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차 아이돌의 New Chapter



양장피

 


출처: https://klyrics.net/boa-boa-one-shot-two-shot/



2018 2 21, 보아가 데뷔 18년만에 미니앨범  <One Shot, Two Shot> 발매했다. 같은 3 28 데뷔 15년차인 동방신기는 제대 국내 앨범인 정규 8 <New Chapter#1: The Chance of Love> 발매했다. 10 이상 정상의 위치를 지켜온 아티스트의 반가운 신보다. 물론 음원 순위만 따지자면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두터운 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요계에서 단순히 연차에만 기인하지 않는 존경을 받으며 력을 인정받고 있다. 데뷔 15년차의 오래된 가수가 새로운 커리어를 보여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티스트 모두 예전의 기량을 활용하여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http://www.ohfun.net/?ac=article_view&entry_id=18099


 보아는 미니앨범 발매에 앞서 <키워드 보아>라는 리얼리티를 브이앱으로 공개하였다. 보아의 오랜 팬인 샤이니 키가 보아의 일상과 음반 제작 과정을 관찰하는 형식이다. 보아는 키와의 대화에서, 앨범 프로듀서와의 대화에서 꾸준히대중성 말한다. 그는 높은 완성도의 어려운 음악이 보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지만 그만큼 대중과의 선을 긋게 되었다고 냉정히 자신의 커리어를 평가한다. 그는 시점에서 보아의 노래를 다시 들어야 하는지를 자문하며, 시점에서 자신의 신보에 대중의 흥미를 신선함이 절실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래서 대중이 따라 있는 쉬운 안무를 후렴구에 넣기를 단호히 요구한다. 어려운 안무는 어디든 넣을 있으니 후렴구만은 쉽게 해달라는 말을 번이고 반복하고, 그에 맞춰 안무를 직접 수정하기도 한다. 수록곡은 힙합, 딥하우스 트렌디한 장르로 채웠다. 그러나 <CAMO> 곡만은 보아가 지금껏 해온 화려하고 강한 노래, 기존의 팬들이 보아에게 기대했을 법한 노래다. 

 

출처: https://klyrics.net/tvxq-the-chance-of-love-unmyeong/



 동방신기 또한 이번 앨범에서 보아가 집중한 대중성에 초점을 맞췄다. 스윙재즈 기반의 타이틀곡 <운명> 그간 동방신기가 선보인 강하고 비장한 댄스음악과 사뭇 다르다. 언뜻 들으면 소위뽕짝처럼 느껴질 만큼 중독성이 강하고 퍼포먼스도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 앨범 전반에서 힘을 빼되, 동방신기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도회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는 유지했다. 음악 활동 외에도 신비주의를 버리고 < 혼자 산다>등의 리얼리티 예능에 출연하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동방신기의 72시간>이라는 자체 예능도 9년만에 선보였다. 예능 출연은 그간 팬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멤버의 성격차와 관계성을 15 만에 대중에게 알렸다. 이러한 변화는 그들의 앨범에서 드러나는 음악적인 변화와도 맞물린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 하나인 <평행선> 동방신기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와 이미지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동방신기는 곡으로 미니멀한 미디엄 템포의 팝을 처음 시도했다. 가사 또한 예능에서 보여준 멤버의 이야기를 담아낸 듯하다.


하루종일 고민을 해봐도 너를 모르겠어
알듯 말듯
특이한
하루에도 번씩 나를 시험에 들게

Woo woohoo 우린 다르지만
이리 끌리는지
Woo woohoo
머리론 이해해도
말로는 설명 못해

너와 평행선 위를 따로 걷다
끝에서 함께할 길을 찾아
지금 너와 조금 서툴지만
내게 점점 다가와

동방신기-평행선  



출처: https://www.vlive.tv/video/65388


<평행선> 뮤직비디오에서 유노윤호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금발을 선보여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상 또한 격한 댄스 중심에 어두운 색감 위주였던 이전의 뮤직비디오와 달리 멤버의 일상을 청량한 색감으로 잡아낸다. <>, <Catch me>, <Humanoid> 같은 강렬하고 비장한 분위기의 퍼포먼스 곡들을 줄곧 타이틀곡으로 삼던 기존의 앨범 노선에서 동방신기가 변화를 것은 스윙 재즈 기반의 정규 7 타이틀곡 <Something>부터 이다. 8집의 타이틀곡 <운명> <Something> 이어 나온 <수리수리>, 그리고 입대 스페셜 앨범이었던 <Rise as god>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을 계속 이어간다. 이번 8집은 동방신기가 성숙한 30 남성의 노련함, 여유, 젠틀함이라는 컨셉을 그들의 새로운 상징으로 만들어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과도 같다.

<One Shot, Two Shot>에서의 보아의 새로운 음악 또한 번의 새로운 시도 정도로 기획한 것이 아니다. 보아만이 있는 퍼포먼스의 최종 단계라 있는 <Hurricane Venus> 이후 보아가 새로운 노선을 계속해서 고민해왔다는 흔적은 <Only One> <Kiss my lips> 이어지는 앨범 분위기의 변화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앨범 전체 트랙에서 자작곡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늘어나고 이지 리스닝을 목표로 하는 곡들도 많아진다. 특히 2015 발매한 <Kiss my lips>에서 보아는 앨범 전체를 프로듀싱하고 작사 작곡에 참여했는데, 기존의 앨범들보다 남성 가수의 피쳐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보아의 새로운 음악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동방신기와 같이 2018년에는 보아의 예능 출연도 늘어났다. 앞서 말한 <키워드 보아> 같은 자체 예능부터 시작해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다 올해 5월부터는 tvN <식량일기>에서 고정 출연을 하게 되었다. 그간 보아는 주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이나 진행자로 출연해왔기에, 버라이어티 고정 출연은 대중에게 보아의 새로운 이미지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수단이 된다. 보아가 그토록 원하던친근한이미지를 얻기에 잦은 예능 출연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 가수이자 방송인으로서 보아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보아는 SM 이사가 아닌 가수고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출처: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2&mode=sub_view&nkey=201802191014533



출처: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2&mode=sub_view&nkey=201802191014533



   보아와 동방신기는 어려운 음악을 하는 실력파 아이돌이라는 공통적인 이미지를 가졌다. (아직까진) 구설수 없는 사생활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대중에게 인정받지만, 인정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티스트 모두 충성도 높은 코어 팬덤으로 위치를 유지해왔다. 보아와 동방신기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대중성을 얻는,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데뷔 15년을 넘어선 현재 고민하고 있다. 고민의 결과가 바로 음원 성적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음반 모두 기존에 아티스트가 가지고 있던 음악적 개성과 일렉트로닉 장르를 접목시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SM 오래 잡아온 아티스트는 꾸준히 유지해온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른이 넘은 사회인,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진 성인으로서 커리어를 오래 끌어나가기 위해 안정과 도전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타협한다. ‘마의 7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명이 짧은 아이돌 업계에서 아티스트의 고민과 그에 따른 커리어 수행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이돌은 잠시 반짝였다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며, 충실한 고민과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15년째에도 새로운 이미지와 팬층을 얻어낼 있다. 아마 아티스트 모두 미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20년차의 아이돌, 30년차의 아이돌을 기대하게 한다. 

다만 2018 그들의 행보를 소속사가 전력으로 푸시해 주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소속사의 다른 스케줄로 인해 보아는 1, 동방신기는 2주만에 음악방송 활동을 마무리해야 했다. 오랜 비즈니스 파트너에 대한 예우로서라도, 아티스트가 바라보는 미래를 걸어갈 있도록 소속사가 신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길 바란다. 


 


우울한 너에게[각주:1] : 또 다른 해나 베이커들을 위하여

-<루머의 루머의 루머> 리뷰 -

 

레몬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내용을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즌 1 1화의 첫 장면. 해나 사물함에 해나를 추모하는 사진이 붙어있다.

 

prologue: “안녕, 해나 베이커야."

 

해나 베이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자살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학교에서는 형식적인 추모가 이루어진다. 어떤 이들은 흘러가듯 해나를 잊어간다. 어떤 이들은 이미 해나를 잊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그 마지막 어떤 이에 해나의 친구 클레이 젠슨이 있다. 약간은 멍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클레이는 해나로부터 발송된 택배를 받게 된다. 그 안에는 열 세 개의 테이프가 있다. 첫 번째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재생을 누르는 순간, 죽은 해나의 목소리가 귀 속에 울려퍼진다.

 

 

해나는 13개의 테이프 앞면과 뒷면에 자신이 자살하게 된 경위를 녹음해 두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원작 제목이 <13 Reasons Why>인것도 이 때문이다. 충격에 휩싸인 젠슨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테이프를 듣기 시작한다. 시즌 1의 각 에피소드들은 해나가 녹음한 테이프 한 면의 내용을 따라 펼쳐진다. 테이프의 각 면에는 해나의 자살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들 각각의 이야기가 녹음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클레이와 친구들, 그리고 해나의 부모님은 미처 알지 못했던 해나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이들의 일상에 변화가 시작된다.

 

시즌 1: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가진 엄청난 힘의 원천은 어느 드라마보다 빼어난 심리 묘사다. 해나가 자살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시청자는 해나의 모습과 나레이션을 통해 그 감정의 강도와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우울증을 겪어봤거나 애어른소리를 들어봤던 사람은 조금 더 쉽게 공감할 수도 있다[각주:2]. 아니, 그 정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해나의 감정선은 일상 생활에서 깊은 감정의 부침을 겪을 때 누구나 충분히 느낄만한, (그러나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감정의 흐름이다.

 

자살하던 날, 해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난 뒤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굳은 마음을 먹고 부모님 가게에 가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며 말하기를 포기한다. 부모님에게 자신마저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애어른의 심리. 부모님이 힘든 것이 결국 나 때문이라는 죄책감.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끔찍한 고독. 해나는 면도칼을 가져가면서도 참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해나가 왜 부모님을 위하려다가 자기 이야기를 못 했냐고 답답해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힘들 때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라는 명제는 생각보다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서 실제로 의지할 사람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당사자가 의지를 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가족과 친구가 수 백 명이 있다고 한들 모두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왜 당사자가 의지를 할 수 없다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해나가 왜 의지를 할 수 없었을까. 해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선뜻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해나의 문제가 아니다.

 

마침내 딸 해나의 테이프를 듣기 시작한 올리비아, 그리고 앤드류 베이커

 

해나는 말을 했다.

해나는 표현을 했다. 힘들다고 말했다. 그냥 그걸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해나는 분명히 힘든 티를 냈다. 해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살려달라 외쳤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소리치고 싶었다. 해나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 못하는 이유도 우울증에 걸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는 이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어서 혼자 침전해 간 거라고. 젠장. 왜 다들 죽고나니까 후회하는 거야. 어떤 이의 마음이, 감정이, 아픔이, 극단적인 결말로 치닫고 나서야 그것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들어보려고 하는거야.

 

해나는 말을 했다.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의 얼굴과 몸매를 평가하며 작성한 리스트를 보고 분노했다고. 그리고 그런 해나에게 남자아이들은 꼴에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그래도 네 엉덩이는NICE라고 써 있지 않았냐고. 어쨌든 칭찬인데 좋은 거 아니냐고. 안타깝지만 남자 아이들은 해나의 마음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 성추행으로 이어졌음을 해나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돌고돌아 해나의 손까지 들어오게 된, 얼굴/몸매 품평 리스트

 

그렇지만 해나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그만큼 순진했을 수도 있고, 친구들을 믿었을 수도 있고, 외로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친구들은 한결같이 같은 대답을 했다. “어쨌든 칭찬인데 좋은 거 아냐? 다른 애들은 욕도 써 있었잖아.힘들게 털어놓아도 공감 받을 수 없는 상황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외로움과 친구에 대한 배신감. 원망감.

 

 

또 다시 해나는 말했다.

 

자신의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고 있다고. 그러나 엄마는 그런 일들을 해나와는 관련없는 먼 세계의 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해나의 조심스런 구출 요청을 과대망상으로 치부해버렸다. 어렵게 세상 밖으로 나온 해나의 감정은 별 거 아닌 것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가장 믿을 만한 부모님에게 이해 받지 못한 감정을 온전히 떠 안아야 할 때의 외로움.

 

죽기 직전까지도 해나는 말했다.

 

브라이스 워커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싶다고. 그러나 상담 선생님과 젠슨을 비롯한 나머지 친구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방어 심리 때문에, 혹은 무지해서, 혹은 둔감해서 해나의 마음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했다. 심지어 오해하기도 했으며 도우려 했으나 제대로 돕지 못했다. 서툰 도움의 손길은 종종 구원이 아니라 공격이 된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이라면 해나의 수많은 시도가 더욱 애처롭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어렵게 꺼낸 말이 빈 공간으로 사라질 때의 허무함과 좌절감은 심장을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 푹 꺼지게 만든다. 그 감정. 반복된 좌절로 학습된 그 무력감과 체념.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졌을 때.

 

그 때 해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이 모든 것이 해나를 자살로 이끌었다.

 

해나야, 해나야, 해나야.

 

 

시즌 1 마지막 화, 해나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장면을 나는 아마 절대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손목을 긋는 장면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살 장면이 너무 적나라해서가 아니다. 해나가 끝내 삶을 포기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잘 느껴져서 그렇다. 자살하려 면도칼을 손에 쥔 와중에도 너무나 살고 싶어하는 해나의 눈빛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 모든 과정을 돌이켜보며 눈물 흘리는 해나의 얼굴에서 죽음이라는 두려움마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을 읽을 수 있어서.

 

그렇게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해나는 모두의 마음 속에 심지어 나의 마음속에도- 짐이 되었다. 누군가는 죽고 나서야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참 슬프지 않은가.

 

 

시즌 2: 돌고 돌아 다시 추모로.

 

아니, 어쩌면 해나의 주변인들은 나름대로 해나를 도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 나름대로 해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행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방 변호사의 증인 심문을 바라보는 올리비아 베이커와 그의 변호사 데니스.

 

시즌2는 해나의 자살에 대한 학교 측의 책임 여부를 따지는 재판을 따라 진행된다. 시즌 1이 전적으로 해나의 관점에서 펼쳐졌다면 시즌 2는 해나가 언급한 당사자들이 자신의 시점에서 해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해나의 이야기가 공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테이프의 존재가 해나의 부모님께 알려지면서 증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테이프와 관련된 해나의 주변인들이 증인으로 채택되어 하나씩 재판에 출석하고, 학교 측 변호사는 해나의 자살에 대해 학교가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집요하게 증인들을 몰아간다. 이 과정에서 해나가 테이프에서 밝히지 않았던 내용들이 밝혀지게 된다[각주:3].

 

 

너와 나의 이야기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사실적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현실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역설적이게도- 현실 그 자체와 동치시키는 것이 이 드라마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강간 문화,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 문화를 뼛속까지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갑과 을의 권력 관계는 드라마 안에서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 돈 많은 백인 남성 은 아시안 남성과 동성애자 남성을 짓누르고, 짓눌린 이들은 또 다시 백인 여성, 돈 없는 흑인 여성, 동양인 동성애자 여성을 억압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폭력과 폭력의 연속이며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악인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은 극도로 악한 사람 한 명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려 이것은 기득권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무지한 –혹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고자하는- 모두의 이야기이다. 비극은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쌓이면서 만들어진다. 해나의 죽음도 그렇다. 자신을 보호하려면 (혹은 자신이 즐거우려면) 누군가가 괴로울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감수한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것이다. 일종의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

 

거울: 딱 현실만큼, 아니 현실보다 조금 더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현실 그 자체만큼, 아니 현실 그 자체보다 고통스럽다. 폐부를 찔러오는 고통에 시청 내내 괴롭지만 동시에 그래도 드라마인데, 조금은 ‘드라마다운요소가 나오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쉽사리 멈춤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그 이상한 기대가 충족될 것이라는 고집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다. 당신이 그런 고집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이 드라마에 패배한 것일테니.

 

유능한, 혹은 잔인한 학교 측 변호사

 

시즌 2에서 학교 측 변호사는 저렇게까지 해야하나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해나를 걸레로, ‘정신이상자로, ‘썅년으로 프레이밍한다. 학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를 보는 입장에서는 Come on!’ 소리가 절로 나온다. 변호사가 증인들의 말을 끊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몰아가는 모습은 너무할 정도로 가혹하다. 학교 안의 무법자들은 학교 안에서나 날고 길 뿐이다. 증인 자격으로 법정 앞에 던져진 해나의 친구들은 법정의 무법자 앞에서 그저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그렇다. 정의구현이라는 말이 너무나 쉽게 사용되지만 뒤틀리고 기울어진 이곳에서 진정한 정의는 구현될 수 없다. 이 드라마가 특별히 잔인한 것이 아니다. 그냥 현실이 잔인한 것이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아이들이 점차 해나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시청자는 한 줄기 빛이 비추지는 않을지 자신도 모르게 기대한다. 사실 그들이 원하는 은 해나와 친구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빛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시청자들이다. 한 줄기 빛에 대한 시청자의 바람은 <루머의 루머의 루머>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사는 현실의 추악함을 마주하고 어떻게든 회피하고 거부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아니, 어쩌면 결말은 궁금한데 작품을 끝까지 보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함일지도.

안타깝게도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어둠과 어둠과 빛>이 아니다. 재판에서 승소하는 것은 학교 측이고 해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가해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내려 앉는다. 이후 제시카의 증언으로 강간범 브라이스 워커에 대한 재판이 따로 열리지만 역시나 워커 또한 말도 안 되는 형량으로 빠져나간다[각주:4].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새 출발을 위해 전학 갈 준비를 할 것이라며 학교로 돌아온다.

 

해나의 두 번째 추모식

 

그렇게 다시 한 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은 흘러간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드라마 맨 처음처럼 추모로 끝난다. 차이점이 있다면 시즌 1의 추모는 가짜 추모, 시즌 2의 진짜 추모라는 점일터. 추모에서 추모로, 몇 개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남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세상에 녹아들고자 한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인물들의 마음 속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클레이가 시즌 1에서 테이프 대신 라디오를 들은 것처럼, 시즌 2에서 해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상징의 문신을 팔에 새긴 것처럼, 진짜 추모를 통해서 모든 이들은 해나에게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까?

글쎄. 아닌 것 같다. 진짜 추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들은 영원히 해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해나는 그들의 삶 구석에 조용히 서 있을 것이고, 종종 잠잠해지려 노력했던 호수에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과유불급

아쉬운 것이 있다면 결말이다. 시즌 2가 시즌 3을 암시하며 끝나는데 굳이 시즌 3을 만들어야 했을지. 시즌 3까지 나온다면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아니라 <비극의 비극의 비극>일 뿐인데. 게다가 해나의 이야기로 시작했다면 해나의 이야기에서 적당히 끝맺음을 했어야 할텐데 초점이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져 간다. 어쩌면 해나가 주인공이었던 것은 시즌 1에 불과했고, 시즌2는 해나의 친구들이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시즌 3에서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비극이 사회에 미치는 여파가 이렇게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총기난사까지 넣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을지. 시즌 3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다. 또 과하다. 그래서 지친다.

 


해나의 다양한 추억이 담긴 영화관 crestmont. 글의 주제에서 어긋나기에 서술하지 않았으나, 작품의 영상미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긴하다.

 

epilogue: 또 다른 모든 해나 베이커들에게

 

시즌 2에서 다른 인물들의 속사정을 들을 수 있다할지라도 내게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어찌됐든 해나 베이커의 이야기다. 해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해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해나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 해나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막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해나와 함께 상처받은 시청자들에게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따뜻한 위로 한 마디 조차 건네지 않는다. 에피소드 시작 전에 우울증, 자살, 폭력 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있으니 시청자의 주의가 요구된다는 자막을 내보내는 것과 각 배우들이 나와 드라마를 소개하면서 도움이 필요하다면 드라마 홈페이지(http://13reasonswhy.info)를 방문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이 작품이 베푸는 최고의 친절이다

그렇지만 지금 바로 내 옆과 뒤, 혹은 내 안에 또 다른 해나 베이커가 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수도 있다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면 도움을 청하는 게 맞는 거라고, 혼자 감당하느라 버거웠을텐데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것이 어떤 해나 베이커들에게는 필요하다. 크나큰 위로가 된다. 그래서 또 다른 모든 해나 베이커들에게 다음 노래를 바친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전해주지 못한 위로를 담아.

 

 

 없는 사랑은 진실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두려운 믿음은 너를 지치게 할 것도 알잖아

여전히 내딛고 있는 그 마음을 돌려

때론 행복은 내겐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고

허전한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때

여전히 힘들어 하는 그 마음을 돌려

 

너도 가끔씩은 그런 네 모습을 벗고 싶겠지

때론 누군가가 벌여놓은 장난인 것 같겠지

하지만 그렇지않아

하지만 그렇지않아

 

원하지 않는 아픔이 내 맘을 조여왔었다는걸 잘 알잖아

그 맘은 나도 잘 알아

돌이킬 수 없이 너무도 멀리 돌아와 이제는 힘들거라고

오늘을 그저 보내고

세상은 너무 외롭고 나 홀로 남겨진 사람이라고 느낄 

그럴 땐 돌아서 내 손을 잡아주기를, 내게로 돌아오기를

 

메이트 - 우울한 너에게


  1. 메이트의 노래 <우울한 너에게>에서 따왔음을 밝힘. [본문으로]
  2. 오히려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이 드라마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 드라마 각 에피소드 시작 전에도 이를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3. 시즌 2가 시즌 3을 암시하면서 끝나는데, 굳이 시즌 3을 만들어야 했나 싶다. [본문으로]
  4. 제시카의 증언 장면이 시즌 2 최고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제시카의 경험은 제시카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여성의 것이다. 내가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문으로]

Love Letter #1: 여인들의 초상[각주:1]





사이숏






하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를테면 A B처럼. A B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평범한연인이다. (물론 A B 다자간 연애를 지향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A B 차이는 너무나 결정적인 탓에 둘은 자주 어긋나기도 하는데, A 애초에사랑하는 관계라고 하는 것을 번도 의심해 적이 없는 반면 B 그것을 끝없이 심문에 부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성과 그것의 필연적인 변화(변화는 예정된 필연의 다른 이름이므로,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앞에서, A B 각각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상의 흐름과 변주, 사랑의 운동성에 순응적이고, 사건의 다른 ()실현 가능태들에 열려 있으며, 따라서 예측하기 어려운 앞으로의 변화들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있는 쪽은 단연 A이다. A사랑하는 남녀의 영원한 결합이라는 근대의 신화로부터 자유롭다. 삶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A 목적은 오직 다가오는 기쁨을 맞이하는 것이며,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한 세계와의 접속과 무한한 승화 가능성을 꿈꾼다. 그렇다면 B? B 사랑에 대해 훨씬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전망을 내세우길 좋아하지만 기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거대한 형이상학적 충동(혹은 반동)이다. 단지 순간 속에 머무르며 영원처럼 살기를 욕망하는 B A와는 반대로 한없이 역행하고 퇴보하는 쪽에 가깝다. 마치 거울 속의 그것을 바라보는 마술적으로 상응하는 모습에 순수하게 기뻐하는 거울 단계의 어린아이처럼, B 사랑(또는, 후술하게 사랑의 이념’) 구조적 폐쇄성과 그것이 구현하는 ()완전함을 믿는다. 말하자면 B, 사랑 앞에서 계몽주의자의 탈을 열성 신자가 된다[1].









 

[1] 레이디 가가의 데뷔 앨범 수록곡 Teeth」의 가사 일부이기도 하다. (출처: anonymousartofrevolution.com)




, ‘사랑이라는 낱말이 지니는 헐거움, 혹은 불충분함에 대해 생각한다.[각주:2] 내가 방금 글자에다 따옴표를 둘러쳐야만 했듯이, ‘사랑 다만 욕망과 친밀성의 어떤 대타적인 양식들을 비끄러매기 위한 수사적 갈고리에 불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사랑 삭제하거나 대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기에, 사랑을 찬미하고 저주했던 수많은 연인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울림이 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남기고 무수한 사랑 이야기의 존재는 사랑을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기 위한, 사랑이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속화되는 것에 저항하고자 했던 처연한 기록의지[각주:3] 증거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A B, 그러니까 당신과 나를 위한 글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당신에게 들려줄 있는 것은 사랑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고작이므로, 나름대로사랑 우회하고자 했던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시도의 흔적은 언제까지 수취인 불명으로 남을 것이다.



이곳은 드레스 룸으로 보이는 공간[2]. 예상 가능한 가지 시나리오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오가는 상황이다. 웨딩 가운을 반쯤 걸친 채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항변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소리친다. 그럼 어디 증명해 ! 전날 밤의 섹스가 주는 여운이 가시고 의혹과 냉소, 질투 따위의 해묵은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할 ,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는 이미 안팎으로 위협에 처한 사랑의 현실을 반영하기에 뼈아프다.




 

[2] “I love you!” “Prove it!” (MISS DIOR - The new Eau de Parfum 영상 중에서)



한편, 질주하고, 밀쳐내고, 환희하는 여자의 매혹적인 움직임을 연출하는 낭만화된 사랑 서사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관객들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 익숙한 여배우의 얼굴이 있다[3]. 그녀가 입을 연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있나요? (이때, ‘연인을 위해 아닌사랑을 위해라는 어구에 주목하길 바란다. 사랑에 빠진 이는 자신의 연인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이 관계항으로서 종속되어 있는 3 대상에 봉사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랑의 이념이다. 주지하다시피 사랑의 이념은 자주 숭고한 , 무조건적인 , 심지어 성스럽기까지 것을 표상하는 대중적 이미지들로 재현되곤 한다. 설령 정체가 이데올로기적이며 허구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랑을 예찬하고 이를 향유할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보다 다층적인 양태(modal) 물음이 함축되어 있는데, 같은 질문을 다음과도 같이 고쳐 물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혹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환언컨대 사랑은 당위성의 영역인 동시에 가능성의 영역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현재성, 러니까지금 여기 영역이다.



 

[3] “And you, what would you do for love?” ([2] 같음)



아이러니하게도 당신과 사랑을 나누게 이후 나를 곧잘 절망감에 빠뜨리곤 하는 사실은 바로 같은 사랑의 교차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에 있다. 존재론적 합일과 조화로서의 사랑의 이념은 일체의 특수적인 것을 초월하도록 상정되지만, 사랑을 위한 어떤 실천도 우연적이고 장소-한정적인 조건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역설. 이를 통해사랑의 본질이란 것을 재건해 있다면, 사랑은 당신과 나로 하여금 운명의 주인이자 영혼의 통솔자로 세상을 군림하게끔 만들어 주는상승의 사다리 아니라[4], 오히려 통제할 없는 상황들의 돌발적 연쇄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 가면서, 모든 도래하는 사건의 폭력(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 앞에 나는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속수무책으로 해제되고 파편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감만을 점지해 뿐이다.


 

[4] “’Cause we’re the masters of our own fate / We’re the captains of our own souls / So there’s no need for us to hesitate / We’re all alone, let’s take control / And I was like…” (라나 레이의 Lust for Life 뮤직비디오 중에서)



이렇게 재건된 사랑의 본질을 염두에 , 관객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향한 에로스의 몸짓으로 충만한 이자벨이 어찌하여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쟁취하려 들지 않고행운의 방문했던 것인지[5], 신경증적 불안에 잠식된 가엾은 영혼 지니는 자기 환상에 배반당한 불운의 파토스를 그토록 열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비로소 납득하게 된다[6]. 이자벨과 지니는 앞서 말한예감 가지 상반된 극화 방식을 보여 주는 인물들이다. 이자벨이 미지의 앞일을 점쳐 과거의 인연과 결별하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했다면(‘마음의 준비’, 아마도 이것이 그녀와 나에게 주어진 최선책일 것이다), 지니는 어느 마을(코니 아일랜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남편의 친딸과 자신의 애인이 정분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현실화되자 폭주하는 광기와 뒤틀린 욕망의 성난 불길이 스스로를 집어삼키게끔 내버려둔다. 사랑 앞에 누구보다 무방비한 이들이기에, 이자벨과 지니는 모두 제각각의 방식으로 모종의 애틋한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사랑의 실현 또는 부재를 둘러싼 문제는 개별 관계항으로서의 당신과 나의 독립된 의지와 자유 너머에 있으며, 따라서증명해 보일 있는 ’, 실증적인 차원과는 더욱 거리가 것이다.


 

[5] 환멸과 배신의 경험을 반복한 끝에 점쟁이(fortune teller) 남성을 찾아간 이자벨(줄리엣 비노쉬). 우습게도 관객들은 남성 또한 실연의 고배를 마신 전적이 있음을 바로 직전의 신을 통해 알게 된다. (영화 Let the Sunshine in」의 엔딩 시퀀스 중에서)




[6] 애인과 연적을 향한 불타는 질투심은 지니(케이트 윈슬렛) 히스테릭한 추락을 부추기고, 그녀는 끝내 줌의 재로 화하고 만다. 아마도 지니는 내가 아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사랑스럽고 경멸스러운 여인일 것이다[각주:4]. (영화 Wonder Wheel 중에서)



사랑은 많은 경우 무질서하고, 때때로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징후들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결코 발화하지 못하는 폭력의 외상과 닮아 있다. 이것은 사랑이 자기 존재 증명에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따라서 언제나 위협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이는 당신과 나를 대칭적으로 결합시키는 관계 맺음의 안정적인 토대가 사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각주:5] 사실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라, 타인과 맺는 모든 관계들이 실상은 그러하지 않은가?) 이러한토대 없음 조건 아래서, 사랑의 윤리적 형식은 어떻게 마련될 있는가? 또한, 어떤 형태의 근거 지음도 없이 사랑의 지속성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없는 물음들이다. 결국 시공간적 유한자로서의 당신과 내가 만끽할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부표들 간의 마주침에 지나지 않으며, 뿌리 잃은 부표에게는 오직 흔들림[, 혹은 나부낌]만이존재 이유[각주:6] 것이기에.


자기 초월과 존재 일치를 경유하여 당신과 (다시) 하나-되기를 꿈꾸는 나의 은밀한 바람 속에는 다분히 플라톤적 색채를 띠는 회귀주의의 망령이 깃들어 있다[7]. (정작 플라톤은 이것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랑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노스탤지어는, 실제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실체 없는 대상을 그리워하는 행위라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하나에서 둘로의쪼개짐 불가피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분화(또는 분리) 과정, 이행은 자체 완전할 없는 까닭에(아니, 문장은 필히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글에서우리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는가? 니체의 논의를 빌리자면, ‘하나에서 둘로의 쪼개짐 단지 문법적 습관의 구성적 효과에 지나지 않은우리라는 주어에하나’(One)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신기루를 덧입힌다), 거기에는 끊임없는 내적 불화와 온갖 잡음들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거울 단계의 어린아이가 상상계적 환상에서 벗어나 상징계적 질서로 진입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가령 주의 끝에서 당신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 , 나는 하나-되기와 -되기 사이에서 수도 없이 진동하며 이미 셋으로, 넷으로 분열하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 내가 결코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이질적인 무엇이 당신과 함께 머무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사람이 다른 이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연인 관계에서조차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경험은 폭력에 가까울 만큼 나를 뒤흔들어 놓곤 한다.

당신으로 인해 삶의 의미와 활력이 모두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고백한 데는, 단언컨대 조금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다.




[7] 플라톤의 『향연』 4 「에로스」에 등장하는 쌍체 인간(hermaphrodite) 신화를 극화하였다. 아주 오래 당신과 나는 본디 몸을 이루고 살았으나, 번개 신의 형벌을 받아 신체적인 분리를 겪게 되고 언제고 다시 합치되기를 갈망하는데, 이것이 바로사랑의 기원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육체적 사랑의 한계를 지적하고 정신적 사랑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영화 Hedwig and the Angry Inch」의 수록곡 The Origin of Love」의 극중 애니메이션 중에서)


이쯤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전환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 보길 바란다[8].


사랑의 급진성은 일상적으로 여겨지는 바와 달리 세계의 나머지 부분을 결정적으로 지워 버리는, 다른 존재에 대한 배타적인 지향성에 있지 않다. 오직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Beyond Good and Evil, 1886)에서 보여 주었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하면서 행하는 것이므로 야만적 행위의 일부이다. 그러나 니체가 아포리즘에 추가하고 있는 ,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점은 종종 잊혀진다. 혁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혁명이 우리의 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인도주의적인 이상으로 선언될 있더라도, 사실상 다른 모든 이들을 희생함으로써 (굴라그 등으로) 실행될 수도 있다. 진정으로 급진적인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 알랭 바디우의 말대로 사랑은최소의 코뮤니즘형태이다. 사랑은 사람을 위한 코뮤니즘이다. 그러나 사랑은 코뮤니즘만큼 도달하기 힘들고, 종종 코뮤니즘처럼 비극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혁명처럼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다.

물론 진정한 사랑을 이루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중략) 사랑과 혁명 사이의 영속적인 불화 (후략) 교착 상태는 어느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둘의 결합으로만 해결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각주:7]


[8] 위와 같은 호르바트의 진술은 사랑에 관한 생텍쥐페리의 유명한 잠언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똑같은 방향을 내다보는 것이라고 인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출처: gaytwogether.com)


둘의 결합 갖는배타적인 지향성 극복하고, 내가 당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당신은 나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을 추구하는 에로스의 경험, 소위사랑의 재발명 요청하는 담론과 이론이 산개해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사랑도 결국 말과 말을 대결시키고 속에서 내가 철저하게 부서지기를 의도하는 지난한 싸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끝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나는 번이고사랑 다시 쓰고 고쳐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당신과 내가 처음으로 서로의 골을 맞대던 ,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아니면, 나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았던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오염된 언어가 당신의 입에서 황망히 튀어나오는 것을 듣고서 나는 환멸과 동시에 우스꽝스러움을 느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각주:8]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을 때쯤에는 천천히 베갯잇을 적시기 시작했다.


다음은 글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인용하고자 하는 이미지와 그에 대한 단상이다[9]. 영화는 사랑의 지속 ()가능함의 조건이 당신과 나에게 강제할 있는 여러 위기들과 관련해 가지 가능한 대응 방식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들의 역할로 남는다.


