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120 BPM>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120BPM : 뜨겁게 박동하는 生의 속도

영화 <120BPM> 리뷰

푸른수염

 

1. ACT UP 

 

 

    1981년 미국, 갑자기 건강하던 남성 동성애자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과 암 증상을 보이며 하나 둘씩 사망에 이르기 시작했다. 처음 이 질병은 ‘동성애 남성들의 독특한 폐렴’으로 불리다가 이듬해인 1982년 ‘AIDS(후천성면역결핍 증후군)’라는 이름으로 정식 명명되었다. 질병의 이름이 정해진 다음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지만, 레이건 정부와 당시 언론은 무관심과 동성애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최초 감염자가 나타난 지 6년이 지난 1987년 3월, 조직적으로 에이즈에 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이 창설되었다. 액트업은 뉴욕에서 처음 결성되었고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 미국 내 도시들로 퍼져나갔으며, 뒤이어 런던, 파리, 베를린과 같은 유럽 도시들에도 속속들이 지부를 늘려나갔다.

 

 

 

2. ▲

     1987년 액트업 뉴욕이 결성된 직후 열렸던 초반의 시위들은 금세 언론과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여기에는 그들의 복장, 플랜카드, 포스터, 빌보드 등에 인쇄된 새로운 로고와 강렬한 문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검은 바탕의 하단에 흰 글씨로 “SILENCE = DEATH(침묵은 곧 죽음)”라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 이 문구는 두말할 것 없이 정부의 무책임한 대처와 그로 인한 끔찍한 결과들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를 내보인다. 그리고 그 문구 바로 위, 포스터나 플랜카드 등의 정중앙에는 항상 분홍색 삼각형이 위치했다.
     분홍색 삼각형의 기원은 동성애 탄압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나치는 강제 수용소 내의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표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강제했는데, 이 표지를 단 사람들은 같은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저주받은 존재’로 여겨졌다. 액트업 뉴욕은 그 역삼각형을 거꾸로 뒤집은 분홍색 정삼각형을 엠블럼으로 차용함으로써 탄압의 역사를 전복시키고자 하였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들에 대한 혐오를 표출했던 자들이 강요했던 죽음의 표지를 그대로 가져와 뒤집은 채 사용한다는 것은 이 운동의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목소리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우리는 당신들의 혐오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며, 심지어는 당신들이 혐오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
둘째, 당신들이 우리의 존재 자체마저 혐오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치열하게 존재하고자 할 것이라는 것.

 

     이 태도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면돌파의 태도라 할 수 있겠다. 1989년의 액트업 파리를 다룬 영화 <120 BPM>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 그룹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요란한 방식으로 혐오에 대응한다. 에이즈 환자의 피를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정부관계자나 제약회사에 가짜 피를 던지고, 사방에 붙일 포스터에는 항문성교의 삽입 장면을 크게 확대 인쇄하고[각주:1],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동성과 키스를 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이것일 테다: ‘보란 듯이.’
     이들은 결코 자신의 존재를 변명하거나, 은폐하거나, 축소시키지 않는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틀에 스스로를 맞추는 대신 그 틀을 부숴버리고자 한다. 사회가 이들을 타자화할 때, 이들은 사회의 입맛에 맞는 말랑말랑하고 얌전하며 소화되기 쉬운 타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대신 이 사람들은 ‘보란 듯이’ 그대로 혹은 더 치열하게 존재하고 그들의 존재방식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현대의 게이프라이드가 택하는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왜 그들은 섹슈얼한 표지들을 나서서 적극 활용함으로써 LGBT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스스로 논란과 비난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 그들은 조금 더 사회의 입맛에 맞춘, 막힘없이 소화됨으로써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기에 더 유리한 방식의 축제를 택하지 않는가? 그들의 한 세대 이전 선배들이 나치의 분홍색 삼각형을 뒤집어 자신들의 가슴에 스스로 붙일 때부터, 지금과 같은 저항의 태도는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혐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가장’ 살아있어야 한다.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3. <120 BPM>

     이것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톤과 그의 죽어가는 연인 션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맥스와 션이, 션과 나톤이, 나톤과 티부가, 그리고 그룹 내의 다른 사람들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열에 들뜨기라도 한듯 서로 사랑을 나누고 섹슈얼한 눈짓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가볍다가도 진지하게, 분노에 가득 차 있다가도 한없이 즐겁게, 마지막 축제 혹은 해내야만 할 숙제처럼. 그들의 사랑에는 왠지 지금 여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비장함이 감돈다.

