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대중·문화·예술지 <PEEP>

푸른사막 아아루- 새로운 마법소녀의 이야기

시몬느

 내가 엄마말을 아주 잘 듣던 8살 때, 태권도 학원을 빼먹는 최초의 일탈을 시도하면서까지 기필코 본방사수했던 만화들이 있다. 인어들이 노래를 부르며 악당을 퇴치하는 <피치피치핏치>나, 윙크하면서 사람들의 ‘하트’를 뺏어가던 꼬마마녀가 주인공인 <슈가슈가룬>, 고양이꼬리를 단 소녀가 외계인과 맞서 싸우던 <베리베리 뮤우뮤우> 등. 만화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나랑 비슷하게 소심하고 서투르게 보이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아주 반짝이는 모습으로 변신해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무엇보다 마법소녀들이 끊임없이 외치던 ‘사랑’ ‘희망’ ‘우정’ 과 같은 긍정적인 구호, 혹은 가치들은 만화를 볼 때 내가 그런 아름다운 말들 속에서 영원히 살 것만 같은, 혹은 살아야만 할 것 같은 환상을 빌려주곤 했다. 물론 나이가 들고 다른 관심사들이 생겨나면서 마법소녀들로부턴 조금 멀어졌지만, 그때부터 판타지물 여자 주인공에 대한 막연한 향수는 계속 내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푸른 사막 아아루>는 판타지 기근을 겪고 있는 웹툰계에 얼마 안되는 정통판타지 작품이다. 제목에 나오는 ‘아아루’는 <푸른사막 아아루>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배경으로, 원래 푸른 별이었으나 지금은 저주에 걸려 사막으로 변해버린 불운의 땅이다. 황폐화되기 전 태초의 아아루에 물과 생명을 선사한 물의 정령의 힘은 아아루 왕녀의 피를 타고 이어져왔다. 주인공 ‘소티스’는 바로 그 왕녀 중 하나로, 물을 샘솟게 하는 주술능력을 타고났어야 했었다. 하지만 쌍둥이 언니 ‘이시스’ 에게로만 그 능력이 쏠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웹툰은 주인공 소티스가 역모의 모함을 받아 쫓기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소티스는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이다. 당차고, 착하고, 정의로운 마법소녀. 왕녀의 혈통을 타고나서 고귀한 캐릭터. 왕녀로서 아아루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어서 모험을 떠날 때 사람들이 위험해질 때마다 특별하게 강한 힘으로 그들을 구해내고 만다. 또 아아루의 네 개의 부족 중 악의 중심인 ‘마아트’ 족이 흑주술을 통해 오염시킨 정령들을 마주할 때에도 그들을 무서워하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치유하려 노력한다. 

우리는 마음 한 구석에서 순수함을 꿈꿔도, 그 순수함이 이 세상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것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소티스의 순수함에는 힘이 있다. 순수하게 아아루를 사랑하는 마음, 모든 존재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진실된 마음은 소티스의 왕녀로서의 운명과 결합하여 ‘악함’이 개입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만든다.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적인 주인공’의 서사가 인기를 끄는 와중, 순수한 사명의식과 강인한 마음으로 괜히 일을 꼬는 일 없이 해결해버리는 소티스라는 캐릭터는 어쩐지 통쾌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런 소티스의 한결같은 캐릭터가 요즘은 조금씩 변주되고 있다. (스포주의) 소티스가 한계를 맞닥뜨릴 때 그의 전생인 ‘네이트’가 소티스의 몸을 빌려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소티스가 네이트로 변신하는 장면들은 드라마로 치면 아마 동시간 최고 시청률을 찍을 수도 있을 만큼 강렬하고 극적이다. 그래서인지 웹툰에서도 항상 마지막 컷에 나오는 것 같다. 독자들은 그저 궁금해 미칠 수밖에… 