 


[9] 엘마(비키 크리엡스) 거칠고, 고집이 세며, 예의나 교양이 부족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속한상류 사회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Phantom Thread 중에서)



너무나도 상이한 경험 또는 지각 방식,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거듭된 충돌 속에서 마침내 관계 자체가 내파할 위기가 그들을 찾아왔을 , 사랑을 보전하기 위해 엘마가 취한 선택은 일견 폭력적인 , 심지어 귀기 어린 것으로까지 느껴진다. (레이놀즈가 침상에서 그녀의 간병을 받을 별안간 나타난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환영(phantom) 떠올려 보라.) 아마도 다수 관객들은 엘마가 사랑을 쟁취하는 방식에 순전한 동의나 지지를 보내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저녁 식탁에서의 격앙된 대화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내심 그녀가 일말의 가차나 미련도 없이 레이놀즈로부터 떠나가 주길 바랐었다. 그러나 그가 사귀어 과거의 숱한 애인들과 독보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였던 그녀는, 그러한 패배주의적인 기대와 예상을 단번에 좌절시켜 버린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의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엘마는 레이놀즈에게 먹일 독버섯 요리를 준비하는데, 이때 그녀는 그가 느끼한 음식을 질색하는 알면서도 천연히 그것을 버터에 볶는 과정을 보여 준다. 엘마는 레이놀즈가 오로지 자신의 안에서 쓰러져 주기를, 그리고 바로 자신으로 말미암아 강인함을 되찾게 되기를 원한다. 사실 지금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라면, 사랑하는 이의 취약성을 독점하고 그에게 치유의 권능을 행사하려는 욕망에 대한 엘마의 고백이 그렇게 섬뜩하거나 엽기적으로 들리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판단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1. 이 글은 영화 「Let the Sunshine in」, 「Wonder Wheel」, 「Phantom Thread」의 결말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본문으로]
  2. A와 B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범죄나 계약과 같이 사랑을 성립시키는 보편적 조건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면, A와 B는 무엇에 의지해서 자신들의 사랑을 선언할까? 적어도 A가 B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B가 A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A의 ‘사랑한다’와 B의 ‘사랑한다’는 서로 동일한 의미론적 값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단어의 용법과 용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기 마련이고, ‘사랑’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통일되어야 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A의 ‘사랑한다’와 B의 ‘사랑한다’는 별개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직관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랑하는’의 결격 사유가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위 결론에 따를 경우 A와 B는 서로 간에 결코 소통될 수 없는 문장과 몸짓, 즉 단절과 균열의 징후들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를 이해한다고 열심히 착각하고, 또 착각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와 존재의 심연은 사랑의 증명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숱한 장애물들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3. “시가 여전히 아름다움에의 기록의지라고 믿는다”던 김선우 시인의 표현을 차용하였다. [본문으로]
  4. 만약 다음에도 지면이 허락된다면, 나는 대상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나무를 위해 기꺼이 숲을 희생하는, 농담을 농담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죽으라고 하면 보란 듯 몸을 내던지는 전혀 ‘미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쓸 것이며, 이 예술 장르의 이름은 가장 에고-트립한 비극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5. 사랑은 언제부터 정상 연애 및 결혼의 역사와 교섭하게 되었는가? [본문으로]
  6. 심보선, 「나의 댄싱 퀸」,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본문으로]
  7.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pp. 123-124, p. 133. 호르바트의 저작이 ‘두 사람을 위한 코뮤니즘’ 형태로서의 사랑 개념을 제안한 바디우의 『사랑예찬』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면, 정치(여기서는 ‘혁명’)가 사랑과 맺는 ‘영속적인 불화’ 관계에 대해 훨씬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본문으로]
  8. ‘너’를 ‘사랑한다’는 ‘나’의 말하기는 ‘나’가 사랑한다고 믿는 이, 즉 ‘너’와 그 외 낯선 타인들에 대하여 ‘나’의 사랑(혹은 믿음)을 재확인시키고자 하는 자기 선언적 행위이며, 미래에 대해 어떤 효력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의미 없고 무력한 언약에 다름 아니다. [본문으로]


ASMR 입문

 

이제로

 

 


 ASMR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이 용어는 졸음이 오게 만드는 영상정도로 이해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이상한 것 혹은 변태적인 것 혹은 야한 것이라는 오명이 덧붙여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누군가에겐 정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ASMR이란 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줄임말로서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후각적, 혹은 인지적 자극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형언하기 어려운 심리적 안정감이나 쾌감 따위의 감각적 경험을 일컫는 말이다.[각주:1]쉽게 말하자면, 미용사가 머리를 자르거나 감겨줄 때, 혹은 해질 무렵 봄 창가에 앉아있을 때, 혹은 멀리서 누군가가 타자 치는 소리를 들을 때 뒤통수가 간질간질한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그러한 기분 좋은 생리적 반응을 팅글(tingle)이라고 한다. 팅글은 통상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고 졸음이 오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팅글을 주기 위한 시청각적인 컨텐츠가 ASMR이다.[각주:2] 그러나 이러한 모호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ASMR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며, 그 효과가 알려진 지도 얼마 되지 않기에 사람들이 느낌으로만 아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러한 느낌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러한 생리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더라도 ASMR은 하나의 장르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있다. 따라서 나는 ASMR을 하나의 문화 컨텐츠로서 제안한다.


 왜 갑자기 ASMR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ASMR을 덕질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ASMR을 영업하고 싶다. 필자는 작년 가을 처음 ASMR영상을 접했는데, 그 때의 간질간질한 기분 좋은 느낌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곧 내성이 생겨 팅글은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ASMR영상이 주는 특유의 편안함과 안정감, 그리고 왠지 모를 만족감에 중독되고 말았다. 그 해 겨울,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하루 종일 ASMR 비디오만 찾아보던 날들을 다 셀 수도 없다.


 최근 들어 필자와 같이ASMR에 입문하는 사람이 늘면서 ASMR 커뮤니티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수도 없이 많은 ASMR 아티스트들이 등장하였으며, 나날이 영상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ASMR은 단순히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한 시청각 자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ASMR Videos?


 

앞서 말했듯ASMR은 문화 컨텐츠로서 그 안에 내용이라 할 만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 무엇을 내용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최근5-6년간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시청자들에게 효과적으로 팅글을 불러일으킨 시도들은 여러 아티스트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작되었고, 이는 장르라고 할 만한 것으로 진화하였다. 다음으로 제시될 것은 ASMR영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위 장르들이다. 자기 전 한 번쯤은 취향에 맞는 영상을 골라 시청해보길 권한다.

 


#Personal Attention


 사람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은 장르는 Personal Attention이다. 이는 사적인 주의끌기라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말로 번역되는데, 쉽게 말하면 ASMR 아티스트가 마치 내 앞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종류의 영상을 의미한다. 주로 시청자를 쓰다듬어주는 듯한 핸드 무브먼트를 사용하고, 각종 사물들을 통해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종류의 영상은 시청자를 편안하게 만들고, 잠들게 만드는 것이 유일의 목표이다. 그래서 사실 팅글을 느끼기 위해서라기보단 기분 좋은 영상물로서 ASMR을 소비하는 필자는 이러한 종류의 영상을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영상들이 조회수가 가장 높은 것으로 보아 ASMR의 본래 의도 하에서는 최적의 장르라고 생각된다.



#Role playing


 Peronal Attention만큼이나 많이 등장하는 영상이 롤플레이 영상이다. 롤플레이라 하면 외설적인 행위가 떠오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ASMR에서의 롤플레이 영상은 연극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하다. 한 예로, 국적을 불문하고 ASMR 아티스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재생산된 주제는 뇌신경검사(Cranial Nerve Exam) 롤플레이이다. 사뭇 뜬금 없는 듯한 이 주제는 ASMR아티스트가 의사가 되어 시청자의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감각 신경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의사나 상담사가 시청자를 상담하고, 검진하고, 치료해주는 종류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롤플레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패러디 영상들예를 들어 할리퀸, 타이타닉, 타잔 등도 자주 등장한다. 혹은 아예 아티스트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여 새로운 내러티브를 꾸려가는 경우도 있다. 즉 롤플레이는 가장 극적인 종류의 ASMR이며, 아티스트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가장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는 장르이다. 당연하게도 필자는 이러한 종류의 영상을 가장 즐긴다.

 


#Show & tell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이나 산 물건을 보여주는 유형의 영상이다. 뷰티 유튜브 영상을 보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유형의 영상일 것이다. 여타 하울(Haul) 비디오와 다른 점은, ASMR에서는 사물을 두드리는(tapping), 긁는(scratching) 혹은 부스럭거리는(crinkling) 등의 행위를 통해 여러 듣기 좋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주로 옷, 액세서리, 책 등 좋은 소리가 나는 사물들의 컬렉션을 보여준다. 남의 파우치를 들여다보는 것이 재미있듯이, ASMR아티스트마다의 개성이 드러나는 컬렉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Object Sounds


 말소리나 입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노토킹(No-Talking)영상으로, 좋은 소리가 나는 사물들ASMR커뮤니티에서는 이를 트리거(Trigger)라고 부른다을 이용한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내는 사물이라면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든 상관 없이 ASMR 영상의 소재가 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ASMR의 경우 사람이 직접 등장하지 않기에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도 있다. 따라서 object sounds영상에는 눈의 즐거움도 요구된다.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분이 좋아지는 영상 (혹은 Oddly satisfying videos)과 유사한 시각적인 만족감을 준다. 요새 유행하는 액체괴물(Slime) 비디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ASMR을 즐긴다고 알려진 아이유의 인스타그램의 액괴 영상이 좋은 예이다.

 



ASMR Artist?

 

Isable Imagination ASMR, <ASMR THE WALKING DEAD ROLE PLAY> 그녀는 워킹데드를 패러디하여 시리즈로 ASMR 영상을 제작하였다. 그녀는 배우 못지 않은 훌륭한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 글을 읽던 와중에 굉장히 거슬리는 단어가 하나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바로 ASMR”아티스트이다. Peep 0호에서 아티스트와 아이돌의 경계를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아티스트는 그 진입장벽이 높은 용어이다. 실제로 댓글을 보면 외국인들은 모두 ASMR 영상 제작자를 “ASMR artist”라고 칭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꼭 유튜버라고 부른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특별한 검열 없이 우수한 콘텐츠 생산자를 artist라 부르고 있다. 이에 더해 ASMR팬으로서 나름의 변호를 덧붙이자면, ASMR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수고를 요한다. 앞서 말했듯이 ASMR영상 제작자들에게는 컨텐츠의 독창성과 팅글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있어 탁월함이 요구된다. 그래서 유튜버들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앞서 말했듯이 대개의 ASMR유튜버의 경우 영상의 기획과 제작, 편집 등 생산의 모든 과정을 오롯이 혼자서 해낸다. 예로 30분 정도의 영상을 편집하기 위해 영겁의 시간이 걸렸다는 한 유튜버의 푸념은 그 노력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더군다나 롤플레이의 경우에는 분장, 배경 세팅 등 영상을 촬영하기 위한 다양한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Goodnight Moon이라는 채널은 자체적으로 판타지 세계관을 만들어내어 이에 대한 영상을 시리즈로 제작한다. 분장이나 소품, 내러티브, 그리고 연기까지 모든 것이 세심하게 준비되어 어느 하나 고퀄리티가 아닌 게 없다. 물론 노력이나 작업의 양으로 아티스트라고 불릴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올-라운더로서 훌륭한 컨텐츠를 제작하는 그들에게 넓은 의미에서의 아티스트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것은 그리 부당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Goodnight Moon, <ASMR Maybell’s Menagerie: Dragon Egg Shopping> 이 영상은 판타지 시리즈인 Babblebrook Series 중 하나로 야생 동물샵에서 용의 알을 구입하는 내용이다. 그녀는 이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직접 용의 알 소품을 8개 가량 만들었다. (오른쪽 사진 출처: Fresh Blush Instagram)

 




Asmr Artists!


이제 그들을 아티스트로 부르는 것이 허락된다면, ASMR 아티스트 몇 명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추천에는 필자의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게 들어갔음을 미리 고백한다.


 



#Gentle whispering asmr



먼저 ASMR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Gentle Whispering ASMR을 소개한다. 필자를 ASMR에 입덕하게 만든 채널이기도 하다. 채널을 운영하는 Maria는 현재 활동하는 ASMR아티스트 중 가장 초창기 멤버이자, ASMR 커뮤니티를 키워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Queen Maria라고 부른다! Maria의 강점은 엄마, 언니, 누나 같은 따뜻함과 세심함에 있다. 이 채널에서는 Personal Attention영상들이 가장 인기가 좋다.

 


#Goodnight moon asmr



본 글에서 이 채널이 몇 번이나 언급되는지, 단연 필자의 최애 채널이다. 영상의 퀄리티와 완성도가 매우 높다. 그녀의 롤플레이는 다른 사람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가 만든 판타지 시리즈는 영화나 소설처럼 정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며, 등장하는 캐릭터마다 매력적이다. 롤플레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영상이 올라오는데 전혀 난잡한 느낌이 없이 그녀만의 빈티지한 분위기 속에 통일된다. 또한 빈티지하고 귀엽고 소소한 물건들을 까마귀처럼 모으는 그녀의 습관 덕에 Show&tell 비디오도 매우 흥미롭다. 이 채널에 태그를 붙인다면 #Vintage #rustic #nostalgic #warm #cozy 정도가 되지 않을까.

 


#Latte asmr



라떼(Latte)는 필자가 한국 ASMR아티스트 중 가장 좋아하는 유튜버이다. 목소리가 굉장히 좋아서 팅글이 마구 느껴진다. 그녀만의 신경 써주는, 보살펴주는 듯한 느낌이 ASMR에 굉장히 효과적이다. 또한 손짓이 굉장히 섬세해서 시각적으로도 팅글이 강하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팅글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혹은 간호사나 상담 직원 등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팅글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채널을 강력히 추천한다. , 한국어 영상에서 근본 없는 악플로 마음 고생을 했던지라 한국어 영상을 자주 올리지는 않는다.


 


#ASMRsurge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나 속삭임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노토킹 채널이다. 노토킹 ASMR 채널 중 가장 영상 퀄리티와 사운드 퀄리티가 좋다. 미지의 채널 운영자는 언제나 유머러스 하셔서 늘 더보기란에 위트있는 글을 남긴다. (더보기란을 기다리는 팬이 더 많은 것 같기도?)

 






  1. 출처: 위키백과[자율감각쾌락반응] [본문으로]
  2. 엄밀히 말하면 ASMR은 감각적 경험, 혹은 현상이지만 흔히 우리가 ASMR을 말할 때는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시청각적인 컨텐츠를 일컫는다. [본문으로]


나는야 행복한 ATM

 

낭거

 

 

 프로듀스 101 시즌2를 통해 워너원이 데뷔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어간다. 높은 화제성과 인기로 데뷔 직후부터 워너원은 화장품, 의류, 제과 등 수많은 광고의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런 오늘날, 점점 높아만 가는 나의 덕심과 얇아지는 지갑, 비어버린 통장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워너원 때문(혹은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구매한 다양한 브랜드들의 제품들을 소개 및 리뷰하고, 그들의 마케팅이 나에게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그리고 그냥 이에 관련된 여러 잡생각들을 풀어 내보고 싶다.


 


 우선 사고 보자! - 이니스프리



 



 텅-장의 시작은 바로 워너원의 이니스프리 광고에서 시작되었다. 아직 워너원이 데뷔도 하기 전의 첫 광고였는데, 이니스프리 광고 떡밥이 프로듀스 101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처음으로 풀린 공식적인 떡밥이었다. 팬들이 꿈에 그리던 파스텔톤의 맨투맨을 입은 내새끼, 뽀얗고 뽀송뽀송한 스타일링과 갓-벽한 헤어 메이크업까지! 그저 [갓니스프리]를 외치기에 그 어떤 모자람도 없었다. 이니스프리의 마케팅은 앞으로 워너블(워너원 팬덤명)들에게 환멸을 느끼게 할 브로마이드 폭주의 시작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니스프리의 브로마이드 증정 행사는 매우매우매우 성공적이었는데, 우선 브로마이드 증정의 기준이 매우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원 상당의 제품을 구매하면 브로마이드 한 장. 필요 없는 물건을 강제로 구매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필요한 화장품을 구매하는 김에 브로마이드를 얻을 수 있어서 매우 즐거웠다. , 브로마이드의 사진 셀렉과 재질까지 굉장히 좋았는데, 광고하는 팩 제품으로 얼굴에 동물 모양을 그리거나 귀여운 문양을 그려 넣어 수많은 워너블들의 심장을 저격하는 센스를 보여주셨다. 브로마이드의 재질도 너무 얇지 않아 잘 구겨지거나 접히지 않았고, 각 멤버들의 사인이 그려진 지관통까지. 가히 혜자라는 말이 튀어 나오는 증정 행사였다.


 그리고 워너원은 이니스프리 광고 모델 장기 계약을 하게 되었고, 팬미팅의 시대가 열렸다. 이니스프리에서 구매하는 상품 3000원 당 1장의 팬미팅 응모권이 부여되었는데, 사실상 다른 이벤트에 비해서 응모권의 가격이 싼 편이라 훨씬 매장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워너원에 입덕하기 이전, 필자는 주변에서 나름 알아주는 색조 코덕이었는데, 단 한 번도 이니스프리의 색조 제품은 구매해 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처음으로 구매해보았던 미네랄 파운데이션 빼곤! 이제 화해어플과 글로우픽’, 그리고 커뮤니티 뷰티방을 샅샅이 뒤져 이니스프리에서 살만한 것들을 검색한다. 선크림은 벌써 사용하고 있는 것이 세 개나 있지만, 매일 바르는 기초 제품이니 조금 묽으면서 백탁이 적은 무기자차[각주:1]를 하나 사고... 엄마가 쿠션 다 썼다고 했으니 쿠션 하나 사 드리고... 요새 피부가 안 좋으니 평이 괜찮은 비자시카밤도 사보자. 그리고 친구가 폼클렌져를 산다고 했으니 내가 대리구매를 하고^^ 팔레트랑 립스틱 세트는 이벤트로 세일 중이니 이걸 구매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소비이다. 그리고 이제 나도 탱탱한 새내기 피부가 아니니 미리미리 링클케어를 하는 것이 좋겠지... 아이크림도 사자. 이 모든 것은 워너원 팬미팅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 워너원 팬미팅이 걸려있지 않았다면 절대 구매할 일 없었던 제품들이었다.


 팬미팅 응모의 마지막 날, 괜스레 응모권 몇 개라도 추가한다면 당첨되지 않으려나 싶은 일말의 기대감 때문에 별 필요도 없는 공병과 기름종이, 압출기 등 다이소에서 충분히 살 수 있는 것들을 긁어 샀다. 그러나 역시, 팬미팅은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40만원 정도를 쓴 나는 내심 슬펐지만 인터넷에서 200만원을 쓴 사람도 떨어졌다는 것을 보니 나는 속상해 할 깜냥도 안 되는구나, 싶어 쉽게 미련을 지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팬미팅 사진들과 후기가 올라올 때에는 또, 왜 나는 쌩눈으로 멤버들을 볼 수 없는 것인지 서러워했다.


 다른 브랜드에 비해 이니스프리에 지출한 비용이 가장 큰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니스프리의 마케 팅(혹은 상술)은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구매하여 사용해 본 제품들의 질이 내가 그 전에 가지고있던 선입견에 비해 좋았고, 이벤트의 경우에도 합리적인 가격선에 팬미팅 행사도 깔끔하고 워너원과 워너원의 팬들까지 잘 챙겨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니스프리는 단타 광고가 아니라는 점도 고려하였다.


 이제 다른 종목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제품 몇 개를 추천할 텐데, 바로 파란색 패키징에 들어있는 아쿠아 UV 무기자차! 개인적으로는 유기자차보다 무기자차를 선호하는데, 무기자차를 바르고 그 위에 화장을 하면 화장이 무너질 때 코 옆 부분이 너무 더럽게 무너져서 슬펐다. 그래서 매번 화장을 하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유기자차를 사용했는데, 이 아쿠아 무기자차는 뭉침이 없고 백탁도 정말 없는 편이라 아침에도 빠르게 화장할 수 있어서 좋다. 이건 워너원이 이니스프리 광고 모델이 끝나도 계속 구매할 예정이다 추천추천. 그리고 섀도우 중에 올망졸망 도토리’!!!! 기본템으로 쓸 수 있는 갈색에 골드펄이 들어있는 섀도운데 발림성이 엄청 좋고 밀착력도 좋아서 손이 많이 가는 제품이다. 색조 제품은 정말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리뉴얼을 했다고 하는데 정말 괜찮은 것 같다.

 




너무... 너무 질려요... - 맛있는 유산균 요하이^^


요하이 상자 ( 굉장히 많은 버전 중 하나) : 종이껍데기를 버리지 못하는 병에 걸린 워너블.


 개인적으로 광고는 귀엽고 상큼하고 멤버들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매우 흡족했던 제품이다. 그런데 요하이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고 해야 할까. 요하이 또한 브로마이드 증정 행사를 기획했는데, 브로마이드의 종류가 단체, 그리고 멤버 당 두 개였나 세 개였나 그랬다. (내가 모은 것은 두 종류밖에 없어서 확실하게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최소 두 개는 확실하다.) 오프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는 곳은 롯데마트랑 롯데월드에 있는 스위트월드, 그리고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풀렸었다. 처음에는 나도 오프라인을 돌아다니다가 가는 곳마다 번번이 찾기가 힘들어서 온라인으로 시켰는데, 브로마이드가 들어있는 세트의 경우에 그냥 과자 가격보다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자 세 박스와 브로마이드 한 장이 들어있었던 것 같은데, 우선 첫 구매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요하이를 처음 먹어봤었는데, 샌드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무난하게 느낄만한 맛이었고, 정말 유산균이 많이 들어있는지 초반에는 화장실도 자주 가게 되었기 때문에 뭔가 기능적으로도 이득이라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롯데제과는 미친 듯한 프로모션을 보여주는데. 이벤트가 하나 뜰 때마다 정이 떨어지게 되는 반작용이 일어났다. 우선 첫 번째 브로마이드와 달리 전신 브로마이드를 증정하는 것이 두 번째 이벤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의 최애 멤버의 브로마이드가 매우 잘 나왔기 때문에 나는 또 즐겁게 요하이를 구매했다. 문제는 이 다음부턴데, 이미 쌓아놓은 요하이가 산더미인데 보틀 증정 이벤트 등등. 이니스프리와는 달리 요하이의 경우 자기들이 구성해놓은 과자 세트를 구매해야 브로마이드를 받을 수 있었고, 똑같은 과자를 몇 박스나 먹고 또 먹다보니 더 이상 먹기도 싫고, 나눠주기에도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또 보틀 세트는 가격도 비싼 편이었고, 요하이의 상술에 진절머리가 나 버린 나는 어느 순간 요하이 굿즈는 별로 탐나지도 않게 되었다.


 한편, 요하이 측에서도 다양한 프로모션을 진행했는데, 카카오톡 이모티콘도 제작했고 팬미팅도 준비했다. 그런데 카카오톡 이모티콘은 사실 디자인이 별로 취향이 아니라 땡기지 않았고 사용도 안 할 것 같아서 다운로드 받지 않았고, 팬미팅은 정말 노골적으로 많이 구매하는 순으로 당첨자를 뽑는다는 공지에 질려 응모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요하이는 처음에는 강렬하였으나 지금은 지긋지긋해져버린, 그런 제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워너블들이 공개방송이나 콘서트, 행사 등에 요하이를 들고 가 서로에게 나눠준다는 이야기도 종종 전해진다. 그래도 생각보다 제품의 인지도 향상과 매출에는 도움이 되었는지, 제과뿐 아니라 롯데 칠성의 요하이 밀키스 광고도 워너원이 촬영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이 제품까지 계약이 되어있었던 것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가끔은 패스할 때도 있어야죠 - 아이비클럽, 케이스위스, 더뮤지션

 

아이비 클럽 화보아이비클럽은 화보도 예뻤지만 워너원이 처음으로 출연한 예능 '해피투게더' 출근 교복을 협찬해주었는데 그 의상이 정말 완벽했다.



 몇몇 광고 제품들은 굿즈가 딱히 소장해야겠다는 욕구가 들지 않았거나, 구하러 다니는 것이 너무 민망하거나 번거로워서 포기한 경우가 있다. 전자와 같은 케이스가 케이스위스와 더뮤지션 리듬게임 어플이었고, 후자는 아이비클럽! 사실 의류는 화장품이나 과자류보다는 가격대가 있으면서도 내 체형과 스타일에 부합하지 않으면 덜컥 사기가 쉽지 않은 편이라 더욱 이런 경향을 띠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게임의 경우에는 내가 잘 하는 편이 아니라 관심이 가지 않았다. 계속 지니까 다시 하기도 재미 없고, 다운로드 받아야 구동이 되는 노래가 많아서 한 게임을 할 때마다 계속 용량이 줄어드는 거다. 가뜩이나 덕후의 핸드폰은 늘 오빠(아님)들의 사진으로 가득 차 만성적인 용량 부족에 시달리는데 말이다. 또 각 브랜드 또한 팬 싸인회 및 일일카페 등의 이벤트를 진행했지만 몇 번의 광탈의 경험으로 시도해봤자 안 될 것이라는 패배의식에 잠겨있었기 때문에 신청하지조차 않았다. 이렇게 나의 지갑은 조금이나마 지켜지는 듯이 보였으나, 곧 클린과 씽크네이쳐의 아름다운 상술이 시작되었다.

 




충성충성^^777 !! - 클린, 씽크네이쳐

 


 사실 클린 향수의 경우 특별한 마케팅을 하지는 않았다. 아주 간단하게, 예쁜 사진으로 인쇄한 브로마이드. 사실 이전 모델인 세븐틴의 경우 포토카드도 증정했다는 것 같은데 그런 굿즈들이 나오지 않아서 서운하기는 하다. 하지만 클린 화보사진 자체가 매우 멤버들의 이미지와 비쥬얼을 한껏 강조해주었기에 충성하고 싶다. 브로마이드의 재질 또한 지금까지의 다양한 브로마이드와는 달리 엄청 빳빳하고 상하지 않는 재질이었다. 무엇보다 향수의 향기 자체가 내 취향이었던 점이 이 제품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한 이유이다. 전체적으로 시향을 해 보았었는데 호불호가 갈리는 향은 오이비누 향이 살짝 나는 rain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난하게 뽀송뽀송한 향이다. 제일 유명하다는 웜코튼 향을 샀는데, 몸이랑 옷에 뿌리니 막 씻고 새 옷을 입은 기분이 드는 상큼한 향이라서 너무 좋았다. 사실 향수가 가격대가 있는 편이라 30ml짜리 제품을 샀는데 좀 더 큰 용량을 샀어도 후회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브로마이드 물량이 적게 들어온 편이라 이를 구하러 다니는 게 힘들었다는 것이 여러 워너블들의 반발을 사게 한 요소인 것 같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나는 마음에 들었고, 지금 롤러볼이나 오프레시 라인 향수를 더 살까 싶은 생각도 있다.


화보도 감동적인 씽크네이처 : 이후 씽크네이처는 팬미팅을 기획하였는데 본인은 40만원 정도를 지출하였으나 200만원을 쓰고도 떨어진 사람들이 많아 크게 '현타'가 오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씽크네이처 제품에 대해서 리뷰해보고자 한다. 씽크네이처는 워너원 멤버 중 강다니엘의 개인광고인데, 천연 샴푸와 바디 제품을 판매한다. 개인적으로 두피 건강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 평소에도 화학 물질이 많이 들지 않은 순한 샴푸를 찾아서 사용해왔는데, 이 브랜드는 다니엘의 광고 소식을 통해 처음 들어보았다. 3종 브로마이드 및 포토엽서 등을 증정한다고 해서 바디제품과 샴푸를 발품을 팔아 구해보았는데, 우선 브로마이드랑 굿즈의 사진과 컨셉이 너무너무너무 좋아서 사진만 보고 있어도 돈이 아깝지 않았다. 샴푸는 화학물질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향도 괜찮고 머릿결이 보들보들하게 유지가 되어서 정말 괜찮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허브향 하나만 샀다가 샴푸 두 개를 더 사와서 집에 쟁여두었고, 추석 선물로도 주변에 나눠주었다. 개인적으로 이 제품도 광고 덕분에 알게 된 좋은 상품인 것 같아 광고 모델 계약이 끝나도 계속 사용하고 싶다.

 


 

 중학교 시절 이후, 프로듀스 101를 통해서 다시금 오랜만에 아이돌 덕질을 시작하였는데 전과 다르게 정말 돈을 쓸 일이 많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다른 아이돌 그룹의 앨범에는 포토카드도 없었고, 종류도 단일하여 앨범 한 개를 구매하고, 스트리밍과 콘서트 티켓에 돈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앨범도 여러 종류로 발매되고, 다양한 광고템과 이벤트에 지출할 금액도 꽤나 부담스럽더라. 뿐만 아니라 프로듀스 101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내 아이돌이 데뷔했다는 기분 때문인지, 서포트 같은 경우에도 돈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입금하기도 하였다.


 분명히 나는 지금 덕질에 맹렬하게 돈을 쏟아붓고 있다. 가끔은 쑥쑥 줄어가는 계좌 잔액을 보고 멈춰서 생각을 해 보는데, 과연 내가 이후에 지금 나의 소비 상황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탈덕하고 나면, 혹은 마음이 좀 식게 되었을 때 지금의 내가 이렇게 돈을 펑펑 쓴 게 후회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내리게 되는 결론은 지금 워너원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지금 지출하고 있는 정도의 금액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지갑을 열고, 그들을 금전으로써 응원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아이돌이 다른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더 많이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돈을 쓴다.



 

본인이 운영하는 워너원 광고제품 인증용 인스타그램 : 워너원 광고제품이 아니어도 상품평을 업로드하긴 하나 워너원의 지분율이 95%에 육박함.









  1. 무기자차는 물리적 자외선 차단제를 말한다. 자외선이 피부에 흡수되지 않고 튕겨 나가는 원리로 자외선을 차단하는 선블록 제품이라고 생각하면 됨. [본문으로]


연극 <이방인> 후기

 


녹턴

 

 


 ‘치인다는 것은, 항상 교통사고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극을 보고 치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험한데, 노래처럼 여러 번 들을 수도, 영화처럼 다운 받아놓고 돌려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머릿속에 극 속의 장면을 수없이 떠올리며 앓을 수밖에.



 한 달 전, 알베르 까뮈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 <이방인>이 내게 그랬다. 그저 좋아했던 소설이라 호기심에 예매해 본 극이, 몇 주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앞서 말한 자체의 일회적인 속성 때문에, 나 같은 경우는 최대한 많은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며 연극이 끝난 후 바로 몇 마디 핸드폰 메모장에 끄적이거나, 희곡집을 구매하거나, 장면을 기억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편인데, <이방인>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하고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을 만큼 날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서 글을 써야만 했다. 조용히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렇게 그 객석에서 내 심장이 뛰었는지, 왜 그 대사들이 숨을 못 쉬게 했는지,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극장을 빠져나왔는지. 대체 이 극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길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다. 나름 프랑스어과라고 프랑스 작가의 책을 읽게 된 것인데, 처음 읽었을 때의 내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들에 공감할 수 없다 못해 화가 나기까지 했다. 어떻게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 그렇게나 아무 감정이 없을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고, 실제로 뫼르소 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과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두세 번 더 읽게 되었는데, 읽을수록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증오하던 뫼르소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어느 날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뫼르소는 위악적이라고. 부조리한 사회가 만들어낸 위악적인 인물이라고. 위악적? 거짓으로 착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거짓으로 악한 모습을 보이는 위악적인 인물. 그 말을 듣고 격하게 공감한 후, ‘위악적이라는 말 안에는 사실 그 사람의 껍질을 벗기고 나면 선한 본질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죽은 다음 날 애인과 함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옆집 남자와 싸운 아랍인을 햇빛 때문에쏴 죽인 뫼르소가,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모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그가 선하다니.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뫼르소의 위악적인 모습에 반해버리고 말았고,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직관적으로 뫼르소를 동정하고 그에게 격하게 공감하며 고등학교 때의 그 서평을 마쳤다.



 자그마치 2년이 지난 후 연극으로 만난 <이방인>, 뫼르소는 내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고 그 이유를 고민하게 했다. 내가 극에서 주로 관심 있게 보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얼마나 연극이라는 포맷 안에 효과적으로 담아냈는지, 연기뿐 아니라 배경음이나 무대 등을 잘 사용했는지, 캐릭터가 명확하게 하나의 노선을 걷고 있는지 등이다.[각주:1] 이런 면에서 연극 <이방인>은 아무리 천천히 생각해봐도 이 모든 것들에 있어 완벽한 극이었고, 내가 한 번밖에 볼 수 없는[각주:2] 이 극에 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연극 <이방인>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이틀 밤을 꼬박 새워야겠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독백얘기를 주로 하고자 한다. 이 연극이 원작의 1인칭 시점 문장들을 꽤나, 그것도 많이, 그대로, 뫼르소의 독백으로 살린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뫼르소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극은, 뫼르소의 독백으로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진행되고 결국 결말까지도 독백으로 끝난다.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독백 위주의 극 진행은 오히려 <이방인>에서는 장점이었다. 온전한 뫼르소의 입장에서, 그의 (물론 크지 않은) 표정 변화와 행동 등을 관찰할 수 있었고 이는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더욱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인물 간의 대화가 나오는데, 이 대화의 비율 역시 적당했다. ‘적당했다고 하면 굉장히 애매한 기준 같은데 적어도 내게는 지루하지 않게 독백과 대화를 적절히 섞어 배치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독백의 주도성 덕분에, 모든 인물이 뫼르소의 이야기 안에서 움직이는 상상 속 인형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작은 산울림 극장에서 큰 무대 장치도 없이, 단순히 소리와 벽에 쏘여지는 영상, 장소를 표현한 간단한 조명과 함께 진행되는 뫼르소의 독백은 까뮈의 소설이 주는 그 잿빛의 느낌과 묘한 긴장을 모두, 완전히 포함하고 있었다. 아랍인을 총으로 쏘기 직전, 그 작열하는 태양과 그에 비치는 칼날, 그리고 뫼르소의 차분하지만 흥분된 목소리, 필름이 끊긴 것 같은 전자적인 소음. 단언컨대 이 장면 이후에는, 누구도 뫼르소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독백을 위해서는 당연히 배우의 연기력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번 뫼르소를 연기했던 전박찬 배우를 처음 본 건 연극 <맨 끝줄 소년>이었는데, 이 연극 역시 독백 위주로 진행되는 극이었다. 그때도 차분하지만 모든 공기를 압도하는 그의 연기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전박찬 배우에게 연출이 먼저 <이방인>의 뫼르소 역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명확한 발성과 딕션, 연기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어쨌든 그는 누구보다도 감정의 변화가 적은 뫼르소를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애인 마리와 있을 때 짓는 활기차지는 않지만 가식적이지도 않은 미소, 사제와의 대화에서 부르짖는 울음 섞인 목소리, 잠에서 막 깨어나 누운 채로 뱉는 독백, 마지막 죽음 앞에서 비로소 위악을 벗어 던진 채 불안에 떠는 인간적인모습. 전박찬 배우는 이 모든 장면에서 묘한 차분함을 잃지 않는 뫼르소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냈다.

그럼에도 약간의 아쉬웠던 점은 단 한 가지였다. 바로바로 공간적 배경이 바뀌다 보니, 암전이 조금 많았던 것. 극에서 암전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암전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준비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어떤 감정의 여운을 느끼는 시간 역시() 제공할 때도 있고. 하지만 암전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관객은 그 시간 동안 잠시 극에서 벗어나 집중력을 잃게 된다. 재빨리 바뀌는 시공간 때문에 이를 표현하기 위해 암전을 사용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게까지 많을 필요가 있나 싶은 장면도 더러 있었다. 무대의 전환이 크게 필요한 장면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이 아쉬운 점은 정말 아쉬운점일 뿐, 큰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긴 했지만.


 원작이 있는 것을 다른 장르로 옮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함은 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작을 완전히 그대로 옮길 수는 없기에 보수와 혁신을 적절히 섞어야 하는 그 지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태 많은 소설들이 연극, 뮤지컬화 되었지만 단연 <이방인>은 최근 내가 본 그런 종류의 공연 중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뫼르소 입장을 잘 살려냈고, 연출도 참신했고, 음향이나 조명의 사용도 적절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결국에는 관객이 뫼르소에게 공감하게 했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극의 형식으로서도, 내용으로서도 두루 좋은 점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적이라는 게 뭘까.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모습과 거리가 먼 뫼르소의 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끔찍이도 인간적인사람들뿐이었다. 사랑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동정하고, 증오하는. 그런 감정들로 똘똘 뭉친 사람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었던 건 뫼르소일지도 모른다. 그만의 방식으로, 그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세상이 그를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 아주 작은 가면까지 벗고 나면 뫼르소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친 감정 한 구석에는 세상에 대한 냉소함과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 그리고 주변에 어떠한 것들에도 흔들리지 않다가도 사소한 것으로 무너져버리고 마는 얇고 단단한 어떤 것이 자리잡고 있을지도. 그리고 그 어떤 것이 무너져버린 인간적인 뫼르소의 마지막 독백으로 이 글을 끝맺어본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 세상이 나와 너무도 닮아서 꼭 형제 같다고 느끼며, 나는 내가 행복했었고 또 여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내게 남은 바람은 내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분노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1. 사실상 전부인 듯. 좋은 극인데 한 번밖에 보지 못한다면 계속 생각하게 되고 그럴수록 다른 방향에서 고민하게 된다. 또 여러 번 볼 수 있는 환경이라면 매번 볼 때마다 다른 것에 주목하게 된다. 그렇게 의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뮤지컬 동아리에서 연출로 일하다가 생긴 직업병 같기도 하고. [본문으로]
  2. 관극(극 관람)이 가능한 다른 날들에는 약속이나 다른 관극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능하다고 해도 불가능 했던 것이, 이미 남은 회차가 전석 매진이었다. 적은 객석 수였다고 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 샌가 소문이 멀리 퍼졌더라. 좋은 극을 한 번으로 끝낸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 [본문으로]


네덜란드에서 아끼던 현대 미술관에 대한 단상들 1

 

르네오

 

 

0.

