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ystal Castles I에서 Amnesty(I)까지
콩브레과자점
나는 2016년 이후로 Crystal Castles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17년 겨울, 일렉트로니카 그룹 Crystal Castles(이하 CC)의 전(前)보컬 Alice Glass가 현(現)프로듀서 Ethan Kath의 성적, 예술적 착취를 폭로했다 1. 2 새로운 보컬 Edith Frances에 익숙해져 팬들의 기억 속 저편으로 잊힌 Alice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진행 중이던 CC의 투어는 중단되었고 현재는 Alice와 Ethan 모두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Crystal Castles I에서 Amnesty(I)까지
2014년 Alice가 CC를 나간 뒤 CC는 휴식기를 가졌다. 많은 팬들은 ‘Alice 향수병’에 걸려 그녀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Alice는 응답하지 않았고 CC가 2015년 4월 Edith와 함께 돌아오자 팬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들의 ‘고스 돌(Goth doll)’ Alice를 부르짖는 자들과 Edith의 등장을 긍정하는 이들.
나는 전자에 해당했다. CC(사실상 Alice)가 가진 소위 ‘B급 감성’, (II)의 ‘Baptism’ 이후 Alice가 쌓아 올린 CC의 보컬 이미지(단발 생머리, 눈 전체를 뒤덮은 까만 아이섀도우, 아무렇게나 발라 입술이 어디인지 구분되지 않는 스칼렛 립스틱)가 붕괴되었다.
십대의 나는 스스로를 Emo(포스트하드코어 음악을 즐겨 듣고, 밴드티셔츠를 입고, Body Modification을 하는 사람-대체로 십대-을 일컫는 말)로 정체화했다. 정체화했다는 말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런 카테고리로 스스로가 분류되기를 희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Alice는 전형적인 Emo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내게는 굉장히 실험적이고 ‘멋진[쿨한]’ Emo로 비춰졌다.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B급 감성’은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대체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Baptism에서의 Alice Glass
CC는 Amnesty(I)를 발표한 이후 묘한 길을 걷고 있다. 변화한 지점은 두 개. Alice에서 Edith로의 변화, 그리고 음악의 변화이다.
음악그룹의 멤버 중 보컬이 바뀌었을 때, 대체로 팬들은 가장 큰 변화를 느낀다. 장르가 바뀌지 않더라도 그 그룹이 음악으로 구현하는 분위기와 에너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보컬이 아닌 다른 파트가 달라져도 음악에는 차이가 생긴다. 하지만 우리의 포커스는 대체로 보컬에게 향하지 않는가? *아무리 우리가 다른 파트에 주목한다고 해도 우리 바로 앞에서(라이브가 아닌 이상 앞은 아니고 몇 만 킬로미터 떨어진 스튜디오일 테지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주목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보컬리스트가 세 번 바뀐 심포닉메탈밴드 Nightwish
어느 순간 Alice가 Edith로 대체되었다. 나는 Edith에게서 Alice와의 유사성을 찾기도 하고, 그녀만의 특징도 보았다. 처음 Frail를 보고 느낀 ‘Alice 향수병’은 Amnesty(I)을 들은 후 완전히 사라졌다. Edith 그 자체를 보다 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연 중 Edith Frances
Edith는 CC의 새로운 보컬 이미지를 쌓아올렸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아무렇게나 자른 곱슬머리, 아무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입술만 칠한 얼굴, 공연 중 스스로에게 물 끼얹기. Alice가 (고스)인형(Doll)으로 불렸던 것과 다르게 Edith는 아무런 별칭이 없다. 보컬로 활동한 기간이 짧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Edith는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어떤’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Edith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러운 그녀의 공연 중 모습과 CC가 구현하는 인공적인 사운드는 양극단의 조화를 이루어냈다.
공연 중 Alice Glass와 Edith Frances
한편 Edith의 모습에서 Alice를 찾게되기도 한다. 2017년 5월 CC의 내한 공연에서 Edith에게서 예전 CC 보컬의 흔적을 찾는 필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이크를 온몸에 휘감고, 마이크스탠드를 들고 뛰어다니기. Alice에게서 보아왔던 것들이었다. 아,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도.