한없이 순수하고 맑은 소티스 옆에는 이시스가 있다. 이시스는 쌍둥이 동생 소티스 대신 왕위에 오른 아아루의 지도자이다. 소티스와는 다르게 이시스는 조용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이다. 처음에는 신비주의를 고수했지만, 최근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시스의 강인한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시스는 소티스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소티스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소티스의 존재는 이시스를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이시스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담담하고 비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되려 이시스가 겉으로 보여주는 여유로운 모습 속에 감춰져 있는 슬픈 운명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나아가는 이시스를 보면 독자는 소티스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소티스보다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시스를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시스의 분량은 소티스에 비해 적은 분량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시스의 운명을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건 호위 무사 ‘히뎁트’ 와의 러브라인이다. 이시스에게 히뎁트는 자신을 어린시절부터 지켜온 소중한 사람이자,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이 유일하게, 온전히 자신만의 의지로 선택한 한 사람이다. 히뎁트와 이시스 모두 인지하고 있는, 이시스의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비극이 둘의 관계를 아프게 만들지만 둘은 그래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는다. 이시스는 자신의 죽음을 걸고 푸르름을 되찾은 아아루에서 살아갈 히뎁트의 모습을 꿈꾸며, 히뎁트는 이시스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항상 옆에서 그를 돌봐 준다.  

소티스의 사랑은 이렇게 절절한 이시스의 사랑과는 결이 조금은 다르다. 소티스가 사랑하는 ‘카라크’ 라는 캐릭터는 많은 학원물 남주가 그렇듯이 틱틱거리면서 소티스에게 접근한다. 싸우다가 정드는 건 필연적인걸까? 카라크가 소티스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건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되어있던 것일 지도 모른다. 둘은 모험을 겪으면서 급격하게 가까워지게 되는데, 작정하고 슬픈 이시스와 히뎁트의 사랑과는 달리 이 둘은 독자들의 설렘지수를 급격하게 상승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달꽃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설렘 씬들(주로 키스신)은 어찌보면 뻔한 구도인데 뻔한 걸 알면서도 그냥 설렌다. 

 카라크라는 캐릭터 자체에도 소티스의 전생과 마아트족의 과거에 관련된 많은 사연이 있지만 (스포), 카라크에게는 유독 ‘미인’ ‘아름다운’ 이라는 외모에 관한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그만큼 카라크는 예쁘다. 예쁘고 잘 꾸며져있는 남자주인공은 푸른사막 아아루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주인공은 외모가 아닌 행동에 대한 수식어가 붙고, 남주인공에게는 외모에 관한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이 뿐만 아니라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 캐릭터가 대부분 여성이며, 여주인공이 위험에 빠진 남주인공을 ‘힘’과 ‘능력’으로 구해주는 등, 기존의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관계를 아주 자연스럽게 극 속에서 드러내 주곤 한다. 

 이런 면은 소티스나 카라크의 관계 뿐만 아니라 최근에 자주 나오는 캐릭터인 ‘자냑’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냑은 마아트 족의 지주로서, 피에 미친 순수한 악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심심하면 죽이고, 거슬리면 베어버리고, 왕녀인 소티스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확실한 악이다. 그럼에도 자냑이 어딘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가 악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자냑은 77화에서 소티스를 때려눕힌 것에 분노하는 타히르 (소티스를 짝사랑하는 의술사)에게 키스한다. 사랑은 부질없는 것이라 말함과 동시에 타히르에게 키스하는 자냑의 모습은 그야말로 욕망과 본능적 감각에 충실한 그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냑의 기습키스에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는 타히르의 모습은 그간 미디어에서 되풀이되어왔던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의 위계를 보란듯이 비튼다. 차후 행보가 기대되는 인물이다.

이 밖에도 아아루에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다. 방금 언급한 타히르, 퉁퉁이, 누르, 카나스를 포함한 아아루의 귀족들과 소티스의 모험 도중에 나오는 초록 날개 회원들과 정령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아아루의 세계관을 완성시킨다.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하는 판타지 대서사가 인기가 없어지는 요즘 웹툰 시장에서 푸른 사막 아아루는 정통 판타지의 맥을 계승하면서,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여성서사를 도입해 신선한 이야기와 아름다운 볼거리를 함께 보여준다. 푸른 사막 아아루 속 소티스와 이시스는, 어렸을 때의 즐겨봤던 마법소녀가 성장한 나와 같이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분을 들게 한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아아루의 독자가 한명이라도 더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지금 당장 네이버 수요 웹툰을 클릭해 <푸른 사막 아아루>를 열어보기를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