 


 나는 미술관이 좋다.


 정확히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 MMCA나 서울시립미술관처럼 크고 넓은 곳일수록 가는 길에서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잔뜩 기대하고 찾아간 현대미술관은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어준다.


 내가 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간단하게 설명하는 일은 명절에 친척들에게 또는 택시 운전사에게 미학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설명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책이나 수업에서, 운이 좋을 때는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좋아하는 작품들, 어떤 작품이 왜 좋았고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하는지 설득하는 비평의 작업들, 더 넓게는 작품을 미술사적 이론이나 미술 밖의 이론을 적용하여 의미화하고 맥락화하는 미술 담론들. 모두 나의 관심의 대상이고 앞으로 계속 배우고 느끼고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은 것들이다. 그렇지만 내가 현대미술과 미술 이론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미술관에서 내가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설명하려 하다 보면 어딘지 딱 들어맞지 않고 무언가 새어나가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미술관에 직접 갔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일련의 과정들, 감각적 경험과 생각들의 총체가  좋다. 직접 그 공간 속에서 발에는 통증을 느끼면서 주변의 다른 모든 배경과 맥락들(다른 작품들까지 포함해서) 사이에서 실제로 공간을 차지하면서 놓여 있는 작품들을 보고 거니는 경험이 좋다. 그런 경험을 한 이후로 그 공간은 내 공간이 된다. 그러면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도 어느 날 불현듯, 아니면 비평문을 쓸 만한 작품이 있나 의식적으로 기억을 되돌려 볼 때면 바로 그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졌던 경험들이 - 그때의 감각과 장면들, 스쳐갔던 생각들이 - 재현된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의 합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각 미술관이 그 건물의 전체 구조와 작품들을 통해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 작품들을 특정 담론이나 비평을 통해 의미화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큐레이팅 방식 등이 미술관의 컬렉션만큼이나 그 미술관에서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야말로 각 미술관이 스스로에게 어떤 역할과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공간 자체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만드는 고유한 특성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1.

 

 작년 하반기 네덜란드로 교환을 가 있던 동안, 그리고 혼자 오랜 시간 여러 도시들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서울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아주 많은 미술관들을 가보았다. 특히 교환을 가게 된 대학에서 미술관학/ 박물관학(Museology) 수업을 들었던 11월에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현대 미술관들을 도장 깨기 하듯이 혼자 열심히도 찾아다녔다.


 미술관학은 미술관의 제반 활동들의 목적과 실현 방법들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미술관은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개별 작품과 작가에 대한 비평이나 미술사적 담론들, 예술 철학만 접해보았지 미술관이라는 실제 공간이자 제도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나에게 필요한 공부다, 하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강 신청을 했다.

기대와는 달리 실제 수업은 실용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네덜란드의 경우 (아마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예술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활동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미술관 역시 공적 보조금과 정책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예술을 위해 (특히 네덜란드 미술관의 방문객은 학생이나 3, 40대의 비율이 매우 적고, 부유한 노년층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공적 지원이 이루어지는 점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전시 방식과 이벤트성 행사들을 활용하여 다양한 층의 관람객들을 끌어들이고 어느 정도의 수익성을 확보함으로써, 미술관의 공적 가치를 증명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공적인 것이 단순히 얼마나 많은 수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지의 문제라는 생각, 그리고 수익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통해 미술관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에 대응하겠다는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많았다. 이 수업에서는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 예술이 사회에서 갖는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모든 예술은 즐겁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험 경제에서의 상품의 일종으로 동질화되고 경제와 실증주의의 논리에 따라 재단 되고 수단화된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토론들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었고, 참여할 의욕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수업에서 말하는 것들 외에 미술관에 대해 어떤 말들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넘쳐나는 여유시간 동안 미술관을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습관이 시작되었다. 당일치기라고 해도 기차와 버스를 타고 3-4 시간 걸리는 곳들이었지만 그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즐거웠다. 한 달 남짓한 그 기간이 어쩌면 관심이 가는 무언가를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시간을 바쳤던 기간인 것 같다.


 그때 갔던 많은 미술관들 중 몇몇에 대해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작품 소개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다. 전시 기획이나 미술관학적 관점에 따른 분석이라고 장황하게 말하기에도 어려운 소소한 경험담이다. 미술관이란 작품을 포장하고 정리해두는 용기나 빈 공간으로서의 역할 이상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주려 시도하는 미술관들 (그러한 시도의 방향이 나의 생각과 같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야기할 거리들이 있는 곳들)에서의 나의 경험과 두서없는 생각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2.

 

 마스트리트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아인트호벤 Eindhoven이라는 도시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 미술관들 중 하나라는 (마침 작년이 설립 80주년이었다) 반 아베 Van Abbe 미술관이 있다. 아인트호벤 자체가 한적한 도시인데 미술관 건물이 전시 관련 포스터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채 주택가에 위치해 있어서 처음에는 지나치면서 미술관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미술관학 수업에서 한 번 단체로 가게 되었고, 미술관 규모도 크고 기획 전시도 자주 바뀌는 편이라 그 후에도 몇 번 더 찾아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건물이 미술관인지도 몰랐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건물의 형태는 적어도 공연장이나 문화공간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는 비정형적이고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기하학적인 구조물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회색 건축물이 보이고 그 앞에는 작은 연못이 건물의 형태를 비춘다. 연못 바로 앞에는 투명한 유리 벽 안으로 비치는 모던한 느낌의 카페가 보이고 야외 테라스도 있다. 건물 내부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금 내가 몇 층에 있는 건지도 헷갈릴 만큼 계단과 복도들이 비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각 층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열린 구조여서 다른 층의 공간들도 부분적으로 볼 수 있고, 건물의 꼭대기까지 천장이 뻗어 있어 안 그래도 넓은 공간이 더 넓게 보인다. 의도적으로 전시실 벽면에도 넓은 빈 공간을 뚫어 옆 전시실에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반 아베 미술관은 개방적이면서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건물 구조를 활용하여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모든 층에서 보이는 넓고 높은 벽면에는 웃음소리인 HAHA의 철자 모양으로 화려한 색의 조명들이 깜박이며 빛나는 대형 오브제로 설치되어 있다. 또 다른 벽면에는 댄 퍼잡스키 Dan Perjovski의 낙서화 작품이 그려져 있다. 퍼잡스키의 작업은 쉽고 단순한 낙서로 사회적 문제를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인데, 그림 하나하나를 액자에 넣어 전시하는 것보다 이렇게 넓은 벽면에 정말 낙서처럼 그려 넣은 것이 더 작품의 취지나 분위기와도 맞고, 건물의 구조를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서로 다른 층이면서 교차하는 방향의 두 복도에서는 각각 한 남자와 여자가 단순한 선율을 반복하면서 (마치 계란말이 김칫국 아카펠라처럼) 화음을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도 정기적으로 상연된다.


 이처럼 반 아베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관람자에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한 번에 한 작품씩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보다는 조금은 산만하게 공간들을 누비고 다니면서 여러 작품들을 동시에 마음대로 연결하고 뒤섞어 경험할 수 있는 떠들썩한 공간을 만들고자 의도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열이라면 열 사람 모두 저마다 다른 동선과 시선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돌아갈 것 같다. ‘이 전시에 정해진 순서나 방법 같은 것은 없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찾고 연결하고 즐겨라!’ 미술관의 공간 전체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른 미술관들에 비해 공을 들인 것 같1층 아카이브 전시실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반 아베 미술관은 꽤 넓은 공간을 관람자가 직접 사진과 포스터 작업들을 미닫이 서랍장에서 꺼내어 볼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작업들을 골라 벽면에 전시해볼 수 있는 DIY 아카이브 전시를 위해 쓰고 있었다. 더 안쪽에는 영상 작업들을 직접 고르고 앉아서 볼 수 있는 작은 상영관이 있었다. 여기서는 여유만 있으면 몇 시간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미술관 로비에는 관람자가 미술관 건물이나 전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배치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의 예를 들면, 미술관의 주요한 장소들을 다른 위치와 시점에서 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가이드와 함께 관람자 스스로도 새로운 위치들을 발견하고 기록함으로써 공유할 수 있는 툴키트가 있었다. 그야말로 자유롭게 내 맘대로 관람할 수 있는 DIY 미술관!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 누구나 각자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비획일적인 공간. 그래서 작품들과 전체 공간을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보고 조합했을 때 어떤 새로운 의미나 경험의 지평이 열리는 것인지 궁금해지지만 그에 대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논의도 제시하지 않는 점이 조금 찜찜한 느낌 어쩌면 특정한 관점에 따라 의미화하고 주장을 하는 일 자체를 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이야기들만 떠다니는 느낌 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곳의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다 지하에서 발견한 한 작은 전시실은 반 아베 미술관이 내세우는 기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 지나침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였다. 멀리서 보이는 전시실 안에서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마도 작품인 것으로 보이는 오브제들을 만지며 놀고 있었고, 몇몇 어른들이 팔짱을 끼고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 엿들어보니 미술관에 전시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관람자는 만져볼 수 없고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누구나 (특히 아이들이나 시각장애인 등 기존의 미술관 전시에서 관람자로 고려되지 않고 시각예술의 향유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 만지고 즐길 수 있는 작업들을 모아두었다는, 그런 취지의 전시실이었다.

우선 그 안에 있는 작품들이 적어도 어떤 작가의 예술작품이 맞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단지 아이들의 감각 교실을 위한 재료들처럼 보여서 기획자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인 대상들과 구별할 수 없는 대상도 비평적 의미화를 통해서든 제도를 통해서든 예술이 될 수 있다고들 하지만, 이 작품들에 그럴 만한 역사적 의미나 숨겨진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작품들을 이리저리 만지고 갖고 돌아다녀 본다고 해서 그로부터 우리가 미술관에서 찾고 기대하는 경험들 - 비일상적인 감각의 경험, 새로운 지각과 사유를 하게 되는 경험 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DIY 아카이브니, 툴키트니, 심지어는 이런 감각 체험 교실 같은 전시를 기획하면서 미술관 측에서 스스로 누구나 예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공공성과 다원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만족스러워할 상상을 하니 답답했다. 분명 그들이 하는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미술관이 왜 소위 교양과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춘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시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의미를 갖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을 지향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직접 작품을 만져보고, 자기만의 아카이브를 만들어보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건물을 누비고 다니는등 보여주기 식의 형식적 참여를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고 유효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Do It Yourself라는 반 아베 미술관의 기조는 획일적인 상품을 소비하는 단계를 넘어서 직접 부품들을 선택하고 조립할 수 있는 대상을 통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이를 소비하는, 경험 경제의 소비 행위와 너무나 닮아 있다. 미술관은 소비자-관람자가 각자 취향에 맞는 맞춤형 관광상품을 즐길 수 있도록 상품-작품들로 꽉 찬 공간을 열어 놓는다. 여기서 예술이 소비의 대상이 되고 미술관에 경험 경제의 논리가 도입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형식적인 참여와 다원성을 최종 목적으로 두는 미술관에서는 공통의 사회적 담론이나 문제의식, 가치판단에 관한 주장들이 모두 필요 없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관람자가 개인적 의미를 갖는 자기만의 경험을 구성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숨겨지고 지워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예술의 사회적 의미나 가치에 대한 주장들을 오히려 사장시키는 미술관이란 결국 미술관의 역할을 단순히 공간을 구획하고 작품을 늘어놓고 관람자에게 모든 해석과 의미화를 맡겨두는 텅 빈 공간으로 축소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반 아베 미술관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소비하고 싶을 만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스스로 생각하는 공공성을 얻기 위해 어떤 가치판단이나 주장도 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결국에는 경험의 소비만이 일어나는 텅 빈 공간을 내세우고 있는 것 아닐까?



(2호에 계속..?)


SMP - 그 오글거림까지 사랑해버린 거야


양장피





 

 2017SMTOWN 콘서트 유노윤호의 <DROP>* 무대 (사진 제공: 멜론매거진)

 


 

 동방신기가 제대했다. SM의 제왕이 돌아왔다. 20113명의 멤버가 탈퇴하고 2인조 그룹으로 돌아온 첫 앨범의 타이틀곡 전주에서 리턴 오브 더 킹을 외치던 분들 아니랄까봐, 리더 유노윤호의 솔로곡 컨셉은 무려 황제다. 2017925일 공개된 DROP의 뮤직 비디오에서 유노윤호는 월계관을 쓰고 황제 복을 입은 채 부조리한 어둠의 세계를 비판하며 희망을 외친다. 시작부터가 상식을 잊어버린 비정상의 아류만이 남았다. 그때가 틀렸고 지금이 바로 정상이다.’ 라는 비장한 나레이션이다. 강한 비트와 쉴 틈 없이 꽉 찬 화려한 안무, 비장한 멜로디와 사회비판적인 가사. DROP은 지금까지 동방신기가 해왔던 것이자 가장 잘하는 것인 일명 ’SMP'의 전형이다. SMPSM Music Performance의 약자로 SM 엔터테인먼트가 내세우는 퍼포먼스 특화 음악이다. SM 아이돌이라면 한 번씩 거쳐 가는 장르이며 SMP로 분류되는 많은 노래들은 SM 노래 같다.’라는 평을 받으며 SM 엔터테인먼트의 음악성을 대표한다. 예시를 들어보자면 보아의 Girls on top, 허리케인 비너스, 동방신기의 Rising Sun, (Keep Your Head Down),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 샤이니의 링딩동, 셜록, f(x)Nu ABO, Red Light, 엑소의 MAMA, 늑대와 미녀 등이 있다. 같은 소속사라도 각 그룹마다 내세우는 캐릭터가 다르고 데뷔한 시기가 다른 만큼 그 특징의 차이는 있지만 무대 위에서의 퍼포먼스를 중점으로 만들어진 곡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SM 소속 아이돌이 수행하는 모든 댄스 곡이 SMP로 분류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특별히 SMP의 정수와 같다고 불리는 곡들이 존재한다. 듣자마자 아 이거 SM 노래다.’라는 반응이 오게 만드는 노래들이 있다


EXO의 MAMA 티저. MAMA에서 엑소 멤버들은 각기 다른 초능력을 가진 설정을 들고 나왔다.



 흔히 정통 SMP라 불리는 노래들은 사회 비판적이고 독특한 가사, 유영진과 Kenzie의 작곡, 화려한 퍼포먼스, 대략 세 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다. 우선 가사를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대중가요가 사랑과 이별을 노래할 때, SMP는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하고 혼란 속에서 자아를 찾는다. 동방신기는 인생은 마치 끝없는 궤도를 달리는 별과 같다며, 정말 혼돈의 끝은 어딜까 질문한다(Rising Sun, 부제-순수). 3<"O"-...>에서는 무려 헤겔의 변증법을 논한다. 갓 데뷔한 2012년의 엑소는 언젠가부터 01로 만든 디지털에 인격을 맡겨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 우리들을 위해 절규한다(MAMA). 이런 가사들은 언뜻 보면 심오하지만, 재미있게도 가사 전체를 보면 일관성이 떨어진다. <Rising sun>, <"O"-...> 등은 모두 한껏 세상에 분노하며 거칠게 고음을 지르다 갑자기 느슨해지며 언젠가 평화는 온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O"-..> 의 경우 실제 헤겔의 정반합 이론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이번에 발표된 유노윤호의 <DROP> 또한 마찬가지다. 척박한 시대를 깨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게 주된 메시지인데, ‘언제 또다시 내던져버린 진실이란 넌 나를 찾게 될까.’, ‘다시 부활을 꿈꾸고 있다면 착한 가면을 쓴 채 기회를 본다면 No’라는 가사는 의미를 파악하기가 영 힘들다. 사실 주제가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인데 컨셉은 황제라는 것부터가 맞지 않는다. 이에 왜 굳이 거창한 주제들을 택하며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면서 오글거리는 가사로 거부감을 주나 의문을 가지는 팬들도 많다. 그러나 사회 비판적인 성격의 SMP들의 주제가 나름 발표 시기에 이슈가 된 사회 문제들을 반영해왔다는 것을 고려하면 단순히 차별화를 위해 그런 가사를 채택한 것은 아닌 듯하다. 20179월 촛불 시위가 이뤄낸 대통령 탄핵 이후 발표된 유노윤호의 <DROP>의 랩에는 ‘It started with candles’라는 가사가 들어갔다. 2014년 발표된 F(x)<Red Light>는 세월호 참사를 비판했다. ‘앞으로만 밀어대니 Yeah 밀어대니 Nah 아차 하면 밟혀.’, ‘Ay Ay It's a Red Light Light 이건 실제상황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라.’, ‘눈 크게 떠 거기 충돌 직전 폭주를 멈춰. 변화의 목격자가 되는 거야. 밀어대던 거친 캐터필러. 그 앞에 모두 침몰할 때.’ ‘니가 말한 최선이란 변명 내겐 의문투성이일 뿐.’ 이와 같은 가사에서 SM 측은 내부 논의를 거쳐 침몰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쓰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각주:1]


그럼에도 많은 SMP에서 발생하는 가사 의미 전달의 문제에 대해선, SMP 곡 중 대부분을 작곡한 유영진이 해명한 바 있다. 그는 2013년 인터뷰에서 작곡할 때 멜로디와 가사보다 리듬과 안무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사의 운율을 댄스곡의 리듬에 맞추다 보면 미리 써 놓은 가사 내용에서 몇 단어만을 발췌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그는 이것이 본인의 능력 문제라고 말했다.[각주:2]


 유영진은 SMP의 아버지라 불린다. <Rising Sun>, <(Keep your head down)>, <링딩동>, <Sorry Sorry>, <I Got a Boy>, <행복> 등 수많은 SM 아이돌의 타이틀곡, 히트곡들이 그의 작품이다. 특히 강렬한 SMP 작곡을 주특기로 한다. 유영진이 부드러운 곡을 내놓았을 때 SM 아이돌 팬들은 유영진이 드디어 세상과 화해했다.’며 놀라워한다. 그는 무대 위에서 가수가 드라마틱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작곡을 한다. 일전에 완벽한 퍼포먼스를 위한 음악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MBC 무용단 출신으로서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미리 포인트 안무와 무대에서의 연출을 염두에 두고 곡을 쓴다. 확실한 무대의 기승전결을 위해 원래는 다른 곡이었던 두 곡을 섞기도 하고, 여러 장르를 혼합시켜 곡 분위기를 전환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들은 듣는 이들에게 혼란을 주거나, 신선한 충격을 준다. 유영진은 작곡가 이전에 정규 3집을 낸 R&B 가수다. 그래서인지 R&B적인 창법이 돋보이는 댄스곡이 SM 아이돌에게는 유난히 많다. 팬들 사이에서 유영진 특유의 R&B 창법을 가장 잘 소화하는 최강창민, 디오가 유영진의 뮤즈, 유영진의 사랑이라고 불린다.[각주:3] 디오는 유영진과 함께 SM station을 통해 R&B 듀엣 <Tell me what is love>를 발표하기도 했다.





 SMP의 또 다른 대표 작곡가로는 Kenzie를 꼽을 수 있다. 엑소의 <중독>, <Monster>, <늑대와 미녀>, 레드벨벳의 <Ice cream cake>, f(x)<Hot summer> 등이 그녀의 작품이다. 유영진보다 작곡 장르의 스펙트럼이 넓으며 더 복잡하고 독특한 느낌의 곡들을 만든다. 특히 SM에서 아방가르드를 맡고 있다고 평가되는 샤이니, f(x)와 합이 잘 맞는다. Kenzie의 주 무기는 복잡한 화성으로, 그녀의 능력은 SM의 곡들이 타 아이돌 기획사의 곡들보다 더 섬세하고 꽉 찬 화성을 보여주는 바탕이라 볼 수 있다. 유영진이 오글거리는(?) 사회 비판적 가사를 즐겨 쓴다면 그녀는 참으로 독특하고 난해한 가사를 선보인다. ‘땀 흘리는 외국인은 길을 알려주자. 너무 더우면 까만 긴 옷을 입자.’<Hot summer>의 가사는 정말이지 가사가 이상한 SM 노래의 대표로 꼽힌다. 샤이니의 <Why so serious?>의 가사는 무려 사랑에 빠진 좀비 컨셉이다. SM의 대표 작곡가로서 유영진과 KenzieSMP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유행에 따라 그 형식을 변주한다. 두 작곡가의 꾸준한 활동은 SM 아이돌이 단단한 팬층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정통 SMP'가 타이틀곡으로 발표되었을 때, SM 아이돌 팬들의 반응은 흔히 역시 슴피(SMP를 칭하는 팬들의 용어)가 짱이다.’ 이거나 좀 대중적인 노래로 하지.’ 둘 중 하나다. SMP의 색깔이 너무 강한 노래들은 흔히 대중에게 SM이 이상한 노래 냈다.’라는 식의 반응을 얻는다. SM도 대중성 결여의 문제를 인식하는지, 최근 들어 강렬한 SMP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활동 연차가 쌓인 소속 가수일수록 더 중화된 세미 SMP'(?)를 부르는 추세다. 정통 SMP는 대부분 데뷔곡이거나 데뷔 후 두 번째 활동 곡으로 발표된다. H.O.T, 신화, 슈퍼주니어, 엑소가 SMP로 데뷔했다. 동방신기와 샤이니의 경우 보다 부드러운 데뷔곡을 들고 나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SMP를 들고 나왔다. 가장 최근에 데뷔한 SM 소속 그룹 NCT’Neo Culture Technology‘의 약자인 팀명에 걸맞게 한층 세련된 SMP를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SM은 소속 아이돌들의 데뷔마다 이 그룹은 SM 소속이라고 선포하듯 대중성과 조금 떨어진 SMP를 내놓는다. 실제로 이 곡들은 일반적인 아이돌 후크송보다 음원 성적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SM은 꾸준하다. 한국의 그 어떤 음악보다 대중적이고 진입 장벽이 낮은 것이 아이돌 음악인데, 최고의 아이돌 명문가라 불리는 SM이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부담스러운 노래를 내놓는다. 이미 확실한 팬층을 가진 대형 기획사로서 어떤 컨텐츠든 웬만하면 먹힌다는 확신이 있어서일까?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SMP의 코어 팬 층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제 그 코어 팬 중 하나로서 필자가 느낀 SMP의 매력을 한번 말해보고자 한다. 확실히 정통 SMP(특히 동방신기의 노래들)는 부담스럽다. 오글거린다. 한창 정통 SMP가 나오던 시기는 2010년 이전이라 지금 듣기에 조금 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중독적이다. SMP에 빠지면 그 세련되지 않음을 즐기게 된다. 그 강렬한 퍼포먼스와 과한 비장함에 처음엔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지 몰라도, 노래를 듣다 보면 홀린 듯 흥이 난다. 노래의 핵심 파트들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노래방에서 SMP를 부를 때엔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정통 SMP의 라이브 무대는 거의 종교의식 현장에 가깝다. 사회에 분노하는 SMP를 떼창할 때 관객들의 모습은 거의 혁명 전사다. 거기다 그 과격한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미인들의 모습이 주는 만족감이란. 꽉 찬 안무와 무자비한 곡의 구성은 간혹 이게 아이돌 무대인가 차력 쇼인가 의문이 들 정도다. 찌르는 고음, 칼군무, 당황스러운 내용의 가사, 어둡고 비장한 멜로디, 갑자기 바뀌는 곡의 진행.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SMP는 한마디로 자극적이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타 아이돌들의 무대와는 또 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어떻게 보면 헤비메탈 팬들의 심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 아이돌 노래라기에는 쓸데없이 과한 비장함엔 대체 불가능한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SMP의 골수팬들은 유영진이 세상과 화해하기보다는 대중과 SMP가 화해하길 바라며 지속적인 SMP의 등장을 바란다. 엑소의 MAMA 이후 이렇다 할 정통 SMP가 등장하지 않았는데, SMP의 적자인 동방신기의 제대는 SMP 코어 팬들에게 단비와도 같았다. 그리고 유노윤호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물론 음원 성적은 저조했다.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차트 인을 실패했으니. 팬들도 좋은 음원 성적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유노윤호와 유영진은 2017년에도 정통 SMP를 시도했다. 이젠 세상과 화해한 듯 했던 유영진이 다시 척박한 세상에 분노하는 곡을 쓴 이유가 그저 코어 팬들 때문일까? 1996H.O.T의 데뷔 이후 2017년 현재까지 SMP는 여전히 살아있다. 이러한 뚝심은 코어 팬층의 존재와 대형 기획사로서 가진 보장된 성공 가능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수많은 논란과 조롱을 뒤로 한 채 SM은 그들이 추구하는 완벽한 퍼포먼스를 위해 20년간 비장함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물에 오랜 팬들은 열광한다. SMP에 열광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SMP에 한번만 열광해본 사람은 없다고 감히 말해본다.






  1. 2015년 11월 이성수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싱본부장의 동아일보 인터뷰 [본문으로]
  2. 2013년 유영진의 텐아시아 인터뷰 [본문으로]
  3. 최강창민은 항상 SMP에서 빠지지 않는 절규 파트를 담당한다. 뭐니뭐니 해도 주문에서의 고음 애드리브가 레전드. [본문으로]


무다영이 22살이 될 즈음엔

<며느라기> 리뷰

 

K


 

*본 글은 201710 월경에 작성되었습니다.

**2018 1 월의 추신이 덧붙여졌습니다.

 

 

무다영이 22살이 될 즈음엔

<며느라기> 리뷰

 

K

 

*본 글은 201710 월경에 작성되었습니다.

**2018 1 월의 추신이 덧붙여졌습니다.


 




 

2000년의 놀이

 


여기에서의 이름은 ‘K인 덕분에 나는 꽤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가령 이 이름에 기댄 동안은 누군가에게는(혹은 자신에게) 버거운 이야기를 담백하게 끄적일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할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버겁더라도 언제고 했어야 할 이야기이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면 알겠지만, 내가 겪은 일들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극악하지는 않다. 이 글에 관심이 있을 (혹은 없을) 누구나 소위 큰집이라 불리는 공간에서 한 번씩은 겪어 봤을 법한 것들이다. 나의 경험은 대부분 어떤 놀이와 관련된 것들인데, 대여섯 살이 되던 무렵에서부터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할아버지 댁에 가면 하는 놀이들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박스 서너 개에 가득 찬 목기를 닦는 일이었다.

나에게 이 놀이를 가르쳐준 사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촌 언니였다. 우리 둘이 함께 짝을 지어 목기를 닦고 있으면, 그 모습을 본 집안 어른들은 지나가며 한마디씩 던져주곤 했다.

 



아이고 우리 00이 시집가도 되겠네

쪼꼬만게 손들이 야물딱지네~’

 


같은 것들. 여자아이라면 한 번씩 들어보았을 법한.


n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장면들의 촉감이나 소리 같은 파편들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가령 행주로 닦아내기 전의 목기는 늘 찐득찐득하다는 것/ 옆에 언니가 있다는 것/ 제기의 목을 잡고 빙빙 돌려가며 닦아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빙--돌릴수록 어른들이 칭찬을 해주고, 웃어준다는 것 따위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이유들로 그 놀이를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하루는 할머니에게 제사 준비 돕지는 않고 소파에서 빈둥댄다는 이유로 크게 혼난 적이 있다. 옆에서 쉬고 있던오빠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순하고 큰 눈은 열심히 끔벅이고 있었지만, 그 몸은 여전히 소파에 기댄 채였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하던 놀이는 실상 잘할수록 칭찬받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꾸지람 듣는 일임을 체득했다. 돌이켜 보니 그 놀이에 오빠는 없었다.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속은 부글거렸고, 오빠가 밉지는 않았지만 또 영문을 모른 채 슬펐다. 아마 그때가 처음으로 억울하다라는 단어를 익힌 날이 아닌가 싶다.


또 중학생이 된 언니는 할아버지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던 때였으며, 그 무렵 나는 내가 놀이를 배우던 즈음 태어난 사촌 동생들에게 다시 그 놀이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2017년의 놀이


 

아이는 설날을 맞아 큰 할아버지 집에 왔다. 엄마랑 박기동 할머니랑 민사린 아줌마랑 밥을 먹고 이제 tv를 본다. 엄마는 부엌에 있다. 심심하다. 할아버지들과 오빠들 틈 사이에 낑겨본다. 할아버지들은 tv만 보고, 옆의 사촌 오빠들은 자기들끼리 게임기에 빠져있다.


아이는 무언가 떠오른 듯이 행주를 집어 들고는, 상을 닦는 시늉하기 시작한다. 곧 어른들의 아유~”하는 소리가 뒤따른다. 어른들이 거드는 소리 몇 마디에 더 신이 나, 아이는 뜩딱뜩딱소리를 내가며 두 손을 더욱 열심히 움직인다.



그 소리,




다영이 잘하네

시집 잘~가겠네

시집가도 되겠다

 


<며느라기> 9.7, ‘설날



  같은 것들. 여자이라면 한 번씩 들어보았을 법한.

그러나 곧 엄마가 소리친다. 화가 난 것 같다. 아이는 놀라 멈칫한다.

 


무다영 누가 그런 일 하래. 이리와!!”

 



며느라기

 


여느 때보다도 긴 추석 연휴였다. 간혹 외국 친구들에게 명절을 설명해야 할 때가 오면, ‘Korean national holi..day’라며 주춤거리며 답하곤 한다. 망설인 이유는 명절의 사전적 정의가 ‘holiday’일지언정,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네풍경은 결코 ‘holiday’의 스틸 컷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모두가 즐거워야 할 명절이 누군가에게는 소위 이 되는 것일까? 아니, 이제 명절에 마냥 즐거운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고민 없이 마냥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그를 찾아보는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여기 결혼 후 맞는 첫 명절이 마냥 즐겁지 않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그리고 몇 십만 명의 팔로워가 그녀가 올린 SNS 게시글을 받아 보며 그녀와 함께 했다. 위근우 기자의 서두를 빌려 적자면, 그녀의 일상을 넘겨보는 사람들은 또 어떤 속 터지는 일이 벌어질까.”[각주:1] 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새로운 피드를 기다렸을 것이다. 바로 만화<며느라기>의 주인공, 민사린의 이야기이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서 연재되고 있는 <며느라기>, 그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이라는 모토 아래, 3개월 차 며느리로서 민사린이 겪는 일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갈등이 만화의 서사를 이끈다.


대학 동창으로 만나 연애를 하고, 이제 결혼한 지 갓 3개월이 된 민사린과 그녀의 남편 무구영은 여느 신혼부부가 그러하듯이 그들이 꾸린 작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로 충만하다. 그러나 무구영의 원가족과 맺는 관계(시댁)로 넘어가면 사린의 온전한 행복은 위협받는다.


그 관계 안에서, 그녀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요구받지만, 동시에 외부인으로서 겪는 차별도 감수해야만 한다. 만화는 주로 이 괴리가 빚어내는 불합리성을 다룬다.


한편 그러한 차별이 엄동설한에 김장 100포기를 시킨다거나, 김치로 따귀를 때리는 장면들을 연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보니 막장극에서는 김치로 하는 일들이 참 많다.) 오히려 사린이 벙찌거나 당황하거나 민망한 상황들은 어머니의 생신’, ‘시부모님의 결혼기념일’, ‘할아버님 제사와 같이 평범한 며느리가 시댁 안에서 겪을 법한 이벤트에서 펼쳐진다.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일상에 스며든 부조리를 <며느라기>는 요란하지 않게, 대신 유달리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가령 사린은 자신의 해외 출장 소식에 염려나 격려 대신 아들 아침밥 차릴 사람의 부재부터 걱정하는 시어머니(박기동)의 모습을 보며 섭섭한 표정을 감출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녀는 미역국 끓여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다는 시누이(무미영)의 메시지에 꼭두새벽부터 생신상을 차리지만, 정작 사린은 식탁 위 그들만이 아는대화에서 소외된다. 묵언수행을 감행한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먹어 치워야 할사과 조각이거나 푹 익은 무 조각이다.


<며느라기> 4-4, ‘결혼기념일’ 


=자 이제 고구마 먹인다’ 대신 무 먹인다라고 해보자 



그렇다고 사린이 악의 없이 사과 조각을 건네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안 분위기를 망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씨 집안의 가족이지만 무씨가 아닌, ‘며느리사린이 처하는 상황은 개인민사린이 자연스럽게 수긍하기에는 부조리하며, 분노하자니 본인만 예민한 사람이 되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분명 사린에게 그 미묘하고 사소한 찰나들은 내가 나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불쾌하고 아픈 기억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자신을 지켜내야 할 상황으로 몰아가는 악당은 누구인가? 악당에게 잘못의 책임을 묻고 그를 처단하면 끝날 일이겠지만, 애석하게도 <며느라기>에 악당은 없다.


돌이켜 보면 시어머니 기동 역시 하루 종일 차례상을 차리는 노동을 하고도 남편으로부터 고생은 무슨따위의 소리나 듣는 처지이고, 제사가 끝난 후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면서도 자식들이 잘 돌아 갔는지부터 걱정하는 보통 어머니일 뿐이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남편(무남천)은 어떠한가. 며느리가 직장 다닌다는사실을 존중해주는 시아버지이자, 과음한 딸의 아침을 걱정하는 자상한 아버지이다.


모든 것이 무구영 탓이다라는 댓글의 그 구영 역시, 힘들어하는 사린을 보면 맘이 편치 않고, 부모님과 사린의 사이에서 곤란하기는 하지만 그녀를 도우려 한다. 심지어 그는, (작은아버지가 부르시면 갈 수 밖에 없지만) 무씨 집안 남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부엌에 들락거리는 인물이 아닌가? 나쁜 맘을 먹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들은 자각하지 못한 채 고구마를 끊임없이 쪄내고 서로에게 먹일 뿐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는 작품이 포착해낸 이 고구마 잔치를 두고 선의로 이뤄진 진흙탕이라 표현하며, 이 진흙탕 위에 세워진 것이 한국의 생활세계, 가부장제임을 지적한다. 그들은 부모님께 마땅히 지켜야 할 효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같은 미덕을 앞세워서로가 서로를 진흙탕으로 끌어들인다.


가령 사린의 경우조차, 그녀가 진흙탕으로 오기까지 과정에는 시부모님께 최선을 다하자는 그녀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는 개인이 지켜야할 인륜이자 동시에 개인을 구속하는 구조적 폭력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각주:2]


나아가 그는,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진흙탕에 있는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안일한 결론에 이르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맞는 말이다. 같이 진흙탕에 있을지라도, 걔 중에는 내가 나를 지켜야할 순간, 지키지 못한 후회와 자책도 겪어 보지 않았을 제도의 수혜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진흙탕을 메울 방안은 무엇인가? 그 이전에 무엇이 이 불합리한 순환을 유지시키는가? 많은 질문들이 머리를 스친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독자들은 사린과 함께 억울함을 자각하고 우리가 속한 구조의 모순을 돌아보기 시작한 단계이다.


작가는 이러한 선의로 이루어진 진흙탕이 진흙탕에 갇힌 개개인의 탈주로 해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대망의보스몹 설날에피소드에서 명확히 드러내며,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규범의 내면화를 통한 착취가 정당화와 착취를 통해 존속되는 구조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어린 무다영의 모습을 통해 투명하게 보여준다.

 



시집가도 되겠네

 


2017년의 놀이에 등장한 아이는 구영과 사린부부에게는 6촌 조카쯤 되는 무다영이다. 상술한 부분은 에피소드의 한 부분이다.


시집가도 되겠네.”라는 말이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가족들이 한 데 모인자리에서 어린 여자아이에게 할 만한 칭찬 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영과 똑같은 말을 들었던 아이가 자라서 그 놀이가 놀이가 아니었음을 곱씹어 보는 수기를 적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말이.


다음의 문제는 선의로 이뤄진 진흙탕의 물이 기혼 여성인 민사린뿐만 아니라, ‘며느라기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어린 무다영에게까지 튀었다는 점이다. , ’며느라기가 내포하는 모순은 단순히 기혼 여성뿐만 아니라, 무씨 집안의 일원인 어린 다영에게도 적용된다. 어른들이 다영에게 건넨 말들에 분명 악의는 없다. 악의는 없지만(그렇지만 어쩌면. 선의도 없다), 이 의미 없는 칭찬에는 어린 아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무서움이 있다.


