 아니다) 한 줌의 믿음과 한 줌의 불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언어로 생각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날이 올까? 그런 기계가 만들어질까? 하지만 그 기계가 사용하는 언어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면? … 믿으면서도 믿지 않기, 쓰면서도 쓰지 않기, 명명하면서도 명명하지 않기. 그러니 “어떠한 문장도 마지막 문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이것은 『구토』에 대한 거대한 오독일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많은 글들을 아주 개인적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밝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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