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d Castaway: 나의 팟캐스트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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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사람의 말소리가 없는 순간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시작은 늘 그렇듯 미미한 것이었다. 초등학생 때 우리 집과 학교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나에게 등굣길이라는 것은 언제나 출근하는 엄마의 차 안이었다. 그 당시 엄마는 <황정민의 FM 대행진>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즐겨 들었다. 나는 황정민 아나운서가 중간중간에 꽁트를 하면서 내는 이상한 목소리를 좋아했고, 엄마는 김원장 기자, 정재승 과학자 등 유명한 전문가들이 나와 다양한 지식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코너를 좋아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도 후자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학교 앞에 도착했는데도 설명하던 것을 마저 듣겠다고 떼를 써서 엄마는 종종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했다.
중학생 때도 초등학교 시절의 영향인지 라디오를 듣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부를 할 때면 책상 왼편에 놓인 노란색 라디오를 항상 켜놓았다. 완자, 오투 같은 문제집을 풀거나 학원 숙제를 하는 것은 너무 지루한 일이었고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하자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음원 사이트가 대중화되고 MP3에 노래를 다운받는 게 가능했던 시기 같은데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연예인들의 왁자지껄 웃긴 이야기, 청취자들이 보내는 다양한 사연들, 때로는 유명한 가수들이 나와 신곡 홍보를 하면서 재롱을 피우는 걸 듣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진짜 재밌는 방송은 왜 항상 12시부터 시작하는지 참.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거의 매일 새벽 2시까지 라디오를 듣고 잤다. 아마 그 당시에는 얄팍한 감수성에 취해 새벽까지 깨어있는 내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다 듣지 못하더라도 항상 켜놓고 잠이 들어서, 다음날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듣는 소리도 라디오 소리였다.
고등학생 때는 누군들 아니겠나 싶지만 공부를 정말 싫어했다. 기숙사 생활을 한 덕분에 부모님과는 떨어져 지낼 수 있어서 정말이지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았다. 물론 그래서 수능을 한 번 더 봐야 했다. 이런 불량한 학생이었던 만큼 자율학습 시간은 정말 고역이었다. 많은 경우 엎드려 잤고, 깨어있을 때는 귀에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팟캐스트를 처음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기자인 김혜리 씨가 라디오에서 영화 관련 프로그램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때 찾아 들은 게 <FM 음악도시 성시경입니다>였다. 그 당시 라디오는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시간에 라디오 앞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한계를 벗어나 노래처럼 다운로드를 받아서 마음껏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떨어지는 청취자 수도 늘리고, 생방을 들었던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었던 방송을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기획이었다. 나는 글로만 읽던 김혜리 씨의 목소리를 접하기 위해 팟캐스트라는 신문물과 첫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김혜리 씨는 금요일마다 ‘영화, 사람을 만나다’라는 코너의 게스트로 나왔다. 매주 영화 하나를 선정해서 그 줄거리와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해주었다. 특히 영화의 줄거리를 듣는 것이 참 좋았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결말 직전까지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세심한 묘사를 곁들어서 말해주었는데 영화 하나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토요일 아침에 금요일 방송분이 언제 올라오나 조급해하며 노트북 앞에 앉아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코너 외에도 문천식 씨가 나와서 웃긴 사연을 기깔나게 읽어주었던 ‘나 문천식이야’, 음식 전문가 노중훈, 이현주 씨가 테마에 따라 각자 맛집을 추천해주고 그 승자를 가리던 ‘대결, 음식도시’ 등 거의 모든 코너에 애정을 갖고 들었다. 다양한 성격의 게스트 사이에서 참 맛깔나게 진행하던 성시경 씨의 능력도 언제나 감탄의 대상이었다. <FM 음악도시 성시경입니다>는 내가 챙겨 들었던 마지막 라디오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로 남아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재수생 시절에는 매일 수능 기출 문제와 학원에서 쏟아지는 숙제들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내 생애 가장 많이 울었던 해이다. 나는 아픈 척 연기를 참 잘해서 학원의 엄중한 출석 시스템을 뚫고 부모님 몰래 자주 조퇴를 했다. 그런 방황 속에서도 내게 힘이 되어준 건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였다. 다소 야하게 보이는 타이틀과 달리 나름 진지하다면 진지한 프로그램이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가 본인이 직접 선정한 문학, 비문학 책을 두고 소설가 김중혁 씨와 거의 2시간가량을 이야기 나누는 방송이었다. 다루는 책들은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의 것이 많았고, 평소의 나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법한 두껍고 딱딱한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마치 그 책을 읽고 함께 수다를 떠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처량하고 희망 없던 재수생에게 마치 지적인 대학생이 된 것만 같은 만족감을 들게 해주었던 것 같다. 당시 다녔던 학원에서는 영어 듣기 공부를 하는 게 아니면 자습 시간에 이어폰도 꽂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영어 문제집을 펴놓고 몰래 팟캐스트를 들었다. ‘남들은 모두 수능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나는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대한 대화를 듣고 있다’는 유치한 스릴감을 좋아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동안 팟캐스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재수한 새내기에게 그것 말고도 즐거운 건 충분했다. 하지만 대학 생활도 결국 비슷비슷한 것의 반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때 다시 팟캐스트로 손을 뻗었다. 세상사 다양한 관심사와 그 분야의 팬들이 자신의 사랑을 뽐내겠다고 방송까지 만드는 곳이 팟캐스트라는 세계다. 