다영이 그런 일을 할 때 기특한 아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칭찬은 다영을 그런 일을 할 때에 기특한 아이로 만들어버린다. 엄마의 걸레질을 따라 하는 아이는 큰 할아버지 집에서는 어떤 일을 해야 가장 쉽게 예쁨 받을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 억울함을 느꼈던 그때보다도 머리가 더 큰 지금, 내 눈에 비친 다영 또래의 아이들은 제 본심을 숨기는데 서투른 존재들이다. 그 작은 마음의 동요 하나하나가 너무 쉽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저 관심을 받고 싶은 어린아이가 스스로 걸레를 쥐고 시집가도 되겠다는 칭찬을 갈구하게 만드는 상황은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무구한 아이에게 벌어지는 쓰라린 풍경이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 정도의 무다영이 시집가도 되겠네라는 말을 너무나 당연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어린 아이의 학습 과정을 유추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이는 제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곧 자신이 살아가야할 일상으로 빠르게 흡수한다. 이미 제사에피소드에서 다영은 앞치마를 두르고 전을 부치고 상을 닦는 일을 민사린과 박기동, 그리고 자신의 엄마채은영을 포함한 여성의 일, 양복을 입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을 남성의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해내면 칭찬을 받는다.


그래서 무다영은 행주질을 한다. ‘엄마를 따라 행주질을 하면 칭찬을 받으니까.’ ‘행주질을 하는 것은 다영이가 자라서 될 엄마의 일이니까.’ 작가는 이러한 학습을 비단 별도의 교육이나 외압에 의해서 일어나는 비극이 아님을, 어린 아이의 모습을 통해 세련되고도 쉽게 풀어낸다.



 결국 어린 다영은 일상과 규범 속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그 구성원이 어떻게 내면화해가는지, 그리고 부조리한 구조가 구성원의 내면화를 통해 어떻게 존속되는지를 그 초기 단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가 그려낸 무다영과 민사린, 채은영, 박기동이 함께하는 설날 풍경은 돌을 깨는 노인이 곧 돌을 깨는 젊은이의 미래일 것(쿠르베)이라는 암시 내지는 경고와 비등한 힘을 얻는다. 예컨대 사린은 남성과 여성이 따로 차려진 밥상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마주하고는 벙쪄버리지만, 다영은 그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다.

사린에게 이 식탁의 광경은 tv속 아침드라마에서나 보던 생경한 것이지만, 6살 다영에게는 큰 할아버지집에서의 식사는 늘 그래왔던’, 보다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조의 대물림은 일상의 반복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며느라기> 6-4, ‘제사중 한 장면(), 6제사분량이 끝난 후, 민사린의 계정에 올라온 다영의 그림()


= 보이는 대로 그렸든, 이제 알게 된 것을 그렸든 간에 아이가 그린 제사의 풍경은 남성과 여성의 복장과 업무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명명백백히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 작가가 그려낸 사린의 일상은 그러니까 왜 이 구조적 폭력을 뿌리치지 못 하냐고사린 개인을 힐난하는 것으로 무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혹 며느라기라는 특정 시기에 근거하여, ‘며느라기자체가 착한여자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며느리들 개개인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며느라기가 며느리들만의 극복기가 되어야 하는 문제인가요?


앞서 언급했지만 작가는 이 악의 고리를 단절하는 데 있어, 며느리들 개개인의 탈주 내지는 며느리들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친절히 미움받을 용기를 실천하는 정혜린의 존재가 그 방증이다. 사린의 동서인 혜린은 평론가 조경숙이 언급한 나라도 살기 위해 나쁜 며느리가 된대표적인 예를 보여주는 인물로, 팔로워들 사이에서는 작중에서 유일하게 할 말 다 하는 사이다로 여겨진다.


시댁과의 분리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보호하기로 한 혜린의 결정은, 그녀를 사람이 나쁘진 않지만 제 멋대로인 형수로 불리게 한다. 주위의 반응에서 한계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혜린은 이러한 반응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혜린이 부재하는 진흙탕의 현장에는 다른 며느라기들이 남아 있다. 혜린도 그것을 알고 있다. 다른 며느라기들이 남겨진 곳에서 그녀의 선택은 유별난것으로 회자된다. 그녀가 쏘아 올린 공은 애꿎은 곳에 고꾸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행보는 무남천, 무구영, 박기동(과 그녀의 친구들), 무미영 등의 입을 오르내리면서 반면교사가 되어 다른 며느라기들에게 튕겨지는 것이다. ‘착한 너는 그렇지 않겠지?’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결국 여전히 고되고 억울한 그네들의 화살은 혜린에게 향하도록 하기도 하며, 온전한 행복을 향하여 결단을 내렸던 혜린은 여전히 미안함이라는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가 갖는 일말의 미안함에서, 혜린이 낸 의미 있는 용기가 현재의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이 드러난다. 대신 작가가 꿈꾸는, 내지는 진흙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는 ‘#며느라기에 있다.



 


#며느라기


 

인스타그램이라는 SNS를 매체로 취한다는 특징은, 일상에 스민 구조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며느라기>가 반짝이는 또 다른 지점이다. (<며느라기>야말로 인스타그램의 여러 장 보기기능이 일구어낸 희대의 수확일 것이다)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316천 명, 페이스북에서 195700여 명이 그녀의 계정(@min4rin)을 팔로우 중이며, #며느라기 #며느리라는 태그 아래 운집해 사린의 며느라기에 같이 공감하고,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고, 응원한다. 작품은 만화가 연재되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이 주인공 민사린이 직접 운영하는 sns 계정이라는 설정을 충실하게 유지 중이다.


가령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운동 후 사진(그림)이나 구영과의 귀여운 셀카 같은 지극히 민사린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올라온다거나, 작가는 사린을 대신하여 집들이, 크리스마스, 새해 기념 피드를 올려 작중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식이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가장 흥미롭다. 그 피드 아래에는 화이팅!’ ‘사린씨 운동하시는 거 멋져요!’등의 댓글이 올라온다.

 


며느라기를 검색해 보면 연관검색어로 늘 민사린 실화’ ‘며느라기 실화가 따라붙고, 다영의 그림이 업데이트 되었을 때는 작가의 농간(?)질에 의해 댓글에는 친구를 태그하여 ‘@0000 헐 이거 진짠가봐라는 반응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작가님의 희열!) 이는 사린의 피드를 구독하는 이들은 사린을 자신과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 #부부스타그램. 사린님도 굿나잇~!



여기에서 <며느라기>SNS를 선택한 영리함이 드러난다. 작가가 실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상황을 내용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해낸 점도 그렇지만, 또 그것을 전하는 매체가 SNS라는 형식은 <며느라기>가 작품 밖의 독자들과 연결되고자 분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SNS의 텍스트는 엄밀한 논픽션도 아니고, 허구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이야기도 아닌 그 중간 단계 내지 경계의 특징을 보인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 텍스트를 작성하는 사린의 존재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


가상 인물인 민사린은 사린과 같이 며느라기에 힘들어하는 여러 이들을 대변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 ‘민사린은 분명 익명의 목소리가 더해져 탄생한 무형의 존재였지만, 그녀는 본인의 계정 @min4rin을 통하여 하나의 인격체로 가시화되며, 계정에 자신의 일상을 게시하고 이에 대한 응답을 받음으로써 팔로워들로부터 그 정체성을 인정받는다.


여기에 SNS매체의 새로운 특징이 더해져 시너지를 일으킨다. 바로 공유이다. SNS 매체에는 기존의 일방향의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져 있던 영화나 책, 방송과 같은 텍스트와는 달리 해석이외의 공유라는 다른 층위의 과정이 나타난다.[각주:3] 개인은 SNS의 공유 기능을 통해 타인의 피드를 수신하게 되는데, 이때 발신자의 포스팅(일상)은 인스타그램의 경우 최대 10장이라는 분량(올해 2월 이전에는 1)에 맞추어 편집된 것이다. 따라서 수신자는 생략된 발신자의 서사를 해석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신자의 텍스트와 자신의 삶 간의 유사성을 찾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린에게 남기는 화이팅!’ ‘멋져요와 같은 격려나 그녀에게 묻는 안부의 댓글들은 누군가의 작은엄마였고, 며느리였고, 시어머니이고, 조카였던 대한민국의 수많은 민사린에게 남기는 메시지이며,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되는 사린의 며느라기는 비단 사린만이 겪는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무다영이 22살이 될 즈음엔...


나는 놀이에 관한 이야기를 되도록이면 어머니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무심코 꺼냈을 때의 어머니의 표정을 본 이후로는 더욱 삼가게 되었다. 그 표정이 자아내는 처참함의 정도는 흐르고 넘쳐 바라보는 나까지 적실 만큼이었다.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늘 조심했다. 적어도 눈 앞의 어머니의 평안을 위하여.


또는 내 쪽에서 피해왔다는 말도 맞을 것이다.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이 무엇의 감정을 담고 있는지 헤아리는 일이, 또 나의 어머니가 왜 나의 추억에 대해 그녀 스스로 방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죄책감을 갖는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는지 그 연유를.


그러나 어린 다영이 멈칫하는 순간에 나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무다영 누가 그런 일 하래. 이리와!!”

 


 

그러니까, 이 한 문장도 말하지 못 했던 것이구나.

 


나의 어머니는 말하지 못했다. 그녀에겐 불쾌할 여유가,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엄마들처럼 주방의 한 구석에서 다른 며느리들과 함께 허리를 수그린 채 하루 종일 기름붙이들과 씨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도 감히 완전히 헤아린다고는 말 못하겠다. 1,2년이 아니라 n십년간 지속되었던, 그녀의 며느라기 만큼이나 깊이 침전되었을 감정을.


스스로 며느리가 되거나 어머니가 되어 모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녀와 같은 죄책감을 갖기까지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들이었다. 만일 2000년의 놀이를 하던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그 얼굴은 행주질 하는 다영을 바라보는 다영 엄마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제서야 그려질 뿐이다. 이렇게 표정을 그려보고 나서야, 며느리도 어머니도 아닌 나는 그녀가 말하던 '방치'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것만 같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민사린의 피드를 팔로우하는 50만 여명의 사람들 모두가 사린과 같은 기혼 여성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린이 겪는 불합리한 순간에 같이 불쾌해하고, 분노하고, 또 그녀를 응원하며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나가며-곱씹기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는 문장은 참 간결하고 옳다’. 이 문장을 곱씹는 결결이 생각하곤 한다. ‘이 짧은 문장이, 문장만큼이나 쌈박하게 내 것이 되면 참 좋으련만.’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내 것이 되기는커녕 마음을 들쑤셔 참 불편하고 어수선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의 의미를 계속 곱씹어야 한다. 촌스럽다만, 그래야 겨우 소화가 되는 것이다. 이 지리한 글도 곱씹기의 일환이었다.


사린의 인스타그램에는 지금까지 당연했던일상이 공유된다. ‘며느라기가 지닌 모순이 며느리들만의 문제이거나, 특정한 지위 특정한 시기에만 발생하지 않다는 점에서 민사린의 공유가 뜻깊다. 많은 평론가들이 남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고 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내가 무다영 나이 때의 일들이 그랬다면, 지금은 어떨까? 작가가 <며느라기>에서 그려낸 사린의 일상에 비추어 보면, 아직까지 우리의 명절은 시집가도 되겠다는 말이 당연한 칭찬처럼 남발되는 현실이지만, 이제는 자신의 아이에게 그런 일을 관두고 이리 오라고 소리칠 수 있는 다영의 엄마 채은영이 있다.


비록 피드의 사각형 테두리 안에서 그녀의 다그침은 갑작스러운 변덕 내지는 짤막한 히스테리로 여겨지지만, 그 테두리 밖에는 같이 다영아 집에 가자!”고 다그치는 수많은 팔로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그 시절 엄마의 다그침을 듣지 못했던 또 다른 무다영들도 있다.


그래서 기대해본다. 무다영이 22살이 될 즈음엔 좀 더 다른 덕담이 들리기를, 진정 ‘holiday’에 걸맞는 명절이 펼쳐지기를.

 

 

 

 

 

추신 (2018.01.26. <며느라기>의 마지막회를 읽으며...)

 

작가는 며느라기’()를 며느리들이 시댁 식구에게 예쁨 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시기로 정의한다. 부연 설명에 따르면, 이는 사춘기나 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면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것으로, 보통 1,2년이면 끝나지만 사람에 따라 10년 넘게 걸리기도, 안 끝나기도 한단다.

생애주기가 연속되는 수많은 단계들로 나뉘어진다고 할 때, 개인의 삶은 현재의 지위를 벗어나 다음 지위로 이행하는 과정의 무수한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사춘기갱년기등의 이름은 특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단계에 붙여진 것들이다.

아동에서 청년으로, 성년에서 노년으로 성숙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신체적인 변화뿐 아니라 인지/정서적인 변화로 인해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된다. 특히나 이 발달단계에서 개인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고뇌하며, 그 과정에서 정체감을 확립하리라 기대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갈등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겪어야 할 당연한 관문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렇지만, ‘사린? 그녀는 며느라기를 거쳐 어떤 지위를 얻게 된단 말인가? ‘며느라기의 문제에 저 막연한 기대를 그대로 적용 시키기가 꺼려진다. 분명히 미끄러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사춘기와 갱년기를 대하는 태도 그대로 며느라기를 본다면 사린의 문제는 미결인 채로 잠식될 것이다. 갓 결혼한 사린은 지금 지극히 혼란(지랄)스러울 수 밖에 없고, 이 시기를 잘 견뎌(버텨)내면, 자연스레 베테랑 며느리가 될꺼야라는 위안과 함께 말이다. 따라서 이런 늪에는 빠지지 말자는 자기 경고의 의미로 이 긴 글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화를 본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작가가 풀어낸 며느라기의 정의에 미끄러지는 부분은 있을지언정, 어떠한 풀이보다도 더 탁월하다고...‘며느라기개념에 사춘기나 갱년기를 끌고 온 것 말이다.

아니 일단, 이 미끄러지는 부분을 짚는 것에서부터 이 긴 글도 시작되지 않았는가. (이게 잘 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

다시 '00' 에 대한 에릭슨(Erik Erikson, 1902-1994)의 설명을 끌어 오자면, 소위 '질풍노도'의 과도기에서 자신에게 제일의 가치가 무엇인지 확실히 인식하면 정체감을 획득한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역할 혼란에 빠지고 만다.

즉 사춘기 따위의 단계 역시 세월과 함께 자연스레 진화되는 하나의 소동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안은 한 켠에서는 자기상(self image)를 확립해나가는 고군분투가, 또 다른 한 켠에선 어떤 체념이 끊이지 않는 치열한 현장에 가깝다.

과도기는 가만히 기다린다고 지나가지 않는다. '며느라기'라고 하여 예외는 아닐 것이다.

 

 

 

참고자료

 

한혜원, 문아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은유적 특성 연구,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15(5), 2004, pp. 621-630.

 

<며느라기>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in4rin/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in4rin/

 

더 읽어보기

 

서지영, 며느라기│① 올해 추석에도 다시 일어날 일들

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7092513307297481

위근우,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 추석 때 가족에게 이 만화를 권해보시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100&artid=201709292147005#csidx24c48ca78b03fc9b23265e13b2a0e95

조경숙, <며느라기>-며느리라는 원죄를 끊기 위하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33&aid=0000035658&sid1=001

 

 

 

*



사실 저는 페미니즘에 대한 앎의 수준에 있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앎을 부지런히 하지 않은 게으름은

제가 이 글을 써 나가는 동안 커다란 장벽이 되어 저를 머뭇거리게 했고,

또 스스로를 검열하는 엄격한 기준으로 작용했습니다 .

그러기에 이 문장들이 너무나 사사롭고 부족한 글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곱씹는 일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더욱 힘내어 곱씹어 보려고 합니다.

고로 여러분의 도움을 소심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1. 위근우, 「남편들이여, 아내를 위해 추석 때 가족에게 이 만화를 권해보시라」 [본문으로]
  2. 위근우, 앞의 글. [본문으로]
  3. 한혜원, 문아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은유적 특성 연구」,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15(5), 2004, p. 625. [본문으로]


하지만 우린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

-윤이형의 루카



오버더펜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을 즐기는 데에는 각자 수많은 이유를 갖고 있겠지만, 나의 경우 문학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글 자체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기 위해서, 또는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진실을 향유하기 위해서이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성취한 작품을 접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어느 편을 선호하는 지에 따라 어떤 이는 시집을, 어떤 이는 소설을 집어들 것이다. 진실의 향유라고 썼지만, 그 진실들은 대체로 편하게 앉아서 받아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얼떨떨하면서 뜨겁고, 아리면서 차갑다. 황정은은 지난 AXT9월호에서 소설가의 임무란 현실적 대안의 제시가 아니라, 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감을 확장시키는 것, 다시 말해 세계와 자아의 경계를 무한히 잡아당기는 것이라 적었다. 결국 최고의 문학작품은 아름다운 문체로 타인들의 진실을 산출해내는 작품일 것이다.




 윤이형은 주로 SF나 판타지 작품들을 써낸 이력으로 인해, 지나치게 장르문학적인 시각으로 편협하게 이해되어온 감이 있다. 지난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에 실린 루카에서 두드러졌던 그녀의 아름답고 처연한 세계를 돌아보고자 한다.


 소설은 너는 루카다. 내가 딸기인 것처럼.”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끝난다. 이 소설은 그러니까, 사랑이 끝나고 난 뒤, 그것을 돌아보는 기존의 많은 이야기들과 맥을 같이 한다. 구체적으로는 성소수자(라고 우리가 부르는)들의 위태했던 사랑과 어쩔 수 없었던 이별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들의 사랑은 그 과정에 따라 대체로 평범하고 약간 특별했다. 목사인 루카의 아버지와 그(루카)의 연인이었던 ’(딸기)가 각자 잃어버린 루카에 대해 돌아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버지의 (심리적인) 복원과 딸기의 성찰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작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루카의 목소리는 소설 안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아버지와 연인의 편협한 이해들이 점차 무겁고 불편한 진실이 되어 그를 대신해 <루카>를 채운다.


 그렇다면 루카는 딸기에게 어떤 존재였나. 루카는 “‘에게 신이자 종교이며 사회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너는 나를 유일한 시민으로 갖는 사회가 되어야 했다. 네가 내 사회의 유일한 시민이었으니까. 너는 나를 온전해지게 하는 가족이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단 한 명의 친구였으며, 주기적으로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지인이었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좀 더 나은 삶이었다. 나는 너라는 한 사람 속에서 그 모두를 찾고 구했다. 그 일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사랑한 너의 어떤 얼굴은 내게 낯설어졌다.


 사랑은 어떻게 지치고 사소해지고 마는가. 너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인식은 처음엔 서로를 이끌리게 하는 마법이자 환상이지만,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타자라는 결정적인 간극이기도 하다. 신형철은 <러스트 앤 본>을 보고, 사랑은 결여의 발견으로서의 응답이기도 하다고 했다. 상대방의 결여를 목격하고, 나의 결여를 발견하면 나는 그의 사랑에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카와 딸기의 경우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같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딸기와 가족에 의해 강제로 아웃팅을 당한 루카. 모태신앙으로 주일학교를 다니며 대학을 다녔던 루카와 퀴어와 관련한 일에만 매달리는(정체성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나는 자신의 결여를 매 순간 떠올렸지만, 루카에게서 그 결여를 발견해내지 못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 모든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 너의 교회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했던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내 동료들이 너의 교회 같은 교회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는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너의 경제적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품는 감정이 관계되어 있었다.



 결여의 화답은 사랑으로 이어지지만, 그 불균형은 결국 사랑을 침식하게 만들 뿐이다. 루카는 딸기와 만나면서 작별했던 세계 - 자신 안에 죽어있던 것들 - 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고 그것은 결정적으로 그들이 헤어지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둘만이 공유하고 있던 세계에서 한 명이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 그것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웠으며, 그렇기에 더 오래도록 남아 남겨진 사람을 아프게 한다. 딸기의 성찰은 반성인 동시에 인식이다. 그는 자신을 가해자이자 관계의 종결을 앞당긴 사람으로 지목하고, 사랑의 당사자로서 그 과정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확인하려 했다.


 아버지라는 캐릭터의 작위성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소수자나 차별과 같은 단어들에 가려져 있던 희미하고 따스한 온기를 온전히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루카와 딸기, 그들은 마냥 착했다. 싸우기도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는 다정한 사람들. “죽었던 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라는 연인이 던진 독백에 홀로 뒤돌아 숨죽여 울었던 사람들. 그럼에도 끝내 되돌릴 수는 없던 그 과정들.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엄정함과 그 안의 따뜻한 사람들. 많은 사랑의 서사들이 눈물을 자아내왔던 지점이지만, 작가는 또 한 번 우리를 울리는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윤이형이 쓴 사랑 이야기의 특별한 점은 무엇 일까. 그것은 그녀가 말하는 사랑의 진실이 따뜻한 문체와는 달리 우리를 한껏 무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에 관해선 수많은 정의들이 매일 생겨나고 또한 기각된다. 그러나 어떠한 명제도 모두에게 평등한 시효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사랑에 관한 아포리즘은 이것이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종교를 택한 딸기와 다시금 신에게 돌아간 루카. 이들의 필연적이었을 이별을 목격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마지막 딸기의 말은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릴 단절에 대해 더욱 씁쓸함을 갖게 한다. 그의 말로 이번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였던, 너는.











왜 청춘들은 아직도 1994년 홍콩에 사는가

영화 <중경삼림>

 

 푸른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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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a’s and Papa’s<California Dreamin’>에 맞춰 흐느적대며 춤을 추는 여자, 제복을 입은 경찰관, 쌓여있는 파인애플 캔, 어수선한 패스트푸드점. 영화 <중경삼림>을 떠올렸을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영화 안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홍콩이라는 특수한 공간적 배경, 그리고 20대 특유의 불안정한 감성과 함께 이 작품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한 축이다. 또한 왕가위 스타일로 일컬어지는 세련된 미장센과 독특한 카메라 기법은 <몽중인夢中人>, <California Dreamin’>, <Things in life>와 같이 이 영화만을 위해 작곡한 듯한 영화음악과 어우러져 영화 자체를 마치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지도록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경삼림>이미지와 음악과 분위기의 영화이다.

 


1994,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의 홍콩. 그 정신 없이 혼란스러운 도시에 네 명의 남녀가 있다. 그들은 서로 순간적으로 사랑에 빠지거나, 이별하거나,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거나, 연인으로 발전한다. <중경삼림>은 그들의 관계와 소통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극적 특징을 분석해보고, <중경삼림>이 나온 지 이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되며, 청춘영화의 대표격으로 거론될 수 있는 것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옴니버스 형식의 플롯

 

<중경삼림>은 별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두 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여 있는 독특한 플롯을 보여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실연당한 경찰 223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극복하려 노력하다 마약 밀매상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은 곧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역시 실연당한 또 다른 경찰 633이 여러 사건을 거쳐 그가 자주 들르던 패스트푸드점의 종업원 아비와 연인이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이 두 이야기는 두 경찰이 애용하는 패스트푸드점을 통해 연결되며, 경찰 223의 내레이션이 두 에피소드에 연관성을 부여하고 둘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경찰 223과 마약밀매상 여자가 처음 길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갔을 때 나오는 경찰 223의 내레이션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쳤던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밖에 안되었다. 57시간 후, 나는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가 마약밀매상 여자와 헤어지고 난 후 패스트푸드점을 들러 새로 온 종업원 아비와 만났을 때 우리가 가장 가까이 스쳤던 순간에는 서로의 거리가 0.01cm밖에 안되었다. 난 그녀를 모른다. 6시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로 반복·변주되어 나타난다. 이 내레이션 이후 카메라는 아비가 사랑에 빠지는 다른 남자경찰 633을 화면에 잡고,  영화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에피소드로 넘어가게 된다. 그의 내레이션은 두 이야기가 유사한 주제의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면서, 옴니버스식 구성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다수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흔하지만, 여러 인물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여러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춘 플롯들은 대개 영화 안에서 교차편집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차편집이 사건 진행의 속도감을 높여줌으로써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경삼림>은 사건의 진행 자체보다는 그에 따른 인물의 내면 표현주로 내레이션을 통해 이루어지는에 집중하면서 두 에피소드를 완벽히 분리하는 옴니버스 형식의 플롯을 채택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관객들이 탄탄하게 짜인 내러티브가 제공하는 사건들의 연속을 따라가기보다, 네 명의 인물 각각에 좀더 집중하도록 한다.

  

 



2. 외로움에 휘청대는 인물들, 그리고 우리

 

이 작품에서는 네 인물의 이야기가 거의 균등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같은 이유로 어떤 주인공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두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동시에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만의 특권으로 여겨지는 내레이션을 <중경삼림>에서는 네 명이 번갈아 가며 한다는 것이 그 방증일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경찰 223과 항상 금발 가발과 선글라스, 레인코트를 착용하는 마약 밀매상 여자, 두 번째 이야기의 경찰 633과 패스트푸드점 여종업원 아비는 사실 서로서로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먼저 경찰 223과 경찰 633은 둘 다 최근에 실연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둘 다 아비가 일하는 패스트푸드점을 애용한다. 그들은 모두 아비의 존재를 인식하지만, 결국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경찰 633뿐이다. 또한, 경찰 223과 마약밀매상 여자는 모두 199451일을 유통기한으로 가지는 통조림과 연관이 깊다. 그리고 이 네 명의 가장 큰 공통점은, 그들 모두 무언가 결핍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갈망하는 것을 잃어버렸거나 손에 넣지 못한 인물들이다. 경찰 2235년간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나를 잘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버림받는다. 마약 밀매상 여자가 공들였던 마약 밀매는 동료들의 배신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그녀의 백인 남자친구는 금발 가발을 쓴 다른 동양인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경찰 633과 동거하던 스튜어디스 여자친구는 어느 순간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난다. 아비는 꿈의 도시 캘리포니아를 항상 꿈꾸지만, 그곳에 갈 수는 없다.


이들의 결핍은 결국 외로움으로 나타난다. 네 명은 서로의 연결고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의 외로움을 깊은 곳까지 보듬어주지 못한다. 마약 밀매상 여자는 경찰 223이 갖고 있는 이별의 상처를, 경찰 223은 여자의 직업, 그리고 동료들과 남자친구의 배신을 뜻하는 통조림 캔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누었던 하룻밤의 온기는 따뜻할지언정, 찰나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들은 외로움을 혼자 극복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그들의 외로움은 홍콩이라는 화려하지만 병리적인 도시 안에서 다소 병적인 극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먼저 경찰 223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 아무에게나 습관적으로 전화를 건다. 숙모에서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후 연락이 끊어진 짝꿍에까지 시도 때도 대상도 가리지 않는 그의 전화는 무시당하거나 거절당하기 일쑤이며, 외부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번번이 좌절된다. 또한 그는 애인이 떠나버리자 자신의 생일인 199451일까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를 잊겠다는 다소 황당한 철칙을 세워 놓고, 애인이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 그것도 유통기한이 9451일까지인 것들을 하루에 하나씩 사 모은다. 그리고 약속했던 51, 여자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그는 삼십 개의 통조림을 앉은자리에서 전부 먹어치운다.

 


경찰 633 역시 애인의 부재로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그는 자신의 집안 곳곳에 묻어 있는 애인의 흔적을 잊기 위해 밤마다 집 안 사물에게 말을 건다. 그러나 그 말들비누에게 예전에는 보기 좋았는데 왜 이렇게 뚱뚱해졌냐며 그녀가 없어도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잔소리를 한다든지, 물을 뚝뚝 흘리는 걸레에게 그만 울고 강해지라고 윽박지른다든지은 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그가 말을 거는 사물들은 결국, 애인이 떠나도 그 슬픔에 흠뻑 젖지도 못하는, 감정을 건강한방식으로 표현하고 해소하지 못하는 병든 자아의 대리물과 같은 것이다.


패스트푸드점 종업원인 아비의 경우 외로움은 지나친 집착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집착하는 대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캘리포니아와 경찰 633이 그것이다. 먼저 그녀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은 캘리포니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아비는 The Mamas & Papas<California Dreamin’>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행위를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은 캘리포니아라는 상상 속의 낙원이지 진짜 캘리포니아라는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비는 경찰 633이 왜 그곳에 가고 싶은지 물어도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도 못하고, 막상 다녀와서는 별 것 없었다며 실망하기도 한다.


또한 경찰 633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결국 그의 전 애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의 집을 주인 몰래 하나 둘씩 뜯어고치는 비정상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집착은 몰래 그의 침대를 뒤지다 전 애인의 긴 머리카락을 발견한 후 히스테리를 부리듯 엉엉 우는 장면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결말 부분에서 아비가 경찰 633의 전 애인과 같은 스튜어디스가 되어 캘리포니아에 다녀오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두 가지 집착이 섞여 나온 결론이자, 그녀가 평소에 품고 있던 환상을 끝내 이룬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감독은 이들이 가진 결핍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외로움의 문제를 전통적·감정적·서술적인 방식을 통해 드러내는 대신 관객들에게 인물들의 특수한 행동을 통해 객관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별다른 영화적 설명 장치 없이 그저 개성 강한 네 인물의 극적 행동을 그대로 화면에 담는 방식은 <중경삼림>이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세기말 홍콩의 비틀대는 청춘들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여과 없이 보여줄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중경삼림>을 끝까지 보고 나면, 네 인물이 마냥 어둠 속에 잠겨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사랑스럽고 발랄하며, 엉뚱하다. 사랑하는 여자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도 그녀의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샐러드를 네 접시나 비우고 여자의 구두나 닦아주는 경찰 223이 그렇고, 한없이 차갑고 쌀쌀맞다가도 술에 취해 경찰 223의 어깨에 슬며시 머리를 기대는 마약 밀매상 여자가 그렇고, 밖에서는 무심하고 무뚝뚝한 경찰이면서 집에 와서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곰인형에게 말을 거는 경찰 633이 그렇고, 크게 틀어놓은 <California Dreamin’> 노래에 맞춰 휘적휘적 춤을 추는 몽상가 아비가 그렇다.


이렇게 섬세한 인물 표현은 화려한 도시 속 외로운 이들을 향한 감독의 연민과 애정이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며, 네 명의 청춘남녀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결국 관객에게까지 전염된다.

 

 


3. 시공간에 대한 여러 은유들

 

<중경삼림>은 유독 시공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 번쩍이는 네온사인, 들떠 있고 어딘가 뒤숭숭한 거리들, 다양한 언어와 인종, 유흥과 오락, 마약, 세기말적 우울과 방황하는 젊은이들 등은 이 작품의 배경이 된 1994년의 홍콩이라는 시대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시공간이 단순히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확장되어 다양한 은유와 표현법을 통해 드러나며 플롯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 글에서는 감독이 작품 전체의 배경을 비롯한 시간과 공간에 대해 어떻게 고민하는지, 또 그 고민들을 영화라는 특수한 매체 속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공간에 대한 은유와 그 의미를 효과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분리해서 분석해야 한다. 먼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소재는 통조림, 더 정확히 말하면 199451일을 유통기한으로 하는 통조림이다. 199451일은 경찰 223의 생일이자, 그가 전 애인과 헤어진 지 한 달째 되는 날로, 전 여자친구에게서 그때까지 연락이 없으면 그녀를 잊기로 정해진 기한이기도 하다. 또한 그 날은 마약 밀매상 여자에게는 그녀를 배신한 애인이자 마약 중개인을 죽이기로 한 날이다. 그녀는 (아마도 그에게서) 전달받은 통조림 캔에 쓰인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 그를 죽이고, 시신 옆에 통조림 캔을 놓아두고 떠난다.


영화 <중경삼림>, 특히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유통기한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경찰 223은 유통기한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는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10000년으로 하고 싶다.”는 대사를 읊기도 하고, 요즘 누가 유통기한 다 된 통조림을 파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말에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옛사랑에 한 달이라는 유통기한을 정해 놓고 약속한 기간이 지나자 파인애플을 먹어치우듯 고민 없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다. 그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유통기한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에 잠식되는 현실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기한이 있는, 그래서 이번 사랑이 끝나면 자연스레 다음 사랑을 찾아나가는 물질화된 관계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의 관계 맺음이 낯설지 않은 것은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약속한 51일의 유통기한이 지나고 태연히 바에 앉아 첫 번째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경찰 223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인 탓이다.

 


시공간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캘리포니아라는 공간에 대한 열광이다. 아비는 캘리포니아를 갈망하면서도 진짜캘리포니아라는 도시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단지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의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는 세 가지 캘리포니아가 나온다고 볼 수 있겠다. 진짜 도시 캘리포니아, <California Dreamin’> 속 아비가 꿈꾸는 실체 없는 공간 캘리포니아, 그리고 바(bar) 캘리포니아.


자신에 대한 아비의 마음을 알아차린 경찰 633은 아비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저녁 8시까지, 술집 캘리포니아로 나올 것. 그러나 아비는 오지 않고, 패스트푸드점 사장이 대신 와서 편지를 전해준다. 그 편지에는 그녀가 술집 대신 진짜캘리포니아로 떠났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녀가 홍콩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년 동안, 경찰 633은 패스트푸드점을 넘겨받아 아비가 좋아하던 <California Dreamin’>을 들으며 그녀를 기다린다. 이제 아비 대신 경찰 633이 두 번째 캘리포니아, 그 꿈속의 공간에 살고 있다. 1년은 조금씩 어긋나 있던 그들이 자신들만의 시차를 줄이는 기간이다. 아비는 경찰 633이 그리워하던 존재인 스튜어디스가 되었고, 경찰 633은 그녀가 일하던 가게에서 일하며 자신을 좋아하던 아비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비로소 돌아볼 시간을 가진다. 인물들에게 1년의 기간을 줌으로써, 감독은 그들이 좀 더 서로를 위해 준비된 상태에서 재회할 수 있도록 하며, 사랑을 시간의 문제로 생각하는 본인의 철학을 영화에 녹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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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중경삼림>에서 눈에 띄는 극적 요소들, 즉 플롯, 인물과 행동, 시공간을 세분화하여 살펴보았다. 필자가 보기에 이 중에서 <중경삼림>을 가장 <중경삼림>답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특색 있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인물은 다들 어딘가 나사라도 하나 빠진 듯 불안정하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우울에 젖어 있기도 하고, 사회적 상식에서 어긋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더욱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막상 본인들은 서로의, 혹은 자신의 그런 행동들을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도 없이 자신의 빈 집에 찾아와 물건들을 바꿔놓는 가끔 인사만 하는 정도인 사이의여자를 발견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 경찰 633처럼 말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네 명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인물들에 쉽게 몰입하고 그들을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는 이유는, 관객들 역시 그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경삼림>은 흔들흔들 위태위태한 현대인의 초상이다.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허황된 유토피아를 꿈꾸고, 유통기한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을 거부하면서도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있으며, 때로는 말할 사람이 없는 나머지 방 안 사물들에게까지 말을 거는 영화 속 인물들은, 사실 알고 보면 화려한 도시를 살아가지만 어딘가 곪은 내면을 지닌 우리 자신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불편한 거울을 들이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대신, <중경삼림>에서 집중하는 것은 파편화된 개인들 간의 관계 맺음이다. 네 명은 비록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조건 없는 위로를 서로에게 건넬 수 있기도 하다. 같이 하룻밤을 보낸 뒤 경찰 223이 마약 밀매상 여자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가볍고 찰나적인 관계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밤 내내 그녀의 존재 자체에서 충분한 위안을 얻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네 명의 남녀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어딘가 자신과 닮아있는 상대방에게서 따뜻함을 찾듯, 관객 역시 그들 자신들과 닮은 <중경삼림>의 청춘들과 공감하고 그들에게서 위안을 얻게 된다는 것, 이것이 이 영화를 지금까지도 이토록 매력적으로 만드는 힘인 듯하다.




 

 

* 참고

지용신, 왕가위 초기 영화 연구 : 아비정전중경삼림을 중심으로, 동서문화연구, : 韓南大學校 東西文化硏究所, 2009.