     아니, 이것은 죽음을 앞둔 이들의 절절한 사랑을 다루는 멜로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에 그들의 사랑은 너무도 쉽게 흘러가고 움직인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이나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션은 맥스에서 나톤으로, 나톤은 션에서 티부로 흘러간다.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문법 하에서였다면, 션의 애인이 바뀌는 것, 그리고 션이 죽은 날 나톤이 티부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이렇게나 불친절한 설명으로 물 흐르듯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영화는 연애와 사랑의 피고 짐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영화 안에서 크고 작은 사랑들은 마치 더 거대한 흐름 혹은 운동의 일부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멜로드라마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신 이것은 어쩌면 투쟁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투쟁은 핏빛의 거대한 강줄기처럼, 사랑과 연애와 섹스를 모두 끌어안고 요동치며 흘러간다. 투쟁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식하며, 대부분의 장면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쟁하고, 싸우고, 깨부수고, 저항한다. 사실상 이 영화는 그들의 길고 긴 투쟁의 역사를 두 시간 이십 분 동안 압축해서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 영화는 투쟁에 대한 이야기인가 보다.

 

 

 


     아니, 이것은 투쟁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에 투쟁의 불꽃은 죽음이 내뿜는 냉기 앞에 너무도 쉽게 사그라든다.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제약회사와 정부 기관과 보험업자들을 찾아다니고 가짜 피와 동지의 뼛가루를 던지며 거리에 나와 가두행진을 벌이는 사람들, 이 사람들 중 누구도 ‘뼛속까지 투쟁가’는 되지 못한다. 죽음의 공포에 몸서리치는 어리고 약한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사실 이들의 투쟁은 절규에 가깝다. 투쟁 현장에서 이들이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은 “우리는 시간이 없어!”이다. 매주 한 명씩 동지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에서 굳세게 투쟁을 이어나가기에 이들은 딱 우리만큼이나, 초연하지 못하다. 영화 초반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투쟁에 앞장서던 션은 병이 진행될수록 점차 토론에서 말수가 줄어들다가, 어느 날인가는 토론장을 박차고 나와 버린다. 그리고 션은 다시는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다 한들 그러지도 못했을 것이다. 죽어가던 어느 날 그는 병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뉴스를 본다. 뉴스에는 뜨거운 시위현장 속 동지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꺼 버린다. 그리고 얼마 뒤 션의 숨 역시 티브이 전원만큼이나 허망하게 꺼져 버린다.

 

죽음이 제일 힘이 세다. 어쩌면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다.

 

     아니, 이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그러기에 생은 너무나 허무하게도 계속된다. 사실 죽음은 영화의 초반부터, 아니면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이들과 함께해왔다. 첫 회의 장면에서 회의의 첫 번째 소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활동가의 부고이다. 그룹의 사람들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는 죽음이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 이전에도 줄기차게 있어왔다는 방증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잊을 만하면 죽음이 엄습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신의 죽음이 있을 거라는 걸, 누구도 잠시도 잊을 수 없다. 연이은 주변인들의 죽음만큼 확실한 메멘토 모리가 있을까. 영화가 액트업이라는 기나긴 싸움의 역사에서 한 토막을 잘라낸 것이라고 할 때, 죽음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안에도 존재하며, 그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첫 번째 회의 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부고가 전달된 그 다음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액트업 파리의 초창기 멤버였다는, 당시 그룹에 컴퓨터를 두 대나 장만해주었다는 죽은 이의 사진을 함께 본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적힌 엽서를 에이즈 확산에 대한 경고로서 미테랑 대통령에게 보내기로 한다. 다음 안건이 회의에 오르고, 토론은 재개된다. 망자의 사진이 담긴 기사와 그의 이름이 적힌 엽서를 옆에 두고서, 사람들은 환호하거나 비난하면서, 울분을 터뜨리거나 농담을 던지면서 한껏, 정말 말 그대로 한껏 ‘살아있다.’ 결국 영화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을 옆에 혹은 목전에 두고 숨 쉬는 이들의 이야기인 듯하다.
     영화가 죽음과 그 이후를 다루고 그리는 방식은 션의 죽음 장면에서 조금 더 명확해진다. 투병 중이던 션은 결국 어느 날 밤 나톤의 아파트에서 허망하게 숨을 거둔다. 새벽에 이를 발견한 나톤은 울부짖으며 옆방에서 자던 션의 모친을 깨운다. 아주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둘은 잠시 후부터 들이닥칠 조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톤과 션의 모친, 그리고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는 그룹의 동지들은,

 