여기는 문자 그대로 다도해다. 제대로 된 섬을 찾아 도착만 잘하면 한동안 내 일상의 즐거움을 보장해주는 낙원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하게 된 곳이 <오지은 정바비의 어쩌다 日本語>였다. 이 팟캐스트는 뮤지션 오지은, 정바비 씨가 일본 음악에 대한 애정을 표출할 길이 없어 자체적으로 만든 방송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정바비 씨가 만든 노래와 가사를 너무 좋아했고, 팬심으로 이런저런 웹 서핑을 하던 중 우연히 이 방송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타이틀만 봤을 땐 일본 음악 팟캐스트인지도 몰랐다. 두 뮤지션은 일본에도 좋은 음악과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에 쉽게 접근할 길이 없다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에게 일본 대중음악의 매력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덕력을 뽐내며, 소수의 일본 음악 팬덤으로부터는 소소한 반향을 일으켜보고자 슬며시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오지은 정바비의 어쩌다 日本語>만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소개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온전히 담겨있었다는 점이다. 오지은, 정바비 씨는 사비로 저작권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방송에 노래들을 집어넣었다. 국내에서는 일본 음악을 접할 방법이 거의 없어서 일반 청취자들로서는 따로 찾아 듣는 게 힘들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일본 음악의 세계를 아주 얕지만,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이 팟캐스트에서 다뤄진 아티스트로는 마츠다 세이코, 나카모리 아키나, Pizzicato Five, Aiko, Southern All Stars, Spitz, AKB48, 노나 리브스, 히로스에 료코 등 시기나 장르의 면에서 무척 다양했다. 이 외에도 특정한 주제를 정해서 거기에 맞춤 선곡으로 구성한 특집들도 있었는데, ‘큐슈 지방 출신 아티스트’, ‘발렌타인 데이에 어울리는 사랑 노래’, ‘작사가 마츠모토 타카시가 참여한 노래 베스트’ 등이 있었다. 방송을 진행한 두 뮤지션의 매력도 큰 몫을 했다. TV에 나오지 않는 인디 뮤지션이라 평소의 말투나 성격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는데 까불 까불거리며 농담을 치다가도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을 해주는 덕분에 두 사람의 수다를 듣는 재미가 상당했다. 방송의 인기는 생각보다 높아서 오프라인 공연도 이뤄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 팟캐스트는 언제부턴가 특별한 공지 없이 업로드가 중단되었고, 기존 파일들도 다 삭제되었다. 저작권 관련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이 싸웠을 수도 있고 이유는 잘 모르겠다. 두 뮤지션이 소개해주는 일본 음악이 그쪽 문화로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후로는 일본 음악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 이 당시의 경험이 종종 그립고 다시 시작해주었으면 할 따름이다.
이제 다시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래서 또 팟캐스트를 뒤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새롭게 도달한 곳은 미국 프로 스포츠라는 신대륙이었다. 첫 시작은 <농구토크 버저비터>라는 방송이었다. 이 팟캐스트는 NBA에 대한 팟캐스트였는데, 처음 듣기 시작할 때 내가 아는 미국 농구선수는 은퇴한 지 오래인 마이클 조던뿐이었다. 그럼에도 세 남자가 매주 2시간 30분가량 농구 얘기만 하는 이 방송에 빠지게 되었다. 그 구성은 한 주 동안 있었던 NBA 소식을 알려주는 ‘이슈 Up & Down’, 그 주의 주요 경기에 대한 리뷰인 ‘핫 매치 Replay’, 다음 주에 예정된 특정 경기에 대한 프리뷰인 ‘위클리 Pick & View’, NBA를 더욱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여러 지식을 알려주는 ‘NBA 스쿨’로 이뤄졌다. 나는 진행자들이 말하는 선수가 누구인지도, 사용하는 농구 용어가 무슨 뜻인지도 전혀 몰랐지만 그래도 열심히 들었다. 내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대상에 대해,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품고 있는 열렬한 사랑을 내뿜으면서 나누는 열정적인 수다를 듣는 게 좋았다. 그런 에너지 자체가 내게 큰 매력이었고 그게 필요했던 것 같다. 그 장르가 스포츠였기 때문에 예술에 대해 말할 때와는 사용하는 용어부터 방송하는 진행자들의 에너지까지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고, 그래서 더욱 재미있었다. 그 이후엔 NBA의 매력에 빠져버렸고, 그것을 넘어 스포츠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NBA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리그로 손을 뻗쳐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NFL(미식축구)과 NHL(아이스하키)에도 손을 댔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새로운 경기와 관련 뉴스를 따라잡는데 많은 시간을 날리고 있으며 이 각각의 리그에 대한 팟캐스트도 듣기 시작했다. 요즘 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렇게 여러 팟캐스트들 사이에서 정처 없이 표류해온 끝에 나는 이제 무언가를 듣고 있어야만 마음이 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내 자취방에는 언제나 팟캐스트가 틀어져 있다. 샤워할 때에도, 설거지할 때도, 학교 가는 길에서도, 특별히 시간이 떴을 때도, 밥을 먹을 때에도,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도 핸드폰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오고 있다. 새로 업로드된 에피소드는 처음 듣는 내용이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해서 듣는 매력이 있고, 이미 들었던 걸 다시 들을 땐 귀 기울일 필요 없이 편안하게 흘려보낼 수 있어서 좋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누군가의 대화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게 좋았다. 팟캐스트를 듣다 보니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과 나 혼자만의 묘한 친근감도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방송 초반에 인트로 격으로 시작하는 진행자끼리의 근황 토크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고 재미있다. 이렇게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그 사람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이제는 사람의 말소리를 듣는 행위 자체가 내 일상의 큰 일부가 되고 말았다. 중독이라면 중독이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다 쓰고 나니 이 정도로 사람 말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냥 내가 좀 외롭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찌할 바 모르고 그냥 팟캐스트를 듣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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