이전영, 닫힌 사회의 소멸에 대한 화려한 진술중경삼림, 월간 사회평론, , 1995. 1.




다시 한 번 그 자리에: 신혜성 Weekly Concert “Serenity”

 


레몬밤

 



 

내가 안 간 콘서트는 항상 역대급.”

 


 모든 덕후들이라면 이 말에 공감하겠지. 특히나 내게 이 말은 2016년 초 신혜성 콘서트 “Weekly Delight”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달간 8회차나 진행되었던 이 콘서트와 20175월 진행된 신혜성 솔로 데뷔 12주년 팬미팅 모두를 가지 못했고, 역시나 내가 가지 않은 콘서트에서 신혜성은 온갖 레전드란 레전드는 다 찍으며 팬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덕후들에게 역대급이나 레전드란 표현의 의미는 여러가지다. 잘 부르지 않거나 한 번도 부른 적 없던 노래가 세트리스트에 들어가는 것도, 원래 싫어하던 짓을 예컨대 분홍색은 절대 싫다던 사람이 공연에서 분홍색 수트나 스웨터를 입는 것- 팬들을 위해 하는 것도, 게스트나 밴드 멤버, 엠씨 등과의 합이 잘 맞아 즉흥적으로 생겨나는 재미있는 (소위 씹덕 터지는) 에피소드도 모두 다 역대급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공연에 간 팬들에게는 역대급이 되며, 그 공연에 못 간(혹은 드문 경우로 안 간) 덕후들에게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고 싶은 사유가 된다.


 그래서 이 포스터를 봤을 때 나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콘서트도 좋은데, 앞으로 다시 하기는 할까 싶던 위클리 콘서트를, 그것도 신보 발매와 함께 한다니! 내 이 공연은 필히 가리라. 이 공지가 뜬 것이 7월 중순 즈음이었는데 이미 내 다이어리 9월란에는 신혜성 컴백. 위클리 콘서트.’ 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고 내 손은 드릉드릉 티켓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혜성 위클리 콘서트 포스터 (사진제공: 라이브웍스 컴퍼니)





 솔로 3집부터 신혜성은 본격적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그 중 8할을 차지하는 것은 모던 록이었다. 당시 신혜성의 발라드를 좋아하던 나는 그의 모던 록으로의 일탈이 한 켠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모던 록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밴드 아이엠낫(당시 메이트)의 임헌일이 전곡 작사 작곡 및 프로듀싱을 맡아 발매한 스페셜 앨범 <Embrace>는 모던 록 계열의 음악만이 수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명작으로 꼽는 앨범이니까. 다만 일종의 관성이랄까. 신혜성의 발라드가 고팠을 뿐. 새로운 것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했고.


 어쩌면 신혜성의 신보 발매 주기가 짧았다면 나의 투정도 없었을 지 모른다. 워낙 신보 발매 주기가 길었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다 나온 앨범에 내가 기대하는 정통 발라드가 없었을 때의 아쉬움이란 더 큰 법이다. 그러다 앨범을 내는 주기마저 길어지니 나의 바람은 힙합을 해도 좋으니 새 앨범을 내달라!’로 바뀌어 버렸지만.




신혜성 스페셜 앨범 <Serenity> 컨셉포토. (사진제공: 라이브웍스 컴퍼니)

 


긴 공백을 깨고 2016년 발매한 <Delight>에서 나의 예상을 한 번 깬 신혜성은 그렇게 올 9, <Serenity>에 정통 발라드 6곡을 차곡차곡 담아 선보였다. 타이틀곡 그 자리에는 역시나 그는 나와는 다른 귀를 가졌구나 생각하게 하는 곡이지만, 콘서트에 다녀 온 이후 왜 이 곡을 타이틀 곡으로 정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앨범을 기다릴 때만 해도 이렇게 사설만 한 장 가득 채워가며 정식으로후기를 쓸 줄은 몰랐지. 앨범 리뷰를 쓸지 콘서트 리뷰를 쓸지 고민 참 많이 했다. 앨범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많으니까.


 어쨌거나 거지 같은 일상 생활을 콘서트 하나만 보며 버텨온 나는 916일과 101, 각각 3회차와 8회차 공연에 가게 되었다. 3회차 공연에서는 뒷자리 외국인 관객이 관람을 방해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집중이 잘 안 되었던 터라 할 말이 그리 많지는 않다. 공연은 역시 막공이라 했던가. 마지막 공연에서는 간만에 입덕할 당시의 설렘과 오래 좋아한 가수에 대한 애틋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므로 이번 후기는101일 마지막 공연 위주의 후기이다. 3회차 공연은 간간이 조미료로 쓰였다.

 


개개인의 예술 경험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언어라는 체계에 구속되어 일반적인 의미로 환원되어 버리고 고유성을 잃는다. 게다가 내게는 아쉬운 것을 표현하는 언어와는 달리 좋았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다. 그러니 콘서트에서 느꼈던 좋은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충실히 감정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평정심과 덕심 사이의 균형 잡기에 실패하여 오락가락하는 문체는 덤. 최고의 무대 세 개는 별도로 표시해 두었다. 설명은 세트리스트 순.

 


 블루스퀘어 삼성카드 홀의 좁은 로비를 가득 채운 화환들, 앨범 판매대, 굿즈 판매대 그리고 작게 마련된 포토존. 익숙한 배치들. 건물 밖에 큼지막하게 걸린 진한 파랑의 현수막. 콘서트를 보러 삼성카드 홀에 한두 번 온 게 아닌데 올 때마다 새로운 설렘이 나를 반긴다. 가장 최근에 삼성카드 홀에서 봤던 다른 가수의 콘서트는 좌석이 너무 좁아서 가만히 앉아있는 데도 옆 관객과 서로 민망해한 기억이 있기에 입장 전에 긴장을 좀 했다. 콘서트에서 분명 뛰라고 할 텐데, 좌석이 지난 번처럼 좁으면 어쩌지. 다행히도 이번 좌석은 그 때와 다르게 넉넉했다. 이번 앨범이 가을과도 찰떡같이 맞는 예쁜 컨셉이라 공연 시작 전 화면도 차분하고 깔끔하니 마음에 들었다.


 공연은 밴드의 ‘I luv you’ 연주에 맞춰 흘러나오는 시 영상으로 시작했다. 3회차에는 나태주 시인의 너를 두고’, 8회차에는 이수동 시인의 동행이 콘서트의 처음을 장식했다. 노래와 시가 끝나면 무대 뒤에서 신혜성이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부르며 등장한다. 그렇게 두 시간 반 가량의 꿈 같은 공연이 시작되었다.


 

콘서트 시작 전을 장식하는 이미지. (사진제공: 라이브웍스 컴퍼니)



내겐 꿈 같은 하루

 코러스 황정미 씨와 함께 부른 <Embrace> 수록곡. 원곡에서는 박지윤 씨와 듀엣을 했다. 원래 좋아하는 곡인데다가 두 사람의 목소리 합도 좋았고 예상치 못하게 듀엣 곡을 해준 것도 만족스러웠다. 가장 최근에 들은 듀엣곡이 2011년 연말 콘서트에서 코러스 천단비 씨와 함께 했던 사랑하기 좋은 날이었으니 이런 무대가 더 반가울 수 밖에.

 

Take me to your heart

 전주 듣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진 곡. 덴마크의 소프트 록 밴드MLTR(Michael Learns To Rock)과 함께 한, 이 추억 속에 담겨있던 곡을 라이브로 들을 줄이야! 3회차 공연에서는 전곡을 영어로 불렀고 마지막 공연에서는 MLTR과 함께 부른 버전처럼 1절은 한국어, 2절은 영어로 불렀다. 개인적으로 1절에서 2절로 넘어갈 때 언어가 바뀌면서 곡의 분위기도 함께 전환되는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에 101일자 버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신혜성이 부른 모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희귀(?)한 라이브는 언제나 환영이다.



 

Serenity 8회차 공연 中 불면증-다른 사람 사랑하지마 직캠 (ⓒ 셩공시대)


고의 무대 #1. 불면증-다른 사람 사랑하지마

 언젠가는 신혜성과 작곡가 조합에 대한 글을 쓰리라 다짐한 것만 몇 년 째인가. 숨죽인 듯한 공연장에서 신혜성은 자신과 최고의 조합을 보이는 작곡가 임헌일과 박창현의 곡을 각각 연속으로 선보였다. 두 곡에서 공연장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피아노 한 대와 신혜성의 목소리뿐. 신혜성이 물만 마셔도 공연장 지붕을 날릴 듯한 함성을 보내주던 관객들은 이 시간 동안 숨을 죽인다.

미니멀한 악기 편성은 역설적으로 신혜성의 목소리에 더 큰 감성을 보탠다. 이 무대를 통해 그는 신혜성은 풍부한 소리를 가진 큰 스케일의 발라드만 어울린다는 주장을 가볍게 반박한다. 날카롭게 고음을 지르지 않아도, 화려한 코러스와 현악이 뒷받침하지 않아도, 신혜성의 목소리는 힘을 갖는다. 신혜성은 목소리만 지문이 아니다. 이 순간은 그의 숨소리도 지문이다. 자신이 가진 특징을 탁월하게 사용할 줄 아는 그는 고요한 공연장에 모든 소리를 하나하나 아로새긴다.

 

덕후를 위한 코너, 싱송생송

 이번 위클리 콘서트에서는 공연 시작 30분 전까지 팬들에게 포스트잇으로 추천곡들을 응모 받아 공연에서 신혜성이 즉흥적으로 고른 곡들을 노래방 반주로 불러주는 코너가 있었다. 이름하여 싱송생송. 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노래를 들려줄 수 있으니까. 나는 신혜성이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지만, 너무 많이 부르는 건 싫다. 본인 곡과 커버곡의 비율이 거의 11이 되도록 구성되어 있던 2013년 연말콘서트의 세트리스트에 적지 않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기에 이런 코너에서 짧게 짧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많은 커버곡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Serenity 8회차 공연 中 싱송생송 코너에서 아기상어를 부르는 신혜성.

포스팅할 생각이 없었는데 소속사에서 공식 영상을 올려준 기념으로 올려본다. (ⓒ LIVEWORKS COMPANY)


게다가 거의 재롱잔치 수준으로 별별 노래를 다 불러줘서 덕후들은 마음속으로 아파트를 뽑고 우주를 부셨다. 특히 마지막 공연에서 신혜성의 씹덕터짐은 최고치에 달했다. 그는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로 된 오버핏 니트를 입고 나와서는 팬들과 함께 쿨의 애상을 부르고, 부끄러워하며 Tell Me 춤을 추고[각주:1], 어제 팬들을 위해 연습했다며 춤을 추면서 전진의 WA를 부르고, 밴드 마스터 장지원 씨와 듀엣 곡을 두 곡이나 불렀다. 그리고 팬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상어 가족이라는 동요도 불렀다. 다 부르고 민망한지 계단에 쭈그려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내 주위에서는 귀여워!! 어떡해!!’ 등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무엇을 부를지를 가지고 팬들과 티격태격하고, 노래방 리모콘 조작을 못해서 당황하거나 혼자 즐거워하는 모습은 덕후들을 사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 다른 회차 공연에서는 Tears, 해결사, 위아래, 성인식, 니가 밉다, 응급실 등을 불렀다고.



열창하는 신혜성 (사진제공: 라이브웍스 컴퍼니)



 최고의 무대 #2. 머물러줘 

 스페셜 앨범 <Serenity>에서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 것이 빗소리에였다면, 콘서트 이후 차애에서 최애로 등극한 노래는 머물러줘이다. 신혜성과 임헌일의 조합은 항상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 노래. 다만 그동안의 작업물들이 임헌일 스타일의 곡에 신혜성의 목소리가 얹어진 느낌이었다면 이번 노래에서는 신혜성 목소리 속에 임헌일의 곡이 들어간 느낌이다. 지난 작업들에서는 곡을 듣자마자 임헌일이라는 느낌을 캐치할 수 있었다면 이번 곡은 작곡가가 임헌일이라는 걸 알고 나서야 비로소 곡에서 그의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면 충분히 설명이 되려나.

 줄곧 담담한 척하다 끝내 참지 못하고 무너져버리는 임헌일 곡 특유의 감정선은 신혜성의 목소리를 만나 호소력을 갖는다. 날 혼자 두지 말아 달라며, 조금만 머물러 날 사랑해 달라는 노래는 콘서트의 컨셉 Serenity에 맞게 잔잔하게, 하지만 잔잔하지 않게 콘서트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곡 후반에 더해진 약 10마디 가량의 반주를 묵묵히 기다린 관객들의 박수가 쏟아지고 나서야 나도 (어쩌면 신혜성도) 마지막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노래가 주는 아릿함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최고의 무대 #3. 로코드라마

 이번에 비트감 있게 편곡을 참 잘했다. 춤 없이 그냥 서서 불러도 지루하지 않고 퍼커션 덕에 가볍게 리듬을 타며 즐길 수 있는 편곡. 브릿지와 후렴구 사이에 새로이 삽입된 피아노가 마지막까지 세련된 느낌을 살려주었다.


Serenity 8회차 공연 中 로코드라마 직캠 (ⓒ 슈똘)


  춤 없이 관객들의 응원법과 함께한 노래인데, 여러모로 도란도란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마지막 공연에서 팬들의 함성을 더 들으려는 듯 사랑이란 건이란 가사를 반복하며 마이크를 넘기는 신혜성과 더 크게 응원 구호를 외치는 관객들의 모습이 흐뭇했다. 오히려 춤 없이 노래만 들으니 첫 번째 벌스의 리듬감을 더 느낄 수 있었기도 하고. 첫 번째 앵콜 곡이었는데 나머지 앵콜 곡이 가기 전에 죽어라 놀고 가자!!!!”라는 느낌이라면 이 곡은 웃으며 재밌었어. 다음에 또 만나!” 하는 느낌. 줄곧 노래 제목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무대는 곡명에 걸맞은 분위기를 연출해줘서 처음으로 제목에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Welcome

 무려 마지막 공연에서만 해준 신화의 10<The Return>수록곡 ‘Welcome’ 편곡 버전. 마지막이니 아쉽다고 제대로 놀고 가자며 곡 제목도 알려주지 않고 전주가 나왔는데, “Welcome to me”라는 가사가 나오자마자 공연장 이름이 삼성카드 홀 대신 싱크홀로 변할 뻔했다.

 신혜성은 싱글즈 10월 호 인터뷰에서 신화의 신혜성과 가수 신혜성의 정체성을 모두 지키고 싶다고 했다. 아마 이 앵콜곡이 그의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반영한 무대가 아니었을까. 익숙하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은 그의 팬 중 대부분이 신화의 팬이라는 걸 증명한다. 신혜성은 자신의 노래로 두 시간을 가득 채워 노래한 솔로 가수이자 신화의 메인보컬이다.

 



 끝으로 피할 수 없는, 안 좋은 이야기를 굳이 꺼내고자 한다. 먼저 조명과 영상이 너무 구렸다. 신혜성과 오래 일한 공연 관계자들이 그에게 최적의 공연을 만들어주려 노력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각주:2] 가끔 진짜 노력하는지 의심스럽다. 조용한 곡에 전혀 맞지 않는 분홍색 조명을 뜬금없이 쓰는 것, 촌스러운 글씨체 (a파도소리체 실화냐)로 노래 가사 타이포 영상을 내보내는 것 등은 제발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수가 영상이나 조명까지 신경 쓸 수는 없지 않나. 좋았던 영상은 ‘Stay’에서 나온 우주 배경뿐이다.


리허설 중인 신혜성. 분홍 조명 실화냐. (사진제공: 라이브웍스 컴퍼니)


 두 번째로는 사골 세트리스트이다. 신나는 무대를 위해 준비한 것은 알겠지만 최근 공연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했던 곡들 몇 개(‘Special Love’, ‘별을 따다)는 잠시만 미뤄뒀으면 한다. 이번 위클리 콘서트는 8주간 세트리스트에 큰 변화가 없었는데(마지막 공연에서 같은 생각대신 ‘Love Letter’를 해준 것 정도?), 두 곡 정도 더 변화를 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예뻐’, ‘Island’, ‘눈물이 글썽’, ‘Don’t’, ‘생각보다 생각나’, ‘사랑사랑’, ‘혼잣말’, ‘’, ‘후에등등[각주:3] 신선함을 줄 신혜성의 노래들이 아직 한가득이다. 신보 발매 후 선보인 콘서트였으니 신보의 수록곡들을 (특히 빗소리에라든가, ‘빗소리에라든가, ‘빗소리에라든가) 더 해줬어도 좋았을 텐데.



 8회차 공연에서 신혜성은 마지막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팬들에게 아쉬운 소리 대신 함성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마지막 공연이라고 우울해하지 말고 더 신나게 끝내자고. 기나긴 콘서트의 끝에 가장 허전하고 아쉬운 것은 가수 본인이지 않겠는가. 팬들은 그의 맘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아쉬운 만큼 더 큰 함성을 보냈다. 공연 막바지에 팬들에게 참아왔던 아쉬운 소리를 마음껏 내뱉을 시간을 주자 쉬지 않고 를 외치는 팬들을 보며 그는 아쉬웠구나! 이렇게 하고 싶은 데 내가 못하게 했구나!”라고 말했다. 마지막 공연 내내 팬들은 신혜성을, 신혜성은 팬들을 아끼는 마음이 뚝뚝 묻어났다.


 공연이 끝난 뒤 신혜성은 밴드와 인사를 하고는 잠시 무대에 남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공연 전마다 얼마나 긴장과 걱정을 하는지. 사고 없이 공연이 끝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관객에 대한 고마움과 앞으로 가수로서의 각오들을 전했다. 공연형 가수를 꿈꾸는 신혜성은 좋은 공연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고민을 8회차 공연이 무사히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내려 둘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공연 후 팬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신혜성 


  신혜성은 20년차 가수다. 그만큼 그는 노련하다. 그의 곁에는 오랜 시간 함께한 밴드와 공연 스텝, 팬들이 있다. 언젠가부터 팬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는 여러분도 즐거워야 하지만 저도 즐거워야 해요라며 팬들의 요구에 선을 긋는 척하지만 이내 못 이기는 척, “누구를 위한 것이냐”,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는 웃음 섞인 투정과 함께 팬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준다. 첫 솔로 콘서트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이젠 (여전히 긴장을 많이 한다고는 하지만) 능숙하게 공연 중간중간 팬들과 소통하며 편안함을 준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연을 수도 없이 했는데도 끊임없이 긴장하고,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최대한 피드백한다. 모든 팬들의 욕구를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공연을 할 수 있을까 방법을 모색한다. 그런 신혜성을 바라보는 팬들은 늘 그 자리에있다. 마지막 공연에서 이벤트로 준비했던 플랜카드의 글귀 언제나 머무를게 그 자리에처럼.


마지막 공연에서 팬들이 신혜성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용 플랜카드.

신혜성은 곡이 끝난 이후에도 조명이 꺼지지 않자 당황했고, 조명 감독님이 실수를 하신 줄 알았다고.


 신혜성은 공연도 노래도 잘하는 가수다. 끊임없이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새 노래를 선보이는 것이 설레는 가수다. 좋아하고 잘 하는 노래를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가수다. 앞으로도 그가 공연장이라는 그 자리에 자주 서기를 바란다. 그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더 많이 그 자리에 함께하기를 바란다. 공연에 대한 그의 고민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의 음악이 늘 우리 가까이 머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의 음악만큼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하기를 바란다. “신혜성이 공연한다고? 가봐야겠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그가 늘 공연으로 사람들을 매료할 수 있는 가수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힘든 하루의 끝에 그의 음악이 있다면, 그 얼마나 큰 위로인가. 연말 콘서트로 다시 한 번 그 자리에 설 그를 응원한다.

 


+

 진지하게 후기를 쓴 덕분에 721197번 가량 덕통사고를 당하고 재입덕을 하게 되었다. 폭발하는 신혜성부심을 크게 외치며 글을 마무리한다.

 


신혜성 외 않헤?

신혜성 노래 들어라!!!!!!!

신혜성 노래 들으세요!!!!!!!!!!!



*****


#해시태그로 알아보는 신혜성 추천곡 20


혹시나 이 지루하게 긴 글을 버텨내고 난 뒤 도대체 어느 노래를 들으라고?” 라는 물음을 가진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 콘서트 후기에 등장한 노래들은 눈물을 머금고 최대한 배제했다.

20곡 미만으로는 도저히 줄일 수가 없었으니 해시태그를 보고 알아서 골라 듣기를 바란다. 혹시 앨범을 통째로 듣고 싶다면, 발라드는 2<The Beginning, New Days>, 모던록은 <Embrace>를 강력 추천한다.

 

#현악_코러스_뿜뿜   #정통발라드   #신혜성만의__감성이_궁금하다면   

   거울                                                                  

   애인                                                                  

   나이                                                                 

   Timeless Memory                                                 

   빗소리에                                                            

 

#조용하고_감성적인 #잔잔한                                   #듀엣곡 #노래방애창곡

   이별을 꿈꾸다                                                      사랑… 후에 (With )

   사랑해                                                                인형 (With 임창정)

   끝인사

   한 걸음을 더


#까랑까랑 #신혜성의_미성을_즐기고_싶다면                #모던록

   사랑사랑…                                                        Stay


#분위기_있는 #bgm #브금으로_딱

   Buen Camino (Feat. 강수지)

   Island

   Love Actually (Feat. Vink)

   안녕 그리고 안녕 (Feat. Eric, 남규리)

   내겐 꿈 같은 하루 (Duet with 박지윤)

   조금 더 가까이 (With 영준 of 브라운아이드소울)




  1. 신혜성은 2007년 본인의 첫 솔로 콘서트에서 게스트 원더걸스와 함께 Tell Me 무대를 (무려 프릴이 달린 레몬색 블라우스를 입고…) 선보인 바 있다. 본인피셜 너무 충격적인 기억이라 머리에서 노래를 지워버렸다고. [본문으로]
  2. 특히 굿즈 디자인 뽑아내는 솜씨는 최고다. 돈 버는 방법을 안다. [본문으로]
  3. 사실 내가 라이브로 듣고 싶은 노래들이다. 죽기 전에 이 곡들 라이브로 들을 수 있을까. 앨범 별 콘서트 해달라! [본문으로]

과거와 현재 그 사이에서 추모하기

- ‘망각의 방법: are you okay?’를 보고 -

 

녹턴

 


 내가 사라지고 잊힌다는 건 슬픈 일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조금 서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어쩌면, 로봇처럼 모든 순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고 조금씩 기억들은 바래지고 잊히기에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김동현 연출 1주기 추모공연, 이라는 주제 하에 공연된 망각의 방법의 첫 번째 작품이었던 ‘are you okay?’는 이런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시간, 그가 살아온 기억들과 만들어 온 역사.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한 공연이라니, 그저 그의 삶 이야기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는데, 러닝타임 내내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고 있는 배우들과 스탭들, 그리고 그의 주변인들의 향기가 너무도 가까이 느껴졌다. 누군가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오히려 그를 이 시간에서 잊는 방법. 그 과정을 극 하나로 이토록 벅차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극은 크게 세 장으로 나뉜다. 이 장들은 모두 관객들이, 배우들이, 우리 모두가 김동현 연출을 잊어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그 사이, 그리고 현재. 첫 장에서는 김동현 연출의 작품들 속 인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근대부터 우리나라 민족들이 겪어온 아픔과 슬픔들을 담아낸 연극의 등장인물로서 배우들이 등장하고, 모두 다른 작품에서, 다른 인물로서 분한 그들은 장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점차 마치 하나의 작품에 존재하는 것처럼 무대에 함께 올라온다. 그리고 각자의 대사를 부분적으로 읊고, 그럼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대사로 받아치고, 또 받아치고의 반복이다. 조용히 그 대사들을 읊조리는 그들은, 한 무대 위에 함께 서면서 김동현 연출의 기억의 일부가 된다. 그가 살아있을 적 한 글자 한 글자 무대 위에 열정적으로 담아냈던 순간들이, 이제는 모두 하나가 되어 온전한 그에 대한 기억만으로 남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할 때 매 순간을 모두 머리에 담을 수 없듯이, 1장도 그랬다. 인물들이 자신의 대사의 몇 단어만, 몇 문장만 툭툭 내뱉는 그 소리들이 합쳐지면서 어떤 부분은 잊히고 어떤 부분은 기억된다. 기억하기 위해 잊는 셈이다. 점차 김동현 연출이 담아냈던 과거의 이야기들은, 과거로서 잊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에 대한 기억으로서 망각되어 간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은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순간들에 대해 말한다. 무대 위 배우들은 서로 사랑을 했던, 사랑을 하는, 사랑을 할 인물들로서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들은 김동현 연출 곁을 스쳐 지나갔을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계속 자신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미 보고 있는데도 지금과 같은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봐달라고 외친다. 그 방식은 아마도 변해가는 자신을 보아달라는,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그 순간을 모두 눈에 담아달라는 뜻일 것이다. ‘본다는 행위는 행해지는 순간, ‘보고 있던대상은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계속 나를 보라는 비슷한 어구들을 외치는 인물들의 말은, 처음엔 다소 생소하지만 점차 리드미컬한 노래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장의 막바지에 다다르면 계속 자신을 제대로 좀 보라고 외치던 인물들의 간절했던 표정은 점점 가벼워지고 밝아진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는 과거를 잊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주제도 망각의 방법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무대 위 인물들은 극이 아무리 진행되어도 상대가 자신을 현재의 모습으로 봐주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며 서로를 다른 방식으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서 그들은 말한다. ‘괜찮다. 우리는 변해가고, 변해가는 우리의 모든 순간들을 눈에 담을 수 없지만 과거만 기억해도 괜찮다고, 현재를 놓치고 있더라도 과거는 천천히 잊어 가면 되니까 괜찮다고 말이다.


 약간은 아이러니하다. ‘망각의 방법을 주제로 하고 있고, 1장에서도 김동현 연출의 작품들 속 인물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옅은 기억으로서 남기 위해 조금씩 잊혀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2장에서 말하는 게 과거를 기억해도 괜찮다는 거라니. 사실 생각해보면, 이 극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모두 망각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는 김동현 연출을 끊임없이 회고한다. 그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연기하는 이 모든 과정이 어쩌면 보다 그를 잘 보내주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온전히 그 시간을 돌아보고 기억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 말이다. 그렇게 2장에서 배우들은 김동현 연출의 삶 속 사랑을 나누었던 수많은 이들로서도 존재하는 한편, 그러한 그의 과거 모습들을 자꾸만 되새김질하고 기억하려 몸부림친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배우들은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온다. 비로소 현재로 돌아온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잊는 과정을 반복하며, 그들은 3장까지 다다랐다. 배우들은 각자 무대 위에서의 삶, 사소한 인생 이야기, 자신에게 중요했던 사건 등을 관객에게 대화하듯이 내뱉는다. 그러나 서로 너무도 달라 보이는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그들 사이를 연결지어주는 하나의 주제가 존재한다. 바로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는 자신이 무대 위에 서는 그 순간, 현실에서의 자신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대 위에 시간을 두고 오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아무리 그리워하는 곳이 있더라도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바로 자신의 집이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인사를 하지 못하고 보냈던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떠올려 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과거를 지나왔고, 역사를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지금 이 곳, 현재다. 마지막 장은, 이제 현재에 남은 배우들 그리고 우리가 사라진 이를 놓아주어야 할 때인 것이다.


 극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과 함께 어떤 시간을 보냈던 이 세상에 없는 그를 기억하고 또 망각했다. 다소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이 극은 이 묘한 지점을 마치 그의 머릿속에 담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듯 잘 표현해냈다. 어쩌면 망각한다는 것은 곧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추모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are you okay? 라는 이 극의 제목은, 꼭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아직은 조금 과거를 기억해도 괜찮다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잊어버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 역시도 괜찮다고. 아꼈던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것은 어떤 방식이든 다 괜찮은 일이니 말이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도 누군가 이렇게 나를 추모해준다면, 어딘가에서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랜 짝사랑의 기록

-쉴레에 대하여-

 

예청그릴스



 2014720. 비엔나의 뜨거운 햇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스물한 살의 나는 길거리의 아무 카페로나 들어간다. 구글 맵을 다시 보니 아직도 20분 정도를 더 걸어가야 한다. 결코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작열하는 태양 덕분에 한낮의 길바닥은 타오르는 듯이 뜨겁고 한달 여간 질질 끌고 다녀 얇아질대로 얇아진 버켄스탁은 길바닥의 열을 발바닥으로 여과 없이 전달한다.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절실하다. 한 모금만 마시면 이 갈증과 더위를 조금이라도 더 참아볼 수 있을텐데.

 

 그늘진 실내에 자리잡고 열심히 메뉴판을 뒤적여보지만 이곳은 스타벅스가 아니다. 손님보다 주문을 받는 종업원이 더 도도한 이곳은 비엔나. 이렇게 더운 날씨인데 아이스 커피는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따뜻한 에스프레소 위에 아이스크림과 생크림이 올라간 선데. 그저 시원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이토록 힘들다니. 아이스크림은 먹는 둥 마는 둥 나름의 아이스(크림) 커피를 후르륵 몇 입에 삼키고 다시 일어난다.

 

 오늘 제체시온은 가야지. 현금이 딱 입장료만큼 남았으니 내일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이곳만 들리면 나는 이번 유럽여행은 성공적이었다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마음먹고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금 나의 체력을 시험한다. 뙤약볕을 그렇게 다시 이십여 분 가량 걸어서 도착한 제체시온.

 


비엔나 제체시온의 모습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주머니에 남은 현금 몇 유로로는 입장료를 구입할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입장료는 금액이 맞는데 이곳을 방문한 목적인 클림트의 벽화를 보기 위해선 돈이 더 필요했다. 한 달여 간의 여행 동안 흥청망청 돈을 써버릴 대로 다 써버린 나는 돌아가기 일주일 전쯤부터 씀씀이가 엄청나게 소심해진 상태.

 

 갑자기 만 오천원 남짓한 금액 앞에서 소심해진다. 갑작스런 더위에 아침 댓 바람부터 벨베데레까지 갔다 온 터라 온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이 상태로라면 전시장에 들어가도 제대로 관람할 힘도 없을거야주문처럼 되내이며 들어왔던 입구 그대로 나온다.

 

 이것이 나의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두고두고, 지금까지로 딱 3년동안 후회하는 순간이다. 그래 봤자 스물 넷이지만 그 중에도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을 뽑아본다면 Top 5에는 속하지 않을까 싶다.

 

 음악, 무용, 오페라 등에는 딱히 집착스런 부분이 없는 내가 비엔나를 유럽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도 빠뜨리지 않고 방문한 데에는 딱 두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바로 에곤 쉴레와 구스타브 클림트. 그런 그들의 작품을 마지막 날, 그 유명한 제체시온의 입구까지 들어갔다가 그대로 돌아나온 경험은 나에게 거의 트라우마에 가깝다.

 

 

 

 이들에 대한 애정을 좀 더 분해해보자면,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희한하게도 쉴레를 먼저 좋아하게 되면서 클림트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중학교 삼학년 때인가, 예술의 전당인지 세종 문화회관인지 어딘가에서 나름 큰 규모의 클림트 전시가 있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당시에도 클림트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키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구나 하고 끝.

 

 그런데 한참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에 빠져있던 사춘기의 나에게 쉴레의 그림은 한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드로잉을 처음 봤을 때, 심마니가 심봤다!” 를 외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이거다 싶었다.

 


Dune Fall, Ryan Mcginley



 다들 사춘기 때 한 번쯤 그렇지 않나.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오롯이 나만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맨다. 중이병 컨텐츠라 해야하나. 그것들이 마치 나의 특별함을 증명해 주듯이. 부모님도, 또래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예민한 감성들을 이해하는 (것 같은) 예술가를 맞닥뜨리는 순간에는 그것들을 두 팔 벌려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 시절의 나는 노골적이고 날 것에 가까운 것들에 꽂혀있었다. 사지가 꺾여 보이는 신체와 이상하게 구부정한 자세들. 피 멍이 든 것 같기도, 곰팡이가 핀 것 같기도 한 창백한 피사체의 피부의 유혹적인 자태의 여자들. 다 벗고 있지만 야하기보다는 위태롭고 처절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뿌리치기 힘든 매력을 느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단 생각에 진절머리치던 격동의 시기여서일까,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하루에도 수십 번 머리를 벽에 처박고 울고 나서야 속이 시원해지던 시기여서일까. 쉴레의 그림은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혼자만은 아니라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딘가에는 나처럼 미치지 못해 속이 요동치는 사람이 한 명은 더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유난히 더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고흐처럼 누구나 다 아는 화가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적어도 대중적으로는 클림트에 비해 덜 유명한 쉴레는 희귀템을 혼자 득템한 느낌을 주면서 쓸데없는 으쓱한 기분을 주기도 했다.

 


Self Portrait with Physalis, Egon Schiele, 1912



 그 시절 내 책상에는 수능이 끝날 때까지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을 다짐한 책꽂이 한 칸이 있었는데, 그 칸에는 이를테면 <On the Road>,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상실의 시대> <키친> <무진기행>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와 같은 당시 나의 감성이라 정의하던 책들이 한 뭉치 정갈하게 꽂혀있었다. (절반은 읽고 절반은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을 나의 감성이라 우기곤 했다.) 쉴레의 그림이 실린 책 한 권도 그 사이에 꽂혔음은 당연하다.

 

 사춘기 이후 쉴레가 다시 인생에 등장했던 건 뜬금없는 대학교 입학 면접 때였다. 수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으로 계시던 두 교수님 중 한 분이 돌발 질문으로 좋아하는 화가를 물어보셨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쉴레가 떠올랐다.[각주:1] 그 분은 동양미학을 전공하신 분이어서 이름을 듣고 나서는 정작 내 대답에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질문들은 거의 다 까먹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그 질문과 나의 대답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혹시 합격하게 되면 쉴레에게 고마워해야지 했고, 훗날 유럽 여행을 떠날 때에는 그렇게 면접에서까지 우려먹은 작가의 작품의 실물을 한번은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2학년 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이다.[각주:2]

 

 오스트리아에서는 레오폴드 뮤지엄, 벨베데레 궁전, 알베르티나 미술관등을 전전했다. 거의 쉴레와 클림트 패키지였달까. 미술관은 대부분 혼자 돌아다녔는데, 쉴레와 클림트의 작품들을 며칠 내내 연속해서 보다 보니 공통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손가락과 가슴이었다.



Nude Self Portrait, Egon Schiele, 1910



 

손가락

 

 쉴레의 손가락은 유난히 아파 보인다. 손의 마디는 불긋불긋하여 벽에 주먹질을 몇 번 한 느낌이다. 울퉁불퉁 못난 손가락에 살도 거의 붙어있지 않다.

 

 동시에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한다. 남녀가 뒤엉켜 누워있는 그림 속에서는 성적인 욕망이 손가락의 끝 마디까지 뻗쳐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화상에서는 바짝 말라 볼품 없어 보이는 육체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그의 강한 자의식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쉴레의 손가락은 그가 그림에 표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하는 도구로 느껴진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칭찬할 때 우리는 그들이 숨 쉬는 것, 손가락, 발가락 하나 하나까지 섬세하게 연기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나는 그것을 쉴레의 모델에게서 본다.

 


Lovemaking, Egon Schiele, 1915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여자의 손가락은 얼굴의 표정보다도 더 정확히 그녀의 욕망을 연기하고 있다. 손가락이 빠져버린다면 이 장면이 지닌 힘의 절반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오스트리아에는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가 함께 전시된 경우가 많았다.[각주:3] 비슷한 시기, 비슷한 장소에서 활동한 이들이다 보니 비슷한 레퍼토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굶고만 살았나 싶게 유난히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의 여인들, 뒤엉켜 있는 연인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은 서로 닮아있는 부분도 많았다.

 

 반복적으로 보다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각주:4] 누군가 나에게 너가 그렇게 좋아하는 쉴레와 클림트를 구분해보라고 퀴즈를 낸다면 나는 어떻게 이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한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그로테스크함의 차이 외에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다른 구분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특히 채색되지 않은 드로잉 만을 가지고 누군가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맞출 수 있을까? 어떻게?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의 특권은 바로 이들의 드로잉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완성작 외에도 작은 규모의 드로잉 습작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작가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로잉을 좋아하는 터라, 이들이 아무렇게나 휘갈겼는데 엄청나게 잘 그려버린 (?) 연필이나 콩테 드로잉 들을 열심히 봤다.

