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간 아름다운 세계

채혜선 세 번째 개인전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 숲> 전시 리뷰

시나인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만으로 가득하다면 누구나 ‘행복하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자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은 있게 마련이니까. 따라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삶 가운데 완벽한 만족을 느끼는 세계, ‘유토피아’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미완의 존재다. 서로의 꿈이 각자에 의해 무너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중 영생에 대한 꿈은 인류 보편적이라고 하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온전한 행복을 경험할 수 없기에 사람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주어진 세상에 맞춘 반쪽자리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순간이라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실제 세계가 아닌 꿈꾸는 세계를 우리는 소설, 그림, 영화 등에서 간접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러한 예술 작품은 대개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러한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편안하면서도 기분 좋은 ‘꿈’을 선사한다. 이는 충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잠깐의 안식과 여유로 위로의 시간이 되며 또는 그런 세상에의 동경과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용기를 응원해준다. 하지만 그 꿈은 이따금 현실 감각을 둔하게 만들거나 현실과 이상의 경계가 모호하게 만들어 형용할 수 없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만들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영생의 꿈을 표현한 회화가 있다. 바로 ‘십장생도(十長生圖)’다. 십장생도는 한국인의 토속 자연물 숭배 사상을 기반으로 중국의 신선 사상을 수용하여 16세기 궁중 회화로 제작 사용되었으며, 19세기에는 민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십장생도는 장수를 상징하는 장생물(長生物)을 그린 것이며, 주로 병풍으로 제작되어 방안을 장식하였다. 십장생은 오래도록 지속되거나 생명이 유지된다고 믿어지는 열 가지의 자연물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해, 구름, 산, 물, 바위,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불로초를 꼽지만 유동적이다. 또한 동방삭이 훔쳐간 신선 세계의 천도복숭아와 대나무, 영지(靈芝)도 함께 그려지면서 열 가지를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십장생도는 산, 바위, 소나무, 구름, 바다 등으로 배경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사이를 학, 사슴, 거북 등이 노니는 선경(仙境)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불로장생과 태평성대의 염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비현실의 이상 세계로 일종의 유토피아다. 8폭 또는 10폭 병풍의 장대한 화면에 장생을 상징하는 자연물들이 화려한 채색으로 위풍당당하게 그려진 환상의 공간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는 깊은 숲 속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만, 조선인이 꿈꾸었던 상상 속의 선계가 분명하고 그러한 세계의 논리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물의 크기나 원근의 왜곡, 또는 과장까지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완결된 불로장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 숲>전시에 소개된 19점의 회화는 소재의 종류나 표현이 조선시대와 달라졌지만, 맑은 색채로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아늑한 풍경을 배경으로 노니는 장면을 그린 채혜선 작가의 작품들로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바람과 이상 세계가 현대판 십장생도처럼 펼쳐졌다. 평면적인 화면과 선명하지만 투명한 색채감각은 현대화된 민화가 어떤 모습인지 알려주며, 그 세계 안에 존재하는 납작하고 만화처럼 귀여움이나 사랑스러움을 극대화시킨 ‘동물 친구들’은 많은 사람이 채혜선 작가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든다. 조선시대 십장생도에서의 동물은 장생으로서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위엄 있고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이라면, 채혜선 작품에서의 동물은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을 드러내며 보는 이에게 편안하게 다가선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발걸음을 멈춘 채 응시한 작품들에서는 작가와 함께 그녀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를 노닐고 있다는 착각을 경험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그림의 배경은 자연 속 골프장이다. 그래서 들판이 주로 그려진 그림들이 많은데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연못을 그린 풍경에서 시선이 멈추었다(도2).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구성과 특유의 민화적 색채감각으로 인해 감상자들이 저절로 ‘예쁘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게 만드는 그림이다. 거대한 초록빛 언덕들은 일렁이는 자태를 뽐내며 그 안에 골프장을 품고 있다. 언덕을 올라가는 골프 카트는 굉장히 작게 그려지고, 주변에서 노니는 오리들은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져 실제와는 달리 크기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언덕 아래 넓게 펼쳐진 연못의 연꽃과 연잎들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그 사이를 하얀 강아지(이하 룽키)(각-하얀 강아지는 채혜선 작가의 반려견이며 이름은 ‘룽키’라고 한다. 작가와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의미에서 등장하는 도상이라고 짐작된다.)와 오리들이 헤엄치며 연못에 빠진 골프공을 꺼내기 위해 발을 들여놓은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그 옆으로 머리를 연못에 처박고 뒤집어져 있는 오리의 모습은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했다.

  자연스럽게 언덕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연못을 배회하던 내 시선은 골프 홀 주변에 머물렀다. 그곳엔 사람 대신 주둥이로 골프공을 물고 있는 오리 한 마리가 있을 뿐 아주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다만 오리가 자기 부리만한 골프공을 물고 있는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고, 오리가 골프를 하고 있다는 유아적 상상보다는 인간으로 인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새들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겹쳐보였다. 때문에 이 그림을 바라보면 볼수록 왠지 모를 불쾌함 내지는 의아함이 생겨났다.

  “사람만한 오리라고 한들, 정말 ‘골프공’이 오리에게도 장난감이 될 수 있을까.”