2017년 5월, 무브홀 옆 타코벨에서 만난 CC
그러나 공통점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차이는 음악의 변화와 연결된다. CC의 음악은 이전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직전 앨범인 III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났던 위치하우스(Witch house) 사운드는 줄어들고 Fleece, Enth 같은 트랙에서 드러나는 인더스트리얼/테크노 사운드가 지배적이게 되었다. (흡사 Gesaffelstein을 떠오르게 한다 3) II의 Celestica와 Suffocation, III의 Transgender 트랙에서의 앰비언트 사운드는 여전히 나타나지만 보컬의 토크박스(이펙터를 통해 보컬 사운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 사용이 거의 사라졌다. 4 토크박스를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Edith의 목소리는 날것 그대로 출력된다. 보컬 샘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Amnesty(I)의 강력한 에너지를 뒷받침하지만 CC는 첫 정규 앨범 이후로 보컬 샘플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것이 꼭 Edith로 인한 변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CC의 음악이 가진 ‘힘’의 변화에는 공연에서 보이는 Edith 자체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Alice가 공연 도중 관객밀착적으로 팬들과 접촉한 것에 반해 Edith는 ‘보컬 존’이라도 있는 듯 그 자리를 지킨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수직으로 뛰며 에너지를 공연장 전체로 확산시킨다. Alice의 퍼포먼스가 관객들과 엉겨 같은 분위기에 녹아들어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Edith는 한 자리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CC 머천다이스
Edith Frances Announcement
강한 힘의 발산은 CC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의 앨범이 보내는 메시지와도 깊게 연관된다. 새로운 앨범의 등장과 함께 CC는 인권운동(아동,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죄수 등의 인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보였고 그들의 머천다이스에도 ‘LGBTQ RIGHTS ARE HUMAN RIGHTS’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또한 앨범명인 Amnesty에서도 드러나듯, 그들이 음악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국제 앰네스티에 기부된다. 5
한편 Amnesty에 (I)를 붙인 것이 흥미롭다. 별칭 I로 불리는 Crystal Castles를 암묵적으로 부인해버린 것이다. ‘부인’이라는 조금 강한 단어를 쓰기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Alice가 아닌 Edith와 함께 내는 첫 앨범을 I로 붙인 것, 이것은 그들이 이전에 Crystal Castles라는 밴드 이름으로 그들의 정규 앨범의 시탄을 발사한 것과는 다른 새로운 ‘시작’을 암시한다.
Alice의 #metoo 선언 이후 현재의 Crystal Castles에 대한 생각
Alice가 지난해 Ethan에 대한 #metoo 선언을 한 후 나는 혼란스러웠다. CC의 Crystal Castles에 수록된 Alice Practice가 Alice의 음악적 역량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Alice가 보컬일 당시 많은 사람들이 ‘Coolest Icon’이라는 이름 하에 CC 음악의 우울함에 열광했다. 그게 Alice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고? 내가 열광한 대상의 실체가 그런 것이었는가? CC가 어떤 새로운 입장을 가지고 다시 등장할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특히나 Alice)가 억울하게 될 결과는 아니었으면 한다. 결과가 명백해진 이후 팬들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다.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대립할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CC는 내게 ‘십대 전반을 함께 보낸 유리성’으로 취급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의 음악만 즐긴 게 아니라, 그들이 가수로서 밟아온 역사에도 열광했다. (이때, 역사의 서술자는 나다. 내가 성장하면서 바라본 그들의 발자취이기에.) 이 역사는 음악적 행보에만 한정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삶, 이미지를 포괄한다. Alice의 #metoo 선언이 진실로 드러난다면, 그들의 역사 자체가 재건될 것이다. Edith가 선 공연의 체험도 수정되어 기억될 것이다. 그들이 지어놓은 유리성에 나도 이끌려 들어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와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 이전에 유리성은 깨져버리고 모래만 남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과거에 내가 유리성 속에서 보낸 시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모래로 사라져버린 유리성을 보고 유감스러워 하는 것은 현재, 혹은 미래의 몫이다. 그들과 함께한 기억은 늘 내 안에 품어져 있다.
영화 <타이타닉> 속 푸른 보석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푸른 보석은 결국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의 추억이었다.
모래성
KEROSENE by Crystal Castles: I’ll protect you from all the things I’ve seen. 십대였던 내가 믿었던 유리성의 주문이었다.
- Alice Glass Statement: http://www.alice-glass.com/cc/ [본문으로]
- Alice Glass Instagram Evidences: https://www.instagram.com/p/Ba-dHxDlxo9/?taken-by=_alice_glass [본문으로]
- 참고: Destinations by Gesaffelstein (https://youtu.be/uGGcLJBkqHM) [본문으로]
- 참고: Crystal Castles Fleece/Empathy live in Saint Petersberg (https://www.youtube.com/watch?v=Y6fmPJ54tZA) [본문으로]
- 전부인지 일부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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