 

 똑같은 여성의 누드여도 클림트와 쉴레의 선은 많이 달랐다. 쉴레의 드로잉에서는 그의 채색화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손가락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심지어 여성의 뒷모습을 담아낸 스케치 속에서도 손가락은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게 쉴레 것일 수밖에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반대로 클림트에서는 가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Two Studies of a Seated Nude with Long Hair, Gustav Klimt, 1901 



 확실히 그의 선은 훨씬 부드러웠다. 둥그스름한 선들이 그리는 곡선, 그것들로 표현되는 여성의 신체는 쉴레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신기할 정도로 그의 여성 누드 모델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여신처럼 느껴졌다. 한 여자에게 사랑에 빠져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을 때 남성의 눈으로 여자의 몸을 묘사한다면 그런 선이 나올까.

 

 특히 클림트 팬이라면 공감할지 모르겠는데, 클림트의 여자들은 어깨가 무척 아름답다. 이상적인 직각 어깨와 군살 없이 늘씬한 팔의 실루엣이 너무 아름답다. 특히 겨드랑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평가적 차원에서 예술이다할 만하다.

 

 

 

 나는 클림트가 여자의 옆모습을 그린 드로잉에서 다시금 심봤다를 외쳤다. 클림트에서는 가슴인 것 같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풍만한 가슴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못해 부담스럽다. 하지만 클림트의 드로잉에서 여성의 젖가슴은 과장이 없다. 약간 처져 빈약해 보이기도 하는 이 아담한 가슴들은 남성들이 원하는 가슴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Study from 'The Beethoven Frieze', Gustav Klimt 



 그리고 이렇게 솔직하고 그래서 더 여성스러운 가슴을 묘사할 정도면 왠지, 정말, 진짜로 많은 여성의 누드를 봤을 것 같았다.[각주:5] 그리고 이런 상상은 소설 <클림트> 속에서 묘사된 클림트의 여성편력적인 이미지와도 맞아 떨어졌다그때부터 그냥 클림트에서는 가슴을 놓치지 않고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다. 좋아하는 것들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 여행지에서, 미술관에서, 쉴레와 클림트를 마주친 일은 좋은 것들만 똘똘 뭉쳐진 행복 그 자체였다.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 하고 남겼던 메모에 적힌 쉴레의 손가락과 클림트의 젖가슴이라는 네 단어를 바탕으로 이렇게 또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기록해본다



  1. 정확히 말하면 쉴레밖에 안 떠올랐다. [본문으로]
  2. 고백하자면 당시에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성덩어리였던 나는 쉴레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내가 그를 좋아하던 온갖 이유를 떠올리게 되었고, 감정이 차올라 울먹이며 대답했다가 거의 울면서 면접장을 걸어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정서가 많이 불안정했구나 너 (?) [본문으로]
  3. 코코슈카는 이름이 매우 귀여움에도 이미 내 마음엔 다른 두 남자가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터라 엄청난 임팩트는 주지 못했다. [본문으로]
  4. 혼자 전시를 감상할 때면 딴 생각과 상상을 무지 많이 한다. 그게 특히 좋은 점! [본문으로]
  5. 솔직하다는 건 본인이 평소 목욕탕에서 보던 그런 가슴에 가까웠다는 것. [본문으로]

<청춘시대>를 보내며

(부제: 너무 이르게 송지원을 애도한다)

 

이르름

 


*이 글은 <청춘시대> 시즌12의 세부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꽤 가까운 미래도 미지수로 느껴지곤 한다. 2020년쯤 누구누구가 결혼하면 웃기겠다, 몇 년 뒤 연휴엔 여기로 같이 여행가자, 따위의 모호한 상상계획들 끝에 그때 내가 살아있다면이라는 조건을 뜬금없이 덧붙이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세상의 균형 맞추기


 "사실 서동주라는 캐릭터를 죽이려고 했었다. 한 사람 정도는 죽여야 세상의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동주가 죽고, 강이나가 '오늘의 사망자수'를 바라보는 장면을 실제로 쓰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인물에 대한 애정 때문에 차마 죽이질 못했다."[각주:1]

 

 <청춘시대> 시즌1이 종료된 후 공개된 박연선 작가의 인터뷰는 시청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죽음을 통한 세상의 균형이라니, 이 무슨 하이킥 엔딩[각주:2]같은 소리인가. 이 발언은 시즌2 7회에서 하메들의 묘비명이 에필로그로 등장하자 다시 주목 받게 된다. 단순히 묘비명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생몰년도가 함께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난 해와 묘비명의 내용에서 묻어나는 특징으로 다섯 묘비의 주인은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가장 주목 받은 것은 매 순간이 행운이었다는 말과 함께 1995-2025(!)라 적힌 유골함의 주인공이 극중 95년생인 송지원(박은빈)이었다는 점이다. (95년생 동갑내기 룸메이트 정예은(한승연)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십자가 모양 묘비의 주인이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송지원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은 묘비명에서 그치지 않는다. 13회의 에필로그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의 손을 잡고 여기가 엄마가 살던 곳이냐고 묻는다. 시점은 8년 후, 2025년이고 남자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송지원의 학보사 동기이자 로맨스를 넘어선 인생 조력자로 등장하는 임성민(손승원)이다. 러브라인이 본격화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극이 끝난 후에도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남길 바라는 시청자들의 희망이 산산이 조각난 순간이었다.

 



우리 하메들 꽃길만 걸어


 야자 시간에 다같이 몰래 하이킥 마지막화를 시청하던 날, 마지막 장면을 본 같은 반 친구들은 교실에서 웅성거리거나 수군대며 복도를 배회하다 걸려서 기합을 받았다. (어차피 그 날의 야자는 전교적으로 망해버렸지만.)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라는 대사가 불러 일으킨 파장의 바탕에는 극중 인물들의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는 시청자들의 바람이 놓여 있었다. 느닷없이 던져진 극중의 죽음에 대한 이런 격한 반응은 그만큼 캐릭터들이 사랑 받았음을 (다분히 변태적인 방식으로) 증명한다.

 


 

  유은재, 윤진명, 정예은, 송지원, 강이나, 조은. 12회로 구성된 두 시즌 동안 여섯 명의 하우스메이트(이하 하메’)들은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남녀 주연 및 주인공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로 이루어진 구도가 기본적인 드라마들 사이에서 <청춘시대>는 다수의 주인공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경우의 수를 영리하게 활용한다. 인물의 수가 많은 만큼 저마다 다른 성격, 다른 입장,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며 쌓아 올려야 하지만, 이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특별한 사건 없이 같이 노는 것만 봐도 재미있고, 에필로그로 제시되는 짤막한 인터뷰나 트리비아들(프로필사진, 전생, 술버릇, 묘비명 등등)까지 재미를 더한다. 가상의 인물들이 정말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인물들간의 케미스트리에 의존하는 쉬운 길을 가는 대신, 하메들은 저마다 극복하고 성장해야 하는 큰 줄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각자의 삶을 사는 와중에 거실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고 시간을 보내며 관계가 깊어지는 쪽에 가깝다.) 이들의 이야기는 닮음으로 공감을 자아낸다고 보긴 어렵다. 은재(박혜수/지우)는 너무 소심하고, 진명(한예리)은 너무 딱딱하며, 예은은 너무 얄밉고, 지원은 너무 노골적이고, 이나(류화영)는 만사가 너무 쉽고, 은이(최아라)는 너무 어리다. 절절한 첫사랑과 첫 실연, 복잡한 가정사,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있을 법도 하지만 왠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너무들로 이루어진 결점투성이들은 너무 사랑스럽다. 서로를 아끼고,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나와 다른 타인들을 예뻐하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함께 보낸 시간만으로 많은 결점들을 슬쩍 봐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사실 장점이 더 많은 그런 너와 나와 우리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인물이 송지원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송지원은 극에 생기를 불어넣는 밝은 캐릭터다. ‘이라 불리우며 여자 신동엽으로 소개되고 인생 최대고민이 모쏠탈출인 것으로 그려지는 이 인물은 언뜻 극의 호흡을 위한 밝은 개그 캐릭터로 보이지만, 극중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가까운 이의 죽음과 관련된 무거운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시즌1에서 송지원은 유일하게 시시한 비밀만을 공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다른 하메들이 각자의 삶에서 큰 사건과 변화를 겪는 동안 도움이 되는 말을 몇 마디 턱턱 던지면서 벨에포크의 공용 공간에 존재한다. 이야기가 밝혀지지 않는 것이 더 비밀스러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궁금한 인물. 그리고 시즌2에서는 시즌1에서 암시만 되었던 그녀의 과거가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자꾸만 들리던 이명들과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송지원은 고군분투한다. ‘문효진성적 트라우마.’ ‘예쁜 구두로 좁혀지는 이 기억들의 조각을 열심히 찾아 다니지만, 어린 시절 친구였던 효진이가 중학교 때 집을 나갔다가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진실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다른 하메들이 시즌을 통해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결점을 극복한 모습으로 성장했다면, 송지원의 이야기는 인격적인 성숙보다는 특정 사건의 해결에 더욱 집중되어 있다. 은재는 이별을 겪으며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예은이는 데이트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서서히 극복하며 자신의 불행에 집중하는 대신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택한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던 진명은 숨을 돌리고 다른 하메들을 돌볼 여유가 생긴다. 은이는 상처 받지 않으려는 어설픈 무관심에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모두 자신에게 없던 능력을 키워낸 것이다. 반면 송지원은 온갖 상황에서 하메들을 도우며 보였던 추진력, 추리력, 뻔뻔함 등 자신이 가진 장점을 최대치로 밀고 나간다.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게 된 다른 하메들과는 달리 지원은 과잉의 습관들을 덜어낸다.



 지원은 쉬운 길을 선택하는 대신 정면돌파를 선택한다. 송지원은 누구보다 차근차근 자신의 과거를 직면한다. 억압했던 기억들이 몰아치기 시작할 때, 모른 척하는 대신 여기로 와서 입을 연다. 가해자인 한관영이 좋은 선생님으로 축하 받는 중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 순서로 넘어가자고 재촉할 때도, 그녀는 손을 들어 증언한다.[각주:3]


 아무도 지원을, 그리고 하메들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친구도, 가족도, 연인도 조력자의 역할을 충실히 할 뿐 자기 몫의 괴로움은 자기가 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차곡차곡 쌓인 인물들 간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청춘시대>가 로맨스물이 되긴 힘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녀관계보다 더 끈끈한 사람 사이의 연결, 그 와중에 주체적으로 갈등을 헤쳐나가는 인물들. 그 바쁜 틈바구니에서 송지원은 시즌1에서는 하메들의 복잡다단한 관계의 중심에서 균형을 맞춰주었고, 시즌2에서는 분홍 편지라는 중심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주연이 없는 극이라지만, 그녀는 늘 중심에 놓여있었다.

 


관객의 특권, 작가의 권한


 이런 송지원이 죽었다.


 극에서 적당한 불친절함은 환영이다. 엄마가 섭렵하고 있는 6-70년대 배경의 아침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그 명확한 선악구도와 절대 숨기거나 암시되는 법 없이 명확한 독백으로 표현되는 주인공들의 속마음,주어진 상황에 대한 정형화된 반응과 그 이후에 주고 받는 예상 그대로의 대사까지. 악역은 너무 당연하게 오해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오해에 빠져든다. 시청자들의 쉽고 빠른 이해를 위한 장치들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이런 친절한 연출이 시청자의 자율성이자 특권을 줄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극 바깥에서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오랫동안 시청자의 특권이었다. 아무리 꽉 닫힌 엔딩을 제작진이 방영한다 하더라도,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의 삶과 행동과 미래에 대해 마음 편히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아무런 구체적인 설명 없는 단호한 죽음은 이 특권을 무시한다. 아니 누가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걸 모르는가. 세상이 잔인하기도 하고, 불운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는 것을 모르나. 이런 불편한 진실만을 굳이 닫힌 현실로 보여주는 것에 한숨짓지 않기 힘들다.

 


“ 저는 시청자들이 왜 그렇게 주인공한테 자기를 감정이입 하는지 모르겠어요. 주인공한테 조금이라도 못되게 구는 사람을 같이 욕하는데, 그런 나는 주변사람이지 않나 싶은 거예요. 저는 누구 한 사람이 주인공이라서 주목 받는 드라마도 싫고 그런 현실도 싫어요.”

 


 어처구니 없지만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의 또 다른 말이 힌트가 될 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청춘시대>의 다인물 구도가 가지는 장점이 비틀려서 나타난 결과가 송지원의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사랑하는 이의 상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허구적 인물의 죽음 앞에서도 무력하다. 송지원의 갑작스런 죽음에 받은 충격과 부정은, 이런 상실의 구조를 굳이 가상의 이야기 안에서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배경과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적어도 직접적인 이유가 주어지는 극중의 죽음보다도, 정말 손쓸 수 없고 설명조차 되지 않는 미래의 죽음을 알려준다는 것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불친절은 캐릭터에 대한 예의가 부족한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야기 속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던 인물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과정은 아무런 맥락 없이 에필로그 몇 개로 던져진다. 우리는 단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다는 것이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 테지만. 한 인물의 서사는 작가의 의지로서 완결된다. 작가는 쏭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성장기이자 생존기


어렸을 적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내가 잠들면 세상도 움직임을 멈추는 줄 알았다

세상은 나를 위해  움직였고

나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시절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 없는 곳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저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다른 사람을 내 세상의 중심에 놓기 시작한 것은


간절히 원해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분한 마음에 차라리 나를 미워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오늘 나는 다시 아프게 깨닫는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미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

 -<청춘시대> 시즌2 7-

 


 청춘들의 소소한 일상물을 기대했다면 <청춘시대>는 조금 다르다. 일상 그 자체보다,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시즌2에서 새로운 하메 조은의 등장은, 모두 아주 무서운 증오가 집약된 분홍 편지때문이었다. 살벌한 저주와, 미움과, 죽여버릴 거라는 협박이 담긴 무서운 편지.


 어쩌면 이것은 사랑보다는 미움에 대한 이야기다. 예은의 목소리로 읽혀진 위의 나레이션은, 사실 하메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다소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시즌2의 중심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두는 것에서 벗어나 미움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의 자신을 돌아보고, 그 가능성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하메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미움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주인공()에게 집중하느라 주변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인물들이 자신의 삶 그 자체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물들의 내적 변화를 통한 성장기지만, 어찌 보면 주인공이라 해서 특별히 친절할 것 없는 세상을 살아나가는 생존기에 가깝다. 사랑이 아닌 미움, 사랑을 통한 미움에 대한 것이었기에 청춘의 찬란한 면 너머 갑작스런 죽음이 비집고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꿈도 희망도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제멋대로고, 알지 못한 채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다니는 이들을. 그러고는 너무 쉽게 다치고 죽어버리는 이들을. 그래도, 여전히, 이 쉐어하우스의 이름은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이다. 하루하루가 아름답다거나, 찬찬히 뜯어보면 구석구석 썩 아름답지는 않은 자질구레한 삶이지만, 청춘은 가히 아름다운 시절이다. 부디 이 시절의 매 순간이 행운으로 기억되길. 쏭의 남은 8년은 누구보다 행복할 것이다



  1. 마이데일리(16-09-06), '청춘시대' 박연선 작가의 아직 못다한 이야기 (종합) [본문으로]
  2.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본문으로]
  3. 그러나 송지원의 진실 밝히기 에피소드 전반에서 느껴지는 과정상의 헐거움은 큰 문제다. 법과 같은 현실적인 연결고리들을 꼼꼼히 구성하지 않는 것이 작가의 오랜 약점이라 생각하지만 이 글의 요점을 빗나가므로 상술하지 않겠다. [본문으로]

* 이 글은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를 안 보셨고, 보실 분들은 영화를 보신 다음에 읽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그토록 짙게 남은 불행의 잔상들에 대하여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마라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제 그만 하라고, 이쯤 했으면 충분하지 않냐고. 이 영화는 정말이지 유이치를, 츠다를, 호시노를, 쿠노를, 그리고 나를 끝까지도 몰아붙였다. 힘에 부치는 영화다. 그래서 이 글 역시 힘겹게 힘겹게 쓴다.

 

나는 왜 이 우울한 영화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는 그저 멍한 기분이었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영화를 보고 며칠, 길게는 몇 주 동안 나는 이 영화에 거의 사로잡혀 있었다. 한동안 영화의 이미지들과 소리들, 그러나 딱 잘라서 이미지혹은 소리로 국한짓기에는 조금 부족한 무언가, 이를테면 분위기같은 것이 악령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그것들을 한 데 모아 잔상으로 부르려고 한다. 이 영화는 나에게 유독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음악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책이든 가끔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뭐라도 써야 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짧게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노트북 앞에 앉아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두 시간동안 목도한 거대한 불행 앞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전에 나는 <꿈의 제인>을 보고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도 비슷한 상태에 빠진 바 있다.) 사람은 가끔 감당할 수 없이 큰 감정의 덩어리를 맞닥뜨렸을 때 오히려 단어를 잃는다. 그러니까 그 몇 주간 나는 목울대에 커다란 불덩어리 같은 것이 걸린 사람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꿀꺽 삼켜지지도 토해지지도 않았다.

또 다른 패인은 내가 필자를 주어로 글을 쓰고자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좀더 객관적인 형식의 글, 이를테면 레포트나 리뷰 같은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글쟁이가 되기엔 너무도 미숙한 탓인지, 어떤 소재에 있어서는 도저히 대신 필자를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리 슈슈에 대해 뭐라도 쓰기 위해서는 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우울과 불행은 과거 온전히 나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잔상 : 초록 풀밭



끝도 없이 펼쳐진 풀밭, 헤드폰과 시디플레이어, 불안하게 기울어진 지평선, 혼자 서 있는 소년 또는 소녀와 그 애를 제멋대로 잡는 카메라.

 

이 영화 최초(이자 최후)의 이미지는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영화가 끝난 후 나를 그토록 괴롭게 했던 우울의 씨앗이자 집약체였다. 이 이미지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한동안 릴리 슈슈의 풀밭에 살아야만 했다.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 기묘한 풀밭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한 번도 울려퍼진 적 없고 오직 헤드폰으로만 들을 수 있다. 그곳에서는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소리 역시 차단되므로, 헤드폰을 쓴 호시노가 아무리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른들 그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는다. , 풀밭에 섰던 유이치와 츠다와 호시노에게 릴리와 릴리의 에테르는 공유되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 공간에서 각자 저마다의 릴리를 찾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다.

 

흥미로운 것은, 쿠노는 단 한 번도 이 풀밭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머지 세 아이들이 릴리를 처음 접하게 되는 계기를 떠올려보자. 유이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호시노의 방에서 릴리의 포스터를 보고 그녀에 대해 처음으로 묻는다. 츠다는 1년 뒤 유이치가 듣던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릴리의 음악을 접한다. 그렇다면 호시노는? 영화에 명시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호시노의 짤막짤막한 언급들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호시노가 중학교 시절 쿠노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릴리와 드뷔시를 사랑하던 쿠노를 통해 릴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네 명 중 릴리라는 이 끔찍한 전염병의 시발점에 있는 쿠노만이 풀밭 씬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쿠노와 다른 세 명이 맞게 되는 운명의 차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유이치는 죽이고, 호시노는 죽고, 츠다는 죽이는 동시에 죽는다. 그러나 쿠노에게만큼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 호시노에 의해 끔찍한 일을 겪은 후 학교에 나오지 않던 쿠노는 어느날 머리를 삭발한 채로 등장한다. 이후 영화는 쿠노의 회복과정을 조심스럽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쿠노는 다시 피아노를 친다.

 

결국 이 풀밭에 서서 헤드폰을 쓰고 릴리 슈슈를 듣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릴리와 자기 자신만을 남기는 일이고, 릴리의 에테르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며 에테르에 자신의 영혼을 내주는 일이다. 영화에서 에테르는 전염병 혹은 기생충처럼 숙주를 찾아 움직인다. 쿠노에서 호시노로, 호시노에서 유이치로, 유이치에서 츠다로.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쿠노는 영화 안에서 단 한 번도 릴리 슈슈를 듣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악착같이 드뷔시에 매달린다. 왜 중학교 때 릴리와 드뷔시를 동시에 좋아하던 그녀가 돌연 릴리를 버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릴리와 드뷔시가 사실 한 존재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릴리와 드뷔시는 아라베스크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각각 어둠과 빛, 즉 존재의 자기파괴적 측면과 자기복구적 측면으로 대변된다. 따라서 드뷔시의 세계에 사는 쿠노가 서서히 조각난 영혼을 복구해나간다면, 릴리에게 영혼을 내어준 세 아이들은 자기파괴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그러나 유이치, 호시노, 츠다에게 릴리는 단순히 죽이는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끝까지 붙잡고 살리는 힘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쿠노가 강간당하는 것을 지켜본 후 유이치는 그야말로 죽지 못해 하루하루 연명하듯 사는데, 이때 유이치에게 유일한 기댈 곳은 릴리 슈슈의 음악과, 온라인 팬카페, 그리고 거기서 함께 릴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파란고양이이다. 쿠노 사건 이후 유이치는 팬카페에 몇 번이나 죽으려 마음먹었다고 털어놓으며 자신을 구해달라고 호소한다. 이때 위로를 건네는 파란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유이치는 앞으로 다가올 릴리의 공연, 그리고 그곳에서 파란고양이를 만날 일만을 기다린다. 이때 릴리의 세계는 유이치를 죽지 못하도록하는 힘이다. (물론 이것은 호시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이치에게 있어, 호시노는 그 세계의 창조주이자 수호자이다. 평범하고 밝은 중학교 1학년이었던 유이치에게 릴리와 에테르를 알려준 사람이 호시노인 데다가, 유이치가 현실 대신 그 세계에 완전히 눈을 돌릴 수 있도록 유이치의 현실을 잿빛으로 만들어준 사람도 호시노이고, ‘파란고양이라는 이름으로 유이치가 팬카페로 대표되는 가상세계에서 안정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한 사람 역시 호시노이기 때문이다. 호시노는 마치 아버지처럼 유이치의 세계를 만들고, 공고히 함으로써 그를 새로 태어나도록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공연장에서 자신이 파란고양이임을 밝히고 유이치가 콘서트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한 순간에 파괴한다. 아버지가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 버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신화와 종교에서 이러한 일은 끝도 없이 반복되어 왔다.

 

 

두 번째 잔상 : 오키나와


마구 흔들리고 지지직거리는 캠코더 속 화면, 초록빛 물과 열대우림과 바람, 불꽃놀이와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

 

나에게 이 영화에서 가장 눈부신 부분을 꼽으라면 고민 없이 오키나와 시퀀스를 이야기할 것이다. 오키나와 시퀀스는 중간에 갑자기 삽입되는 회상 장면 중 하나로, 러닝타임의 꽤 긴 부분을 차지한다. 시간적 배경은 이들이 중학교 1학년이던 1999년 여름, 호시노와 유이치가 친구였던 마지막 시기. 필리어(유이치)의 표현에 따르면, 친구들끼리 훔친 돈으로 간 이 여름의 오키나와 여행은 그의 인생에서 장및빛 시대의 종말을 알리고 잿빛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전환점이었다. 필리어는 말한다. 이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인류가 멸망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이후의 전개를 보면, 그 이야기는 아마 진심일 것이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생각했을 때, 오키나와 시퀀스는 여러모로 눈에 띈다. 이 시퀀스에 이질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가장 큰 요소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사용이다. 첫 장면인 비행기 씬에서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모든 화면이 휴대용 캠코더로 찍은 것으로 대체된다. 엄청난 노이즈, 현격히 떨어지는 화질, 촬영자의 미숙함 혹은 움직임 때문에 멀미가 날 정도로 흔들리는 화면. 이때 드는 자연스러운 의문은 아마도 촬영자가 누구인가하는 것일 것이다. 감독은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심지어 촬영자는 한 명일수도, 여러 명일 수도 있다. 이 시퀀스를 자세히 보면 유이치의 일행과 여행사 직원이 번갈아가며 두 세 대의 캠코더를 들고 항상 촬영중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핸디캠의 사용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한 현장감과 엄청난 역동감을 부여하면서도, 물리적인 흔들림과 불안정 탓인지 어딘가 불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오키나와 시퀀스를 더욱 특이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요소는 화법의 변화이다. 물론 표준 일본어에서 오키나와 방언으로의 변화 역시 이 시퀀스가 주는 이질감에 기여하지만, 더 근본적인 차이는 영화 자체의 화법 변화에 있다. 이전까지, 그리고 오키나와 이후에도 영화는 유이치의 1인칭 시점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른다. 물론 유이치가 목격하지 못하는 장면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츠다의 자살 장면처럼) 유이치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퀀스에서만큼은, 유이치는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호시노이다.


릴리의 아라베스크에 남쪽 섬이 나오잖아요? 상관없을지 몰라도 오키나와 근처에 아라베스크와 비슷한 섬이 있어요. ‘새로운 성이라는 뜻인데, ‘아라구스크’, 신이 사는 섬이라지요. (아이디 : 파란 고양이)

그 섬 이름 들은 적 있어. 근데 어디서 들었지? 그게 기억이 안 나. (아이디 : 필리어)

 

아라구스크에 대해 파란고양이는 상세하게 기억하는 반면, 필리어는 어디서 들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1999년의 여행이 다른 누구도 아닌 호시노의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이 여행에서 호시노는 보고, 유이치는 보지 못한 것, 혹은 호시노는 겪고 유이치는 겪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호시노는 이 여행에서 세 번이나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이 중 두 번은 자신이 겪은 것이고, 나머지 한 번은 목격한 것이다. 첫 번째는 바다에서 튀어오른 동갈치가 그를 습격했을 때, 두 번째는 물에 빠져 정신을 잃었을 때 호시노는 죽을 뻔했다. 동갈치의 습격 때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으니 덜 위험했다고 쳐도, 물에 빠졌을 때 호시노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탐험가가 그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탐험가로 말할 것 같으면, 오키나와 시퀀스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다. 이 사람은 여행의 첫 순간 아이들이 탄 SUV에 합승을 부탁하면서 처음 등장하는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일행과 계속해서 마주친다. 자기소개에 따르면 이 인물은 호기심이 왕성한 대학생으로 추정되고, 이 섬에는 벌써 네 번째 온 것이며, 이번에는 즈구로미료고이라는 새를 보고 가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은 탐험가가 아이들과 친해진 후 서로 죽고 죽이는 자연의 잔혹한 섭리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자연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며, ‘그래서 여행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곱씹어볼수록 묘하다. 왜냐하면 이 섬의 자연 속에서 그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직후 죽음을 맞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행은 참으로 어이없게도 끝이 난다.

 

탐험가의 도움으로 죽다 살아난 호시노는 일행과 함께 SUV에 타 온갖 걱정을 들으며 이동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앞쪽 도로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고, 운전수는 차를 세웠다. 그때 마침 호시노는 이들과 동행한 오키나와 토박이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오키나와 전설에 사람에겐 혼이 7개 있다고 해. 2개 잃어서 5개 남았어. 섬에 나쁜 걸 들여온 거 아냐? 신을 화나게 하면 살아서 못 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고 현장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탐험가가 있었다.

 

신은 탐험가에게 화가 났던 걸까? 섬을 파헤치고 다니는 그의 대책 없는 명랑함에? 생판 남이 먹고 있는 음식을 매번 달라고 하는 뻔뻔함에? 자연의 잔인함을 너무도 빨리 간파한 영리함에? 아니면, 신이 두 번이나 죽이고자 했던 호시노를 끝내 살려낸 오만에?

오키나와 할아버지의 말대로 호시노가 두 개의 영혼을 잃고 다섯 개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순간 호시노의 나머지 다섯 영혼은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조각조각 났을 것이다. 이 순간 이후 호시노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섬에서 경험한 세 번의 죽음 이후 호시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키나와 이전과 이후에 등장하는 호시노는 유이치의 눈에 비친 대로, 유이치가 이해하는 대로 그려진다. 그러나 오키나와 시퀀스에서만큼은 다르다. 장담하건대, 유이치는 여행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간 개강 첫날 호시노가 왜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굴었는지, 오키나와 여행이 왜 호시노에게 전환점이었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관객 역시유이치보다는 많은 것을 보았다고 한들완벽히 알 수는 없지만,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1999년 여름 죽음의 섬에서 호시노는 죽음에 매료당했을 수도, 압도당했을 수도, 생의 허무함에 환멸이 났을 수도, 혹은 전부 다일 수도 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 여름 호시노의 영혼이 난도질당했으며, 그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복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 시퀀스에서 휴대용 캠코더는 시종일관 이 모든 크고 작은 죽음들을 기록한다. (죽은 탐험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씬에서 그가 아이들의 캠코더에 관심을 보이고, 심지어는 가지고 내릴 뻔하는 부분이 다시 보인다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까.) 그리고 캠코더는 여행에서 돌아온 호시노가 츠다와 쿠노를 강간협박하는 수단으로 다시금 등장한다. , 이 영화에서 캠코더는 죽음을 담는도구에 이어서, ‘죽이는도구가 된다.

 

 

세 번째 잔상 : 오후의 교실


따뜻한 갈색 톤의 화면, 빈 의자들, 피아노 소리, 앉아 있는 소녀와 서서 소녀를 바라보는 소년, 오후의 햇빛.

 

이 영화의 마지막은 평온하다. 특히 앞의 수많은 폭력적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큰 감정의 기복도 사건도 없이 조용히 마무리되는 결말부분은 다소 싱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결말 중 가장 잔인하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따라서 남은 이들에게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햇빛이 들어오는 오후의 교실에 앉아있는 유이치와 쿠노는 과연 무사히 무럭무럭 커서 어른이 될 것인가? 이 평화롭고 나른한 마지막을 우리는 과연 해피엔딩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가끔 이렇게까지 우울한 영화에서라면 차라리 주인공이 죽길 은근히 바란다. 예컨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의 죽음은 그녀의 인생을 생각했을 때 차라리 복된 것일지 모른다(물론 그 방식은 나의 정신 건강에 무척 좋지 않았지만). 만약 마츠코가 그 후에도 오래오래 살았더라면? 상상해보라. 나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때때로 삶은 죽음보다 잔혹한 것이며, ‘어떤삶의 연장은 축복보다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이치만하던 시절, 만약 나의 삶이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이고 그 때의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나 역시 같은 것을 바랐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유이치는 스스로 이야기했듯 여러 번 자살을 생각하고, 카메라도 이를 방조하기라도 하듯 관객을 가지고 논다. 유이치가 호시노를 찌르고 나서 장면 전환이 된 후 카메라는 트래킹 쇼트로 텅 빈 유이치의 집을 훑으며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카메라가 방 안쪽으로 들어가면 유이치는 어설프게 피아노를 치고 있다. 카메라는 유이치를 잠깐 보여주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천장을 비추고, 서서히 내려온다. 가장 심장 떨어지면서도 절묘하다고 느꼈던 장면은 이 직후에 나온다.

 


저 씬. 저 망할 놈의 씬. 이 장면에 대해서는 굳이 많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장면에서 나는 가슴이 철렁하여 탄성을 내뱉으면서도, ‘결국 너도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드는 안도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주 조금 후련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영화에 푹 빠져 유이치라는 캐릭터를 많이 아끼게 되었기 때문에 들었던 듯하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인생들에서 죽음은 해방의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 바로 다음에 유이치는 천연덕스럽게도 천천히 내려와 쪼그려 앉은 채 방 안에 밀고 들어오는 오후의 햇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이치는 죽지도, 경찰에 넘겨지지도 않는다. 대신 유이치는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담임에게 불려간다.

 

이 이야기에서, 이것보다 더 최악인 결말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유는 명확치 않지만, 나는 이전까지 이 영화에 무수히 등장한 폭력적인 장면들보다 이 장면에서 더한 충격을 받았다. 살인을 저지르고 온 유이치를 앉혀놓고, 착하지만 어딘가 덜떨어진 담임이 묻는다. 요새 성적이 떨어졌는데 고민하는 일 있니? 유이치는 없다고 대답하고, 담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 그럼 열심히 해봐.”……도대체 뭘?

나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오사나기 담임이 평범한 어른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큰 악의는 없지만 무지하고, 사실은 알고 싶은 의지도, 관여하고 싶은 의지도 없다. 그녀는 커가면서 적당히 넘기고 빠져나가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녀는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들 간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개입한다. “이누부시가 학교에 오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 혹시 다들 짐작가는 것 있니?” “다들 쿠노에게 왜 그러는 거니?” 등등. 물론 이 개입은 제스쳐에 가깝다. 여전히 이누부시는 학교에 오지 않고, 쿠노는 여자아이들에게 이지메를 당하며, 유이치의 성적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유이치와 쿠노 역시,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것이다. 마지막 씬인 오후의 교실 이후 그들은 모든 불행의 기억들과 지은 죄를 십자가처럼 이고지고 꾸역꾸역 살아가다 자기도 모르는 새 어른이 되어버릴 것이다. 적당히 넘기는 법과 마음 주지 않는 법과 어린 시절을 잊는 법을 배울 것이다. 어느 순간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늘 그렇듯, 가장 잊고 싶은 것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항상 아주 사소한 계기에도 몰려와 기억의 주인을 악령처럼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아주 사소한 계기에도. 나에게 이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는 나에게 많은 후유증을 남겼지만, 동시에 나의 어린 날들의 후유증이었다.

 

 

마지막 잔상 : 릴리 슈슈



 

Arabesque : https://youtu.be/hEvnvs3NP_M

Glide : https://youtu.be/nRRZg8B7G5k

Ai No Jikken : https://youtu.be/nRRZg8B7G5k

Erotic : https://youtu.be/zQHHTGpL60A

 

 



아이돌 개념 뒤흔들기 :

아뮤즈 재팬의 PerfumeBABYMETAL 기획




왕수박

 




 

아이돌?


 

        



무엇이 무대에 서 있는 누군가를 아이돌로 만드는가?

 


 뛰어난 외모, 군무, 맞춰 입은 의상, 성적 소구, 댄스곡... 몇몇 아이돌 그룹이 공유하는 특성을 얘기하기는 쉽지만 무엇이 아이돌의 필요충분조건인지 콕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우상이라는 어휘의 포괄적인 의미만큼이나 국가별 시대별 아이돌의 모습은 달랐으며, 지금도 그 경계는 계속해서 변화, 확장 중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짧은 한국 대중음악사만 들춰 보더라도 90년대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인기를 끌었던 시기와 SM엔터테인먼트의 ‘HOT’ 이후의 아이돌 씬은 각각의 음악, 팬덤 문화 등에서 너무나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당대 아이돌의 모습이 현재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는 90년대 아이돌 세대 이전의 솔로 가수들은 한국 대중들이 그들을 아이돌로 부르지 않았음에도 동시대 일본의 아이돌 개념에 비추어 보면 명확히 아이돌로 분류되어야 한다.


 팝 씬으로 눈을 돌려보면, 뉴키즈온더블락과 엔싱크는 아이돌이었다지만, 원디렉션은 아이돌인가 그냥 보이밴드인가 혹은 오디션 출신 팝스타인가? 저스틴 비버와 아리아나 그란데는? 10대들의 우상이라는 점을 들어 이들에게 ‘idol’이라는 어휘를 사용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뮤직뱅크에 나오는 K-POP 아이돌 그룹과 이들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그냥 직관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그 경계를 명확히 설명하기 힘들다. 프로덕션 과정은 비슷하지만 콘텐츠의 형태가 다를 수도 있고, 결과물은 같지만 프로덕션 과정이 아예 딴 판일 수도 있다. 무엇이 그들을 아이돌로 만드는 것인지, 무엇이 아이돌인지, 어떤 질문이 먼저인지도 알 수 없다.   