 

  이유 모를 불쾌한 의문을 뒤로 한 채 몇 걸음 옮기자, 또 다른 환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꽃이 가득 핀 동글동글한 푸른색의 거대한 선인장이 등장하는 그림이었다(도3). 작가는 맑지만 쨍하지 않은 색감을 주로 사용하여 마치 숲 속에서 있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선사한다. 이때 노란색, 빨간색 꽃들이 예쁘게 핀 선인장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연의 푸른빛이 감도는 다른 작품과 다르게 따뜻하고 환상적인 노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인장 주변을 보게 되면 선인장 꽃보다도 작은 사람들은 골프채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고,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룽키, 청설모, 캥거루는 흙더미 혹은 선인장 뒤에 숨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기 주머니에 새끼가 있는 캥거루 한 마리는 저 멀리 골프 홀 주변에서 골프공 하나를 손에 들고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설모의 주변에는 그들이 열심히 모은 밤들이 놓여 있고, 식량을 저장하기 위해 잔디밭을 파헤치면서 생긴 흙 잔해들이 흩어져있다. 그 중 왼쪽 모퉁이에서 구석을 향해 서 있는 청설모 한 마리가 모은 밤들 사이로 분홍색 골프공과 하얀색 골프공이 보인다. 해가 지고 있어 전반적으로 난색계열의 색채가 지배적인 가운데에도 골프공은 도드라진 색감과 두꺼운 칠에 의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분홍색 골프공은 형광색으로 주변 색감과의 괴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때 다시금 불편한 의문이 수면 위로 올라와, 죽은 야생 동물의 뱃속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자꾸만 의식하게 되었다. 생명과 직접 연결되는 음식 곁에 놓인 작고 동그란 모양의 놀이 도구가 실제보다 더 무겁고 더 강하게 느껴졌다.

  좁은 공간이라 작품들이 가까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세계에 빠져드는 순간에 금이 가는 것을 의식적으로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분위기로 연출된 자작나무 숲에 다시 빠져들었다(도4). 앞선 그림들은 놀이터처럼 활기찬 움직임으로 가득 채워진 반면, 이 그림은 정적인 자작나무 사이로 피어 있는 억새들이 바람소리를 연상시키며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더구나 자작나무 사이로 길이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도 없어 누구나 가고 싶은 데로 가면 될 것 같다. 그곳에서 공작들은 자작나무 사이를 유유히 걸어 다니며 당당한 자태와 화려한 색채로 그들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그 뒤로 멀리 그려진 룽키와 고양이 한 마리, 새 세 마리는 공작들을 응시하고 있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 등장한 사람은 골프에 심취해 있다.

  자작나무 숲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룽키의 시선이 머무는 중앙부의 공작새 무리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공작새가 낳은 알들이 골프공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알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여리고 약해서 보호받아야 하고 섬세한 온기로 품어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비슷한 크기와 모양새의 그저 스포츠 도구에 지나지 않는 딱딱한 골프공이 그 옆을 지키고 있기에 채혜선 작가의 이상 세계에 생긴 틈은 더욱 넓어진다. 그 배신감으로 숲 끝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 불특정 사람에게 근거 없는 미움이 싹 트게 된다. 이 숲 속은 아름다운 이상적인 세계로 완결된 공간이 아니라는 자각이 선명해지는 그 순간 그녀가 화폭에 담아낸 이상 세계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골프장은 사람들이 골프를 치는 그들의 유희 공간이지, 동물들의 삶의 터전이 아니라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채혜선 작가는 <Friends> 시리즈를 통해 반려견 룽키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이 편안하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기를 희망하며, 사람들에 의해 고통 받는 동물들과 그들을 보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만의 목소리로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 조용히 위로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는 맑고 투명한 색채감각으로 조선적 유토피아를 대표하는 ‘십장생도’의 장생물과 유사하게 자연 풍경 속의 골프장으로 자신만의 이상 공간을 만든 다음, 그 안에 동물들과 골프를 치는 사람들의 위계를 나누지 않고 오밀조밀하게 배치하여 그녀만의 세상을 그려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모두가 ‘친구’가 되기를 소망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유토피아적 공존은 결국 미완으로 끝나고 있다. 조선시대의 십장생도는 장생물이 하나같이 ‘장수’라는 동일한 염원을 상징하며 이상 세계를 완전하게 대변하지만, 채혜선 작가의 그림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소하고 부자연스러운 지점에서 그 불편함은 드러나는데, 그것은 골프공으로 대변되는 사람과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문명이다. 동물들과 직접 맞닿아 있는 골프공은 장난스럽게 바라볼 수 없는 무거운 존재이며, 표현적인 부분에서도 다른 것들에 비해 두껍게 칠해져 그 무게감을 더해준다. 채혜선 작가의 유토피아에서 ‘골프공’은 마치 영화 <인셉션>에서 그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팽이처럼, 깨어진 꿈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장치가 되어 결국 이상 세계의 부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한 대중문화는 점차 단순해지면서 해석의 여지가 없어지거나, 심지어 그것이 이상 세계이며 허구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각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상 세계 속 모순이나 허점을 알아차리는 예민함과 같은 감각은 점차 무뎌지고 있다. 채혜선 작가의 작품 속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는 그러한 퇴보까지도 지적한다.

  19점의 회화를 모두 감상하고 전시실의 한 벽면을 채운 유리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일렬로 심어진 은행나무와 당당하게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피해 날아다니는 비둘기들이 있는 인사동의 거리 풍경은 그녀가 만든 꿈에서 깨어난 나를 또 다시 깨어나게 만들고, 그 광경까지도 하나의 ‘전시’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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