션의 옷을 입히는 일에서부터 애를 먹고(죽은 몸이 뻣뻣해 한 명이 들어 올리면 한 명이 잽싸게 옷을 입혀야 했다), 의사를 불러 사망을 확진받고(철자 불러주시겠어요? S-E-A-N D-A-L-M-A-Z-O), 힘을 합쳐 션의 모친이 눈을 붙이던 라꾸라꾸 침대를 들어올리고(보기보다 무거워 최소 세 명은 달라붙어야 했다), 조문객을 맞이하려 커피를 끓이고(커피 말고 다른 것은 없냐는 까탈스런 동지가 있어 모친은 과자를 내왔다), 조의문의 단어를 조금 손보고(션의 모친은 조의문에 ‘용감한’이라는 형용사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골 처리 문제와 장례 절차를 논의하고(션은 보험업자들에게 자기 재를 뿌리는 정치 장례를 원했다), 시시껄렁한 농을 하며 웃는다(그룹과 션의 모친은 그의 유골을 6:4 혹은 8:2로 나눠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질구레한 일상, 징글징글한 이승의 일들은 션의 죽은 몸이 놓인 바로 옆방에서 진행된다.

     사람들은 아침이 올 때까지 나톤의 아파트를 지켰다.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올 무렵, 나톤과 티부가 부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더 내리네 마네, 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나톤이 티부에게 오늘 밤에 자기 아파트에 올 수 있겠냐고 묻는다. 티부는 올 수 있다고 하면서 같이 잠도 자는 거냐고 되묻는다. 나톤은 그렇다고 말하고 티부는 웃는다. 나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순간, 카메라는 아마도 나톤의 시선이 닿을 아파트의 반대편, 그러니까 거실과 방이 함께 담기는 쪽을 화면에 담기 시작한다. 오른쪽의 방에는 유독 작아 보이는 션의 몸뚱어리가 덩그러니 침대에 눕혀져 있다. 두꺼운 벽이 중간에 있고, 왼편에 위치한 거실에는 션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누군가는 애인을 끌어안고 있고, 누군가는 손짓을 섞어가며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고, 누군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듣는다. 고요함과 소음, 정지와 운동, 죽음과 삶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뉜다. 혹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바로 옆방에 죽음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톤은 왜 애인이 죽은 바로 그 날 밤 같은 그룹 내의 인물 티부를 불러 섹스를 하는가? 이것은 더 이상 사랑과 배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가장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영화 내에서 그가 션의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암시가 등장함에도.) 만약 나톤에게 죽음이란 것이 저 멀리, 어디 다른 나라 이야기거나, 다른 도시, 아니면 최소한 다른 동네쯤에나 있는 이야기였다면 그는 티부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옆방에 죽음을 두고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섹스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확인이다. 자기 앞의 생에 필사적으로 타인의 온기를 끌어들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나토스의 대척점, 혹은 그 뒷면에는 하필 에로스가 있는 것이다.

 

4. △

     영화는 (유형의) 삼각형으로 시작하여 (무형의) 삼각형으로 끝난다.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그룹 멤버들의 티셔츠와 포스터와 시위 장면의 플랜카드에서 다양한 크기의 분홍색 삼각형들을 만날 수 있다. 삼각형은 그룹 내의 모든 감염자와 비감염자, 재소자와 비재소자, 당장 죽어가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모든 게이와 레즈비언과 약물중독자들을 연결한다. 또한 이 삼각형을 통해 그룹의 멤버들은 처음 운동을 시작한 뉴욕을 비롯하여 샌프란시스코와 베를린과 런던의 사람들과도 연결된다.
     영화 곳곳에 놓인 삼각형들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 전체가 그리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삼각형을 만날 수 있다. 이 삼각형의 윤곽은 처음에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가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선명해진다. 삼각형의 세 꼭지점에는 투쟁과 섹스와 춤이 있다. 투쟁-섹스-춤이라는 세 가지 재료는 영화 내내 번갈아 가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완연한 삼위일체를 이루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우리는 이 삼각형의 테두리 안에서 매일매일 옆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스스로도 죽어가는 사람들, 매일같이 세상에 의해 존재가 부정당하고 지워지는 사람들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요란하게 싸우고 섹스하고 춤추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표현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들보다 조금 빠르고 격렬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옆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으니, 불에 달군 신발을 신고 춤추는 동화 속 마녀처럼 계속해서 투쟁하고 섹스하고 춤추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는 동안, 아직 그들은 1분에 120비트로 박동치는 生의 한가운데에 머물 수 있을 테니.

 

 

 

  1. 알다시피 항문성교란 동성애 탄압의 유구한 역사를 지나면서 ‘저쪽’ 진영에서 늘 가장 먼저 걸고넘어지는, 그런 어떤 것이었다. 심지어 2018년에도! 궁금하다면 네이버 영화에서 <120 BPM>을 검색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자칫 눈이 썩어버릴 수 있으니 추천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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