 





 이처럼 아이돌에 대한 정의는 시대별, 국가별로 일일이 예시를 들어 그 변화를 분류할 수 있을 뿐, 고정된 하나의 개념으로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아이돌개념을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일본 아이돌 혹은 아이돌 문화로 한정하고자 한다.[각주:1] 이는 양국에서 그룹 중심의 아이돌 문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동시에 이 시대 아이돌 문화의 전형으로서의 아이돌 그룹을 대강이나마 정의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점차 과열되는 팬덤 문화, 아이돌 기획의 전형성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 등의 부수적인 문제들은 덤으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 언급할 특정 아이돌 기획물들은 동시대 아이돌 개념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인 셈이다. 이것은 특정 시대 혹은 어느 국가의 입장 (혹은 현재 특정 가수의 팬의 입장)에서는 전혀 개념을 뒤흔들만큼의 새롭거나 특징적인 요소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아이돌은 모름지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고정적인 개념은 없으며 - 일본의 모 아이돌 기획이 마치 이제껏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거나, 현재 아이돌에 대한 완벽한 대안이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본 글은 일본의 대형 기획사 아뮤즈[각주:2]가 선보인 기획들이 200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전형을 안티테제적으로 공격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전략이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아이돌은?


      



 아무리 유동적인 개념이라지만, 2000-2010년대에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형태는 꽤나 전형적이다.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는 1)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어 연습생 시스템을 거쳤으며 2) 거대 자본을 소유한 연예기획사에 의해 기획된 3) 10-20대의 단일성별 댄스 가수 그룹아이돌 그룹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이들의 음악, 안무, 외모, 팬덤 등의 요소들이 하나의 거대한 아이돌 문화로 소비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공식으로 설명될 수 없을 것 같은 수많은 사례가 이미 존재한다. 아이유는 데뷔 이래 줄곧 아이돌 취급을 받다가 작사, 작곡능력에 대한 검증과 성적 소구의 점진적 배제를 통해 아티스트로 분류되는 분위기이며,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기회를 얻은 몇몇 가수들은 자신의 음악적 능력과 더불어 거대 자본의 기획, 자신의 타고난 외모 등 아이돌스러운요소들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이미 닳고 닳은 수익 창출 방식, 혹은 개별 아티스트의 생존 방식에 불과한 것이지, 기존의 아이돌 개념을 뒤흔드는 새로운 형태는 아니다.



 대기업의 수익 창출이 목적인 엔터 산업의 큰 틀 안에서 뛰어난 외모, 좋은 음악, 좋은 가창력은 아티스트의 형태가 그룹인지 솔로인지를 불문하고 언제나 높은 상업성을 담보한다는 이유로 그것의 변주가 계속해서 일어날 뿐이다. 따라서 소위 -아이돌급으로 노래를 잘하는 모 인기 아이돌 그룹의 모 멤버는 아티스트일까요? 아니면 아이돌일까요?”라거나 노래는 별로 못하는데 작사, 작곡을 잘하고 얼굴이 예뻐서 인기가 많은 모 솔로가수는 아이돌일까요? 아티스트일까요?”라는 식의 논쟁은 개별 사례의 상업성을 판단하자는 것일 뿐, 그것이 아이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날카로운 질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단일 성별의 댄스 그룹이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하나의 대중문화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으며, 그것의 전형이 현재 한국에서 아이돌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견고한 틀이기 때문에, 개별 콘텐츠들의 상업성 및 가수로서의 자질 등은 그것의 개념을 흔들만한 영향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이미 노래를 잘하는 아이돌, 외모로 더 주목받는 아티스트들에게 수없이 노출되었고, 동시에 계속해서 연예기획사에서 선발되어 나온, 소년/소녀 컨셉의 단일 성별 댄스 그룹을 봄 당하고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잘 트레이닝 되어있으며, 누군가의 음악은 꽤나 상업적으로 훌륭하다. 심지어는 누군가는 그것을 직접 만들기까지 한단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에게 그들은 거대 자본의 기획물이자 성적인 어필과 유사 연애를 이용하는 아이돌 그룹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노래를 잘 하는가? 그 와중에 작사 작곡까지 할 줄 아는가? 이러한 요소들은 대중들이 그들의 음악을 한 번쯤 스트리밍 해줄만한 요인이 될지 몰라도, 그들을 아이돌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각주:3]

 





아이돌이면서 아이돌답지 않을 수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했듯, 특정 가수가 아이돌인지 아티스트인지, 그 경계에 대한 명확한 합의는 현재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이 아이돌을 아이돌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줄 만한 의미도 없다. 다만 위의 세 가지 기준(기획사, 연습생 시스템, 단일 성별의 댄스그룹)에 부합하는 상업가수들이 아이돌이라는 낙인을 부여받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돌은 계속해서 아티스트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아티스트들은 계속해서 아이돌의 상업성을 확보하고자 한다.[각주:4] 상업성이라는 틀 안에서 둘 사이의 경계가 자연스레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한 가지 틈을 확인할 수 있다. 대중들은 개별 아이돌 멤버를 능동적인 주체로 인정혹은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돌이 아무리 만들어진 기획물이라지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개별 주체가 각각의 개성과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상업성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대중들은 아이돌이 그저 거대 자본의 기획물에 지나지 않는, 10-20대들이 주로 열광하는 하위문화로 취급하는 동시에 그룹 안에서 비주얼 멤버, 가창력이 뛰어난 멤버 등을 구분하며 각자의 능력과 발전 가능성 등을 면밀하게 판단하려고 한다. ‘무시하지만 기대하기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심리는 아이돌 문화의 주요한 세일즈 포인트가 되는 동시에 기존의 아이돌과 아티스트에 대한 경계가 사실상 무의미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부분이다.[각주:5]



          




 결국 어떤 그룹이 아이돌임을 탈피, 아니 적어도 아이돌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라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아이돌 및 아티스트 존재 양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예컨대, 그룹의 각 멤버가 발전 가능한 개별 주체가 아닐 수 있을까? 메인 비주얼 멤버, 메인 댄서, 메인 보컬을 없앨 수 있을까? 상업성을 충분히 확보한 아티스트가 되기는커녕, 상업성에 대한 기존의 기준과 자본의 논리를 아예 차단함으로써 얻는 다른 효과가 있을까? 일본의 3인조 아이돌 그룹 'Perfume(퍼퓸)‘’BABYMETAL‘은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돌파구를 시도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소개하기에 충분하다. 본 글에서는 먼저 그룹 퍼퓸의 각 요소를 나누어 소개한 뒤,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기존의 경계를 넘나드는지 밝힐 것이다.

 

 


일본의 3인조 걸그룹 Perfume. 2000년 결성, 2007년 메이저 데뷔하여 일본 여성 그룹 최초로 6장의 정규앨범이 모두 오리콘 1위에 올랐으며, 현재도 기록이 진행 중이다. 2010년 도쿄돔에 입성하여 지금까지도 매년 돔 투어, 아레나 투어 등 대규모 투어를 진행하는 장수 걸그룹이다.

 

 



1) 음악과 보컬, 가창력

 


 아이돌이 아티스트의 하위 단계 혹은 예비 아티스트 등으로 인식되면서 생겨난 제1의 골칫거리는 바로 가창력 이슈이다.


 이는 아이돌을 가수의 프레임에서 빼낼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노래와 춤 실력을 갖추는 것은 가수의 기본적 직업윤리라는 논리 아래 대중들의 끈질긴 요구가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돌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가창력을 트레이닝하여 우리 아이도 가수다!’라고 말하기 부끄럽지 않도록 하였다면, 일본에서는 대놓고 노래를 조악하게 불러 아이돌의 역할 자체를 뒤집어버렸다

 

 이에 퍼퓸은 한 발 더 나아가 노래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창 이슈에 맞서며, 노래를 라이브로 부른다는 개념 자체를 그룹의 구성 요소에서 근본적으로 제거해버린다. 이들은 방송이나 콘서트 등에서 생목 라이브를 절대 하지 않는다. 음원에서조차 이미 목소리가 심각하게 변조되어있어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가 없는데다가 라이브가 필요한 상황이 있더라도 보코더[각주:6]나 오토튠을 실시간으로 사용하여 일부러 라이브처럼 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노력을 기울인다.

 


DJ겸 프로듀서 나카타 야스타카(中田ヤスタカ)’



 이러한 전략은 디제이 나카타 야스타카(中田ヤスタカ)’가 만드는 일렉트로닉 음악의 특성에 의해 가능해진다. 나카타 야스타카는 사실 프로듀서보다는 DJ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아티스트로, EDM 작업과 클럽 디제잉 활동을 메인으로 한다. 이러한 그와 퍼퓸의 관계는 프로듀서가 아이돌에게 곡을 선물하는 방식이 아니라, 거꾸로 아이돌이 이 DJ의 객원보컬이 되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DJ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만든 클럽 음악과 믹스 셋이 공연장에 플레이되면 그만일 뿐, 개별 곡의 보컬이 라이브로 등장할 필요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에서 사람의 목소리란 다른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어우러지는 하나의 악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라이브로 불릴 필요도 없고, 바이브레이션 등 각종 기교를 요구하지 않는 하드코어 사운드의 클럽 음악을 만들며, 이를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 멤버들의 목소리는 기계음으로 변조되어 음원에 박제된다. 결국 그의 작업은 퍼퓸을 주체적인 아티스트가 아닌, EDM 음악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리며 그들에게는 생목소리로 라이브를 해야 할 어떠한 의무도 사라져 버린다. 메이저 데뷔 이후 모든 타이틀과 수록곡은 나카타 야스타카 단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일관성 역시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하고 있다.

결국 퍼퓸은 한 명의 DJ가 만든 여자 아이돌 버전 EDM, 그것이 무대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그룹에서의 리더, 메인보컬, 메인댄서는 존재하지 않게 되며 멤버 세 명은 모든 곡과 안무에서 동일한 비중을 소화한다. 또한 가창력이라는 요소는 애초에 그들 음악에서 존재하지 않는 부분이므로 대중들은 그들의 발전하는 노래 실력이나 아티스트로서의 가능성 등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2) 성적 소구의 배제

 


 여기까지만 본다면 클럽튠 음악을 하며 라이브를 잘 하지 못하는 혹은 대놓고 립싱크를 하는 몇몇 기성 가수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맞다. 심지어 EDM은 오히려 아이돌의 퍼포먼스에 가장 유리한 장르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러한 퍼포먼스가 어떠한 목적으로 구성되느냐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아이돌의 안무는 아이돌이 예뻐 보이기 위해 혹은 멋있어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다. 교복, 정장, 체육복 등을 입고 사랑을 노래하며 남녀불문 섹시한안무를 추는 것이 아이돌 팬덤을 구축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정확한 접근법임을 부정할 이는 없다. 그러나 퍼퓸의 모든 안무를 담당하는 안무가 미즈노 미키코(水野 幹子, MIKIKO)는 춤에 관한 이러한 접근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인물이다.

 

 댄스의 기교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안무는 저급한 것이라는 그의 인식은 각종 장르의 기본이 되는 루틴, 그리고 이들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성적 어필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아이돌 댄스를 강력히 비판한다. 그가 운영하는 댄스 컴퍼니 'ELEVENPLAY'는 기술과 접목된 현대 무용을 연출하는 일본 내 유명 무용단으로, 현대무용을 공부한 그의 아이돌 작업은 사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며, 작업의 결과 역시 상당히 독특한 효과를 내고 있다.

 


  

안무가 겸 무대연출가 미즈노 미키코(野 幹子)와 그의 무용단 ELEVENPLAY의 무대 (ELEVENPLAY X YASAKA X RHIZOMATIKS (2015) (링크1) )

 

 

 사랑을 갈구하는 가사를 애교 섞인 몸짓으로 표현한다거나, 멤버들의 몸매를 강조한다거나, 파워풀한 기교로 멤버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안무 등은 무대에서 절대적으로 배제된다. EDM을 통해 어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댄스가 아닌 EDM 사운드 자체에 대한 표현으로 안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 아이돌 그룹이 소위 남성적인컨셉과 안무를 시도하거나, 성에 관해 수동적인 역할을 제거함으로써 성적 소구를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략과는 전혀 다른 시도로, 이러한 부분을 시각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퍼퓸의 안무들과 상당히 유사한 EVENPLAY의 작업을 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Perfume - PARTY MAKER (2013, Perfume 4th Tour in DOME LEVEL3, Tokyo Dome) (링크2)



 

ELEVENPLAY - Trace (2015) (링크3)


 여기에서 한발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퍼퓸의 성적인 세일즈 포인트를 제거하는 것은 그들의 의상, 헤어, 스타일링 등의 외적인 부분이다. 먼저 퍼퓸은 자신들의 음악에 박제된 그들의 목소리와 같이 그들의 스타일링 변화를 최소화 하고 있다 - 사실은 최소화가 아니라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더욱 정확하다. 데뷔 이래 염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며, 각각 긴 생머리, 단발머리, 파마머리를 단 한 차례도 바꾸지 않고 유지해왔다는 것이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그들은 각 곡에서 어필하고 싶은 컨셉에 따라 스타일을 바꾸는 전형적인 이미지 소비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는 무대 의상까지도 상당히 정형화되어 있으며 콘서트에서 입는 의상은 색상, 패턴 등에서만 작은 변화들이 있을 뿐이다. 결국 그들 스스로에게 온전히 종속된 것은 세 멤버가 보여줄 수 있는 기계적인 안무와 음악, 그리고 여성 헤어의 세 가지 스텐다드 타입뿐인 것이다.[각주:7]




 기획사의 상업적 전략 역시 이러한 그들의 외적인 모습과 같은 맥락에 있다. 퍼퓸은 일본 아이돌의 상당수가 촬영하는 그라비아[각주:8]는 물론이며, 성적 대상화, 성 상품화와 유사연애 심리를 이용하는 상술, 이벤트 등 모든 요소에 단 한 차례도 참여한 적이 없다. TV 프로그램 역시 대부분 토크나 다큐멘터리 위주로 출연하며, 아이돌에 대한 가학적 행위를 웃음코드로 삼는 예능 출연은 거부한다. 극단적으로는 한국 아이돌들까지도 일본 진출 시 필수로 생각하는 악수회나 팬 사인회조차 열지 않는데, 이는 음악이나 공연 외적인 부분에 대한 판매가 전면적이고 직관적인 성 상품화가 아니더라도 인간 대 인간의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 유사연애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포토카드, 화보집을 이용하여 앨범 버전을 늘려 파는 행위 등 온갖 상술을 필요 이상으로 배제하며 성적 소구 배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각주:9]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의 멤버들로 구성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젊고 아름답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계속해서 새롭고, 더 예쁘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아이돌의 인기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저물어 간다. 결국 누가 노래를 조금이라도 더 잘해서 살아남느냐, 더 잘난 얼굴로 드라마를 몇 편이라도 찍느냐의 뻔한 결말은 대중들에게 아이돌=한 철 장사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그러나 퍼퓸은 외모를 파는 아이돌의 핵심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음악적, 외적으로 발전하거나 퇴보하지 않는 그들에게는 아티스트로서의 진화를 통해 살아남아야 할 필요도 이유도 사라져버린다. 발전 가능한 주체로서의 지위가 박탈된 채, 이미 검증된 아티스트들의 작업이 그들의 음악과 무대를 하나씩 채운다. 대중들은 퍼퓸이라는 아이돌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이 구매하는 것은 퍼퓸을 만든 아티스트들의 작업인 것이다.




 

3) 라이조매틱스 Rhizomatiks


이러한 퍼퓸의 기계와 같은 모습은 기술팀 라이조매틱스(Rhizomatiks)’의 무대 연출을 통해 시각적으로 최종 완성된다. 라이조매틱스는 첨단 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작업을 메인으로, 상업적 광고, 캠페인, 미술 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이다. 그중에서도 그룹의 창시자이자 가장 주축이 되는 인물인 다이토 마나베 (真鍋大度)는 퍼퓸의 무대 연출과 기술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인물이다. 그의 퍼퓸 무대 작업은 나카타 야스타카가 만든 일렉트로닉 음악 자체를 시각화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으며, 미키코의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한 안무와 함께 퍼퓸의 무대를 하나의 종합적인 시각 예술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다이토 마나베()Rhizomatiks Research의 작업실 모습. RhizomatiksResearch, Architecture, Design의 세 팀으로 나누어져있으며 그 중 기술 분야는 Research 팀에서 담당하고 있다. (참고 : https://rhizomatiks.com)

 






 증강현실, 다이나믹 VR, 스크린 투사 기술 등을 이용한 퍼퓸의 무대들은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는 그들의 미디어 아트 작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라이조매틱스의 가장 최근의 기술을 처음 상업적 버전으로 선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RhizomatiksPerfume의 작업을 조명한 전시 (2013, NCC ITT Art Museum, TOKYO)

 





4) 종합 - 퍼퓸의 아이돌, 아티스트 논란

 


 결국 퍼퓸이라는 아이돌 기획은 각종 공연 및 미디어 노출에 유리한 3인조 걸그룹을 내세워 DJ, 현대 무용가, 미디어 아티스트가 협업한 결과물이며, 실제로 이들은 팀 퍼퓸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로 인식되고 있다. 퍼퓸 3인의 멤버는 각 예술 분야의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버전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며, 이러한 프로젝트에 실제로 아이디어를 낸다거나 음악적 부분에 참여하는 등의 역할은 일절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퍼퓸은 무엇을 하는가? 그저 대단한 기획자들을 잘 만났을 뿐이며, 프로젝트의 일원으로서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이 전부 아닌가? 팀 퍼퓸은 이러한 논란과 질문들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키지만, 정작 멤버들은 천진난만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로 무대에서 열심히 춤을 추는, 아이돌로서의 태도를 꾸준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사실 대중음악에서 어떤 아이돌 혹은 아티스트의 기획은 결국 몇몇 전문가들의 손에서 탄생한다. 이번에는 작사 및 작곡에 참여했다, 각종 연출에 신경을 썼다며 보도자료가 나올 뿐, 무대에 서 있는 그가 얼마나 아이디어를 냈는지, 얼마나 참여했는지에 대해서 대중들은 알 길이 없다 - 그리고 분명히 숙련된 전문가들의 도움 없이는 나오지 못했을 작업들이 거의 대부분, 사실 전부임을 필자는 확신한다. 개인이 모든 프로덕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알더라도 그것이 거대 자본의 이윤추구라는 상업적 목적에 의해 탄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아이돌 그룹은 그러한 목적 아래 성과 유사연애를 점점 더 교묘하게 팔아 대중들의 피로감을 높였고, 계속해서 비난받아왔을 뿐이다.

 



2013년 칸 국제 광고제에 출품되어 은상을 수상한 Perfume - Spending All My Time 무대와 월드투어 홍보 기획물. (링크6)

 


 팀 퍼퓸은 이러한 비판에 정면으로 맞선다. 아이돌은 어차피 기획된 것, 만들어진 것, 짜여진 것이다. 노래를 조금 잘 하는 것이 아이돌의 지위 변동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면, 어설픈 라이브로 노래실력에 대한 논쟁을 안고 가느니 노래를 할 수 없는 음악을 가져와 노래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가장 아이돌다운모습일 수 있다.


 동시에 아이돌이 비판받는 가장 주요한 지점인 유사 연애와 성 상품화 등의 요소들을 과감하게 제거한다. 예쁘니까, 몸매가 좋으니까, 예능에서 이렇게 열심히 망가지니까, 소녀에서 숙녀가 되는 성장 스토리가 있으니까 우리를 좋아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무용에 가까운 안무와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가, 세련된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채운다.


 퍼퓸의 공연이 갖는 상업적 의미는 세 멤버의 예쁜 외모나 춤사위, 코스프레가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시각적으로 훌륭한 무대 그 자체이다. 그리고 멤버들은 묵묵히 그 기획의 수행자로서 무대를 해낸다. 이것은 소위 아티스트로 분류되는 대중 뮤지션들의 전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글 도입에서도 언급했듯, 외모를 파는 아티스트가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판다는 것은 우리가 특정 가수들에게 굳이 아티스트의 지위를 부여하는 주요한 자격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 음악으로 인정받으며 음악과 무대 자체를 파는 아티스트인가? 물론 어떤 사람들은 퍼퓸 멤버들이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의미의 아티스트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예술 작업의 수행자로서 대중 매체에 전면적으로 나서는 세 멤버들의 역할은 분명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들은 일회성 행위 예술에 고용된 아르바이트가 아니며, 18년의 활동 과정에서 팀 퍼퓸의 퍼포먼스를 위해 잘 트레이닝 된 전문가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어떤 예술 작업의 아이디어 제안, 실제 제작, 수행의 세 층위에서 무엇이 예술행위 그 자체인지, 무엇의 비중이 예술가를 만드는지 지금도 끝없이 논쟁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팀 퍼퓸은 대중음악계를 대상으로 그 경계를 보여줄 뿐이다.



2016 리우 올림픽의 폐막식 공연은 팀 퍼퓸의 작품이었다. 음악 : 나카타 야스타카, 안무 : 미키코, 무대기술 : 라이조매틱스, 연출 : 시이나 링고 (링크7)

 



 3인조 아이돌 그룹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아티스트의 전유물로 생각되는 생존방식을 소유하는 것. 예비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발전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함으로써 욕할 준비를 하고 있던 대중들에게 허무함을 안겨주는 동시에 상업적인 기획의 철저함을 잃지 않는 것. 우리가 보는 모든 상업음반은 사실 다 같은 논리로 만들어졌음을 역으로 증명하면서 영원한 시간성을 획득하는 것. 이것이 퍼퓸의 기획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이자 논쟁의 지점이다.

 

 작년을 기준으로 30대에 들어서 아이돌이라고 불리기에도 민망한 그들은 이번 2018년에 무려 결성 18주년, 메이저 데뷔 12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일본 대중들은 이러한 논쟁을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중론은 아이돌과 아티스트 그 어느 쪽에 속하기에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한편, 퍼퓸이 아티스트의 지위를 얻는 것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2000년대 이후 정형화되어있는 아이돌 그룹의 대안적 형태를 제시하는 동시에 현재 진행되는 아이돌과 아티스트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덧붙임 : BABYMETAL

 


베이비메탈의 영국 락 페스티벌 라이브. 이들은 아시아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UK 앨범차트 15위에 오르는 성과를 냈다. (링크8)



 

 베이비메탈은 퍼퓸의 상업적 성공 이후 동일한 전략으로 만들어진 3인조 헤비메탈 아이돌 그룹이다. 퍼퓸이 하드한 일렉트로닉 음악을 아이돌 버전으로 풀어냈다면 베이비메탈은 헤비메탈 사운드와 아이돌스러운 멜로디를 결합시켜 락 팬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는 밴드와 연주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헤비메탈은 하드코어 락 밴드 연주를 통해 표현될 수 있는 특수한 장르로 여겨지나, 이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대신 춤을 춘다. 한편 베이비 메탈과 함께 투어를 다니는 밴드는 비록 베이비메탈의 멤버가 아니지만, 구성원이 고정되어있으며 연주 실력 또한 매우 훌륭하다. 무대에서 환호를 받는 것은 춤을 추는 세 명의 소녀들이지만, 관객들은 수준급의 헤비메탈 연주를 라이브로 듣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사운드는 아이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락 세부 장르의 팬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베이비메탈의 장르는 헤비메탈인가 아니면 아이돌인가? 무대에서 밴드의 연주가 라이브로 나오고 있음에도 이들이 아이돌로 분류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밴드를 밴드로 만들어주는 명확한 기준은 무엇인가?

 

 






링크

 

1. ELEVENPLAY - YASKAWA × Rhizomatiks × ELEVENPLAY (2015)

https://www.youtube.com/watch?v=H_eAkJ_o-pk



2. ELEVENPLAY - TRACE (2015)

https://www.youtube.com/watch?v=850P1Pvuikw




3. Perfume - PARTY MAKER (2013, 4th Tour LEVEL3, TOKYO DOME)

https://www.youtube.com/watch?v=NgqFfGpKkAA



4. Perfume - STORY (2015, Live at SXSW)

https://www.youtube.com/watch?v=4eHqYZVrMP0


5. Perfume - Perfume No Okite (2016, 6th Tour Cosmic Explorer, KYOCERA DOME)

https://www.youtube.com/watch?v=K1diKgG4urI



6. Perfume - Spending All My Time (2013, Cannes Lions International Advertising Festival)

https://www.youtube.com/watch?v=GOUcCrjiOu0



7. 2016 리우 올림픽 폐막식 일본 공연

https://www.youtube.com/watch?v=s23qwzu4Mb8



8. BABY METAL - KARATE (2016, Download Festival, UK)

https://www.youtube.com/watch?v=qXF94RGYEmw









  1. 물론 2000년대는 특별히 한국 아이돌 문화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양상은 일본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의 2000년대 아이돌 문화를 비슷하게 묶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있다. 바로 한국 아이돌 문화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SM엔터테인먼트가 일본의 쟈니스, 하로프로젝트 등의 사무소와 유사한 기획을 많이 보였으며, 이후 ‘한류’를 통해 상호 아이돌 문화의 특성이 대놓고 섞이고 있다는 점이다. (프로듀스101과 ABK48 총선거, E-girls의 소녀시대 모방, 동방신기, 트와이스의 현지화 등) [본문으로]
  2. 아뮤즈는 사실 배우 중심의 연예기획사이나, 탄탄한 가수 라인업을 확보하여 매년 아뮤즈 소속 가수들만 등장하는 음악 페스티벌을 개최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일본의 국민 밴드 사잔 올 스타즈를 중심으로 퍼퓸, ONE OK ROCK, 호시노 겐, 사쿠라 학원, 베이비 메탈 등 강력한 팬덤보다는 대중성 중심의 아티스트들이 소속되어있다. 또한 일본 연예사무소들 중 이례적으로 한국 지사 ‘아뮤즈 코리아’를 운영하고 있으며, 소속 아이돌로는 예능 비정상회담을 통해 얼굴을 알린 타쿠야 소속의 ‘크로스 진’이 있다. [본문으로]
  3. 본 글이 이러한 형태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을 밝힐 뿐이다. 추가하자면, 역으로 ‘아티스트’ 유형의 가수가 아이돌적 요소를 통해 상업성을 담보하는 케이스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피로감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케이스들은 현재 서서히 인기를 얻고 있는 과정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마치 이 지겨운 아이돌 그룹들을 ‘물리쳐줄’ 대안적 콘텐츠로 추앙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있다. 이를테면 ’마마무는 노래를 잘한다. 다른 아이돌에 비해. 어쨌든 그래봤자 기획사에서 나온 아이돌 그룹이다. 노래를 잘하고 음악이 좋으니까 듣지만, 무대에서 춤추는 아이돌 그룹, 이제는 지겹다.‘ ’헤이즈/볼빨간 사춘기는 가창력이 그렇게 뛰어나진 않은 것 같지만 곡이 너무 좋다. 곡도 스스로 만든다니 더 매력적이다. 심지어 예쁘기까지 하다. 하지만 춤을 추지 않고 매체 노출이 적어 아이돌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런 식이다. 안타깝게도 필자의 눈에는 두 콘텐츠에 대한 대중들의 소비 양태가 지나치게 비슷하다. [본문으로]
  4.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자하는 의도는 없으며, 전형적인 아이돌 그룹과 그 외의 범주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한 어휘이다. [본문으로]
  5. 기존의 방식을 통해서는 ‘실력파 아이돌’ 이상의 범주 탈피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아이돌을 예비 아티스트, 혹은 아티스트가 지녀야 할 잠재력이 있는 개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본질적인 구별은 더더욱 무의미하다. 어차피 똑같은 기준과 잣대로 바라볼 것이라면, 특정 가수가 그룹이든 솔로든 연습생을 했든 안 했든,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본에서는 이를 매우 극단적인 방법으로 역이용한다. 바로 아이돌 연습생들을 트레이닝하지 않고 바로 데뷔시키는 것이다. 결국, 아이돌이 아티스트급의 실력을 갖출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의 기대를 극도로 낮추고 실력에 대한 논쟁을 회피하는 동시에 성장과정이 극도로 강조되어 커다란 세일즈 포인트를 획득하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상업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철저히 분리되어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6. 보코더 (Vocoder) : 목소리의 음이나 톤을 변조하는 이펙터 [본문으로]
  7. 이는 퍼퓸이 아이돌로서 어필할 수 있는 각종 외적인 요소들을 극도로 제한시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일본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걸그룹으로 만들어주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단발머리, 긴 머리, 묶음머리를 하고 있는 세 여성의 실루엣이 곧 퍼퓸이라는 인식은 특정 히트곡, 컨셉, 얼굴 생김새 등에 관한 각인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본문으로]
  8. 여성의 비키니 차림이나 세미 누드를 찍은 영상물 또는 화보집 [본문으로]
  9. 그 때문에 각종 스캔들에도 전혀 타격이 없는 편이다. 인기 아이돌이기 때문에 멤버들의 열애 소식이 터지면 대중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지만, 정작 팬들은 스캔들이 없는 멤버에게 왜 좋은 나이에 연애를 못하는 것이냐며 안타까워한다. [본문으로]


PEEP PICK






오버더펜스 : 신철규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지만, 막상 상대방의 기호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주저하게 될 때가 있다. 종종 너무 맘에 들었던 시집이나 책을 골라서 건네주었지만 상대방의 질타를 받곤 했다. 내 취향이 점점 보편에서 유리되어 간다는 위기감이 드는 무렵, 내 우려를 불식시켜주는 대중적 문학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중적이지만 훌륭히 문학적이고, 문학적이지만 충분히 대중적이다. 물론 유명인의 언급에 의해 화제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그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철규와 박준은 아직까지 한 편의 시집만을 낸 신인 작가들이지만, 데뷔 시집으로 단숨에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다. 이 풋내기 시인들의 ‘실존적 엄살’을 마음껏 향유하셨으면. 그리고 앞으로 이들이 걸어가는 길도 주목해 주셨으면.    








푸른수염 : Tablo+Pe2ny, <Eternal Morning>



에픽하이의 타블로와 프로듀서 페니(Pe2ny)의 프로젝트 그룹 이름이자, 이들이 2007년 발매한 앨범의 이름. 부제가 <Soundtrack to a lost film>인 만큼, 가상의 영화와 씬에 대한 가상의 영화음악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앨범을 사면 가사집에 가사 대신 각각의 곡에 해당하는 영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장르 등)과 연출된 스틸컷이 들어있다.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에서부터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개별 수록곡들의 분위기도 천차만별이다. 한창 에픽하이에 정신이 나갔던 시절 필자는 팬심으로 이 앨범을 골백번도 더 돌려 들었지만, 몇 년이 지나고 팬심을 빼도 충분히 좋은 앨범이라 아직까지도 많이 듣고(특히 카페에서 공부할 때에 매우 유용), 이번 핍에 쓰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특히 겨울에 들으면 정말정말 좋다. 가장 아끼는 트랙은 타이틀곡인 <White>. 곡의 전주 부분부터 마음이 서늘해진다. 이 곡은 타이틀이라고 나름 뮤비도 있다..! 뮤비는 그 무렵 나온 여느 에픽하이 뮤비들처럼 또라이같고… 어쨌든 한 번쯤 볼 만하다.

다른 추천 트랙은 <Holden Caulfield>, <Father’s Watch>, <Eternal Mourning>.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들어보시라. 장범준의 벚꽃연금처럼 매해 겨울 당신의 트랙리스트에 돌아오는 음반이 될지도 모른다.








양장피 : Ohashi Trio, <I Got Rhythm?>



트리오라고 적혀있지만, 본명이 오오하시 요시노리인 아티스트의 솔로 유닛이다. 재즈팀 형식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한 사람이 트리오라면 더 기억에 남고 재밌지 않을까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재즈, 포크, 팝, 소울,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융합시켜 특유의 음악을 만들어내는데, <I Got Rhythm?>은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재즈의 스윙 리듬이 돋보이는 앨범이다. 그의 다른 앨범들에 비해 템포가 빠른 곡들이 많고 리듬이 강조되어 있다. 할 일을 하면서 틀어놓고 가볍게 리듬을 타기 딱 좋다. 초반부터 경쾌한 곡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느린 템포의 발라드도 수록되어 있어, 과하지 않을 정도로 텐션을 끌어올렸다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나면 기분이 산뜻해진다. 각종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아티스트의 편안한 연주 센스에 집중하고 있자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진다. 곡 전체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건반 처리가 기분 좋다. 추천 트랙은 세련된 리듬의 <VOODOO>, 현악기 소리와 어우러지는 남녀 화음이 낭만적인 <나와 달의 왈츠>, 마지막 트랙인 <Lady>. 가을의 산들바람 같은 앨범이다. 사실 필자는 오하시 트리오의 전곡을 사랑한다. 딱히 듣고 싶은 노래가 없을 때면 늘 그의 노래를 랜덤재생한다. 그만큼 편하고, 그렇지만 질리지 않는다. 그의 앨범 중 가장 인기를 끈 건 특유의 어쿠스틱한 편곡으로 채워진 커버 앨범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작곡들이 더 좋다. 14개의 앨범을 다 들어볼 시간이 없으신 분에겐 베스트 앨범인 <Standard Best>를 추천드린다. 소개한 앨범보다도 더 세련된 오하시 트리오를 느끼고 싶다면 <PARODY> 앨범을 추천드린다. 혹시 한국 인디 보컬 CHEEZE의 <Be There>을 좋아한다면, 꼭 원곡자인 오하시 트리오의 버전을 들어보시길.








이제로: Goodnight Moon, <ASMR Summer in Portland>,

https://www.youtube.com/watch?v=wISgLn-dBNM



ASMR 중 단 하나의 영상만을 고를 수 있다면 단연 이 영상이다. <ASMR Summer in Portland>는 Goodnight Moon채널의 주인인 Erin의 포틀랜드 여행기이다. Goodnight Moon만의 빈티지함과 노스탤지어가 가득 묻어난다. 뛰어난 영상미 덕에 ASMR을 넘어 단편 필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ASMR의 본분을 져버린 것은 아니다. 정원의 새소리, 밤 중 드라이브, 모닥불 등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ASMR은 우리가 그런 것들로부터 살면서 한 번쯤 느꼈을 듯한 기분 좋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여러모로 필자가 진심을 다해 애정하는 영상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추천하지만, 이불 속에서 도무지 나오기 싫은 나른한 아침에 이 영상을 한 번 보길 권한다. 그날은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하루가 될 테니!







이르름 : 10cm - Good Night (10cm The First EP)

https://youtu.be/LrTSR1jJcGg



남들과 다른 것을 들으면 특별해진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인디씬을 헤매며 십센치의 나름-데뷔팬이 되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거의 음원만 들었으니 가수 입장에서는 상당히 실속 없는 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얼마 전 기나긴 안방팬 생활을 청산하고 인생 첫 콘서트를 다녀왔고, 콘서트가 끝난 후 관객들의 좋은 밤을 빌며 영상링크를 보내주는 그의 세심한 스윗함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그렇다. 저 영상 영업글이다.) 물론 줄곧 권정열의 끈적함과 특유의 찌질한 감성에 붙들려버린 거지만, 요즘은 작자 본인의 고통에서 우러난 차분한 위로들이 간절하고 또 소중하다. 그래서 더더욱 지치고 잠들기 힘든 밤에 오래도록 함께할 것 같은 곡. 개강과 함께 시작될 전쟁 같은 날들을 보낸 후 잠들기 전 듣는다면 좋지 않을까. 험난한 세상에서 돌아와 마음의 먼지를 터는 기분으로 듣는다. 오늘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고요하고도 거친 밤공기, 바람 소리, 달빛에 너의 평화롭진 않았을 것 같은 어지럽고 탁한 긴긴 하루, 너의 새벽, 빈 창가. 나쁜 기억에 아파하지 않았으면, 숱한 고민에 밤새우지 않았으면.  





도리스 레싱 - 풀잎은 노래한다



내 맘대로 선정한 2017년의 책. (출판년도는 1949년이며 원서를 추천한다.) 아주 오랜 시간 쌓아 올려지는 고통스러운 고구마를 맛볼 수 있다. 아주 미묘하며 흥미롭게도 맛있는….고구마. 아프리카의 백인들을 작중 인물로 내세워 인종, 성, 자본에 따른 계급이 미치는 영향력을 독자에게 서서히 스며들게 한다. 밋밋한 일상에서 이끌어내는 장기적이고 세세한 심리 묘사가 최고였고, 훌륭한 소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레몬밤: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



막장보다 더한 막장. 막장이란 이런 것. 상상 가능한 모든 막장과 상상할 수도 없는 모든 막장의 총집합. “그 누구도 믿지 마라”의 표본. 시간은 때우고 싶은데 지루한 건 싫다면 추천한다. (그렇게 필자의 한 학기가 날아갔다.) 시즌 1 첫 화 첫 장면부터 어그로를 끌면서 시작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막장 전개에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무감각해진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이게 말이나 돼?” ㅡ 어이가 없는 것을 넘어서서 작가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 작가의 떡밥 회수 능력이 수준급이라 정신 차려보면 귓가엔 오프닝 음악이 맴돌고, 다음 시즌이 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까지도 막장이다. 중반 이후 가브리엘의 캐릭터 붕괴가 아쉽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일관적이라 열심히 욕을 하며 볼 수 있다. 내 최애 캐릭터가 가브리엘이라면(인생은 가브리엘처럼 편법과 임기응변으로!) 최악은 톰 스카보다. 모니터 속으로 들어가서 암살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막장에 가려져 있지만, 드라마는 주인공들의 진한 우정을 다룬다. 나름대로 -특히 시즌 8 마지막 화에서는- 철학적인 고민을 던져주기도 하고. 에피소드 개수도 많고 시즌도 8개나 되지만 프링글스처럼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물론 시즌 7부터는 의리로 본 게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버티고 버텨서 시즌 8까지 보고 나면 위스테리아 가에 정들어 버린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끝까지 막장에 되먹지 못한 전개를 보여준다는 것은 안 비밀.





백예린 - square (미발표곡)
https://youtu.be/_md16sTcnPM (ⓒ cyidra)



사실 PEEP PICK으로 끝내기엔 부족해서, 좋아하는 보컬리스트들에 대해 짧은 글을 적는 코너를 기획해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동안 생각에만 머문 글들이 몇 개였던가. 백예린의 목소리와 감성은 혼자서만 간직하기 아깝다. 노래를 잘하는 건 기본값이다. 진정으로 노래와 하나가 되어 무대를 즐기는 모습을 보다 보면 이 아티스트는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기대하게 된다.

이 곡의 포인트는 청량하게 울려퍼지는 건반 소리다. 여기에 영어 가사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녀의 음색이 더해진다. 시원하게 부는 봄바람과 따뜻한 봄 햇살 속에서 도시 곳곳을 누비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밴드 사운드와 어우러지는 백예린의 목소리는 음원과는 또 다른 생동감이 있다. 공연마다 편곡이 바뀌기도 하니 이리저리 직캠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그러니 이 글을 보는 당신, 지금 당장 링크를 타고 들어가 유투브 탐험을 시작하라.







kㅏ구 : 김동률 <Reply(답장)> mv 4분 43초 (미니 앨범 <답장> 中)

https://www.youtube.com/watch?v=kMRLzSQorK0


(mv 4분 50초)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도 붉게 차오른다.

   매년 여의도에서는 불꽃 축제가 열린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다. 너무 붐빌 테니까, 또 매일 보던 서울 하늘에 하루 불꽃이 터진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다 싶어서 그랬다.  

   김동률이 3년 3개월 만에 신곡을 발표했다. 1주일가량이 지나서야 노래를 들었다. 어느 가수의 베스트 앨범 만을 계속해서 들었던 요즘이었다. 그녀의 베스트 앨범은 이미 30여 년 전의 것. 그때의 세상으로 도망가 잠시 살고 있었다.

  핍픽에 그것을 소개할까 싶기도 했다. 음악에 욕심이 많은 편도 아니라 신곡이 뭐가 나오는지, 트렌드가 무엇인지 살펴볼 여유도 없었고. 김동률의 노래라면, 굳이 여기에 소개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테고. 그래, 또 누군가에게는 그의 노래가 청승맞은 클리셰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나 결심은 4분 43초에 무너졌다.

   김동률의 노래는 탄탄하고 조밀하다. 그는 5~6분에 걸쳐 노래를 짓는다. 선율과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간다. 이를테면 건물의 골조처럼 말이다. 그러나 정점에 이르면, 그 뼈대 안에서 메이고 겨웠던 무언가는 터져 흐르고 만다. 'Replay'에서는 왜곡된 기억 안에 갇혀 버린 남자가 통곡을 하며 무너졌고, 이 직전의 타이틀 곡이었던 '그게 나야'에서는 남자의 눈물 대신 흐린 하늘에 빗줄기가 쏟아졌었다. 그의 노래를 듣는 일이란, 골조물 잔해만 남은 그 광경을 부러 찾아가는 일과도 같았다.

  그의 노래에 관한 후기를 찾아보다가, 걔 중에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느껴지는 노래 속 화자의 이야기'라는 표현을 보았다. ‘참 옳다’ 싶었다. 그는 시공도 비껴간 채로, 자신의 마음만을 돌이켜 살펴본다. 때로는 그 시간을 되감고 싶어 하기도 한다. 자폐적인 세계 안에서 그는, 전하지도 못한 반성과 고백과 후회를 짓고 무너지길 반복했다.

   자, 그런 그가 이번에야말로 '답장'을 쓴다. 내가 '알다시피 좀 많이 느려서','미루고 미뤘지만',‘답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이제 다 소용없겠지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가지고서 말이다.

  여지껏 그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 융통성 없어 보이는 독백이 답답할 수도 있었겠다. 아니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에 ‘감동’을 연발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수 있겠다. 그래서 그만큼이나 흔해진 노래가 따분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번에는, 같이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그가 어떻게 무너지고 쏟아지는지, 아니 쏘아 올려 터뜨리는지. 그가 보낸 답장을.



추신1. 그는 앨범을 발표한 직후, sns를 통해 故종현을 언급하며, ‘음악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잘 살아가고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전했다.  

추신2. 여의도 불꽃 놀이를 보러 가실 분 구합니다.

 











왕수박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스트리밍 데이터로 선정한

2017년 올해의 K-POP / J-POP [TOP5]


*순서와 순위는 무관

K -POP


이달의 소녀 오드아이써클 - ‘Sweet Crazy Love'

‘이달의 소녀‘는 2016년 10월부터 한 명씩 솔로 데뷔를 통해 멤버를 공개, 총 12명의 완전체 그룹을 만드는 스토리텔링 아이돌이다. 완전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는 시점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3인조 유닛 ‘오드아이써클’은 ‘이달의 소녀’ 기획의 탄탄한 자본과 프로듀싱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단숨에 이들을 2018년 가장 주목해야 할 신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감각적인 스트링 루프로 시작하는 드림팝 <Sweet Crazy Love>는 이 웰 메이드 팝 앨범의 단연 주인공. 메인 스트링 사운드와 착 붙어있는 몽환적인 패드와 보컬 믹싱이 리스닝 포인트.


효린, 창모 - ‘BLUE MOON’

대중들에게 이미 수없이 검증받은 보컬 + 라이징 랩 스타의 피처링 + 흠잡을 데 없는 트로피컬 사운드와 드랍 편곡은 2017년 대중적으로 성공한 첫 EDM을 탄생시켰다. 2015년 샤이니의 'View', 2016년 태연의 'Why' 등 트로피컬 사운드 및 하우스 장르를 K-POP에 이식하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후렴의 드랍 파트에서 보컬이 극도로 배제된 싱글이 이처럼 대중적으로 흥행한 케이스는 'BLUE MOON‘이 처음이라 하겠다. 선미의 ’가시나‘, EXO의 ’KoKo Bop'등 후발주자들의 히트는 분명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워너원 (Wanna One) - ‘Energetic’

이전 시즌의 프로젝트 그룹 'IOI'가 김이 몽땅 빠져버린 데뷔곡으로 화력을 날려버린 선례가 있기에 데뷔가 다가올수록 ‘국프’들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미리듣기 투표로 선정된 ‘Energetic’은 이 걱정을 단번에 날려버리고도 몇 트럭이 남아버린, 올해 최강의 ‘남돌 명곡’으로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싱글이었으니. 단 한 차례의 변주도 없이 밀고 들어가는 4-3-6 코드에 얹어진 스타카토 기법의 일렉트릭 피아노, 청량한 신스 사운드는 고막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특히 건조한 드랍과 함께 시작되는 1절 후렴구는 2017년 K-POP에서 가장 짜릿한 파트.


신해경 - ‘모두 주세요’

2017년은 인디 뮤직 혹은 뮤지션이 얼마나 모래밭 위에 서 있던 개념이었는지를 모두가 확인한 해이기도 했다. 소위 ‘페이스북 픽’으로 불리던 역주행 음원의 유행은 철저한 인디펜던트 뮤직과 대중성과 상업성을 확보한 중소기획사의 상업 음반이 사실상 구별할 수 없는 것임을 밝혀낸 것이다. 그러나 신해경은 그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도 어찌 되었든 후자에 속할 일은 없어 보이는, 그런 ‘힙하고’ ‘인디스러운’ ‘나만 알고 싶은’ 뮤지션으로서 적당한 관심을 받으며 뜨뜻미지근한 한 해를 보냈다. 홈 레코딩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기 힘든 독창적인 사운드와 탄탄한 곡의 짜임새는 어쨌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곡을 들을 수밖에 없게 했지만, 글쎄. 뭔가 역주행에는 어울리지 않는 갬성~ 그러나 직관적으로 좋은 음악.






아이유, 오혁 - ‘사랑이 잘’

4년 만에 발매한 정규앨범 ‘Palette'의 선공개 곡. 전작 ‘Modern Times’가 재즈, 블루스, 스윙, 보사노바 등 말 그대로 모던의 각종 장르를 총망라하며 수많은 작가진을 갈아 넣은 블록버스터였다면, ‘사랑이 잘’은 셀프 프로듀싱이 가능한 아티스트 이미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제작된 앨범 ‘Palette'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싱글이다. 2017년 현재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편곡, 멜로디, 가사, 보컬의 엑기스 그 자체. 모두가 많이 들을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노래.






J -POP


DAOKO X 米津玄師(요네즈 켄시) - ‘打上花火’ (うちあげはなび, 쏘아올린 불꽃)

2017년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싱글. 애니메이션 영화 <쏘아올린 불꽃, 위에서 볼까 아래서 볼까?>의 주제가로 사용된 이 곡은 J-POP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를 전면에 내세워 히트했으며, 동시에 신인가수 DAOKO를 단숨에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영화의 일부를 편집하여 만든 뮤직비디오를 통해 감상하면 곡의 감성이 두 배가 된다. (링크) 이 뮤비는 현재 유튜브 조회수 1억을 돌파하였으며, 아직도 뮤비를 DVD로 파는 일본에서는 매우 기념비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 필자는 이 곡을 DAOKO의 내한공연에 방문하여 라이브로 들었음을 이 면을 빌어 자랑해본다^ ^)

(https://www.youtube.com/watch?v=-tKVN2mAKRI)



倉木麻衣(쿠라키 마이) - ‘渡月橋 ~君 想ふ~’ (도월교 ~그대를 생각하오~)

2017년 일본에서 위의 곡 다음으로 히트한 싱글.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주제가 전용 가수로 잘 알려진 쿠라키 마이의 화려한 재기작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 싱글 역시 2017년 코난 극장판의 주제가로 사용되었는데, 동양풍의 영화 컨셉에 맞추어 제작된 트로트 혹은 엔카 풍의 J-POP이다. 애잔한 감성의 뽕삘이 한 바가지 들어있어 홍진영 혹은 장윤정이 불렀다면 국내에서도 크게 히트했을 것임을 감히 예견할 수 있을 정도.


Perfume - If you wanna

EDM 아티스트로의 완전한 전환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는 Pefume의 2017년 하반기 싱글. 퓨처베이스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물론, 영어 가사의 EDM 드랍 파트를 후렴으로 사용하여 사실상 J-POP보다는 EDM 카테고리로 분류되어야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곡의 꽉 찬 드랍 사운드는 그룹의 라이브에 최적화되어있으며, 공연장을 클럽으로 만들어버리는 파워를 보여준다.


Polkadot Stingray - Synchronisica

시이나 링고를 연상시키는 보컬, 자극적이지만 흡입력 있는 기타 리프로 인디 락 씬에서부터 가파르게 인기를 얻은 밴드. 'Synchronisica'는 밴드의 메이저 데뷔앨범 수록곡으로 가장 자극적인 리프와 속도감을 보여주는, 가장 ‘Polkadot Stingray다운’ 트랙이다. 2015년 데뷔 후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어 2018년이 가장 기대되는 J-ROCK 밴드.



安室奈美恵 (아무로 나미에) - In Two

2017년 J-POP씬에서 단 하나의 사건을 꼽자면 바로 아무로나미에의 은퇴 선언일 것이다. 이 면에 아무로 나미에의 인생사와 은퇴의 의미를 줄줄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국민 가수였던 그녀의 은퇴 선언은 일본에 대국민적 충격을 선사했다. 뒤이어 커리어의 종점으로서 발표된 25주년 베스트 앨범 ‘Finally'는 2017년 11월 발매임에도 불구하고 연간 판매량 1위를 차지했으며,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총판 200만 장을 돌파했다. 'In Two'는 이 앨범에 수록된 신곡 중 하나로, 아무로나미에의 2010년대 초반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댄스 넘버이다. 코다 쿠미와의 콜라보레이션 루머가 돌았을 정도의 강렬함과 그녀의 제2 전성기 즈음을 연상시키는 사운드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곡.



<PEEP PICK - 키워드 ‘시작’>





푸른수염 :

조르주 멜리에스, <달세계 여행>,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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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의 시작점에 위치한 작품들 중 가장 아끼는 영화. 사람들이 우주선을 뚝딱뚝딱 만들어서 달에 도착하지만 달에 사는 외계인들에게 된통 당하고 지구로 다시 돌아온다는 매우 귀여운 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 있으면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 상상력이 구현된 결과물은 더더욱 사랑스럽다.




이르름 :

어퓨 물광 틴트 CR01_덜익은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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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끼와 낮은 채도가 안 받는 나는 주구장창 쨍한 색을 발라왔다. 하지만 이제는 발랄함만을 추구하는 것을 멈춰야할 때…… 자연스러우면서 차분한 덜익은자몽과 함께 나의 이십대 중반이 시작되었다.



네이버웹툰 <계룡선녀전> (글/그림 돌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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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늘어난 몇 안되는 것을 꼽아보자면 nerdy함을 빼놓을 수 없다. 오랜 인연의 시작점을 찾아가는 선녀의 전생과 관련된 사람들이 (하필이면) 대학 교수와 대학원생들이기 때문에 부담스럽지 않은 너디함이 느껴지는 유머를 맛볼 수 있다. 따뜻한 그림체와 귀여운 캐릭터들은 덤!




레몬밤 :

하이라이트 - 시작 ♬


‘시작이 설레지만은 않을 그대들에게’


하이라이트의 첫 번째 미니앨범 “Can you feel it?”의 수록곡.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가사처럼 보이지만, 오랫동안 함께했던 ‘비스트’와 이별한 뒤 새 이름으로 시작해야 했던 이들의 마음이 담긴 노래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것을 두고 새 시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다. 변화와 시작이 조금은 두렵지만, 웃으며 옛 것을 추억할 수 있도록. 특히 용준형의 담담한듯 담담하지 않은 송랩이 일품.




왕수박 :

Perfume - One Room Disco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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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거주 단위인 ‘원룸’은 새로운 시작을 앞둔 젊은이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혼자 살기 시작하며 느끼는 설렘과 두려움. 모든 고민을 떨쳐내고 원룸에서 디스코를 춘다는 가사는 우리 모두의 풋풋하고 또 힘겨웠던 시작을 응원한다. 새학기 즈음 일본 음악방송에 단골로 등장하는 오리콘 1위 넘버로, 16비트의 단순하지만 웅장한 인트로 드랍 이후 반전되는 청량한 디스코 사운드가 매력포인트.


DAY6 - 아 왜 (I Wai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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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한 순간. 음악을 파는 그룹은 수명이 길다.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상술로 만드는 탄탄하고 두터운 디스코그래피가 있다면 금상첨화. 공연 수익은 더욱 장기전으로 간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돌 보이밴드의 형식을 빌어 새로운 셀링포인트를 모색하는 밴드가 있다. 모던 락을 내세우던 기존 타이틀에서 벗어나 대중성을 한껏 가미한 편곡과 멜로디로 2017년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린, 첫 싱글 다운 첫 싱글. 아 왜 더 잘안됐을까. 아 왜…






이제로 :

다음웹툰 <두번째 집> (글/그림 우현)



관계의 시작에 관한 웹툰. 그림체도 화려하지 않고, 대사도 거의 없으며 박진감 넘치는 서사도 없지만 시선과 침묵, 그리고 빛이 그 모든 것을 압도한다. 작가는 이제 막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예민하게 그려낸다. 또한 작가는 상당한 수준으로 빛을 묘사하는데, 빛의 온도차로 그만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의 특기인 듯하다. 감성적인 웹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추천!




방탄소년단-Save Me (2016)



필자가 방탄소년단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다. 방탄소년단 특유의 애절한 분위기가 폭발하는 곡. 사운드, 가사, 보컬 어느 하나 애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떨어지기 전에 그 손을 내밀어달라는 그들의 외침은 귀에, 그리고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황량한 벌판 위에서 처절하게 춤추는 그들의 원테이크 퍼포먼스는 덤이다. 2016년 10월, Save me M/V를 클릭함과 함께 내 덕질인생도 시작되었다.






Kㅏ구 :

스니커즈 맥스(高) 카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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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정판 + 은색 포장지

2.카카오 ‘MAX/高’함량이 주는 다크 초콜릿 풍미! 약간의 씁쓸함이 지나친 단맛을 중화.

3 ... 알잖아요 초코바 맛있는 거 이건 더 맛있음.


  누군가의 작업은 한 밤중에 시작한다. ‘시작’이 조금 늦은(?) 이들에게 바치는 PEEP PICK템. 사실 우리도 알고는 있다. 밤은 새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밤새 붙잡았던 일들은 실상 몇 시간 전의 자신이 (그것도 더 효율적으로) 끝낼 수도 있던 것이고, 밤새 불태운 모든 덕질에는 타인의 인정이나 금전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밤샘이란, 다 알면서도 빠져드는 개미지옥 같은 것.

 이러한 ‘밤샘 작업’들은 ‘초코바’라는 비상식량을 먹어야만 하는 명분으로 삼기엔 소박하고 염치없지만, (초코바가 무엇인가. 그 태생은 체력 소모가 심한 운동을 하거나, 전투 중 제대로 식사하기 어려운 군인들이 먹는 비상식량이 아닌가) 그래도 밤새 당 떨어진 자신에게 맥스 카카오를 먹여 보면 어떨까. 꾸덕하고 달달한 이것을 우물대는 순간만큼은 한명의 치열한 생존자가 될 것이다.

 맥스 카카오는 구하기도 쉽다. 한정판이라더니 필자 눈에 띈 것만 몇 달 째이다. 한정판이라면서 한정판이 아닌 초코바. 어디에서는 ‘MAX CACAO’고, 어디에서는‘最高の カカオ’인 이름. 폴리페놀 향(?)이 나는 맛있는 고칼로리 초코바. 늦은 시작을 앞두고 자조와 환멸이 교차할 때, 내일의 피폐함이 두려울 때. 이럴 때에는 맥스 카카오를 한 손에 쥐고 앙 베어 물자. 우걱우걱 씹어 삼키자. 이 이율배반적이고 맛있는 것을. 오늘도 누군가는 밤을 지새운다.



예청그릴스 :

FKJ- Instant Need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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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은 종종 특별한 한 곡에서 시작된다. FKJ의 Instant Need 역시 바로 그런 곡. “Take me in yours ~” 라고 몇번이고 외쳐대는 절절한 가사와 멜로디는 당시 실연의 아픔을 음악으로 이겨내던 누군가의 달팽이관을 후벼팠더랬다. FKJ의 뜻을 알고 나면 더욱 충격적인 이 아티스트는 올해 한국에 온다. 아싸!




르네오 :

박우진 춤 영상 'Crush'




  돌이켜보니 본격적으로 우진이 덕질을 시작하게 만든 영상. 프로듀스 101 무대를 가벼운 마음으로 보다가 섹베오레(십점 만점에 십점 무대) 장면을 보고 충격 받아서 누군지 검색해봤는데 정보도 거의 없고 당시 방송에서 그렇게 주목을 받는 연습생도 아니었어서 떡밥이랄게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관심이 덕질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와 이 사람 너무 좋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만든 영상. 워낙 춤을  좋아하고 오래 춰 온 사람이라 youtube에 과거 춤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다. 긴 팔이 돋보이는 의상을 입고 팔을 휘적거리고 흐느적거리는데 그게 또 각이 딱딱 맞아서 보고 있으면 따라서 내적 댄스를 추게 된다.





#0. 굿-즈 물어오는 사람들[각주:1]


 Kㅏ구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모으기 좋아한다. 그들의 이러한 버릇은 어엿한 한 종의 습성으로 사전에 기재되어있다. 다른 새들이 집을 짓기 위한 재료나 새끼를 먹이기 위한 것들을 물어오는 동안, 까마귀들은 반짝이는 것들로 방을 가득 채운다. 물론 까마귀가 집을 짓지 않거나 새끼를 굶긴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쓸모에 있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을 그들의 둥지로, 끊임없이 물어올 뿐이다.

앞으로의 글들은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있다면 살아가는데 밀도 높은 행복이 될 것들을 물어오는, 까마귀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쓰는 것들이다. 이번 글로 그 시리즈를 시작한다. 앞으로 내가 쓸 굿-란 것이 무엇이며, 이 시리즈에 임하는 다짐은 어떠한지 따위를 전하는 가벼운 인사말 정도로 읽어준다면 좋겠다.///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다 같이 발음해 보자. 구우-.

 


굿즈란 단어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떠올렸는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형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아이돌 팬덤이 만들어낸 2차 창작물 내지는 응원봉같은 것들을, 누군가는 사람만한 다키마쿠라를 떠올릴 수도 있고, 혹은 텀블벅이나 과자전, 언리미티드 에디션같은 플랫폼에서 볼 법한 창작물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분기마다 나오는 다른 디자인의 스타벅스 텀블러, 전시를 보고 난 후 아트샵에서 구경하는 에코백이나 엽서. 이 외에 책을 주문하고 받는 보틀이나 베개, 레플리카 유니폼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대통령 취임 우표까지도 떠올릴 수 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굿즈라 부른다.

 


굿즈?

 


굿즈Goods의 사전적 정의는 상품이다. 실체를 가진 유형의 물품이라면,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그 굿즈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단 소리다.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굿즈들이 존재한다. 비단 브로마이드나 포토카드, 등신대 베개, 동인지 뿐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굿즈란 용어는 종종 아이돌 산업이나 서브컬처에서 파생된 상품만을 상기시키곤 하는데, 왜냐하면 굿즈를 전파한 일본에서 이 용어를 서브컬처계의 관련 상품을 한정하는 데 쓰기 때문이다. 보통은 넓게 대중문화의 파생상품을 일컬어 머천다이즈Merchandise(md)라 칭한다.

굿즈란 엄밀히 말하자면, 일차적으로는 영화나 만화·애니메이션 등의 원작에 바탕을 두고 제작한 팬시 상품이나 기념품 등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는 md로 대체될 수 있을만한 것들이다. 그런데 점점 발달하는 팬 문화와 제작사가 원하는 퀄리티의 굿즈를 내주지 않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팬들이 자급자족의 형태로 동인지나 등신대 베개 등 2차 창작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굿즈의 확장된 이차적 의미이다. 이렇듯 굿즈와 md는 미묘하게 태생이 다른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커뮤니티를 통해 굿즈란 단어가 먼저 알려졌으며 서브컬처계의 문법을 빌려와 서브컬처계의 파생상품이나 2차 창작물뿐만 아니라 여타 파생상품, 기획 상품까지도 굿즈라 부른다. 글의 소재가 서브컬처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굳이 따지자면 이 글에는 굿즈보다 머천다이즈가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더 굳이 따지자면(2)창작물과 (기획)상품의 경계가 모호한, 한국의 특수한 굿즈실정이 이 시리즈와 가장 맞춤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필자는 구우-의 발음을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이 시리즈에서는 굿즈를 다룰 것이다.

 


이것도 굿즈?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굿즈이다지난달 17일 발매한 19대 대통령 취임 우표이다. 330원이면 얻을 수 있는이니굿즈(문재인+goods)”로 알려져 발매 전부터 큰 화제를 얻고 있다. 500만장이라는 대규모 발행에도 불구하고예약 주문이 폭주함에 따라 인터넷 주문까지 폐쇄한 상황이다.



앞으로도 이 글을 읽어주()다면, 글에 나올 물건들 중에는 이것도 굿즈라고?’ 반문할 만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만큼 굿즈라 묶이는 것들 안에서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는 것인데, 이는 굿즈의 본질적인 성격에서 기인한다. 무엇보다도 굿즈는 파생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 굿즈는 저마다 그것이 참여하는 모체가 있다. 그 모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모체의 성질을 분유한 굿즈의 결도 달라지는 것이다.

넓게는 산업 분야가 무엇인, 장르가 무엇인지에 따라 좁게는 작가·멤버·캐릭터·인물 등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다 달라진다. 더군다나 팬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아이돌문화나 서브컬처계의 굿즈 산업만 하더라도 내부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 스타나 캐릭터의 얼굴이 박혀있는 물건만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팬의 연령대가 넓어짐에 따라 굿즈도 일코(일반인 코스프레)가 가능하도록 품목을 다양하게 세분화하여 제작되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굿즈를 소유하는 갈래는 더욱 세세하게 나뉘고 있으며, 물건의 외양만으로는 굿즈를 판별해내기 어려워졌다.




 


= 이마트식품 코너에서 굿즈를 만났다. SM엔터테인먼트와 가공식품브랜드 PEACOCK이 콜라보한 걸그룹 레드벨벳 음료.




이 들쭉날쭉한 물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특징은, 바로 굿즈가 덕질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덕질이라는 용어는 오타쿠에서 파생한 ()에 행위에 비하하는 뜻을 접하는 접미사 ‘-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오타쿠オタク는 광의로서, 특정한 분야에 열중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처음에는 일종의 멸시와 배척의 의미를 담아 쓰였던 덕질이 스스로의 취향 내지는 타 집단과 구별되는 특수성을 드러내는 말로 전환되어 퍼졌듯이, 이제는 굿즈 역시 넓은 의미의 취향을 드러내는 유형의 물질이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취향과 기호, 내지는 애정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굿즈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소비 형태가 사물의 효용성이나 유용성이 아니라 사물이 상징하는 기호에 대한 소비로, 곧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에 대한 소비로 전환되었다는 맥락에서 굿즈는, 어떤 이에겐 현대 소비문화의 첨단, 그 자체로 여겨질 수 있다. 여기까지는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말이다.

그러나 나 같은 일개 덕후에게 굿즈는 호빵맨의 빵조각이나 영혼을 쪼개어 넣는 호크룩스 내지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것이다. (또한 굿즈라고 다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의 퀄리티도 중요하다. 퀄리티 자체가 굿즈를 갖고 싶은 맘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앞에 분유니 참여니 하는 해학적인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호빵맨의 조각을 얻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호빵맨의 온기. 비록 파편일 뿐이지만, 파편만으로도 전체를 상기시킬 수 있는 힘 그것이 굿즈에 있다.




= 심지어 호빵맨은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떼어준다. 선후관계가 뒤엎어지긴 했지만. (호빵맨이 스스로 영업에 나선 것 역시 아니지만) 필자만 하더라도, 만일 직접 저 호빵 조각을 받았더라면 그를 마음으로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굿즈를 사는사람만 있나

 


한편 이 물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굿즈는 소비문화의 해악으로 읽히곤 하며, 굿즈를 다루는 글의 포커스는 소비하는 행위 그 자체에 조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굿즈 시장이 활성화되는 동향을 분석하거나, 소비행위를 저격하는 양상이다. 이를 언급하는 것이 그러한 비판을 교정하고자 함은 아니다. 실제로 굿즈의 방점은 소비에 있다. 그러나 굿즈를 사는 사람이 있다면 필히 파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 이전에 만드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굿즈의 또 다른 방점은 소비가 아닌 생산, (판매목적이 아니라 자급자족하여 굿즈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정말 말할 것도 없이)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요지이다.

물론 양산되는 대부분의 굿즈가 쓴 소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굿즈의 다른 이름은 기획 상품, 판촉물이다. 그렇다. 대부분 굿즈의 역할은 소비자를 낚기 위한 미끼이다. 예컨대 알라딘이나 영화 배급사에서 한정판 굿즈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목적은 따질 것 없이 명료하다. ‘관련 상품인 굿즈가 곁가지를 친 그것, 즉 책과 영화 티켓 등 메인 상품의 수익이다.

 굿즈를 샀더니 책을 주더라.”는 상황이 누군가에겐 우스갯소리로, 누군가에겐 씁쓸한 상황으로 읽힐 수 있는 까닭은 주객전도라는 상황을 전제로 했고, 주객전도는 부조리한 아이러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에 대해서 역설하는 글들은 이보다 훨씬 좋은 글들이 많으니 이 글에서까지 다루진 않도록 하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뒤엎어졌다 하더라도 굿즈는 여전히 객의 입장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역으로 굿즈는 객이기 때문에, 주가 누구냐에 따라 그 맥락이 달라질 수 있다. (사실 위의 말은 누군가(=나 같은 사람)에게는 진정 기쁨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도 있다. 주객전도가 그래서 왜 나쁜데?’ 라고 반문하면 다 해결될 문제지만 그것이 쟁점은 아니니...)

다시, 어떠한 맥락은 옳고 다른 맥락은 그르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객들만큼이나 다양한 들이 존재하며, 그리하여 굿즈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대규모 기업 자본에 의지하는 경우만 있지 않음을 짚고자 하는 것이다.

앞서 우리나라의 굿즈 실정은 조금 특수하다고 적어 놓았는데, 이는 굿즈의 2차적 의미인, 2창작물로서의 맥락에 관한 것이다. 서브컬처계의 문법이었던 굿즈가 머천다이즈까지 포괄하는 꼴이 되면서, 굿즈의 창작물로서의 의미와 굿즈의 용례가 전방위한 상황이 맞물렸다. 굳이 모체가 되는 1차 창작물이 코믹스나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니더라도 일종의 본부가 있는 2차 창작물, ‘덕질의 산물이라면 굿즈로 통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굿즈는 판매되는 상품일지라도, 그것을 만들어 낸 자의 덕질대상이 무엇인지 역시 관건이 된다. 그들은 굿즈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이 열중하는 무형의 가치, 이념까지도 물질화하여 유형의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고, 이를 판매를 통해 유포할 수 있다. 즉 굿즈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생산자가 몰두하는 분야와 대상의 대리 표상이 된다.

 




=‘조크든요스티커 (제작 :텐시)

작년 8, 웹진 아이즈에서는 페미니즘 전쟁│④ 페미니즘 굿즈 온리전이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행사 부스에 나왔던 굿즈들을 조명한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위 사진은 기사에서 소개되었던 굿즈 중 하나이다. (사진 제공: 이로)

굿즈가 마냥 상품 판매를 본 목적으로 하는 기업 자본의 끄나풀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페미니즘 관련 굿즈는 개인과 단체를 막론하고 점점 더 활발하게 제작되는 추세이며, 목표는 1차적인 수익보다도 그 후에 파생되는 담론에 있다. 기사의 대목을 그대로 옮기자면, “여기에는 이 굿즈들을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써 계속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데 기꺼이 돈을 쓰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래서 굿즈를 물어온다는 것은

 


그래서 굿즈를 물어오는 일은 나의 최애와 나, 그리고 존잘님(내지는 제작사)간의 공고한 삼각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제 최애는 연예인이나 캐릭터에 국한되지 않으며, 어떠한 대상이 최애로 등극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정도에, 즉 덕심에 달려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굿즈들은 그만큼의 다양한 덕심들을, 그리고 다시 덕심은 그만큼의 기호와 취향을 나타낸다.

세상엔 이 취향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삼각형들이 존재하여 관계를 이루어 나간다. 결국 굿즈를 물어온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이 삼각관계의 한 꼭짓점이 되고 동시에 다른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는 일이다. 점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다른 점들과 선을 이어 자신의 세계를 넓혀간다. 새롭게 마주하는 세계로부터의 기념품은 굿즈이다.

모 잡지에서 굿즈를 다루며 팬들이 비공식 굿즈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원동력을 한 문장으로 추려놓은 것을 본 적 있다. 그게 다 너무 사랑해서다.”라고. 사랑해서 만들어낸다는 말은 애정과 관계가 결핍된 현대인만의 편집증적 증상이 아니라, 그림의 기원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부타데스의 딸은 떠날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벽에 그의 그림자를 따라 새겼고, 아버지는 딸을 위해 그 흔적의 형상을 흙으로 빚어주지 않았는가.

그래봤자 청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혹은 굿즈를 소유하여 최애의 정체성을 나눠가질 수 있을 것이란 바람이 허깨비라고 욕한다면 사실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림자와 구운흙이 회화와 조각의 시작이더라는 전설(플리니우스, 《박물지35XLIII, 151)을 떠올릴 때마다, 본인처럼 까마귀 같은 사람은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그것은 비록 애잔함도 아니고 안도감도 아닌 미묘한 것이지만, 이 이야기는 사랑해서만들어 내거나, 만들어진 것을 물어오는 까마귀 같은 사람들의 축제를 마무리하기엔 충분하다.

 


굿즈를 물어오는 일을 적다보면 덜 부끄러워질 수 있을까

 


우리 문집의 모토는 세상에 부끄러운 덕질은 없다.”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덕질은 곧 특정한 분야에 열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분야에 버닝하는 행위이다.

열중. 자신의 덕질을 자유롭게, 그리고 무겁지 않게 기록하는 이 필집은 나에게 한구석을 할애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공간에 굿즈에 열중하노라.” 고백한 셈이다. 세상에 부끄러운 덕질은 없다지만, 사실 나의 덕질은 아직 부끄럽다. 미지근한 인간으로서 굿즈 덕후가 되기에 결핍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열정, 노력, 여유, 집요함, 사실 덕후가 되기에도 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덕후의 본질에도 맞지 않고, 우스운 소리지만. 나에게는 어떤 덕후 콤플렉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나는 굿즈를 좋아하노라 말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자꾸 보고, 생각하고, 써보려 한다. 이것이 나의 사랑 방식이다. 분명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소극적이지만 내적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고, 덕질을 하기에는 천성이 조금 게으르지만, 영업할 때만큼은 열렬한 그런 사람이 분명. 앞으로 써 나갈 굿즈 시리즈는, 나의, 그리고 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콤플렉스 극복기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굿즈에 대해 쓰겠습니다.’ 이 한 문장이 이렇게까지 길어졌지만. 인사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추신



  1.  까마귀가 반짝이는 것을 물어오는 버릇은 사실 어떤 불가항력적인 습성은 아니라고 한다. 강박적으로 보이는 이 버릇이 유전자에 새겨진 영구한 성질의 것은 아니며, 특수한 조건이 유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특수한 조건이란 호기심이다. 까마귀도 노화되어 호기심을 잃으면, 물어오는 것을 멈추기도 한다고.

  2. 내 기억에 남아있는 최초의 굿즈는 세일러 문 캐릭터가 일렬로 그려져 있던 노란 베개이고, 최근의 굿즈는 지인을 위해(그를 덕질하는 마음가짐으로) 소량 제작한 티셔츠이다. 당신의 추억이 담긴 굿즈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3.  ‘예쁜 쓰레기란 말도 있으나 한 철 쓰이던 용어 같기도 하고, 용어에 담긴 자조적인 뉘앙스가 주관에 맞지 않아 쓰지 않았다.

  4. 극복기의 성과가 좋을 것 같지는 않다.

  5. 당신이 꼭 그래야할 일은 아니지만, 다음에도 만났으면 좋겠다. 다음엔 조금 더 촘촘하면서도 편안한 글로 돌아오는것을 다짐하며. 물어가고 싶은 굿즈와 함께.


  1. 굿-즈 시리즈 : 굿즈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 혹은 탐닉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에 대하여 끄적거립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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